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잘 지내셔야 합니다, 이안 님.”
“…너 없이 잘 지낼 자신이 없는데.”
“잘 지내실 겁니다. 레토 씨도 마찬가지고.”
“저도… 크게 자신은 없는데요.”
가만히 그 장면을 바라보고 있던 카일은 두 눈을 감았다.
그리고 느꼈다. 슬슬 제 인내심이 바닥나고 있다는 것을.
‘인내심’ 하면 존 나센, ‘존 나센’ 하면 인내심이다.
끊임없는 단련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바로 그 인내심이니까.
그런 존 나센의 인내심을 이토록 갉아먹는 중이라니.
여러모로 참 대단하다고 할 수 있는 두 남자였다.
‘저러는 것도 처음이나 안타까운 거지, 자꾸 저러면 뇌절 그 이상, 그 이하도 아니라고.’
슬슬 본인이 나서서 물리적으로 좀 끝내야 하나, 고민이 되던 찰나.
그런 카일의 속내를 알아차린 건지 넬이 이안과 레토의 등을 두들긴다.
“자! 이만 하는 게 좋겠습니다. 너무 오래 기다리게 하실 수는 없습니다.”
“그래도, 조금만 더….”
“이안 님 말이 맞습니다. 조금만 더….”
“더 할 말 남았나.”
이때, 동생과 마음이 맞았는지 리어가 더는 못 견디겠다는 듯 나섰다.
눈물 나는 작별도 적당히 해야지, 이러면 언제 작별을 할 수 있냐고 말하듯이.
“남았으면 빨리들 해라. 10초 주겠다.”
10초 안에 할 말 안 하면 숨지게 만들어주겠다는 느낌이다.
덕분에 이안도, 레토도 재빠르게 넬과의 작별 인사를 마칠 수 있었다.
“어휴.”
한숨을 내뱉은 카일은 저도 모르게 이마를 짚고 말았다.
그리고는 이런 상황이 그려지게 된 과정을 잠시 떠올렸다.
*
“예? 넬. 다시 말해 봐요. 지금 뭐라고요?”
“카일 님의 형님 되시는 분을 따라서 저도 새로운 세상으로 가보고 싶습니다.”
너무 갑작스러운 요청. 덕분에 카일은 뭘 잘못 들었나 싶었다.
리어가 제수씨들한테 인사나 하겠다고 아주 잠깐 들른 아카데미.
그 와중에 어떻게 소식을 들었는지 달려와선 다짜고짜 그리 말을 꺼낸 것이다.
“아니, 넬. 그렇게 말해도… 그건 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라고요.”
현재 넬은 제국의 정식 귀족이다. 그것도 작위 귀족.
그런 인물이 제국 바깥으로 넘어가는 건 보통 일이 아니다.
자칫 무슨 문제가 생길 시 어떤 책임과 영향을 가져올지도 모르는 상황.
최소한 황실에 가서 보고를 하고 허락 정도는 구해야 한다.
그래야만 차후 있을 수도 있는 일에서 도움을 받을 수가 있다.
“듣기로 그곳 사람들은 카일 님의 고향분들과 비슷한 정도로 강하다고 했습니다. 그곳에서 새로운 깨달음을 얻고 싶습니다. 저는, 여기서 더 나아가야만 합니다!”
“지금도 충분히 강해요. 지금 그 나이에 비슷한 수준을 지닌 기사 후보생 있어요?”
없다. 제국 온 곳을 둘러봐도 그런 인물은 없다.
정말 샅샅이 뒤져보면 하나 정도는 나올 수도 있겠지.
하지만 그마저도 겨우 넬과 비슷한 수준인 게 전부다.
결코 그녀보다 윗줄에 있을 수는 없다. 어떻게 장담하냐고?
여기까지 키운 인물이 하나는 카일이요, 하나는 레아니까.
“…알고 있습니다. 하지만 저는, 타인들에 비해서 강하고 싶은 게 아닙니다.”
넬은 굳건한 의지로 가득한 목소리로 말을 이어나갔다.
“저는 어제의 저보다, 내일의 저가 두 배는 더 강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제가 강해지기 위해 더 많은 노력을 하고, 더 많은 곳을 가며, 더 많은 것을 배웠으면 합니다.”
“진짜 이거 너무 난감하게 하는데….”
본인 의지가 너무 강력하니 그냥 무시할 수는 없는 노릇.
결국 카일은 리어를 찾아가서 방법을 물었다.
“기특한 친구로구나.”
“그렇죠. 그렇긴 한데, 마음대로 돌아다녀도 아무 문제가 없는 우리와는 다르게 넬은….”
“내가 부탁하마. 어차피 형식적인 일 아니냐. 적당하게 황실 구색만 좀 맞춰주면 되겠지.”
“…바로 얼른 가라고 하겠네요. 형님이 나서신다면.”
그렇게 해서 당일날 바로 넬의 강호행이 결정되었다.
아카데미 부분은 특별히 휴학계까지 내어주는 특급 대우가 되었고.
이제 겨우 회복한 귀족 가문에 엄청난 관심이 쏟아진 격이었다.
이후 재빠르게 짐을 싼 넬은 가족들에게 먼저 소식을 전했다.
너무 급히 출발하느라 얼굴도 못보고 가는 게 죄송스럽다고.
몸 건강히 잘 다녀올 테니, 올 때는 정말 제국 최고의 여기사가 되어서 올 테니.
아무 걱정도 하지 말고 조금만 기다려달라고 말이다.
다음으로 알고 지내던 이들에게도 적당히 작별 인사.
티샤와 엘가는 여기서도 충분할 텐데 왜 그러냐며 아쉬워했다.
그도 그럴 게, 각각 이안과 레토 그 둘이 잘 되는 걸 원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넬의 진심이 워낙 강렬했기에 둘 모두 결국 넬을 응원했다.
성녀야 그 소식을 듣자마자 바로 축복을 빌어주었고.
문제는 한창 넬과 결혼도 하고 애도 낳고 손주까지 보는.
그런 미래를 그리고 있던 두 남자라고 할 수 있었다.
“그게 무슨 소리지, 넬? 갑자기 왜 떠난다는 거야. 난 이해를 못 하겠어.”
“저도 그러합니다, 넬 양. 왜 갑자기 그런 결정을! 상의도 없이!”
“죄송합니다. 하지만, 상황이 너무 급해서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너무 갑작스럽다고 하는 이안과 레토.
그 둘을 설득하며 잘 다녀오겠다고 하는 넬.
그렇게 해서 끝나지 않는 인사가 이어진 게 벌써 한 시간 전 이야기였다.
참다못한 리어까지 나서서 ‘끝내라. 끝내주기 전에.’ 라고 나섰을 정도.
“이제 정말로 가보겠습니다. 이러지들 않으셔도 됩니다. 영원히 안 돌아오는 것도 아닌데.”
“하지만….”
“이 친구의 말이 맞다. 내가 돌아오는 길에 몸 성히 잘 데리고 올 터이니 믿어라.”
리어가 직접 나서서 보증인을 자처한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존 나센, 그것도 그 후계자가 내놓은 약속.
거기까지 못 믿겠다고 하면 ‘나 죽여줍쇼.’ 하는 것과 똑같다.
결국 마음을 다잡고 슬며시 뒤로 물러서는 이안과 레토.
그 둘을 바라보던 넬이 미소를 짓더니 별안간 그 둘을 껴안는다.
“억.”
“엇?!”
“기다려주시길. 두 분께 보다 더 잘 어울리는, 그런 대단한 사람이 되어서 오겠습니다.”
아주 당당하게 역하렘 의지를 밝히는 넬이었다.
덕분에 카일의 머리가 그야말로 멍해지려는 찰나.
“…그래. 잘 다녀와.”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이안도 레토도, 딱히 ‘두 분’ 에 신경을 쓰지 않는 눈치였다.
…아니면, 그냥 ‘잘 어울리는’ 라는 말만 제대로 들었다거나.
*
“모이세요!”
전해진 말은 딱 그 한 마디가 전부였다.
하지만 티샤도, 엘가도 그 말을 듣자마자 부리나케 달려갔다.
시간이 흐르고 흘러 마침내 가까워진 약속의 시간.
아직 1학기가 끝나려면 좀 남았다지만 카일이 그러지 않았던가.
시간제한에 딱 맞춰서 할 생각은 추호도 없다고.
‘오늘인가? 그래. 오늘인가 봐! 드디어!’
‘걱정 마. 최선을 다했잖아? 그래, 고작 약혼이야. 혹시나 밀리더라도….’
‘…아니! 어떻게 아무렇지 않을 수가 있어!’
‘약혼도 중요한데! 전혀 아무렇지 않은 게 아니잖아!’
그런 두 사람에 반해 조금은 차분한 모습의 성녀.
그리고 아무리 지워도 지워지지 않는 피곤함이 묻어있는 황녀까지.
마침내 네 여자가 카일의 방에 전부 모이게 되었다.
“전부 모인 겁니까?”
“네, 카일.”
“전부 모였어요.”
“그렇군요. 음, 일단… 제가 왜 모이라고 했는지, 다들 아실 거라고 생각됩니다.”
그러자 티샤, 엘가, 성녀, 황녀, 모두가 고개를 끄덕거린다.
이렇게 중요한 이야기는 딱 하나밖에 없지 않은가.
“약혼 순서를 정해야 하잖아요. 그렇죠?”
“그렇죠, 그렇죠.”
“안타깝게도 첫 번째가 있으면 마지막이 있는 법이고요.”
“신경 안 써요. 어차피 이번에 정해진다고 끝이 아닌데요.”
티샤와 엘가가 각각 답하고, 성녀가 웃으면서 고개를 끄덕거린다.
황녀는 그 와중에 열심히 졸고 있느라 반쯤 정신이 나가있었고.
“자, 일단 약혼 마지막 순번은 황녀님.”
“아아.”
“이런….”
대충 예상은 하고 있었다지만 그래도 안타까운 일은 안타까운 일이다.
해서 성녀는 물론이고 티샤도, 엘가도 모두 진심으로 안타까워 하는데.
“우응….”
정작 당사자는 간만에 맞이한 편안하고 아늑한 공간에서 수면을 취하느라 정신이 없다.
오죽하면 엘가가 ‘깨워야 할까요?’ 라고 물어볼 정도이겠냐만.
“지금은 놔두죠. 어차피 당사자도 알고 있고. 제가 나중에 다시 말하면 되니까요. 그리고 세 번째는… 성녀님. 일단 이번에는 그렇게 되셨어요.”
“아앗! 그렇군요. 아쉽네요. 이번에 교단 일이 너무 많아서.”
성녀 또한 얼추 예상은 하고 있었는지 바로 수긍한다.
오히려 자신이나 황녀보다는 티샤와 엘가 순번이 더 궁금하다는 눈치일 정도.
“그리고 가장 중요한… 첫 번째는….”
어디선가 두구두구! 하는 효과음이 들리는 것 같다.
마치 바로 옆에서 누군가 책상을 손으로….
“황녀님. 하지 마세요.”
“미안.”
“언제 일어나신 거예요. 그리고 일어나자마자 효과음은 또 뭐고.”
“첫 번째, 라는 말에 나도 모르게 눈이 떠졌어.”
“하여간. 큼큼! 아무튼. 첫 번째는….”
티샤와 엘가가 서로의 두 손을 붙잡은 채 기다리고 있다.
무슨 연말 대상 시상을 앞둔 두 라이벌을 보는 느낌이라고 할까.
이러다가 웃음이 터지면 안 되는데, 하고 생각하며 카일은 바로 발표했다.
“티샤.”
“흐잇!”
“아아…!”
탄성을 흘리는 티샤와 탄식을 내뱉는 엘가.
서로의 감정이 교차하는 와중에 성녀가 재빠르게 박수를 친다.
그리곤 승자에겐 축하를, 패자에겐 바로 응원을 건넨다.
혹 있을지도 모르는 갈등을 사전에 차단하는 모습이었다.
“접전이었어요. 둘은. 우열을 너무 가리기 힘들어서 마지막의 마지막까지. 심지어 바로 직전까지도 고민하고 있었어요.”
“후우… 뭐, 이럴 수도 있다고 생각은 했으니까… 만은, 아쉬운 건 어쩔 수가 없네요.”
쩝, 하고 입맛을 한 번 다시는 엘가.
하지만 곧 헛기침을 하고서 바로 털고 일어난다.
어차피 이대로 끝도 아니고 약혼만큼. 아니, 약혼보다 더 중요한 승부처가 두 번이나 남았다.
거기서 이긴다면 오늘의 패배 정도는 순식간에 잊을 터.
“약혼식은 어떻게 할 생각이에요, 카일?”
“너무 거창하지도 않고, 너무 소탈하지도 않게요. 그리고 하루 건너서 하는 것도 지양하고. 아무리 약혼이라지만 하루 건너뛰어서 한 명씩 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난 찬성. 솔직히 그러면 너무 이상해.”
“저도 황녀님 말씀에 찬성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