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사랑의 기원
지훈의 일주일은 기본적인 의식주를 제외하면 딱 세 가지로 채워진다.
아르바이트, 구직 활동, 그리고 운동.
혼자 조용히 있으면 쉽게 생각에 매몰되는 지훈에게 주 3일의 카페 아르바이트는 꽤 좋은 환기다. 약간의 용돈벌이는 부차적인 이득이고 정신에 좋다고나 할까. 여러 사람을 만나 이야기하고, 두 시간 정도 반짝 바쁘게 보내고 나면 쓸데없이 부풀었던 걱정까지 한결 가벼워진다. 무엇보다 의주에서 어머니의 가게를 도울 때가 생각나서 좋다.
다음은 구직 활동이다.
마음에 드는 회사를 추리고, 자기소개서를 쓰고. 또 어떤 날은 그전까진 생각해 보지 않았던 분야까지 두루 살핀다. 십년지기였던 인간이 모든 물건을 팔아먹은 와중에도 깜박하고 회사에 두는 바람에 유일하게 살아남은 노트북은 덕분에 평일과 주말을 가리지 않고 혹사당한다.
그리고 마지막, 운동.
솔직히 이 운동은 두 종류다.
“…후우….”
가볍게 물로 샤워하고 나온 지훈은 머리의 물기를 대충 수건으로 턴 다음 소파에 풀썩 앉았다.
이전 회사 근처에 등록했던 몇 개월 남은 피트니스 센터는 혹시라도 전 동료들을 만날까 싶어 가지 못한다. 하지만 고맙게도 새로운 동거인은 집에 운동방이 있었다. 덕분에 지금처럼 지훈은 이동시간 낭비 없이 운동할 수 있게 됐다.
그리고 그가 퇴근하고 돌아온 밤에는……. 지훈은 손목 안쪽에 있는 흐린 자국을 만지작거렸다.
장담컨대 서해원과의 섹스는 운동의 범주에 들어간다. 살면서 단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자세로, 써 본 적 없는 근육을 쓰는 그것을 운동이라 하지 않기엔, 숨이 차다 못해 전신에 힘이 빠져 널브러지지 않은 적이 없었으니 말이다.
“개인적인 관계라….”
지훈은 소파에 멍하게 앉은 채로 혼잣말했다.
요즈음, 이렇게 쉬는 시간이 되면 지훈의 머릿속은 이 집의 주인으로 가득 찬다. 해원 혼자 일방적으로 아는 사이였다고 하기엔 제가 이유 없는 호의를 베푼 적 있다는 말이 의미심장하다.
게다가 묘하게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건 우리가 알고 지낸 시점을 물었을 때 그가 보인 태도다. 제대로 눈을 마주치지 않고, 아니, 마주치지 ‘못하고’ 정확한 대답을 피하던 모습이라니.
서해원. 서해원. 서해원.
반듯하고 예쁜 이름을 아무리 연거푸 곱씹어봐도 떠오르는 건 없다. 거기에 SJ의 회장 아들이라니. 대체 그런 위치의 사람이 제 인생에 끼어들 여지가 어디에 있나 싶다.
어쩌면 이 모든 것이 걱정을 사서 하는 제가 만들어 낸 고민일지도 모른다. 어울리지는 않지만, 해원 역시 원나잇으로 시작했던 것이 민망해서 그냥 해 본 말일 수도 있다. 그래서 그렇게… 자신 없는 듯한 얼굴을 했던 거고.
한참이나 기억 속 모든 얼굴을 되새기던 지훈은, 이내 소파 한쪽에 두었던 노트북을 열었다. 곧이어 입력한 검색어는 단출했다.
‘SJ 회장’
엔터를 치기가 무섭게 곧장 떠오른 건 뉴스 기사를 오가며 보았던 얼굴이었다. 포털 사이트에 걸리는 것이니만큼 가장 좋은 사진을 썼을 텐데도, 억센 이목구비와 웃음기 없는 표정은 딱 보기에도 불같은 성정이 그려졌다. 갸름하고 유려한 미남인 해원과는 딴판인 모습이었다. 아무래도 외탁이려나. 입가에 옅은 미소가 어렸다.
하지만 그 순간이었다.
“차……태욱?”
굵은 폰트로 적힌 SJ 회장의 이름 석 자를 한발 늦게 되짚은 지훈의 눈이 커졌다.
차태욱. 차태욱. 차, 태욱. 지훈은 앞서 해원의 이름을 몇 번이나 입 안으로 굴렸던 것처럼 강건해 보이는 이름을 연거푸 중얼거렸다. 노트북 키보드 위로 다시 손이 움직였다.
‘SJ 차태욱 서해원’
나란히 적은 이름은 얼굴만큼이나 닮은 게 하나 없어 보였다. 지훈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엔터 키를 꾹 힘주어 눌렀다.
하지만 이내 화면에 떠오른 건 지극히 건조한 타이틀의 기사 몇 개가 전부였다. ‘법무법인 이랑의 서해원 변호사를 SJ 전략기획실 법무팀장으로 영입’. 작년 가을의 일이다.
덕분에 온갖 생각이 머릿속을 휩쓸었다. 아버지라고 말한 ‘회장님’이 SJ의 회장이 아닌 건가? 겨우 하나 더 알게 됐다 했더니 그마저도 잘못 짚은 거였나? 기사를 훑는 지훈의 눈이 순간 깜박이는 것마저 잊은 채 멍해졌다.
숨소리마저 들리지 않던 고요가 깨어진 건 그 순간이었다.
“―아! 지훈 님. 집에 계셨군요.”
쾌활한 인사의 주인공은 김 비서였다. 왠지 나쁜 짓을 하다 걸린 기분이 된 지훈은 허둥지둥 노트북을 소리 내 덮었다. 김 비서는 양손에 바리바리 생필품이니 가벼운 식자재니 하는 것들을 가득 들고 있었다.
지훈은 자연스럽게 그를 따라 주방으로 들어갔다.
“정리하는 거 도와드리겠습니다.”
“네? 무서운 소리 마세요. 걸리면 욕먹습니다.”
“어― 그래도.”
“그래도, 안 됩니다. 여기 옆에 예쁘게 앉아서 구경이나 하십쇼.”
그냥 한 번 거절하는 말이라고 생각했는데 김 비서의 태도는 꽤 강경했다. 결국 지훈은 멋쩍게 턱을 긁적이며 커다란 아일랜드 식탁 한편에 앉았다.
그나마 다행인 건 김 비서는 이 모든 것이 꽤 능숙해 보였다는 거다. 동선 낭비 하나 없이 물건을 정리하기 시작한 손은 빠르다 못해 빈틈 하나 없었다. 어쩌면 정말 제가 끼어드는 게 더 귀찮은 일이었을지도 모르겠다.
업무는 물론이고 생활 전반까지, 김 비서는 말 그대로 서해원의 수족이나 다름없었다. 어쩌다 마주치기만 해도 얼음이 되는 다른 고용인들과는 달리 그에게 장난도 치고 때론 목소리를 높여 따지기까지 하고 말이다.
일사불란한 김 비서를 말 그대로 ‘예쁘게 앉아 구경하던’ 지훈은, 잠시 망설이다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 김 비서님.”
“넵.”
“다른 게 아니고… 한 가지 궁금한 게 있는데요.”
깍듯하게 대답하던 김 비서의 움직임이 뚝 멈췄다. 거기에 왠지 순식간에 퀭한 기운이 어린 눈까지. 덕분에 최대한 일상적인 어조로 말문을 뗐다고 생각했던 지훈은 그 가볍지 않은 반응 앞에서 당황을 감추지 못했다.
“아! 들어 보시고 말씀하시기 곤란한 거라면 당연히 대답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
“혹시 제가 뭐라도 실수하게 될까 봐… 여쭙고 싶은 거라.”
누가 말을 걸든 2초 안에 대답할 것 같던 김 비서는 지훈이 그를 알게 된 이래 처음으로 한참이나 침묵했다. 혹시 뭐라도 실수한 걸까. 스스로가 한 말을 돌이켜 보아도 딱히 짚이는 건 없었다. 애초에 무슨 질문을 던진 게 아니었으니 말이다.
잠시 뒤. 긴 정적 끝에 열린 비서의 입은 지훈의 초조함을 전혀 다른 방향으로 틀었다.
“변호사님, 아니, 법무팀장님이 지훈 님을 어떻게 알고 계시는지. 그거 빼고는 다 말해드릴 수 있을 겁니다.”
“설마 김 비서님은 다 알고 계신 겁니까?”
“네. 불행히도요.”
“와아…….”
“정말 죄송합니다. 그래서 그것만큼은 좀 곤란합니다. 혹 지훈 님이 물어봐도 절대 말하지 말라고 하셔서.”
솔직히 물어보려던 건 이게 아니었는데 뜻밖에 얻어걸린 정보였다. 덕분에 해원이 그냥 했던 말이 아닐까 하는 확률 낮은 가정은 완전히 사라졌다. 동시에, 이 사람에게 저라는 인간의 첫인상이 상사의 침대 속에 숨어 있던 원나잇 상대만은 아니라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하나, 하는 생각도 들었고 말이다.
하지만 한편으로는 의아함이 더 커지기도 했다.
“저, 그럼 다른 걸 여쭤봐도 되겠습니까?”
“네. 제발, 뭐든지요.”
김 비서의 태도는 꽤 순순했다. 지훈은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살짝 적신 다음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일전에 변호사님이랑 같이 있던 중에 전화가 왔었습니다. 서 변호사님이 ‘회장님’이라고 부르는 분이셨는데.”
“아마도 저희 SJ의 차태욱 회장님이실 겁니다.”
어떻게 말을 꺼내야 할지 막막해서 빙빙 돌려 시작한 대화였건만, 걱정이 무색해질 만큼 흐름이 빨랐다. 덕분에 당황한 건 지훈이었다.
“차, 차태욱 회장님이요?”
“법무팀장님 개인폰으로 연락할 회장님은 그분뿐이셔서요. 그런데요?”
“예? 어― 그게…, 음. 서해원 변호사님은… 그분이 아버지라고 하셨거든요. 그런데, 그….”
삐끗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던 지훈은 말을 몇 번이나 더듬으며 문장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했다. 실로 드문 태도였다.
눈치 빠른 비서는 이제까지의 대화를 복기하며 조용히 머리를 굴렸다. 능구렁이 같은 상사와 정반대인 청년을 벌써 한 달 넘게 지켜본 그는 권지훈이 웬만한 일로 저러지 않는다는 것쯤은 안다.
다행히 답을 찾는 건 그리 어렵지 않았다.
“아아. 왜 ‘차해원’이 아니라 ‘서해원’인지 궁금하신 모양이군요.”
사르르 눈을 접어 웃을 뿐 도통 속내를 드러내는 일 없는 해원과는 달리, 지훈은 곧장 정곡을 찔린 표정이 됐다.
“……죄, 죄송합니다.”
“죄송하긴요. 저라도 그럴 텐데요.”
김 비서는 탁탁, 소리 내어 마지막 물건을 갈무리해 넣은 다음 걸치고 있던 재킷을 벗었다. 물건만 정리하고 가려던 일정이 바뀐 탓이다. 돌아선 그의 등 뒤로 지훈의 시선이 졸졸 따라다녔다.
비서는 그라인더에 원두를 넣어 갈기 시작했다. 위이이잉, 짧고 요란한 소음이 났다.
“지훈 님. 금환은 아시나요?”
묘하게 죄스러운 긴장으로 뻣뻣해져 있던 지훈은 갑작스러운 질문 앞에서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예?”
“주식회사 금환이요. 금환 화학, 금환 시스템…, 또 뭐가 있더라.”
“―금환 철강. 그럼요. 압니다.”
“아, 이전에 다니셨던 곳이 철강회사라고 하셨죠.”
김 비서는 느긋하게 말을 이으면서도 커피 추출 준비를 금세 마쳤다. 보아하니 이곳에서 한두 번 커피를 뽑은 게 아닌 모양이었다. 실로 오랜만에 대접받는 위치가 된 지훈은 그 모습을 조용히 지켜봤다.
“그럼 직군이 다르다 보니 아무래도 금환재단 서명희 이사장님 존함은 들어보기 힘드셨겠군요.”
“금환재단… 서명희 이사장님이요?”
“열다섯 살이었는지, 열여섯 살이었는지… 하여간, 그쯤이었다고 합니다. 두 분 부부께서 법무팀장님을 외아들 삼기로 했던 때가.”
반자동 커피 머신의 기계음과 담담한 어조. 그 두 개의 합주에 홀린 듯 있던 지훈이 들은 문장의 의미를 정확하게 깨달은 건, 몇 초 뒤의 일이다.
“―아.”
“잉꼬부부였던 두 분이 처음으로 다투셨다던데요. 차 씨와 서 씨. 어느 쪽의 성을 할지로요.”
“…….”
“그때 서명희 이사장님께서, 나중에 황혼이혼이라도 하게 된다면 ‘우리 해원이’를 SJ에서 데려가게 되는 건데 그 꼴은 못 본다고 외치셨답니다. 뭐. 이건 저도 들은 소문이긴 합니다만.”
어떤 말을 해야 폐가 아니려나. 아니, 이걸 내가 들어도 되는 게 맞나? 지훈의 머릿속엔 몇 초 동안 작은 태풍이 몰아쳤다. 하지만 정작 폭탄을 던진 쪽은 평온하기만 했다.
결국 지훈이 택한 건 진실되지만 나름 절제된 반응이었다.
“어, 엄청나네요….”
“그 고집 센 차태욱 회장님이 바로 접고 들어가셨다니 보통은 아니시죠. 게다가 결과적으로는 당사자가 그걸 마음에 들어 하니 잘된 일이기도 하고요.”
드디어 처음으로 익숙한 사람이 나왔다. 지훈은 그걸 놓치지 않았다.
“당사자가 마음에 들어 한다는 건, 서해원 변호사님 말씀이십니까?”
“뭐, 저도 언제였나 여쭤본 적이 있거든요. 혹 회장님 성 대신 이사장님 성을 따르게 된 게 싫지는 않았냐고요. 그런데…….”
집주인의 취향만큼 심플한 커피잔 안으로 진한 에스프레소가 따라 옮겨졌다. 혹시 한 방울이라도 흘릴까, 잠시 숨까지 멈췄던 김 비서의 말이 이어졌다.
“‘어머니께서 일부러 내 배경을 하나 더 만들어 주신 건데, 싫을 리가요.’라며 웃으시던데요.”
지훈은 대답 없이 조용히 침묵했다. 하지만 이번에는 당혹 때문이 아니었다. 처음 그의 배경을 깨달았을 때 몇 초 동안 스쳐 지나갔던 생각 따위가 무색할 만큼 깊은 애정이 전해져서다.
확실히 ‘서해원’은 제 편이 둘이다. 그것도 SJ와 금환. 하나같이 이 반도의 경제를 쥐락펴락하는 것들로 말이다.
어느새 지훈의 앞으로 잔을 놓은 김 비서는 저도 그 맞은편에 앉았다. 지훈은 작게 “감사합니다.” 하고 꾸벅 인사하고는 커피를 한 모금 삼켰다. 적당한 산미가 감도는 진한 에스프레소였다.
“하여간, 이건 비밀도 아니니 걱정 않으셔도 됩니다. 당장 본사 사람들은 다 아는 이야기여서요. 본인이 먼저 차태욱 회장님을 아버지라고 소개했다면 더욱 더요.”
혹시라도 앞선 걱정을 할 것을 우려한 탓인지 유독 가볍게 덧붙여진 말이었다. 서해원 변호사님 곁에는 좋은 분들이 많구나. 지훈은 생각했다.
삐죽 머리를 들었던 의문은 해결됐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해원과의 거리가 좁혀진 것 같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사람과 저 사이의 교집합이 무엇일지 더욱 궁금해졌을 뿐이다.
“아! 물론, 아직은 공개적으로 밝힌 이야기는 아닙니다. 어차피 나중엔 좋든 싫든 수면 위로 올라오겠지만요.”
“예, 주의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김 비서님.”
“어유. 저야 말로요. 솔직히 저한텐 이쪽이 훨씬 더 쉬운 질문이었는데요?”
김 비서가 너스레를 떨며 웃었다.
* * *
[안녕하세요. 해성 물산 채용 담당자입니다.
지원을 위해 귀한 시간 내주셔서 진심으로 감사드립니다. 이번 서류전형 심사에서 귀하의 자질은 높게 평가되었으나….]
지훈은 문자를 더 읽는 걸 포기했다. 어차피 끝까지 보지 않아도 그다음을 훤히 그릴 수 있는 통보다.
‘경험 삼아 서류를 넣어 보자’를 시작한 지 벌써 몇 번째. 지원한 회사는 다 다른데 결과는 왜 이렇게 판에 박힌 듯 똑같은지. 지훈은 제 무릎에 머리를 베고 누워 서류를 들여다보는 남자를 향해 몸을 푹 숙였다. 그는 조금 놀란 듯했지만, 지훈을 밀어내는 대신 표정을 볼 수 없을 만큼 파묻힌 머리를 가볍게 쓰다듬었다.
서로의 숨소리만이 대화를 대신하는 침묵 끝에 먼저 입을 연 건 해원이었다.
“……또?”
“또.”
돌아온 대답은 유독 작았다. 덕분에 해원은 한숨을 꾹 삼키며 결 좋은 머리카락만 만지작거렸다.
주관적인 콩깍지를 제외하고 보더라도 확실히 권지훈은 일머리가 있다.
아르바이트하는 것만 봐도 그렇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점심에는 일찌감치 인기 메뉴들을 곧장 만들 수 있게 준비해 두는 건 기본에, 사장에게 귀띔해서 어느새 쿠폰까지 만들었다. 생긴 지 얼마 안 된 카페니만큼 단골을 만들기 위함이다. 덕분에 해원은 요즘 카페에 갈 때마다 매장 한쪽 벽에 붙은 코르크 보드에 쿠폰을 꽂아 둔 핀이 늘어나는 걸 세는 재미가 생겼을 정도다.
이런 사람이 회사에서 얼마나 잘할지 뻔히 그려지는데. 왜 그 좋은 스펙을 가지고 번번이 서류에서 미끄러질까.
“지훈 씨. 고개 들어 봐요.”
한참을 꼼짝 않고 있던 지훈은 그제야 머리를 빼꼼 들었다. 짙은 눈썹이 아래로 휜 것이 영 기운이 없다. 해원은 속으로 혀를 차면서 자세를 바로 하고 앉았다.
“제일 가고 싶은 곳은 어디라고 했었죠?”
“……리델이요. 5월쯤 공고가 뜰 거라고 합니다.”
“그럼 아직 여유가 있네요.”
“그래도, 자신이 있는 건 아니라. 무엇보다 이번에 떨어진 해성 물산도 정말 괜찮았는데.”
말이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곧은 어깨가 슬슬 처졌다. 덕분에 해원은 ‘그럼 내 밑에서 일할래요?’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올라온 것을 간신히 참아야 했다. 지훈의 성격상 든든한 뒷배가 생겼다고 생각하기는커녕, 이제까지의 노력을 완전히 부정당하는 것으로 느낄 것이 뻔해서다.
솔직히 이해도 안 됐다. 지훈이 일머리가 있다는 게 객관적인 판단이라면, 주관적인 판단으로는 대체 이 사람을 떨어트리는 멍청이들의 뇌를 해부해 보고 싶을 뿐이다. 저라면 무슨 짓을 해서라도 곁에 둘 텐데.
그 때, 지훈의 한숨 어린 말이 이어졌다.
“서류 통과하고 면접까지 가면 열에 아홉은 붙는데… 항상 이렇습니다. 서류가 문제예요.”
“…….”
“그래서, 이전 직장 다니면서 토익 점수도 950점까지 올리고 자격증도 엄청 땄습니다. 결과는… 달라진 건 없지만요.”
물구나무서기를 한 채로 봐도 소위 ‘면접 프리패스상’인 남자의 어울리지 않는 자학은 끝도 없이 이어졌다. 하지만 그 덕분에 조금은 힌트를 얻기도 했다. 해원은 지훈의 곁에 더욱 바짝 붙어 앉은 다음 짐짓 산뜻한 어조로 물었다.
“지훈 씨. 괜찮다면 제가 지훈 씨 서류들을 좀 볼 수 있을까요?”
“예?”
“이력서랑 이번에 낸 해성 물산 자기소개서요. 따로 저장해 둔 파일, 있죠?”
지훈은 조금 움찔하기는 했지만 해원의 제안을 마다하지는 않았다. 물론, 자신 있게 반긴 것도 아니다. 노트북을 가지고 와서 이력서와 자기소개서 파일을 여는 내내 머뭇거림이 묻어났다.
“흠…….”
무표정한 얼굴로 보는 것보다 입가에 옅은 미소를 띤 채로 보는 게 더 무섭다. 지훈은 다정하지만 엄한 선생님에게 밀린 숙제 검사를 받는 것처럼 눈만 데굴데굴 굴렸다.
사실, 지훈은 요즈음 포털 사이트에 ‘서해원 변호사’를 꽤 자주 검색했다. 그리고 그 덕분에 제게 사랑을 고백한 남자가 어떤 사람인지 아주 조금쯤은 알게 됐다.
유명 대형 로펌에서 기업 형사 소송 분야에 있던 해원은 거대한 돈이 오가는 소송의 뉴스 끝자락이나 법조인 대상 사이트에서 그 이름이 자주 보였다. 특히 그의 주특기는 1심이나 2심에서 진 사건을 맡아 대법원 승소까지 확정하는 것이라고 했다.
권지훈은 법에 문외한이었지만, 그게 쉬운 일이 아니라는 것쯤은 알 것 같았다.
“…저. 혹시, 눈에 띄는… 문제라도 있습니까?”
“문장 자체는 흠잡을 데 없어요. 비문도 없고, 간결하지만 하고 싶은 말은 분명히 전달되고.”
“그런…데요?”
글자와 말로 다퉈 이기는 것이 전문인 사람에게 제 인생이 너무 어설피 직조되어 보이지 않기를 바랐지만, 역시 쉽지 않았던 모양이다. 문장 자체는 흠잡을 데 없다는 말은 뒤집어 보면 다른 곳에는 문제가 있다는 뜻이니 말이다.
손가락 끝으로만 턱을 짚은 채로 슥 바라보는 해원의 움직임은 지극히 우아했다. 밝고, 또 맑은 연갈색 눈동자와 눈이 마주친 순간 지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그런데 조금, 날것의 정직함이지 않나요?”
“―아! 예전에 스터디 할 때도 그런 말을 듣기는 했었습니다. 그, 그래서 꽤 고친…건데.”
“네에…….”
상냥한 응대였지만 단 두 음절에 숨겨진 뜻을 깨닫는 건 어렵지 않았다. ‘고친 게 이 정도라면 그 전은 안 봐도 알겠다.’ 노트북을 나란히 들여다보던 지훈의 머리가 자연스레 해원의 어깨로 툭 떨어졌다.
남중, 남고, 유독 남초였던 학번을 거쳐 첫 직장은 극한의 남초 회사. 온종일 동성에게 둘러싸여 지냈던 탓일까, 뻣뻣한 성격과는 달리 지훈은 은근히 가벼운 스킨십을 곧잘 했다. 물론 자각은 전혀 없는 듯했지만 말이다. 서해원에게는 참 기쁜 일이다.
“기본적인 질문은 다 비슷할 테니까, 조금만 손대 볼까요.”
최고의 업무환경 앞에선 자진해서 일하고 싶어지는 법이다. 어깨에 머리를 기댄 지훈이 불편하지 않도록 자세를 곧게 한 해원은, 그의 생애 없던 자기소개서 첨삭을 시작했다.
그러자 ‘인생에 큰 굴곡은 없었지만 나름 최선을 다해 살았고 쨌든 뽑아주시면 성실히 일하겠습니다’로 요약 가능한 권지훈의 인생에 마법이 일어났다.
평범한 대학 동아리 활동은 치열하게 불타올랐던 기억으로.
제가 얼마나 우주의 먼지 같은 존재인지 알게 된 인턴십은 이 분야를 향한 애끓는 열정으로.
만나서 더러웠고 다시는 보지 말자 이를 갈았던 프로젝트는 일에 너무나도 목말랐던 시기 주어진 단비로.
묵묵히 지켜보다 팔뚝 위로 소름이 돋은 지훈은 어느 때보다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저어, 변호사님. 저 이렇게 대단한 사람 아닙니다.”
“대단하지 않아도 대단한 척하세요. 최소한, 말이라도.”
“말만 그런 건 허풍이잖습니까.”
“그런가요? 그래. 허풍일 수도 있겠네요.”
듣기 좋은 웃음소리가 들렸다. 슬쩍 눈만 굴려 옆을 바라보자, 여전히 키보드 위로 부지런히 손을 움직이는 해원이 그린 듯한 미소를 걸고 있었다.
“하지만 지훈 씨. 재밌는 건, 사람은 대단한 척 발버둥 치다 보면 어느새 말뿐이었던 모습이 진짜가 되기도 한다는 거예요.”
“…….”
“여유로운 척, 해 볼 만한 척, 무섭지 않은 척……. 처음에는 그냥 그런 척했던 것들이 사실이 되는 것도 재밌잖아요.”
널찍한 거실 안은 타자 소리 외에는 어떤 대화도 흐르지 않았다. 그건 나쁜 의미의 적막은 아니었다. 제 할 말을 다 한 해원은 지훈의 서류를 고치는 데 집중했고, 지훈은 그런 그의 옆모습을 보면서 생각에 빠졌을 뿐이니 말이다.
그 따뜻한 침묵이 얼마나 흘렀을까. 나직한 목소리가 고요를 갈랐다.
“서해원 변호사님.”
“네.”
“도와주신 덕분에 경인이… 그러니까, 저랑 같이 살았던 친구가 오늘 돈을 좀 갚았습니다. 감사합니다.”
예상치 못했던 이름의 등장에 해원의 가지런한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하지만 그 미세한 균열은 이내 싱그러운 미소에 감춰 사라졌다.
“천만에요. 나머지도 그렇게 오래 걸리지는 않을 거예요.”
“예? 아아, 걱정 안 합니다. 정말 만약에 남은 걸 못 받더라도 이만큼이라도 돌려받은 게 어딘가 싶은걸요.”
……이렇게 물러터질 수가.
해원은 가까스로 옅은 한숨 대신 입꼬리를 밀어 올렸다. 그는 제가 사랑하는 남자가 세상에서 가장 단호한 얼굴을 한 순두부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티끌 하나 없이 정직하고, 말랑말랑하고. 정말이지 딱 맞았다.
하지만 서해원의 속을 끓게 한 순두부 권지훈은 사실 아직 본론에 들어가지 않았다.
“저어. 얹혀사는 주제에 민망하지만, 생활비도 전혀 안 받으시고 그러니까….”
“누누이 말했지만 생활비는 정말 사양할게요, 지훈 씨.”
“예, 알고 있습니다. …그래서 드리는 말인데요.”
한시도 가만히 있지 않았던 해원의 긴 손가락이 처음으로 타이핑을 멈췄다. 자못 심각한 이야기가 나오려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사실 그 타자 소리에 묻어가듯 말을 이을 계획이었던 지훈은 순간 조용히 쏠린 이목에 목소리를 삐끗하고 말았다.
“―크흠, 흠, 호, 혹시, 이번 주말에 시간 되십니까?”
“…….”
“정말 바쁘신 거 알지만 그래도 쉬실 때 한 끼 식사 정도는 대접해 드리고 싶어서요.”
“식사요?”
“아! 식사가 별로면, 면접 보러 갈 때 입을 옷도 필요하거든요. 저보다 변호사님이 훨씬 옷을 잘 입으시니까… 괘―, 괜찮으시면, 혹시 조언을 얻으면 좋지 않을까 해서…….”
그렇지 않아도 영 멋없게 시작한 제안은 갈수록 흐지부지해졌다. 지훈은 해원의 눈조차 제대로 바라보지 못한 채로 어영부영 입을 다물었다. 짧은 정적 역시 조금 전과는 다른 어색함이 뚝뚝 묻어났다. 덕분에, 한 올 한 올 정성 들여 그린 듯한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1단계는 섹스, 2단계는 키스, 3단계는 데이트라. 뭐. 괜찮네요.”
“…….”
“하지만 데이트 신청은 좀 더 연습해야 할 거 같은데요. 권지훈 씨.”
지훈의 목덜미는 해원이 말을 이으면 이을수록 붉은 물을 흡수하는 종잇장처럼 벌겋게 익더니, 마지막에 가서는 얼굴까지 새빨개졌다. 해원은 인간에서 토마토로 전직한 지훈을 보면서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너무 낭만이 없어. 솔직히 조금 실망했어요?”
“……죄송합니다.”
웅얼거림에 가까운 대답이 흘러나온 후, 거실 안은 다시금 일정한 리듬의 타자 소리로 채워졌다.
하지만 여느 때와 같은 느긋한 평온은 없었다. 여전히 시뻘건 한 사람은 당장 어디에 머리라도 박고 싶은 표정이었고, 다른 한쪽 역시 말려 올라가는 입꼬리를 입술까지 깨물어 참느라 바빴으니.
대한민국의 내로라하는 총수 일가가 모인 서울의 한 부촌.
SJ그룹 차태욱, 금환재단 서명희 이사장 부부의 자택은 그 고요한 단독주택가 안에서도 유독 거대한 부지를 자랑한다. 하지만 오늘. 웬만해선 감히 소란스럽게 할 수조차 없는 그 대저택은 유독 걸걸한 불호령으로 쩌렁쩌렁 울렸다.
“못해도 한 달 전부터 이야기했는데 인제 와서 못 간다니. 대체 무슨 소리냐?”
“하하, 사정이 그렇게 됐는걸요.”
“우리 쪽 일은 아닐 테고…. 박 회장한테 너랑 같이 간다고 큰소리쳐 뒀는데, 안 돼!”
“왜요. 아버지께서 말씀 좀 잘해 주시면 되지 않을까요. 몇 없는 친구분인데.”
“서해원!”
차태욱 회장은 예순을 넘긴 나이가 무색하게 성악가처럼 목청이 좋았다. 그러나 뭇 심약한 자들은 심장을 부여잡을 그 호통도 하나뿐인 아들 앞에서는 무용지물이었다.
태평하게 “잘 부탁드립니다.” 하고 웃는 해원 앞에서 차태욱 회장의 속은 바짝 타다 못해 재만 남았다. 오랜 라이벌이자 막역한 친구인 희신그룹의 박 회장에게 이번에는 아들을 데려가 자랑하겠노라고 얼마나 큰소리를 쳐 뒀는데. 정작 코앞까지 다가온 중요한 행사에 빠지겠다니!
차태욱 회장은 급히 든든한 아군에게 SOS를 보냈다. 바로 옆자리에서 내내 말 한마디 더 하는 일 없이 차만 마시던 그의 부인, 서명희 이사장이다.
“당신도 뭐라고 말 좀 해 보세요. 해원이 이 녀석, 요즘처럼 중요한 시기에 갈수록 뺀질뺀질한다니까요.”
“으음, 확실히… 오래전부터 말해 둔 행사인 만큼 갑자기 불참하는 건 보기 좋은 일은 아닐 텐데.”
옳거니. 잘됐다. 차 회장은 방긋 예쁘게 웃기만 하던 아들이 슬쩍 경직되는 걸 보며 내심 안도했다.
어릴 때부터 ‘엄마 말 잘 들어야 한다!’라고 귀에 못이 박이게 말한 탓일까, 서해원은 정말 어머니인 서명희 이사장의 말만 잘 듣고 다른 일엔 능구렁이처럼 빠져나가는 아들로 자랐다. 하지만 뭐, 잘됐다. 어디 집안 누구 자식은 답 없는 개망나니로 산다는데, 부모 중 한 명 말이라도 듣는 게 어딘가 싶은 그였다.
그러나 그건 일러도 너무 이른 안도였다. 믿었던 보루인 아내가 동그란 금색 안경테를 추어올리며 덧붙인 물음 때문이었다.
“아들. 혹시 데이트라도 가니?”
닮은 것 하나 없는 부자의 눈썹이 동시에 꿈틀했다. 특히 아직은 절대 말할 생각 없었던 정곡을 찔린 해원은 저도 모르게 고운 미간까지 좁혔다.
사실 가장 쉬운 대답은 정해져 있다. 그저 ‘아니요.’라고 하면 된다. 그냥 개인적인 일정이 생겼노라고 둘러대면 괜한 관심을 끌거나 설명할 일 없이 해결된다. 만약 보통의 상황이었다면 망설이지 않고 그렇게 했을 거다.
그러나 서해원에게 권지훈은 보통도, 감히 부정할 수 있는 사람도 아니다.
“……김 비서가 뭐라고 하던가요?”
“호호, 글쎄.”
“어머니.”
“으응, 모르겠대도.”
다 알면서 모르는 척 눙치는 건 서명희 이사장의 전매특허다. 괜히 뭐라고 말을 붙일 수도, 모르는 척할 수도 없도록 상황을 쥐락펴락하는 거다. 서명희 이사장의 타깃은 두 남자를 유연하게 번갈아 갔다.
“여보. 아들 대신 저랑 갈까요? 그런 자리 같이 가는 것도 오랜만이잖아요. 어때요.”
“뭐어, 당신이 그렇다면 나야 좋지만….”
귀염성 없는 아들과 함께 가는 행사보다 아내와 함께 가는 행사를 백 배는 더 좋아하는 애처가 차 회장의 불만이 대번에 쏙 들어갔다. 언성을 높일 필요도 없고, 아쉬운 소리를 할 필요도 없는 해피엔딩이었다.
“희신 쪽에 연락은 내가 지시해 둘게요. 그나저나, 해원아?”
하지만, 집안의 평화를 되찾은 어머니의 부름 앞에서도 해원은 답지 않게 떨떠름히 대답했다.
“……네?”
“요즘 애들은 돈 모아서 일식 먹으러 다닌다던데. 그런 덴 어떠니?”
아니나 다를까, 한없이 상냥한 껍질을 뒤집어쓴 폭탄이 떨어졌다. 차태욱 회장 역시 모자의 대화에 슬그머니 끼어들었다.
“‘요즘 애들’? 왜, 만나는 사람이 좀 어린가?”
“글쎄요, 잘 모르겠네요. 아! 최 셰프가 이번에 낸 곳도 제법 소문이 좋던데. 참고하렴.”
“…….”
‘잘 모른다’는 무적의 단서를 붙여 봤자, 문장의 종결이 데이트 장소 추천이면 앞선 발뺌이 무색해진다.
덕분에 해원은 제 어머니의 말에 대답하는 것 대신 입을 다물고 차를 한 모금 삼키는 걸 택했다. 여기서 괜히 무슨 변명이라도 해 보려고 했다간 부담스러운 관심만 키울 게 뻔했다.
인정한다. 확실히 요즘, 감히 상상하지 못했던 일상에 푹 빠져서 주변의 눈을 살피지 못했다. 김 비서가 귀띔한 게 아니어도 주변에 사람을 두르고 사는 어머니가 지훈의 존재를 짚어낼 방법은 넘쳤다.
신경 써야 할 게 많아졌다. 분명 머리로는 확실히 안다.
하지만, 이 순간. 그 모든 이성적인 판단 위에서 너울대는 건 얼마 만인지 모를 들뜸이었다. 권지훈과의 ‘데이트’라니. 몇 달 전까지는 꿈조차 못 꿨던 단어다.
답지 않은 두근거림 때문일까. 이때까지의 서해원은 감히 예상하지 못했다. 그렇게나 기대했던 데이트가 제 발등을 찍는 결과로 끝나게 된다는 사실을 말이다.
* * *
식사를 대접하겠다는 핑계로 받은 데이트 신청이지만, 정작 서해원은 지훈에게 정말로 밥을 얻어먹을 생각은 요만큼도 없었다. 애초에 보증금을 들고 튄 심란한 친구를 둔 사랑스러운 취준생에게 지갑을 열게 할 그가 아니었다.
굳이 탓을 찾자면, 식사 중간에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일어났던 지훈의 얼굴과 목소리가 평소와 다를 것 없이 태연했다는 것 정도일까.
해원이 뭔가 이상하다는 걸 깨달은 건 꽤 나중의 일이었다. 식사를 다 끝낸 뒤, 자리에 앉아 직원을 기다리는 제게 볼우물이 쏙 들어가게 웃는 지훈 때문이었다. 물론 보기 좋다. 예쁘고, 또 귀엽다. 그래, 그렇긴 한데……. 해원은 그 웃음에 마주 웃어 주면서도 고개를 갸웃했다.
그러다 밥 한 끼에 권지훈의 한 달 아르바이트비 이상을 쓰게 했다는 사실을 알게 되기까진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어찌나 기가 차던지. 솔직히, 지훈이 정말 즐겁다는 듯 웃지만 않았어도 환불 처리를 하고 다시 결제했을 거다.
변호사 배지를 다는 순간부터 잽에는 어퍼컷을 돌려주는 사람으로 유명했던 서해원은 조용히 다음 수를 계산했다. 다른 누구도 아니고 권지훈과의 첫 데이트다. 여섯 살이나 어린 남자의 지갑을 열게 한 것으로 끝낼 수는 없었다.
“어서 오십시오. 해원 님.”
기분 좋게 식사를 마쳤을 때만 해도 그다음 행선지로 이런 곳에 오게 될 줄은 몰랐는데. 지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하지만 한껏 경직된 지훈과는 달리, 깍듯한 인사의 대상은 여유롭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너무 갑자기 찾아온 건 아닐까요?”
“아닙니다. 그렇지 않아도 연락을 드리려고 했었는데, 딱 좋은 시기에 오셨습니다.”
“다행이네요. ―하지만 오늘은 제가 아니라 이쪽 때문에 왔는데.”
머리카락 한 올까지 정갈하게 다듬은 중년 남성의 시선이 지훈에게로 닿았다. 그는 머잖아 “예. 잠시만 기다려 주십시오.” 하고 빙긋 웃더니 어디론가 총총 발을 옮겼다.
해원과 함께 도착한 곳은 실로 고풍스러운 분위기의 테일러샵이었다. 세월이 느껴지는 나무 바닥과 부드럽게 떨어지는 간접조명. 그리고 한쪽 벽면을 가득 차지한 슈트와 액자들까지. 꼭 영화 속 한 장면에나 나올 법한 장소였다.
한편, 분위기에 눌려 얼떨떨하게 주변을 살피던 지훈은 한발 늦게 제가 들은 말을 짚어냈다. ……나 때문에 온 거라고?
“저, 서 변호사님.”
“면접 보러 갈 때 입을 옷 필요하다면서요.”
저는 끽해야 백화점에 가려고 했다는 말은 꺼내기도 전에 먼저 잘렸다.
“게다가 지훈 씨보다 제가 훨씬 더 옷을 잘 입으니까, 조언을 구하고 싶다고도 했었죠.”
“그건 그렇습니다. 하지만―”
“밥도 얻어먹은 겸, 이건 제가 선물할게요.”
“…….”
어째 식사 한 끼 몰래 계산했다고 너무 큰 게 돌아오는 것 같다. 하지만 지훈도 어쩔 수 없었다. 해원의 차를 타고 도착한 파인 다이닝의 입구에 선 순간, ‘아. 서 변호사님은 나한테 얻어먹을 생각이 전혀 없구나.’라는 걸 직감할 수 있었으니 말이다.
입으로는 “지훈 씨가 사는 거니까 비싼 거 시킬게요.”하고 웃는데, 생활비도 한 푼 받지 않는 사람이 이런 곳의 밥값을 내게 할 리 만무했다. 화장실에 다녀온다며 일어나서 슬쩍 종업원을 부른 건 그래서였다.
물론, 재취업까지 돈을 아껴야 하는 상황에서 단 한 끼의 식사 비용으로는 눈이 튀어나올 만큼 비쌌던 건 사실이다. 하지만 그게 아까우냐고 묻는다면 ‘전혀’다. 정말 한 끼 정도는 얼마든지 낼 수 있었는데. 지훈은 멋쩍게 턱을 긁적였다.
정중한 목소리가 들린 건 그 때였다.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지훈 씨, 가죠.”
싱긋 웃는 해원은 여느 때처럼 부드러운 목소리였지만, 한편으로는 이번만큼은 양보하지 않겠다는 의지가 전해졌다. 결국 지훈은 테일러샵의 안쪽으로 쭈뼛쭈뼛 발을 옮겼다.
“원단은 언제나처럼 영국 쪽으로 하시겠습니까?”
“네. 대신 일상생활에서 편히 입을 수 있게끔 튼튼하면서도 무겁지 않은 원단으로 하고 싶은데요.”
“아, 그렇다면 딱 맞는 라인이 있습니다.”
어딜 봐도 어색하게 굳은 옷의 주인 대신 대화를 주도한 건 해원이었다. 덕분에 지훈은 막연한 긴장을 내려놓고, 개수를 다 세기도 버거울 정도로 빼곡하게 놓인 원단 번치북들을 구경했다.
사실 지훈은 평소 옷에 전혀 관심이 없었다. 사복은 티셔츠에 청바지. 출근할 때는 깔끔한 흰 셔츠에 적당한 가격으로 산 슈트 몇 개를 돌려 입었다. 온라인 쇼핑도 거의 안 했다. 옷을 샀다 하면 팔다리 기장을 수선해야 하니 너무 번거로워서였다.
그가 복장에서 추구하는 건 오로지 단 하나. 깔끔이었다.
“지훈 씨. 색을 골라 볼래요?”
“―예?”
부모님의 쇼핑에 따라온 아이처럼 눈만 굴리고 있던 지훈에게 드디어 차례가 돌아왔다. 지훈은 얼른 자세를 바로 하고 해원이 내민 원단 책자를 바라보았다.
“여기 약간 푸른 기가 도는 것과 회색 기가 도는 것. 둘 중 마음에 드는 게 있나요?”
테일러샵 안은 순간 적막에 찼다. 하지만 선택을 채근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오히려 심각한 표정으로 원단을 살피는 사회 초년생을 얼마든지 기다려 줬을 뿐이다.
사실, 그때까지 해원은 물론이고 셀 수 없이 많은 부호와 정치인들의 옷을 담당했던 테일러까지도 지훈의 표정을 신중함으로 착각했다. 하지만 그들이 어라, 싶어진 건 긴 침묵 끝에 흘러나온 작은 목소리를 들었을 때였다.
“죄송……합니다. 혹시, 뭐가 파란 거고 뭐가 까만 건가요?”
해원과 테일러의 시선이 서로 한 번 부딪쳤다가, 또 동시에 원단 번치북으로 향했다.
분명 아주 미묘한 차이이긴 하다. 그러나 수없이 많은 슈트를 접한 그들의 눈엔 완전히 첫인상부터가 다른 원단이었다. 스와치가 아니라 큰 면으로 완성되었을 때를 생각하면 더욱 그렇다.
해원은 이번에는 좀 더 기본적이고 명료한 색상으로 손을 옮겼다. 굳이 대중적인 이름으로 부르자면 다크 네이비, 네이비, 그리고 다크 그레이. 이렇게 세 개의 컬러였다.
“그럼 이중에서는요?”
“어, 다 훌륭한 것 같은데….”
‘훌륭한 것 같은데.’라니. 도통 색에는 어울리지 않는 표현이었다. 보나 마나 권지훈의 성격상 ‘그 색이 그 색 같은데.’를 가장 공손하게 말한 것이 분명했다.
훤칠한 두 고객의 대화를 조용히 듣고 있던 테일러의 입이 열렸다.
“혹시 평소에 선호하는 카라나 소매, 라펠은 따로 있으십니까?”
저건 분명히 거적때기만 걸쳐도 잘 어울리는 얼굴과 몸을 가진 부작용이다. 해원은 입꼬리를 올린 채 눈만 깜박이는 지훈을 보며 확신했다. 귀하디귀한 첫 데이트이니만큼 더 오래 시간을 끌 이유가 사라졌다.
“지훈 씨. 이번에는 제가 고르는 대로 해 볼래요?”
“예. 전적으로 맡기겠습니다.”
대답은 단 1초의 망설임도 없이 흘러나왔다. 옅은 안도까지 어린 목소리가 못내 귀여워서 해원은 속으로 조금 웃었다.
그 이후, 진심은 담겼지만 영혼은 조금쯤 빨려 나간 ‘좋은데요?’를 반복하던 지훈의 입이 다시 열린 건, 원단은 물론 카라의 모양과 단추 개수까지 하나하나 다 정하고 난 뒤였다.
“저어. 혹시 이런 옷은 만드는 데 시간이 얼마나 걸립니까?”
“워낙 사람 손이 많이 들어가다 보니 보통은 한 달 반 정도 생각하시면 됩니다만, 혹 급하신 일정이 있으십니까?”
“아, 아닙니다.”
솔직히 가격을 물어보고 싶어 입이 근질근질하기는 했다. 하지만 지훈은 그 욕구를 가까스로 참았다. 대신, 살며 처음으로 하는 채촌 앞에서 몸을 최대한 반듯하게 했다. 굳이 어깨와 허리를 펴라고 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곧은 자세에 테일러의 입가에도 만족스러운 미소가 걸렸다.
작업이 거의 마무리되어 가던 그 때였다.
“지훈 씨. 잠깐 이거 매 볼래요?”
해원의 손에 들린 건 녹색 바탕에 푸른 다이아 패턴이 깔린 넥타이였다. 지훈은 딱 봐도 만지는 것조차 황송한 넥타이를 조심스럽게 건네받았다. 눈치 빠른 테일러 역시 자연스럽게 몇 걸음 뒤로 빠져서 측정한 수치들을 정리했다.
“저 솔직히 이렇게 밝은색 넥타이는 처음 해 봅니다.”
“매 보면 딱히 그렇다는 생각도 안 들 거예요. 무엇보다 머리카락이나 눈 색이 진하니까, 조금은 밝아도 예쁠 테고.”
넥타이를 목에 감으면서도 긴가민가했던 지훈은, 말마따나 완전히 매고 나니 흰 셔츠에 받치는 것만으로도 저와 꽤 잘 어울리는 것을 보고 내심 감탄했다.
몇 걸음 떨어져서 지훈을 살피던 남자가 가까워진 건 그 순간이었다.
“잠시만. 이렇게 매는 게 더 잘 어울리겠네요.”
순식간에 체온이 전해질 정도로 등 뒤에 바짝 붙어선 해원은 꼭 백허그를 하는 것처럼 팔을 두른 채로 넥타이를 다시 묶기 시작했다. 새하얀 피부 때문인지 푸른 핏줄이 유독 두드러져 보이는 손이 단 한 번의 멈칫거림도 없이 움직이는 모습은 꼭 우아한 무용 같기도 했다.
지훈이 제가 숨을 참고 있다는 걸 깨달은 건 목 위로 평소와는 조금 다른 매듭이 완성되었을 때였다. 뒤늦은 호흡이 길게 터져 나왔다.
“……후우, 너무 복잡한데요.”
“그런가요? 몇 번 연습하면 어렵지 않아요.”
“실은 넥타이 매는 것 자체가 별로 자신이 없습니다. 한창 출근할 때도 제일 쉬운 방법으로만 하는데도 두세 번씩 다시 묶는 날이 많았을 정도라.”
“그럼 앞으로는 제가 대신 매 주면 되겠네요.”
지훈의 까만 눈동자엔 순간 지진이 났다. 인제 보니 전신 거울 속에 나란히 비친 저와 해원의 거리가 너무 가까운 것도 같았다. 지훈은 슬쩍 저만치 떨어진 테일러의 안색을 확인했다. 딱 봐도 해원과 오래 알고 지낸 듯한 그는 서류를 뒤적이고 있을 뿐 놀란 듯한 얼굴은 아니었다.
“앞으로 몇 번 더 와야 할 거예요. 잘 어울렸으면 좋겠는데.”
놀란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거울을 통해 눈이 마주친 해원이 유독 근사하게 웃었다. 지훈은 넥타이 끝을 만지작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왠지 손가락 끝이 뜨거웠다.
본받고 싶을 정도로 반듯한 자세의 인사를 받으며 테일러샵을 나오자 하늘은 예상보다 더 어두웠다. 시간만 따지면 그렇게 늦지 않은데도 오늘따라 하늘 저편부터 물들기 시작한 보랏빛이 유독 진했다.
사실, 이건 말 그대로 느낌이었을지도 모른다. 워낙 점심을 잘 먹은 터라 또 식사를 하러 갈 만큼 배고프지는 않은데 그렇다고 벌써 첫 데이트의 공식 일정을 끝내고 싶지 않은 마음이 만든, 그냥 그런 느낌.
그건 서해원 역시 마찬가지인 듯했다.
“지훈 씨. 좀 걸을까요? 날씨도 좋은데.”
거절할 이유가 없었다.
기분 좋은 선선한 바람이 부는 봄 날씨는 사시사철 내내 이랬으면 좋겠다 싶을 정도로 쾌적했다. 무엇보다 해원과 이렇게 아무 이유 없이 나란히 걸어 본 것 자체가 처음이었다.
하릴없이 거닐고 싶은 날씨인 건 다른 사람들도 모두 같은 생각인지 깔끔하게 정비된 도로 여기저기엔 제법 사람이 많았다. 덕분에 손을 잡지는 못했지만, 가능한 한 바짝 붙어 걷다가 손가락이 스칠 때면 누가 먼저였는지 모를 아이 같은 웃음이 삐져나왔다.
그 때, 지훈의 눈에 붉은 돌담의 가게가 눈에 들어왔다. 좀 더 정확히는, 가게의 문을 한참 넘어 인도까지 길게 늘어진 줄이 보였다고 해야 할 것이다.
“변호사님. 저기, 뭐 하는 곳인지 아십니까?”
“글쎄요. 저도 이쪽으로 걸어와 본 건 처음이라… 아.”
지훈과 마찬가지로 고개를 삐죽 내밀던 해원은 한발 먼저 가게의 정체를 알아냈다.
“저기 구석에 베이커리라고 적혀 있네요.”
“와― 빵집이요? 줄 엄청 기네. 그렇게 맛있나?”
“이왕 여기까지 온 김에 확인해 보는 건 어때요.”
“……정말요?”
“못 할 게 뭐가 있어요. 데이트인데.”
틀린 말은 아니었다. 아니, 어쩌면 서해원 같은 사람이 빵을 사려고 줄을 서서 기다리는 건 데이트가 아니면 있을 수 없는 일일 테다. 해원은 몇 걸음 앞서 대기열 끄트머리에 먼저 편입한 다음 천연덕스럽게 고개를 까딱였다. 그 장난기 어린 표정 앞에서 지훈 역시 픽 웃음이 터졌다.
한편, 지나가는 사람들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장신의 남자 둘이 나란히 서자 알게 모르게 관심 어린 시선들이 슥 꽂혔다. 애초에 따로 떨어져 있어도 눈에 띄는 두 사람이다. 그런데 그 훤칠한 미남들이 다정하게 붙어 이야기까지 나누니 어쩔 수 없었다.
“저, 빵 진짜 좋아하는데 정작 잘 사 먹지는 못합니다. 입맛만 까다로워서요.”
“왜요. 어머니가 만든 게 맛있어서?”
“아무래도요. 뭔가 성에 안 찬달까. 좀 그렇습니다.”
“술 취해서 단팥빵 이야기만 30분 넘게 한 덴 다 이유가 있었네요.”
“하지만… 여기서 먹은 건 정말 그 맛이 안 나는걸요.”
지훈은 멋쩍게 대답했다. 제가 그런 얘기까지 했을 줄이야.
그뿐인가. 다리 위에서 만난 누군지도 모를 남자에게 술에 취해 빵 이야기를 늘어놓는 것으로도 모자라 회사 투정에, 믿을 수 없는 하룻밤까지. 해원과 함께 하는 것이 너무 편해서 그 시작을 잠시 잊고 있었는데 어느덧 아주 먼 이야기가 된 것 같다.
……분명히 그날은 정말 추웠었는데.
지훈은 기분 좋게 머리카락을 스치는 봄바람을 느끼며 괜히 울컥한 목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그 모든 동요를 훤히 들여다본다는 것처럼 다정한 눈을 한 해원의 물음이 이어졌다.
“그 맛이 어떤 건데요?”
“음……. 국산 팥으로 푹 찐 다음에, 설탕 대신 과일로 단맛을 내서 입에 은은하게 달라붙는, 그런 거.”
“국산이랑 아닌 거랑 차이가 커요?”
“완전요. 색깔은 물론이고 식감이나 맛까지 전부 다릅니다.”
생각해 보면 서해원과 이런 시시껄렁한 이야기를 하는 건 처음이었다.
물론, 종종 카페에서 어떤 손님을 만났었는지 정도는 말한 적 있다. 하지만 두 사람의 대화는 대체로 명료한 목적 아래 이루어졌다. 작게는 동거인으로서 묻는 아침 인사나 날씨, 식사 여부부터 크게는 이직을 알아보는 회사에 대한 고민까지. 상대에 대해 궁금한 걸 정말 순수하게 물어보는 건 섹스 도중이 더 많을 지경이었다.
1단계는 섹스, 2단계는 키스, 3단계는 데이트.
처음에는 터무니없는 단계라고 생각했는데 정말 그의 말처럼 되어 간다. 꼭 조금씩 짧아지는 줄을 따라 한 발짝씩 걷는 지금처럼, 천천히, 천천히 상대가 제 일상에, 생각에 스며드는 게 느껴진다.
이게 사랑으로 다가가는 단계라면 남은 4, 5단계는 대체 뭘까. 지훈은 눈에 띄게 줄어든 앞의 사람들을 보며 생각했다. 해원이 말을 받은 건 그 때였다.
“―역시 작은 동네 빵집에서 시작하셔서 그렇게 유명해진 덴 다 이유가 있겠죠. 대단하시네요.”
사실 지훈은 자동반사적으로 “감사합니다.”라고 공손히 말하려고 했다. 하지만 묘한 본능이랄까, 자각이랄까. 무어라 한 단어로 이름 붙일 수 없는 것이 뒷덜미를 잡아당겼다.
지훈의 입이 다시 열린 건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은 짧은 침묵이 지나간 뒤였다.
“……서해원 변호사님.”
“네?”
“그건, 어떻게 아십니까?”
깨달은 사실을 하나씩 되짚는 목소리는 평소보다 조금 멍하게 흘러나왔다.
“저 분명 어머니께서 의주에서 빵집을 하고 있다고 말하기는 했지만… 다른 건 얘기한 적 없는 것 같은데요.”
언제나 유연하게 말을 가지고 놀던 남자의 입이 꾹 다물어지는 걸 보는 건 매우 생소한 경험이었다. 또, 늘 저를 똑바로 바라보던 연한 갈색 눈동자가 살짝 허공을 훑는 것 역시.
만약 다른 사람이 이런 이야기를 했으면 뒷조사를 했다고 생각했겠지만, 상대는 해원이다. 오래전부터 저를 알았다는 서해원. 제게 사랑을 고백하고, 또 당당히 요구한 서해원.
권지훈은 얼마 안 가 하나의 결론에 도달했다.
“변호사님. 혹시 우리, 의주에서 알던 사인가요?”
“…….”
“예? 그런 거죠? 맞죠?”
변호사라는 직업답게 언제나 청산유수로 말하던 남자는 드물게도 입을 꾹 다물었다. 아니, 심지어 코앞에 두고도 믿을 수 없지만 눈을 제대로 마주치지도 못할 만큼 여유를 잃은 것처럼 느껴졌다.
살짝 시선이 높은 상대를 올려다본다는 게 지금처럼 도움이 된 적도 없다. 해원은 바짝 붙어선 지훈의 시선이 제 얼굴을 샅샅이 훑는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서 도망치지 못했다.
말이 사라진 해원은 이상할 정도로 초조해 보이기도 했고, 또 들떠 보이기도 했다. 덕분에 그걸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서 눈에 담는 지훈의 마음 한구석도 간질간질해졌다.
꼭꼭 숨겨져 있던 사랑의 기원이 드디어 한 자락, 모습을 드러냈다.
“첫 힌트네요.”
“……첫 실수죠.”
시작부터 마음 같지 않았던 데이트의 끝.
한참을 침묵하던 해원이 정말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투로 나직하게 말했다. 이 역시 처음 들어보는 표정과 목소리였다. 지훈은 결국 크게 소리 내 웃어 버렸다.
* * *
서해원이 장난처럼 말했던 5단계는 그 자신의 생각보다 꽤 유효했다. 특히, ‘첫 실수’가 나왔던 지난 데이트 이후로 서해원과 권지훈의 관계에는 매우 유의미한 진전이 생겼다.
특히 지훈 쪽이 그랬다.
“혹시, 성형하셨습니까?”
더운 숨을 삼키고 있던 해원은 순간 제가 들은 말을 의심했다. 머리꼭지까지 열이 올라서 헛것을 듣나 하는 생각마저 했을 정도다. 하지만 이어진 물음은 산 넘어 산이었다.
“네?”
“왜. 영화 보면 페이스 오프라는 거 하지 않습니까. 완전히… 다른 사람으로.”
“…….”
“눈도 그래요. 저 몰래 컬러 렌즈 같은 걸 끼셨나.”
“……권지훈 씨. 지금 우리, 뭐 하고 있는지는 알죠?”
질문에는 질문으로 답하자 지훈이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미소를 걸었다. 솔직히 그 예쁜 미소 앞에서 해원은 말문이 막혔다. 그 부끄러움 많던 꼿꼿한 남자를 저렇게 만든 게 저라니. 뿌듯해야 하나 미안해해야 하나 헷갈릴 지경이었다.
“저 기억력이 꽤 좋은 편인데. 아무리 생각해도 이렇게 생긴 사람은―, 떠오르지 않거든요. 학교나 학원에서 본 건, 후우, 분명…, 아닌데.”
“…….”
“―그렇다고, 어머니 가게에 왔던 손님도, 아닌 거 같고….”
해원은 대답 대신 제 몸 위에 올라탄 지훈을 감상했다. 늘씬한 허리를 부드럽게 움직일 때마다 옅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이 얼굴선을 따라 흔들리는 게 보기 좋았다.
물론, 얼굴부터 가슴께까지 번진 붉은 물로 유독 탐스러워 보이는 피부를 훑는 것도 빼놓을 수 없다. 달아오른 살결 위로 한껏 물고 빨아서 통통하게 선 작은 유두는 그저 보기만 해도 아랫배가 뻐근해진다. 만져 주지도 않았는데 삽입의 박자와 함께 꺼덕거리며 선액을 흘리는 성기는 말할 것도 없이 시각 포르노 그 자체고 말이다.
“…사실, 의주시처럼 작은 곳에서 변호사님 같은 얼굴이면, 모를 수가 없―, 흣, 아.”
해원은 이어진 접합부의 젖은 소리와 함께 흘러나온 옅은 울림에 잠시 팔로 눈가를 가렸다. 솔직히 제 성기를 기분 좋게 조일 때마다 띄엄띄엄 끊어지는 저 단정한 목소리를 듣는 것만으로도 위험했다. 정말이지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사정하고, 또다시 단단해질 것 같다.
“서해원 변호사님. ―왜요, 응?”
옅게 깔린 밭은 헐떡임을 제하고 듣는다면 그저 한없이 달콤하기만 한 연인의 목소리였다. 그 물음 앞에서 평소라면 재깍 대답했을 해원은 부러 조용히 숨만 골랐다. 눈을 가린 팔 역시 여전히 내리지 않았다.
사실, 그는 요즘 단 한 번의 말실수에 훅 거리가 가까워진 지훈을 두고 정신을 차리지 못하고 있다. 몸에서 마음까지 천천히 다가가는 다섯 단계가 절실했던 건 어쩌면 제 쪽이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 정도다.
어떤 표정을 짓고, 어떤 목소리를 내고,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모르겠다. 여유로운 척, 해 볼 만한 척, 무섭지 않은 척. 이제껏 잘해왔던 그 무엇도 저렇게 사랑스러운 목소리를 내는 지훈 앞에서는 감히 시도조차 할 수 없었다.
한편, 권지훈은 그런 서해원을 진작에 눈치챘다. 아니 심지어는 저 선명한 당혹이 꽤 마음에 들기까지 한다. 허리를 움직여 숨 쉬는 게 버거울 정도로 몸 안을 꽉 채운 성기를 살짝 빗겨나가게 한 지훈은 천천히 말을 이었다.
“변호사님.”
“…….”
“서해원 씨?”
짐짓 해원의 말투를 흉내 낸 부름이었다. 꿋꿋이 눈가를 가리고 있던 팔이 그제야 위로 조금 올라갔다. 고운 미간을 슬쩍 찌푸린 해원은 소위 이것 봐라, 하는 표정이었다. 어차피 지훈의 눈에는 담담한 척 애쓰는 게 훤히 짚어졌지만 말이다.
“그러니까 왜 대답을 안 해 주십니까. 눈도 가리고.”
“계속 옛날얘기만 할 거잖아요.”
“아닌데요. 키스하려고 했는데?”
정말 완전히 말렸다. 대체 권지훈은 어쩌다 이렇게 야해졌을까. 해원은 책임을 돌릴 곳이 저 자신뿐인 한숨을 길게 내뱉었다.
쿡쿡대는 웃음이 섞인 입맞춤 역시 부드럽게 시작됐다. 몸을 숙이자 빠듯할 정도로 삽입되었던 성기가 살짝 빠져나가며 호흡이 한결 편해진 지훈은 어느 때보다 적극적으로 입을 열고 혀를 섞었다.
덕분에 확실히 궁지에 몰린 건 서해원이었다. 말랑하고 기분 좋은 살덩이. 간지러운 더운 숨. 키스가 깊어질수록 제 성기를 문 내벽과 입구가 가볍게 조였다 풀리기를 반복하는 자극까지.
“……꽤 여유롭네요, 지훈 씨는.”
“어떤 분께 배운 게 있어서요.”
살짝 입술이 떨어진 순간 들린 낮은 속삭임에 지훈이 눈을 접어 웃으며 말했다. 그 덕분이라면 덕분에 서해원이 권지훈을 봐주는 것도 끝났다. 커다란 손이 딱 감당할 수 있는 속도와 깊이로만 움직이던 골반을 단단히 틀어잡는 건 순식간의 일이었다.
“―흐으읏!”
위에서 아래로 내려가는 체중과 그걸 온전히 거스르는 허릿짓이 만난 순간. 지훈의 입에선 높은 신음이 터져 나왔다.
해원 역시 성기를 입이 마를 만큼 조이는 따뜻한 감각에 눈을 살짝 가늘게 떴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살과 살이 맞닿아 부딪치는 움직임까지 멈춘 건 아니었다. 한껏 젖은 마찰음이 빠르게 반복되기 시작했다.
“하아, 읏, 아, 아, ―앗!”
사실 고집 센 권지훈이 신음을 참지 않도록 하기까지는 꽤 많은 공이 들었다.
한평생 반듯하게 바른 생활만 해온 모범생 지훈에게 가장 잘 먹히는 전략은 칭찬이었다. 해원은 지훈이 예쁘게 헐떡이고 울 때마다 상을 주듯 입을 맞췄다. 쾌감을 순수하게 드러내는 건 부끄러운 게 아니며, 무엇보다 제 앞이라면 더더욱 사랑스러운 일임을 몇 번이나 속삭였다.
그리하여 바로 오늘처럼 몸 위에 스스로 올라앉을 때까지.
“솔직히, 조금 놀랐어요.”
“…흑, 아, 잠, 깐만, 흐앗!”
“권지훈 씨가 남자 위에서 이렇게 허리를 잘 돌릴 줄은 상상도 못 했는데.”
지훈은 짐짓 다정한 말투에 실려 나온 음란한 평가 앞에서도 제대로 된 대꾸 한마디 하지 못했다. 커다란 성기가 좁고 연약한 점막 깊은 곳까지 버거울 만큼 파고들 때마다 저절로 입이 벌어지기는 했지만, 거기서 터져 나오는 건 문장이 아닌 소리의 파편뿐이었다.
무엇보다 해원의 말은 완전히 틀린 것도 아니었다. 피할 수 없는 전류 같은 쾌감이 배 속 깊은 곳을 쾅쾅 쳐올릴 때마다 그걸 돕겠다는 양 저절로 허리를 움직이고 있었으니 말이다.
“하, 앗, 히익…!”
바들바들 떨면서도 뿌리 끝까지 꽉꽉 성기를 받아먹는 지훈을 바라보던 해원은 말랑말랑하게 힘이 풀린 몸을 안아 눕혔다. 시선 역시 자연스럽게 위아래가 뒤바뀌었다. 저를 내려다보는 밝은 눈동자에 실린 흥분을 읽고 지훈이 밭은 숨을 할딱거렸다. 본격적으로 이어질 자극을 앞둔 젖은 내벽 역시 부드럽게 길이 좁아졌다.
이제 권지훈의 몸은 같은 남자의 침입을 기대할 줄 안다. 그걸 짚어낸 해원이 작게 웃으며 속삭였다.
“이렇게 소질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래요. 조금 더 일찍 찾아올 걸 그랬죠.”
어쩌면 조금쯤 탓을 하고 싶어진 것일지도 몰랐다. 제가 이렇게 황홀한 매일을 사는 바보가 된 건 권지훈 네가 일찍이 날 이렇게 무너트린 탓이다, 하고.
하지만 상기된 얼굴로 숨을 몰아쉬는 지훈의 입 밖으로 나온 대답은 해원이 생각지도 못한 것이었다.
“왜. ―왜, 안 찾아, 왔는데?”
참 용감한 질문이었다. 누구인지 알아보기는커녕 짐작조차 하지 못하는 남자의 성기에 깊게 처박힌 채로 하기에는 더더욱.
해원은 글쎄요, 하고 나직하게 중얼거리며 답을 피했다. 그러나 지훈의 새까만 눈동자는 쉽사리 포기하지 않겠다는 듯 고운 얼굴 위로 끈질기게 머물렀다.
결국 먼저 백기를 든 건 해원이었다. 어차피 담담한 척 허풍을 떠는 건 틀렸다. 그는 제 머리카락을 쓰다듬는 지훈의 손에 기대, 아주 오랫동안 함께했던 나약함을 느릿느릿 내뱉었다.
“지금처럼 지훈 씨가 나를 기억 못 하는 건 괜찮지만….”
“…….”
“나를 싫어하게 되는 건 못 견딜 것 같아서.”
지훈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찌푸렸다. 깊은 삽입이 아프거나 불편해서는 아니었다. 그럴 리가 없잖아, 라고 말하고 싶어서다. 하지만 해원은 그보다 먼저 지훈의 이마에 제 머리를 가볍게 부딪쳤다.
“그러니까, 내가 교활했던 거죠.”
“교활…, 이요?”
“기껏 용기를 내 말을 붙인 순간이라는 게 지훈 씨가 혼자가 되었을 때잖아요. 그때가 아니면 누군지도 모르는 낯선 남자인 나를 따라갈 생각 같은 거… 하지 않았을 거라는 걸 아니까.”
“…….”
“교활하고…… 또 초라하죠.”
해원이 쓰게 웃었다. 살짝 내리깐 시선 때문일까. 긴 속눈썹이 하얀 뺨 위로 긴 그림자를 만들었다. 그 얼굴을 올려다보던 지훈은 문득 저 남자의 목소리가 저를 붙잡았을 때를 떠올렸다.
‘웬만하면 사는 쪽을 선택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지훈 씨. 당신이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니까.’
분명 웃음기 어린 목소리였다. 그 덕분에 사실 지금 이 순간까지 장난스러운 빈말이라고 생각했던 게 사실이다. 잔뜩 술에 취한 제 극단적인 행동을 막으려 일부러 조금 과격한 표현을 썼던 거라고 말이다.
하지만, 감히 이제는 알 것 같다. 그 추운 다리 위에서 정말로 진심이었던 건 서해원이다. 그저 절박하지 않은 척했을 뿐이다.
지훈은 힘없이 늘어지는 손을 들어 하얀 뺨을 쓸었다. 그 춥디추웠던 날, 그가 바람에 얼어붙은 제 얼굴을 감쌌던 것처럼. 그러자 갈색 눈동자가 온기를 따라 천천히 움직였다. 지훈이 입이 열린 건 시선이 온전히 맞닿은 뒤였다.
“기껏… 용기를 낸 거라면서요.”
“…….”
“그럼 괜찮습니다. 조금 교활하고, 초라해도.”
아. 정말 이상한 표정이다. 지훈은 저를 바라보는 해원을 보며 몽롱하게 생각했다. 언제나 느긋함을 두르고 있던 그의 얼굴이 이 순간만큼은 여린 파문 하나에도 무너질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 사랑스러운 균열을 오래 들여다볼 수는 없었다. 이내 서로의 몸이 와 닿게 끌어안은 해원이 귓가로 나직하게 속삭인 물음 때문이었다.
“……허리, 불편하진 않죠?”
지훈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기묘한 고양감이 들었다는 걸 부정할 수는 없다. 힘껏 끌어당겨 안은 손 아래로 닿는 근육의 움직임 하나마저도 완벽한 사람이 이토록 매달린다는 게. 이렇게나 오래된 마음이 긴 시간을 타고 흘러 기어이 제게 도달했다는 게.
“흐읏……!”
지훈은 해원이 끝도 없이 깊게 파고드는 걸 막지 않았다. 오히려 부끄러움도 없이 더욱 다리를 벌려, 절정을 앞에 둔 성기가 저를 얼마든지 휘두르도록 내버려 뒀다. 너무 깊어서 무서운 어딘가가 꾸욱 짓뭉개져 두려울 정도의 쾌감이 일 땐, 해원을 밀어내는 것 대신 그의 목과 어깨에 더욱 매달리는 걸 택했다.
해원 역시 그 달콤한 환대에 기꺼이 부응했다.
한껏 커진 기둥이 푹푹 찌르고 닿는 곳마다 젖은 열기가 피어올랐다. 찌릿찌릿 저릴 만큼 아랫배가 울리다가도, 그보다 더 안쪽에 있는 무언가가 퍽 쳐올려질 때면 교성보다도 꺽꺽댐에 가까운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러다 온몸이 함께 딸려 나가는 것처럼 쑥 빠져나갔다가 뿌리까지 깊게 쑤셔진 순간.
“흐앗, 아, 읏―!”
단단한 뼈대가 그려질 정도로 허리가 들뜬 지훈이 고개를 길게 뒤로 젖혔다. 한껏 벌어진 허벅지 역시 멋대로 툭툭 튀면서 옅은 경련을 반복했다. 해원의 그린 듯한 근육 결을 타고 뿌연 정액이 길게 번졌다.
하지만 해원은 제 상체가 지훈의 것으로 엉망이 되는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꽉 조여든 내벽이 한계까지 물어대며 끝내 도달한 절정 앞에서 그의 미간에도 선명한 찌푸림이 걸렸으니.
어느 때보다도 여유가 없던 섹스였다는 걸 증명이라도 하듯, 서해원과 권지훈은 누구라고 할 것 없이 들뜬 숨을 몰아쉬었다. 성기를 곧장 빼지 않고 따뜻한 안쪽에 그대로 처박고 있자 한숨이 만든 미세한 떨림마저도 서로에게 고스란히 전달됐다. 이 순간의 감각이란 그저 단순히 육체적 쾌락이 남긴 잔열 따위가 아니었다. 가장 약하고 수치스러운 순간마저도 기꺼이 함께할 수 있는 상대와 호흡을 공유하며 오는 온전한 충족감에 가까웠다.
위이잉, 하고 협탁 위에서 짧게 진동이 울린 건 그 때였다. 후희에 완전히 늘어지던 두 사람은 그제야 간신히 현실로 고개를 돌렸다. 지훈의 휴대폰이었다.
해원은 땀에 젖은 머리카락을 쓸어 올린 다음, 더운 한숨과 함께 천천히 제 몸을 빼내었다.
다물어지지 않은 채로 뻐끔거리는 구멍에서부터 끈끈한 액체가 길게 이어져 주욱 늘어지는 게 터무니없이 야했다. 해원은 젤로 번들거리는 콘돔을 말아 밀면서 뜨끈뜨끈하게 열이 오른 뒷목을 가볍게 스트레칭했다. 섹스의 열기가 머리에 남아 머릿속을 기분 좋게 휘젓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그보다 더 먼저 해원의 의식을 맑게 해 준 건, 한껏 열 오른 정사와는 어울리지 않는 갈라진 탄성이었다.
“……우와.”
여전히 침대에 반쯤 몸이 파묻힌 지훈은 휴대폰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이 와중에도 울긋불긋한 몸이며 한껏 젖은 구멍이 무방비하게 드러난 게 얼마나 야하던지. 덕분에 해원은 목을 몇 번 가다듬은 다음에야 나직하게 입을 열 수 있었다.
“지훈 씨. 왜요?”
지훈은 곧장 대답하지 않았다. 대신 말없이 휴대폰을 빙글 돌려 그 내용을 확인할 수 있게 해 주었다. 그리고 몇 초 뒤. 해원은 지훈과 마찬가지로 작게 “우와.” 했다.
퇴사 이후, 첫 서류 통과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