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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판 속 전투종족-316화 (316/318)

“오늘 에르 데리고 입궁하겠습니다.”

제 동생, 5황녀에게서 그 소식을 전해들은 황태자는 두 가지 감정이 교차했다.

한창 귀여울 때라 조카를 보고만 있어도 기분이 좋아지는 것과.

그 조카에게서 오늘도 살아남을 수 있을까? 하는 걱정, 이 둘로 말이다.

‘타니아는 그렇게 조용한 아이던데. 엄마를 닮아서 그런 것인가.’

황녀의 딸인 에르와 티샤의 딸인 타니아. 이 둘의 나이차는 고작 한 살.

그러나 두 아이의 성격은 그야말로 하늘과 땅 차이 수준으로 달랐다.

어찌나 착하고 또 사려도 깊으며 항상 그리 조용한지.

타니아가 이제 다섯 살이라고 하는데 하는 짓은 열다섯은 되어 보였다.

황제마저도 그런 타니아를 보고서 아이가 너무 일찍 철이 들면 슬프다는 말까지 했을 정도.

그에 반해서 자신의 조카, 에르제베트는….

“사암― 쪼오오온―!”

저 앞에서 무언가 엄청난 속도로 달려들고 있었다.

그 속도가 어찌나 빠른지 저 멀리 있던 게 눈 깜짝할 사이에 앞까지 다가왔다.

심지어 차기 황제를 지켜야 하는 기사들조차 미처 반응을 하지 못했다!

“크업!”

결국 오늘도 에르의 안기기를 가장한 몸통 박치기에 그대로 당하고 만다.

아직까지는 애가 작아서 다행인데, 몸집이 커지면 말려야 하지는 않을까.

황태자는 에르를 껴안은 채 바닥을 구르며 그렇게 생각했다.

“태, 태자 저하! 괜찮으십니까!”

“태자 저하!”

곁에 있던 기사들과 시종들이 놀라서 우르르 몰려든다.

누군가는 이런 일이 처음이고 또 누구는 몇 번 봤을 것이다.

그럼에도 아직 어느 누구도 이 아이를 막아내지 못했다.

“괜찮다. 가서 의자나 하나 가져 오거라.”

손을 휘휘 내저은 황태자는 품에 매달려있던 에르를 의자에 앉히려 했다.

하지만 에르는 그런 황태자의 품에 꼭 매달려선 떨어질 생각이 없었다.

“헤헤헤! 삼촌! 에르 왔어!”

“에르. 이런 자리에서는 그런 호칭이 아니라 다른 호칭을 불러야지.”

다른 이들에겐 격을 따지지 않는 황녀이지만, 그래도 상대는 황태자다.

큰 오빠이기 전에 차기 황제이니 응당 예를 갖추는 게 옳은 일.

하지만 에르는 그런 황녀의 말에도 ‘시러!’ 하고 고개를 내저었다.

“삼쪼온은 삼쪼온이야! 난 삼촌이 좋아! 저하 싫어!”

“에르.”

“놔두거라. 공적인 자리도 아니고 조카를 만나는 자리인데. 이곳에서까지 태자로 있을 이유는 없지 않니. 여기선 삼촌으로 충분하다.”

하하, 웃던 황태자가 갑자기 은근한 눈길로 황녀를 바라본다.

“그리고. 다른 이도 아닌 네가 격을 따지는 건 여전히 이상하다.”

“저도 태자 저하껜 무례하게 군 적 없습니다만.”

조금은 억울한지 그렇게 말하는 황녀였으나 말끝을 흐리고 말았다.

양심이 아예 없는 건 아닌지라, 본인의 과거 행적들을 잘 기억하고 있으니까.

“삼쪼온! 나 더 세졌어! 기사 또 이겼어!”

“그러냐. 장하구나, 우리 에르. 우리 조카가 최고다.”

이제 겨우 여섯 살이다. 대귀족가의 아이라고 해도 예법 정도만 배울 게 전부인 때다.

제국 10강들을 살펴보아도 이 시기부터 두각을 드러낸 경우는 거의 없었다.

하지만 에르는 달랐다. 이미 다섯 살 때 기사 후보생을 꺾었다.

어지간한 숙련병들을 상대로 체력 검증에서도 확실한 우위를 보였다.

심지어 얼마 전에는 기사 하나를 꺾는 기염을 토해내기까지 했다.

비록 상대가 기사가 된 지 얼마 되지 않았다고 하지만, 기사는 기사다.

그 인물을 고작 여섯 살 여자아이가 힘으로 꺾어버린 것이다.

‘이런 아이가 매번 몸통 박치기를 하는데도 내가 살아있다니… 우리 조카가 삼촌이라고 최대한 살살 해주고 있다는 건가.’

우리 조카가 또 은근히 착하구나, 하고 생각하며.

황태자는 옆에 앉아서 발장난을 치고 있던 에르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그러자 에르가 히히! 하고 행복한 웃음을 지었다.

“에르. 넌 어째 엄마 빼고 다 좋아하는 것 같네.”

“엄마도 좋아! 그런데 엄마는 매일 봐서 그래!”

“매일 보니까 더 좋아해야지.”

그렇게 말한 황녀가 에르를 바라보며 질문을 던진다.

“엄마랑, 요한 오빠랑. 둘 중에 누가 더 좋아?”

“요한 오빠!!”

단 1초의 고민도 없이 바로 터져 나온 에르의 대답.

덕분에 황녀의 표정은 사정없이 구겨지고 말았다.

“끄윽. 끅.”

덤으로 옆에 앉아있던 황태자는 웃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졌고.

“어, 삼촌 웃는다! 삼촌 기분 좋아? 재미있어?”

“그래. 에르, 너 덕분에 이 삼촌이 많이 웃는 것 같다.”

“다행이다! 엄마는 에르 때문에 힘들다는데!”

“끄읍.”

다시 한 번 시작된 에르의 공격에 황태자는 또 한 번 입술을 깨물었다.

어이가 없어서. 다른 누구도 아닌 5황녀, 율리카가 저런 말을 하는 날이 올 줄이야.

“그만 좀 웃으시죠, 저하. 자꾸 웃으시면 서운합니다.”

“끄으… 어쩔 수 없지 않느냐. 이제 이해가 좀 가느냐? 황제 폐하께서, 그리고 어마마마께서 너를 보며 얼마나 속이 새까맣게 타들어 가셨을지 말이다.”

“…그래도 전 어릴 때 이 정도는 아니었던 걸로 기억합니다만.”

“기억 날조하지 말거라, 황녀.”

아니기는 개뿔이. 지금 에르랑 하는 짓이 판박이인데.

황태자가 슬쩍 눈을 흘기자 황녀도 무언가 찔리는 구석이 있는 모양이다.

큼큼, 헛기침을 하는 모습에서 그 느낌이 확 난다고 해야 할까?

“삼쪼온! 나 저기 있는 기사랑 또 싸워도 돼?”

“에르. 여기 있는 기사들은 모두가 황제 폐하의 검이란다. 무슨 말인지 알지?”

“응! 황제 폐하께는 절대 함부로 하면 안 돼!”

“그래, 착하다. 그러니까….”

“하지만 황제 폐하도 그러셨어! 에르가 하고 싶으면 해도 된다고!”

“….”

아니, 황제 폐하. 저도 모르는 사이에 에르랑 무슨 약속을 하신 거랍니까.

*

“…선함을 믿으시고, 그 자애로운 손길로 모두를 살피시며, 다만 긍휼히 여기소서.”

요하네스가 무릎을 꿇은 채 그 긴 기도문을 전부 외워낸다.

아직 일곱 살밖에 되지 않았건만 벌써부터 신실한 기운이 가득 느껴진다.

일반 사제들은 물론이고 성기사들, 심지어 추기경들까지 탄성을 흘릴 정도였다.

“다음 성자는 이미 정해진 것 같구나. 허허허.”

그 모습을 물끄러미 쳐다보던 교황이 너털웃음을 터트린다.

그러자 전前 성녀, 힐데 역시 따라서 살포시 미소를 지었다.

“자꾸 그러시면 지금의 세라핌께서 서운하게 여기실 거예요.”

교단의 이전 성녀였던 힐데가르트 도미니카 데 아가사 세라핌.

그녀는 자신의 의무를 모두 끝마치고, 신실한 신도로서 ‘사랑’ 이라는 일을 행하기 시작했다.

그 결과 카일 존 나센과의 사이에서 사내아이를 얻게 되었고 말이다.

당연히도 성녀의 의무는 차기 성녀, 차기 세라핌에게로 넘어갔다.

그리고 그 세라핌은 현재 제국 남쪽으로 순례를 떠난 상황.

힐데는 혹 현 성녀가 불편해할까 그녀가 없는 사이에 잠깐 방문한 것이었다.

“별 걱정을 다 하는구나. 오히려 성녀는 네가 와서 조금이라도 더 알려주고, 더 조언해주고, 더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있다. 네가 안 와서 서운한 기색까지 보이더구나.”

“이해는 합니다만, 자꾸 의지하게 되면 스스로 일어서지 못하는 법입니다. 그 분께서도 ‘세라핌’ 의 이름을 내려 받으신 분이니 분명 혼자서도 잘 해내실 수 있을 겁니다.”

그 말에 교황은 그 말이 맞다며 다시 한 번 너털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는 사이, 자리에서 일어선 요한이 조심스레 교황과 힐데 곁으로 다가온다.

“교황 성하. 어머님.”

“차기 성자 왔는가.”

“어찌 그런 말씀을. 저는 아직 부족하고도 부족한 아이일 뿐입니다.”

“그대의 어머니 되는 사람도 그러했다. 하지만, 교단의 역대 세라핌 중에서도 가장 빛나고 따스한 이가 되었지. 요한, 너도 그럴 수 있을 거다.”

애당초 요한의 이름부터 제국 황제가 특별히 내려준 이름이다.

그 이름은 교단의 초대 성자가 어린 시절 썼다고 알려진 것.

그걸 황실에서 내려주었다는 건 그만큼 거는 기대가 크다는 뜻이었다.

“요한. 혹시 부담스럽나요?”

제 아들을 바라보며 전대 성녀, 전대 세라핌이 조심스레 질문을 던진다.

너무나 사랑스러운 아이다. 자신과 카일 사이에서 나온, 세상을 다 줘도 모자랄 생명이다.

그 아이가 혹 부담스럽다면, 싫다고 한다면 결코 강요할 생각 따위 없었다.

그저 요한이 하고 싶은 대로 이 넓은 세상을 살아갔으면 했다.

“…부담이 되지 않는다면, 그건 거짓말일 겁니다, 어머니. 하지만, 정녕 그래야 한다면. 그렇게 해서 많은 이들을 위할 수 있다면 저는 그리 할 것입니다. 그게 어머니의 아들로서, 그리고 아버지의 아들로서 자랑스러운 일이 아니겠습니까.”

일곱 살의 나이에도 불구하고, 요한은 또박또박 제 뜻을 밝혔다.

그 기꺼운 말에 교황은 다시 한 번 속으로 생각했다.

신께서 이렇게나 찬란한 차기 성자를 일찍 내려주어서 참으로 감사하다고.

“교황 성하.”

“말하거라, 요한.”

“저번에 말씀드렸던 대로, 사제 분들과 좀 만나보고 싶습니다.”

“그래. 그리 하거라.”

교황이 손짓으로 곁에 있던 사제들을 불러온다.

그러자 뒤에서 대기 중이던 사제들이 곧장 옆으로 다가온다.

이후 요한과 함께 어딘가로 바삐 이동하기 시작했다.

“…저 모습을 보면 저 아이 몸에 흐르는 피가 그곳의 것임을 깨닫게 되더구나.”

어지간해서는 자신이 원하는 바를 잘 표현하지 않는 요한이다.

혹 그로 인해 상대방이 난처해하는 모습을 보기 싫다는 것이 그 이유.

그럼에도 그 요한이 교단에 오면 꼭 확인하는 것이 있다.

“그럼요. 어디 가겠나요? 요한의 아버지가 누구인데. 그리고 그 본가가 어디인데.”

다름 아닌 교단 내부에 위치한 사제 및 성기사들의 단련장.

요한은 그곳에 가서 사제들과 함께, 그리고 성기사들과 함께 구슬땀을 흘리길 좋아했다.

이렇게 같이 땀방울을 흘리고 있으면 혼자 할 때보다 기분이 더 상쾌하다나.

“언젠가는 교단의 모든 분들이 할아버님과 같은 강하신 분들이 되기를 바랍니다.”

요한이 지닌 그 꿈에 교황도 그리고 힐데도 속으론 기겁을 했었다.

교단의 존 나센 남작 화라니. 상상만 해도 정신이 다 아찔해질 지경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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