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슬 윤곽이 얼추 드러나는 것 같단 말이야.’
강의를 마치고 나서며, 카일은 약혼 순서에 대해 생각했다.
앞으로도 계속 이렇게 된다면 티샤, 엘가, 성녀, 그리고 황녀 순이 될 것 같다고.
일단 학업 부분에서 압도적인 상황을 보이고 있는 사람은 티샤와 엘가다.
그 둘은 자신에게도, 그리고 자신의 부모님에게도 큰 점수를 딸 것이다.
당장 강의에서 두각을 드러내는 것이나, 각종 과제나 발표에서도 압도적이다.
‘성녀님도 나쁘지 않지만 그 둘에 비하면 살짝 모자라.’
머리는 분명 좋지만 아직 아카데미에 익숙하지 않은 게 약점이다.
시간만 좀 더 있다면 금방 따라잡을 텐데, 일단 1학기만 보자면 둘에 비해선 부족하다.
‘그리고 황녀님은….’
황녀를 떠올린 카일은 안타까움의 한숨을 내뱉었다.
무슨 문제가 있어서 그러냐고? 절대 아니다. 황녀도 잘 하고 있다.
사고를 전혀 치지 않은 채 보조교사 업무를 나름 괜찮게 해나가고 있는 중.
물론, 어디까지나 나름이다. 다른 보조교사들에 비하자면 아무리 높게 쳐줘도 평균이다.
지도하는 교수 입장에선 황녀이니까, 당연이 어렵게 대할 것이라고 생각했는데.
예상외로 지도 교수의 폭풍 잔소리에 황녀가 이리저리 휩쓸리는 중이란다.
그 소식에 놀란 카일이 황녀에게로 달려가니 그녀답지 않게 칭얼거리기까지 했었을 정도.
이렇게 힘들 줄 몰랐다고. 보조교사들이 그렇게 존경스러울 줄 예상 못 했다고.
‘아이고, 어쩝니까. 우리 황녀님. 그러게 그렇게 말렸는데.’
딱히 해줄 말이 없었다. 그냥 연신 품에 안고 등만 토닥거려 줄 뿐.
황녀는 웃으면서 이 정도로도 충분히 위로가 된다고 말했다.
그러나 카일은 미안한 기색을 애써 숨기며 계속 황녀를 안아주었다.
사실, 카일은 그 이유에 대해서 대강 파악하고 있었다.
언젠가 황태자가 이런 말을 자신에게 했던 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동생 녀석이 본인답지 않게 칭얼거릴 때가 올 걸세. 그러면 그냥 위로만 해주게.”
“황태자 전하.”
“사적인 자리에선 형님으로 불러도 좋다고 했네.”
“아… 예, 형님. 그, 뭔가 아시는 눈치이십니다만.”
“과정이 공평해야 하지 않겠는가. 보조교사가 원래 얼마나 힘든 자리인데. 그걸 황실의 일원이라고 쉽사리 보낼 수는 없는 법. 해서 내가 ‘황녀’가 아닌 ‘보조교사’로 보고 대하라고 직접 엄명을 내렸다네. 매제도 이해를 해주었으면 좋겠군.”
당연히 이해는 한다. 황녀라고 보조교사를 쉽게 하면 경쟁 성립이 안 되니까.
하지만 그 말인 즉, 황녀의 개고생이 확정되었다는 것과 다름이 없었다.
보조교사. 카일 기준 대학원생. 그것도 박사 과정까지.
황녀는 박사 과정까지는 밟을 필요가 없다지만 그래도 논문 하나 정도는 내놓아야 한다.
이유? 아직 카일과 나머지의 아카데미 졸업까지는 3년이 남았다.
그동안 학업적 성취도를 증명하려면 그보다 더 확실한 길은 없을 터.
솔직히 존 나센 남작은 ‘학업적 성취도’ 부분에 아직 긴가민가한 반응이다.
하지만 그 부분을 남작 부인이 ‘아주 중요하다!’ 라고 하며 꽉 붙잡고 있다.
공부 또한 단련만큼이나 인내심, 그리고 자기 자신과의 싸움이 중요하다면서 말이다.
‘황녀님이 역전하려면 이젠 무력 부분이 유일한 건가.’
이 부분도 사실 황녀에게 마냥 유리하지는 않다.
저번에도 말했지만 황녀는 이미 강자 부분에 들어섰다.
따라서 성장을 하려면 더 많은 노력, 그리고 더 큰 깨달음이 필요하다.
속으로 ‘힘내라! 황녀님!’ 하고 응원을 하고 있는데,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고 했던가?
저 앞쪽에서 저번보다도 더 퀭한 느낌이 진하게 느껴지는 황녀가 나타났다.
“황녀님.”
“…카일.”
원래라면 카일을 보자마자 웃으면서 달려들었을 텐데.
그리곤 대련을 하자거나, 그도 아니면 반칙 좀 해볼까? 하고 웃었을 여자인데.
이젠 그럴 기력조차 없는지 그냥 손만 흔들고 있을 뿐이었다.
새삼 대학원생들의 애환을 느끼면서, 카일은 황녀 앞으로 다가갔다.
“많이 힘드시죠?”
“아니.”
“안 힘드세요?”
“많이, 가 아니라 죽을 만큼 힘들어.”
황녀의 대답에 카일은 저도 모르게 ‘와.’ 하고 탄식을 흘렸다.
설마 그 황녀가, 제국 10강들한테 매일 싸우자고 들덤비고.
황제와 황태자 모두의 머리를 지끈거리게 할 정도로 사고뭉치였으며.
존 나센에서도 ‘존 나센 사람이 아니지만 존 나센답다.’ 라는 평을 들었을 정도인데.
‘대학원생 과정에 무너지다니. 역시, 이건 미친 인간이나 하는 짓이야.’
안타깝다. 그리고 미안하다. 결국 다 자신 때문인 것 같아서.
뭐라도 해주고 싶은데, 그랬다간 공평성에 어긋나니 망설여지기도 한다.
“일단 좀 걸을까요? 산책이라도 하면 좀 나아질 거예요.”
“그러자. 머리가 아파서. 이제는 책만 보면 구역질이 날 것 같아.”
그게 좋은 징조가 아닌데, 하고 속으로 중얼거리면서.
황녀와 함께 후원 쪽으로 나선 카일은 적당한 곳에 착석했다.
“고생이 많으시네요. 그거 엄청 힘들 텐데.”
“그러게. 왜 카일, 너나 다른 사람들이 말렸는지 알 것 같아.”
“이제라도 포기하시는 건.”
“안 해. 너도 알잖아? 포기라는 게 존 나센에서 최악의 감점 요소라는 거.”
잘 알죠. 너무 잘 알아서 문제죠. 카일은 고개를 끄덕거릴 수밖에 없었다.
포기라니. 그 소식을 들었다간 남작도, 남작 부인도 실망감을 숨기지 못 할 거다.
“그래도 힘내서 하고 있으니까 너무 걱정할 건 없어. 일단 해내면 나에겐 큰 도움이 되니까 말이야. 이거, 아무나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 하잖아.”
“아무나 못 하는 게 아니라, 거의 다 못 한다고 보는 게 맞을 수준일 걸요.”
쉬웠다면 개나 소나 다 대학원생에 박사 과정 밟고 교수가 되었을 거다.
그게 안 되니 교수진이 최고 엘리트가 되어서 아카데미에 있는 거다.
“이제 얼마 남았지?”
무엇을 묻는지는 뻔하다. 아마도 약혼 순서를 결정짓는 날을 의미할 터.
그에 카일은 잠깐 생각하더니 ‘길어도 4개월 정도.’ 라고 답했다.
“…장기적으로 봐야 하려나. 단번에 끌어내려고 하니 너무 힘드네.”
황녀 입에서 설마 ‘장기적으로 본다.’ 라는 말이 나올 줄이야.
무조건 단번에 몰아치는, 직진만 아는 사람이 저렇게 변하다니.
대단하다, 대학원생. 아니, 두렵다! 대학원생!
“맞아. 소식 들었어?”
“무슨 소식요?”
“저번에 겨우 여유 좀 내서, 티샤랑 공녀랑, 성녀님이랑 차를 마셨거든. 우리 이야기는 이제 딱히 할 이유도 없고, 해봤자 서로 안타깝기만 하고. 그래서 다른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안이었나? 우리 10강들이 굉장히 기대된다고 했던 남자.”
카일은 고개를 끄덕거리며 맞다고 답해주었다.
그보다 갑자기 이안 이야기는 왜 나오는 걸까?
“슬슬 이야기가 도는 것 같아. 그 남자가 좋아하는 여자를, 또 다른 남자가 좋아한다. 그런데 그 여자의 위치가 애매해서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만 한다, 라고 말이야.”
“라고 남이 연애사 떠들기 좋아하는 인간들이 그렇게 수군거리고 있겠죠. 알아서 잘 할 거예요. 그쪽이라면, 반드시 그럴 거니까 걱정할 거 하나 없어요.”
그 대답에 황녀가 어떻게 확신을 가지는 거냐고 물었다.
넬이라는 여자가 일개 남작가에 불과한 영애인 건 사실이라고.
아직 그런 하위 귀족이 반려자를 여럿 둔 전례는 없었다고 말이다.
“황녀님. 원래 사람이란 게, 급하면 다 방법을 찾게 되어 있어요.”
“급하면 방법을 찾는다고?”
“멀리 갈 것도 없이 당장 황녀님이 보조교사 자원한 것부터 그런 예시죠.”
그러자 황녀가 ‘아아.’ 하고 장탄식을 흘린다.
한 방에 이해했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리는 것은 덤.
“저기 계십니다.”
이때, 저 앞쪽에서 몇몇 인물들이 카일과 황녀 쪽으로 다가오기 시작했다.
자세히 살펴보니 이전에 황궁에서 몇 번 얼굴을 봤었던 이들이다.
“카일 공자. 황태자 전하의 명을 받아 왔습니다. 같이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갑자기요? 무슨 일이라도 생긴 겁니까?”
“정확한 건 모르지만 살짝 그런 것 같습니다.”
이렇게 직통으로 황태자가 자신을 찾았던 적이 별로 없었는데.
카일은 고개를 갸웃거리면서도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리고는 황녀를 돌아보면서 다녀오겠다, 라고 답하려는 순간.
“5황녀 저하. 저하께서도 같이 가주셔야 할 것 같습니다.”
“…나도? 나는 왜?”
“황태자 전하께서 제국 10강 분들에 대한 소집령을 내리셨습니다. 해서 10강 분들께서 속속 모여들고 있습니다. 교단의 프리실라 단장까지도 호출한 것으로 보입니다.”
그러자 피곤함에 찌들어있던 황녀의 눈에서 별안간 안광이 터져 나온다.
정말 어지간한 일이 아니면 10강 전원을 동시에 호출하는 일은 극히 적은데.
아카데미에서 한창 바쁜 자신은 물론이고 교단의 프리실라 단장을 부른 것도 모자라서.
지금처럼 카일까지 부르고 있다는 것은, 무슨 일이 생겨도 제대로 생겼다는 뜻이었다.
“…아무래도 무슨 일이 생긴 것 같지?”
“생겨도 아주 제대로 생긴 거죠.”
마주보며 고개를 끄덕거린 카일과 황녀는 바로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
“…전하. 다시 한 번 말씀해주시겠습니까?”
빠르게 황궁까지 닿은 이후, 카일은 바로 황태자를 알현했다.
대체 무슨 일이기에 이리 갑작스레 자신을 부른 것일까.
“동쪽에서 낯선 손님들이 왔다고 하는군.”
“동쪽이라면… 유목 부족 말입니까?”
가한은 사라졌다지만 여전히 그곳 부족들은 강한 존재들이다.
그곳에서 누군가 왔다면 제국 10강이 모이는 것도 완전 이상한 일은 아니다.
항상 제국의 힘을 더 강하게 보이는 것이 평화를 유지하는 방법이니까.
‘혹시 이것들이 그새를 못 참고 또 이상한 사고라도 친 건가?’
아주 불가능한 일은 아니다. 모두가 진심으로 굴복한 것은 아니니.
하지만 존 나센 남작이 벌인 일을 생각하면 도저히 그런 허튼 생각을….
“그게 아니네. 카일.”
하지만 황태자는 그런 카일의 물음에 고개를 내저었다.
“유목 부족들이 사는 동쪽 초원. 그보다 더 먼 곳, 더 동쪽. 그 너머에서 왔다고 하는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