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2. 이유 없는 호의 (3/7)

2. 이유 없는 호의

점심시간을 앞둔 상쾌한 오전.

김 비서는 문득 강한 퇴사 욕구를 느꼈다. 물론 그 욕구의 중심엔 7년째 함께한 상사가 있다.

“김 비서님. 저 요즘, ‘변호사님’이라는 단어가 섹시하게 들리기 시작했어요.”

“……아니. 이건 또 무슨 신종 고문이신지.”

“음. 물론 제일 야한 건 ‘서해원 변호사님’이지만요. 좀 급할 땐 ‘서 변호사님’도 좋고.”

조곤조곤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생기를 잃어가던 김 비서의 낯빛은, 다음 순간 무언가 회상하듯 기울어진 해원의 고갯짓 앞에서 비바람을 만난 바다처럼 검어졌다. 저 머릿속에서 지금 무엇이 펼쳐지고 있을지 상상이 갔다. 분명 서해원을 ‘변호사님’이라고 부르는 누군가로 가득 차 있을 거다.

“제가 이전 직장에서부터 입버릇이 붙어서 계속 실언을 했습니다. 앞으로는 꼭! 법무팀장님, 이라고 불러드리겠습니다.”

“네? 아니에요. 원래 하던 대로 편하게 부르세요.”

별 시답잖은 소리를 할 때조차 무서울 정도로 완벽한 모습인 상사가 빙긋 웃으며 마지막 서류에 사인을 마쳤다. 김 비서는 깍듯한 태도로 서류를 받으면서도 순간 맹렬하게 피어오른 지적 욕구 앞에 고뇌했다. ‘모르는 것이 약이다’와 ‘아는 것이 힘이다’가 팽팽히 대립했다.

“죄송합니다만,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변호사님 소리를 들을 때마다 서게 생겼으니까 적응 훈련을 해야죠.”

호기심의 결과는 참혹했다. 역시 힘보다는 약을 선택했어야 했는데. 순간 초점을 잃은 김 비서의 눈이 통창 너머의 먼 빌딩 숲을 내려다봤다. 서해원이 변호사 배지를 단 순간부터 쭉 함께해 왔지만, 나날이 적응되기는커녕 아득해진다는 생각을 하면서였다.

“―아. 점심시간이네요. 저는 혼자 나가 볼 건데. 김 비서님은요?”

“……돈 벌기 힘들어서 밥이라도 먹고 버텨야지 안 되겠습니다, 정말.”

“하하, 네. 그러세요.”

얄미울 정도로 상쾌한 대답이었다.

총 42층으로 이루어진 건물에서 중간보다 조금 더 위인 36층. SJ 전략기획실 법무팀 팀장인 서해원은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동안 마주친 모든 구성원의 깍듯한 인사를 받았다.

대형 로펌에서 활약하며 살벌할 정도로 몸값을 올려 가던 그가 SJ의 모든 어두운 일들을 쥐락펴락하는 ‘36층’ 이곳에 왔을 때, 법조계는 물론이고 정·재계의 사람들은 직감했다. 드디어 SJ에서 후계 수업을 시작했구나, 하고 말이다.

하지만 해원은 제게 쏟아지는 지대한 관심들을 알면서도 어떤 유난도 떨지 않았다. 특별 대우 따위 바라지 않는다는 양 직접 운전대를 잡고, 가끔은 옥상 정원에서 바람을 쐬기도 하며 사람들 사이에 섞여들었다. 인간의 바닥이란 편안할 때 드러난다는 것을 아주 오래전부터 치열하고 처절하게 배운 탓이다.

오늘도 평소와 마찬가지였다. 전용 엘리베이터로 원하는 층까지 곧장 움직이는 뭇 간부들과는 달리, 해원은 점심시간을 앞두고 우르르 몰려나온 직원들과 같은 엘리베이터를 탔다.

“민주 씨, 우리 커피는 나가서 마실래요?”

“음? 네, 좋아요. 그런데 웬일이에요? 항상 회사에서 본전 뽑아야 한다는 사람이.”

“왜. 우리 회사 뒤편으로 빠지면 있는 골목에 작은 카페 하나 새로 생겼잖아요.”

여러 사람을 태우고도 불쾌하지 않을 정도의 거리를 남긴 널찍한 엘리베이터. 가장 안쪽에 자리한 해원의 가지런한 눈썹이 희미하게 움찔했다. 일분일초라도 빨리 튀어 나가 맵고 짠 음식으로 거북한 속을 달래겠다 마음먹었던 김 비서 역시 마찬가지였다.

“어, 본 것도 같고. 그런데요?”

“거기 카페 알바가 진-짜 잘생겼어요.”

“어머.”

“월수금 이렇게 3일만 나오고, 오전 11시 오픈부터 저녁 7시까지 근무하거든요? 커피류는 주인이 직접 내리는데 스무디나 간단한 음료 종류는 알바가 하더라고요.”

“아하핫, 못 살겠다! 뭘 그렇게 자세히 알아요?”

“민주 씨. 그 애매한 마음가짐 뭐예요. 훈남이 아니라 미남이라고요.”

결연함에 가까운 확신 때문일까. 그녀들의 대화는 낮은 소곤거림임에도 유독 귀에 쏙쏙 들어왔다.

“……거기 샌드위치 같은 건 없나요?”

“안타깝지만 음료랑 케이크만 팔아요. 그러니까 얼른 밥 먹고 가요. 요새 갈수록 손님 많아진다니까.”

김 비서는 필사적으로 제 뒤에 서 있는 상사를 곁눈질조차 하지 않으려고 노력했다. 만면에 가득 올라온 웃음을 꾹 참느라 잔뜩 길어진 인중을 들켰다간 무슨 화를 입을지 몰랐다.

한참을 내려가던 엘리베이터는 드디어 1층 로비에 도착했다. 하지만 가장 안쪽에 자리한 해원은 사람들이 모두 내리고도 미동조차 없이 우두커니 서 있을 뿐이었다.

“크흠, 흠. 그럼 이따 뵙겠습니다. 변호사…, 아니, 아니. 법무팀장님.”

“…….”

“좋-은 시간 보내고 오십시오.”

고운 미간 사이가 순간 좁아지는 것을 모르는 척하며 김 비서는 후다닥 먼저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다.

* * *

아침에 눈을 뜨자마자 퇴근을 꿈꾸는 직장인들에게 한 시간 남짓한 점심시간이란, 반강제로 참여한 마라톤 중간에 목을 축이는 순간과 다름없다.

“아이스 아메리카노와 카모마일 하나. 맞으시죠?”

“네!”

“감사합니다. 맛있게 드세요.”

그리고 여기, 빽빽한 빌딩 숲 사이에서 심심찮은 입소문을 생성 중인 문제의 알바생은 문학적인 표현이 아니라 실제로도 목을 축일 만한 마실 것을 내어주는 중이다.

해원은 앉을 자리 하나 없이 꽉 찬 몇 평짜리 카페를 눈으로 훑은 다음 어느새 익숙해진 카운터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그러자 조리대 위를 닦고 정리하던 상대 역시 오늘 방문한 손님 중 누구보다 키가 큰 해원을 곧장 알아봤다.

“아, 서 변호사님.”

세상에서 ‘변호사님’이라는 단어를 가장 섹시하게 부르는 권지훈은 웃을 때 볼우물이 쏙 들어간다.

“…….”

인사도, 주문도 하지 않는 손님의 고요한 시선에 의아해진 지훈이 목소리를 낮춰 물었다.

“왜 그러십니까?”

“……회사 직원들이 뒤편 골목에 새로 생긴 카페 알바가 잘생겼다길래. 궁금해서 와 봤어요.”

들은 말이 머릿속에 채 다 입력되지 않았다는 듯 눈만 깜박이던 지훈은 이내 멋쩍게 웃었다.

3주 전. 지훈은 회사를 나왔다.

깔끔한 퇴사였냐고 묻는다면 그건 아니다. 으레 따라오는 ‘왜?’라는 질문 앞에서 그가 지난 6개월 동안의 회사 생활을 댔기 때문이다.

보고서의 이름을 바꿔 제출하는 걸 지적한 이후로 시작된 교묘한 활동 배제와 기수 열외. 그러나 그 사실을 인정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또, 그걸 예상하지 못했던 것도 아니다.

하지만 마지막 한 줌 남았던 미련과 망설임까지 완전히 떨치게 한 건 같은 회사의 태도였다. 반년 만에 용기를 내 처음으로 점화한 문제 앞에서, 회사는 문제를 들여다볼 의지조차 없었다. 오히려 1년 반 동안 사소한 지각조차 한 번 한 적 없는 지훈을 철저히 떠날 사람 취급했다. 남겨진 사람들의 ‘화합’을 깨기 곤란하단 태도로 말이다.

덕분에 첫 직장을 향한 짝사랑은 버틴 것이 무색하게 손쉽게 사그라들었다.

“그래도 어떻게든 가게가 알려졌다니 잘됐네요. 음료는 뭘 드시겠습니까?”

“아이스티요.”

“어― 정말, 다른 거 드셔도 되는데.”

“하하. 마셔 보니 괜찮아서요.”

천연덕스럽게 빙긋 눈을 접는 해원 앞에서 지훈 역시 어쩔 수 없다는 듯 웃었다.

일주일에 세 번. 해원은 카페에 올 때마다 아이스티를 시킨다. 처음 왔을 때 ‘지훈 씨가 만드는 메뉴 중 제일 손이 안 가는 것이 뭐죠.’라는 질문에 별생각 없이 아이스티라고 대답한 뒤부터다.

“여기, 주문하신 아이스티 나왔습니다.”

“감사합니다.”

사실 지훈은 이 카페에 꽤 파격적인 조건으로 채용됐다. 주 3회 출근에, 취업준비생 특성상 시험이나 면접이 잡힐 경우 미리 말하면 언제나 일정 조율 가능. 약간의 퇴직금을 받기는 했지만, 뭐라도 하지 않고 있으면 불안한 지훈 같은 사람에겐 딱 맞는 단기 일자리였다.

지훈은 천진난만하게 “원하는 곳 공채 시즌까진 시간이 비어서 걱정했는데, 정말 좋은 사장님이시죠? 운이 좋았습니다.”라고 했지만, 사실 그 이유가 뻔히 그려지는 해원이었다.

저 파격적인 근무조건의 이유는 사실 첫째도 얼굴, 둘째도 얼굴, 셋째도 얼굴일 것이 분명했다. 권지훈은 커피 맛에는 자신이 있던 사장이 단 하나 자신 없던 요소인 ‘호객’에 완벽하게 부합하는 아르바이트생이었다.

거기에, 심지어는―

“사람 대하는 일을 하는 건 왠지 상상이 안 됐는데.”

“예?”

“생각보다 굉장히 능숙해서요. 이런 아르바이트를 전에도 해 본 적 있나요?”

음료로 몇 모금 목을 축인 해원이 물었다.

아닌 게 아니라, 지훈은 딱 봐도 초보 사장보다 일을 잘했다. 주문이 조금만 길어져도 ‘잠시만요.’를 다섯 번쯤 반복하는 사장과는 달리, 얼굴만 보고 뽑은 단기 아르바이트생인 지훈은 모든 걸 듣고 외운 다음 재확인까지 했다. 그건 단순히 암기력 때문이 아니라 여유에서 오는 차이임이 분명했다.

“아, 어머니께서 의주에서 빵집을 하십니다.”

“…….”

“덕분에 간단한 음료 만드는 거나 주문받는 건 익숙하긴 해도, 어머니 가게 말고 다른 곳에선 처음이라 걱정했는데… 크게 다르진 않아서 다행이죠.”

처음엔 동네 장사로 시작했던 작은 가게는 단팥빵 맛집으로 알음알음 소문이 나더니, 이제는 ‘의주 맛집’으로 당당히 검색어 첫 페이지에 뜰 정도가 됐다. 지훈이 넘치는 주문량이라면 도가 튼 건 그래서다. 교복을 입을 때부터 대신 카운터를 봤으니 개장한 지 한 달이 안 된 카페 정도야 손바닥 위다.

“음. 자리가 안 나네요. 계속 서 계시기도 뭐한데.”

“―아니에요, 난 신경 쓰지 말아요. 이제 가려던 참이었으니까.”

지훈의 얼굴을 집착적으로 뜯어보던 해원은 혹시라도 제 동요를 들킬세라 화사한 미소를 내걸었다. 때마침 딸랑, 도어벨이 울리며 앞서 엘리베이터에서 만났던 SJ의 직원들이 들어오는 게 보였다.

지훈이 시선을 돌린 순간, 플라스틱 컵 바깥에 맺힌 물방울에 슬쩍 젖은 손가락이 무방비한 손등 위를 살살 원을 그리듯 움직인 건 그 때다. 흠칫, 작은 떨림이 온기 너머로 전해졌다.

“퇴근 시간에 다시 올게요. 이따 봐요. 지훈 씨.”

지훈은 대답 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 * *

권지훈은 얼마 전 SJ타워 가장 꼭대기 층 펜트하우스에 전입신고를 했다.

처음엔 하룻밤을 보낸 곳에서 아예 눌러앉을 생각 같은 건 전혀 없었다. 아무리 하루아침에 갈 곳이 없어졌다고 해도, 뻔뻔함과는 거리가 먼 지훈의 성격상 그런 일은 원천적으로 무리였다.

하지만 권지훈 몫만큼의 뻔뻔함으로 대신 들이댄 건 집주인인 서해원이었다. 열에 들떠 다리가 풀린 지훈을 당연하다는 듯 자신의 집으로 다시 데려온 그는,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말투로 살벌한 말들을 쏟아냈다.

‘왜요. 구직하다가 꼭두새벽에 또 한강 가려고요?’, ‘그럼 전 새벽마다 지훈 씨 집 앞에서 밤새워야겠네요.’, ‘지훈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나면 나도 죽을 거라고 했잖아요.’…….

결국, 빙긋 웃는 얼굴을 올려다보며 되레 걱정이 싹튼 건 지훈 쪽이었다. 저 무서운 가정들이 감히 따라갈 수 없는 행동력과 결합하면 어떤 결과가 될까 싶어 속이 덜컥한 거다. 한강 다리 위에서 만났던 두 사람이 순식간에 입장이 바뀐 셈이었다.

서해원은 그렇게 권지훈과 같은 서류로 묶이는 데 성공했다.

그뿐일까?

“지훈 씨 구멍이 얼마나 잘 젖는지 그 여자들한테 알려 줄 수 있으면 좋을 텐데.”

“…제가, 젖는 게…, 아니라, 변호사님이―!”

“네?”

뭐라 변명해 보려던 지훈은 말을 끝까지 다 마치지도 못했다. 남자의 손가락을 세 개나 받아먹은 구멍에서 들리는 마찰음이 저 자신의 목소리보다도 더 크게 느껴진 탓이었다. 처음에는 손가락 하나를 밀어 넣는 것조차 버거웠던 입구는, 어느새 해원이 손을 움직이는 대로 벌어지며 쿨쩍거렸다.

“읏…….”

지훈은 한 손으로는 제 구멍을 쭈걱쭈걱 벌리면서 또 다른 손으론 우악스럽게 엉덩이를 쥐는 힘 앞에서 겨우 신음을 삼켰다.

서해원은 ‘다음에 할 때는 젤을 준비해 놓겠다’는 약속을 틀림없이 지켰다. 아니, 지키다 못해 수치심에 절어서 숨을 쉬는 게 힘들 정도로 즐겨 사용한다. 덕분에 지훈은 아직도 젤의 감각에 적응하지 못했다.

좀 더 정확히는, 묽기만 했던 액체가 묘한 점성이 감도는 것으로 변화하는 그 일련의 과정이 제 구멍과 다리 사이에서 벌어진다는 것을 채 받아들이지 못한 상태다.

“서 변호사님, 저, 잠깐만― 잠깐만, 요.”

“아파요?”

“그건… 아니지만.”

“그럼 왜요? 안쪽까지 잘 젖었는걸요.”

입구를 부드럽게 푸는 데만 집중하던 해원이 별안간 손을 빠르게 움직이며 휘젓기 시작한 건 그 때였다. 잘 젖었다는 말은 허언이 아닌지, 내벽을 조였다 풀 때마다 구멍 안쪽에서 손가락을 쪽쪽 물고 빠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저 자신보다도 제 몸을 잘 아는 남자의 손 앞에서 잘 빠진 허리가 속수무책으로 들썩였다. 지훈은 그제야 입을 틀어막았다. 믿을 수 없을 정도로 음란한 소리를 내는 뒤로도 모자라 입에서까지 신음을 쏟아낼 순 없단 생각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필사적인 노력은 서해원의 고운 눈썹을 살짝 치켜 올라가게 했다.

“처음엔 손만 대도 앙앙대고 울길래 원래 소리를 잘 내는 줄 알았는데. 생각보다 고집스러운 쪽이었네요, 우리 지훈 씨는.”

“…그, 그렇게 운 적, 없…, ―흣!”

“네에, 그럴지도요.”

간신히 흘러나온 부정은 말랑말랑하게 풀린 구멍을 빠르게 쑤시는 손가락 앞에서 제대로 끝맺어지지도 못했다. 지훈의 골반을 단단히 받쳐 잡은 해원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하지만 난 당신이 그렇게 우는 걸 듣고 싶은데. 어떻게 하면 좋으려나.”

지훈은 입을 틀어막은 손 아래에서 밭은 숨을 헐떡였다. 간지러운 눈웃음 속에 감추어진 선명한 욕구를 만날 때마다 피부 아래가 간지러웠다.

같은 남자와 한 침대를 쓰고. 발가벗은 채로 다리를 벌려 올라타 앉고. 제 뒤를 열고, 휘젓고, 맘껏 침범하도록 내버려 두다 못해 그의 성기가 처박히길 기다리고 있다니. 이 모든 것이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상상도 못 했던 일이라는 게 믿어지지 않았다.

침대 옆의 협탁 위에서 일정한 진동이 들린 건 그 순간이었다.

밤 11시. 전화가 오기에는 늦은 시간이다. 하지만 서해원의 휴대폰은 아주 가끔 이 시간에도 울리곤 했다. 얄미울 정도로 근사한 미소를 띤 해원이 제 검지를 입술에 가져다 댔다. 음탕하리만치 젖은 손가락이었다. 지훈은 그게 정말 자신의 애액처럼 보여서 저도 모르게 시선을 피했다.

마주 보는 것 대신 기꺼이 먼저 엎드린 것도 그래서였다. 차라리 보지 않으면 덜 부끄러울 것이라 믿었던 탓이다.

“―네. 회장님.”

첫 섹스에서는 한참 동안 풀고도 절반도 채 삽입하지 못했던 구멍은 이제 커다란 성기를 어렵지 않게 받아먹었다. 지훈은 제 엉덩이에 닿는 단단한 아랫배를 느끼며 베개 위로 고개를 더욱 깊게 파묻었다. 같은 남자에게 꿰뚫리다 못해 완전히 채워진 느낌은 횟수가 거듭될수록 익숙해지기는커녕 되레 더 생생해지기만 했다.

“아아… 네. 요즘 조금 바빠서.”

해원은 얄미울 정도로 느릿느릿 허리를 움직였다. 푹 젖은 내벽이 어떻게 열리고, 또 어떻게 채워지는지 선명히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아주 천천히.

덕분에 먼저 떨리기 시작한 건 깊고 거칠게 쑤셔지는 감각을 아는 허벅지였다. 지훈은 연결된 점막에서 흘러나온 젤에 끈적해진 다리 사이를 비비며 어찌할 바를 몰라 했다. 작은 움직임마저 어찌나 선명히 느껴지는지, 몸 안으로 해원의 모양을 따라 길이 나다 못해 불거진 혈관의 맥박마저 전해지는 것 같았다. 한껏 달뜬 지훈의 엉덩이가 저도 모르게 원하는 호흡을 찾아 움직이기 시작했다.

하지만.

“조만간, 찾아뵙겠습니다. 하하, 네에, 그럼요.”

“흐, 히익…!”

스스로 즐거움을 찾아보려는 가냘픈 시도는 원하는 곳에 닿기도 전에 짧고 날카로운 들숨으로 바뀌었다. 고개를 비스듬히 해서 어깨로 휴대폰을 받친 해원이 지훈의 두 팔을 뒤로 단단히 잡아챈 다음, 제 성기를 뿌리 끝까지 찔러 넣었기 때문이었다.

음모가 닿을 정도로 깊게 삽입된 부피감 앞에서 지훈은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하고 고개까지 뒤로 꺾었다. 해원의 나직한 속삭임이 귓가에 닿았다.

“뭐예요. 왜 전화하면서 박히니까 더 흥분해?”

“…그런 거, 아니, ―흐으읏!”

“아냐?”

굵은 기둥이 느끼는 지점을 넘어 배 속 어딘가까지 푹, 푹 찌를 때마다 눈앞이 깜박깜박 점멸했다. 지훈은 대답조차 하지 못하고 헐떡였다. 만약 손이 자유로웠다면 여느 때처럼 입을 틀어막았을 거다. 아니, 최소한 베개에 머리를 묻고 저만 들을 수 있는 소리쯤은 냈을 거다.

그러나 뒤가 꿰뚫리는 것으로도 모자라 팔까지 뒤로 젖혀진 자세에서 자유롭게 할 수 있는 건 얼마 없었다. 지훈은 귀와 목덜미는 물론이고 등까지 벌겋게 익은 채 떨면서도 소리를 억눌렀다.

한편, 그 의미 없는 노력에 발맞춰 해원의 전략도 곧장 바뀌었다. 서해원은 저 뻣뻣한 권지훈이 정말 못 견뎌 하는 걸 이미 잘 안다.

“해원, 아, 변호사님, 제발….”

“왜. 아니라면서요. 응?”

“흑…….”

무서울 정도로 깊게 삽입되었던 성기가 쭉 딸려 나가는 순간 꼬리뼈까지 경련했던 늘씬한 몸은, 이내 그것이 다시 처박히지 않고 입구에만 걸쳐지자 곧장 반응이 왔다.

한껏 벌어진 구멍이 옴죽대며 귀두를 물었다 풀기를 반복했고, 고집스럽던 목소리에도 옅은 울음기가 섞였다. 옅은 땀이 송골송골 맺힌 푹 들어간 기립근부터 연약한 점막과 연결된 부위까지. 해원의 시선이 지훈의 뒷모습을 집요하게 훑었다.

요령 없을 정도로 무엇이든 잘 참는 권지훈은 딱 하나. 애태우는 것에 약하다.

해원이 그 비밀 아닌 비밀을 눈치채기까지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혹시라도 아플까 싶어 천천히 삽입할 때마다 먼저 보채며 허리를 움직여 대는데 모를 수가 없었다.

하물며 조른다는 자각조차 없는 단호한 이목구비는 또 얼마나 야한지. 해원은 간신히 고개를 뒤로하는 지훈의 코끝이 발갛게 물들어 있을 것을 먼저 상상했다.

그러나 그 달콤한 기대도 잠시. 한없이 여유로웠던 눈매는 머잖아 길게 가늘어졌다. 어찌나 소리를 눌러 참았던지 퉁퉁 붓고 피멍울이 맺힌 지훈의 입술 때문이었다.

“…….”

“벼, 변호사님. 흑, 저, 정말로―”

“……지훈 씨한테는 장난도 못 치겠네요.”

하려던 말이 가로채진 지훈은 순간 들은 문장을 이해하지 못하고 젖은 속눈썹만 깜박였다. 어깨가 슬슬 뻐근해질 정도로 땅겨졌던 팔이 풀린 건 그 때였다. 지훈은 몸을 짚고 설 새도 없이 푹신한 침대로 고꾸라졌다. 젖다 못해 끈적해진 접합부로 곧장 살과 살이 크게 맞부딪쳤다.

갑작스레 시작된 자극은 한없이 노골적인 소리를 내며 이어졌다.

“아, 힉, 히익, 흑…!”

예상 가능한 담백한 쾌락에만 익숙했던 몸이 무너지는 건 순식간이었다. 감히 거리를 둘 수 없는 침입 앞에서 지훈은 엉덩이만 쳐든 채 마구 박히다 못해 무릎마저 힘이 풀려 늘어졌다. 해원 역시 그 함락만을 기다렸다는 듯 깊게 삽입한 자세 그대로 몸을 덮어 짓눌렀다.

너무, 깊었다.

“흑, 흐앙, 앗, 제발, 아. 아―!”

해원이 빠르게 허리를 쳐 내릴 때마다 지훈의 손발이 허공을 쥐며 허우적댔다.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 시작된 전류가 이성을 녹이는 지금, 지훈이 쾌감에 저항해 할 수 있는 건 고작 그게 다였다. 언제나처럼 몸을 틀거나 하다못해 기어 도망치는 것도 불가능했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으로 처박힌 기둥이 느끼는 지점을 한참 넘어 결장까지 비집고 열어 짓이겨댈 때마다 눈물만 줄줄 흘러나왔다.

물론 바득바득 소리를 참던 입 역시 다를 건 없었다. 살짝 기절하는가 싶으면 강렬한 쾌감에 억지로 정신이 들고, 그러다 또다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하는 통에 신음을 억누를 여유가 있을 리 만무했다.

그렇게 오랜 노력이 무색한 교성만을 높여가던 지훈은, 이내 더 올라갈 수 없는 숨을 터트렸다. 촉촉하게 땀이 어린 목덜미에 입을 맞추는 남자와 거의 동시에 다다른 절정이었다. 누구의 것이라 할 것 없이 열 오른 숨소리가 한참이나 뒤섞였다.

한동안 그렇게 서로의 체온에만 기대다가 먼저 몸을 일으킨 건 해원이었다. 동그랗고 예쁜 엉덩이와 허벅지 틈새로 선명한 흥분이 주르륵 흘렀다. 실로 노골적인 감각에 늘어졌던 지훈의 어깨가 움츠러들었다.

날아갔던 이성이 조금쯤 돌아온 것도 그 때다.

“―아. 저, 전화. 전화는, 어떻게….”

곱고 가지런한 눈썹이 꿈틀했다. 섹스 후 막 숨을 고르자마자 하는 말이라는 게 불청객의 안부라니. 어찌 보면 저를 걱정해서라는 걸 알지만 그리 기껍지 않은 게 사실이다. 해원은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저만 알던 진실을 순순히 털어놓았다.

“그건 애초에 수신 거절했는데요.”

“정말…. 서 변호사님!”

기어이 삐죽한 볼멘소리를 내고 만 지훈은 억울한 소리를 좀 더 이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 투정은 입술 위로 쪽, 소리 내 떨어지는 간지러운 키스 앞에서 맥이 끊겼다. 눈이 마주친 해원의 뺨이 말문이 막힐 만큼 예쁜 분홍빛인 것도 따질 마음을 식게 하는 데 한몫했다.

하고픈 수많은 말들은 결국 옅은 한숨 한 번으로 정리됐다. 지훈은 목을 몇 번 가다듬은 다음, 제 얼굴에서 이상할 정도로 떨어지지 않는 시선의 의미를 묻는 것으로 화제를 돌렸다.

“왜…, 크흠, 흠, 왜, 그러십니까?”

“입술이 이게 뭐예요.”

“예?”

입술이 어떻다는 거지. 지훈은 반사적으로 혀를 내밀어 제 입술 위를 훑었다. 그러자 아주 희미하게나마 옅은 쇠 맛이 느껴졌다.

“……딱히 아프진 않은데.”

“보는 내가 아파.”

조금 전까지 제게 한 치의 여유도 주지 않고 성기를 찔러 넣던 사람의 것이라고 하기엔 영 힘이 없는 대답이었다. 게다가, 아무렇지도 않게 내뱉었다지만 그 내용 역시 못 견디게 달다. 그래 봤자 입술에 작은 상처 조금 난 것일 뿐인데. 지훈은 간지러운 민망함에 눈만 굴렸다.

결국 대화는 돌고 돌아 원점으로 왔다.

“―사, 상사 전화인데. 그렇게 안 받고 넘겨도 됩니까?”

상사라고 말하기는 했지만 솔직히 그 표현을 써도 되는 건지 확신은 안 들었다. 회장이라고 한다면 분명 높은 확률로 서해원 그가 속해 있는 SJ의 수장을 말하는 것일 텐데 말이다.

하지만 해원의 지적은 제 걱정과는 퍽 다른 부분에서 치고 들어왔다.

“권지훈 씨. 앞으론 머리에 새기세요. ‘밤 11시에 오는 상사 전화는 애초에 받지 말자’.”

“아.”

“어차피 그 시간에 올 전화가 정상적인 용건일 확률은 없어요. 그러니 앞으로 11시엔 잠을 자거나, 쉬거나… 그것도 아니라면 나랑 섹스하는 데 집중하면 돼요.”

마지막에 자연스럽게 따라붙은 선택지 하나를 빼고는 어쨌거나 틀린 말은 아니었다.

하지만 한편으론, 저라면 상대가 ‘회장님’이면 받을 것 같았다. 설령 그게 밤 11시에 오는 전화라도 말이다. 지훈은 대답 대신 턱을 긁적였다. 그러자 해원은 그 생각마저 뻔히 읽었다는 듯 다시 한번 쪽, 입을 맞추며 말을 이어갔다.

“그리고, 뭐. 아버진데요.”

“…….”

“전화 한 번 안 받았다고 큰일 나는 거 아니니 걱정하지 말아요.”

나긋나긋한 목소리는 여느 때와 다를 것 없이 평온했다. 아니, 입술에서부터 지훈의 목으로, 가슴께로 움직이는 키스를 하며 달짝지근한 후희를 즐길 여유마저 있었다.

하지만 정작 그걸 듣는 지훈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흘렀다. 그건 분명 섹스의 열기와는 완전히 다른 서늘한 감각이었다.

……나 지금, 대체 누가 가슴에 뽀뽀해 주고 있는 거지.

계기가 뭐였든 어쨌거나 한집에 사는 남자에 대한 새로운 정보가 갱신됐다. 그것도 어쩐지 한참 전에 알았어야 할 것 같은 정보다. 늦은 자각에 목 뒤가 빳빳해졌다.

지훈은 제 몸에 고개를 묻은 남자를 새삼스레 위아래로 훑어보았다. 이제껏 알아채지 못했던 새로운 정보가 눈에 들어온 것은 그 때였다.

“…….”

그건 긴 흉터였다.

왼쪽 다리, 허벅지 위쪽부터 무릎 아래까지. 대체 어떻게 해서 생긴 것일지 짐작도 가지 않는 선명한 일직선의 자국. 잘 다듬어진 희고 매끄러운 몸에 있기에는 너무나 큰 상흔은 아주 오래전의 것인지 붉은 기운 하나 없었다. 작게 줄어든 게 저 정도 크기라면 처음에는 정말 훨씬 더 심각했을 거다.

마음 한편으로 미안함과 민망함이 함께 머리를 들었다. 한집에서 벌써 몇 번이나 몸을 섞으며 성기의 크기나 각도 같은 건 믿을 수 없을 만큼 잘 알게 됐으면서 이렇게 큰 흉터가 있단 건 몰랐다니.

“그냥 옛날 일이에요.”

대체 다리를 보는 건 어떻게 알았는지. 지훈은 제 가슴에 조금쯤 눌려 들려온 말에 멋쩍게 입을 열었다.

“그래도… 꽤 크게 다치셨을 것 같은데.”

“그랬었죠. 하지만 중요한 건 지금이잖아요.”

싱거울 만큼 담백한 목소리였다. 하지만 지훈의 시선은 그 뒤로도 한참이나 흉터에서 쉽사리 떨어질 줄 몰랐다.

* * *

빼곡한 직장가 한편의 작은 카페는 점심시간이 지난 오후가 되면 손님이 확 줄며 한산해진다. 덕분에 지훈 역시 이 시간에는 쉬거나 채용공고를 둘러보곤 한다.

오늘도 별 이변은 없어서, 자그마한 매장 안에는 편안한 차림의 중년 여성 한 명만 있었을 뿐이었다.

“따뜻한 아메리카노 한 잔과 바스크 치즈 케이크 나왔습니다.”

가벼운 재즈 음악이 흘러나오는 매장 안으로 깍듯한 목소리가 퍼졌다. 하지만 두어 번을 더 불러도 동그란 금테 안경을 낀 부인은 꼼짝도 하지 않았다. 조리대 저쪽에서 눈이 마주친 사장이 어깨를 으쓱했다.

결국 지훈은 직접 커피를 쟁반에 받쳐 들었다.

“어머. 미안해라. 부르는 걸 못 들었네요.”

“아닙니다. 그러실 수도 있죠. 맛있게 드세요. 필요한 거 있으시면 말씀해 주시고요.”

싱그럽다는 단어가 어울리는 인사에 중년 여성의 입가에도 옅은 웃음이 걸렸다. 그 때였다. 딸랑, 하고 도어벨이 울리나 싶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뒤따랐다.

“지훈 형!”

“어? 규선아.”

본가가 있는 의주시에서 알고 지내던 동생, 염규선이었다. 생각지 못했던 사람의 방문에 놀란 지훈의 눈이 동그래졌다.

규선을 반갑게 맞으면서도 사장을 향해 살살 눈치를 보자, 그는 지훈을 향해 “한가한데 뭐. 눈치 보지 말고 편히 이야기해요. 커피는 내가 서비스로 줄게.” 하고 사람 좋게 말했다. 개장한 지 한 달. 매장의 매출과 홍보를 책임지다 못해 접객조차 완벽한 아르바이트생의 휴식이 얄미울 리 없었다.

두 사람은 구석에 위치한 테이블로 자리를 옮겼다.

“죄송해요, 지훈 형. 제가 너무 갑자기 찾아왔죠?”

“아냐. 그나저나 오랜만에 보는 거 같다.”

“하하. 저 오늘 월차였거든요. 은행 일 보러 나왔다가 겸사겸사…. 그런데 형이야말로 어머님 따라 완전 요식업으로 전직 준비하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 이직 준비하면서 일주일에 며칠만.”

오늘 아침, 염규선과는 두 달 만에 갑작스러운 연락을 한 참이었다. 그가 먼저 말을 걸었고, 구질구질한 퇴사 스토리를 다 털어놓기도 뭐해서 ‘그냥 요즘은 카페에서 일해.’ 정도만 말했었는데, 이렇게 갑자기 찾아올 줄이야. 답지 않게 위치를 꼬치꼬치 물을 때부터 좀 이상하다 싶기는 했다.

고등학교 때 같은 동아리에서 선후배로 만난 이후로 알고 지낸 지 10년이 넘은 규선은 절대 이런 성격이 아니다. 두 살이 어린 동생이라지만 늘 진중함과 침착함을 배우게 되는 사람이었는데 말이다.

마주 보고 앉아 아메리카노를 몇 모금 홀짝이던 지훈은 먼저 넌지시 입을 열었다.

“규선이 너, 할 말 있는 거 같은데.”

“음…….”

규선은 정곡을 찔렸다는 듯 턱을 긁적였다. 그러고는 이내 지훈이 요즈음 떠올리지 않던 이름을 슬그머니 꺼냈다.

“경인 형, 사고 쳤다면서요?”

유경인.

근 한 달 전까지만 해도 한 집에서 동고동락했지만, 지금은 연락처조차 모르는 남이 된 십년지기. 지훈은 해원의 뜻을 따라 경인과 관련된 일체의 것들을 그에게 위임하곤 의식적으로 멀리한 지 오래였다.

“그건 어디서 들었어?”

“재진이 아시죠? 이재진. 왜, 신화전자 다니는.”

“어. 알아.”

“그 녀석, 요즘 경인 형이 추천한 코인 샀다가 결혼 자금으로 모아둔 거 다 날렸다고 난리도 아니에요. 심지어 돈도 좀 빌려줬다던가?”

차마 전화나 메시지로는 말을 꺼내지 못하고 기어이 찾아와야만 했던 이유가 뻔히 그려지는 순간이었다.

사실, 어쩌면 마음 한편에서는 진작 예상했을 결과일지도 몰랐다. 같이 사는 제 뒤통수를 칠 정도라면 그 밖의 사람들은 이미 한계까지 간 상황이었을 게 당연하다.

“하아…….”

“집 주소로 가 봐도 텅 비어 있고, 전화번호도 바뀌어서 도통 연락이 안 된다고 하길래 걱정되어서요. ―아! 물론, 지훈 형 얘기는 입도 벙긋 안 했어요!”

깊은 한숨을 무엇이라 해석했는지 규선이 쩔쩔매며 말을 덧댔다.

“걱정 안 해. 그런데, 나도 도움은 못 되겠는데. 미안하다.”

“네?”

“나 이제 경인이랑 같이 안 살아. 이사 간 곳을 알기는 하지만 아직도 거기에 있을지는 모르겠고. 단기 임대라고 했었거든.”

“아아…. 그랬군요. 어휴, 진짜 어쩌다 그렇게까지.”

오랜 지인과의 기분 좋은 만남은 순식간에 침묵으로 가득 찼다. 세상 물정 모르던 때부터 함께 알고 지낸 사람의 불행이란 아무래도 마음의 거리를 두기가 쉽지 않다. 애꿎은 아메리카노만 들이켜던 규선의 입이 열렸다.

“그래도 같이 안 산다니까 차라리 안심인데요? 덩달아 험한 꼴 볼 수도 있는데.”

지훈은 얼른 대답하지 못하고 멋쩍은 웃음만 걸었다. 지훈이야말로 같이 살다 되레 험한 꼴을 본 당사자였기 때문이었다. 규선은 그걸 금방 짚어냈다.

“왜요. 설마 형도 뭐 투자했어요?”

“아니, 그건 아닌데. 그냥…… 같이 살던 집 보증금 문제가 조금.”

“네에에?!”

한참을 망설이다 머뭇머뭇 흘러나온 말에 규선의 입이 떡 벌어졌다.

솔직히 오늘 그가 이렇게 무리해서 찾아온 것도 돈을 떼먹힌 동창보단 지훈을 위해서였다.

염규선에게 지훈은 꽤 특별했다. 같은 동아리 선배였던 지훈은 그 나이대라면 다들 하는 흔한 욕 한 번 하지 않는 사람이었고, 의주에서 서울로 대학을 와서 적응하지 못했던 스무 살, 학교도 다른 그를 일주일에 한 번씩 만나 밥을 사 줬다. 지금 생각해 보면 겨우 두 살 차이 나는 20대 초반의 지갑 사정이 뻔히 그려지는데 말이다.

“와. 경인 형. 진짜 미쳤다. 진짜, 진-짜 미쳤다. 아니, 다른 사람도 아니고 어떻게 형한테!”

“어디 가서 말하지 마.”

“당연하죠! 아니, 그보다. 그럼 요즘은 어디서 지내시는 거예요?”

하여간 사람이 너무 좋아서 탈이야, 이 형님은! 규선은 걱정을 가득 담아 물었다.

그런데, 한없이 충격적인 소식을 말할 땐 이미 마음 정리가 됐다는 듯 담담하던 지훈이 삐걱거린 건 그 때였다.

“아―, 아는 사람 집.”

거짓말 못 하는 권지훈과 눈치 빠른 염규선의 조합은 좋다면 좋고, 최악이라면 최악이었다.

“어라. 어째 이거 반응이 묘한데요?”

“묘하기는 무슨!”

“에이. 뭔데요. 저 입 무거운 거 아시잖아요, 지훈 형. 귀띔 좀 해 줘요. 연상 누님 집에서라도 살아요? 꽤 진지한 사이?”

“뭐? 아니! 나, 남자야, 남자!”

지훈은 순식간에 눈의 반짝임이 사라지는 규선을 보며 안도와 심란함을 동시에 느꼈다. 그래. 보통은 같은 남자와 산다고 하면 아무런 의심도 안 할 거다. 지금의 규선처럼.

“그래도 도와주는 사람이 있어서 다행이네요. 이직까지 준비하는 상황이면 더더욱 어디 가기도 힘든데.”

곧바로 대답하는 대신 커피를 몇 모금 삼킨 지훈의 시선이 반질반질한 테이블 위로 내려앉았다. 잠시 말을 고르던 지훈은 이내 혼잣말처럼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사실, 잘 모르겠어. 이렇게 신세를 져도 되는 건가 걱정만 되고.”

“별로 친한 사람은 아니에요? 아니다, 안 친한데 집에 들일 리가요.”

“그런…가.”

“형 성격에 같이 살면서 도움이 됐으면 됐지 폐 끼칠 리도 없고. 그냥 도움받을 때 받고 나중에 크게 갚는 건 어때요?”

당장 저 맞은편 42층 건물의 전략기획실 법무팀장에게 크게 갚는 방법이 뭘까, 규선아. 차마 꺼내지 못할 문장이 턱밑까지 치받았다. 까만 눈동자에 어린 걱정을 읽은 규선의 말이 이어졌다.

“어차피 세상에 이유 없는 호의는 없잖아요. 뭐. 저도 인생 오래 산 건 아니지만… 살다 보니 그렇던데요?”

“…….”

“굳이 계산기를 두들겨 보자는 말이 아니라, 돌이켜 보면 결국 뭐든 이유가 있더라고요. 그게 좋은 이유든 나쁜 이유든 간에요. 아마 형한테 집을 빌려준다는 사람도 마찬가지겠죠.”

영업직으로 사람을 많이 만나는 규선은 가끔 이렇게 인간관계를 건조하게 꿰뚫어 보곤 했다. 때로는 흉내라도 내고 싶었던 냉철함이었건만, 역시 쉽게 따라 할 수 있을 것 같지 않다. 지훈은 맥없이 웃으며 어깨를 으쓱했다.

* * *

[1. 직무에 대한 지원 동기와, 이를 위해 어떤 준비를 해 왔는지 기술해 주십시오.]

노트북 화면 속 커서의 깜박임을 한참이나 노려보던 지훈은, 답을 쓰는 것 대신 머리를 뒤로 젖혀 소파에 기댔다.

1년 8개월을 꼬박 근무하고 그만둔 지 한 달이 거의 다 되어 가는 이전 회사의 첫 질문도 딱 저랬었다. 오랜만의 구직인 만큼 감을 되찾을 겸, 수시 채용하는 곳에 서류라도 넣어 볼까 싶었는데. 어째 첫 문장부터 안 좋은 기억이 스멀스멀 올라온다.

가장 관심 가는 회사들은 아직 채용 시즌이 아니어서 다행이었다. 마음도 추스르고 합격 사례들을 살펴보며 준비할 시간이 있다.

“뭐가 잘 안 되나요?”

지훈은 그제야 슬쩍 고개를 들어 다정한 목소리가 들린 곳을 바라보았다. 밖에서 볼 때마다 감탄이 나올 정도로 완벽한 남자가 제 왼쪽 허벅지를 베고 누워 있는 모습이라니. 당장 눈에 담고 있는데도 한없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서해원 변호사님.”

“네에.”

문득, 편안하게 늘어진 갈색 머리카락을 만지고 싶다는 욕구가 고개를 들었다. 하지만 우습게도 그걸 행동으로 옮길 자신이 없었다. 몇 번이나 몸을 섞고 키스를 했는데도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건 망설여지다니. 이상하다는 걸 알지만 어쩔 수 없었다.

지훈은 제 입술만 올려다보는 남자를 향해 천천히 말을 이었다.

“오늘… 이유 없는 호의는 세상에 없다는 말을 들었습니다.”

“누가 그랬는데요?”

“고등학교 후배요. 오늘 카페에 인사하러 들렀길래 이야기하다가, 어쩌다 보니.”

“틀린 말은 아니네요.”

어쩌면 좀 더 제대로 말을 해야 했다. 규선이 저를 찾아온 이유에 대해서. 저 대신 채무를 신경 써 주고 있는 사람이다. 경인이 저 말고도 여기저기 빚을 졌다는 걸 알리는 게 맞다.

하지만 왠지 오늘 밤은 당연한 것들을 따를 기분이 아니었다. 사실, 다른 사람을 주제로 떠들고 싶지 않았다는 게 정확할지도 모른다.

“……그럼, 변호사님은요?”

이 순간, 지훈이 정말 궁금한 건― 아니 알고 싶은 건 따로 있다.

“변호사님의 호의에는 무슨 이유가 있습니까?”

“…….”

“저한테 왜 이렇게 잘해 주시는 겁니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전, 도움받은 것의 절반… 아니 그 반의반도 돌려드리지 못할 건데요.”

해원의 맑고 연한 갈색 눈동자는 빛을 받으면 꼭 그걸 흡수하는 것처럼 보인다. 지훈은 차마 그 눈과 시선을 똑바로 마주하지 못하고 괜히 다른 곳을 봤다. 깊은 밤. 도시의 야경이 한눈에 들어오는 거실 안은 그 어둠만큼이나 조용한 침묵이 흘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나직하지만 분명한 목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아무래도 오늘 고향 후배랑 제 이야기를 한 모양이네요.”

“예?”

“아마 지훈 씨 후배는 유경인이 여기저기서 돈으로 얽힌 것 때문에 찾아왔을 테고. 그러다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집에서 살고 있다는 얘기라도 했겠죠.”

“…….”

“후배가 그러던가요. 이유 없는 호의를 베풀 사람은 없다고?”

담담한 어조만큼 쿵, 심장이 내려앉았다.

해원의 짐작은 등줄기로 식은땀이 배어 나올 만큼 정확했다. 단 한 가지 틀린 게 있다면 제가 ‘잘 알지도 못하는 남자의 집에서 산다’고 말했으리라는 부분 정도일까.

죄인 같은 심정이 되어 간신히 고개를 바로 하자, 여전히 무릎 위에 나른하게 머리를 뉘인 해원이 간지럽게 눈웃음쳤다. 다시 저를 바라봐 주어 기쁘다는 듯한 미소였다.

“앞서 했던 말을 정정해야겠네요. 세상엔 분명 이유 없는 호의도 있어요. ……뭐, 하지만 내가 그렇다는 건 아니고. 그 반대죠.”

“반대…요?”

“나는 그저 권지훈 씨, 당신에게 받았던 걸 돌려주고 있는 거니까.”

해원은 거대하지만 우아한 육식동물이 기지개를 켜듯 몸을 일으켰다. 하지만 지훈은 무릎이 비고, 크고 따뜻한 손이 뺨에 닿을 때까지도 들은 말을 채 다 이해하지 못했다.

나한테 받았던 걸 돌려줘? 내가 저 사람에게 ‘이유 없는 호의’를 베푼 적이 있다고?

지훈은 이미 몇 번이나 헤집은 기억을 새삼스레 다시 뒤적였다. 하지만 감히 확신하건대 살며 저런 밝은 갈색 눈동자를 가진 사람은 마주친 적은 없었다. 결국, 꺼낼 수 있는 말은 하나뿐이었다.

“저는……, 서해원 변호사님을 도와드린 적이 없는데요.”

길고 늘씬한 목이 살짝 옆으로 기울었다. 이미 예상한 답이라 놀랍지도 않다는 태도였다. 지훈은 속을 채 다 읽을 수 없게 가늘어진 눈을 보면서 조금 급하게 물었다.

“변호사님. 전부터 궁금했습니다만, 변호사님은 절 꽤 이전부터 알고 계신 거 같은데. 대체 언제부텁니까?”

사실 진작 확인했어야 할 질문이 이토록 늦게 흘러나온 건 모두 해원 때문이다. 차마 ‘처음 섹스할 때 저와 섹스하는 걸 너무 많이 상상하다 보니까 여기가 안 젖는다는 걸 깜박했다고 하셨는데, 그 의미가 뭡니까?’라는 말을 꺼낼 엄두가 안 나서다.

물론 지금이라고 해서 그런 노골적인 소리를 할 수 있다는 건 아니다. 상대의 뻔뻔함이 아주 조금은 옮았는지, 들뜬 채로나마 채근할 수 있게 됐다는 정도다.

하지만, 시종일관 느긋하던 남자가 처음으로 시선을 피한 것도 그 때였다.

“먼저 말해 주면 재미없잖아요. 지훈 씨가 알아내야죠.”

만약 눈을 감고 있었더라면 서해원의 동요를 짚어낼 수 없었을 거다. 느긋하다 못해 장난기마저 어린 목소리만큼은 평소와 다를 게 없었으니까. 그런데도 지훈은 태연하게 말하는 해원에게서 평소와는 다른 위화감을 느꼈다.

사실 이 순간 제가 짚어낸 감정의 이름을 확신할 수 없었던 건, 저 완벽한 남자가 왜인지 이 화제에 자신 없어 보였기 때문이다.

자신이 없다니. 세상 어디에 둬도 그럴 수 없는 사람 같은데.

해원의 손이 지훈의 뺨을 쓸다가 귓불 바로 아래턱의 시작점으로 향했다. 지훈은 그 간지러운 촉감에 어깨를 떨면서도 남자의 표정을 뜯어 살피는 걸 멈추지 않았다. 그 집요함 덕분일까. 잠시 말을 고르는 것 같던 해원이 이어 속삭였다.

“그래도 조금은 귀띔을 주자면, 내 호의의 이유는 물질적인 걸 원해서는 아니에요.”

“……그럼요?”

“글쎄. 좀 더 개인적인 관계가 되었으면 한달까요.”

쉽사리 속을 내보이지 않는 남자를 탐색하는 데 열중하던 지훈은 순간 잘못된 조각을 빼낸 젠가처럼 평정을 잃었다. ‘개인적인 관계’라는 단어를 되새기는 동공도 작게 흔들렸다.

묘하게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던 남자가 여유로움을 되찾은 건 그 덕분이었다. 가지런한 손끝이 턱선을 그리듯 움직일수록 지훈의 고개가 저도 모르게 살짝 들렸다. 전세가 역전됐다.

간신히 마른침을 꼴깍 삼킨 지훈은, 떨리기까지 한 목소리로 물었다.

“저, 그거… 혹시. 사귀자는…, 말씀입니까?”

“아뇨.”

드물게도 강한 어조의 부정이었다. 고운 미간까지 옅게 찌푸린 해원 앞에서 순간 어깨가 축 늘어졌다. 하지만 그건 꽤 성급한 반응이었다.

“사귀는 거로는 안 돼요. 그딴 거로 만족이 될 리가.”

“…….”

“날 사랑해 주세요. 내가 지훈 씨를 사랑하는 것처럼.”

오만하게 굴려는 건 아니지만, 사실 지훈은 이제껏 사랑이라는 단어를 무겁게 생각해 본 적 없었다. 그 말에 심장이 뛴 적조차 많지 않다. 기껏해야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연애에서 상대가 처음으로 ‘사랑해, 잘 자.’라고 슬쩍 내뱉는 순간 가볍게 웃음 지은 게 전부일까. 시작만 멋쩍지 그다음부턴 입버릇보다 쉬워지는 것. 그게 사랑이었다.

하지만 무서울 정도로 일렁이는 눈을 한 서해원이 말하는 사랑은 무언가 달랐다.

지훈은 문득 저를 바라보는 해원에게서 굶주린 육식동물을 겹쳐 봤다. 허기에 지쳐 헐떡이면서도 사육사를 향해 이빨을 내미는 본능을 억누르는 것을 사랑이라고 할 수 있나? 만약 그렇다면, 저 애정은 태생부터 다른 무언가다.

지훈은 잠시 숨 쉬는 것조차 잊은 채 얼어붙었다. 정말이지 건강한 심장을 타고난 것에 감사해야 했다. 이 짧은 순간에도 추락과 상승을 반복한 마음이, 끝내 감정의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짜내졌으니.

“사, 사랑…, 이요?”

“당장 바라는 건 아니에요. 난 욕심이 많지만, 성격까지 급하지는 않거든요.”

그 어느 때보다도 다정하게 눈웃음친 해원이 목덜미 가까이 고개를 숙였다. 따뜻한 숨결이 와 닿는 순간 여린 살갗 위로 확 소름이 돋았다.

“지훈 씨. 우리, 진도는 5단계 정도로 천천히 나눠서 나갈까요?”

이미… 진도 나갈 건 다 나가지 않았나.

지훈은 저도 모르게 얼마 전의 그라면 감히 꿈도 꾸지 못했을 생각을 했다. 하지만 이어진 달콤한 말은 그런 발칙한 상상마저 아득히 뛰어넘었다.

“1단계는 섹스, 2단계는 키스. 자, 다음은 뭘 할까요?”

“……왠지 무서운데요.”

목선을 따라 입 맞추던 해원이 소리 내 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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