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폭풍
포근하고, 따뜻하고, 단단하고.
수면제 없이는 잠들 수 없었던 몇 달 만의 숙면은 묘한 후기로 마무리됐다. 권지훈은 몽롱한 상태에서도 제가 떠올린 단어를 거듭 되풀이했다. 포근하고, 따뜻하고, 왜…… 단단할까. 앞의 두 개는 그렇다 쳐도 마지막 것은 의아하기 그지없었다.
하지만 지훈이 정말 의심해야 하는 건 ‘포근함’과 ‘따뜻함’이었다.
지방에서 같은 고등학교를 나와 나란히 상경해 대학을 다니고 또 취직한 지금까지 10년을 동고동락했던 친구, 유경인은 어제 집 안에 있는 모든 물건을 들고 종적을 감췄다.
말 그대로다. 아침까지는 있었던 모든 것들이 녹초가 되어 퇴근해 돌아온 저녁,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설마 집을 잘못 찾아왔나 몇 걸음 돌아나가 현관문 밖을 확인하기도 했다. 하지만 쓰레기봉투 몇 개만 있을 뿐 을씨년스럽게 텅 빈 집은 분명 501호 투룸이 맞았다. 부엌 벽에 있는 누런 흔적 역시 익숙했고 말이다.
가진 모든 걸 잃었다는 걸 깨닫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끔찍한 현실 자각은 전화 몇 통이면 충분했다. 10년간 바뀐 적 없는 친구의 연락처는 없는 전화번호가 됐고, 입주한 이래 처음 전화해 본 집주인 할아버지는 “무슨 소리야. 집 뺀다며?”라고 되물었다. 분명 경인은 한 달 전쯤 집을 재계약했다며, 월세가 올라가지 않아 다행이라고 했었는데 말이다.
보증금 1억에 월세 70. 보증금은 서로 반반 냈지만 계약자는 경인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단 한 번도 그게 위험할 거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아니, 오히려 고맙기만 했었다. 제가 한창 주말 출근까지 하는 인턴으로 정신없던 때 혼자 발품을 팔아 집을 구하고 이사까지 진행해 준 오랜 친구가 얼마나 든든했던가.
……물론 이제 이 모든 건 과거형이 되었지만 말이다.
“―우, 우와아악!”
이제 제게는 포근하고 따뜻한 아침 따위 없다는 현실을 떠올린 순간. 찬물이라도 맞은 듯 벌떡 몸을 일으킨 지훈은 괴성과 함께 침대에서 굴러떨어졌다. 곧장 바닥에 부딪힌 무릎에서 시큰한 통증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 아픔은 몇 초 가지 않았다. 애초에 가벼운 타박상 따위는 막 깨달은 두 가지 충격 앞에선 간지러움보다도 못한 자극이었다.
“…뭐…, 이게, 대체 무슨….”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 그리고 민망한 부위의…… 불편함.
아니야. 설마, 그럴 리 없어.
지훈은 맞닥뜨린 현실을 필사적으로 부정했다. 하지만 대리석 바닥에서 미지근한 온기가 올라오면 올라올수록 골반과 다리 사이가 뻣뻣하게 아우성쳤다. 은밀한 틈새에서 전해지는 이물감은 또 어떤지! 사실 이물감보다는 부피감이라는 표현을 사용하는 게 더 적확했지만, 지훈의 머리는 본능적으로 그 단어를 떠올리는 걸 피했다.
대체 지금 몇 시지? 회사는? 출근은? 또 얼마나 깨질까. 낯선 침실에서 눈을 뜬 와중에도 현실적인 걱정이 폭주할 수 있다는 게 어이없었다.
하지만, 앞서 지훈을 의아하게 했던 ‘단단함’의 정체가 나른하게 말을 건 것도 그와 동시였다.
“걱정했는데 기운 좋네요. 지훈 씨, 잘 잤어요?”
실로 몇 달 만에 푹 잤지만, 어쨌든 굿 모닝은 아니다. 환한 침실에서 같은 남자와 함께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으로 눈을 뜬 이상 절대 좋을 수가 없다. 제 이름을 상냥하게 부르는 낯선 남자가 대체 ‘뭘’ 걱정했는지 두렵기만 할 뿐이다.
“죄송합니다만, 여긴 어디…….”
“제집인데요.”
실로 상큼하기까지 한 대답이었다. 감히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하던 지훈은 그제야 침대 옆 바닥 여기저기에 널브러진 익숙한 옷들을 발견했다. 급한 대로 구겨진 셔츠를 주워 입는 손이 덜덜 떨렸다.
하지만 정작 집주인인 남자는 전혀 당황한 기색이 없었다. 살짝 일어나 침대 헤드에 몸을 기댔을 뿐 뭐라 말을 더 걸지도 않았다.
바지는 어디 간 거야. 지훈은 초조하게 셔츠를 잡아 내리며 입술을 깨물었다. 슬쩍 가늘어진 맑은 갈색 눈동자가 제 성기에 닿는 것처럼 느껴지는 게 착각이길 바라면서.
“…거듭… 죄송합니다. 그런데 혹시 누구…신지.”
“기억 안 나요?”
여느 때처럼 간신히 버티는 하루를 보낸 다음 집에 돌아와서 오랜 친구가 저 몰래 이사 간 걸 확인하고. 그다음에는 술을 마시다가…….
멍하게 기억을 더듬고 있자 저쪽에서 옅은 한숨이 흘러나왔다. 이내 팔을 길게 뻗어 몇 번 휘적거린 남자는 침대 옆에 뒤엉켜 있던 자신의 옷에서 작은 지갑을 찾아냈다.
통성명 대신 건네진 건 네모반듯한 명함이었다. ‘서해원’. 갓 일어나도 화사한 얼굴만큼이나 예쁘장한 이름이었다. 지훈은 목을 몇 번 가다듬은 다음 “서해원 씨. 혹시 지금 몇 시인지 아십니까?” 하고 최대한 정중하게 말을 붙이려고 했다.
하지만, 그 물음보다 더 빠른 게 있었다.
―콰앙!
저만치에서 들린 굉음이었다. 지훈은 눈을 동그랗게 뜬 채로 소리가 들린 방향과 해원을 번갈아 봤다. 그린 듯이 고운 얼굴엔 심드렁한 기운만이 어려 있었다.
“저기요. 호, 혹시 밖에 누가 또 있습니까?”
“누가 있다기보다는, 이 집 비밀번호를 아는 사람이죠. 오늘은 좀 내버려 두나 싶었는데. 역시 그냥 쉬게 해 주지는 않네요.”
그게 누군데!
숙취와 뻐근한 근육통으로 마비되었던 머리가 팽팽 굴러가기 시작했다. 정말이지 구겨진 셔츠 하나만 간신히 꿰입은 모습을 보여주는 건 눈앞의 남자 하나로도 벅찼다. 흉포한 괴수의 행진은 점점 침실로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무서울 정도로 커지는 소리만큼 초조함 역시 함께 부풀어 올랐다.
물론, 지훈이 그러거나 말거나 굳게 닫힌 문은 머잖아 속절없이 열렸다.
“변호사님! 대체 왜 이렇게 전화를 안 받으시는 겁니까아앗!”
“안녕하세요. 김 비서님은 오늘도 화가 많으시네요.”
“안녕 못 합니다! 그리고, 제가 화가 많다고요?! 화내는 이유가 누구 때문인지는 안 따지시는 겁니까? 네에?”
침실 문이 열리기 직전, 궁지에 몰린 지훈이 가까스로 고른 도피처는 오랜만의 숙면을 신세 졌던 도톰한 이불 속이었다. 그건 나름대로 나쁘지 않은 선택이었다. 김 비서라고 불린 남자는 빠르게 말을 쏟아낼 뿐 지훈의 존재를 전혀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래요. 나 때문인 거로 하고, 스케줄 다 취소해 주세요.”
“죽어도 안 됩니다! 변호사님, 오늘 중요한 일정이 얼마나 많은지 아십니까?!”
“뭐. 어차피 그 중요한 일정들, 제가 빠지면 하나도 안 중요해질 텐데요.”
“정말 미치셨습니까? 요새 좀 잠잠하다 싶더니 왜 또 이러시는 건데요!”
변호사님…이라고?
지훈은 엉겁결에 구겨질 만큼 움켜쥔 명함을 뒤늦게 다시 펴 보았다. 그러자 이걸 왜 이제 보았나 싶을 정도로 선명한 검은 알파벳 두 개가 곧장 눈에 들어왔다.
‘SJ’. 양각으로 새겨진 레터마크는 익히 잘 아는, 아니, 최소한 대한민국에서 사는 사람이라면 모를 수가 없는 로고였다.
SJ그룹 전략기획실 법무팀장 서해원.
그게 현재 이불 하나로 나신을 함께 가린 남자의 직책이었다.
“김 비서님. 말 예쁘게 하셔야죠.”
실로 나긋나긋한 제언이었다. 슬쩍 웃음기까지 짚이는 목소리에 조금 억울해지기도 했다. 제 쪽은 어둠에 눈이 익숙해질수록 선명히 보이는 동성의 복근 덕분에 시선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를 지경이건만. 대체 뭐가 저렇게 재밌는 건지.
하지만, 지훈은 얼마 안 가 차라리 그렇게 장난치듯 말할 때가 나았다는 걸 알게 됐다.
“―여기, 손님도 계신데.”
둘러쓴 이불 위로 툭툭, 가벼운 손길이 느껴진 순간. 침실 안은 무서울 정도의 적막이 흘렀다. 물론, 박력 넘치던 비서의 기세도 거기까지였다. 해원이 “음? 김 비서님. 왜요, 지훈 씨한테 인사도 없이 그냥 갈 건가요?” 따위의 미친 소리를 지껄이는 게 그 증거다.
김 비서는 화가 많은 게 아니었다. 비서의 말마따나 서해원이라는 남자는 사람을 돌게 하는 데 탁월한 재능이 있다. 지훈은 감히 확신했다.
“이따 뵙겠습니다.”
딸각. 조용히 문이 닫히자마자 곧장 이불 속에서 꿈틀대던 지훈은 저도 모르게 삐죽 고개를 들었다.
“그대로 있어요.”
“예?”
“어차피 피차 출근은 틀린 거 같은데 좀 더 쉬고 이야기해요.”
“아! …지, 지금 몇 십니까?”
“11시요. 참고로 지훈 씨 휴대폰은 너무 시끄러워서 제가 껐어요. 9시까지 출근이라면서 무슨 8시 반부터 전화질을 하던지. 뭐라더라. 커피포트 청소?”
“…….”
“그렇게 커피 처마시고 싶으시면 네가 청소해서 먹으라고 했는데. 하하.”
저승사자가 뒷골을 잡아당기면 딱 이런 느낌일 거다. 지훈의 안색이 창백해졌다. 태어나 지각 한 번 해 본 적 없건만, 이제야 연락 하나 없이 회사를 무단결근했다는 실감이 났다. 아니, 무단결근만 했나? 저를 잡아먹지 못해 안달인 사수며 이제는 같이 식사조차 하지 않는 동기들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그러나 그 걱정을 끊어내듯, 호수 위로 비치는 여린 햇살을 엮어 만든 듯한 남자의 말이 이어졌다.
“우리, 새벽 5시까지 섹스했어요.”
“…….”
“난 당신 씻기느라 6시 넘어서야 침대에 누웠고. 그러니까 같이 더 자요. 나중 일은 그다음에 생각해도 되니까.”
따지고 보면 틀린 말은 아니었다.
어차피 물은 엎질러졌다. 이렇게 어기적어기적 걸어서 회사에 갈 수도 없고, 무엇보다 지금은 영혼까지 찢어발길 기세일 사람들을 견딜 만한 멘탈이 아니다. 현실을 자각하면 자각할수록 팽팽하게 긴장이 어렸던 어깨에서 슬슬 힘이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아침을 깨웠던 따뜻하고, 포근하고, 또 단단한 감촉이 기다렸다는 듯 몸을 다시 감싼 건 그 때였다. 지훈은 당연하다는 듯 저를 끌어안은 해원의 품 안에서 두 손으로 얼굴을 가려 버렸다. 그러나 아무리 꾹꾹 눌러 본다 한들, 뺨으로 열이 오르다 못해 눈두덩이마저 뜨끈해지는 걸 막을 수는 없었다.
또, 숙취 저편에 파묻혀 있던 지난 새벽의 파편이 드문드문 떠오르기 시작하는 것 역시.
* * *
“술 냄새나….”
완전히 이성이 날아간 권지훈은 말이 짧아진다. 몇 시간 전의 해원은 저보다 여섯 살 어린 남자의 그 당당한 투정을 전혀 불쾌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퍽 기껍다는 듯 웃었을 뿐이다.
“제가 아니라 지훈 씨한테서 나는 건데요. 정확히는 지훈 씨 옷에서요.”
“……그런가.”
“네. 하지만 제가 벗겨드릴 테니까 상관없잖아요. 그보다, 더 이야기해 줄래요?”
지훈의 반듯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사근사근한 목소리에 담긴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였다.
“유경인? 아니면, 회사 사람들?”
“지훈 씨를 새벽 두 시에 다리 위로 보낸 사람들에 대한 거라면, 뭐든.”
쪽, 쪽.
목에서 쇄골로, 또 윗가슴으로. 가볍게 입 맞추는 횟수가 늘어나면 늘어날수록 셔츠의 단추 역시 덩달아 풀려갔다. 따끈하게 열이 오른 피부는 무척이나 부드러웠지만, 그렇다고 해서 마냥 말랑하지는 않았다.
슬렌더한 체형에 딱 보기 좋게 붙은 근육. 길고 단단한 뼈대. 어딜 봐도 완연한 남자의 몸이다. 하지만 오랜 기다림에 갈급한 듯 물고 빠는 해원의 움직임에는 망설임이라곤 없었다.
“응…, ―읏!”
작은 유두를 입에 넣는 순간, 지훈은 몸을 물결치듯 튀면서 조금 날카로운 신음을 흘렸다.
이건 싫은 걸까. 해원이 살짝 시선을 움직였다. 발갛게 상기된 뺨과 움찔거리는 허벅지는 싫은 쪽과는 거리가 멀었다. 알코올로 성감이 도드라진 것과는 별개로 타인과의 접촉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셔츠를 지나 바지까지, 지훈의 옷을 벗기는 손에 전보다 속도가 붙었다.
“…하아, 정말, 다른 사람은 몰라도― 유경인, 걔는 정말 나한테 그러면 안 됐는데.”
유경인. 해원이 익히 잘 아는 이름이었다.
권지훈의 십년지기. 대학과 군 생활까지는 퍽 건실했지만, 반년 다닌 회사를 그만둔 뒤부터는 본인을 ‘전업 투자자’라고 말하는 인간. 세상천지에 자기 휴대폰 요금조차 못 내는 전업 투자자가 어디 있나 싶지만 말이다.
해원은 판판한 가슴을 춥, 춥, 소리 내어 빨면서도 지훈의 한숨조차 놓치지 않고 귀를 기울였다. 빨면 빨수록 입 안에서 단단해지는 작은 살덩이가 못 견디게 귀엽기는 했지만 지훈의 속내는 그 못잖게 중요했다.
“다른 사람이면 몰라도 걔는. 정말 내가 매일매일…, 흐으, 읏, 어떻게 하루를 버텨서 집에 왔는지, 다 알면서….”
“그 친구한테 회사 이야기를 다 했었어요?”
“……응.”
“직속 사수며 동기들한테 반년 넘게 투명 인간 취급 받고 있는 거며, 온갖 잡무 처리하는 쓰레기통처럼 대해지는 것도?”
지훈이 다시 한번 응, 하고 대답했다. 아니, 사실 이번엔 좀 더 뭐라고 덧붙이고 싶었지만 끌려 내려간 속옷이 예민한 성기에 비벼지는 통에 그러지 못했다. 부드러운 침대 시트 위 바로 맞닿은 몸 여기저기로 옅은 전기가 튀었다.
한편, 기어이 지훈을 완전한 나신으로 만든 해원은 그제야 잇자국까지 남기던 가슴에서 입술을 뗐다. 제가 발가벗긴 늘씬한 몸을 눈에 새기기 위해서였다.
큰 키에 길쭉한 팔다리. 단정하다 못해 단호한 인상의 얼굴. 약간 마른 듯하지만 과하지도 빈약하지도 않게 다듬어진 몸. 어딜 봐도 권지훈은 참 잘난 남자다. 덕분에 어딜 가나 눈에 띄고, 때로는 이 외모만으로도 이유 없는 호의가 따라오기도 했을 거다.
타고난 것을 잘 이용할 정도로 요령 있는 사람이었으면 조금은 덜 힘들었을까?
해원이 찌푸리듯 웃었다. 제가 떠올린 생각이 얼마나 위선적인 것인지 알아서다. 애초에 그렇게 순수하기만 한 마음이었다면 이 올곧은 남자가 가장 약한 순간에 도달하고 나서야 다가가지 않았을 거다. 작은 유두가 꼿꼿해지다 못해 발갛게 될 정도로 빨지도 않았을 거고, 또…….
해원은 지훈의 엉덩이가 허벅지에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잡아당긴 다음, 쭉 뻗은 다리를 잡아 벌렸다.
“참 나쁜 친구였네요. 하지만, 그 정도야 제가 찾을 수 있을 것 같은데.”
“그럴 수, 있…, 아, ―후읏!”
“찾은 다음에는요?”
가볍게 발기한 성기를 손에 쥐자마자 지훈의 허리가 살짝 들떴다. 움푹 들어간 복근 역시 핥다 못해 깨물고 싶을 정도로 선명해졌다. 밝은 갈색 눈동자 위로 욕정이 어렸다.
“아, 히익, 흣, 잠깐, 잠깐, 만….”
“응? 지훈 씨. 당신 친구, 찾은 다음엔 어떻게 해 줄까요.”
“으응, …읏, 흐앗!”
“원하는 게 있으면 말해요. 뭐가 됐든 들어줄 테니까.”
계속되는 채근과는 달리 해원의 행동은 답을 구하는 것과는 거리가 먼 것들뿐이었다. 같은 남자의 앞에서 단 한 번도 열린 적 없는 다리를 벌려 누르고, 선액을 흘리는 성기를 잡아 흔들고. 때로는 강압적으로, 또 때로는 애태우듯 움직이는 자극 앞에서 음탕함과는 거리가 멀었던 목소리가 한없이 높아졌다.
하지만 가장 반응이 거셌던 건 제법 두둑하게 잡힐 정도로 발기한 기둥의 끄트머리를 괴롭히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아, 흐아앗, 아!”
지훈은 갈라진 귀두 끝을 엄지손가락으로 긁거나 손가락 사이에 기둥을 끼운 채 잡고 문지를 때마다 어찌할 바 모르고 허리를 뒤틀어댔다.
완연한 사내의 몸으로 흔한 자위조차 해 본 적 없는 숫된 반응을 보인다는 게 얼마나 아랫배를 땅기게 하는지. 해원은 지훈이 어떤 쾌감에서도 도망치지 못하도록 허벅지가 상체에 닿을 만큼 치켜들게 한 다음 그대로 단단히 고정해 눌렀다.
“흑……!”
성기가 붙잡힌 것으로도 모자라 꽉 다물어진 입구까지 적나라하게 드러난 순간, 지훈이 꼭 목 안에서 울리는 듯한 신음을 냈다. 알코올과 뒤섞인 쾌락에 이성이 녹아내린 채로도 본능적인 수치심을 느낀 탓이었다.
해원의 시선 역시 제가 깊게 꿰뚫을 입구로 끈적하게 달라붙었다. 퍼런 힘줄까지 돋은 성기를 잡고 흔들 때마다 움찔대는 주름은 손가락 하나도 먹기 버거울 정도로 좁아 보였다. 긴 눈매가 즐겁다는 듯 가늘어졌다.
“히익, ―하, 아아, 흐으읏!”
연하디연한 틈새로 따뜻하고 축축한 살덩이가 닿고, 이내 바짝 힘이 들어간 주름을 노골적으로 할짝거리기 시작했다.
지훈은 꼼짝달싹할 수 없게 짓눌린 채로도 허리를 들썩여댔지만 별 도움은 못 됐다. 그 미칠 듯한 감각에서 도망칠 수 있기는커녕, 손으로는 성기를 잡아 흔들고 입으로는 구멍을 희롱하기 시작한 해원을 즐겁게 했을 뿐이다.
“아, 흐윽, 제발…!”
완연한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혀가 고집스레 입을 다문 주름을 하나하나 찌르고 더듬을 때마다 단정한 얼굴이 눈에 띄게 무너져내렸다. 지훈은 머릿속을 하얗게 물들인 자극의 이름을 제가 아는 어떤 단어로도 정의할 수 없었다. 온몸에 옅은 전기가 흐르는 듯 간지럽다가도, 발가락 끝까지 힘이 바짝 들어가 곱을 정도로 기분 좋기도 했다.
해원이 제가 들어갈 입구에서 혀를 떼어낸 건 의미 없는 반항을 포기한 지훈이 옅게 흐느끼기 시작한 때였다. 그는 살면서 처음 겪어 본 종류의 쾌감에 놀라 훌쩍이는 지훈의 허벅지를 달래듯 쓰다듬었다.
“이건 그만할게요. 자아, 내 쪽 봐 볼래요?”
얼굴은 물론 목과 가슴까지 발갛게 물든 지훈은 숨을 헐떡이면서도 말을 잘 들었다. 그런 순종을 칭찬하듯 해원은 제가 충분히 적신 구멍으로 천천히 손가락을 밀어 넣기 시작했다. 미끌미끌한 살덩이와는 또 다른 느낌의 침입에 지훈이 히익, 하며 어깨를 움츠렸다.
“지훈 씨. 앞으로도 도움이라곤 안 될 쓰레기 같은 건, 당신 발목을 잡는 일이 생기기 전에 내가 완전히 치워 줄게요.”
앞서 듣지 못한 질문의 답을 대신 내는 목소리는 퍽 다디달았다. 그 안의 내용과는 별개로 말이다. 해원은 손가락을 기분 좋게 조이는 따뜻함을 즐기며 본격적으로 길을 넓히려고 했다.
그러나 보다 먼저, 권지훈이 내는 소리라면 제 숨소리보다 예민하게 듣는 남자의 귀에 들어온 작은 중얼거림이 있었다.
“하아…, 흑, ―안, 돼.”
해말갛다 못해 투명한 느낌마저 드는 얼굴 위로 선명한 의아함이 떠올랐다.
“왜? 지훈 씨 믿음을 다 짓밟은 새끼잖아요. 죽고 싶을 만큼 힘들게 한 건 돌려줘야 하지 않나.”
“그래도. 그래도…, 안 돼.”
고운 미간이 희미하게 찌푸려졌다. 해원은 입력된 명령어를 이해하지 못한 인형처럼 몇 초 정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아무리 기다린다 한들 어떤 번복도 없었다.
좁은 구멍 안에 쑤셔 박은 손가락이 과감하게 움직이기 시작한 건 그 순간이었다. 흠뻑 젖은 채로 쭈걱쭈걱 부끄러운 소리를 내는 입구를 노골적으로 벌리는 손길은 어쩌면 투정처럼도 보였다. 고작 손가락 몇 개에 흉곽의 모양이 도드라질 정도로 헐떡이는 지훈을 내려다보던 해원의 입이 열렸다.
“그럼 팔이나 다리라도 하나쯤 못 쓰게 만들게요. 이건 괜찮겠지.”
할 수 있는 최대한의 배려라는 듯한 말투였다. 물론, 실제로도 ‘이것만큼은 양보 못 해.’라고 생각하기도 했다. 제가 뒤쫓지 않았더라면 끔찍한 선택을 했을 수도 있는 권지훈이라니. 해원의 머릿속에는 그런 걸 이해할 수 있는 영역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 때였다. 단추를 모두 푼 채 가볍게 걸치고만 있던 셔츠 깃이 휙, 한쪽으로 쏠린 건.
“……안 돼.”
“…….”
“안 되는 건…, 안 되는 거야.”
끌려가지 않으려고 했다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다. 그러나 해원은 어떤 저항도 하지 않았다. 처음으로 권지훈이 자기 의지로 저를 잡아당긴 순간인데. 감히, 할 수 없었다.
순식간에 숨이 닿을 만큼 가까워진 지훈은 시선이 바로 마주치자 파들파들 떨면서도 저를 피하지는 않았다. 가엾고도 먹음직스러운 용감함이었다. 여유를 찾은 해원은 퍽 느긋하게 지훈을 탐색했다. 발갛게 열이 오른 뺨과 목덜미. 제대로 몸을 가누지도 못하면서도 기어이 제 옷깃을 움켜쥔 손. 시선이 바로 마주치자 파들파들 떨면서도 저를 피하지는 않는 검은 눈동자까지.
솔직히 신기했다. 저 주먹만 한 머리를 열어서 다리를 벌리다 못해 뒤로는 제 손가락을 집어삼킨 채로도 개의치 않고 명령하는 사고회로를 확인하고도 싶었다.
하지만, 가장 큰 문제는 이런 억지마저 기꺼이 들어주고 싶은 저 자신이다. 확실히 제가 망가진 건 권지훈 때문인 게 분명하다. 해원은 지훈이 알면 억울해할 확신을 했다.
“……다음에 할 때는 젤을 준비해 둘게요. 지훈 씨랑 섹스하는 걸 너무 많이 상상하다 보니까 여기가 안 젖는다는 걸 깜박했어요.”
“흐윽….”
“아닌가. 잘 젖은 것도 같고.”
바지춤을 내리고 공들여 풀어놓은 입구와 골 사이로 흉흉하게 일어선 지 오래인 성기를 문지르자 지훈은 슬금슬금 엉덩이를 뒤로 빼려고 들었다. 본능적으로 그다음을 직감한 탓이다. 해원이 마른 입술을 혀로 적시며 낮게 웃었다.
“―아, 흐으읏!”
혀로, 또 손가락으로 한참이나 틈을 벌려 만든 틈새는 오랜 수고가 무색하게 굵은 기둥을 절반밖에 받아먹지 못했다. 하지만 어느 쪽이든 실망할 건 없었다. 절반의 삽입이라 한들 전립선을 잔뜩 짓누르기엔 부족함이 없었고, 애초에 서해원은 지훈의 고갯짓만으로도 미칠 수 있는 인간이었으니.
“지훈 씨. 지훈 씨는, 내, 상상 따위보다, ―하, 훨씬 더 야한 거 같아요.”
“앗, 으응, …잠, 깐만, 아!”
한없이 금욕적일 것만 같은 남자가 입으로, 또 뒤로 내는 젖은 소리란 세상 그 어떤 교성보다 음란했다.
지훈은 굵고 단단한 기둥이 제 어딘가를 꿰뚫고, 또 아슬아슬하게 스칠 때마다 고개를 젖히며 몸을 떨었다. 온몸의 신경이 저를 침범한 부위에 집중되다 못해 이어진 내벽으로 상대의 맥박까지 느껴지는 것만 같았다.
푹푹 처박히는 압박감만으로도 벅찬 상황에서 사정을 참을 여유나 이성 같은 건 없었다. 지훈은 해원의 성기가 전립선을 꾹꾹 짓누를 때마다 진한 정액을 부끄러움조차 없이 줄줄 싸 댔다. 자세가 자세인 터라 지훈의 가슴과 배는 물론이고 옅은 땀이 맺힌 해원의 아랫배까지 뿌연 욕망으로 함께 흐려졌다.
서해원은 그 광경에 완벽하게 흥분했다.
“아, 흑……!”
이 따뜻한 곳으로 완전히 들어가면 어떤 기분일까. 지금도 이렇게나 좋아하는데, 그저 넣는 것만으로도 사정하고, 빌고, 매달리게 될까? 저 반듯한 얼굴로 제게 매달리는 권지훈이라니. 상상조차 되지 않는 미래를 그저 가정하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당겼다.
해원은 쾌감에 달달 떨며 입까지 벌린 지훈의 안으로 제 것을 좀 더 깊숙이 집어넣었다. 그렇지 않아도 좁디좁은 내벽은 지훈이 울컥 사정할 때마다 불규칙적으로 조이기까지 하며 등줄기를 찌릿하게 했다.
하지만, 이 기분 좋은 안에 제 것을 쏟아내기에는 아직 일렀다.
“―지훈 씨. 엎드려요.”
맑은 갈색 눈동자 위로 무서울 정도로 선연한 욕망이 어렸다. 그걸 발견한 지훈은 머릿속이 쾌락에 점멸하는 와중에도 저도 모르게 숨을 참았다.
* * *
지훈은 같은 날 두 번째로 보는 낯선 천장 앞에서 눈만 깜박였다.
매일 밤 불면으로 고생한 지 반년. 제가 이렇게나 쉽게 잠들 수 있는 사람인 줄 몰랐다. 믿을 수 없지만, 또 잤다. 그것도 하룻밤을 함께 보낸 낯선 남자의 품에서, 정말 어이없을 정도로 푹.
느지막이 일어났을 때만 해도 옷가지로 엉망이었던 바닥은 먼지 하나 없이 깔끔했다. 태평하게 ‘같이 더 자고 나중 일은 그다음에 생각하자’라던 서해원은 한참 전에 먼저 일어난 모양이었다.
[편하게 갈아입고 기다리세요.]
메모가 아니라 작게 프린트한 쪽지라고 해도 믿을 정도로 반듯한 필체였다.
지훈은 머뭇머뭇 침대 발치에 잘 개어진 새 옷들을 하나씩 펼쳐보았다. 보드라운 스웨터 위에서는 은은한 향이 났다. 반사적으로 그 위에 코를 박았던 그는 머잖아 저와 밤을 보낸 남자에게서 이것과 같은 체향이 났다는 걸 깨달았다. 순식간에 눈가가 뜨거워졌다.
“―무슨 생각하는 거야, 진짜!”
지훈은 구겨진 셔츠를 벗어 던진 다음 준비된 옷을 얼른 꿰입었다. 깔끔하게 포장된 새 속옷에 슬리퍼까지. 민망할 정도로 완벽한 준비였다. 분명 고마운 일이기는 했지만, 덕분에 의아함 역시 더 커졌다.
분명 서해원. 그 남자는 저를 꽤 잘 아는 것 같았다.
아니, 잘 알다뿐일까?
‘……다음에 할 때는 젤을 준비해 둘게요. 지훈 씨랑 섹스하는 걸 너무 많이 상상하다 보니까 여기가 안 젖는다는 걸 깜박했어.’
아무리 생각해도 저런 눈에 띄는 남자와 얽힌 기억이 없건만, 그 욕정 가득한 말은 분명 진심이었다. 지훈은 거실로 향하기 전 벌겋게 열이 오른 얼굴을 몇 번이나 문지르며 심호흡했다.
이성이 돌아오면 돌아올수록 아득하지 않은 게 없었다. 당장 머무를 집. 무단결근한 회사. 거기에 저를 잘 아는 듯한 남자와 보낸 하룻밤.
그러나, 그건 다소 이른 걱정이었다.
“일어나셨습니까.”
거실에서 집주인 대신 지훈을 맞은 말쑥한 차림의 사내는 ‘김 비서’가 분명했다. 깍듯한 인사 속에서 침실이 떠나가라 외치던 목소리를 짚어낸 지훈은 뻐근함에 구부정했던 자세를 얼른 바로 했다.
하지만 이불 속의 상대가 아닌 척하려던 서툰 연기는 시도도 전에 실패로 돌아갔다.
“지훈 님, 마실 것이라도 드릴까요?”
“예? ……아, 예. 부, 부탁드립니다.”
“녹차나 커피도 있습니다만, 아무래도 오래 주무시고 나오셨으니 물로 드리겠습니다.”
세심하기 짝이 없는 배려였지만 창피함에 혀가 꼬부라지는 기분이었다. 같은 남자와 정신없이 뒹군 것으로도 모자라 늘어지게 늦잠까지 자고 나온 저를 어떻게 생각할까, 심란하기도 했다.
그러나 조심스럽게 접시에 받친 물을 건넨 김 비서의 눈에 어려 있는 건 어떤 부정적인 감정도 아니었다. 오히려 참을 수 없이 삐죽삐죽 올라오는 호기심에 가까웠다.
어차피 이렇게 된 거 모르는 척하기가 더 힘들다. 겨우 목을 축인 지훈은 먼저 말을 걸었다.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까?”
설마 이렇게 곧장 물을 줄은 몰랐다는 듯 내내 응대에 능숙했던 얼굴이 처음으로 삐걱거렸다. 잠시 뒤, 지극히 신중하고 조심스러운 질문이 돌아왔다.
“정말 외람된다는 걸 압니다만… 혹, 저희 변호사님은 어떻게 만나셨는지 여쭈어봐도 될까요.”
뻔히 예상 가능한 질문이었음에도 말문이 막힌 건, 모든 걸 털어놓고 싶지는 않지만 그렇다고 말을 꾸며내는 것도 내키지 않아서다. 지훈은 물컵 표면에 가볍게 맺힌 물기를 손가락 끝으로 그리며 몇 초 정도 침묵했다.
“오늘 새벽에… 마포대교 위에서 만났습니다.”
“네?”
“제가 떨어져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을 테니까 웬만하면 같이 살자고 하시던데요.”
지훈이 택한 대답은 어떤 꾸밈도 없는 담백한 진실이었다. 단, 비서가 물은 것 이상은 굳이 말하지 않으면서 어쩌면 농담처럼 넘어갈 수도 있을 만큼 가볍게. 사실 후자는 개인적인 바람에 가까웠지만 말이다.
하지만 아쉽게도 지훈은 제가 내놓은 말에 대한 비서의 반응을 채 다 확인할 수 없었다.
“아. 일어났네요. 지훈 씨, 몸은 어때요. 걸을 수 있겠어요?”
발소리조차 내지 않고 성큼성큼 걸어온 해원은 머릿속에 흐릿하게 남아 있는 기억보다 훨씬 더 커다란 느낌이었다. 아니, 좀 더 분명히는 시선이 마주치는 순간 움찔할 정도의 위압감을 느꼈다는 게 정확하다.
그건 단순히 키나 체격 때문만은 아니었다. 애초에 지훈 역시 180cm의 키로 어디 가서 작다는 말 같은 건 단 한 번도 들어본 적 없다.
“……괜찮습니다. 저, 그런데―”
“다행이다. 우리 같이 갈 곳이 있거든요. 이것부터 처리한 다음, 맛있는 거나 먹으러 갈까요?”
최소한 지훈의 기억 속에선 만난 지 하루도 채 되지 않은 남자라는 게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친근한 어투였다.
하지만 지훈은 배시시 접힌 눈매를 보고도 마주 웃어 주지 못했다. 렌즈를 끼기라도 한 건가 싶을 정도로 밝고 또 맑은 갈색 눈동자가 조금은 섬뜩할 정도로 저를 뜯어 살피는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걸리는 건 묘한 단어 사용이다. 처리라니.
“어딜… 가자는 겁니까?”
“가 보면 알 거예요.”
해원이 꼭 선물이라도 앞둔 사람처럼 대답했다.
* * *
그렇게 야반도주, 아니, 출근한 새 도망쳤으면 최소한 살던 곳보다 훨씬 좋은 곳으로라도 갔어야지. 지훈은 몇 명이나 거쳐 갔을지 모를 낡은 침대와 모서리가 닳은 책상을 보며 생각했다.
“나가 보세요. 필요하면 부를 테니까.”
“예. 알겠습니다.”
장소와는 어울리지 않는 경쾌한 지시였다. 경인을 가운데 끼고 석상처럼 서 있던 반듯한 슈트 차림의 사내들은 망설임 없이 허리를 숙이더니 곧장 자리를 떴다.
아직 짐이 다 정리되지 않아 너저분한 원룸 안으로 먼저 들어선 건 해원이었다. 구두조차 벗지 않고 뚜벅뚜벅 걸어 들어간 그는, 바짝 얼어 있는 경인의 어깨를 붙잡아 지훈을 마주 보게 했다. 그렇지 않아도 체구가 작은 편인 경인은 해원에게 붙들리자 꼭 거대한 거미에게 잡힌 먹잇감처럼 보였다.
“자. 인사하세요. 반갑지 않아요? 평생 다시 안 볼 기세로 도망쳤는데, 하루 만에 다시 만나다니.”
두려움, 놀람, 당혹, 체념, 그리고 수치. 오랜 친구의 얼굴에서는 온갖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하나같이 어제 아침 “나 출근할게. 뭐 필요한 거 있어? 들어올 때 사 올게.” 했을 때 대답 대신 어깨를 으쓱하던 경인에게서는 볼 수 없던 것들이다.
현관에 우두커니 서서 성인 남자 둘만으로도 꽉 차다 못해 버거운 원룸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지훈의 입이 툭 열렸다.
“여긴 얼마짜리야.”
“……어, 어어?”
“여긴 보증금이랑 월세 얼마냐고.”
경인이 대답을 머뭇거렸다. 물론, 그 망설임은 오래 가지 못했다. 어깨를 움켜쥔 커다란 손으로 뼈를 으스러트릴 듯한 힘이 들어갔기 때문이었다.
“―다, 단기 임대라서 보증금 없이 월세만 내. 40만 원….”
“1억 있잖아. 그건?”
산 넘어 산이었다. 간신히 열렸던 입은 다시 꾹 맞붙었고, 해원의 손등 위로도 그 시간에 비례한 만큼의 뼈대가 그려졌다.
초조하게 어쩔 줄 모르던 경인이 다시 변명을 이어간 건 숨이 턱 막힐 정도의 악력에 목이 거북이처럼 말린 뒤였다.
“그건, 어, 투자 때문에 다른 곳에 묶어두는 바람에―”
“유경인.”
“…….”
긴 설득은 필요 없었다. 함께 지낸 시간만큼 상대의 속이 들여다보였던 탓이다. 좁고 낡은 원룸 안으로 짧은 적막이 흘렀다
그리고 머잖아 유독 너덜너덜했던 하루의 끝, 간신히 집에 발을 디뎠던 지훈을 세상의 끝으로 몰았던 이유가 흘러나왔다.
“대출…이 조금 있어서. 그거 갚는 데 썼어.”
“…….”
“지, 진짜 원래는 얼마 안 빌렸었어! 그런데 가끔 급전 때문에 돌려막다 보니까, 정신 차려 보니 원금보다 이자가 더 많아져서. 그래서…….”
낯선 이들이 들이닥쳐 붙들고 있어도 경찰에 신고는커녕 잔뜩 움츠러들어 있던 이유가 나왔다. 하다못해 정상적인 돈도 아니었구나. 지훈은 직감했다.
“지, 지훈아. 사실 나도 오늘 내내 너한테 연락하려고 했거든? 그런데, 정말 면목이 없어서 엄두가 안 났어. 정말 미안해. 그런데 진짜! 이번엔 제대로 수익 내서 연락할 생각이었어. 아, 아니. 수익이 아니더라도― 어디 취업이라도, 아니 알바라도 구해서.”
지훈은 경인을 친구보다는 형제처럼 생각했었다.
한때는, 서로 그랬다.
심지어 각자의 가족과도 안면을 트다 못해 명절에 함께 시간을 보낸 적도 많았다. 그건 두 사람 모두 외동이어서만은 아니었다. 가치관이 통했고, 비슷한 생각을 했으며, 앞서거나 뒤설 때도 상대를 응원하고 축복할 수 있어서였다.
하지만 이제 그 오랜 인연의 끝이 눈앞에 있다.
“……내 물건들만 돌려줘.”
“어?”
“어디에라도 뒀을 거 아니야. 여기에 다 들어가지도 않는데.”
지훈은 팔짱을 낀 채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인 해원의 눈썹이 꿈틀하는 걸 못 본 척했다. 그는 입꼬리를 가볍게 올리긴 했지만 어딜 봐도 물러터진 처분이 마음에 안 든다는 표정이었다.
솔직히 지훈도 저 자신이 우스웠다. 네가 그럴 여유가 어디 있냐, 권지훈. 당장 내일 출근도 막막한 주제에. 턱밑까지 한숨이 치밀어올랐다.
동정심 때문은 아니다. 그보다는, 세상 모든 것이 즐겁기만 했던 때부터 닳고 닳아가는 지금까지 이어온 시간을 더는 훼손하고 싶지 않았던 것에 가깝다.
또 약간의 책임감을 느꼈을지도 모르겠다. 경인이 투자를 빙자한 소모에 가진 돈을 모두 털어 넣는다는 걸 알았다. 점점 경제적으로 허덕이기 시작하는 걸 눈치채고도 모르는 척했다.
친구의 자존심을 지켜주기 위함은 아니었다. 진지하게 마주 보고 앉아 미래를 이야기하기엔 제 오늘이 터무니없이 버거웠기 때문이다. 그래서 대화 대신 월세를, 휴대폰 요금을, 한 달의 생활비를 내주곤 했었다. 이거면 되겠지, 스스로에게 중얼거리면서 말이다. 사실 그렇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오늘은, 그 결과다. 그러니까 제 끔찍한 하루를 가끔이나마 털어놓을 수 있던 순간과 돈을 맞바꾼 셈 치자. 지훈은 요동치는 마음을 억누르며 거듭 말을 이었다.
“유경인. 어딨냐고, 내 짐은.”
“그러니까, 지훈아. 그게 말야.”
하지만 소위 십년지기였던 인간은 간신히 쥐어짜낸 마지막 노력조차 짓밟을 모양이었다.
“……파, 팔았어.”
최대한 담담한 척하던 지훈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뭐?”
“보, 보다시피 자리가 넉넉하지 않아서. 팔 수밖에 없었어.”
‘팔 수밖에 없었다’. 마치 원하지 않는 일을 억지로 해야 했다는 것처럼 책임에서 한 발 떼어내는 표현이었다.
“하루 만에?”
“어? 어어, 응. 어쩌다 보니까…….”
“‘어쩌다 보니까’ 하루 만에 가전, 가구, 옷. 그 많은 것들을 다 팔았다고? 어떻게?”
“…….”
“묻잖아, 유경인. 어떻게 그랬냐고.”
애초에 즉흥적인 결정이 아니라는 건 알고 있었다. 한 달도 전부터 월셋집 재계약을 했다고 말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거기에 아예 제 물건을 싹 처분할 계획까지 함께 있었을 줄은 몰랐다.
오랜 친구, 아니 오랜 친구였던 사람의 침묵 앞에서 지훈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쳐들었다. 천장 구석을 물들인 누런 얼룩이 눈에 들어왔다. 몇 번이나 빗물이 젖었다 마르기를 반복하며 생긴 흉터 같은 자국이었다. 수없이 겹쳐진 그것은 아예 뜯어내지 않는 이상 누수를 찾을 수 없을 터였다.
꼭 지금의 저처럼.
지훈은 얼룩을 노려보면서 입을 열었다.
“―말 못 하겠다면, 법대로 하면 되겠네.”
“뭐?”
“서해원 변호사님. 도와주시겠습니까?”
원룸 안에 있는 건 단 두 사람뿐이니 부르는 사람도, 듣는 사람도 이름을 헷갈릴 일은 없었다. 하지만 대답은 한 템포 늦게 흘러나왔다.
“……얼마든지요.”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였다. 지훈은 그제야 천장에서 시선을 떼고 저를 무서울 정도로 똑바로 보고 있는 남자를 마주 보았다. 달을 떼어다 박아 넣은 듯한 연갈색 눈동자가 묘하게 빛나고 있었다.
“제 돈이랑 손해배상 다 토해낼 때까지 가능한 방법은 다 쓰고 싶습니다. 합의 같은 것 없이요.”
“다행히 제가 그런 걸 참 잘해요.”
“감사합니다. 부탁드리겠습니다.”
지훈이 꾸벅 허리를 숙였다. 이곳을 앞서 빠져나갔던 슈트 차림의 사내들보다 더 정중하고 깍듯한 인사였다. 그리고 미련 없이 뒤를 돌았다. 현관에 서서 원룸으로는 한 발짝도 들이지 않았던 터라 떠나기 역시 쉬웠다.
그 냉랭함에 당황한 건 유경인이었다.
“지훈아, 야아, 잠깐만. 응? 잠깐 내 말 좀 들어 봐. 지, 지훈아! 지―…, 악!”
막상 정말 붙든다고 해도 더 이어질 수 없을 공허한 변명은 몇 초 지나지 않아 외마디 비명과 함께 끊겼다. 정확히는, 경인이 순식간에 무릎이 꺾인 채 너저분한 바닥으로 푹 고꾸라졌다.
눈앞이 하얗게 변하는 짧은 통증이 지나고 가장 먼저 눈에 들어온 건 먼지 하나 말끔한 구두코였다.
“사실 난 법대로 하는 걸 그리 좋아하지 않아.”
경인은 일그러진 표정으로 위를 올려다보았다. 하지만, 위압적일 정도로 장신인 남자는 발치에 구겨진 채로는 얼굴조차 제대로 볼 수 없었다. 낮고 사근사근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해야 할 것도 많고, 시간도 오래 걸리고.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최종 판단을 내가 아닌 다른 사람이 내린다는 것도 짜증 나고 말이야.”
“…다, 당신 대체 뭐….”
“들었잖아. ‘서해원 변호사님’.”
끼이익. 낡은 의자는 무게가 실리자 바퀴가 달려 있는데도 듣기 싫은 소리가 났다. 경인은 저도 모르게 아릿한 어깨를 작게 움찔했다. 저를 무릎 꿇린 남자를 처음으로 똑바로 볼 수 있었던 것도 바로 그 순간이었다.
“아― 저렇게 귀여운 부탁을 감히 내가 어떻게 거절하겠어.”
“…….”
이상했다. 분명 상대는 의자에 앉아 눈높이가 낮아졌는데도 전혀 가까워진 느낌이 들지 않는다는 건. 경인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왠지 모르게 들떠 보였다. 남자는 추레한 공간과는 어울리지 않는 눈웃음을 치기도 했고, 도톰한 입술을 깨물어 입꼬리를 잡아 누르기도 했다. 심지어 조금 전까지만 해도 제 어깨뼈를 으스러트리려고 했던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는 모습은 또 어떤지. 하얀 뺨에 물든 분홍빛 기운이 착시인가 싶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긴장 어린 관찰은 거기까지였다.
남자, 서해원은 문득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달콤한 기운을 싹 지우더니 그린 듯한 눈썹을 찌푸렸다.
“상환 계획 좀 짜 보자. 답 없으면 뭐라도 뜯어 팔면 되겠지.”
* * *
정말 이상한 하루다.
끔찍한 하루라고 칭하기엔 묘한 해방감이 있고, 좋은 하루라고 하기엔 까딱하면 극단적인 선택을 했을지도 몰랐다. 그러니 가장 어울리는 건 ‘이상하다’일 거다.
짧은 복도까지는 꼿꼿한 자세로 걸어 나왔던 지훈은, 엘리베이터 없는 빌라의 계단 중간에서 별안간 크게 휘청였다.
“하아…….”
가까스로 손잡이를 잡은 덕분에 굴러떨어지는 일만은 피했지만 그렇다고 멀쩡한 건 아니었다. 심장은 무서울 만큼 빠르게 뛰었고, 손도 옅게 떨렸다. 반듯했던 몸 역시 서늘한 계단 위로 푹 꺼졌다. 지훈은 몸을 웅크린 채로 심호흡을 반복했다. 하지만 가슴께 어디가 꽉 막힌 듯 답답한 감각은 여전했다.
그 때였다.
“권지훈 씨?”
오늘 하루를 이상하게 만든 장본인의 목소리였다. 늘어져 있던 지훈은 거기에 담긴 제 이름을 듣자마자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려고 했다. 하지만 그 시도는 어설픈 들썩임으로 끝났다. 구두 굽이 바닥에 부딪히는 소리가 급하게 이어졌다.
“죄송합니다. 다리에… 힘이 풀려서.”
“다치지 않은 게 중요하죠. 그런데, 잠깐만.”
순식간에 곁으로 다가온 해원이 곧장 제 코트를 벗었다. 그러고는 반듯하게 접어 돌계단에 바로 앉은 지훈에게로 가져다 댔다.
“이 위에 앉으세요.”
“예? 아닙니다. 이렇게까지 해 주실 필요는―”
“아직 허리 불편하잖아요.”
“…….”
“내가 그렇게 한 거니까 이 정도는 허락해 줄래요?”
창백했던 지훈의 귓가가 순식간에 붉어졌다. 몸 상태가 유독 좋지 않았던 이유를 새삼 다시 깨달은 탓이다. 또, 상냥하지만 물러섬 없는 말에 담긴 의미 역시.
값비쌀 것이 분명한 모직 코트를 깔고 앉는 걸 마다할 핑계는 모두 사라졌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힘이 들어간 허벅지 사이를 바짝 붙인 채로 머뭇머뭇 입을 열었다.
“저……. 말 맞춰 주셔서 감사합니다.”
“네?”
“안에서 한 얘기는… 그냥 해 본 소리였습니다. 그렇게 겁을 줘야 뭐든 하는 녀석이라.”
민망함을 무릅쓰고 꺼낸 말이건만, 해원은 예상하지 못한 말을 들었다는 듯한 표정이었다.
“겁만 주다뇨. 난 진심인데요?”
“그래도―”
“조만간 지훈 씨 돈은 한 푼도 빠짐없이 돌려받게 해 줄게요. 걱정하지 마세요.”
살면서 이런 장소의 계단을 밟아볼 일조차 없었을 것 같은 남자는 어느새 자연스럽게 옆을 차지하고 앉아 있었다.
사실 지훈은 그에게 묻고 싶은 게 한둘이 아니었다. ‘저를 아시는 거 같은데, 어디서 뵀었죠?’, ‘새벽에 마포대교 위에서 만난 건 우연이었습니까?’……. 그러나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지훈이 고른 선택지는 가장 담백하고 또 현실적인 것이었다.
“서해원 변호사님. 혹시, 제 휴대폰 가지고 계십니까?”
“네. 지훈 씨는 가지고 있어 봤자 계속 들여다보면서 쓸데없는 걱정이나 할 것 같아서요.”
“…….”
“드릴까요?”
귀를 의심할 정도로 뻔뻔하기 그지없는 대답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망설임조차 없이 흘러나온 말에 어떤 반박조차 하지 못했다. 심지어 내심 인정마저 했다. 지금 같은 상태로 회사 사람들에게 치였다면 정말로 무너져 버렸을지도 모르겠다고 말이다.
짧은 침묵을 내버려 두던 해원의 말이 이어졌다.
“상급자에게는 들키지 않도록 교묘하게 괴롭히는 사수. 그리고 그 모든 걸 모르는 척 눈 감는 동기들.”
지훈은 저도 모르게 몸을 흠칫 떨었다. 다정함을 품은 나직한 목소리는 멈추지 않고 계속됐다.
“실수였다면서 온갖 알림에서 누락되는데 정작 평가가 떨어지는 건 지훈 씨인 ‘거지 같은 회사’. 휴대폰 진동만 들어도 스트레스받는다면서요.”
“……저 정말 별소리를 다 했군요.”
“그 얘기만 했을까. 취하고 싶어서 일부러 소맥으로 마셨다는 말부터, 서울에는 왜 이렇게 맛있는 단팥빵이 없냐면서 30분 넘게 빵 이야기만 했어요. 그러다가―”
“아, 제발요.”
해원의 맑은 웃음소리가 퀴퀴한 벽에 부딪혀 울렸다.
조금 전과는 다른 의미로 얼굴에 열이 오른 지훈은 무릎에 얼굴을 반쯤 묻은 채 그를 곁눈질했다. 이상한 하루를 만든 이상한 남자 때문일까. 덩달아 그 이상함이 전염된 것 같았다. 같은 남자와 섹스한 것으로도 모자라 그와 나란히 앉아 제 인생의 가장 최악의 단면을 농담하듯 이야기하고 있다니. 정말 미쳤다고밖에 말할 수 없다.
하지만, 그 어떤 말이라도 들어주겠다는 듯 조용히 눈을 휘어 웃어 주는 얼굴을 보고 있으면 저도 모르게 입이 열렸다. 고등학생 때부터 함께한 친구에게조차 어쩌다 가끔 술을 힘을 빌려야만 털어놓을 수 있었던 속마음인데 말이다.
“정말…… 힘들게 한 취업이었습니다.”
“…….”
“힘들게 회사에 들어간 만큼 정말 열심히 했고… 그래서 사수가 보고서를 가로채는 걸 견디기 힘들었던 것 같기도 합니다. 내가 노력한 결과인데, 하고.”
명함 속 정보 말고는 아는 것 하나 없는 남자의 시선이 닿는 게 느껴졌다. 지훈은 그의 눈을 똑바로 보는 걸 피한 채 느릿느릿 말을 이어갔다.
“그냥 계속 모르는 척해야 했나, 벌써 몇백 번, 아니 몇천 번이나 생각해 보기도 했는데요. 정작 그 상황으로 돌아가면 같은 선택을 할 것 같습니다.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걸까요.”
울컥 뜨거운 것이 턱밑까지 치받았다. 크게 들이켠 한숨 뒤에 들끓는 감정을 숨겨 보려고 했지만, 그마저도 덜덜 떨려서 분명 다 들키고 말았을 거다.
“남들은 다 잘만 다니고 있는데. 1년 넘게 고생하다 직장 구했다고 어머니도 엄청 기뻐하셨었는데…… 왜 저만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습니다.”
마지막 중얼거림은 거의 스스로에게 내뱉는 핀잔이나 다름없었다.
해원은 둥그렇게 몸을 웅크린 지훈의 모든 것을 눈에 새기고 귀에 담았다. 옅게 떨리는 까맣고 긴 속눈썹, 푸른 힘줄이 튀어나올 정도로 움켜쥔 주먹, 침착해지려고 애써서 더 가여운 숨소리까지.
권지훈은 참 여전했다. 휘어질지언정 부러지고, 입에 발린 말이나 아부 따위도 못 하고. 하지만 그만큼 약하고 작은 것들을 아끼며 또 아무 이유 없이 사랑한다.
그런 지훈과 소위 서열대로 굴러가는 분위기의 회사는 지독할 정도로 맞지 않았을 거다. 요령 없이 반듯하고 정직한 사람과, 이유 없는 불만과 열등감에 차서는 계급 놀이를 하는 인간들의 궁합이 좋았을 리가 없다.
아니, 사실 지훈의 반대쪽에 있는 사람들은 꽤 즐겁긴 했을 거다.
권지훈은 회사의 울타리를 제하고 보면 감히 비슷한 경쟁 대상에 설 수조차 없는 잘나디잘난 남자다. 그런 사람을 짓밟고 움츠리게 하면서 빈약한 우월감을 채웠으리라.
“권지훈 씨.”
지훈의 어깨가 꾸중을 앞둔 아이처럼 움츠려졌다. 혼내려고 하는 게 아닌데. 해원은 살면서 한 번 내 본 적 없는 상냥하고 부드러운 목소리를 내려고 노력하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지훈 씨 어머님이요. 아들이 새벽 두 시에 한강 다리 위에 올라가는 것보다 잘 나가는 철강회사 직원인 게 더 중요한 분이세요?”
까만 눈동자 위로 순식간에 촉촉한 막이 어렸다.
일찍 돌아가신 아버지 없이 혼자 빵집을 운영하며 가계를 꾸린 어머니는 단 한 번도 지훈에게 ‘의젓해져야 한다’는 말을 한 적 없다. 오히려 언제나 어린 아들이 너무 일찍 철이 들까 걱정했을 뿐이다.
지훈은 새벽같이 일어나 가게로 나가면서도 집 안 곳곳에 애정 가득한 쪽지를 남긴 어머니의 온기 속에서 자랐다. 아낌없이 사랑하고 또 사랑받는 법을 배운 건 분명 어머니에게서다.
“……아뇨.”
“아니면, 그 회사에서 뼈를 묻어야만 낫는 병에라도 걸렸나요?”
지훈은 대답 대신 고개를 저었다. 한심하게 울먹이는 목소리가 나올 것 같아서였다.
“벌써 그 거지 같은 회사에서 1년 넘게 버텼고, 우울한데 할 게 없어서 틈만 나면 자격증 따고 토익 점수만 올렸다고 했잖아요?”
“…….”
“거기에 밑 빠진 독이던 동거인이 사라졌으니 금전적인 부담도 사라졌고, 떼먹힌 보증금까지 제가 다 받아다 줄 건데…….”
눈이 마주치자 짐짓 고민하듯 고개를 기울인 채로 말을 잇던 해원의 입가에 그린 듯한 호선이 걸렸다. 낡디낡은 건물의 계단조차 화사하게 만드는 미소였다. 지훈은 그 모습이 꼭 슬로우 모션처럼 하나하나 눈에 박히는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 때, 무언가 비밀스러운 말을 덧붙이겠다는 듯 해원의 고개가 가까워졌다. 지훈 역시 얼결에 그를 따라 몸을 붙였다. 그러자 따뜻한 온기가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내 작은 속삭임이 귀를 간지럽혔다.
“―장담컨대 그 능력에, 이 얼굴이면 당장 내일이라도 SJ 본사에 들어갈 수 있을걸요.”
결국, 지훈은 울먹울먹하면서도 기어이 웃음이 터져 버렸다. 이 상황에서 웃을 수 있다니. 당장 어제의 제게 지금을 말했다면 절대 믿지 않았을 거다. 하지만 상관없다. 바닥 없는 수렁에 빠진 것처럼 느껴지기만 하기보다는 웃는 쪽이 훨씬 나으니.
솜털이 간지러울 정도로 가까이 있던 남자의 숨이 가까워진 건 그 때였다.
촉, 부드럽게 맞닿았다 스칠듯한 거리를 두고 떨어진 입술은 깃털이 닿은 듯 부드러웠다. 지훈은 오뚝한 코가 닿을 정도로 가까이 있는 해원을 바라보았다. 재차 허락을 구하듯 기다리는 그에게서는 좋은 향이 났다.
다시 입술과 입술이 부딪히는 순간, 지훈은 눈을 감았다.
“응…….”
순식간에 입 안을 벌리고 들어오는 살덩이에 어깨가 반사적으로 떨렸다. 조금 전 정중한 입맞춤을 했던 상대라고는 믿어지지 않을 정도로 지독한 움직임이었다. 지훈은 그를 밀어내는 대신 고개를 기울여 탐욕스런 혀가 저를 마음껏 침범토록 내버려 뒀다.
같은 남자에게 뺨과 뒷목까지 감싸진 채로 키스를 받는 상황이 이상하다는 자각이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지훈을 사로잡은 감정은 신기함이었다. 닿는 것은 입술과 혀뿐인데 시종일관 여유로웠던 남자의 초조함이 온몸으로 선명하게 느껴졌다.
타액이 섞이고 또 부딪힐 때마다 젖은 소리가 급한 숨에 섞여 나왔다. 문득 해원의 성기가 제 몸 안에 처박히던 순간이 떠오른 건 그래서였을 거다. 애초에 따뜻하게 젖은 점막을 휘젓는 움직임을 반복한다는 점에선 근본적으로 닮은 행위다.
혀의 움직임이 농염해질수록 지훈의 무릎 역시 가볍게 튀기 시작했다. 머리를 흐물흐물하게 녹이던 열기가 서서히 아랫배를 중심으로 원을 그리듯 움직인 탓이다. 지훈은 아랫입술로 전해진 따끔한 통증 앞에서야 반쯤 풀린 눈을 가늘게 떴다.
“이다음은 차에서 할까요?”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서는 선연한 욕정이 묻어났다. 해원 역시 같은 생각을 한 게 분명했다. 지훈은 돌이킬 수 없는 갈림길 앞에서 잠시 숨을 골랐다.
이 순간부터는 어떤 핑계도 없다. 새벽의 자포자기도 아니고 이성을 마비시킨 알코올도 없다. 감히 그 무엇에도 기대 도망치지 못하게 될 거다. 지훈은 그 사실을 분명히 인지했다.
이상한 남자에게 휘말린 이상하기 짝이 없는 날.
지훈이 고른 건 마찬가지로 그 어느 때보다 이상한 선택지였고, 그는 이내 태어나 본 미소 중 가장 완벽한 것을 만났다.
* * *
키스, 그다음.
단단한 품에 반쯤 안겨 차로 오면서도 지훈은 제가 서해원과 함께할 행위가 무엇인지 정확히 알지 못했다. 애초에 동성과의 관계를 바랐다기보다는 저를 유일하게 잡아 준 상대를 밀어낼 마음이 들지 않아 휩쓸린 폭풍이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열에 들뜬 와중에도 하나쯤 신경 쓰이는 게 있기는 했다. 바로 차 옆에서 부동자세로 대기하던 슈트 차림의 고용인들이었다. 저 사람들은 뒷좌석에 나란히 올라타는 나와 서해원을 보며 무슨 상상을 할까. 지훈은 문을 채 완전히 닫기도 전 다시 부딪친 입술에 반사적으로 눈을 감으며 생각했다.
아랫입술을 깨물었다가 빨아들이고, 각도를 틀어 이번에는 윗입술. 다음은 그 안의 촉촉한 점막까지. 빈틈없이 닿고 있는데도 부족하다는 듯 매달리는 입맞춤은 키스라기보다는 호흡에 가까웠다. 입술이 맞닿고 혀가 섞이지 않으면 살지 못한다는 것처럼 급하고 또 필사적이었다.
“하아, 음…….”
지훈이 ‘정말 서해원과 뭔가를 하는구나.’를 새삼 깨달은 순간은, 암레스트를 걷어 올린 시트 위로 등이 닿을 때였다.
침대도 아닌 차 뒷좌석에서 슈트 재킷을 벗는 해원을 보고 있자니 제가 뭘 앞둔 건지 실감이 났다. 안온하고 적당했던 연애들 속에서 상대를 올려다본 적조차 거의 없었건만, 자연스럽게 다리 사이를 가르고 몸을 붙인 동성의 존재라니.
나도 스웨터를 벗어야 하나?
걷어 올리는 쪽이 나은가? 아니면, 그냥 가만히 있을까?
엄밀히 따지고 보면 서해원과 하는 게 처음도 아닌데 머릿속은 그 어느 때보다 엉망진창이었다. 하지만 그건 괜한 걱정이었다. 애초에 상대는 위에서부터 차근차근 내려오는 정석을 따를 생각이 없었으니 말이다.
“……아.”
“왜요. 가슴 빨아 주는 거 기대했어요?”
“예? 아, 아뇨! 그런 게 아니라―”
“기대대로 하면 재미없잖아요. 자. 허리 조금만 들어 볼래요?”
바지의 훅이 풀리고 지퍼가 내려가는 순간 저도 모르게 내뱉은 탄성에 해원이 빙긋 웃었다. 상황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싱그러운 눈웃음이었다. 저도 모르게 엉덩이를 조금 들어 바지와 속옷을 잡아 내리는 걸 도운 건 분명 그 웃음에 홀렸기 때문일 거다.
따뜻하다 생각했던 차 안의 온도는 날씨에 어울리는 옷을 입었을 때나 해당하는 일이었다. 민감한 맨살에 닿는 공기에 퍼뜩 정신을 차렸지만, 이미 하반신은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발가벗겨진 뒤였다.
다정한 명령이 이어졌다.
“다리도 더 벌리고.”
뒤늦게 밀려온 열기가 눈이 시릴 만큼 얼굴을 달궜다. 차 밖에 서 있는 사람들이 차 안을 들여다보면 어떡하지, 걱정도 됐다. 하지만 마지막으로 제 목을 얽맸던 셔츠의 단추를 몇 개쯤 풀고, 주름 하나 없이 반듯했던 소매의 커프스를 빼는 해원의 움직임은 물 흐르듯 매끄럽기만 했다.
떨림을 고스란히 품은 한숨이 지훈의 입에서 터져 나왔다.
분명히 이 낯설고도 수치스러운 행위를 멈추고자 한다면 지금이 마지막 기회였다. 못할 것도 없었다. 서해원은 말을 덧대어 채근하지도 않고, 힘으로 강압하지도 않는다. 분명 머리로는 그 모든 것을 알고 있다.
“흣…….”
“더 벌려요. 내가 볼 수 있게.”
허벅지가 천천히 옆으로 벌어지고, 벌어지면 벌어질수록 훤히 드러나는 성기와 엉덩이 틈새 사이로 해원의 시선과 손길이 닿았다. 스스로 선택한 행동을 되짚어 보기도 전에 이성을 훨씬 웃도는 부끄러움이 사고를 마비시켰다.
“아직 약간 부었네요. 이번엔 빨아도 넣는 건 어렵겠어요.”
모든 감각이 하반신에만 쏠려 극도로 예민해졌기 때문일까. 되레 머리로 가는 산소가 부족해진 느낌이었다. 지훈은 몽롱하게 풀린 눈으로 해원을 올려다봤다. 여린 피부가 통통하게 올라온 입구를 살살 원을 그리듯 만지던 남자가 간지럽게 웃었다.
“그렇게 아쉽다는 표정 지으면 곤란한데요. 난 지훈 씨가 아픈 게 아니라 좋아하는 걸 보고 싶거든.”
당연히 꺼냈어야 할 부정은 부끄러움에 혀가 말려 제때 튀어나오지도 못했다. 아니, 사실은 지금 제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아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는 게 정확할 거다.
정말 미친 거 같아. 지훈은 저 자신에게 중얼거렸다. 살며 처음으로 자진해서 선택한 일탈은 숨 막히게 다정하고, 수치스럽고, 또 기분 좋았다.
정말 맛있는 것을 앞뒀다는 듯 만족스럽게 젖은 점막이 민감한 표피를 적신 건 그 때였다.
“―아, 흐으읏!”
서해원의 입 안은 믿을 수 없을 만큼 따뜻하고 또 부드러웠다. 지훈은 제가 낸 소리의 크기를 깨닫고 뒤늦게 두 손으로 입을 틀어막았다. 하지만 그렇게 필사적으로 신음을 삼킨다고 한들, 또 다른 입에서 나는 젖은 소리까지 막을 수 있는 건 아니었다.
성기와 타액이 만날 때 나는 마찰음은 사탕을 빨아 먹는 것보다도 달았고 키스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음탕했다. 부드러운 입술과 점막이 기분 좋게 조일 때마다 온몸의 피가 아래로 몰리며 아랫배가 벌벌 떨렸다.
간지러운 전류로 시작했던 쾌감이 고조되면 고조될수록 지훈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높이 띄우면서 벌어진 다리를 더욱 크게 열었다. 뜻밖의 환대에 사타구니 안쪽에 처박힌 머리 역시 보다 깊숙이 움직였다.
“힉…!”
스물아홉. 대단한 경험은 없지만, 그래도 성적인 쾌감에 대해 알만큼은 안다고 감히 생각하는 나이. 권지훈에게 삽입이란 저 자신이 자극의 깊이와 정도를 제어할 수 있는 행동이었다.
하지만 같은 남자의 입 안에 성기가 처박힌 지금, 이제껏 경험하고 알아 왔던 모든 기준은 실로 다디단 균열이 나는 중이다. 이 일방적인 삽입에서 지훈이 마음대로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다.
특히 가장 미칠 것 같은 건 딱 기분 좋을 정도만 단단한 혀였다. 지훈은 사람의 혀가 이렇게까지 섬세하게 움직일 수 있다는 걸 처음 알았다.
젖어서 선액을 흘리는 귀두 끝을 문지르고, 꾹 막기도 했다가 기둥 옆을 살살 긁는 매끄러운 살덩이. 그 작고 부드러운 자극 앞에 이성 따윈 파도 앞의 모래성처럼 녹아내렸다.
분명 머리 한구석에서는 누군가가 창문에 눈을 가까이하면 있는 대로 다리를 벌린 채 헐떡이는 저를 볼 수 있다는 걸 경고했다. 하지만, 모든 의지를 배반한 허리가 멋대로 들썩거렸다. 그것도 제가 흥분을 쏟아내는 곳이 서해원의 입 안이라는 사실마저 새하얗게 잊은 채로.
“하아, 앗, 흐…….”
사정감에 떠는 아랫배가 빠르게 펄떡일 때마다 그린 듯한 복근이 진해졌다 옅어졌다가를 반복했다. 크게 목울대를 몇 번 움직인 해원은 고개를 슬쩍 들어 그 보기 좋은 움직임을 감상했다. 찌릿한 쾌감에 떨던 지훈이 뒤늦게 몰려온 당혹에 정신을 차린 것도 그 때였다.
나 대체 무슨 짓을 한 거지.
나른하게 늘어졌던 등줄기로 쭈뼛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서, 서해원, 변호사님.”
“응.”
한껏 발기한 성기가 몇 번이나 목구멍을 치닫고,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가득 토해낸 정액까지 삼켰기 때문일까. 잠에서 막 깼을 때마저 말끔했던 목소리는 낮게 갈라져 있었다. 덕분에 흥분과는 다른 의미로 달아오른 지훈은 손으로 얼굴을 거칠게 쓸었다.
“저, 저도…. 저도―, 해, 드리겠습니다.”
네 번이나 말을 더듬으며 완성된 결의였다. 하지만 해원은 지훈이 낼 수 있는 그 최대한의 용기 앞에서도 별다른 반응이 없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그답지 않게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한 표정이었다.
그의 반응은 한참 후에야 나왔다.
“……우와, 야해라.”
“…….”
“지훈 씨. 저 방금 갈 뻔했잖아요.”
고운 미간을 찌푸리기까지 한 해원을 보며 당신 쪽이 백 배, 천 배, 아니 만 배는 더 야하다는 말을 할 순 없었다. 유독 붉게 변한 도톰한 입술이 타액 때문인지, 아니면 제가 쏟아낸 것 때문인지 젖어 번들거리는 게 신경 쓰였다. 제 입 또한 마찬가지로 곧 저렇게 될 거라는 사실 역시.
한편, 해원의 시선은 파들파들 떨리는 단정한 눈가에 머물러 있었다. 같은 사내의 성기를 입에 담는 것마저 책임감으로 해내려는 게 지독할 만큼 권지훈답다는 생각을 하면서다. 물론, 조금 전까지 머리를 처박고 있던 허벅지 안쪽의 부드러운 피부를 만지작거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지훈의 어깨가 가볍게 튀었다.
“그쪽은 다음에요.”
나직한 목소리가 이어졌다.
“오늘은 손만으로도 충분할 것 같은데. 해 줄래요?”
여전히 힘이 완전히 들어가지 않는 몸을 조금 일으킨 지훈이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 심지어 조금은 안도하기까지 했다. 짐짓 선택지를 주는 물음에 깃든 다정한 교활함은 서해원만 아는 일이다.
단단한 부피감이 느껴지는 바지춤이 천천히 아래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굳이 짚고 넘어가자면, 권지훈은 이제껏 살며 단 한 번도 ‘꿀린 적’ 없었다. 다리 사이에 있는 2차 성징의 크기가 중요해지는 시기가 온 이후로는 늘 그랬다. 심지어는 전형적인 사이코였던 군대 선임이 ‘너는 잘생겼는데 자지까지 커서 재수 없다’라고 빈정대며 얼차려를 준 적도 있을 만큼 그 존재감이 뚜렷한 쪽이다.
“…….”
하지만 그 거대한 걸 눈앞에 두는 순간 가장 먼저 든 생각은 ‘정말 붓는 정도로 끝나서 다행이다.’ 하는 안도였다. 갈 뻔했다고 한 건 거짓말이 아니었는지, 끝이 젖은 기둥은 푸른 힘줄이 툭 불거지기까지 한 채로 꺼덕거렸다. 보는 것만으로도 움츠러들 만큼 선연한 흥분이었다.
잠시 머뭇거리던 지훈은 천천히 용기를 냈다.
“하….”
살며 처음으로 손에 쥔 타인의 성기는 손의 온도보다 조금 더 따뜻했고 또 적당히 습했다. 낮게 목을 울리는 한숨에 잠시 멈칫했던 지훈은 이내 아래로 길게 드리운 속눈썹을 보며 조심스러운 움직임을 시작했다. 오랜 흥분을 알리듯 잘 젖은 선단이 서툰 손짓을 도와주었다.
“불편하지는… 않으십니까?”
“괜찮아요. ―대신, 조금만 더 빠르게.”
서해원은 제 손안에서 더운 숨을 토해내는 순간마저 터무니없을 정도로 완벽한 남자였다. 하얀 피부 위로 깃든 분홍빛은 세상에서 가장 부드러운 꽃잎이 번진 것처럼 촉촉해 보였고, 살짝 찡그린 눈썹마저 한 올 한 올 가지런했다.
지훈은 숨까지 죽인 채로 그 황홀한 흥분을 훔쳐보았다. 처음 쥐었을 때도 손 안 가득 쥐어졌던 기둥은 적당히 속도를 붙여 움직이자 더욱 묵직해졌다. 커진 흥분의 부피만큼 더 따뜻해진 것 같기도 했다.
왠지 입이 말랐다. 성기를 잡고 흔드는 건 분명 제 쪽인데, 자꾸 아랫배 어디쯤이 멋대로 움찔거렸다. 이 기둥이 콱콱 처박히고 흔들리는 감각이 몸 안 깊은 곳에서부터 피어나는 것만 같았다.
맑은 눈동자에 그득히 어린 열기 앞에서 지훈은 저도 모르게 허벅지를 들썩였다. 여전한 이물감이 느껴지는 뒷구멍에도 꽉, 힘이 들어갔다. 그저 시선이 마주쳤을 뿐인데도 몸 안으로 그가 깊게 들어온 것만 같았다.
어깨를 움찔 떨게 될 정도로 따뜻한 것이 손과 팔뚝, 그리고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는 허벅지까지 울컥 쏟아진 건 그 때였다.
지훈은 꼭 다시 한번 사정하기라도 한 듯, 참았던 숨을 그제야 크게 토해냈다. 하지만 한 번 자각한 배 속 깊은 곳의 근질거림은 사라지지 않았다. 발가락 끝 역시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바짝 곱았다.
그 순간 지훈을 현실로 끌어올린 건 이곳에서 가장 비현실적인 남자였다.
“……지훈 씨.”
낮게 가라앉은 목소리에 담겨 나오는 저 자신의 이름에 목덜미로 소름이 돋았다. 지훈은 허둥지둥 대답했다.
“―예, 예에.”
“자위. 별로 해 본 적 없죠.”
“…….”
질문에 솔직히 답을 하자면, ‘그렇다’다.
지훈은 진실을 토해내는 것 대신 입술을 꽉 붙이는 걸 택했다. 손에는 여전히 서해원의 성기가 쥐어진 채고, 흩뿌려진 하얀 정액의 온기조차 식지 않았는데 자위 경험까지 논할 자신이 없어서였다.
하지만 정작 물음을 던진 당사자는 애초에 답을 기대하지 않았던 모양이었다. 헝클어진 머리를 쓸어 올린 그는 지훈을 더 부끄럽게 할 속삭임을 달콤하게 덧붙였다.
“그래서 더 기분 좋았어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