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갈소연이 호위들과 함께 황제를 알현하고 있는 사이.
검선은 표국 사람들과 함께 그들을 기다리고 있는 중이었다.
여기까지 와놓고 왜 갑자기 이러시냐는 제갈소연의 말도 있었다.
워낙 중요한 자리인 만큼 검선이 동행해주면 좋을 텐데.
되었다고 계속 손을 내저으며 기어코 거부하고 말았으니까 말이다.
사실 그에 대한 이유는 굉장히 간단한 것이었다.
‘황제를 만나면 분명 무릎을 꿇어야 할 터. 내가 아무리 관조하는 자라고 하지만, 이 무릎이 어디 쉽게 꿇어질 것인가. 괜히 들어갔다가 서로 얼굴만 붉히겠지.’
아직 자존심이란 게 조금은 남은 모양이다.
속세를 떠나면서 그와 관련된 모든 것들을 내려놓았다고 생각했는데.
그까짓 것들, 그냥 한 번 무시하고 나면 그렇게나 마음이 편안할 수가 없는데.
아무래도 수련이 부족한 것 같다며 검선은 스스로에게 혀를 찼다.
일부러 수염을 길러 나이를 먹은 티를 내는 것도 그 일환이다.
이미 반로환동의 경지에 이르러 보는대로 나이를 가늠할 수 없다.
하지만 그로 인해 괜한 시비에 걸리거나, 나이 문제를 언급하는 게 싫어서.
지금처럼 수염도 기르고 말투도 일부러 노장의 티를 내고 있는 중이었다.
‘그것보다, 아까 마주한 자들. 이쪽 세상의 고수들로 보였다.’
제갈소연이 황제의 부름을 받고서 그곳으로 나아갈 때.
그녀를 데리러 온 10명의 남녀는 굉장히 인상적이었다.
성별도, 나이대도, 그리고 생김새도 제각각이다.
심지어 그 중 한 명은 아무리 많이 쳐줘도 제갈소연과 비슷한 연배다.
그럼에도 느껴지는 기세는 맹의 초절정 고수와 거의 비슷했다.
어찌나 그 기세가 맹렬한지, 검선은 저도 모르게 검을 찾고 있었다.
‘세상은 역시나 넓구나. 이런 곳에도 저런 고수들이 있다니.’
초절정은 진작 넘어선 고수가 열이라. 가히 제국이라 불릴 만하다.
아까 그 정도였다면, 맹이나 마교의 고수들과도 능히 맞붙을 수 있다.
간혹 서쪽에는 야만스럽기 짝이 없는 자들만 산다는 말을 들었는데.
지금 와서 보니 그것들은 모두 본적도 없는 자들의 헛소리였던 모양이다.
심지어 그 고수들이 황제의 명령에 따라 손님을 맞이하기까지 했다.
저들도 무인으로서의 자존심이 있을 텐데, 그걸 충성심이 이겨냈다.
그 정도면 어디 한 곳은 순식간에 쓸어버리는 것도 가능할 거다.
‘그 너른 초원 지대가 일종의 완충 지대였던 것인가. 허허.’
역시 세상의 이치는 참으로 대단하다고, 검선은 그리 생각했다.
물론, 모든 것이 대단하게만 여겨진 것은 절대 아니었다.
방금 전 마주한 이곳 고수들을 보면서 이상한 점을 한 가지 꼽자면.
모두가 내부의 기운을 극도로 정갈하게 유지한 것은 아니라는 점이었다.
분명 수준은 화경에 근접한 자들이 맞는데.
심법은 초절정에 겨우 닿을 만한 수준밖에 되지 않는다.
저래서는 금방 쇠하여 등선의 경지에 닿지 못할 가능성이 높다.
마음 같아서는 저들을 붙잡고 그 사실을 알려주고 싶다.
늙은이의 참견, 혹은 비슷한 고민을 겪었던 선배로서.
하지만 곧 검선은 ‘되었다.’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일단 말도 제대로 통하지 않는 것이 첫 번째 이유요.
그런 식으로 쉽게 깨달음을 얻어봤자 좋은 게 없는 게 두 번째 이유다.
저들도, 이곳 세상의 고수들도 알고 있을 것이다.
진정한 강함이란 남을 통해서가 아닌 스스로 넘어서는 것.
자기 자신을 뛰어넘고 또 뛰어넘어야만 비로소 강자라 할 수 있다.
“대단한 곳입니다. 이란 거대한 제국이 이런 머나먼 곳에 있을 줄은.”
“슬쩍 반응을 보니 우리 물품 중 관심을 가지는 게 좀 있더군요.”
“다행입니다. 여기까지 물건들을 가져오느라 얼마나 고생을 했었는데.”
표국 사람들은 새로운 무역 지대를 발견한 게 기쁜 모양.
검선은 그런 이들을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다시 외부로 시선을 돌렸다.
그 때, 저 옆에서 한 무리의 사람들이 또 나타났다.
청년 둘. 그리고 그 둘을 뒤따르는 여러 사람들.
그 중 가장 앞에 선 청년을 본 검선은 호오, 탄성을 흘렸다.
복장을 보아하니 굉장히 대단한 위치에 있는 인물로 보인다.
아마 따지자면 이곳 제국의 황자 정도는 될 것으로 보이는데.
‘나쁘지 않구나. 이런 거대한 제국의 황제가 직접 맞이해주는 것도 대단한 일인데, 황자까지 오고 있다니. 제갈소연, 그 아이가 그래도 잘 하고 있는 모양이군.’
검선은 그리 생각하며 그 뒤로 시선을 돌렸다.
찌릿!-
그리고 바로 그 순간, 검선은 저도 모르게 손이 움찔 떨리는 것을 느꼈다.
‘…무엇이냐.’
두 눈을 홉뜨고 온 몸의 기운을 팽팽하게 끌어당긴다.
저도 모르게 검선은 이곳을 나서 저 청년의 앞으로 나아가려고 했다.
이유는 단 하나. 저 젊은이와 한번 겨뤄보고 싶다는 마음이 일어서.
“….”
다행히도 검선이 그 정도로 수련이 덜 된 인물은 결코 아니었다.
무인의 본능이 한 번 일자마자 바로 정신을 차리고 그걸 잠재웠다.
하마터면 표국 사람들 앞에서 부끄러운 모습을 보일 뻔했다.
그러는 사이, 검선을 놀라게 한 청년은 황자와 함께 안으로 사라졌다.
검선은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다가 깊은 생각에 잠겼다.
‘아까 지나간 자들과 비슷하지만, 전혀 다른 부류로다.’
제갈소연을 데리고 가기 위해 온 자들이 전부 불꽃과도 같고.
맹에서 활동하고 있는 후기지수들이 흐르는 물과도 같다면.
방금 지나간 저 청년은, 거대한 산과도 같은 기세를 지녔다고 할 수 있었다.
무엇이든 지닐 수 있는 상대다. 불길을 머금으면 세상을 태울 거대한 화마로.
물을 머금으면 일거에 모든 걸 쓸어낼 폭포가 될 수도 있는 자다.
저런 인물을 대체 언제 봤었던가. 그나마, 소림의 신승이 저러했던가?
“대체 무엇이란 말인가….”
혹시 저 자도 반로환동에 다다른 자란 말인가?
하지만 느껴지는 기운은 또 너무 적다. 숨긴 게 아니라, 그냥 느껴지지 않는다.
대체 이곳 세상은 어찌 되어먹은 것인지. 검선은 침음을 흘려야만 했다.
*
어찌나 소중하게 감싸두었던지, 무슨 엄청 귀중한 물건이라도 되는 줄 알았다.
하지만 나온 건 고향에서 원판 다음으로 흔하게 보이는 물건이었다.
농담 조금 보태서 벌레보다 더 많이 보이는 게 바로 봉이었을 수준이다.
‘그런 걸 대체 왜 이렇게 소중하게 가지고 왔냐고.’
슬쩍 주변을 보니 황제도, 황태자도, 황녀도, 그리고 10강들과 신하들까지.
저것의 정체를 알고 있기에 두 눈만 껌뻑거리고 있는 게 눈에 들어왔다.
이해한다. 저들도 당황스럽겠지. 신물이라고 가져왔는데.
그 물건이 존 나센 사람들이 ‘하하하! 우리 봉!’ 하고 들고 다니는 물건이니까.
심지어 운동기구로도 쓰고 무기로도 쓰고 잘 때 껴안고도 자는.
따지자면 그냥 아무 때나 다 쓰이는 잡템 중의 잡템이었으니까!
“카일.”
“예, 폐하.”
“아무래도 그대가 이야기하는 게 빠르겠군.”
이미 황제 또한 상황을 알고 있는지, 카일에게 그렇게 말했다.
저들이 그렇게 애타게 찾아서 바로 여기까지 오게 된 이유.
그것을 설명해줄 수 있는 인물이 바로 앞에 있는 상태였다.
“폐하. 통역 마법이 어느 정도 준비되었다고 합니다.”
마침 통역을 거치지 않고 약간의 대화를 할 수 있는 마법이 준비되었단다.
이런 편리함에선 역시 마법이 주술보다 한 발자국 더 앞서있다.
티샤가 더 많은 노력을 해야겠구나, 라고 속으로 생각하면서.
마법사가 나서서 통역 마법을 시전하자 카일은 입술을 떼었다.
“안녕하십니까. 그, 성함이 어떻게 되신다고….”
“제갈소연이라고 합니다.”
“아, 예. 그래서 이 물건이 정확히 어떻게 거기까지 닿은 건지?”
카일의 물음에 제갈소연은 보다 더 자세하게 상황을 설명해주었다.
사파 무리들에 의해 기습을 당하고 정체절명의 상황에 놓인 순간.
하늘을 가르고 구름을 꿰뚫으며 푸른 섬광 한 줄기가 나타났다고.
그 빛은 이내 적들을 모조리 쓰러트리며 세상을 침묵에 빠트렸다고 한다.
“….”
거기까지 들은 카일도, 그리고 자리에 모인 모든 이들도.
모두가 다시 한 번 똑같은 표정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알고 있기에 그럴 수밖에 없다.
엄청난 시일이 걸리는 저쪽 세상에서 왜 그런 일이 일어난 것인지.
몇 달 전, 한 남자가 내기라며 무언가를 힘껏 내던지던.
그 장면이 자동으로 그들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이었다.
“저, 아무래도 말입니다. 이거… 우리 가문의 물건인 것 같습니다만.”
“소협의 가문에서 난 것이란 말입니까?! 이런 감격스러운 일이!”
제갈소연이 환하게 웃으면서 카일의 손을 덥석 붙잡는다.
어찌나 반가워하는지 카일이 굉장히 난처한 기색까지 보일 정도.
“그렇다면 가문의 어느 분께서 이와 같은 의義를 행하신 겁니까? 알고 싶습니다. 만나 뵙고 싶습니다! 그리고 감사 인사를 드리고 싶습니다, 소협!”
이곳이 황제를 알현하는 장소인 것도 잠깐 잊은 걸까.
워낙 반가워하는 눈치에 카일이 자세한 이야기는 나중에 하자고 말하려는 찰나.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던 황제가 손짓으로 주변을 환기시킨다.
“아무래도 따로 이야기를 할 시간이 필요하겠구나. 카일 존 나센.”
“예, 폐하.”
“먼 곳에서 오신 손님들은 당분간 제도 내에 머물 것이다. 자네가 여유가 될 때마다 가서, 이번 일에 대해 말해주면 좋을 듯 하군. 여기서는 좀 그렇지 않은가.”
저들은 뭐 엄청 대단한 존재가, 대단한 일을 행한 것으로 알고 있지만.
실상은 그냥 내기 좀 하겠다고 봉을 힘껏 던진 것에 불과하다.
그게 어쩌다 보니 어마어마한 거리를 넘어서 도달한 것 뿐이다.
“이제 또 다른 이야기를 해봐야겠군.”
황제는 역시 황제다웠다. 이번 만남으로 제국에 어떤 이점이 올 수 있는가.
이번에 저들이 끌고 온 표국과 어떤 교류를 할 수 있는가.
제국에 더 큰 이득을 줄 수 있는 일. 황제는 그 부분에 대해 더 관심이 많아 보였다.
“흐음.”
그리고 황녀는, 굉장히 경계하는 눈빛으로 제갈소연을 바라보는 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