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36층
요즘, SJ에는 묘한 소문이 돈다.
아니, 좀 더 정확히는 소문보단 일종의 SJ 맞춤형 도시괴담이라는 단어를 쓰는 게 정확할지도 모르겠다. SJ 본사의 36층부터 시작해 퍼지게 된 그 괴담은, 이제는 1층부터 42층까지 모르는 직원 하나 없다. 감히 어느 누구도 수면 위에서 떠들지는 않지만 말이다.
괴담에는 수많은 주의사항이 붙어 있다.
하지만 그중 가장 잊지 말고 주지해야 하는 건, 회사에서 도보로 5분 거리에 있는 카페 이용 3계명이다. 이 3계명은 근처 카페의 아르바이트생이 잘생겼다는 말을 듣고 찾아갔다가 직장 상사를 만난 36층 법무팀의 한 희생양이 작성했다.
첫째. 그 카페에 갈 때는 사원증을 걸지 않고 가는 게 좋다.
둘째. 그 카페에 ‘누군가’가 먼저 도착해 있다면 다른 카페로 가는 것을 추천한다.
셋째. 이미 그 카페를 이용하는 도중에 ‘누군가’가 방문했다면, 꼭 테이블과 접시를 깨끗하게 정리하고 반납하자.
(※ 참고로 ‘누군가’는 아르바이트생을 귀찮게 한 모든 사람을 기억한다.)
예상했다시피, 여기서 일정하게 등장하는 카페는 권지훈이 주3일 아르바이트를 하는 카페이다. 배경이 정해지고 나면 등장인물을 유추하는 건 더 쉽다.
‘누군가’는 36층 전략기획실 법무팀장 서해원이다.
하지만 SJ의 브레인만 모인 36층에서도 유일하게 찾지 못한 답은, 연 지 얼마 안 된 카페 아르바이트생과 법무팀장 서해원과의 관계였다.
가장 먼저 떠올린 만만한 가정은 역시 학교 선후배였다. 나이 차이가 살짝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어떻게 연이 닿으면 알고 지낼 만한 정도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화제의 아르바이트생이 서해원을 ‘변호사님’이라고 부르는 게 알려짐과 동시에 첫 번째 가설은 곧장 폐기됐다. 서해원이 아르바이트생에게 퍽 깍듯한 존댓말을 쓰는 것 역시 추리를 더욱 미궁으로 빠지게 했다.
단 한 가지 확실한 건, 미남은 미남끼리 어울린다는 얼굴의 개연성 정도일까. 사람들의 커 가는 호기심만큼 카페의 매출 그래프는 나날이 순항했다.
하지만 한편, 그에 비례한 슬픔도 존재했다.
“최종면접이… 잡혔다고요?”
바로 아르바이트생 운을 자영업 인생 초반에 몰아 쓴 카페 사장의 비탄이었다. 지훈은 저를 자못 애틋한 눈으로 바라보는 사장의 말을 얼른 받았다.
“예, 하지만 제일 가고 싶은 곳은 아직 인적성 결과가 안 나와서요. 끝까지 고민해 봐야 할 것 같습니다. 아! 물론, 붙어야 할 수 있는 배부른 소리지만…….”
“누가 우리 지훈 씨를 떨어트려. 아주 그냥 다아― 붙을 거예요.”
“정말 감사합니다. 늘 배려해 주셔서 얼마나 든든한지 모릅니다.”
카페 사장은 입꼬리를 잡아 올린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솔직히 마음만 같아서는 먼 훗날 가게를 접는 그 날까지 저 훤칠한 청년과 함께하고 싶은 게 사실이다. 하지만 그런 사리사욕보다 지훈과 함께한 몇 달간 든 정이 더 컸다. 심지어 간략하게나마 어쩌다가 직장을 그만두고 취준생 대열에 합류하게 되었는지조차도 전해 들었다.
저렇게 반듯한 사람의 인생이 꼬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다. 그저 원하는 곳이라면 어디든 다 합격하되 발령일이 조금만이라도 뒤로 정해지길 바랄 뿐이다.
하루 중 가장 한가한 오후 3시. 작은 도어벨 소리와 함께 손님이 들어왔다. 얼른 조리대 뒤 의자에서 일어난 지훈은 익숙한 단골손님을 확인하곤 보기 좋은 미소를 걸었다.
“어서 오세요.”
자그마한 키에 동그란 금색 테의 안경을 낀 중년 여성은 항상 이렇게 손님이 드문 시간대에 찾아오곤 한다. 처음에는 메뉴를 하나하나 먹어 보더니 몇 주 전부터는 홍차에 완전히 정착했다.
“음, 오늘은… 발 마스케로 주문하려고 하는데. 가능할까요?”
“네. 물론이죠. 준비되면 자리로 가져다드리겠습니다. 편하신 자리에 앉아 주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하루에 한정 수량만 판매하는 홍차는 이 카페에서 유일하게 아르바이트생인 지훈이 직접 자리로 서빙하는 메뉴다. 커피 못잖게 차를 사랑하는 사장이 정성 들여 모은 찻잔에 담겨 나가기 때문이다.
지훈은 능숙하게 찻잎을 꺼내 차를 우릴 준비를 마쳤다. 그 때, 잠잠하던 도어벨이 한 번 더 울렸다. 이번에 먼저 움직인 건 카페 사장이었다.
“지훈 씨는 그거 마저 준비해요. 주문은 내가 받을게요.”
“옙.”
지훈은 깍듯하게 대답하면서도 카운터 쪽으로 다가온 남자 둘을 흘끗 확인했다. 외근이라도 하고 왔는지 옷을 잘 갖춰 입은 그들의 목에는 익숙한 SJ의 사원증이 보였다.
좀 웃긴 일인가 싶긴 하지만, SJ의 직원이 올 때마다 지훈은 내심 반가웠다. 엎어지면 코 닿을 거리에 있는 것치고는 저 사원증을 보기 어려워서다. ……서 변호사님 회사 사람들도 많이 와 주면 좋을 텐데. 지훈은 속으로 작지만 큰 오해를 하며 준비한 차를 트레이에 담아 옮겼다.
가게 안쪽의 벽면. 중년 여성이 앉는 자리는 항상 같았다.
“주문하신 홍차 나왔습니다. 뜨거우니까 드실 때 조심하세요.”
“네. 고맙습니다. 잘 마실게요.”
“감사합니다. 혹시 더 필요하신 게 있으시면 뭐든 말씀해 주십시오. 아, 그리고 이 쿠키는 서비스입니다.”
“어머, 세상에나.”
다정한 손님은 작은 것에도 진심으로 고마워했다.
하지만 그녀의 따뜻한 감사 인사는 채 마무리되지 못했다. 딱 한 자리 떨어진 앞쪽 테이블에서 들려 온 퉁명스런 목소리 때문이었다.
“―무슨 카페 알바생 가지고 호들갑을 떨길래 와 봤더니. 참 내.”
순간, 기분 좋은 미소를 걸고 있던 지훈과 중년 여성의 눈이 함께 동그래졌다. SJ의 목걸이를 한 두 남자의 말은 들으란 듯이 계속 이어졌다.
“작게 말하십쇼, 작게.”
“아니, 그렇잖아. 난 뭐 들어오자마자 후광이라도 비치는 줄 알았는데. 무슨 저 정도로 그 난리야. 법무팀장이 어울린다는 것도 망상질 아냐? 회사 코앞이라 그냥 오는 거 가지고.”
“하긴. 무슨 그 서해원이 카페 알바랑…….”
바로 코앞에 손님이 있는 걸 다행으로 여겨야 할까. 지훈은 정말 가까스로 인상이 확 찌푸려지는 걸 참았다.
하지만 울컥함보다 더 큰 건 제가 너무 순진했던가 하는 자책이었다. 서해원 정도 되는 사람은 그저 회사 앞 카페에 자주 오는 것조차 사람들의 관심을 끄는 일이었나? 제게는 그저 단 하나, 사랑만을 바라는 남자라 미처 눈치채지 못하고 실수한 건가. 온갖 생각이 머리를 휘몰아쳤다.
“그나저나 알바가 직접 음료 가져다주나 봐요. 여자들이 그래서 끔벅 죽는 거 아닐까요?”
“별걸 다 좋아하네! 어이가 없어서.”
“왜, 바꿔서 생각해 보자고요. 예쁜 알바가 커피 가져다준다고 하면 좋잖아요.”
“아. 확인, 확인! 그렇네. 야. 요즘엔 왜 그런 곳이 없냐?”
낮게 낄낄대는 대화 앞에서 귓가가 뜨거워졌다. 슬쩍 조리대 쪽을 보자 음산한 표정을 건 사장이 다 완성된 음료를 들어 보였다.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조롱의 가격은 8,000원이었다.
지훈은 어찌할 바를 정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지금 무슨 말을 하시는 거냐고 따져 묻고 싶다가도, 서해원과 같은 건물을 쓰는 사람들이라는 게 마음의 제동을 걸었다. 그렇다고 아무것도 못 들은 척하고 지나가기엔… 솔직히, 억울했다.
그 때였다.
“―이거, 아주 곤란한 경우네요.”
살짝 느리게 흘러나온 우아하고도 청명한 목소리는 그리 크지 않은데도 한 글자 한 글자 귀에 때려 박는 듯 또박또박했다. 덕분에 앞에 있던 지훈과 카페 사장, 그리고 한 칸 너머의 테이블에 있던 사내 두 명의 시선까지 모두가 발화점으로 동시에 쏠렸다.
“원래 이렇게들 무례하나?”
“…….”
“아니면, SJ 이름을 목에 끼고 있어서 용감해진 건가요?”
언제였던가. 카페 사장은 이런 빌딩숲 사이의 카페를 찾아오는 중년 여성을 두고 이 근처의 건물주가 분명하다고 짐작했었다. 물론, 지금 이 순간까지는 그냥 웃어넘겼던 이야기였다.
……어쩌면 생각보다 더 엄청날지도. 지훈은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꼴깍 삼켰다.
동그란 금색 안경테 너머로 보이는 눈은 언제나의 온화함이 사라지고 일견 냉엄한 기운마저 서려 있었다. 어깨에나 닿을까 싶은 작은 키에 동그란 인상 때문에 늘 친근한 느낌을 받았던 게 무색할 만큼 위압적이기도 했다.
물론, 한편으로는 걱정도 됐다. 딱 봐도 체격이 좋은 지훈을 코앞에 두고도 시시덕대던 자들이 초면의 중년 여성에게는 더하지 않으리라는 보장이 없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이어진 그들의 반응은 지훈의 예상을 완전히 벗어났다.
“―어, 어어?”
분명 처음에는 뭐야, 하는 눈으로 고개를 쳐들었던 그들은 머잖아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빈정대듯 낄낄대던 얼굴에도 전과는 다른 표정이 떠올랐다.
당혹? 놀람? 낭패감? 어쩌면, 그 모두 다.
안절부절못하던 그들은 사장이 ‘아이스 아메리카노 두 잔 나왔습니다.’라고 말하기가 무섭게 음료를 들고 튀어 나갔다. 당당히 끼고 들어왔던 사원증 역시 어느새 벗어서 주머니와 가방에 쑤셔 넣은 건 물론이다.
한없이 얼떨떨해진 채로 서 있던 지훈이 퍼뜩 정신을 차린 건 그들이 나가며 울린 도어벨 소리를 듣고 나서였다. 지훈은 저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는 시선을 깨닫고는 몸을 꾸벅 접었다.
“손님, 불쾌한 경험하게 해 드려서 정말 죄송합니다.”
“내가 사과를 받을 이유는 없지요. 어디든 무례한 사람은 꼭 있기 마련이니까.”
“아닙니다. 소중한 시간을 방해받으신 건 분명하니까요. 다시 한번 죄송합니다. 그리고…… 감사합니다.”
빙긋 웃는 미소에서 왠지 모를 단단한 힘이 느껴졌다. 잠시 머뭇거린 지훈은 목을 한 번 가다듬은 다음 말을 이었다.
“저, 혹시 괜찮으시다면 다음에 다시 찾아 주시겠습니까?”
“네?”
“월요일, 수요일, 금요일. 이 3일이 제가 근무하는 날인데요. 이때 찾아와 주시면 더욱 감사할 것 같습니다.”
중년 여성의 고운 눈매에 의아함이 서렸다. 몇 초 정도 지훈을 바라보던 그녀는 이내 천천히 물었다.
“다시 오면요?”
“아! 대단한 이유는 아닙니다. 그저, 다음번 홍차는 제가 대접하고 싶어서요. 잘 어울리는 디저트와 같이요.”
뭔가 기분이 상하셨나? 아니면 너무 건방진 제안처럼 들렸으려나.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시선을 마주하고 있는 중년 여성의 앞에서 지훈은 제가 무언가 실언한 것이 있는지 되짚었다. 하지만 아무리 머리를 굴려도 큰 실수는 없는 것 같았다.
도통 무슨 생각을 하는지 짐작하기 어렵던 고운 이목구비 위로 옅은 웃음이 걸린 건 그 때였다.
“……그래요. 그렇게 할게요. 고마워요, 권지훈 씨.”
저도 모르게 조금 긴장했던 걸까. 아주 작은 한숨까지 내쉰 지훈은 다시 한번 허리를 꾸벅 숙여 인사하고는 카운터 안쪽으로 종종걸음을 옮겼다. 순간 삐죽 고개를 들었던 묘한 위화감의 이유를 짚어낸 건 그 뒤였다.
잠깐만. 방금 내 이름…… 불렀지 않나?
지훈은 뒤늦게 중년 여성이 앉은 테이블을 돌아보았다. 하지만 그녀는 이미 자그마한 핸드백에서 책을 꺼내 읽고 있었다.
“어우. 뭐라고 한마디 하려고 했는데 갑자기 튀어 나가서! 지훈 씨, 괜찮아요?”
“예? 아. 저야 뭐…….”
“저 새끼들, 빨대도 안 가져갔어요. 마시다가 콱 얼음이나 다 쏟으라지!”
조리대 저편에서 나와 대번에 가까이 온 카페 사장이 격앙된 말을 쏟아냈다.
사실, 키가 쑥 자란 중학생 때부터 어머니의 가게를 도왔던 지훈에게 저 정도 진상은 그리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하지만 단 하나 마음에 걸리는 게 있다면, 저들이 서해원의 이름 석 자를 입에 담았다는 것. 그것뿐이다. 지훈은 멋쩍게 웃으며 팔뚝 위의 서늘함을 떨치듯 손으로 몇 번 쓸었다.
* * *
“지훈 씨. 셔츠는 이거로 바꾸죠.”
왜인지 모르게 심각하기까지 한 제안이었다. 덕분에 셔츠를 다 입은 뒤 소매 단추를 잠그는 것만 남겨두고 있던 지훈은 제가 걸친 것과 해원의 손에 들린 것을 번갈아 보았다.
“뭔가 차이가 있습니까?”
“카라 끝 모양이요.”
“아아…….”
뭔지 모르겠지만 어쨌든 차이가 있다는 말이다. 지훈은 더 묻는 것을 일찌감치 포기하고 순순히 셔츠를 도로 벗었다.
사실 서해원은 며칠 전부터 이런 상태였다. 셔츠, 넥타이, 재킷과 바지, 구두의 색과 모양. 하다못해 양말의 길이까지 몇 개의 후보를 두고 인형 옷 입히기를 했다. 물론 그 인형은 권지훈이다.
“넥타이는 그대로 가도 되겠네요. 잠깐 고개 들어 볼래요?”
“예.”
지훈은 섬세한 이목구비 위로 긴 속눈썹이 드리우며 생긴 그림자를 훔쳐보면서 자세를 반듯하게 했다. 바짝 가까워진 남자에게서는 언제나처럼 좋은 향이 났다.
최종면접을 앞둔 아침인 오늘. 해원은 평소보다 집중해서 이렇게 머리부터 발끝까지 옷매무새를 일일이 확인해 주고 있었다. ‘제가 알아서 잘 챙겨 입고 갈 테니, 변호사님은 얼른 출근하십시오.’ 같은 말은 감히 할 수 없었다. 전에 없이 진지한 저 표정을 보고 있노라면 군소리 없이 시키는 대로 따라야겠다는 생각만이 들 뿐이었다.
몇 번의 손짓만으로 능숙하게 넥타이의 매듭을 만든 해원의 입가에 그린 듯한 미소가 걸렸다.
“잘 어울리네요. 셔츠를 바꾸길 잘한 거 같아요.”
“신경 써 주셔서 감사합니다.”
“천만에요.”
커다란 손이 살짝 다가오더니 몇 가닥 흘러나온 지훈의 머리를 조심스럽게 정리했다. 실로 간지러운 움직임이었다. 지훈은 해원이 이럴 때마다 이 완벽한 남자와 정말 ‘뭐라도 되는’ 사이 같다는 기분이 든다.
……서해원과 나는, 애인인가?
문득 떠오른 문장은 사귀는 거로는 만족할 수 없다던 단호한 목소리에 덮여 금세 흐려졌다. 하지만 두려울 건 없었다. 제가 사랑하는 만큼 사랑해 달라던 뻔뻔하지만 달콤한 요구가 그 뒤를 따랐으니 말이다.
섹스하고, 키스하고, 데이트하고. 또, 같이 살면서 면접일 아침에 옷을 골라주는 관계에는 대체 무슨 이름을 붙이는 게 좋을까. 지훈은 아직 그 답을 속 시원히 낼 수 없었다.
하다못해 마주 선 남자에게 대신 물어보기도 뭐했다. 그런 질문은, 못해도 취준생 딱지라도 뗀 다음에 하고 싶었으니까.
“왠지 변호사님이 저보다 긴장하신 거 같습니다.”
지훈이 나직하게 내뱉은 말에 해원의 고운 눈썹이 살짝 찌푸려졌다.
“정말 그럴지도 모르죠.”
“어. 정말요?”
“왠지 첫 재판 때랑 비슷한 기분이라고나 할까. 오랜만이네요, 이런 거.”
“그렇게까지……요?”
“그럼. 누구 일인데.”
심란하게 일렁이는 속을 다스릴 겸 가볍게 내뱉은 말에 돌아온 대답은 생각보다 반향이 컸다. 정작 그 당사자는 일부러 마음을 흔들려고 의도한 것도 아닌데 말이다. 지훈은 제가 귀한 조각상이라도 된다는 양 조심스레 다루는 남자 앞에서 가까스로 표정을 가다듬었다.
하필 이 순간, 머릿속 어디엔가 깃들어 있던 못된 말이 떠오른 건 참 얄궂은 일이다.
‘법무팀장이 어울린다는 것도 망상질 아냐? 회사 코앞이라 그냥 오는 거 가지고.’
‘하긴. 무슨 그 서해원이 카페 알바랑…….’
유독 추웠던 다리 위에서 마주쳤던 순간엔 꼭 달을 떼다 박은 것 같았던 밝은 눈동자는, 이렇게 부드럽게 떨어지는 햇살 아래에서는 그 자신이 태양이 된다.
요즘 권지훈은 저 눈빛 안에 담긴 애정을 새삼스레 자각하고 있었다. 사실 코앞에 두고도 실감이 안 난다. 제가 저 믿을 수 없을 만큼 다디단 마음의 종착점이라니.
“저 그래도, 이제껏 면접 결과는 늘 좋았었으니까요. 열심히 하고 오겠습니다.”
일부러 어느 때보다 씩씩하게 대답하자 해원의 향이 훅 가까워졌다.
한없이 부드러운 키스였다. 입 안을 파고드는 움직임은 다정하지만 거침없었다. 한편으로는 욕심껏 삼킬 듯이 입을 맞췄던 평소와는 다르게 옷에 손대지 않으려고 노력하는 게 느껴지기도 했다.
그 귀여운 노력 앞에 지훈이 웃지 않을 수는 없었다.
퍽 자신 있게 말하기는 했지만 어쨌거나 면접은 면접이었다. 몇 번이고 연습하고 외운 대답은 방치된 알코올처럼 날아가고, 한 칸 떨어진 옆자리의 누군가가 유독 자신만만해 보인다.
지훈은 정리해 둔 예상 질문을 머릿속으로 다시 시뮬레이션하면서 짧게 심호흡했다. 언제나 문제였던 서류를 통과하고 나니 인적성에 1차 면접까지는 순탄했다. 이제 남은 건 하나, 2인 1조로 들어가는 오늘의 2차 면접뿐이다.
“김아름 씨. 권지훈 씨.”
지훈은 딱딱한 호명을 따라 벌떡 일어나면서 휴대폰 액정 위로 저를 비춰보았다. 어느새 습관이 된 것처럼, 해원의 손이 닿은 모습을 보면 멋대로 덜컹거리는 심장이 조금쯤 달래지고 그 자리를 자신감이 채웠다.
면접관은 세 명. 끽해야 3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남자 한 명과 4-50대의 남녀가 나란히 앉아 있었다. 시작도 나쁘지 않았다. 1분 자기소개와 함께 본격적인 질문이 시작된 면접은 초장부터 냉랭한 기운이 흘렀던 1차 때와는 다르게 제법 친근한 분위기마저 흘렀다.
하지만, 진짜 파도가 몰려온 건 이제야 긴장이 좀 풀렸다고 생각한 순간이었다. 가장 먼저 창을 던진 건 가장 젊은 면접관이었다.
“권지훈 씨는 제법 최근까지 호안제강에서 일했었네요?”
그 어떤 것보다 먼저 예상했던 질문이다. 1차 면접에서 나오지 않았기에 더더욱. 지훈은 마른침을 한 번 꿀꺽 삼키고는 침착하게 대답했다.
“예, 그렇습니다.”
“1년 8개월이라. 조금 애매한 기간이 아닌가 싶은데. 이직을 생각하게 된 이유라도 있나요?”
“이전 직장에서 첫 사회생활을 시작하며 1년 8개월 동안 정말 많은 것을 보고 배웠습니다. 하지만 조직에서의 업무에 익숙해질수록 제 역량을 더 잘 발휘할 수 있는 분야를 찾는 눈 역시 생겼습니다. 이력서에 쓰기에 깔끔한 시간을 채울 수도 있었겠지만, 하루라도 빨리 새로운 분야에 뛰어들고 싶다는 생각에 곧장 이직을 결정했습니다.”
“아하. 그렇군요…. 빅5 철강회사를 그만두고 새로운 도전이라.”
모호한 반응이었다. 하지만 그걸 안다고 한들 어쩔 수 없었다. 지금의 제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대답을 했다.
중년의 남자 면접관의 입이 열린 건 그 때였다.
“그럼 한 가지 상황을 제시해 볼 텐데, 권지훈 씨라면 이걸 어떻게 해결할지 답변해보세요.”
지훈은 예, 하고 깍듯하게 대답하며 자세를 더욱 빳빳하게 했다. 면접관의 말이 이어졌다.
“권지훈 씨가 우리 한터플래닛에 입사했다고 합시다. 그럼, 여기 자기소개서에 썼던 대로 우직하고 성실하게 일하겠죠. 그런데 어느 날. 저 윗분들까지 다 모인 회의 시간에 지훈 씨의 상사가 자기 아이디어라면서 웬 기획서를 돌리기 시작합니다.”
“…….”
“이게 뭐지, 하고 들여다봤는데, 웬걸. 일주일 전에 상사가 한번 보여달라고 해서 전송해 줬던 파일이네요. 이건 지훈 씨가 두 달 넘게 준비하던 거였습니다. 시장 조사부터 업계 교수들까지 찾아가 자문 얻어가면서요. 그런데, 상사가 가로챈 거로도 모자라 온갖 칭찬까지 들어가며 진행된다네요, 그게.”
심장이 빠르게 뛰었다. 아니, 왼쪽 가슴에서 그대로 뜯겨 나온 다음 반으로 갈라 귓구멍에 처박혔다. 알고 있는 거다. 이전 회사에서 무슨 일이 있었는지.
무심한 목소리가 계속됐다.
“상사에게 따지니 그게 다 자기 밑에서 배워서 나온 거 아니냐고 적반하장으로 나오고, 믿었던 동료들은 오히려 권지훈 씨를 바보 취급합니다. 그깟 기획서 하나, 그냥 눈 딱 감고 ‘여기 있습니다.’ 그냥 드리면 나중에 더 큰 거로 돌아올 텐데…… 하고요.”
지훈은 눈을 깜박이지 않기 위해 노력했다. 또, 제가 이 자리에 앉아 있는 이유가 제 노력 때문인지, 아니면 모욕을 위해서인지 구분하지 않기 위해 부단히 애썼다. 최소한 지금 이 순간만큼은 그걸 참아야 했다.
“권지훈 씨는 만약 이런 상황이라면 어떻게 행동할 겁니까?”
세 쌍의 눈이 집요할 정도로 얼굴 가죽 너머를 살피려고 하는 게 느껴졌다. 지훈은 제가 지옥에서 보냈던 반년을 돌이켜보았다. 그다음, 제가 하지 못했던 것들을 천천히 입에 담았다.
“가장 먼저 사내 고충과 괴롭힘 방지를 담당하는 부서를 찾아갈 것입니다. 그다음, 제 노력이 폄훼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할 겁니다.”
“…….”
“물론 당장 동료들을 보기 껄끄러울 수는 있습니다. 하지만, 장기적으로 보았을 때 잘못된 관행이 자리 잡는 것이야말로 모두를 힘들게 하는 일일 테니…… 소리를 내겠습니다.”
짧은 침묵이 흘렀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겨우 몇 초간의 정적이었겠지만, 지훈은 그 찰나가 끔찍하게 긴 것처럼 느껴졌다.
“소리를 내도 소용이 없다면요.”
내내 무언가를 적고 있던 여자 면접관이었다. 그 목소리는 그리 크지도 않았고, 힐난이나 조롱의 기운이 깃들어 있지도 않았다. 하지만 때로는 아무렇지도 않기에 더 못 박히는 것들이 있다.
“일대 다수로 짜고 권지훈 씨만 이상한 사람으로 만든다면요? 그래도, 변화가 없다면요?”
지훈은 짧게 심호흡했다. 이제 과거에서 현실이다.
“그렇다면 제 가능성과 능력을 믿어줄 회사로 이직할 것 같습니다.”
“이직, 이요?”
뜻을 알 수 없는 쉼표가 느껴지는 물음이었다. 지훈은 제게 향한 세 쌍의 눈을 하나하나 들여다보면서 대답했다.
“예. 구성원의 인격을 말살하는 사내 문화가 당연한 기업에서 건강한 미래가 있을 리 없습니다. 때문에, 이직을 준비할 것입니다.”
“…….”
“할 수 있는 한 치열하게요.”
저 시선들의 의미가 무엇인지 고민하는 건 의미 없는 일이었다. 지훈은 몇 초간 말을 끊었다가 힘주어 말을 이었다.
“……저는 이곳 한터플래닛이 그 건강한 미래가 있는 회사라고 생각하고 지원했습니다.”
세상에 쉬운 일은 없다는 뻔한 격언을 모르던 건 아니었다. 그걸 잘 알기에 더 열심히 살아왔다.
하지만, 이런 말들도 있지 않나. ‘날먹’이나 ‘쉽게 가자’ 같은 것들. 누군가는 그 말처럼 살아가기에 있는 단어일 텐데, 왜 열심히 살아온 제게는 그것들이 단 한 번도 쉽게 찾아오지 않는지.
면접이 끝나고, 지훈은 곧장 면접장 근처 화장실로 직행했다. 가장 먼저 한 일은 세수였다. 그것도 할 수 있는 한 가장 차가운 물로 얼굴 위를 내리쳤다.
한 번, 두 번, 세 번…. 몇 번이고.
얼마나 그렇게 찬물을 끼얹었을까. 왠지 모르게 뺨이 얼얼하다는 생각에 거울을 보자, 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얼굴은 이곳에 도착했을 때와는 달리 엉망진창이었다. 특히 가장 거슬렸던 건 해원이 예쁘게 매 준 넥타이가 보기 싫게 흐트러졌다는 거였다.
“하, 면접 결과가 늘 좋기는 무슨…….”
지훈은 작게 중얼거렸다.
* * *
서해원은 오늘 하루 몇 번이나 확인한 휴대폰을 공연히 한 번 더 켜 보았다.
전화, 없음. 메시지, 역시 없음.
달라진 게 없다는 걸 알면서도 기어이 다시 띄운 마지막 대화는 오전 11시를 조금 넘겨 끝났다. ‘잘하고 오겠습니다.’ 이모티콘 하나 없는 반듯한 문장을 마지막으로, 지훈은 저녁 5시 40분인 지금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다.
휴대폰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고 있으려니 오늘 하루 내내 묘하게 산만한 상사의 곁을 지킨 김 비서의 입이 열렸다.
“……그냥 연락해 보시죠?”
“아직 면접 중일 수도 있잖아요.”
“아닐 겁니다.”
사실, 아직 면접 중일 수도 있다고 말한 서해원 본인도 그게 아니라는 걸 모르지 않았다. 하지만 돌아온 부정은 그걸 참작하고서라도 유독 단호했다. 누구보다 가까이에서 수족처럼 일한 비서를 잠시 눈에 담던 해원은, 이내 작은 한숨에 질문을 실어 보냈다.
“몇 시에… 끝났나요?”
“지훈 님은 두 시쯤 끝났습니다.”
이제껏 살면서 ‘속상해서 죽을 것 같다.’라는 문장의 뜻을 몰랐었는데. 제 인생을 움켜쥔 여섯 살 어린 남자는 그 낯선 구절마저도 뒤늦게 가르쳐 준다.
해원은 눈을 감은 채 의자에서 풀썩 소리가 날 만큼 머리를 뒤로 젖혔다가, 다시 휴대폰을 노려보았다. 말로 먹고산다는 것이 무색하게 머릿속이 표백된 기분이었다.
평범한 인사말 하나에도 한참을 망설이던 그가 택한 건 짤막한 물음이었다.
[지훈 씨, 어디예요?]
확인하지 않을 수도 있을 거다. 이미 집에 도착해 있을지도 모른다. 아니, 그게 아니라면……. 해원은 머릿속으로 온갖 선택지를 그리며 답지 않게 초조함을 감추지 못했다.
하지만 언제나 예상을 빗나갔던 지훈은 오늘 이 순간마저도 이른 짐작을 벗어났다. 오래 망설이다 보낸 것이 무색하게 메시지 옆의 숫자 1은 곧장 사라졌다.
그러고는―
“왜 그러십니까?”
“회사 앞.”
“네?”
비서의 의아한 되물음이 이어졌지만, 해원은 대답 대신 곧장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보낸 메시지 못잖게 짤막한 지훈의 답장 때문이었다.
[변호사님 회사 앞이요]
권지훈이 면접을 끝내고 나와 가장 먼저 한 건 조금 늦은 점심을 먹는 거였다.
바삭바삭한 튀김옷이 입혀진 두툼한 돈가스에 목이 따가울 정도로 차가운 콜라를 무엇 하나 남기지 않고 먹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힘들 때일수록 잘 먹어야 한다는 뻔한 말을 따르기 위해서였다.
그렇게 든든하게 배를 채우고 나서는 대형서점에 갔다.
딱히 목적이 있어서는 아니었다. 적당히 조용하고, 적당히 바글바글하고, 또 적당히 구경할 게 많은 곳이었기 때문이다. 오늘의 신간부터 베스트셀러를 훑어보다가 매장 한쪽을 넓게 차지한 전자기기까지 한 번씩 다 만져보고 나니 시간은 금방 흘렀다.
SJ 본사 건물은 그 길다면 길고 짧다면 짧은 여정 중 가장 마지막에 도착한 곳이었다. 버스를 타고 가다가 어중간한 위치에서 일찍 내린 다음, 일부러 한참을 걷고 걸어서.
해원에게 문자가 온 건 카페에서 막 음료를 사서 나왔을 때였다.
‘지훈 씨, 어디예요?’
짤막한 문장 하나였지만 그의 다정한 목소리를 떠올리기엔 충분했다. 게다가 타이밍도 완벽했다. 지훈은 면접장을 빠져나온 이후 처음으로 진심 어린 미소를 건 채 대답했다. ‘변호사님 회사 앞이요.’
하필 딱 퇴근 시간이라 슬슬 불어나는 사람들 사이에서 해원을 곧장 찾지 못하면 어떡하지 생각했는데, 역시나 기우였다. 지나가는 이들보다 머리 하나, 아니 그 이상은 큰 서해원은 정문을 나오기도 전부터 곧장 눈에 띄었다. 슈트 재킷조차 걸칠 새 없이 휴대폰 하나만 쥐고 나왔기에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
“…….”
그저 걸어 나오는 것조차 영화 속 한 장면 같은 남자는 이미 제 속을 다 들여다봤다는 듯한 얼굴이었다. 덕분에 지훈은 왠지 좀 미안해졌다. 그래서, 그 대신이라기는 뭐하지만 두 손에 들고 있던 것 중 하나를 얼른 내밀었다.
“드십시오.”
“이건―”
“바닐라 라떼요. 사장님이 엄청 자신 있어 하시는 메늅니다.”
“…….”
“맨날 저희 카페에 오셔서 아이스티만 드셨잖습니까. 자요.”
삐걱거리는 서해원이라니. 참 보기 드문 광경이었다. 얼떨떨한 표정으로 음료를 받아든 그는 이내 잠자코 까만 빨대를 물었다.
투명한 플라스틱 컵 속 음료가 몇 번 줄어들었을 때쯤 지훈이 슬쩍 감상을 물었다.
“맛있죠?”
“……네. 맛있네요.”
“저도 근무할 때마다 한 잔씩은 꼭 마시는 거 같습니다.”
맑은 연보랏빛 하늘과 가볍게 살랑이는 바람까지. 오늘 하루가 어땠는지를 제하고 보면 야속할 만큼 완벽한 날씨였다. 서해원과 권지훈은 한동안 높다란 건물의 정문 앞, 화단의 돌에 나란히 기댄 채로 묵묵히 음료만 마셨다.
그러다 먼저 침묵을 깬 건, 헝클어진 까만 머리카락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걸 묵묵히 지켜보던 서해원이었다.
“지훈 씨. 같이 올라갈래요?”
지훈의 까만 눈이 동그랗게 커졌다. 들은 말 역시 한발 늦게 이해했다.
“같이 올라간다… 라니, 여기를요?”
“네.”
“전 이곳 직원도 아닌데요.”
“당연히, 직원이 아니라 손님으로서죠. 제가 지훈 씨 일하는 카페에 갔던 거랑 똑같이요.”
차마 SJ의 이름을 입에 담지도 못한 채 ‘여기’나 ‘이곳’으로 빙빙 돌려 말하던 지훈의 얼굴에 선명한 당혹이 어렸다.
“어……. 그, 변호사님 일하시는 회사인데요. 주변 사람들 눈도 많고. 곤란하실 수도 있는데.”
“왜 곤란하죠?”
다정하지만 물러설 기색이 없어 보이는 남자 앞에서 지훈의 입이 저절로 꾹 다물어졌다. 얼마 전 카페에서 겪었던 일 같은 건 죽어도 말할 수 없어서다. 하지만 그 침묵은 그리 오래가지 못했다. 이내 귓가에 닿은 속삭임 때문이었다.
“회사에서 야한 짓 할 생각하면 못 써요, 권지훈 씨. 내 사회적 지위를 생각해 줘야지.”
“―예? 그, 그런 생각 안 했습니다!”
“흠, 못 믿겠는데요. 당당하면 같이 올라가든가요.”
와. 진짜 뻔뻔하다. 지훈은 순간 정말 순수하게 감탄했다. 그러자 그림 같은 미소를 씩 내건 해원이 곧장 지훈을 잡아끌기 시작했다. 슬슬 퇴근하고 밖으로 나오기 시작하던 SJ의 직원들과는 정확히 반대되는 방향의 역주행이었다.
“자, 잠깐만요. 변호사님! ……서해원 변호사님!”
“저희 SJ에 오신 걸 환영해요. 권지훈 씨.”
주춤할 새도 없이 입구에 들어서자 감히 구둣발을 내딛는 것조차 황송할 정도로 반짝이는 로비가 펼쳐졌다.
카페에 있다가 떠나는 해원을 보면서 종종 이 건물의 내부를 상상해 본 적은 있었지만, 그렇다고 정말 들어와 보고 싶단 생각은 한 적 없다. 그것도 이렇게, 앞서 걷는 남자가 가는 곳마다 홍해가 갈라지듯 인파가 열리고, 사람들이 꾸벅 인사하는 상황 따위는 더더욱 꿈꾼 적 없다.
어찌나 성큼성큼 발을 옮겼는지 가드를 지나 1층의 게이트까지 넘는 건 순식간이었다. 덕분이라면 덕분에 엉망진창이던 오늘 하루의 우울 같은 건 감히 끼어들 새도 없어졌다. 호기심 반, 놀람 반으로 달라붙는 그 어떤 눈과도 시선을 마주치지 않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으로도 빠듯했으니 말이다.
한편, 저 입구에서는 팔을 붙잡는 것으로 시작했던 커다란 손은 어느덧 손목까지 자연스럽게 내려와 있었다. 지훈이 그 사실을 깨달은 건 띵, 하는 소리와 함께 열린 엘리베이터에서 사람들이 우르르 쏟아져 나오는 순간이었다.
“아, 안녕하십니까. 먼저 들어가 보겠습니다.”
“네. 수고하셨습니다.”
실로 깍듯한 인사 앞에서 지훈은 마른침만 꼴딱꼴딱 삼켰다. 온 신경이 제 손목 안쪽을 부드럽게 원을 그리듯 만지는 서해원의 엄지손가락에 쏠린 것만 같아서였다.
불행 중 다행으로 사람들이 빠져나가고 텅 빈 첫 번째 엘리베이터에 올라탄 건 두 사람뿐이었다. 지훈은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자마자 작은 비명을 질렀다.
“변호사님! 대체, 다른 사람이 보면 어떡하려고!”
“―4단계.”
“예?”
어찌나 놀랐는지 아직도 심장이 벌렁벌렁한데 돌아온 대답은 짤막하다 못해 단출했다. 심지어 짐짓 장난스러운 턱짓마저 뒤따랐고 말이다. 지훈은 그제야 해원이 가리킨 곳을 따라 시선을 옮겼다. 그 끝에 있는 건, 어느새 손목에서 자연스럽게 내려와 깍지까지 끼워진 손이었다.
잠시 침묵했던 지훈은 이내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설마, 4단계가 손잡기라는 뜻은 아니시겠죠?”
“왜요. 좋지 않아요?”
슬쩍 접히는 눈매가 간지러울 만큼 달았다. 섹스와 키스를 지나 첫 데이트를 한 것으로도 모자라 이제야 손잡기라니. 지훈은 저도 모르게 입을 조금 벌렸다. 하지만 정작 상대는 손을 더욱 단단히 고쳐 잡을 뿐이었다. 농담도, 장난도 아니라는 거다.
그 악력 앞에서 먼저 손을 든 건 지훈이었다. 물론 엄한 단서 하나를 붙이는 것도 잊지 않았다.
“……문 열리기 전까지만요.”
“네.”
정말 대답 하나만큼은 세상에서 제일 예쁘게 하는 남자다. 덕분에 왠지 뺨이 훅 뜨거워진 지훈은 목소리를 몇 번 가다듬은 다음 그제야 딱 하나 불이 들어온 층을 확인했다.
“36층……. 와, 높네요.”
“가끔은 좀 더 낮았으면 좋았겠다 싶어요.”
“왜요?”
“왔다 갔다 하기 귀찮잖아요.”
처음으로 맞잡은 서해원의 손은 유독 따뜻했다. 덕분에 지훈은 엘리베이터 층수가 빠르게 더해질수록 이 맞닿은 온기와 떨어지기가 아쉬워졌다. 문이 열리기 전까지만이라며 못 박은 건 제 쪽인데 말이다.
28, 29, 30…….
빈틈없이 꽉 맞물렸던 해원의 손에서 천천히 힘이 빠지기 시작했다. 그러다 맑은 기계음이 들린 순간. 약속은 충실하게 이행됐다. 마지막까지 손가락 끝이 손등 위를 노골적으로 더듬기는 했지만 말이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어깨를 조금 떨었다.
“같이 가실까요.”
36층. 본격적인 자신의 공간에 도착한 해원은 자연스럽게 지훈을 에스코트했다. 그 상냥한 눈웃음 앞에서 지훈은 거절할 생각도 못 하고 얼떨떨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실 지훈은 해원의 저 표정이 얼마나 귀한 것인지 잘 모른다. 한강 다리 위에서 붙들렸던 때부터 가장 따뜻하고 화사한 봄날을 떼어 온 듯한 미소를 내내 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퇴근 전이던 36층의 사람들은 달랐다. 이제껏 본 적 없는― 아니, 상상조차 한 적 없는 서해원의 간지러운 표정 앞에서 얼어붙었던 그들은 이내 입까지 쩍 벌렸다. 해원의 뒤를 따르는 슈트 차림의 지훈 때문이었다.
눈에 띄다 못해 번쩍이는 두 남자의 조합은 온갖 상상을 불러일으키기에 충분했다. ‘언제나 친절했던 회사 뒤 카페 알바생의 정체가, 사실은?!’같은 드라마 속 비밀 남주의 타이틀부터, 이 모든 것이 몇 달 동안 계획된 고도의 인사평가 방법이 아닌가 의심하는 사람까지. 36층은 차마 입 밖으로 토해낼 수 없는 온갖 감정이 소용돌이치는 공간이 되었다.
하지만 몇 직원들을 말 그대로 얼음 상태로 만든 건, 눈이 마주친 순간 “어?”하고 멋쩍게 웃으며 묵례한 지훈의 인사였다.
“……아는 사이인가요?”
“예? 그게, 안다기보단 카페에 자주 와 주시는 분들이라.”
남녀를 불문하고 지훈을 구경 가는 것에 나름 재미가 붙었던 사람들은 ‘꽃돌아, 네가 우리한테 그러면 안 돼!’ 하고 속으로 울부짖었지만, 별 소용은 없었다. 오늘따라 청명하게 반짝이는 지훈은 그 마음의 소리를 완벽하게 튕겨냈다.
“아하…. 자주, 와 주시는 분들이요.”
입꼬리만 올렸을 뿐 눈은 전혀 웃지 않는 서해원의 시선이 지훈이 아는 체하는 이들의 면면에 꽂혔다. 슬쩍 가늘어진 눈매 속에서도 빛을 잃지 않은 밝은 눈동자가 유독 섬뜩하다고 느껴지는 순간이었다.
“―아니. 대체, 이게 무슨 일입니까?”
조금 카랑카랑한 목소리의 주인공은 서해원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몇 안 되는 사람 중 하나였다.
“어, 김 비서님!”
“제가 이 소란을 피우시라고 귀띔드린 게 아닐 텐데요, ‘법무팀장님’. 네에에?”
유독 낯선 환경인 탓일까, 지훈은 아는 얼굴이 한 명 나왔을 뿐인데도 눈에 띄게 긴장을 풀고 반가워했다.
볼우물이 쏙 들어갈 정도로 밝아진 표정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원은 이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그러고는 다시 한번 아무렇지도 않게 36층을 충격에 빠지게 할 말을 내뱉었다.
“보세요, 지훈 씨. 제가 이렇게 핍박받고 살아요.”
“…….”
“…….”
실로 경악 어린 침묵이 깔렸다.
그걸 어렵잖게 짚어 낸 지훈은 여러 인턴 생활이 길러 준 진실의 눈으로 주변을 슥 둘러보았다. 그리고 머잖아 나온 판독 결과는…….
결사 항전의 민중 봉기를 앞둔 듯한 표정들 앞에서 지훈은 자연스럽게 화제를 돌렸다.
“……변호사님. 변호사님 사무실은 어딘가요?”
“아. 저쪽이요.”
36층을 충격과 경악으로 몰아넣은 두 사람은 매끄럽게 발을 디뎌 복도 끝에 있는 가장 안쪽 사무실로 이동하기 시작했다. 그 길쭉한 뒷모습에 수많은 시선 역시 조르르 따라간 건 당연했다.
결국 뒷수습을 맡게 된 건 김 비서였다. 그는 새삼스럽지도 않다는 듯 짝짝, 짧은 박수 두 번으로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관심을 잘라냈다.
“후우우, 오늘은 다들 퇴근하실까요.”
* * *
“우와! 진짜 뷰 좋은데요? 이런 곳에서 일하시는구나.”
“그냥 회색 빌딩들뿐인데요.”
“에이. 그래도요.”
지훈은 탁 트인 해원의 사무실을 둘러보며 밝게 웃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오면서부터 계속해 빳빳하게 힘이 들어가 있던 어깨에서도 그제야 힘이 빠졌다. 종이 한 장, 펜 한 자루까지 말끔하게 정돈된 이곳에서 익숙한 향이 났기 때문이다.
서해원 그 자체를 공간으로 만든 듯한 사무실 이곳저곳을 둘러보던 지훈의 시선은 이내 커다란 책상 위 한가운데 있는 명패에 닿았다.
“‘전략기획실 법무팀장 서해원’……. 멋지네요.”
어깨를 으쓱하고 웃은 해원은 대답 대신 빨대로 플라스틱 컵 안의 얼음을 몇 번 저었다. 바닐라 라떼는 어느새 얼음이 녹아 조금 밍밍해져 있었다. 아, 하고 작은 탄성을 낸 지훈의 말이 이어졌다.
“그러고 보니, 저도 법무팀장님이라고 불러야 하는 거 아닙니까?”
“무슨 그런 아쉬운 소리를.”
“예?”
“그냥 서해원 변호사님, 이렇게 불러 주세요. 이제까지처럼.”
사실 지훈이 서해원을 ‘변호사님’이라고 부르게 된 건, 따지고 보면 김 비서 때문이다. 누군지도 모를 남자와 정신없이 보낸 하룻밤 뒤에 이불 속에서 엿들은 호칭을 따라 하다 보니 어느 순간 입에 밴 거다.
가만히 생각해 보면 정작 김 비서님은 요즘 그렇게 안 부르는 거 같긴 하지만……. 지훈은 늦어도 한참 늦게 깨달은 사실을 되짚으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소파에 기대선 채로 묵묵히 옅은 미소를 걸고 있던 해원의 입이 열린 건 그 때였다.
“지훈 씨.”
“예?”
“지금부터 내가 하는 말은 처음부터 끝까지 그저 온전히 SJ 전략기획실 법무팀장 서해원으로서 하는 말이에요.”
사무실을 살피다 별생각 없이 뒤를 돌아봤던 지훈은, 묘할 만큼 감정을 도려낸 듯한 남자의 시선을 마주한 순간 눈을 크게 떴다. 들은 말을 이해한 건 그 나중의 일이었다. 나긋나긋하지만 힘 있는 목소리가 이어졌다.
“―다시 말해, 권지훈 씨를 사랑하는 서해원이 하는 말이 아니라는 거예요. 부디 그렇게 들어 줄래요?”
“……예. 알겠습니다.”
꼴깍. 저도 모르게 자세까지 고쳐 선 지훈의 목울대가 크게 움직였다. 어쩌면 아이러니한 일이었다. 하필 오늘 이곳 36층의 사람들도 서해원의 화사한 미소를 처음 보았고, 권지훈 역시 서해원의 다른 얼굴을 처음 보았다는 건.
지훈의 눈에 진지함이 서린 것을 확인한 해원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권지훈 씨. 우리 SJ에서 일하는 건 어때요?”
한없이 따뜻한 기류만이 흘렀던 사무실 안은 순간 정적에 찼다. 그 끝도 없이 이어질 것 같은 고요를 채운 것이라곤 오로지 플라스틱 컵 안에서 얼음이 녹으며 종종 달그락대는 소리뿐이다. 두 사람의 시선 역시 진득하게 엮였다.
얼마나 그렇게 있었을까. 한없이 단호한 입매만큼이나 딱 떨어지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싫습니다. 절대로.”
놀랍지 않은 일이었다. 아니, 99%의 확률로 예상했던 답이다. 권지훈처럼 대나무 같은 남자에게는 여기서 단 1%의 반전을 기대하는 것조차 모욕이나 다름없을 테니.
해원은 고개를 느긋하게 기울였다. 담담한 질문 역시 뒤따랐다.
“왜요. 낙하산이어서?”
사실 이번에도 반전을 기대한 질문은 아니었다. 당연히 대답은 하나, ‘예.’겠지. 제 확신을 굳이 정확히 확인받기 위해 한 말에 불과했다. 이내 긍정보다 더욱 분명한 두 음절이 튀어나왔다.
“아뇨.”
덕분에 해원은 순간 대답을 잃고 몇 초간 가만히 있었다. 하지만 지훈은 그 침묵에도 당황은커녕 여느 때처럼 꼿꼿하기만 했다. 길고 힘겨웠던 하루의 여정을 보여주듯 흐트러진 머리와 옷차림을 하고 있는데도 한없이 반듯해 보일 수 있다니. 그 순간 해원은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감탄해 버렸다.
“……그럼요?”
“지금의 전 취준생 권지훈이라서요.”
또박또박 흘러나오는 단어는 모여서 문장이 됐고, 완벽한 의미로 완성됐다. 서해원은 제가 가장 사랑하는 목소리에 담겨 나온 말에 온 신경을 집중했다.
“보란 듯이 자리 잡을 겁니다. 취준생 권지훈이 아니라 제대로 된 명함이 있는 권지훈으로. 낙하산으로라도 데리고 오고 싶은, 그런 사람으로.”
“…….”
“지금 서해원 법무팀장님께서 해 주신 감사한 제안은 그때 고려해 보겠습니다.”
변호사님이 아니라 법무팀장님. 그 정확한 단어사용을 깨달은 해원의 입술 끝이 저도 모르게 위로 조금쯤 말려 올라갔다.
변호사님이 아니라 법무팀장님이라면 지금 이 상황에서 웃으면 안 된다. 머리로는 아주 잘 안다. 하지만 지훈의 말을 곱씹으면 곱씹을수록 그게 쉽지 않다.
“무조건 오케이가 아니라… ‘고려해 보시겠다’?”
“예. 그렇습니다.”
예의 바르지만 망설임 없이 흘러나온 대답 앞에서 해원은 고개를 푹 떨구고 말았다. 어떻게 다듬어 감출 엄두조차 나지 않을 정도로 올라간 입꼬리 때문이었다. 소리 내 웃는 것을 참기 위한 한숨 역시 길게 후우우, 터져 나왔다.
“지훈 씨.”
“예.”
“저, 지금 살며 처음으로 이상형이라는 게 생긴 것 같아요.”
눈을 마주하지 않고 바닥만 내려다보는 해원을 바라보며 의아함이 둥둥 떠올랐던 지훈의 미간이 순간 꿈틀한 것도 그 때다.
이건 분명 ‘서해원 변호사님’으로 돌아온 남자의 말이다. 왜 갑자기 법무팀장에서 변호사로 돌아갔는지는 모르지만, 여하튼 그렇다. 하지만 지금 갑작스러운 직함 변경보다 더욱 신경 쓰이는 건 그 내용이었다. 내내 당당하기 그지없던 지훈의 태도에도 삐걱, 금이 갔다.
공연히 시선을 한 바퀴 휙 돌린 지훈은 짧은 헛기침 뒤에 쭈뼛쭈뼛 물었다.
“가, 갑자기 생긴 이상형이… 어떻게, 되십니까?”
해원의 도톰한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팽팽하게 펴졌다. 그리고 이내 애정과 욕정, 그 두 가지 감정이 뒤섞여 넘실거리는 대답이 흘러나왔다.
“야망 있는 남자.”
“…….”
“엄청 섹시하네요, 그거.”
정작 그 말을 하는 당사자의 얼굴이 어느 때보다 넋을 빼놓을 만큼 근사하게 보였다는 건 지훈만 아는 비밀이다.
구직을 열심히 해야 할 이유가 하나 더 늘었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그리 생각했다가 곧이어 속이 훅 더워졌다. 유독 이상형이라는 단어에 민감하게 반응한 스스로를 깨달아서다. 상대는 농담처럼 가볍게 한 말인 것이 뻔한데 말이다. 분명, 머리로는 잘 알았다.
그런데 왜 이렇게 못 견딜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걸까.
지훈은 초조하게 주먹을 쥐었다 폈다를 반복했다. 섹스하고, 키스하고, 데이트하고, 손을 잡은 뒤에야 상대를 연애 대상으로 바라보기 시작한 저 자신을 이제야 자각해서였다.
아니, 심지어 제게 이미 사랑을 고백하기까지 한 남자의 가장 이상적인 연애 대상이 저였으면 좋겠다는 어이없는 욕심마저 삐죽 싹텄다. 그 깨달음이 지훈을 얼마나 당혹케 했는지 모른다.
‘나는 혹시, 서해원을….’
사실 지훈은 이제껏 살면서 했던 얄팍한 연애 몇 번 동안 언제나 갑의 위치였다. 물론 그걸 자각한 적은 없었다. 짧으면 몇 달에서 길어야 1년이 못 됐던 연애에서 언제나 차이는 입장이었기 때문이다.
지훈은 연애시장에서 객관적으로 훌륭한 남자였다.
잘생기고, 학벌 좋고, 지나가는 말 한마디까지 새겨들을 정도로 다정하고. 지훈과 연애를 시작했던 사람들은 하나같이 초반에는 먼 미래까지 상상하고는 했다. 늘 따뜻하다는 건 절대 뜨거워지지는 않는다는 말과 같은 뜻이라는 걸 깨닫기 전까지는.
하지만, 그들이 지금 권지훈의 얼굴을 본다면 믿을 수 없다는 표정을 할 거다.
“지훈 씨. 회사에서 야한 짓 할 생각하지 말라고 했잖아요. 왜 그렇게 얼굴이 빨개요?”
“―예? 아. 죄…, 죄송, 합니다.”
해원의 고운 눈썹이 살짝 꿈틀했다. ‘그런 적 없다’가 아니라 ‘죄송합니다’라니. 지금 스스로가 무슨 말을 한 건지 알기는 하는 건가 싶어서다. 짐짓 장난 같은 물음이 이어졌다.
“혹시 내 책상 위에서 다리 벌리는 상상이라도 했어요?”
“네? 아뇨! 절대! 그런 적 없습니다!”
앞서 나왔어야 할 부정이 드디어 터져 나왔다.
솔직히 평소의 해원이었다면 ‘그럼 왜 당장 여기서 뒹굴고 싶어 죽겠다는 표정을 하고 있는 건데요?’ 하고 조금 더 짓궂게 놀렸을 거다. 그렇지만 오늘의 권지훈은 충분히 힘든 일이 많았다. 잠시나마 머리에서 우울한 생각을 밀어낼 수 있었다면 그걸로 됐다. 해원은 피식 웃으며 조금 느지막한 저녁 식사를 제안하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열린 건 붉게 변한 눈매를 떨군 채 묘하게 안절부절못하던 지훈의 입이었다.
“―그게, 그러니까. 정말 빨리 취업해야겠다 싶다는 생각을… 했습니다. ……야망 있는 남자가 되려면요.”
장담컨대, 살며 처음으로 누군가의 이상형이 되고 싶다 생각한 융통성 없는 남자의 떨리는 목소리란 세상 어떤 음담패설보다 자극적이다. 특히 그것이 뒤늦게 자각한 제 마음의 크기에 당혹해서 새빨갛게 익은 권지훈이라면 더더욱.
덕분에 해원은 웃으며 장난치던 그대로 굳어서 흔한 대답조차 하지 못했다. 예상치도 못했던 순간에 찾아온 달콤한 습격은, 최소한 지훈의 앞에서만큼은 근사한 남자이고 싶었던 그를 손쉽게 무장해제시켰다.
“…….”
“아무리 대단한 포부가 있어 봤자 새 회사 들어가기 전까진 야망이 아니라 망상일 테니까…. 무, 물론 면접 말아먹고 와서 할 말은 아니라는 건 압니다만.”
어울리지도 않게 우물쭈물 말을 잇던 지훈이 끝내는 죄송합니다, 라고 거듭 사과하려 했으나, 그 시도는 도중에 툭 끊어졌다. 순간 몸이 크게 휘청할 정도로 달려든 힘 때문이었다.
“―아, 읍…!”
당신의 이상형이 되고 싶다는 달콤한 고백을 들은 직후에 하는 키스치고는 다디단 기운이 전혀 없는 입맞춤이었다. 순간 중심을 잡으려 테이블에 손을 디딘 지훈은 실수로 그 위에 있던 명패를 밀어 엎어트리고 말았다.
하지만 해원은 그런 것 따위에는 아랑곳하지 않고 지독한 입맞춤을 이어갔다. 느긋하게 혀를 섞을 여유는 없었다. 해원이 정신없이 매달린 건 그저 지훈의 입술, 그것 하나뿐이었다. 제게 최악이었던 날마저 상대에겐 선물 같은 말만을 담는 그 부드러운 피부를 정신없이 물고, 빨고, 삼키는 것밖에 할 수 없다는 듯이.
처음에는 약간 놀란 듯했던 지훈 역시 팔을 둘러 해원의 목을 감싸 안으며 조급한 키스에 적극적으로 화답했다.
이 책상 위에서 다리를 벌릴 생각이 없다고 펄쩍 뛰었던 것이 불과 몇 분 전이건만. 지훈은 어느새 사타구니 사이에 노골적으로 맞닿고, 꾹꾹 짓누르듯 비벼지는 단단한 허벅지를 반기듯 다리를 벌렸다. 성기 위로 묵직한 체중이 실릴 때마다 기다렸다는 것처럼 허리가 들썩이기도 했다.
아랫배보다 반 뼘 정도 아래. 그 안쪽 어딘가가 자꾸 간질간질했다. 해원이 언제나 오랜 시간 공들여 풀어주는 입구 역시 아직 처박히지도 않는 성기를 욕심껏 빨아 삼키듯 세게 힘이 들어갔다.
“하아…….”
어쩌면 서해원의 이상형이 되고 싶다 생각하고, 또 그걸 자각한 순간 마음속 어딘가에 남아 있던 마지막 장벽이 무너진 것일지도 몰랐다. 예컨대 달콤함에 기대 밀어놓았던 ‘같은 남자와의 관계에 이토록 깊게 빠져들어도 괜찮은 걸까’라는 불안한 물음 같은 것들이.
사실 처음엔 그저 폭풍일 뿐이었다.
시선을 돌리는 곳마다 진흙탕인 앞을 보느니 그 모든 것을 뒤엎어 버리고 싶어 선택한, 지독하게 다정하고 또 자극적인 도피처. 그게 서해원이었다.
한때는 그의 사랑을 의심도 했다. 저 남자가 나를 바라보는 눈에 사랑이라는 단어를 붙이는 게 맞을까. 감히 확신할 수 없었다. 그래서 몸을 섞고, 입을 맞추고, 손을 잡으면서도 마음만은 안전한 거리에 뒀다. 정확히는 그렇다고 착각했다.
모든 것을 휘몰아칠 수 있는 폭풍이면서도 제게는 빗방울 하나, 서늘한 바람 한 자락 미치는 것조차 속상해하는 남자를 사랑하지 않을 방법 따위 없다는 걸 모르고.
“…흐으, 읏, ―아!”
지훈은 해원의 몸이 제게 닿으면 닿을수록 꼭 남자의 성기에 꿰뚫리기라도 한 것처럼 아랫배를 파르르 떨어댔다. 그에게 몸을 여는 스스로를 부인하는 걸 포기하자, 그저 상상만으로도 쾌감에 몸이 달떴다. 며칠을 고르고 고른 슈트 따위는 이미 엉망이 된 지 오래다.
입술이 떨어질 때마다 누가 먼저라고 할 것도 없이 서로에게 달려들던 두 사람이 마침내 서로의 이마를 맞댄 채로 밭은 숨을 고른 건, 도저히 참을 수 없이 박고, 또 박히고 싶어진 때였다.
해원이 지훈의 귓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빨리, 집에 가야겠죠, 우리.”
대답은 필요 없었다. 지훈은 남자의 목을 잡아당겨 붉게 물든 도톰한 입술을 가볍게 빨았다.
* * *
[인적성검사 결과 발표]
안녕하십니까? 주식회사 리델 채용 담당자입니다.
20XX년 5월 수시 채용 인적성 검사 합격을 축하드립니다.
추후 진행 예정인 1차 면접 일정은 다음과 같습니다.
…
나쁜 일이 있으면, 또 좋은 일이 있다.
나쁜 일에 나쁜 일이 겹쳐서 만났던 달콤한 행운처럼 구직도 다를 게 없다. 카페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며 1지망이었던 회사의 인적성 검사 발표 결과를 초조하게 기다리던 지훈의 뺨에 보조개가 쏙 들어갔다.
“어?! 지훈 씨. 그 뭐야, 무슨 검사 합격했어요?”
“……예.”
“어우우! 너무 잘됐다!”
며칠 전 힘든 면접을 보고 온 지훈이 낯선 모습으로 바닐라 라떼를 사 간 이후, 카페 사장은 손톱만 한 미련이 남아 있던 전과는 달리 열성적으로 지훈의 구직 활동을 격려하기 시작했다.
냉정하게 따지고 보면 어차피 떠날 아르바이트생에게 가득 마음을 써 주는 게 어찌나 감사하게 느껴지던지. 지훈은 요즈음 늘 떠올렸던 다짐을 새삼스레 한 번 더 했다. 이렇게 좋은 분들이 많은데. 진짜 열심히 살자.
맑게 울린 도어벨 소리와 함께 권지훈의 가장 큰 행운이 걸어 들어온 건 그 순간이었다.
“―변호사님.”
한없이 달콤하게 웃는 서해원과 그런 남자를 바라보는 권지훈의 눈은, 이제 카페 사장이 옅은 헛기침을 하며 저만치로 자리를 뜨게 할 만큼 온도가 비슷해졌다. 아직 당사자들은 채 실감하지 못하고 있지만 말이다.
“오늘은 좀 빨리 오셨네요?”
“그냥, 일도 일찍 끝났고. 지훈 씨가 평소에 어떤 손님들 만나는지 구경도 하고 싶어서요.”
“오늘은 뭐 드시겠습니까.”
“바닐라 라떼?”
지훈의 입가에 근사한 미소가 걸렸다. 해원은 그 찰나의 행복을 감히 놓치지 않고 눈에 담았다.
“그럼 오늘은 특별히 제가 만들어야겠네요. 편하신 자리 어디든 앉아 계십시오.”
느긋한 오후의 햇살이 카페의 통창을 지나 포근하게 쏟아졌다. 일부러 창가 자리를 택한 해원은 그 따뜻한 온기 속에서 부지런히 움직이는 지훈을 구경했다.
그 때였다.
“……아! 어서 오세요, 손님.”
도어벨 소리와 함께 들어온 누군가를 확인한 지훈이 유달리 반가움이 담긴 높은 목소리로 인사를 했다. 덕분에 곧은 눈썹을 슬쩍 꿈틀한 해원이다. 누가 들어도 달콤한 인사는 제 것이었다지만, 저렇게까지 들떠 할 손님이 있었다니.
같은 층의 직원 중에서 단골이 제법 있다는 것도 기가 찼는데, 이건 또 누구일까. 해원은 그가 앉은 각도에서는 커다란 화분에 반쯤 가려지는 자그마한 뒷모습을 뜯어보았다.
“오늘, 홍차를 얻어 마실 수 있을까 해서 왔는데.”
“당연하죠! 뭐든, 정말 뭐든 골라 주세요.”
“추천은 어렵나요? 이왕 얻어 마시는 만큼 온전히 맡기고 싶네요.”
온화하게 웃는 중년 여성의 앞에서 지훈은 고개를 갸웃, 기울이기까지 하며 깊게 고민했다.
“음. 전 홍차는 진짜 잘 모르는데…… 그래도 여기서 마셔보고 좋았던 건 ‘웨딩 임페리얼’, 이겁니다.”
“어머나. 나도 좋아하는 차예요. 취향이 통했네요.”
여느 손님과의 것보다 화기애애한 주문 시간이었다. 지훈은 입꼬리를 잡아 올린 채로 포스기에 빠르게 가격을 입력했다. 그리고 뭐라 더 인사말을 이어가려던 순간, 자그마한 중년 여성 뒤로 카운터 가까이 다가와 선 장신의 남자와 눈이 마주쳤다.
평소였다면 “음료는 거의 다 만들었습니다, 변호사님. 잠시만요.” 하고 싹싹하게 말할 수 있었을 거다. 하지만 지훈은 왠지 지금만큼은 그 문장이 얼른 입 밖으로 나오지 않았다. 중년 여성보다 머리 두 개는 더 높은 서해원의 표정이 왠지 좀…… 평소와는 다른 것 같아서였다.
그건 착각이 아니었는지, 해원에게서는 이제껏 들어본 적 없는 거친 말투가 흘러나왔다.
“대체 여기서 뭘…… 하시는 거예요?”
뜻을 알 수 없는 질문이었다. 하지만 지훈이 그 물음의 의미를 의아해할 새는 없었다.
“홍차를 고르고 있잖니.”
“홍차를 여기서 왜, 아니― 언제부터?”
서해원의 손이 권지훈과 중년 여성 사이를 덧없이 오갔다. 그 뜻밖의 대화 앞에서 한없이 얼떨떨해진 건 지훈이었다.
“저, 저희 카페 단골손님이신데요. 혹시 서 변호사님도 아시는 분이십니까?”
“‘단골손님’?”
“…예에….”
드디어 제대로 답할 수 있는 질문을 받아 최대한 성실히 대답한 것 같은데. 어째 돌아온 반응은 좀 이상했다. 지훈은 고개를 뒤로 살짝 젖힌 해원이 길게 토해내는 한숨을 들으며 눈만 빠르게 깜박였다.
그 때, 이 혼란스러운 상황을 모두 설명해 줄 열쇠를 지닌 다른 한 사람의 입이 열렸다.
“우리 애가 원래 좀 유별나게 예민해요. 후후.”
“어머니!”
“이제껏 마주칠 일 없게 피해서 오느라 힘들었는데. 이제야 좀 편히 이야기할 수 있겠네요.”
거의 190cm에 가까운 성인 남성을 보고 ‘애’라고 말할 수 있는 건 어머니의 특권이다. 지훈 역시 의주에 가면 낯부끄러울 정도로 내 새끼니 우리 아들이니 하는 소리를 들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건…….
지훈은 순간 등줄기가 오싹해지다 못해 싸늘한 식은땀이 훅 배어 나오는 것을 느꼈다. 동그란 금색 안경테 너머로 눈이 마주친 중년 여성이 빙긋 웃으며 말을 이었다.
“―제대로 인사하는 건 처음이지요, 지훈 씨. 서명희입니다.”
인사를 먼저 해야 할까? 아니면 사죄를 먼저 해야 하는 걸까.
솔직히, 권지훈은 헷갈렸다. 제 옆에 앉은 남자가 정말이지 뜯어말리고 싶을 정도로 당당한 태도라 더욱 그랬다.
“여긴 왜 계속 찾아오셨던 건가요?”
“해원이 네가 누굴 이렇게 끼고 다니는 게 좀 신기한 일이니. 어디 가만히 있을 수 있어야지. 무엇보다 궁금하잖니. 대체 어디서 어떻게 만난 무슨 사이길래 같이 살기까지 할까.”
나긋한 목소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지훈의 얼굴이 핼쑥해졌다. 말이 해원의 집에 ‘신세 진다’지, 두 단어로 줄여 말하면 동거다. ‘끼고 다닌다’라는 단어사용도 의미심장했다. 아무리 제가 서해원에 대한 마음을 인정하기로 마음먹었다지만, 이렇게 곧바로 그의 어머니를 맞닥트릴 줄은 몰랐는데.
특히 가장 힘든 건 어디서 어떻게 만난 사이인지에 대한 설명이다. 감히 “제가 몇 달 전 새벽에 마포대교 위에서 죽으려다가 만났습니다.”라고는 할 수 없다. 게다가 “아드님께서 제가 죽으면 따라 빠져 죽겠다고 하셨습니다.”라는 말은 더더욱.
그렇다고 거짓말을 할 엄두도 안 난다. 그러니 지훈이 할 수 있는 건, 그나마 아는 힌트를 근거로 진솔하게 말하는 것뿐이었다.
“서 변호사님과는, 의, 의주에서부터 알던 사이입니다.”
“어머. 의주시? 정말? 어떻게요? ”
“예? 어, 그냥…… 동네 형, 동생이었습니다.”
그 순간 권지훈은 서해원의 표정이 어땠는지 보았어야 했다. 하지만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걸 목격한 건 서명희 이사장뿐이었다.
지훈이 사 준 홍차를 한 모금 머금어 삼킨 그녀는 유독 매끄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지훈 씨, 스물아홉 살 아니던가요?”
“―마, 맞습니다.”
“해원이가 중학교 때 서울로 올라왔으니까, 여섯 살 차이면 지훈 씨는 그래 봤자 초등학생이었을 텐데. 둘이서 같이 어울렸다니 좀 신기하네요. 후후.”
솔직히, 서명희 이사장이 돌려 전한 의문은 지훈이야말로 가장 궁금한 거였다. 오죽하면 의주 친구 몇 명에게 물어보기까지 했다. ‘성은 기억이 안 나는데, 혹시 해원이라는 이름의 동네 형 기억나?’하고 말이다.
하지만 누구에게든 속 시원하게 돌아온 답은 없었다. 의주에서 나고 자라 그곳에서 아예 뿌리를 박고 사는 친구조차 전혀 모르겠다는 말만 했을 뿐이다.
“……어머니. 잠시만요.”
“내가 먼저 지훈 씨랑 이야기 중이잖니.”
지훈은 느긋한 어조를 둘러썼을 뿐 그 안에는 묘한 팽팽함이 숨어 있는 목소리를 곧장 짚어냈다. 저 때문에 싸우는 모자라니. 이보다 더 끔찍한 전개가 있을 수는 없다.
“아무리 그래도 이렇게 무작정―”
“그, 그게, 사실!”
답지 않게 조금 빠르게 흘러나오던 해원의 말이 끊긴 건, 그걸 틀어막으려는 듯이 우렁차게 터진 목소리 때문이었다. 덕분에 서 씨의 성을 가진 두 사람의 눈이 그 발원지로 동시에 움직였다. 늘 혈색 좋던 지훈의 얼굴은 조금 창백하게까지 보였다.
“서해원 변호사님은 저를 곧장 알아보셨는데…… 정작 제 쪽은 좀 가물가물한 상태입니다.”
“…….”
“정말 죄송합니다. 둘러대려는 게 아니라, 그래서 의주에서 알고 지냈다는 말 외에는… 정확한 말씀을 드리기가 어렵습니다.”
동그란 안경 너머 서명희 이사장의 눈이 가늘어졌다.
솔직히, 다른 사람의 말이었으면 믿지 않았을 대답이다. 하지만 요 몇 달 이 카페에 꼬박꼬박 방문한 그녀는 눈앞의 반듯한 청년에 대해 제법 잘 알게 됐다. 특히 반듯하기 그지없는 성격에 대해선 더더욱.
잠시간의 기묘한 침묵을 깬 건 서명희 이사장이었다. 그녀는 어느 때보다 따뜻하고 다정다감한 말투로 바짝 긴장한 지훈을 달랬다.
“이런, 혹시 다그치는 것처럼 들렸다면 정말 미안해요. 나이 먹고 많아지는 게 주책뿐이라. 궁금한 나머지 너무 캐물었네요.”
“예? 아, 아닙니다! 저라도 당연히 그럴 텐데요!”
서명희 이사장은 참 미안할 정도로 펄쩍 뛰는 지훈과 유독 굳은 자신의 아들을 번갈아 눈에 담았다. 그러고는 잠시 무언가 골똘히 생각하듯 천천히 홍차를 머금어 삼키기를 1분. 그건 객관적으로는 대단치 않은 찰나였지만, 서해원과 권지훈이 나란히 서 있던 관계의 발판을 뒤흔들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곧바로 이어진 서명희 이사장의 말에 어느 상황에서도 쉬이 얼어붙은 적 없던 서해원의 어깨가 뻣뻣해졌다.
“그나저나, 의주에서부터라면…… 아무래도 해원이라는 이름보다는 다른 쪽에 익숙할 것 같은데.”
들은 말을 채 이해하지 못한 지훈의 얼굴에 의아함이 떠올랐다. 서명희 이사장은 그 반듯한 이목구비를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 아주 오랫동안 먼지가 쌓였던 이름을 천천히 입에 담았다.
“예?”
“도현. 김도현.”
“…….”
“이게 우리 해원이가 의주에서 쓰던 이름인데. 혹시 이 이름이라면 기억이 나는 사람이 있나요?”
이제껏 서명희 이사장의 말에 깍듯함을 넘어서 빠릿빠릿하게 반응하던 지훈은, 처음으로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 대신 한참이나 기억을 더듬듯 있다가 이내 천천히 눈을 크게 떴을 뿐이다. 드디어 교집합을 찾은 까만 눈동자가 빛을 받아 반짝였다.
하지만 평소라면 그 모습을 넋 놓은 듯 바라보았을 남자는 이 순간만큼은 다른 행동을 했다. 기이익, 벌떡 일어나며 끌린 의자가 유독 날카로운 굉음을 냈다. 그러고는 곧장 구두 굽이 빠르게 교차하며 부딪치는 소리가 이어졌다. 어떻게 잡을 새도 없이 이어진 움직임이었다.
지훈이 순식간에 저만치로 멀어진 남자의 이름을 부른 건 지극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도현 형!”
서해원, 혹은 김도현이었던 남자가 우뚝 멈춰 섰다.
하지만 여느 때처럼 뒤를 돌아보며 웃어 주지는 않았다. 지훈은 그대로 곧장 카페를 빠져나가는 곧은 뒷모습을 멍하게 바라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