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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
어디서부터 잘못된 걸까?
권지훈은 지나온 29년 인생을 천천히 곱씹었다. 하지만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지독해야 할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그렇게 나쁘게 살지는 않은 것 같은데, 대체 왜 여기까지 오게 됐을까.
아직 겨울의 한기가 다 떠나지 않은 초봄. 칼바람이 부는 새벽 2시의 마포대교는 흔히 지나가는 차 한 대 보이지 않았다. 답답한 명치에서부터 기어 올라온 한숨이 하얀 꽃처럼 빠르게 피었다 사라졌을 뿐이다.
지훈은 너울대는 강물을 내려다봤다. 이곳에 올라온 건 지극히 충동적인 결정이었다. 아니, 따지고 보면 결정도 아니다. 눈앞이 흐려질 정도로 술을 마신 다음 무작정 걷고, 걷고, 또 걷다 보니 이 오갈 데 없는 길 위였다.
그 때였다.
“떨어질 거예요?”
뺨이 아릴 만큼 차가운 새벽과는 어울리지 않는 태평한 물음이었다. 지훈은 멍하게 목소리가 들린 쪽으로 고개를 움직였다. 시선이 닿은 곳에는 뿌연 시야로도 길쭉한 장신을 가늠할 수 있는 남자가 서 있었다.
“떨어져 죽을 거냐고요.”
대답 대신 들은 문장을 곱씹고 있자니 낯선 남자의 말이 담백하게 이어졌다.
“웬만하면 사는 쪽을 선택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지훈 씨. 당신이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니까.”
“……예?”
“강은 녹았다지만 아직 춥잖아요. 뭐, 정 떨어져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겠지만.”
웃음기 어린 말투 때문일까. 구구절절 무시무시하기 짝이 없는 이야기들이 장난처럼 들렸다. 지훈은 흐리게 번지는 눈가를 벅벅 문질렀다. 그러자 어두운 야경 속에서도 선명하게 보이는 것들이 있었다.
연하고 맑은 갈색 머리카락. 기묘할 정도로 선명하게 보이는 눈동자. 구김 하나 없는 롱코트와 슈트.
반듯한 자세로 선 남자는 이 시간, 이 장소와는 더없이 이질적인 모습이었다.
“권지훈 씨. 저는 당신을 꽤 오랫동안 지켜봤어요.”
……뭐야. 이 사람. 지훈은 미간을 찌푸렸다. 낯선 이의 입에서 짐짓 친근하게 흘러나오는 제 이름이 이상하다는 것 정도는 알코올에 전 머리로도 알 수 있었다. 하지만 이성의 작동은 거기까지였다.
“그래서…요?”
“그래서, 지훈 씨에 대해 제법 잘 알아요. 특히 지금 당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쓰레기들에 대해선 더욱더.”
경계 대신 순순히 흘러나온 대답을 남자는 꽤 반가워하는 눈치였다. 그걸 알 수 있었던 건, 한 폭 정도로 떨어져 있던 그가 천천히 가까워졌기 때문이었다. 딱딱한 구두 굽 소리가 한 번 들릴 때마다 매서운 날씨보다 먼저 봄이 찾아온 듯한 이목구비가 선명해졌다.
“예를 들면, 이름을 바꿔치기해서 보고서를 낸 주제에 그걸 따졌더니 벌써 반년째 투명 인간으로 취급하며 따돌리는 직속 사수와 동기들….”
“…….”
“같이 살던 월세 보증금을 다 챙긴 거로도 모자라 옷 한 벌까지 모두 훔쳐 잠수한 십년지기 친구. ―아니, 이런 걸 친구라고 해야 하나?”
아프게 몰아치던 바람이 멎었다. 정확히는, 어느새 코앞까지 다가온 남자가 뺨을 할퀴던 바람을 막아섰다.
지훈은 그의 손이 얼굴에 닿고 나서야 시야가 자꾸 뿌옇게 변했던 이유를 알게 됐다. 눈물에 젖어 꽁꽁 얼어붙은 뺨을 달래듯 감싼 온기가 사무치게 따뜻했다.
“억울하잖아. 그런 새끼들 때문에 죽는 건.”
……맞아. 억울해.
지훈은 정말 진심을 가득 담아 대답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터져 나온 것은 매일같이 꾹꾹 눌러 참았던 헐떡임이었다.
‘울어 봤자 바뀌는 건 하나도 없으니까 울지 말자’. 언제나 주문처럼 중얼거리며 짓눌렀던 감정이 걷잡을 새도 없이 쏟아졌다. 단단한 손가락이 몇 번이나 부드럽게 눈가를 쓸고 또 쓸어도 눈물은 멈출 줄을 몰랐다. 멈출 수가 없었다.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 말이라면 뭘 못 들어주겠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요.”
벼랑 끝에서 만난 낯선 남자가 다정하게 속삭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