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로판 속 전투종족-311화 (311/318)

“폐하. 태자 입궁이옵니다.”

시종장의 보고에 황제는 고개를 끄덕거렸다.

그리고 잠시 후, 문이 열리며 황태자가 안으로 들어선다.

“폐하를 알현하나이다.”

황제의 부름을 받고 급히 궁으로 들어선 황태자가 인사를 올린다.

그 모습을 잠깐 바라보던 황제는 고개를 끄덕거리곤 앉으라는 듯 손짓했다.

“소자를 급히 찾으셨다고 들었습니다.”

“논의할 것이 있기에 그리했다, 태자.”

“중요한 것이옵니까?”

“중요하지. 중요하고말고. 귀족들의 군주로서도, 딸을 지닌 아비로서도.”

거기까지 말해주자 황태자는 바로 자신을 찾은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약혼도 치렀겠다, 이제 슬슬 그 다음을 논할 때가 온 것입니까.”

“아직 시간이 남았다고 하지만 그 시간도 금방이니라. 그에 반해 제국의 사정은 그 때 그 때 다 맞춰지지 않는다. 여유가 있을 때 미리 논하는 게 서로에게 좋을 것이다.”

황태자는 그런 황제의 말에 십분 동의한다는 듯 고개를 끄덕거렸다.

아직 카일의 입에서 본격적으로 결혼을 논하는 내용은 나오지 않았지만.

그 때까지 두 손 놓고 기다리고 있는 건 시간낭비일 수 있다.

무엇보다 얽힌 여자들이 하나같이 쉽사리 할 수가 없는 인물들.

때가 다가오고 나서야 논하기 시작하면 국사와 겹쳐 정신이 없을 것이다.

그럴 바에 지금처럼 여유가 있을 때 어느 정도 해놓는 편이 좋다.

“내 이미 리토리오 대공과는 얼추 이야기를 끝냈다.”

빠르시다, 라는 생각이 황태자의 머릿속을 스치고 지나간다.

동시에 아직 정해진 것도 없는데 무엇을 끝낸 것인지 궁금해지기도 한다.

“결혼 날짜가 잡히기 전에 서로 적당한 식 장소를 찾기로. 존 나센 쪽에선 되도록 조용히 처리해주기를 바란다고 했지만, 제국의 예법을 무시할 생각은 없다고 했으니 적당히만 한다면 그들 입장에서도 부담스럽지 않은 일이 될 것이다.”

“의외군요. 당장 가족이 될 이들을 전부 존 나센으로 불러서 식을 치르게 할 줄 알았는데.”

“가족을 굉장히 중요시 여기는 이들이니, 다른 곳의 가족들도 신경을 쓰지 않겠느냐.”

그리 말하며, 황제는 툭툭 하고 테이블을 잠시 두드렸다.

“이제는 앞으로가 굉장히 중요하다, 태자. 존 나센과 이어지는 곳이 네 곳이다.”

제국의 주술 연구를 선도하는 곳, 전반적인 외교 부분의 중추 역할을 하는 곳.

황실과 함께 이 제국의 안정을 도모하는 곳. 마지막으로 황실 그 자체까지.

이 네 곳이 존 나센과 직접적으로 연을 맺고 굉장히 깊게 얽히게 되었다.

이 사이에서 균형을 잘 맞추어야 한다. 잘못하면, 후일 일들이 꼬일 수도 있다.

지금이야 존 나센이 철저하게 자신들의 세상을 지키며 산다고 하지만.

그래도 세상은 만에 하나, 가 있는 법이니 조심해서 나쁠 것은 없다.

“앞으로 태어날 조카와는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것이다. 교단도 그렇고, 리토리오도 그렇고. 내가 주술을 크게 받아들인 건 단순히 그 가능성만 봐서 그런 것도 아니니라.”

“알고 있습니다, 폐하. 이미 미래를 예견하셨기에, 더 큰 우호적인 손길을 내미신 것이 아닙니까. 소자도 그 부분을 알기에 힘껏 노력하고 있습니다.”

“다행이다. 태자가 짐의 뜻을 알고 있다 말할 순간이 오다니. 다 컸구나.”

황제는 고개를 돌려 창문 바깥을 조용히 쳐다보았다.

벌써 1년의 반이 지나갔다. 세월은 참으로 정직하게도 흘러간다.

새로웠던 것이 과거의 것이 되고, 미래의 일이 현재의 일이 된다.

“썩 기대가 되는구나. 어떤 새로운 이들이, 제국을 융성하게 만들지.”

*

존 나센이 흘리는 땀방울과 같이, 시간은 멈추지 않고 계속 흐른다.

때론 느릿하게, 또 때로는 눈 깜짝할 사이에 흘러가기도 하지만.

그럼에도 멈추지 않는다. 그럼에도 계속 나아간다. 끊임없이, 계속.

한때는 사특한 사술이라고 여겨졌던 주술이 마법 다음 가는 학문이 되고.

굳건할 것 같았던 제국 10강들의 위치가 바뀌어, 새로운 인물이 들어서고.

또 다시 계절이 지나고 지나, 싱그러운 봄바람이 불어오는 때가 가까워졌다.

그리고 살살 불어오는 그 봄바람을 맞이하며, 여인들이 자리에 모였다.

“오늘 따라 차 향이 굉장히 좋네요.”

“그렇죠? 남쪽에서 새로 올라온 거예요.”

엘가의 말에 티샤가 역시! 하고 고개를 끄덕거린다.

차기 대공이 직접 타주는 차만으로도 이미 충분하다 못해 남는데.

황실과 대공가에만 납품된다는 최고급 차이니 더더욱 대단할 수밖에.

“소식 들었죠? 이틀 전에 아주버님이 돌아오신 거. 황녀님도 들으셨죠?”

“응. 들었어. 떠날 때보다 몇 배는 더 강해진 것 같다고 하더라고.”

얼마 전 동쪽 그 너머로 떠났던 리어 존 나센이 마침내 돌아왔다.

원래도 강하던 남자였지만, 돌아온 그는 이전보다 훨씬 더 강해졌단다.

마중을 나갔던 카일이 탄성을 금치 못했다고 하니 확실하다.

“설마 또 바로 달려가서 붙어보자고 하실 건 아니죠, 황녀님?”

“맞아요. 그러시면 안 돼요. 약혼도 했고, 조만간 식 날짜도 잡히는데. 이제는 정말 아주버님으로 제대로 대우해드려야 한다고요.”

“누가 뭐래. 나 싸운다고 한 적 없어. 설령 싸우고 싶어도 카일한테 먼저 허락 받을 거야.”

그야말로 일취월장. 결국 아주 조금은 ‘황녀다운 황녀’ 가 된 황녀였다.

강하다고 일단 도전장부터 날리는 거 금지. 싸우고 싶다고 칼 뽑는 거 금지.

행동하기 전에, 말하기 전에 한 번만 더 생각해보고 말하고 행동하기.

카일의 그 끊임없는 잔소리가 결국 빛을 발하기 시작한 것이었다.

“아, 잠깐만. 그게 전부가 아니잖아요? 설마, 가족이 더 늘어날 줄은 몰랐는데 말이죠.”

“아하하! 그러게요. 설마 그 때 뵈었던 분이 경쟁자가 아니라 가족이 될 줄이야!”

떠날 적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던 검은 머리의 여인.

처음에는 카일에게 집적거리는 줄 알고 얼마나 경계를 했던가.

오죽하면 실례인 걸 알면서도 대놓고 접근하지 말라고 했었고.

그런데 이제 보니, 그녀의 마음은 거기가 아니었던 모양이다.

분명 고향으로 돌아간다고 했는데, 제갈소연이 다시금 제국으로 왔다.

마음을 정했다며, 제 정인을 따라서 여기까지 함께 왔다며.

“덕분에 카일도 억! 하고 뒤집어졌잖아요. 아주버님이 평생 결혼 안 할 줄 알았다나?”

“그런가요? 아주버님도 나름 멋진 분이셨는데.”

“아카데미 시절에 나름 인기가 있긴 했어. 너무 과묵해서 금방 잊혔지만.”

끼익-.

이때, 문이 열리며 성녀가 안으로 들어선다.

입가에 잔잔한 미소를 지은 채, 여인들을 보자 가볍게 손을 흔든다.

“성녀님! 기도는 다 끝나신 건가요?”

“네. 방금 전에 다 끝났답니다. 카일 형제님은요?”

“아주버님이 오셨다고 해서 갔다가 아직 안 돌아왔어요.”

“그렇군요. 하기야,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 오래 걸리셨으니까.”

처음엔 이번 년도 안으로 돌아올 것이라고 여겼었다.

하지만 무슨 사정이 있었는지, 반년이 훨씬 넘는 시간이 걸렸다.

해서 카일이 제 형 걱정에 밤잠을 이루지 못했냐고? 설마.

걱정을 하기는 했다. 리어 걱정이 아니라 동쪽 세상 걱정을.

“대체 얼마나 때려 부수고 다니는 건데요, 형님. 좀 적당히 하시지.”

가끔 밤에 하늘을 바라보며 그렇게 중얼거리곤 했던 카일이다.

덕분에 티샤와 엘가는 다시금 깨달을 수 있었다. 아주버님도 엄청난 분이구나.

아버님 피가 어디를 가겠냐만은, 카일만 생각하면 안 되겠구나! 하고.

“저, 자매님들. 잠시 앉아주시겠어요?”

갑작스레 성녀가 그렇게 운을 떼고 나선다.

여전히 입가에 미소를 짓고 있긴 한데.

그 미소로도 다 가릴 수 없는, 무언가 진지한 느낌이 폴폴 난다.

“…무슨 일 있어, 성녀님?”

황녀가 가장 먼저 살짝 걱정스럽다는 목소리를 낸다.

뒤를 이어 티샤와 엘가 또한 두 눈을 깜빡거리며 성녀를 바라보았다.

“실은 말이죠.”

이야기를 시작한다. 그리 길지도 않게, 최대한 요점만 간추려서.

“…에? 아니, 잠깐만. 성녀님. 방금 뭐라고?”

하지만 그 이야기는, 정말 어지간해선 놀라지 않는 황녀마저 당황케 하기 충분했다.

방금 성녀가 한 말이 너무 놀랍고 또 갑작스러웠기에 충분히 그럴 만했다.

“지금 말 잘못 한 거지? 그렇지, 성녀님?”

“그러게요. 성녀님. 지금 저도 잘못 들은 것 같은데요.”

“아뇨. 자매님들. 맞게 들으셨어요. 저, 결혼 첫 번째는 양보할게요.”

성녀의 확인에 티샤도, 엘가도, 그리고 황녀도 할 말을 잃었다.

아니, 약혼 이후 여태껏 그거 하나를 위해서 이 악물고 노력했던 게 아닌가.

또 한 번 이어진 힘든 경쟁. 심지어 존 나센에 가서 직접 확인도 받았다.

그 결과 마침내, 결정된 결혼 첫 번째는 다름 아닌 성녀였다.

이전까지는 꿈도 꾸지 못하던 중량을 들 수 있게 된 점.

그리고 성공적으로 교단의 일과 학업 부분 모두를 이룬 부분.

그 모든 것들을 통합하여 영광스러운 첫 번째 자리를 이룬 것인데.

“그걸 양보하겠다니. 성녀님, 혹시 미쳤어?”

“자꾸 왜 그러세요, 황녀님. 그리고 제가 양보하면 자연스레 첫 번째는 황녀님이 되는데요.”

“바로 그게 마음에 안 들어서 그래. 난 어디까지나 내 힘으로 차지하고 싶은 거야. 이런 식으로의 첫 번째는 싫다고. 이건 아니야.”

황녀의 말에 티샤와 엘가도 각각 우려를 나타냈다.

이런 식으로 하면 다음 있을 경쟁에서 살짝 이상해진다고.

존 나센에서 승자를 정해주었는데 이러면 그림이 묘해진다고.

자칫 시댁의 묘한 눈초리를 받을 수도 있으니 조심해야 하는….

“어머님께는 이미 허락을 받았어요. 그건 걱정하지 않으셔도 될 거예요.”

“에?”

“에에엥?”

“뭐예요? 언제?”

당황하는 세 여자와, 승리의 미소를 짓고 있는 성녀.

“아니, 성녀님? 대체 왜요? 왜 그런 결정을 하신 거죠? 허락은 또 뭐고요!”

“사실 저는 약혼도, 결혼도 다 좋지만… 보다 가장 원하는 게 있어서요.”

헤헤, 하고 웃더니 성녀가 양 볼을 붉게 물들인 채 말을 이었다.

“아이. 저는요. 카일 형제님의 첫 번째 아이를 원한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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