“잘 다녀왔는가, 매제?”
리어와 레아의 마중을 다하고 나면 잠깐 황궁에 들러달라고.
황태자가 그리 부탁했었기에 카일은 이후 잊지 않고 황궁에 찾아갔다.
그러자 황태자는 바로 친근한 기색으로 그리 맞이해주었다.
“흐음. 아직은 좀 낯선 호칭인 모양이군.”
“솔직히 말씀을 드리자면, 좀 그렇습니다.”
“하지만 어쩌겠는가. 이게 현실인걸.”
웃음을 터트린 황태자가 카일에게 자리를 권한다.
결혼은커녕 아직 약혼도 하지 않았으나 이미 황실가의 일원 대우를 받는다.
식만 안 올렸을 뿐이지 이미 맺어지는 건 기정사실화 시켜둔 모양이었다.
“두 사람 마중은 잘 했고?”
“예. 며칠 전 출발했습니다.”
“얼마나 걸릴 듯 싶은가.”
“아무리 늦어도 한 달 반 정도. 그 안으로는 돌아올 겁니다.”
카일의 말에 황태자가 ‘그런가.’ 하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허면 한 달 후에 또 리토리오 대공가도 그렇고, 다른 이들도 바빠지겠군.”
“다른 세상과 정식으로 맺어지는 계기가 될 테니 말입니다.”
“존 나센이 물꼬를 터주었지. 이렇게 또 빚을 하나 달아두는군.”
“괜찮습니다. 오히려 고향에선 그렇게 생각 안 할 겁니다.”
제국에 대한 충성심 때문에 한 일은 절대 아니다.
그저 새로운 운동 기구를 얻어낼 수 있다는 기대감과 흥분.
오로지 그것 때문에 다들 신나서 저러는 것이다.
“그래도 계산은 확실히 해야지. 혹 자네 고향에서 원하는 게 있을지 묻고 싶네.”
흐음, 하고 카일이 턱을 몇 번 만지작거린다.
사실 이럴 것 같아서 부모님과 한 번 이야기를 나누긴 했다.
제국이 우리 쪽에 무언가 주고 싶다고 하면, 어찌 해야 하냐고.
그에 존 나센 남작과 남작 부인이 비슷하게 했던 말이 있긴 했다.
“솔직히 말씀드리면, 하나 있기는 합니다.”
“그래? 그게 무엇인가. 가능하다면 다 해주고 싶은데.”
“별 거 아닙니다. 그냥 아카데미에 있는 헬스장… 그러니까, 실내 연무장을 제국 곳곳에 만들어서 모든 제국민들의 건강 증진을 꾀하는 거라고 할까요?”
“아카데미의 실내 연무장 말인가?”
실내 연무장 부분에 대해서는 황태자도 비교적 자세히 알고 있다.
원래도 있던 것을 카일이 각종 지원을 받아내어서 거대하게 증축했던가.
거기에 온갖 기구들까지 들여와서 수준도 엄청 끌어올렸고.
“귀족들의 체력 수준을 올리고 싶다는 건가?”
“귀족만이 아닙니다. 전 제국민들의 건강 증진 프로젝트라고 보시면 됩니다.”
“으음. 당장 해내기에는 좀 빠듯한 안건이군. 제국민들이 잘 따라줄지도 의문이고.”
현실적인 걱정이다. 그 정도의 규모를 신축하고 또 관리하는 건 전부 다 돈이다.
거기에 기껏 만들고서 이용을 하게 하려면 강제성이 필요할 것 같은데.
괜히 그랬다가 민심이 하락하면 황실 입장에서는 껄끄러워진다.
“그 부분은 걱정하실 것 없습니다.”
하지만 카일은 이미 그 부분에 대한 대책을 지니고 있었다.
“일단 교단 쪽에서 슬슬 사제들이 나설 겁니다. 참고로, 교단은 이미 건강 증진에 대해서 굉장히 적극적이고 또 장려하는 모습을 띠고 있죠.”
“그건 나도 들었네.”
“사제들이 퍼져서 사람들을 설득해줄 겁니다. 교단에 대한 신뢰는 꽤 깊으니 말이죠.”
카일의 말에 황태자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각종 봉사 활동과 구휼 활동으로 이미 많은 민심을 얻은 교단이다.
그곳에서 나서준다면 어려움이 확실히 적어질 것이다.
“그리고 귀족들도 적당히 회유하고 압박해서 모범을 보이게 할 계획입니다.”
“괜찮겠는가? 귀족들이 존 나센을 껄끄러워하긴 하지만 힘으로만 밀어붙이면….”
“우려하실 것 없습니다. 힘으로 밀어붙이는 짓은 안 합니다.”
진심이다. 힘으로 어떻게 밀어붙여.
그랬다가 귀족들 전부 몰살할 수도 있는데.
“그보다 더 좋은 길이 있죠. 세 대공가가 있지 않습니까.”
“호오. 각 대공가 파벌들을 이용할 생각이란 건가.”
리토리오 대공가는 이제 처가가 될 터이니 당연히 패스.
슈렐리츠 대공가는 무인으로서 이전부터 통하는 게 있었다니 여기도 패스.
마지막으로 바이엔 대공가는 티샤와 접점이 있으니 이것도 가능했다.
“…이쯤 되면 무서울 지경이군. 설마 이것까지 생각하고서 있던 건가?”
“처음부터 그런 건 아니지만, 생각을 아예 안 한 건 아닙니다.”
그 대답에 황태자는 하하, 하고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역시 황제의 말이 맞았다. 제 아버지의 눈이 정확했다.
카일 존 나센. 저 청년은 존 나센이지만 또 존 나센이 아니라고.
그들보다 더 위험할 수도 있고, 혹은 그들보다 더 좋은 친구가 될 수도 있다고.
저 청년이 제국을 적대하는 데에 앞장섰다면 어찌 되었을까.
그런 상상만 해도 절로 오싹, 하고 소름이 돋는 것 같았다.
‘막내야. 덕분에 살았다.’
살다 살다 5황녀에게 고맙다고 할 날이 올 줄은 몰랐는데.
황태자는 그리 생각하며 카일에게 말했다. 한 번 해보라고.
*
‘돌고 돌아서 다시 아카데미로 돌아왔군.’
다음 학기까지는 아직 시간이 많이 남았다.
방학은 이제 막 시작했고, 못 해도 두 달이라는 기간이 있다.
해서 고향으로 돌아갈까, 그런 생각도 했지만 곧 관두었다.
그랬다가 바로 남작 부인이 ‘눈치가 이리 없니!’ 하고 등짝을 때릴 것 같아서.
‘부지런히 처가 사람들이랑 친해져야지!’ 잔소리도 덧붙일 것 같아서였다.
“으음.”
아카데미를 걸으며 주변을 둘러보다가, 저도 모르게 탄성이 나온다.
‘이렇게 보니 갑자기 감회가 새롭네.’
처음에는 이곳 아카데미에 오려고 정말 별짓을 다했었지.
언제까지고 운동 지옥에 파묻혀있을 수는 없어서, 탈출하고 싶어서.
로맨스 소설에도 나도 연애라는 것을 한 번 해보고 죽어야 하지 않을까 싶어서.
해서 수를 써서 아카데미로 향했고 소원대로 여러 가지 일을 겪었다.
그리고 그 과정에서 함께 해줄 여인들도 생겼다.
그게, 좀 많이 생겨서 난처하다는 게 작은 문제이지만.
더 웃긴 건 운동이 싫어서 여기까지 도망친 자신인데.
어쩌다보니 이제는 제국민 건강 증진 프로젝트를 제안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스스로를 존 나센이 아니라고 은연중에 여기고 있었는데.
아무래도 그건 본인의 착각이었을 뿐, 실은 누구보다 존 나센이었던 것 같다.
지금도 봐라. 아카데미에 돌아오자마자 헬스장으로 향하는 자신을.
‘미쳤구나. 진짜 미쳤어.’ 라고 중얼거리면서도 본능은 충실했다.
이 정도면 정말 운동하기 싫어서 아카데미로 도망을 친 것인지.
그게 아니면 아카데미에 헬스장을 차리려고 온 건지 헛갈릴 지경이다.
‘이참에 아예 보건복지부 비슷하게 부처라도 만들어 달라고 할까?’
마음 같아서는 단련성, 뭐 이런 거로 부탁하고 싶은데.
이러면 너무 존 나센스러우니 그건 좀 아닌 것 같고.
그나마 비슷한 게 있다면 보건복지부 쪽이라고 보는 게 맞다.
장관 자리에는 나이 지긋한 닐 영감을 앉히면 제격일 것 같다.
솔직히 제국도 좋고 존 나센도 만족스러운 결과가 아닐까?
원래부터 존 나센이 ‘끈기가 있다.’ 라고 긍정적으로 평할 정도의 제국.
그곳 사람들에게 좀 더 체계적인 단련을 시켜준다면 더 강해질 것 같은데.
‘체력은 국력이라잖아. 헛소리인 줄 알았는데, 고향 사람들 보고 느꼈지. 이건 진짜다, 라고.’
황실도 긍정적으로 평가할 확률이 높다.
존 나센과 더 돈독한 관계를 다질 수 있을 테니.
제국에 손해가 되는 것도 없으니 더더욱 그러할 것이다.
“내일부터네요.”
“그러게. 내일부터지.”
“내일부터, 정말 괜찮을까요?”
“서로 선은 지켜주기, 아시죠?”
와중에 네 여자들은 당장 순서 경쟁에 집중하고 있었다.
공식적인 경쟁은 2학년이 시작되는 그 순간부터, 로 정해두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공식적인’ 경쟁이다.
루틴을 돌려 건강을 확보하는 것은 방학 때부터 해도 된다고 했다.
그 말은, 지금부터 일말의 방심도 해서는 안 된다는 것.
당장 지금도 그렇다. 말로는 ‘내일부터’ 라고 하는데.
이 중 한 명이라도 지금부터 시작하면 같이 할 기세다.
그나마 육체 단련만이 순서를 가르는 척도가 아님을 공표했기에.
다른 부분으로도 충분히 추가 점수를 받을 수 있다고 말했기에.
괜한 무리수를 던지지 않는다고 보는 게 맞았다.
“널널하게 해도 괜찮아요. 다음 학년부터 해도 된다니까.”
“아뇨, 카일! 당장 내일부터 열심히 할 거예요!”
“맞아요. 그래야만 나중에 억울하지 않죠.”
어째 황녀만이 아니라 다른 여인들도 전부 존 나센 화가 진행되는 것 같은데.
뭐, 좋은 게 좋은 거 아니겠는가. 라고 속으로 중얼거린 카일은 벤치 위에 앉았다.
참고로 정원에 있는 그 벤치가 아니라, 헬스장의 그 벤치다.
“핫!”
그 모습에 여인들도 누가 먼저라 할 것도 없이 기구 앞에 선다.
이렇게 열심히 운동을 하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
그게 가장 큰 영향을 줄 거라고, 마리아 남작 부인이. 그리고 리어와 레아가 그랬다!
“카일! 이 기구 어떻게 다루는 건가요?!”
“지금 자세가 좀 이상한 것 같은데, 이게 맞나요?”
“카일 형제님! 저 어때요? 이 정도면 충분하지 않나요?!”
“이 기구 좀 이상한 것 같아, 카일. 이리 와봐.”
“….”
와중에 또 작은 기회까지 놓치지 않고 이용하려는 여인들.
겉으로는 트레이닝을 받으면서, 속으로는 무언가 다른 속내가 드러나는.
그야말로 깜찍한 짓을 꾸미고 있는 느낌이 솔솔 난다.
덕분에 에휴, 한숨을 내뱉은 카일은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잔뜩 기대한 네 명의 여자들 사이로 지나가서는.
“여러분.”
툭툭-.
벽에 붙여둔 경고문을 가리켰다.
[ 연애 금지. 지금 당신이 생각할 건 루틴! 중량! 과부하! 몸! ]
그러자 티샤도, 엘가도, 성녀도, 그리고 황녀까지.
모두가 눈치를 보며 슬그머니 입을 다문다.
그 모습에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고서 다시 벤치에….
“진짜 이 기구는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 그래요!”
“자세가 중요하다면서요! 이러다가 다치면 큰일이잖아요!”
“충분하다는 말씀이 필요합니다, 카일 형제님!”
“정말 이상하다고. 기구 사용하다가 누구 다치면 어쩌려는 거야.”
다시 한 번 단련과 기구를 들먹이자, 결국 버티지 못 한 카일이었다.
“봅시다. 이 기구는 이렇게… 자세가 좀 불안정하긴 하네요. 코어가… 조금 더 과부하 좀 주시죠… 이건 기구 문제가 아니라 사용을 안 해서 뻑뻑해진….”
존 나센의 본능은 오늘도 쉬지 않고 돌아간다!
- 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