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294화 (294/318)

아무리 좋아하는 것도 ‘일’ 이 되면 이상하게 하기가 싫어진다고 했던가.

예전에는 거짓말이라고 여겼지만, 요즘에 와선 맞을 수도 있겠다고.

오늘도 밤샘 작업 끝에 겨우 퇴근을 하며 티샤는 그리 생각했다.

‘이상하게 가면 갈수록 더 바빠지는 느낌인데….’

주술이 새로이. 그리고 긍정적으로 세상에 다시금 모습을 보인 이후.

티샤는 그 선두에서 쉬지 않고 열심히 연구를 진행하고 있었다.

그리고 깨달았다. 선구자의 길은 보통 힘든 게 아님을.

세상의 인식이나 아무 것도 없는 상태에서 길을 닦는 것도 그렇지만.

당장 같이 무언가를 진행해줄 인력이 부족하다는 것도 문제였다.

현재 주술은 그냥 자연스레 퍼지게 된 것이 아니다.

뒤에서 황실과 대공가가 은근히 밀어주며, 결과를 바라고 있다.

그 말은 어중이떠중이들을 모아서 연구를 할 수 있는 상태가 아닌.

최고 중의 최고들만 모아서 결과를 내놓아야 한다는 뜻이었다.

‘많은 사람들이 주술에 호기심을 보이곤 있지만, 아직은 많이 부족해.’

사람이 많지 않다. 그렇다는 건 자신이 다수의 역할을 대신해야 한다는 거다.

그리고 그 말은 어쩔 수 없이 다른 시간을 대신 써야 한다는 뜻도 된다.

“티샤. 내일 성녀님이랑 교단에 가는데, 같이 갈래요?”

“작은 파티가 있는데 나랑 카일은 갈 거예요. 혹시 티샤, 당신도 가고 싶다면 말해줘요.”

“자매님! 티샤 자매님! 같이 운동 안 하시려나요?!”

잊지 않고 찾아와주는 건 고마운데, 슬프게도 움직일 수가 없다.

더 슬픈 건 이게 강제로 한 것도 아니고 본인이 원해서 그런 거다.

반드시 주술에 대한 모든 부정적인 시선들을 지워버리고.

마법 다음 가는. 아니, 마법에 버금가는 학문 수준으로 올리겠다는.

주술 대중화라는 커다란 꿈을 지녔기에 어쩔 수가 없었다.

‘차라리 카일에게 받은 이 책을 그냥 풀어버려서 모두가 연구하도록 할까?’

라는 생각도 했지만 곧 관두고 만 티샤였다.

온갖 난해한 주술과 그 성립 방식이 들어가있는 물건이다.

애당초 주술에 대한 기초 지식이 없는 이들은 꿈도 못 꿀 일이며.

어중간한 실력을 지닌 이가 잘못 건드리면 되레 최악의 결과가 나올 수도 있다.

마법이 그러한 것처럼 주술도 기본 이상의 실력은 반드시 필요하다.

날이 선 칼을 아무 이의 손에 쥐여 주고 휘두르게 할 수는 없는 법.

그러다가 겨우 인식을 돌린 게 도로아미타불이 될 수도 있었다.

결정적으로 이건 카일이 오직 자신을 위해서 내어준 선물이 아니던가.

나중이라면 모를까. 지금은 좀 더 소중하게 지니고 싶었다.

‘내용이라면 이미 필사해서 적당하게 알려주고 있으니까… 공개는 조금만 더 뒤로 미루자.’

애써 그렇게 생각하며 다시 한 번 작업에 열중하려는 찰나.

별안간 연구실 문이 열리더니 한 여인이 들어섰다.

“안녕.”

“오셨어요, 황녀 저하.”

대뜸 들어와선 그렇게 말하는데도 티샤는 놀라는 기색이 하나 없었다.

마치 이런 일이 꽤나 익숙하다는 듯이, 정말 여유롭게 대하고 있을 뿐이었다.

그리고 황녀 또한, 너무나 익숙하게 연구실 안으로 들어왔다.

이후 대충 소파 위에 몸을 던지더니 ‘으억!’ 하고 신음을 내뱉었다.

“피곤하신가요?”

“응. 엄청.”

“놀랍네요. 제국 10강께서 피곤하실 일이 생기다니.”

“차라리 몸 쓰는 일이 백 배 나은 것 같아.”

“저번에는 앉아만 있는 일이니까 오히려 쉬울 것 같다고 하셨잖아요.”

호기롭게 아카데미 보조 교사 자리를 지원하던 순간.

황제와 황태자는 물론이고 카일과 티샤, 엘가까지 전부 황녀를 말렸다.

그저 상황을 잘 모르는 성녀만이 ‘힘내세요, 황녀님!’ 라고 응원만 할 뿐.

황녀는 그 걱정들 앞에서 괜찮다고, 아무 일도 아니라고 호기롭게 외쳤다.

그까짓 보조 교사 정도는 보란 듯이 1년 동안 해보이고 말겠다고.

모두가 ‘아닌데. 엄청 힘들 텐데.’ 고개를 젓는 와중에도 말이다.

‘하지만, 아니었어.’

처음에는 괜찮았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래. 딱 사흘 정도.

이후 자신이 황녀라는 것조차 잊은 듯 엄청나게 밀려드는 일들.

거기에 교수 또한 선을 넘지 않는 부분에서 계속 황녀를 닦달했다.

이렇게 된 거 이왕 진짜 보조 교사로 대하라고.

신체 능력만 발군인 것 같지만 나름 머리도 굉장히 좋다고.

그러니까 우수한 보조 교사가 온 김에 제대로 써먹으라고.

황태자의 은밀한 명령에 열과 성을 다해서 움직이고 있는 것이었다.

“카일이랑 티샤 너, 그리고 공녀까지. 왜 걱정을 했는지 알 것 같아.”

“그렇죠. 원래 쉬워 보이는 ‘학문’ 쪽이 더 어려운 경우가 허다해요. 할 게 너무 많으니까요.”

이제는 많이 친해져서 그럴까. 편하게 대화를 하는 티샤.

황녀도 그 부분에 대해 딱히 뭐라고 할 마음은 없는 듯 했다.

그저 티샤의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내젓고는 이렇게 답할 뿐이었다.

“왜 존 나센 남작 부인… 아니, 어머님께서 학업 성취 조건까지 거셨는지 알 것 같아.”

본인은 이미 아카데미를 졸업해서, 기존의 학업 성적으로 결과를 받아야 한다.

하지만 황녀는 아무리 생각해도 그게 전혀 이득이 되지 않음을 알고 있었다.

아카데미 생활이 엉망이었던 건 아니지만, 솔직히 말해서 잘 한 적도 없다.

지나가는 말마따나 황녀가 아니었다면 진작 학사 경고를 몇 번은 받지 않았을까.

“티샤.”

황녀의 부름에 막 작성을 끝낸 연구지를 정리한 티샤가 고개를 돌린다.

“방학도 이제 반이 넘게 지나갔잖아. 어쩔 거야?”

“정확히 어떤 부분을 말씀하시는 걸까요?”

“너나 나나, 방학 동안에 당장의 이 일 때문에 정작 카일과는 많이 못 붙어있었잖아.”

날카로운 지적에 티샤의 몸이 움찔, 하고 떨린다.

사실 카일이 엘가, 혹은 성녀와 함께 어떤 일을 함께 하고, 어디를 함께 간다고 할 때마다.

주술이고 뭐고 그냥 다 때려치우고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을 참느라 여간 힘든 게 아니었다.

그런 유혹들을 이겨낼 수 있었던 이유는 단 하나.

항상 최선을 다하는 모습이 보기 좋다는, 너무나 멋지다는 카일의 평가였다.

단순히 카일만 그런 게 아니라 카일의 가족들 되는 이들도 그리 말했다.

즉, 지금 자신이 하고 있는 건 결국 나중을 위한 일종의 투자.

‘그래도 가끔은 그냥 다 내려놓고 카일이랑 좀 어울려 다니고 싶은데.’

속으로 후우. 하고 한숨을 내뱉으며 티샤는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황녀에게 차라도 마시겠냐고 질문을 하려는 순간.

“어. 뭡니까? 티샤는 그렇다 치고 황녀님도 계시네?”

“카일?!”

“카일?”

열려있는 문 사이로 들어선 것은 다름 아닌 카일이었다.

혹시 오늘도 엘가랑 성녀랑 어디 간다고, 그 말을 하러 온 걸까?

라는 걱정을 하며 티샤는 슬그머니 카일의 상태를 살폈다.

그리고 곧 그 생각은 기우였음을 빠르게 알아차렸다.

“좀 쉬었다 해요, 티샤. 그리고 황녀님도. 아, 황녀님은 이미 쉬고 계신가?”

카일이 들고 온 것은 따뜻하게 데웠는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 두 개.

아마 저 안에는 우유와 차가 각각 나뉘어서 들어가 있을 것이다.

“오늘 치 운동은 다 한 모양이네요?”

“네. 원래는 엘가 님이 또 어디 파티에 가자고 했는데, 너무 자주 가는 것 같아서요.”

“공녀는 매번 카일, 너를 데리고 파티에만 다니는 것 같아.”

“어쩔 수 없죠. 귀족들 사이에선 파티도 업무의 연장 아닙니까. 황녀님.”

와중에 또 카일을 생각해서 술은 본인 선에서 컷하는 엘가였다.

그 덕에 부담 없이 그냥 적당하게 좀 어울려주고, 대화 좀 나누다가.

엘가의 손을 붙잡은 채 돌아가주면 그게 끝인 상황이라 할 수 있었다.

‘솔직히 술은 대체 왜 먹는 건지 아직도 모르겠어.’

영영 작별을 하는 이별주라면 또 모를까. 평소의 술은 정말 별로다.

단순히 몸에만 안 좋은 게 아니라 마음도 해치는 것이 아닌가!

차라리 술을 마실 시간에 같이 운동이라도 하면서 더 많은 과부하를….

“카일.”

“에?”

“지금 표정, 또 본인도 모르게 운동 쪽으로 흘러간 것 같은데요.”

날카로운 티샤의 지적에 카일이 ‘억’ 하고 탄식을 흘린다.

참 이상한 일이다. 분명 자신은 운동이 싫어서 아카데미로 도망을 친 건데.

어째서 점점 하는 건 죄다 그 운동과 심히 관련이 깊은 것들인지.

당장 보건성의 임시 고문 자리 또한 그 일환이 아닌가!

“것보다, 이렇게 두 사람이 같이 있는 건 처음 보네요.”

능숙하게 잔에 우유와 차를 따라주는 카일.

그러자 황녀가 소파에서 일어나 앉더니 차가 담긴 잔을 가져간다.

“이제는 동병상련이잖아. 예전에는 티샤를 이해 못 했는데, 이제는 아니야.”

“그러니까 제가 말릴 때 왜 안 듣고 고집을 부리셔서.”

“그러면 어떻게 해. 아카데미 성적이 티샤보다 한참 아래인데!”

성녀님도 있는데 왜 그러세요, 라고 말했던 건 이제 과거다.

저번 기말고사에서 성녀의 성적이 나쁘지 않게 나왔던 것이다.

이런 식이면 2학년 1학기 부분에서도 평균 이상은 할 수 있을 터.

사실 일이 이렇게 될 거라고 카일은 예상하고 있었다.

그 엄청나고 방대한 양의 교리들을 달달 외우고 있는 성녀다.

아카데미도 결국 암기가 주인데, 설마 성녀가 그걸 못 할까.

덕분에 황녀는 물론이고 엘가도 발등에 불이 떨어졌다.

티샤 다음으로 학업 성적은 무조건 자신이라고 여기고 있었는데.

성녀가 갑자기 치고 올라오니 엘가도 요즘엔 다시 공부에 열중하고 있었다.

‘그것도 안 되는 황녀님은 애가 타서 결국 대학원생… 아니, 보조 교사를 택했지만.’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상당히 피곤하고 퀭한 황녀의 얼굴.

그걸 보고 있자니 자신도 모르게 마음이 아파지는 카일이었다.

항상 당당하고 자신만만한 게 황녀의 트레이드 마크라 할 수 있었는데.

보조 교사가 된 이후 삶의 무게를 절실히 느끼고 있는 상태가 되어버렸으니.

“티샤? 황녀님?”

안 되겠다. 이렇게 힘겨운 상황 속에선 역시 파이팅이 필요하다.

“기분 전환도 할 겸, 새로운 운동 기구도 왔으니 운동이나 할까요?”

“….”

“….”

눈치 없이 끼어든 존 나센 본능이 미운 황녀와 티샤였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