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봄의 끝에서
대전, 목포, 보령, 안동, 수원.
전부 열다섯 살의 서해원, 아니 김도현이 의주시에 도착하기 전에 거쳤던 도시들이다. 심지어 이건 순수하게 학교를 전학한 곳만 세었을 뿐. 짧게는 며칠에서 길게는 방학 동안 한두 달 머물렀던 곳까지 꼽으면 숫자는 더 늘어난다.
여섯 살에 어머니가, 아홉 살에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난 뒤 6년. 열다섯 살의 김도현이 인생의 절반에 가까운 시간 동안 배운 건 시선에도 온도가 있다는 사실이었다.
시작은 동정이었다.
제일 처음 도현을 데려갔던 이모는 최소한 1년 정도는 그런 눈을 했다. 말이 이모지, 워낙 멀리 살다 보니 거의 보지도 못한 남이나 마찬가지였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낯선 도시, 낯선 집, 낯선 사람. 도현은 모든 것이 낯선 그곳에서 필사적으로 적응해갔다.
딸 셋에 막내아들 하나, 그 전형적인 이유로 집안에서 떠받들어지던 동갑내기 사촌과 정반대의 성적표를 받아오기 전까지는.
한 하늘에 태양은 두 개 뜰 수 없다고, 앞에서 1등과 뒤에서 1등도 함께 있을 수 없었더랬다.
‘난 저 거지 새끼랑 같이 살기 싫다고 몇 번을 말해!’
열등감에 악이 받치다 못해 얼굴까지 시뻘겋게 익었던 사촌은 고래고래 소리를 지르다가 기절까지 했다. 허무하고 우습지만 이게 김도현의 긴 여정이 시작된 첫 이유였다.
그다음 집에서도, 또 그 다다음 집에서도 사건은 다르지만 결과는 같았다. 도현은 크고 작은 불화가 일어날 때마다 누구도 나쁜 사람이 되지 않는 해결 방법으로 편리하게 지목됐다. 그런 식으로 여러 사람들이 짧거나 길게 그를 스쳐 지나갔다.
그리고 여기. 바다가 보이는 작고 평화로운 도시 의주.
“내가 생판 남의 새끼 먹여 살리려고 새벽부터 개고생하는 줄 알아?”
“그럼 나보고 어떡하라는 건데. 쟤를 가져다 버려?”
“버려야지, 그럼! 왜 못 버리냐?! 고아원이든 어디든 버리면 되지!”
“그게 말처럼 쉬우면 당신이 해 봐! 그래도 저거 데리고 있으면 달에 몇십은 준다잖아, 쟤네 외갓집에서!”
얼마 되지 않는 짐을 양손에 들고 오래된 기차역에 발을 디뎠던 도현은, 낯선 친척 부부의 온도를 짚어 낸 순간 깨달았다.
내 마지막은 여기구나.
“씨발. 병신 새끼. 뭘 쳐다봐!”
아홉 살에 동정으로 시작했던 시선의 온도는 불편으로, 냉대로, 점점 끝도 없이 떨어지기만 하다가 이 작은 도시에서는 이제 혐오로 바뀌었다.
특히 그중에서도 도현을 못 잡아먹어 안달인 건 고모부라는 남자다. 그는 도현이 제 시야에 들어오기만 하면 저렇게 소리부터 질렀다. 오랫동안 미용실을 가지 못해 덥수룩한 머리가 눈을 가린 지 오래인 터라 제가 어딜 보는지도 알 수 없을 텐데 말이다.
도현은 꾸벅 허리를 숙여 인사하곤 집을 빠져나왔다.
시궁창 속에서 똑똑하다는 건 그리 좋은 일만은 아니다. 자진해서 인생을 망치기에는 너무 영리하고, 그렇다고 제가 침몰해 간다는 걸 모르기에는 너무 많은 것을 안다는 뜻이었으니까.
사는 것에도 확실한 기한이 있었으면 좋겠다. 도현은 아침 대신 유통기한이 하루 지난 우유를 마시면서 생각했다.
권지훈을 만난 건, 등나무가 흐드러진 열다섯 살의 봄이었다.
학교가 끝나면 늘 도서관에 갔다.
당연히 같이 가는 친구 같은 건 없었다. 어색한 전학생 딱지가 떨어질 때마다 낯선 곳으로 떠나는 걸 몇 번 반복하고 나면, 교우관계는 욕심이라는 걸 알게 된다. 책을 읽고, 공부를 하고, 그게 아니면 저를 내버려 두고 흘러가는 세상을 지켜본다.
오늘 도현이 선택한 건 가장 마지막 것이었다.
단출한 2층짜리 도서관 건물 뒤편. 도현은 이곳의 테이블 벤치를 좋아했다. 저 멀리로는 바다가 보였고, 한 철 흐드러지게 매달린 등나무꽃의 향은 유독 달콤했다. 그리고 무엇보다 마음에 드는 건 찾아오는 사람이 없다는 거였다.
하지만 가끔은 예외도 있는 법이다.
“…….”
“…….”
언제나 앉던 자리를 차지한 작은 남자아이는 유독 볼이 동그랬다. 심지어 눈이 마주치자 낯선 저를 향해 슬쩍 입꼬리를 올려 웃기까지 했다. 도현은 마주 웃어 주는 대신 주변을 살폈다. 보아하니 같이 온 사람은 없는 것 같았다.
한 명 정도는, 뭐.
도현은 아이의 옆으로 향하되 분명한 거리를 두고 앉았다. 이 낯선 꼬마가 시끄럽지 않기를 바라면서다. 다행히 이른 우려와는 달리, 아이는 대체로 조용했다.
“…우음….”
종종 중얼대는 혼잣말과 잇따르는 살벌한 지우개질 소리만 제외하면 말이다. 뭘 그렇게 열심히 썼다 지우는지. 작은 손에 들린 지우개로 종이가 들썩이다 못해 찢어질 기세로 문질러댔다.
특히 가장 어울리지 않는 건 한숨이었다.
그래 봤자 초등학교 저학년이나 될까 싶은 꼬마에게 저렇게 큰 시련이 된 게 대체 뭘까. 도현은 보고 있던 책을 자연스럽게 든 채로 시선만 슬쩍 옆으로 돌렸다.
1) 32-17+42 = 10000000
2) 53+26-18 = 모르겠ㄷㅏ요..
……대체 쟤는 뭐가 문제야?
도현은 생각했다.
덧셈과 뺄셈이라니. 아이에게는 미안하지만, 감히 장담컨대 저 정도 산수는 부모님이 돌아가시기 전부터 했다. 제가 또래보다 배움이 빠른 쪽이라는 걸 참작해도, 글쎄. 저 단순한 문제가 몇십 번의 지우개질을 만들어낼 만한 이유를 짐작할 수 없었다.
심지어 슬쩍 보인 오답도 기상천외했다. 세 자리 숫자가 나왔다가, 뜬금없는 한 자리 숫자가 나왔다가.
그나마 다행인 건, 본인도 뭔가 이상하다 싶은지 문제 하나를 풀기가 무섭게 오만상을 쓴다는 거다. 그리고 다시 지우개질. 아마 내버려 뒀다간 이곳에 있는 내내 살벌한 지우개질 소리를 듣게 될 것이 분명했다.
도현이 입을 연 건, 아이가 32-17의 답을 29로 계산했을 때였다.
“야.”
말을 걸 거라고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걸까. 아이는 놀랄 만큼 고개를 휙 쳐들었다. 만약 청력이 더 좋았다면 그 움직임에서 바람 소리 같은 걸 들을 수 있었을 만큼 말이다. 덕분에 도현의 입에선 의도했던 것보다 훨씬 무뚝뚝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걸 왜 못 풀어. 병신도 아니고.”
아이는 생각을 읽기 쉬웠다. 동그랗게 커졌던 눈이 조금 작아지고, 턱은 목에 가까워진다. 그리고, 무엇보다 결정적으로 작은 입이 삐죽 튀어나왔다.
“형.”
“뭐.”
“나한테 예쁘게 말해 줬으면 좋겠어요.”
솔직히 불만을 터트릴 줄 알았다. 어려운 걸 어떡하느냐느니, 뭐 그런 거. 하지만 작은 입에서 이어진 말은 도현의 예상을 완전히 빗나갔다.
“그렇게 못된 말 쓰는 거 아니에요.”
“…….”
“예쁜 말 쓰세요. 그런 말 쓰면 못써요.”
그 순간, 테이블 위에 흩어진 다른 문제집들의 표지가 눈에 들어왔다. 초등학교 2-1학기 국어. 그렇다면 아홉 살이다.
열다섯 살에, 아홉 살 아이에게 혼이 났다.
도현은 까만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러자 아이는 시선을 피하기는커녕 작은 입에 더 힘을 주고는 저를 마주 보는 것이었다. 동글동글함과 올곧음이 함께 올 수 있는 표현이었다니. 왠지 신기한 느낌이었다.
사실, 병신이라는 단어는 도현이 의주에 온 이후로 하루도 빠짐없이 매일같이 들은 단어였다. 당연히 그 단어가 향한 곳은 도현 그 자신이었다. 병신이라는 단어만으로 불린 적도 있었고, ‘개병신같은 병신새끼’처럼 여러 번 덧대어 들은 적도 있다.
분명 의주에 오기 전까지는 단 한 번도 입에 올린 적 없는 최악의 말이었는데. 어느새 저도 모르게 끔찍한 남자의 언어가 스며들었다. 어딜 가나 누구보다 똑똑했던 김도현은 그 사실을 이제야 자각했다.
“……알았어. 그럴게.”
“네.”
“그리고, 욕해서… 미안.”
“네!”
아이의 입가에 다시 한번 빙긋 웃음이 걸렸다. 실은 이번엔 그걸 마주 돌려 주고 싶었지만, 입꼬리를 올려 보지 않은 지 오래라 타이밍을 놓쳤다. 잠시 머뭇거리던 도현은 조심스레 말문을 열었다.
“넌 이름이 뭐야?”
“권지훈이요. 형은요?”
“김도현.”
“우와! 왠지 이름 비슷하다.”
“지훈이랑 도현이 뭐가 비슷해?”
“히― 하잖아요.”
“히…….”
여섯 살 어린 남자아이의 생각을 따라잡을 수는 없었다. 하지만 굳이 딴죽을 걸고 싶지는 않아서, “그래, 그렇네.” 했다.
가볍게 바람이 불며 등나무꽃의 향이 흐드러졌다. 까만 눈동자를 초롱초롱 빛내던 아이가, 그러니까, 지훈이 별안간 엉덩이를 움직여 바짝 가까이 붙어 앉은 건 그 때였다.
“있잖아요, 형.”
“응?”
“저 이거 좀 알려 주시면 안 돼요?”
얘는 정말 어딜 가도 예쁨받겠다. 도현은 애늙은이 같은 생각을 하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굳이 약속을 잡지 않은 만남이 시작된 건 이날부터였다.
대체로 먼저 와 있는 건 학교가 일찍 끝나는 지훈이었다. 하지만 가끔은 도현이 먼저 도착하는 날도 있었다. 그럴 때면 도현은 올지 안 올지 알 수 없는 아이를 위해 제가 가장 좋아하던 자리를 비워뒀다.
멀리 반짝이는 바다. 향긋한 연보라 등나무꽃.
그리고 작고 착한 권지훈.
김도현은 그렇게, 평화롭지만 힘겨운 도시에서 함께하게 된 것이 하나 늘었다.
“넌 집이 어디야?”
“저어기. 쭉 가면 있는 우체국 옆!”
“우체국? 빵집이랑 미용실 있는, 거기?”
“응.”
열다섯 살과 아홉 살. 여섯 살의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김도현과 권지훈은 만난 지 열흘 만에 말을 놨다. 정확히는 도현이 먼저 허락했다. 지훈은 망설이지도 않고 곧장 “응, 알겠어!” 했고, 두 사람의 대화는 한결 더 거리가 가까워졌다.
“도서관까지 걸어오기엔 조금 멀지 않아?”
“우음…. 그냥 걸으면 되는데.”
도현은 고개를 삐뚜름하게 기울였다. 복잡한 길 하나 없는 의주시의 지리에 눈뜨고 나니 지훈이 매일같이 열심히 걸어왔을 경로가 뻔히 그려졌다. 제가 걸어도 20분은 걸리는 거리를, 아홉 살짜리가 그 흔한 버스 하나 안 타고 걸어 다녔다니.
“앞으로는 내가 집까지 데려다줄게.”
“우와! 정말?”
“버스는…… 못 타겠지만. 같이 걸어가자.”
도현은 처음으로 제게 용돈이 없는 게 싫어졌다. 이럴 때 버스비 정도는 대신 내 줄 수 있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괜히 멋쩍은 기분에 제대로 눈도 못 마주치고 있건만, 지훈은 “사실 혼자 가면 좀 심심했어!” 하고 배시시 웃을 뿐이었다.
그날, 뉘엿뉘엿 지는 금색 해를 보며 둘은 손을 잡고 걸었다.
물론 처음에는 조금 어색했다. 누군가의 손을 잡는 게 얼마 만인지 상상도 안 갔다. 하지만 오토바이 하나가 위험천만하게 인도 위를 쌩하고 지나간 뒤로는 차라리 그게 마음 편해졌다.
지훈은 집으로 돌아가는 내내 재잘재잘 떠들었다. 학교에서 있었던 일. 어제 본 TV 속 내용. 하다못해 몇백 년을 산다는 바다거북의 수명까지. 그렇게 가만히 듣고 있다 보니 어느새 빨간 우체국이 보였다.
도현은 기분 좋은 듯 잡은 손을 붕붕 흔드는 지훈을 보며 물었다.
“집이 정확히 어디야?”
“저기로 가면 돼!”
맞잡지 않은 다른 손으로 지훈이 가리킨 곳은 작은 빵집이었다. 단언컨대 의주시에서 가장 맛있는 냄새가 나는 곳이다.
“…….”
저도 모르게 마른침이 꼴깍 넘어갔다.
사실 도현은 이제껏 저 빵집을 감히 단 한 번도 들어가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 아니, 좀 더 솔직히 말하자면 이 앞을 지나갈 땐 숨을 참고 걸어간 적마저 몇 번 있다.
선뜻 발을 떼지 못하고 멈칫거리고 있으려니 먼저 씩씩하게 한두 걸음 앞장서서 손을 잡아끈 건 지훈이었다. 그 찰나 동안 도현은 ‘돈이 없는데. 들어가서 어떡하지?’ 하는 생각을 했다.
하지만 그건 이른 걱정이었다.
“엄마!”
“지훈이 너. 엄마가 혼자 도서관 가지 말라고 했지!”
“…아, 정말 괜찮은데….”
지훈이 빵집 주인으로 보이는 여자를 ‘엄마’라고 부른다는 사실보다 더욱 놀란 건 모자의 대화 내용이었다. 도서관, 이제까지 몰래 왔던 거였나? 저도 모르게 고개까지 돌려 옆을 바라보자 지훈은 그렇지 않아도 동글동글한 볼에 바람을 넣은 채로 제 눈을 못 본 척했다.
뒤늦은 물음이 이어진 건 그 때다.
“그런데, 이쪽은?”
“엄마. 진짜 진짜 진짜 똑똑한 형이에요!”
……권지훈. 진짜 창피해. 도현은 작은 빵집이 쨍하게 울릴 정도로 크게 외치는 지훈 덕분에 뺨이 좀 뜨거워졌다. 그러거나 말거나 옆에서는 변명인지 변호인지 모를 것이 계속됐다.
“형이 숙제도 다― 도와줬고요, 도서관에서 집까지 혼자 가기엔 멀다고 데려다줬어요!”
“어머머. 세상에.”
눈이 동그래진 여자의 얼굴에서 익숙한 표정이 보였다. 도현은 민망함을 숨기려 우선 꾸벅 인사했다.
“아! 혹시, 요새 우리 지훈이 문제집에 풀이 써 둔 게 학생이었나요?”
“……네.”
“나는 학교 선생님이 이렇게 해 주셨나 했는데, 왠지 글씨체가 긴가민가하더라니! 학생은 이름이 뭐예요? 몇 살이고?”
“김도현이요. 중2고요.”
“중2? 키가 커서 고등학생인가 했네. 새빛중?”
“네.”
“이 근처 살아요?”
쏟아지는 질문에 술술 대답하던 도현의 입이 처음으로 막혔다. 근처라고 하기에는 조금 떨어져 있었고, 멀다고 하기엔 또 가까워서다.
“저 위쪽, 목공소집에 사는데요.”
“목공소집? ……아!”
아주 찰나였다. 티 없이 밝았던 얼굴 위로 무언가 생각하는 듯한 망설임이 지나간 건. 이제껏 단어 그대로 ‘살기 위해’ 어른들의 눈치를 살펴야 했던 도현은 그걸 곧장 알아봤다.
여전히 닿아 있는 작고 부드러운 손의 온기가 더없는 사치처럼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긴장으로 손을 꽉 잡자, 지훈은 그것이 장난인 줄 알았는지 작게 히히 웃으며 마찬가지로 있는 힘껏 맞잡아 주었다.
“저…, 도현 학생.”
추운 것도 아닌데 어깨가 조금 떨렸다. 무언가 말하려던 지훈의 어머니가 잠시 침묵한 것도 그 순간이었다.
그렇게 몇 초나 지났을까. 영원히 닫혀 있을 것만 같던 입술이 열렸다.
“……그, 아줌마가 너무 고마워서 그러는데. 혹시 괜찮으면 아줌마네 가게에서 같이 저녁 먹고 가지 않을래요?”
지금 내가 무슨 말을 들은 거지. 도현은 순간 숨을 쉬는 것조차 잊고 멍하게 있었다. 그런 도현을 현실로 잡아당긴 건 드물게도 신이 나서 방방 뛰는 지훈이었다. 언제나 차분하기만 했던 목소리가 두 톤은 높아진 채로 재잘재잘 이어졌다.
“와! 같이 먹자, 형!”
“…….”
“응? 같이 먹고 가아.”
도현은 간신히 고개를 끄덕였다.
학교가 끝나면 곧장 도서관으로 향했던 도현의 일상은 그날을 기점으로 바뀌었다.
* * *
방과 후에는 바로 빵집으로 간다. 거기엔 학교가 먼저 끝나 일찌감치 도착해 있던 지훈이 있다.
어떤 날은 빵집 한 편의 테이블에서 같이 시간을 보내곤 하지만, 대체로는 간식거리를 몇 개 들고 도서관에 간다. 물론 버스를 타고서다. 지훈의 어머니가 도현에게 아예 돈을 넉넉히 충전해 둔 교통카드를 맡긴 덕분이다.
“형. 형은 엄-청 똑똑하니까, 변호사 하면 되겠다.”
권지훈이 김도현을 반쯤 신격화하기 시작한 건 도현이 전교 1등이라는 걸 알고 난 뒤부터였다.
솔직히 그런 걸 말할 생각은 전혀 없었다. 빵집에 놀러 왔던 미용실 아주머니가 ‘어머머머, 얘! 네가 이번에 전교 1등 했다며? 어쩜 학원 하나 안 다니는데 그래?’라고 말하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덕분에 그날, 도현은 방방 뛰는 모자를 양팔에 끼고 한참 늦은 축하 케이크 커팅까지 했다. 기쁘지만 민망하기도 한 기억이다.
“……세상에 직업이 얼마나 많은데. 왜 하필?”
“변호사는 젤 똑똑한 사람이 하는 거랬어.”
“누가?”
“엄마가.”
“아.”
감히 반박할 수 없는 두 글자가 튀어나왔다. 그래, 그분이 그러셨다면 뭔들 맞는 말이다. 초여름의 더운 바람을 맞으며 책을 읽던 도현은 곧장 수긍했다.
“내가 변호사 하면 지훈이 너는 뭐 할 건데.”
“나? 나는 아직 안 정했지.”
“그러면서 나한테는 변호사 하라고 해?”
“하지만… 나는 형처럼 공부를 잘하지 않는걸.”
살갑게 말을 받던 지훈의 말꼬리가 축 처졌다. 도현은 보던 책까지 탁, 소리 나게 덮고 진지한 얼굴이 됐다.
“권지훈, 너 똑똑해. 정말로.”
“진짜?”
“응.”
빈말이 아니다. 처음 만났을 때야 산수를 두고 좀 헤맸지, 옆에 딱 붙어서 공부를 봐 주자 스펀지처럼 쭉쭉 흡수했으니 말이다.
하지만 아무리 힘주어 대답해도 새까만 눈동자 저 너머에선 ‘형, 그런데 예전엔 나한테 병신이라며….’라고 말하고 싶은 티가 났다. 도현은 애써 그걸 모르는 척했다. 그리고 벌써 몇 번이나 한 다짐을 또 했다. 예쁜 말 쓰자. 진짜.
그 때, 난처함을 달래주기라도 하듯 지훈이 크게 하품했다.
“졸려?”
“조금…….”
“잠깐 안으로 들어가자.”
벤치 테이블에서 일어나 도서관으로 들어가자 마주친 직원 몇이 슬쩍 눈인사했다. 매일같이 찾아오는 친형제 같은 두 사람은 이미 이곳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다.
도현이 저를 졸졸 따라오는 지훈을 데리고 곧장 향한 곳은 열람실 저 구석, 오래된 책들이 가득한 곳이었다. 그는 커튼 너머로 볕이 가볍게 들어오는 위치에 제 교복 재킷을 넓게 벗어 펼치고는, 그 옆에 앉아 무릎을 두드리며 속삭였다.
“자. 내 옷 위에 누워서 여기에 머리 기대.”
“형 옷인데.”
“괜찮아.”
잠시 머뭇거리나 싶던 지훈은 이내 순순히 도현의 말을 따랐다.
따뜻하지만 눈부시지는 않은 햇빛. 딱 베고 눕기 좋을 정도로 단단한 무릎. 시간이 스며든 종이 냄새. 그 모든 것이 더해지자 까만 눈동자에는 금세 선명한 잠기운이 어렸다.
하지만, 꾸벅꾸벅 졸면서도 고집스레 확인한 것도 있었다.
“……혀엉.”
“응.”
“다리, 안 아파?”
솔직히 생각보다는 조금 묵직했다. 눕기 전까지는 ‘이 조그마한 머리가 무거워 봤자, 뭐.’라고 생각했는데 말이다. 아무리 뭇 또래보다 발육이 좋다고 하더라도 어쨌거나 김도현 역시 아직 중학교 2학년에 불과했다.
하지만 도현은 솔직함 대신 드문 허세를 부리는 쪽을 택했다.
“안 아파. 뭐 이런 거 가지고.”
“그럼 다음엔…, 흐아암, 내가 해 줄게.”
반쯤 하품에 묻히긴 했지만 꽤 분명한 목소리였다. 도현의 시선이 슬쩍 지훈의 다리로 향했다. 딱 예쁘게 맞는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은 덕분에 그 두께를 가늠하는 건 어렵지 않았다.
……내 팔보다 더 가느다란 거 같은데, 무슨.
도현은 저도 모르게 픽 흘러나오려고 하는 웃음을 꾹 참으며 소곤소곤 말했다.
“그래. 나중에. 아주 나중에 해 줘.”
“으응….”
웅얼거림이나 마찬가지인 대답과 함께 지훈은 곧장 깊은 잠에 빠져들었다.
지훈의 숨이 규칙적으로 변한 걸 확인한 도현은 제 무릎에 눌려서 조금 튀어나온 동그란 볼을 툭 건드려 봤다.
“…….”
어느 순간부터 제대로 된 미래를 꿈꿔 본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미래라는 건 당장 오늘 하루를 제대로 발 디딜 수 있는 사람이나 상상하는 거다. 다음 달에는 이 학교에 남아 있을 수 있을까, 아니, 내일은 다른 집으로 가게 되지 않을까 하는 막연한 불안 속에 살면서 그 뒤를 상상하기란 어렵다.
하지만 도현은 정말 오랜만에 먼 미래가 조금쯤 궁금해졌다. 변호사는 어떻게 되는 거더라. 나른한 햇살 속에서 기억 어딘가를 뒤져도 봤다.
……뭐가 됐든, 이대로라면 괜찮을 거 같아.
도현은 저도 벽에 머리를 기댄 채로 눈을 감았다. 그리고 정말 오랜만에 깊은 잠을 잤다.
따뜻한 사람들과 포근한 공간에서 있다 보면 시간이 쏜살같이 녹아 흐른다. 도서관에서 같이 깜박 잠들었다 일어난 도현은 사서의 목소리에 눈을 떴다. 그건 무릎에 머리를 베고 자던 지훈 역시 마찬가지였다.
키가 삐죽 다른 두 사람은 나란히 머리꼭지가 보이게 죄송합니다, 인사하고 도서관을 나왔다. 초여름의 날씨는 벌써 저녁이 가까워졌는데도 낮인 양 훤했다.
“형. 우리 완전 푹 잤다, 그치.”
“…그러게. 너 오늘 잠 설치는 거 아니야?”
“설치는 거가 뭐야?”
“낮에 자서 잠을 잘 못 잔다고.”
“누우면 잘 수 있어!”
“부럽네.”
여느 때처럼 빵집으로 데려다주는 버스 안에서 나누는 잡담은 갈수록 시답잖아졌지만, 그래서 좋았다. 지훈을 자리에 앉게 하고 그 앞에 손잡이를 잡고 선 도현은 그 잠깐 쉬었다고 유독 초롱초롱해진 까만 눈동자를 보며 옅게 웃었다.
“형은 잠을 잘 못 자?”
“그냥 그래.”
“왜?”
적당한 이유를 둘러댈까 하는 생각을 하지 않은 건 아니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기에는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이 너무나 온전한 신뢰로 가득 차 있었다. 살며 단 한 번도 만나지 못했던 시선의 온도다.
그래서, 완전히 거짓말은 아닌 대답을 했다.
“집이 조금… 시끄럽거든.”
물론 그 뒤에는 여러 말이 생략되어 있다. 매일 밤 술을 마신 고모 부부가 싸워. 가끔은 그게 내가 있는 창고 방까지 번지기도 해. 도저히 잠을 제대로 잘 수가 없어. 도현은 차마 내뱉지 못한 문장 대신 빙긋 웃었다.
동그란 얼굴과는 어울리지 않는 진지한 대답이 돌아온 건 그 때였다.
“형. 그럼 자기 전에 숫자를 세 봐.”
“숫자?”
“응. 잠이 온다, 잠이 온다. 1, 2, 3, 4, 5, 해 봐. 그럼 잠 잘 와.”
“……그래도 안 오면?”
“그, 그럼…, 5, 4, 3, 2, 1, 해.”
영 단위 수가 빈곤한 건, 다른 과목은 모두 곧잘 하는 지훈이 제일 어려워하는 게 수학이기 때문이어서일 거다. 도현은 여섯 살 어린 인생 선배의 진지한 조언 앞에서 입술을 딱 붙여 웃음을 삼키곤 힘주어 대답했다.
“알았어. 그렇게 할게.”
어느덧 버스는 우체국 앞에 도착했다. 도현은 이 순간이 좋으면서도 싫다. 지훈을 빵집에 데려다주고 이제 제가 발 디딘 현실로 돌아가야 한다는 뜻이기 때문이다. 수렁과도 같은 곳으로.
“형. 오늘은 저녁 안 먹고 가지?”
“……응. 오늘은 고모부가 집에 계시는 날이라.”
“그럼 내일은?”
“내일은 괜찮아.”
“그럼 내일은 꼭 와. 약속.”
“약속.”
지훈을 데려다주고 나자 하늘이 눈에 띄게 어두워진 게 제 착각인 건지, 정말 저녁이 와서인지 헷갈렸다. 하지만 견딜 만했다. 오늘을 어떻게든 잘 보내면 내일이 올 테니까.
열다섯 살의 김도현은 무거운 발을 옮겨 목공소와 연결된 집에 도착하기 전까지는 그렇게 믿었다.
“……다녀왔습니다, 고모부.”
“고모부는 무슨, 이 개병신새끼가!”
고모부는 아직 늦은 밤도 아닌데 벌써 술에 거나하게 취해 있었다. 검붉은 얼굴, 반쯤 풀린 눈, 지독한 냄새. 무엇하나 엮이고 싶지 않은 것들이다. 도현은 그를 똑바로 보지 않고 허리만 한 번 꾸벅 숙인 채 창고방으로 들어가려고 했다.
하지만 그보다 휘익, 아슬아슬하게 머리를 피해 날아온 게 있었다. 벌써 몇 번째 깨부수고 새로 샀는지 모를 리모컨이었다.
“야, 나 모르는 새 내 얼굴에 아주 똥칠을 하고 다녔더라? 어?”
평소 같았으면 그저 죄송합니다, 한마디하고 지나갔을 거다. 고모부가 제게 뭔가를 던지는 것도 욕을 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 아니었으니 말이다. 하지만 이어진 말은 도현의 발을 바닥에 얼어붙게 했다.
“너, 거지새끼도 아니고 누가 밥 얻어먹고 다니래?”
“…….”
“씨발. 동네에 소문이 다 났어. 목공소 깡패 부부가 전교 1등 한 번 안 놓치는 똑똑한 조카 새끼 돈만 받고 쫄-쫄 굶긴다고. 그래서 착하디착한 빵집 과부년이 대신 돌봐준다고. 이 씨발, 별 개같은 년이….”
취한 채로 비틀비틀 일어난 고모부는 곧장 도현의 코앞까지 왔다. 퍽, 무서울 정도로 큰 소리가 나며 도현의 머리가 한 번 크게 휘청였다.
“야. 잘 처먹고 다니니까 좋든?”
“…….”
“어? 집에서는 맨날 깨작대고 입이나 다물고 있으면서. 밖에서는 뜨신 밥에 빵까지 잘 처먹고, 배가 부르든? 그래?”
곳곳이 딱딱하게 변한 쉬기 직전의 밥. 유통기한이 지난 우유. 배달시켜 먹고 남은 반찬. 그것들을 제대로 먹지 않은 것이 ‘집에서는 맨날 깨작댄’ 거라면, 맞다. 그렇지 않아도 더워진 날씨엔 차라리 먹지 않는 게 살기 위한 방법 같았으니까.
도현이 아무런 대답 없이 그저 맞으며 버티고 서 있자 억센 손이 덥수룩한 머리채를 휘어잡았다.
“음침한 새끼.”
“놔… 주세요.”
“진짜 난 이 눈깔만 보면 소름이 끼쳐. 어떻게 이게 사람 새끼 눈깔이지?”
의주에 도착한 이후부터 도현은 앞머리를 내려 유독 밝은 갈색 눈동자를 가리기 시작했다. ‘저 기분 나쁜 눈깔, 언제 날 잡고 파 버릴까.’라고 했던 고모부에게 조금이라도 거슬리지 않기 위해서였다.
하지만 그 오랜 고생은 쉽게 물거품이 됐다.
“사실은 네 어미, 뭐 어디 외국인이랑 붙어먹었던 거 아냐? 그렇지 않고서야 어떻게 이런 개 같은 눈깔이 나오냐고.”
확, 있는 힘껏 단단한 몸을 밀쳐낸 건 그 때였다. 워낙 일찍 돌아가신 탓에 얼굴도 잘 기억나지 않는 엄마라지만 저 더러운 입에 담기는 것까지 참고 싶지는 않았다.
하지만 술에 거나하게 취하다 못해 잡아먹혀 폭력성만 남은 상대에게 그 최초의 반항은 최악의 결과를 불러왔다.
“이 씨발새끼가! 어디 한번 진짜 병신 만들어 줄까?!”
그 뒤로는 기억이 뒤죽박죽이다. 정신없이 얻어맞다가 우당탕, 공구가 떨어지는 소리와 함께 다리가 뜨거워졌고, 이내 사이렌 소리를 들었던 것 같기도 하다. 아니, 고모의 날카로운 비명이 먼저였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단 하나.
그 와중에도 직감한 건, 지훈과 약속한 내일은 없을 거라는 사실이었다.
지훈이 작은 머리를 기대고 잤던 다리에 긴 상처가 난 그날 이후. 도현은 지훈을 다시 보지 못했다. 아니, 정확히는 몇 번쯤 병원에 찾아왔던 지훈의 어머니를 도현이 만나지 않겠다 거부하면서 지훈 역시 볼 일이 없어졌다는 게 정확하다.
감히 볼 염치가 없었다.
그저 저에게 잘 대해 주었다는 이유만으로 고모부의 입에 오르내리게 했다. 하물며 ‘비정한 가족과 전교 1등’ 운운하는 타이틀로 지역 뉴스에까지 난 판국이라면 더더욱 저따위와의 연결고리가 있어선 안 됐다. 워낙 악명 높은 이웃이라 다들 안타까워할 뿐 쉽게 공론화하지 못했던 지독함은, 도현의 병원 입원을 계기로 언론 제보에 물꼬가 터졌다.
하지만 그렇게 소란스러워진 탓에 예상치 못한 기회도 생겼다.
‘혹시, 우리 재단의 장학생이 되어서 서울로 가지 않겠니?’
금환재단의 서명희 이사장. 병원의 오랜 후원자이자 도현의 병원비 일체를 부담했다는 그녀가 어느 날 찾아온 거다.
도현은 그 제안을 받아들였다. 쫓기듯 오래된 기차역에 발 디뎠던 첫날과는 달리, 의주를 떠나는 마지막 날엔 온몸을 편안하게 감싸는 고급 승용차를 탔다.
아침마다 인생의 유통기한을 점쳐야만 했던 생활과 정반대의 삶은 그때부터 시작이었다. 밤에는 제대로 잠을 잘 수 있었고, 살면서 처음 먹어 보는 맛있는 음식들이 매일같이 식탁 위에 올라왔다.
그저 ‘회장님’과 ‘이사장님’이었던 차태욱과 서명희와의 관계도 점점 달라졌다. 서울로 올라와 생활한 지 1년. 김도현은 인생 전체를 통틀어서 제 앞에서 긴장한 어른들을 처음 보았다. 맛있는 음식을 앞에 한가득 두고도 제대로 먹지 못하던 그들은 물컵을 쥔 손을 떨면서 물었다.
‘괜찮다면 우리가, 네 부모가 될 수 있게 해 줄래?’
도현은 곧장 대답하지 못했다.
싫어서가 아니었다. 영원히 상실했다 생각한 단어를 너무 오랜만에 들어서. 그래서였다. 결국, 도현은 그들 앞에서 언제 마지막이었는지도 모를 눈물을 뚝뚝 흘렸고 차태욱 회장과 서명희 이사장은 더욱 어쩔 줄 몰라 했다.
그렇게, 가족이 생겼다.
얼마 안 가 이름도 바뀌었다. ‘서해원’. 새 이름은 마음에 들었다. 성도, 이름도. 하지만 한편으로는 손톱 밑에 박힌 작은 가시처럼 저만 아는 따끔함도 있었다.
이제 지훈이는 날 정말 못 알아볼지도 모르겠네. 해원은 생각했다.
감히 꿈에 바라지도 못했던 다정한 가족이 생기고, 누구라도 선망할 배경과 미래가 발밑에 깔리고. 그렇게 과거의 잿빛 그림자가 옅어질수록 해원은 제가 가장 초라한 순간 맛봤던 달콤한 기억에 더욱 사로잡혔다.
애초에 하루아침에 JS와 금환, 이 두 개의 이름을 볼품없던 김도현이 모두 가지게 됐다는 건 그리 녹록한 일이 아니었다. 자신을 바라보는 사람들의 시선은 김도현에게나 서해원에게나 크게 다르지 않았다. 덕분에 해원은 세상을 알아갈 때마다 모든 것을 갖게 된 제 유일한 결핍이 그 순수한 온기임을 깨닫게 됐다.
매일 조금씩 침몰하던 저를 붙들었던 작은 손.
동정도, 목적을 숨긴 감언도 아닌, 이유 없는 호의. 그것의 귀함을 처절하게 배운 건, 다시 만나는 걸 상상할 수 없을 만큼 멀리 떨어지고 나서였다.
열다섯 살에 만난 작은 아이는 그렇게 서해원의 인생을 줄곧 따라다녔다. 옷을 갈아입다가 다리의 흉터를 봤을 때. 지나가다 빵집이 보일 때. TV에서 무릎베개를 한 사람들이 나올 때. 심지어 경영학과를 졸업하고 난 후, 경영대학원을 가길 바랐던 부모님의 뜻에 처음 반해서 기어이 로스쿨을 택했을 때도.
해원은 늘 ‘속으로 권지훈, 다 너 때문인 거야.’ 했다.
온갖 공부와 시험에 허덕이다 지친 날에도 뭐, 지훈의 탓을 아주 조금쯤 했다. 공부 잘하는 사람이 할 수 있는 다른 일, 세상에 많고 많잖아. 권지훈, 왜 하필 변호사를 하라고 해서는 이 고생을 시켜.
저와 여섯 살 차이 났던 권지훈이 지금쯤 성인이 되고도 남았으리라는 걸 모르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해원의 머릿속에서 ‘권지훈’은 영원히 아홉 살이었다. 저를 향해 해맑게 웃던 그 착하고 순한 남자아이.
속으로 지훈에게 투덜대고 나면 조금은 기분이 나아졌다. 아니, 기분만 나아졌을 뿐일까. 책과 프린트물로만 둘러싸인 곳에서조차 그는 반짝이는 푸른 바다를 볼 수 있었다. 달콤한 등나무꽃 향기가 코끝에 어렸고, 도서관 열람실 구석으로 들어오던 햇빛이 느껴졌다.
아마 살아 있는 동안은 너를 쭉 이렇게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해원은 생각했다.
사실 이때까지만 해도 서해원에게 어느덧 권지훈은 가상 인물이나 다름없는 존재가 되어 있었다. 그가 떠올릴 수 있는 것들 중에서도 가장 예쁜 공간을 배경으로 한 유독 소중한 보물 같은 것. 그게 권지훈이었다.
……‘사람 보는 눈을 키워야 한다’라는 어머니의 등쌀에 못 이겨 면접관으로 참석했던 먼 친척 소유 회사의 1차 면접장에서 그와 마주치기 전까지만 해도, 정말 그랬다.
* * *
서해원이 도망쳤다.
그 잘나고 뻔뻔한 남자가 도망치다니. 정말 어울리지 않는 단어였지만 사실이 그랬다.
해원이 말 한마디 없이 카페를 나간 뒤, 단골손님이었던 그의 어머니 역시 “그럼 나중에 봐야겠네요, 지훈 씨.” 하며 자리를 떴다. 덕분에 지훈은 고작 한 시간 남은 카페 근무가 얼마나 길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해원의 차가 아닌 지하철을 타고 귀가하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멍하게 정신을 놓고 있다가 내릴 정거장도 한 번 놓쳤다. 하지만 제 실수를 탓할 생각은 들지 않았다. 아니, 조금쯤 빙 돌아가서 차라리 다행이다 싶었다. 도현을, 아니 해원을 다시 만나 무슨 이야기를 할지 고민하고 또 고민하는 것만으로도 시간은 금방 갔으니.
그러나 지훈의 그런 긴장은 괜한 것이었다. 문 앞에서 몇 번이나 심호흡하고 들어간 것이 무색하게 널찍한 집은 텅 비어 있었다. 정확히는 서해원과 커다란 가방 하나, 옷가지 몇 개 빼고 모든 것이 제자리에 있었다는 게 맞는 말이겠지만, 지훈에겐 혼자 남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제 예전 이름을 들킨 김도현, 아니 서해원이 갈 만한 곳이 어딜까. 서로 떨어져 있던 시간의 공백만큼 막막한 질문이었다.
하지만, 답은 의외의 사람이 가지고 왔다.
“의주로 튀셨습니다.”
혹시라도 해원이 돌아올까 싶어 뜬눈으로 보낸 아침. 지훈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여느 때와 같은 말쑥한 차림을 하고 들어온 김 비서의 말에 삐끗, 갈라진 소릴 냈다.
“……예?”
“급하셨는지 회사 명의로 등록된 차를 쓰셨거든요. 어젯밤부터 의주의 한 리조트호텔에 멈춰 있습니다. 가시겠습니까?”
답은 정해져 있다. 지훈은 얼떨떨한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김 비서는 놀랍지도 않다는 듯한 표정으로 “운전은 제가 하겠습니다. 남이 운전하는 차에 타면 멀미를 해서요.”라고 덧붙였다.
서울에서 의주까지는 차로 꼬박 4시간을 달려야 한다.
여행이라고 하기엔 웃음기 없고, 그저 진지하기에는 마음 한편이 술렁이는 도로 위를 유영한 지 얼마나 되었을까. 해원의 취향인 가사 없는 연주곡만이 이어지던 차 안에서 다시금 먼저 대화의 포문을 연 건 김 비서였다.
“2년 됐습니다.”
하필 그 순간 물로 목을 축이고 있던 지훈은 순간 사레가 들어 크게 콜록거렸다.
“―크흠, 흠, 예, 예에?”
“서해원 법무팀장님이 지훈 님 뒤꽁무니만 쫓아다닌 거. 2년째라는 겁니다. 휴지 여기 있습니다.”
서해원이 그 ‘도현 형’이라는 것도 얼떨떨한데, 제 뒤를 쫓아다닌 게 2년째라니. 어째 들어도 실감 나지 않는 말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자세한 이야기를 듣기 전, 보다 먼저 조심스레 물었다.
“……이제 말씀해 주실 수 있는 겁니까?”
“이미 다 알게 되신 것 같은데요. 그리고 아무리 그렇다 한들 ‘오늘 일정 취소해주세요.’ 문자 하나만 보내고 나른 분한테 지킬 의리, 저도 없습니다.”
다른 건 다 말해도 저에 대한 것만큼은 말할 수 없다던 일전의 태도와는 달리 시큰둥한 목소리였다. 김 비서의 말이 이어졌다.
“지훈 님, 2년 전에 동연에 입사 지원하셨었지요?”
전혀 예상하지 못했던 단어가 나왔다. 주식회사 동연. 지훈이 2년 전 지금처럼 취준생이었을 때 원서를 넣었던 회사 이름이었다.
“아, 예. 그런데 그건 어떻게.”
“거기 1차 면접관에 서해원 법무팀장님도 계셨습니다. 기억 못 하시는 것 같지만요.”
“……예?”
“외가 쪽 먼 친척이 오너인 회사라, 이사장님께서 자리를 만들어 보내셨었습니다. 분명히 지훈 님을 향한 지랄도 그때부터였을 겁니다.”
놀란 채로 입까지 조금 벌렸던 지훈은, 제 이름과 맞물려 묘하게 라임마저 느껴지는 단어를 천천히 곱씹어 물었다.
“지랄이요?”
“…저 방금 지랄이라고 했습니까?”
“예.”
“크흠, 흠! 죄송합니다. 관심, 관심으로 바꾸겠습니다! ―하지만 그날, 얼마나 놀랐었는데요!”
의도치 않게 마음의 소리를 내보인 김 비서는 크게 헛기침을 몇 번 하며 2년 전의 어느 날로 지훈을 데리고 갔다.
“가시기 전엔 한 백 번쯤 ‘귀찮아 죽겠네요.’하고 툴툴대셨던 분이, 끝내고 내려와선 똑바로 서지도 못하고 주차장 바닥에 주저앉는데. 와, 정말!”
“…….”
“무슨 일이냐고 사정사정해도 넋 나간 사람처럼 말 한마디 없으시고…. 집에 도착해서도 곧장 침대 위로 푹 쓰러지시는 겁니다.”
어떻게 말이 이어지는 족족 하나같이 상상조차 안 가는 것뿐인지. 지훈은 김 비서의 묘사로 흘러나온 해원을 몇 번이나 떠올려 보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 비슷한 것조차 그려지지 않았다.
때로는 부러울 정도로 여유롭고 느긋하던 남자다. 그것에 실금이라도 간 걸 본 건 그가 실수로 의주 이야기를 했을 때 정도일까.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꿀꺽 삼키고 있으려니 김 비서가 “덕분에 뭔 일 날까 봐 그날 퇴근도 못 하고 법무팀장님네 소파에서 잤습니다.” 하고 투덜거림을 덧붙였다.
“하, 하지만 전… 동연은 최종 선택하지 않았는데요.”
“예. 입사 거절하시고 호안제강에 가셨었죠.”
사실, 여태껏 지훈은 제가 2년 전 합격까지 했지만 가지 않은 회사를 떠올리지 않으려 의식적으로 노력했었다. 다시 없는 끔찍한 기억을 남긴 첫 회사를 호안제강이 아닌 동연으로 선택했었다면 무언가 달라졌을까, 하는 후회 때문이었다.
당연히 1차 면접 자리에 누가 있었는지도 전혀 기억이 안 난다. ‘이렇게 생긴 얼굴을 봤으면 못 알아볼 리가 없는데,’라고 확신했던 것이 무색하게 말이다. 지훈이 마른 입술만 달싹거리고 있자, 한숨 어린 목소리가 이어졌다.
“그 일로 지훈님께 다행히, 라는 단어를 쓰는 게 참 얄궂은 건 알지만…… ‘다행히 덕분에’ 폭탄 수습이 됐죠.”
“폭탄… 수습이요?”
“면접장에 다녀온 며칠 뒤인가요. 계속 나사 빠진 사람처럼 지내던 분이 갑자기 업계 1위 로펌 때려치우고 동연 법무팀에 들어가겠다고 하셨었으니까요.”
서해원이 왜 그런 말을 했을지는 굳이 물어보지 않아도 뻔히 짐작됐다. 김 비서 역시 예의상의 부정 같은 건 하지 않았다.
“SJ 회장과 금환재단 이사장 외아들이 동연 법무팀이라니!”
“정말, 말도 안 되는…….”
“제 말이요! 지훈 님, 저 진짜 그때 까무러치는 줄 알았습니다. 제가 이 정도니 회장님이랑 이사장님 반응은 굳이 말씀 안 드려도 되겠죠.”
순간 머릿속에서 포털 사이트 검색으로 보았던 인상이 센 남자의 프로필 사진과, 카페에 곧잘 찾아왔던 단골손님의 얼굴이 교차됐다. 특히 후자의 경우에는 동그란 금색 안경 너머로 저를 빤히 바라보던 시선까지 느껴질 정도였다.
“지금 생각해 보면, 주변 모두가 뜯어말려도 동연, 동연 노래 부르시던 분이 하루아침에 식어서는 ‘갈 일이 없어졌네요.’ 할 때부터 그놈의 ‘갈 일’이 뭔지 알아봤어야 했습니다.”
“…….”
“그게 아니라면, 어느 날 신논현역 앞에서 내려선 저를 먼저 돌려보내기 시작했을 때부터라도요.”
신논현역은 지훈이 매일같이 출퇴근했던 호안제강의 사옥이 있는 곳이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솜털마저 곤두선 얼굴을 쓸었다. 그렇지 않아도 묻고 싶은 게 가득이라고 생각했는데, 거기에 질문이 더 늘어날 수 있는 거였다니.
……대체 내가 뭐라고 그렇게까지 해?
심장이 빠르게 콩콩 뛰었다. 거기엔 단 하나의 이유만을 댈 순 없다. 놀람, 설렘, 부담, 걱정…. 온갖 것이 뒤섞여서다. 백미러를 통해 지훈의 침묵을 들여다보던 김 비서는, 더는 숨길 의지조차 없다는 듯 순순히 실토를 이어갔다.
“이미 예상하셨겠지만, 서명희 이사장님께는 제가 전부 다 말한 거 맞습니다, 지훈 님.”
“전부 다… 라고 하심은.”
“두 분이 같은 집에서 지내는 매우! 친밀한 관계라는 것부터, 아르바이트하시는 카페, 그리고 의주에서 만난 사이라는 것까지요.”
“아….”
“참고로 마지막 것은 두 분 같이 사시기 시작하셨을 때 법무팀장님께 슬쩍 물어봐서 들었습니다. ‘의주에서 같이 붙어 지냈던 아이’라고 하시던데요.”
지훈의 입에서 작지만 긴 한숨이 터져 나왔다. 역시 단골손님, 아니 서해원의 어머니라는 이사장이 유독 나이대까지 따져가며 정확한 관계를 알고 싶어 했던 데는 다 이유가 있었다.
채 몰랐던 달의 뒷면을 알면 알수록 여유가 생기기는커녕 입이 말랐다. 하지만 이번엔 지훈이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정확히는, 해원과의 관계를 시작하면서 가장 먼저 도려내 두었던 현실을 입 밖으로 꺼내야 할 순간이었다.
지훈은 짧게 심호흡한 다음, 흐트러지지 않은 목소리로 물었다.
“제 이야기를 그분께 모두 전하신 이유는, 제가 서해원 변호사님과 같은 남자라서… 그렇습니까?”
“그럴 리가요.”
빈말이라고 하기엔 너무 재깍 꾸밈없이 흘러나온 대답이었다. 김 비서는 백미러를 통해 흘끗 지훈의 표정을 살핀 다음, 확인사살 같은 말을 덧붙였다.
“개인적인 연애사를 제가 어떻게 간섭하겠나요. 말한다고 들을 분도 아니고.”
차마 연거푸 이유를 묻기에는 앞서 모든 용기를 꺼내 쓴 지훈은 그저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물론, ‘개인적인 연애사’라는 단어가 새삼 뺨을 뜨겁게 달군 탓도 없지 않다.
“일어나셔서 저 처음 만났을 때 그러셨잖습니까. 그분이 말하시길 지훈 님이 죽으면 자기도 따라 죽겠으니, 웬만하면 같이 살자고 하셨다고요.”
그때까지만 해도 당연히 농담이라고 생각했던 말이다. 또, 상대 역시 그러리라고 생각했었던 것 같다. 애초에 지훈은 서해원이라는 남자가 제가 한 말을 반드시 행동에 옮길 것임을 확신할 수 있을 정도로 그를 알게 되기까진 제법 시간이 걸렸다.
하지만 그때도, 지금도 김 비서는 그 문장의 농도를 곧장 알아보았던 모양이다. 인상을 찌푸리기까지 한 씁쓸한 얼굴이 그걸 증명했다.
“참 내. 7년을 어떻게 모신 분인데 그 꼴을 봅니까, 제가?”
“…….”
“하여간! 지훈 님에게 여러 사람 목숨 달려 있다는 것만 알고 계십쇼. 아무리 첫사랑이 무섭다고 해도요, 사람이 뭘 할지 짐작은 되어야지, 원.”
왠지 목구멍이 뜨거운 것으로 꽉 막힌 기분이었다. 후텁지근한 숨을 참았던 지훈은 이내 간신히 “예, 죄송합니다.” 하는 대답을 쥐어짜냈다.
오늘따라 유독 멀게 느껴지는 의주까지는 아직 세 시간이나 남았다.
* * *
2년 전.
서해원은 권지훈의 호안제강 입사에 누구보다 실망한 사람이었다.
그에게는 나름의 계획이 있었다. 지훈과 같은 회사에 들어가서 ‘서해원’으로 안면을 튼 다음, 우연을 가장해 아주 먼 훗날 제가 김도현이라는 걸 알게 하겠다는 실로 안전한 계획이.
처음은 회사 구내식당이나 휴게실 따위에서 자연스럽게 말을 붙이는 걸 시작으로 할 생각이었다. 전처럼 지훈아, 할 수는 없을 테니 ‘지훈 씨’라고 부르는 걸 백번은 더 연습했다. 웃기지도 않는 짓이라는 걸 알지만 그렇지 않다간 반드시 실수할 것 같아서였다.
동연에 간다고 하니 집안에서 저를 뜯어말리는 것도 가뿐하게 무시했다. ‘몇 년쯤 뒤에 권지훈이랑 같이 SJ든 금환이든 옮기지 뭐.’하고 속으로 먼 미래까지 그리면서 말이다.
물론, 그 장기 계획은 입사 거절이라는 생각지도 못한 선택지를 고른 지훈 덕분에 하루아침에 물거품이 됐지만.
“……호안제강보다는 동연이 사는 곳이랑 더 가깝잖아.”
인파로 북적이는 퇴근 시간. 해원은 호안제강의 사옥에서 걸어 나오는 지훈을 보며 저도 모르게 중얼거렸다.
솔직히, 오늘의 방문은 지극히 충동적인 것이었다. 그저 외부 일정을 끝내고 이동하다 문득 눈에 들어온 호안제강의 빌딩을 보고 무작정 김 비서에게 차를 멈춰 세우게 한 거였다. 있지도 않은 ‘친구와의 약속’을 운운하면서 말이다.
무작정 이곳으로 온다고 해서 지훈을 볼 수 있을 거라는 생각 같은 건, 정말 전혀 해 본 적 없는데.
“지훈 씨, 들어가요.”
“예. 내일 뵙겠습니다.”
저를 기어이 변호사가 되게 한 아이는 이 많은 사람들 사이에서도 유독 눈에 띄었다. 아니, 실은 이제 아이라는 단어는 어울리지 않는다. 삐죽 튀어나온 키와 빳빳하게 갖춰 입은 슈트 너머로도 충분히 그려지는 잘 다듬어진 몸까지. 어딜 봐도 완연한 성인 남성으로 자랐다. 객관적으로 봐서 ‘참 잘 컸네, 권지훈.’ 하는 게 맞다.
해원은 누군가에게 깍듯하게 인사하는 지훈을 보면서 저도 그에게 말을 거는 상상을 했다. 하지만 한번 어그러진 계획은 쉽사리 새로운 길이 보이지 않았다.
18년 전에는 병실 면회까지 거부하면서 하루아침에 연을 끊고 의주를 떠났다. 그런 주제에, 인제 와서 김도현이라는 오래된 이름을 꺼낼 엄두 따위 날 리가 없다. 고작 아홉 살이었던 지훈이 저를 기억할지― 혹 기억하더라도 달가워할지도 문제다.
무엇보다 그 본인이 제가 머릿속에서 언제나 인사하던 그 권지훈과는…… 많이 달라졌을 수도 있다. 해원은 사람으로 바글바글한 인도에서도 곧장 눈에 들어오는 늘씬한 뒷모습을 따라 걸으며 생각했다. 이대로 모른 척 그냥 과거의 기억으로 남겨두는 편이 좋을까, 하고.
그러나 그러면서도 계속 지훈을 따라 걷는 이유는 스스로도 알 수 없었다. 면접에서 그와 눈을 마주쳤을 때 느꼈던 강렬한 감정을 다시 한번 느끼고 싶어서일까.
한편, 흔한 망설임 한 번 없이 곧장 움직인 지훈이 향한 곳은 작은 꼬마 빌딩 하나를 통으로 쓰는 캐주얼 의류매장이었다. 해원은 지훈이 매장 입구로 들어서는 것을 보며 그 뒤를 놓치지 않으려 발걸음을 빠르게 했다.
하지만, 이제껏 단 한 번도 머뭇거린 적 없던 지훈이 문 앞에 우뚝 멈춰 선 것도 그와 동시였다.
따라가는 걸 들켰나?
덕분에 갑자기 크게 몸을 빙글 돌리며 어정쩡하게 멈춰 선 해원은, 전화는커녕 메시지 하나 달리 온 게 없는 휴대폰을 얼른 귀에 가져다 댔다. 슬쩍 곁눈질로 바라본 지훈은 표정까지는 알 수 없었지만 계속 매장의 문가에 서 있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것도 꽤 오랫동안.
심장이 이렇게 빠르게 뛰는 게 얼마 만인지.
어울리지도 않게 통화하는 척을 이어가던 해원은 한참 뒤에야 마른침을 삼키며 고개를 기울였다. 확실히 권지훈은 의류 매장의 문 앞에 여전히 서 있기는 했다. 물론 저를 눈치챈 것과는 거리가 먼 이유로 말이다.
그걸 확인한 순간, 해원은 저도 모르게 헛웃음을 지었다.
“……하.”
지훈은 출입문의 손잡이를 잡고 있었다. 그것도, 얌체처럼 몸만 쏙 들어가는 사람들을 위해서 말이다. 제대로 지켜본 것만 따져도 다섯 명 이상이 지나갔다. 그런 사람들이 최소한의 감사 인사를 할 리도 만무하다.
하지만 권지훈은 불쾌해하기는커녕 갑자기 문이 닫히면 누군가 다치기라도 할까 걱정된다는 듯 손잡이를 좀 더 고쳐잡았다. 심지어 처음으로 작게 “감사합니다.” 한 사람에게 빙긋 입꼬리를 들어 올려 웃어 주기까지 했다.
지훈이다.
도서관 뒤에서 만났을 때와 다를 것 하나 없는, 권지훈이다. 그 순간 터져 나온 한숨에는 감탄과 안도가 뒤섞여 있었다.
종각에 있는 로펌에서 신논현역 앞으로 퇴근하는 일상이 시작된 건 그날부터다. 지훈의 뒷모습. 걸음걸이. 가끔씩 보이는 미소…. 그 모든 게 신기하면서도 그리웠다.
물론 권지훈에게 말을 거는 상상도 쭉 이어졌다. 같은 지하철을 타서 ‘저기, 혹시 저 알아보겠어요?’ 해 볼까? 가볍게 부딪쳐 보는 건 어떨까. 그게 아니라면, 앞에서 물건을 떨어트려 볼까. 권지훈이라면 분명히 챙겨 줄 텐데….
방법은 다양했다. 그 무엇도 실제 행동으로 옮긴 적은 없었지만 말이다. 그건 분명 회피였다.
하지만 해원은 제 망설임의 이유로 하루에 지훈을 만나는 시간이 너무 짧은 탓을 했다. 신논현역에서 마곡나루역까지 급행 30분, 가끔 사람이 많을 때 일반 배차를 타면 50분. 정말 운이 좋은 날이어야 강남 근처 맛집에서 혼자 저녁 식사를 같이해서 두 시간. 신입 사원답게 일을 헤맨 지훈이 야근하고 나오면, 또 그 얼굴이 너무 지쳐 보인다는 이유로 오늘은 패스.
그렇게 빙빙 돌아가는 퇴근을 한 지 한 달 반.
제발 이제는 뭐라도 말을 걸어 보자. 어깨를 부딪치고 ‘죄송합니다.’라도 좋으니까. 서해원은 결심했다.
그날은 지훈이 소속된 팀의 회식이었다.
북적이는 식당까지 쫓아가서 혼자 고기 2인분을 시켜 놓고 앉아 있는 게 미친 짓이라는 자각은 있었지만, 하는 수 없었다. 해원은 제 앞에서 지글지글 연기를 내며 익는 고기 대신 저만치서 긴장한 얼굴로 앉아 있는 지훈을 흘끗 바라보았다. 회식 따위에 저렇게 기합이 들어간 모습을 보고, 어떻게 모르는 척 뒤돌아 귀가할까.
사실 이때만 해도 아직 서해원에게 권지훈은― 뭐랄까, 말하자면 환상 속 요정이 실체화된 존재에 가까웠다.
물론 작고 동그랗던 아홉 살이 아니라는 건 안다. 딱 보기만 해도 180cm쯤 되어 보이는 키의 신체 건장한 남자에게 요정이라는 단어는 거리가 멀어도 좀 먼 게 아니다. 그러나 해원은 자꾸만 잘 자란 남자에게 아홉 살의 그림자를 덧씌워 보곤 했다. 웃는 모습만큼은 기억 속 모습과 크게 달라지지 않았다는 것이 그 착각에 도움을 주기도 했다.
하지만, 호안제강의 회식은 서해원을 영원히 아이로 머무는 피터팬의 환상에서 현실로 단번에 끌어당겨 주었다.
“이야아, 권지훈이! 소맥 엄청 잘 마네? 의외다, 야!”
그랬다. 그의 작고 동그랗던 (전)요정은 단정하고 말끔한 얼굴로 술을 제법 했다.
세상천지에 소주 2병을 쉼 없이 비우고도 멀쩡하고, 하다못해 소맥마저 잘 마는 요정 같은 건 없다. 덕분에 해원은 그제야 ‘아, 그래. 지훈이도 성인이지.’ 하고 늦어도 한참은 늦은 깨달음을 가졌다. 제가 서른셋이니 권지훈은 스물일곱이겠구나, 하고 새삼 나이도 셈해 봤다.
오늘이야말로 말을 붙여 보려고 했는데, 뒤늦게 자각한 시간의 틈새가 너무 깊었다. 아무리 착해 빠진 권지훈이라지만 이제 와서 감히 제가 발 디딜 곁이 있기는 한 건지 자신도 없어졌다. 해원은 상사들이 주는 술을 모두 들이켜는 지훈을 보면서 그도 미지근한 맥주를 몇 모금 삼켰다.
호안제강의 회식은 꽤 터프했다. 맨정신으로 음식을 먹고 대화를 나누는 것보단 취하기 위한 자리를 만든 것처럼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회식이 끝나자 여기저기서 뻗은 사람들이 속출했다.
“거기! 대리 불러요, 대리. 운전대 잡으면 큰일 나! ―후우, 지훈 씨는 지하철?”
“예.”
“그래요. 조심히 들어가요.”
“……감사합니다. 내일 뵙겠습니다.”
앓는 소리를 내며 늘어진 사람들이 가득한 고깃집 앞. 지훈은 옷매무새만 조금 흐트러졌다 뿐이지 발음 하나 뭉개지지 않고 멀쩡했다. 해원은 그걸 보고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멀리서 대충 보기만 해도 마신 술이 상당한데 주량이 의외로 정말 세구나, 싶어서였다.
하지만 이 말끔한 모습에는 그가 몰랐던 비밀이 두 개 있다.
우선 첫 번째 비밀은, 지훈은 술에 취해도 얼른 티가 나지 않는 타입이라는 거다. 다행히 그걸 눈치채는 데까지는 오래 걸리지 않았다. 회식 장소를 떠나 지하철역으로 가는 지훈이 평소완 다르게 아주 완만한 S자를 그리며 움직인 탓이다.
전혀 안 취한 줄 알았는데. 취하긴 취했네.
해원은 발걸음을 조금 빨리 했다. 그건 지훈의 술기운에 감히 기댄 용기였다. 늘 열 걸음 정도 떨어졌던 거리가 다섯 걸음 정도로 줄었을 뿐인데 긴장마저 됐다.
“후우….”
지하철 에스컬레이터 근처까지 도착한 지훈은 잠시 우뚝 선 채로 긴 한숨을 토해냈다. 사실 그건 해원이 아직 깨닫지 못한 힌트였다. 하지만 18년 만에 다시 만나 지켜본 지 고작 한 달 반째인 해원이 그걸 곧장 짚어낼 방법은 없었다.
결국, 권지훈의 두 번째 비밀은 지하도로 내려가고 난 뒤 가장 최악의 타이밍에서야 드러났다.
“―권지훈!”
얼핏 말술처럼 보이는 지훈은 한창 마실 땐 괜찮다가 취기가 뒤늦게 확 몰아서 올라오는 타입이었다.
평소의 권지훈이었다면 이런 저 자신을 알고 있으니 술이 완전히 깰 때까지 바람을 쐤을 거다. 하지만 입사한 지 겨우 두 달째인 신입사원에게 그런 짬이 있을 리가 없었다. 그저 큰 회식을 별다른 실수 없이 보냈다는 것만으로도 긴장이 풀려 다른 건 생각 나지도 않았으니 말이다.
그리고 해원이 그 사실을 깨달은 것이, 아래로 내려가는 긴 계단 앞에서 크게 기울어지는 지훈의 몸을 보고 나서라는 건 매우 유감스러운 일이었다.
“…하아….”
두 달간 머릿속으로 수없이 그렸던 시뮬레이션은 한순간에 물거품이 됐다. 하지만 그깟 게 중요하지는 않았다. 저 낭떠러지 같은 계단 아래로 떨어질 뻔한 지훈을 가까스로 붙잡은 것만으로도 안도가 터져 나왔다.
물론 신체 건장한 성인 남성을 힘의 반대 방향으로 끌어안은 대가는 있었다. 서로 단단히 얽힌 두 사람은 휘청, 중심을 잃은 채 지하철 바닥 위로 쓰러졌다.
대체 이런 땅바닥에 등을 대고 누운 게 얼마 만인지.
해원은 제 위로 엎어진 남자를 향해 저도 모르게 한숨 가득한 말을 내뱉었다.
“……제발, 지훈아. 이럴 거면 취한 티라도 내야지.”
물론, 자각도 없이 튀어 나간 말이었던 만큼 내뱉자마자 아차 했다. 저야 매일같이 빙 돌아가는 퇴근을 하며 말 붙이는 상상만 했다지만, 지훈에겐 제가 그저 어느 날 갑자기 만난 낯선 남자 A일 것이 뻔했으니 말이다. 아니나 다를까 축 늘어진 채로 있던 지훈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
“…….”
뺨이 간지러웠다.
그 이유가 살짝 벌어진 지훈의 입술에서 흘러나온 숨이 닿기 때문이라는 걸 깨달은 건, 까만 눈동자에 비친 저를 보고 나서다.
사실, 살면서 누군가를 이토록 가까이서 볼 기회는 생각보다 많지 않다. 그것도 열 보 안으로 들어가는 것조차 용기를 내야 했던 상대라면 더더욱.
그 때문일까. 모든 감각이 비정상적으로 증폭된 기분이었다. 너무 잘 보이고, 잘 들리고, 잘 느껴졌다. 얇고 부드러운 눈꺼풀에 슬쩍 비친 혈관. 제 위에서 가볍게 압박하는 단단한 몸의 형태. 도톰한 입술 안의 혀가 달싹거리면서 나는 소리까지. 이 순간 유일하게 거슬리는 건 제 심장 박동뿐이다.
간신히 버티고 있던 피아노 줄이 끊어지는 것처럼 지훈의 고개가 푹 떨어진 것도 그 때였다.
“…하아….”
더운 숨이 귓가로 확 끼치고, 이어 예민한 피부 위로 부드럽고 말캉한 입술이 닿았다. 해원은 저도 모르게 호흡까지 참은 채로 목에 빳빳이 힘을 줬다. 하지만 잠꼬대하듯 응, 하고 낮게 앓는 소리가 감겨온 순간에는 지훈의 재킷을 구겨질 정도로 움켜쥘 수밖에 없었다.
솔직히 그 뒤로는 기억이 뒤죽박죽이다. 완전히 늘어져 체중을 기댄 지훈을 어떻게 일으켜 업고 지하철을 탔는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한 가지 선명한 건, 막차 시간에 맞춰 나란히 앉은 자리에서 지훈의 머리가 제 어깨에 닿았던 감촉이다. 그래 봤자 맥주 한두 모금 마신 게 전부건만, 같은 칸에 있던 사람들은 지훈보다 제 쪽을 더 취한 사람으로 보았을 거다.
지훈이 사는 동네에 도착하니 마침 같이 사는 룸메이트 유경인에게 전화가 왔다. 해원은 묘하게 전기가 흐르는 것 같은 손으로 간신히 행인인 척 전화를 받았다. 물론 그러고도 자리를 떠난 건 지훈이 경인의 부축을 받아 지하철역을 빠져나가는 걸 저만치서 확인하고 나서다.
그리고 그날 밤.
서해원은 권지훈을 상상했다. 머릿속에 그저 예쁜 기억으로 존재한 권지훈이 아니라, 스물일곱 살의 권지훈을. 제 품에 단단하게 안겼던 길고 늘씬한 몸과 옷 아래의 근육을, 살결을, 소리를.
미쳤다든가 제정신이 아니라든가 하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지훈을 다른 온도로 바라보는 게 가능하다는 걸 깨닫는 건 첫 자각이 어려웠을 뿐이다. 오히려 그 긴 시간 동안 제 마음이 흐르고 흘러 도달한 결과에 내심 만족하기까지 했다.
……물론, 덕분에 말을 거는 건 또 미뤄졌다.
솔직히 그때만 해도 서해원은 제가 그렇게나 오랫동안 지훈에게 말 한마디 제대로 붙이지 못할 것이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또, 살며 처음으로 애정을 갈구하게 된 상대에게 거부 받는 걸 저 자신이 그리도 무서워하게 될 줄도 몰랐다.
인생의 가장 끔찍한 순간마다 머릿속으로 떠올리며 버텼던 존재가 눈앞에서 소리 내어 말하고, 눈을 접어 웃고, 달콤히 숨 쉰다는 건 황홀한 지옥과 다름없었다.
더는 상상할 수 없었다. 멀리 반짝이는 바다도, 산들거리는 꽃향기도. 지독하게 일진이 꼬이다가 최악이라고 부를 수 있을 만큼 엉망이 된 날조차, 이제껏 저를 지탱해 준 예쁜 기억을 떠올릴 수 없었다.
그 대신 서해원이 초조히 기다리게 된 건 해가 지는 저녁이었다. 지훈을 볼 수 있는 시간. 어떤 끔찍한 나날조차 흘러 지나가게 해 준, 그 모든 고운 것들의 중심에 있는 남자를 시야에 둘 수 있는 유일한 순간.
그래서 가끔 러시아워에 걸린 날엔 저를 의아하게 보는 김 비서의 눈을 무시하고 무작정 차에서 내려 달린 적도 있다. 옷이며 머리가 엉망이 될 정도로 뛰어가 이미 작아진 지훈을 먼발치나마 눈에 담으면, 그제야 지옥 같던 하루를 떨쳐낸 진짜 숨을 쉴 수 있었다.
해원은 그렇게 태양을 중심에 두고 도는 이름 없는 행성처럼 매일 고요하게 들끓었다. 물 한 방울 없는 메마른 땅에서 영원히 좁아지지도, 멀어지지도 않을 것만 같은 거리에 목말라하면서.
하지만, 그 영원할 것 같던 공전에도 끝은 있었다. 퇴근길에 우는 날이 많아졌던 권지훈이 끝내 혼자 남았을 때였다.
추운 초봄의 새벽.
첫 회식 이후로 단 한 번도 술을 무리해서 마시지 않던 지훈은 두 번째의 과음을 했다. 그리고 지하철 계단 위에서 휘청거렸던 그 날처럼― 이번에는 마포대교 위에 홀로 섰다.
을씨년스러운 날씨 탓인지 그 흔한 차 하나 지나가지 않는 외로운 길 위에.
“떨어질 거예요?”
금방이라도 검은 수렁 아래로 떨어질 것만 같던 지훈의 고개가 천천히 움직였다.
이렇게 어이없을 정도로 쉽게 말을 걸 수 있는 거였다면 조금 더 일찍 곁에 섰어야 했는데. 해원은 씁쓸하게 웃었다. 감정을 자각한 이후 처음으로 눈이 마주치는 순간을 수없이 그리고 또 그렸건만, 개중에 이렇게 어둡고 차가운 날은 없었다.
지훈은 초점이 제대로 잡히지 않는지 눈을 몇 번이나 깜박였다. 그 아슬아슬한 모습을 보며 해원이 말을 이었다.
“떨어져 죽을 거냐고요.”
입에 담는 것만으로도 심장 한편이 서늘해지는 물음이었다. 하지만 그걸 아는지 모르는지 지훈은 어떤 대답도 해 주지 않았다. 덕분에 해원은 저 검은 강물에 머리가 처박히는 듯한 기분을 먼저 체험했다.
휘청휘청 걷는 뒷모습을 따르며 떠올렸던 수많은 위로의 문장들도 허무할 만치 쉽게 사그라들었다. 감히 어떤 근사한 위장도 할 수 없다. 이제껏 제 인생을 조용히 지탱했던 축이 무너진다는 건, 그런 거였다.
“웬만하면 사는 쪽을 선택해 줬으면 좋겠는데요, 지훈 씨. 당신이 죽으면 나도 따라 죽을 거니까.”
“……예?”
“강은 녹았다지만 아직 춥잖아요. 뭐, 정 떨어져야 한다면 어쩔 수 없이 따라가야겠지만.”
난 아무래도 권지훈에게 멋진 사람이 되긴 글렀어. 해원은 저를 멍하게 바라보는 반듯한 얼굴을 보며 생각했다. 그나마 다행인 건 지훈의 앞에서 처음으로 내뱉은 ‘지훈 씨’라는 단어가 퍽 매끄럽게 흘러나왔다는 거다. 지겨울 정도로 오랜 연습 덕분이다.
“권지훈 씨. 저는 당신을 꽤 오랫동안 지켜봤어요.”
“그래서…요?”
“그래서, 지훈 씨에 대해 제법 잘 알아요. 특히 지금 당신을 여기까지 오게 한 쓰레기들에 대해선 더욱더.”
너무 들떠선 안 됐다.
너무 들끓는 속을 그대로 보여줘서도 안 됐고.
머리로는 안다. 하지만 저를 향한 지훈의 짤막한 물음 앞에서 숨이 부족할 만큼 심장이 뛰어댔다. 비겁하다는 생각이 들지 않은 건 아니었다. 버림받을까 두려워 감히 다가가지 못하다가 용기를 내는 순간이라는 게 그가 이렇게나 약해진 때라니.
해원은 천천히, 절대 가까워질 수 없을 것만 같았던 거리를 좁혀가기 시작했다.
“예를 들면, 이름을 바꿔치기해서 보고서를 낸 주제에 그걸 따졌더니 벌써 반년째 투명 인간으로 취급하며 따돌리는 직속 사수와 동기들….”
“…….”
“같이 살던 월세 보증금을 다 챙긴 거로도 모자라 옷 한 벌까지 모두 훔쳐 잠수한 십년지기 친구. ―아니, 이런 걸 친구라고 해야 하나?”
하지만, 변명하자면 서해원 그도 여유가 오래 남진 않았었다.
어느 날부터 작은 미소조차 없이 퇴근하는 지훈을 지켜보며 걱정만 쌓여갔던 한 달.
지하철에서 중간에 뛰어내려 낯선 역의 화장실에서 소리 내 우는 걸 듣고서야 알아본 상황 앞에서 분노에 이를 갈았던 그다음 달.
어릴 적 알던 형 따위가 권지훈에게 얼마나 무의미한 상황일지 곱씹을 때마다 앞에 설 자신이 사라졌던 또 그다음 달…….
외줄 위를 걷던 아슬아슬한 한달 한달이 쌓이고 쌓여, 요즈음은 눈이 마주치는 순간 대뜸 사랑한다는 고백부터 토해낼 것 같을 정도였으니까.
해원은 저를 올려다보는 젖은 눈동자를 바라보며 크게 심호흡했다. 그러고는, 켜켜이 쌓인 애정을 토로하는 것 대신 권지훈보다 저 자신에게 하고픈 말을 이어 말했다.
“억울하잖아. 그런 새끼들 때문에 죽는 건.”
권지훈은 그에게 하나뿐인 봄이다.
저 멀리 반짝이는 바다를 품고, 또 지나가는 바람에 번지는 등나무꽃 향기를 싣고, 그늘 속에서 유일하게 햇살이 떨어지는 유일한 봄. 그것이 홀로 익사하게 하느니 차라리 같이 추락할 거고, 최소한 그 전에 살아보려 발버둥은 쳐 볼 거다.
지훈이 숨을 헐떡이며 울기 시작했다. 늘 몰래 엿들으며 심장이 조금씩 찢겨 나갔던 울음이지만, 오늘은 다르다. 해원은 차갑게 언 뺨 위로 떨어지는 눈물을 조심스럽게 쓸고 또 쓸었다. 제 손에 기대듯 기울어지는 고개가 자못 사랑스러웠다.
“내가 도와줄게요. 당신 말이라면 뭘 못 들어주겠어. …그러니까, 나랑 같이 가요.”
이른 고백 대신 떨리는 몸을 끌어안자, 분명 팔을 둘러서 안은 건 저인데도 따뜻한 온기에 대신 감싸진 것 기분이 들었다.
아주 오래전부터, 이렇게 하고 싶었지.
서해원은 스스로를 향해 중얼거렸다.
* * *
의주시는 10만 명이 조금 넘는 작은 도시지만 한 사람 정도가 작정하고 숨기엔 충분한 곳이다. 하지만 지훈은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여행길 끝에 도착한 고향에서 해원을 곧장 찾아냈다.
“여긴 정말 그대로네요.”
“…….”
“우와. 이 의자, 어렸을 땐 꽤 높은 것 같았는데.”
연보랏빛 꽃망울들이 늘어진 작은 도서관 뒤편 벤치. 서해원은 그곳에 있었다. 어렸을 때 앉았던 그 자리 그대로. 달라진 것이라면 둘 다 어릴 때와는 비교할 수 없이 훌쩍 커 버렸다는 것 정도일까.
지훈은 저를 보고 연한 갈색 눈을 조금 크게 떴다가 휙 고개를 돌린 남자의 옆자리에 털썩 앉았다. 그러자 살짝 어깨가 닿은 정도로 크게 움찔하는 진동이 전해졌다. 그걸 모르는 척, 지훈은 여느 때와 다름없는 담담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도망은 왜 치셨습니까?”
고운 눈썹이 슬쩍 꿈틀했다. 별다른 세팅 없이 가볍게 늘어트린 머리 스타일을 하고 얇은 니트에 면바지를 입은 해원은 평소와는 퍽 다른 분위기였다. 지훈은 어울리지 않게 대답을 꾸물대는 남자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도망친 거 아닌데요.”
“불러도 뒤돌아보지도 않고 휙 나가는 게 도망이 아니면 뭡니까.”
카페에서 지훈이 마지막으로 불렀던 이름은 서해원이 아닌 ‘도현 형’이었다. 그걸 기억하는 해원이 다시금 멈칫했다. 지훈의 타박 아닌 타박 역시 이어졌다.
“심지어 휴대폰도 끄고 외박이라니. 좀 너무하신 거죠, 이건.”
“그냥, 생각 정리만 하려고….”
“차로 4시간은 더 걸리는 곳까지요?”
본전도 못 찾는 변명을 이어가던 해원은 그냥 입을 다물고 저 멀리 시선을 피하는 걸 택했다. 화창한 5월의 햇살을 머금은 바다는 한낮에도 별을 흩뿌린 듯 금색으로 넘실댔다.
한동안 말을 고르던 해원이 물음에 답한 건 한참 뒤의 일이었다.
“기껏 감췄던 인연이라는 게, 20년 전에 잠깐 알고 지내다가 이 작은 도시를 발칵 뒤집고 사라졌던 거니까.”
“…….”
“너무 시시해서 실망했을 것 같아서. 그래서…, 맞아요. 도망쳤어요. 예전이나 지금이나, 똑같이.”
누군가에게 고개 숙일 일도 작아질 일도 없는 남자가 묘하게 힘이 빠진 목소리로 말하는 건 참 지독하게 어울리지 않았다. 그 모습을 바라보던 지훈은, 별안간 해원의 고개를 제 쪽으로 휙 잡아당겼다.
그건 정중함과 예의 바름을 녹여 사람으로 만들면 꼭 그 자체일 것 같은 지훈으로서는 전에 없던 행동이었다. 또, 한편으로는 내내 눈을 마주치던 걸 피하는 해원 탓에 제대로 맞닿은 적 없는 시선이 비로소 제대로 얽히는 순간이기도 했다.
해원의 갈색 눈은 오늘따라 유독 맑고 또 밝게 빛났다.
“대체 예전엔 왜 그렇게 앞머리를 길게 기르고 다니셨던 겁니까? 그때 한 번이라도 눈을 봤었으면, 그래도 의주 얘기가 나온 날 곧장 알아봤을 텐데.”
“…그게….”
“아깝잖아요. 이렇게 예쁜데.”
뭐라고 말을 하려던 해원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짐짓 자연스럽게 제 턱선을 따라 그리듯 움직인 지훈의 손 때문이었다. 딱 듣기 좋을 정도로 낮은 목소리가 천천히 이어졌다.
“정말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납니다. 어머니가 ‘도현 형이 많이 다쳐서 당분간 보기 힘들 거야.’ 하셨을 때요.”
아홉 살 때의 일이니 거의 20년 전의 기억이다. 당연히 해원과는 달리 자잘한 것들을 모두 다 떠올리지는 못한다. 그러나 지훈에게 아홉 살 때를 기억해 보라고 하면 딱 하나. 유독 다정하고 따뜻했던 키 큰 교복 차림의 형만이 남는다.
그 형은, 김도현은 막연한 포근함과 서글픔을 동시에 품고 있다. 잠시 기억을 더듬듯 눈을 가늘게 했던 지훈이 문득 떠올랐다는 듯 덧붙였다.
“아. 병원도 갔었습니다. 만나지 못하고 돌아와서 또 펑펑 울었던 거 같기도 하고.”
“병원까지 왔었을 줄은… 몰랐어요.”
“갔었습니다. 그것도 엄청 떼를 써서.”
열다섯 살의 김도현은 저를 몇 번이고 찾아왔던 지훈의 어머니를 독할 만큼 냉정하게 모두 면회 거부했었다. 제 딴에는 더 이상 폐를 끼치지 않으려 한 행동이었는데, 그것 때문에 지훈을 울렸을 줄은 몰랐다.
해원의 시선이 슬쩍 또 아래로 향했다. 그러자 지훈이 그러지 말라는 듯 하얗고 부드러운 뺨에서 말랑한 귓가까지 어루만졌다. 그건 꼭 다정한 연인이 할 법한 행동처럼 느껴져서, 해원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나중엔 어른들이 하는 말을 조각조각 듣고 어렴풋이 깨닫기는 했습니다. 도현 형을 못 보는 건 ‘당분간’이 아니겠구나, 하고요. 실제로도 그랬고.”
고스란히 내보였다간 겁먹고 도망칠까 싶어 언제나 짓누르기만 바빴던 감정이 턱밑까지 차올라 출렁였다. 해원은 단정한 눈매를 접어 웃는 지훈 앞에서 초조한 숨을 삼켰다.
하지만 이어진 말 앞에서는 그 어설픈 평정도 곧 산산이 조각났다.
“감히 이런 말을 해도 되는지는 모르겠지만… 다행입니다. 이제는 정말 많이 사랑해 주시는 분들 사이에 계신 거 같아서요.”
“―그럼 지훈 씨는요.”
순간 쏴아, 봄바람치고는 강한 바람이 불었다. 길게 늘어져 있던 연보라 꽃들이 술렁이며 달콤하게 두 사람을 감싼 것도 그 때다. 작은 소년에서 완연한 남자가 되어 찾아온 그들을 반가워하기라도 하듯이 유독 진한 향이었다.
누르고 눌렀던 마음 한 자락을 기어이 마저 꺼내 드는 목소리가 조금 떨렸다.
“지훈 씨는, 어떤데요.”
볼품없던 김도현이라는 걸 들켜서 단 한 가지 좋은 건 얼마든지 한심해질 수 있다는 거다. 이 초라한 나를 사랑하는 사람들 사이에 권지훈, 너도 있는 거냐고 차마 소리 내 묻지도 못하는 주제에.
지훈은 얼른 답을 내놓지 않았다. 그저 눈앞에 있는 남자의 모든 것을 뜯어보듯 물끄러미 시선을 마주했을 뿐이다.
결국엔 사랑은 아니었던 걸까. 감히 같은 온도로 서로를 보는 것 따위는 욕심이었을까.
―하지만.
지훈이 저를 사랑해 주는 미래보다 거부하고 밀어내는 미래를 더욱 많이 그려보았던 해원은, 상상 속의 여느 때처럼 기회를 구걸하려 했다. 그러나 보다 먼저 입을 연 건 내내 침묵하던 지훈이었다.
“5단계는 제가 정하겠습니다.”
어떤 말 앞에서도 무너지는 일이 없는 것으로 정평이 난 남자는, 살며 단 한 번도 만난 적 없는 다디단 판관 앞에서 순간 삐끗했다.
“네?”
“진도요. 앞의 4단계는 다 변호사님이 정하셨잖습니까. 그러니까 마지막은 제가 정할 겁니다. …혹시 불만 있으십니까?”
불만이라니. 감히 그런 걸 품을 수 있을 리 없다. 해원은 좌우로 작게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마지막이라는 단어 앞에서 불안하게 요동치는 심장까지 어떻게 할 수는 없었다. 손등 위로 푸른 혈관이 툭 튀어나올 정도로 주먹에 힘이 들어갔다.
그 초조함을 아는지 모르는지 지훈은 흠흠, 하고 목을 가다듬고 자세를 바로 하더니, 가뿐하기까지 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우리, 인사하죠.”
“인사……요?”
“예. 인사. 그것부터 해야 할 것 같습니다. 저랑 변호사님은.”
섹스, 키스, 데이트, 손잡기,
그리고 인사.
보통의 만남과는 달리 하나씩 역행하다 도달한 단계로 치면 퍽 그럴듯한 순서다. 하지만, 인사에는 두 가지 목적이 있다. 만날 때와 헤어질 때. 인사는 그 두 순간 모두 한다.
처음 시작했던 장소에 앉아 가장 마지막에 하는 인사는 뭘까?
해원은 잠시 숨을 참았다. 그러나 어깨를 곧게 편 지훈 쪽은 반대로 후우, 하고 짧은 날숨을 토해냈다. 이내 단호하고 반듯한 이목구비만큼이나 딱 떨어지는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권지훈입니다.”
“…….”
“앞으로도, 잘 부탁드립니다. 서해원 변호사님.”
‘앞으로도’.
해원은 유독 힘주어 흘러나온 단서를 입 안에서 굴려 보았다. 한 번으로는 모자라서 두어 번 더. 하지만 아무리 되새기듯 중얼거려 보아도 기한 없는 미래를 담은 그 단어는 꼭 제 것이 아닌 듯 어색하기만 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한들 탐나지 않는 건 아니었다.
생각해 보면 권지훈과 있을 때는 늘 그랬다. 감히 내일을 상상하는 것조차 두려웠던 열다섯 살에도 먼 미래가 궁금해졌고, 지나가듯 내뱉었을 뿐일 말대로 걸어가게 됐다. 미래가 현실이 됐다.
―그렇다면.
해원은 저도 모르게 바짝 마른 입술을 혀로 가볍게 훑었다.
“뭡니까. 변호사님도 하세요.”
“……분명히 앞으로도, 라고 했어. 권지훈.”
어울리지도 않게 툴툴대듯 채근했던 지훈의 입이 꾹 다물어졌다. 나직하게, 하지만 또박또박 흘러나온 제 이름 석 자에 담긴 들뜸 때문이었다. 해원의 목소리는 평소보다 빠르게 이어졌다.
“나중에 구두계약이었다고 잡아떼도 소용없어. 모든 걸 다 증거로 제시할 테니까.”
“…….”
“실질적으로 동거한 것이나 마찬가지인 거주지부터 매일같이 찾아가서 만났던 카페, 하다못해 네 허벅지 뒤에 있는 점의 위치나 박힐 때 어떤 소리를 내는지까지.”
짐짓 노골적이기까지 한 으름장이었다. 하지만 지훈은 그 욕심 가득한 말 중 무엇도 거부하지 않았다. 그저 진득한 침묵으로 대답을 대신했을 뿐이다. 고요함의 농도만큼 지훈의 뺨에서부터 시작된 붉은 기운은 끝도 모르고 번져나갔다. 귀로, 목으로, 셔츠 안에 숨겨진 채라 보이지 않는 가슴팍으로.
‘앞으로’ 제 것이 될 그 보기 좋은 것을 눈에 담는 해원의 갈색 눈동자에 선명한 욕망이 어렸다.
그러나 서해원 그는 변호사다. 최소한 말만큼은 누구보다 그럴듯하게 할 수 있다. 조금 전의 지훈처럼 후, 짧은 숨을 내쉰 해원은 열기로 들끓는 얼굴 위로 그린 듯한 미소를 건 다음, 짐짓 공손히 인사했다.
“소개가 늦었습니다. 권지훈 씨. 서해원입니다.”
* * *
의주시는 작은 곳이지만 외곽을 따라 아름다운 해안선을 끼고 있는 덕에 오션뷰를 노린 괜찮은 호텔들이 몇 개 있다.
하지만 정작 지훈은 그 풍광 좋은 호텔을 한 번도 이용해 본 적 없었다. 스무 살에 대학을 서울로 간 이후 명절이 되어야 겨우 내려오는 고향인데 집을 떠나 다른 곳에서 시간을 보낼 이유가 없었으니 말이다.
“하아…, 저, 여기 처음 와 봅니다.”
“잘됐네요.”
입술에서 시작된 해원의 키스는 턱과 늘씬한 목선을 따라 자연스럽게 움직였다. 물론 그러면서도 손으로는 꼼꼼하게 채워진 셔츠 단추를 푸는 것도 게을리하지 않았다. 어느새 가슴이 훤히 드러난 지훈은 제 몸에 매달린 해원을 끌어안은 채로 더운 숨을 길게 내뱉었다.
정말 새삼스러운 일이긴 하지만 집이 아닌 곳에서 남자와 몸을 섞을 준비를 한다는 것만으로도 머리가 더 뜨거워지는 것 같았다. 하다못해 등 뒤로 닿는 벽의 서늘함마저 자극으로 느껴질 정도다. 커다란 통창 멀리 익숙한 바다가 펼쳐진 곳이라 더욱 그랬을지도 모르겠다.
바지가 허벅지를 타고 떨어지는 간지러운 감촉에 옅게 떨던 지훈은 문득 제가 ‘맨정신으로’ 해원의 앞에서 처음 다리를 벌렸던 순간을 떠올렸다.
생각해 보면 그때도 집은 아니었다. 밖으로는 고용인들이 몇 명이나 서 있는 차 안에서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사타구니 사이에 해원의 머리를 처박고 헐떡였었으니.
“왜?”
아주 잠깐 집중하지 못했을 뿐인데 해원은 제게서 관심이 멀어진 걸 곧장 눈치챘다. 그건 꼭 지독한 허기를 채우는 것보다도 애정 어린 손길 한 번에 더 목마른 맹수 같은 눈이라, 지훈은 손이 닿은 그의 머리와 등을 쓸면서 얼른 대답했다.
“변호사님이랑은 정말 많이 했는데… 좀, 이상해서요.”
“뭐가 이상한데요.”
“그게… 아!”
뭐라 말을 이으려던 지훈은 순식간에 몸이 떠오르며 시야가 휙 바뀌자 깜짝 놀라 해원의 몸에 매달렸다. 고등학생 이후로 어디 가서 체격으로 꿀리는 일 없던 저를 오로지 팔의 힘만으로 번쩍 안아 올린 남자 때문이었다.
한편, 해원은 한없이 단정한 목소리로 흘러나온 노골적인 표현에 옅은 웃음이 터진 채였다.
“지훈 씨, 나랑 ‘정말 많이’ 섹스했는데도 아직 남은 이상한 게 뭐예요. 네?”
“……놀리지 마세요.”
“궁금하잖아요. 내 거가 몸속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 이상하다고 하는 게 뭘지.”
지훈이 입술을 깨물었다. 그저 그런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아랫배가 묵직해지는 듯한 기분이어서다. 애초에 누군가에게 안겨 침실로 향한다는 건 생각보다 훨씬 더 달콤하고 설레는 일이었다. 이어질 행위가 무엇인지 그도, 나도 서로 아는 채로 온전히 몸을 맡긴다는 점에선 섹스와 닮았지만 또 달랐다.
덕분에 푹신한 이불 위에 푹 눕혀지는 순간, 지훈은 남자의 눈웃음을 보며 마른침을 삼켜야 했다. 하지만 그건 차라리 약과였다.
“응? 지훈아.”
와아, 지금…….
살면서 몇천, 몇만 번은 더 들었을 저 자신의 이름에 흥분하는 이상 성욕자는 되고 싶지 않은데. 하지만 저렇게 웃으며 저렇게 부르면 정말 어떻게 빠져나갈 방법이 없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눈꺼풀을 파르르 떨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여태껏… 어떻게 했었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키스는 어떻게 했는지. 옷을 어떻게 벗었고, 또 벗겼는지. 물론, 이상하다는 건 아는데, 기억이…, 잘 안 납니다.”
“…….”
“전부…… 애인으로서 하는 건 처음이어서요.”
너무 떨려서 심장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 같다는 말까지는 차마 하지 못했다. 말마따나 대체 몇 번이나 몸을 섞었는데 그렇게 숫된 척 구느냐고 생각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웃음기 어린 타박 대신 돌아온 건 말캉한 입술이었다. 정신없이 혀를 섞었던 조금 전과는 달리 입술의 부드러운 감촉에만 매달리는 듯한 다디단 키스였다. 지훈은 그 달콤함을 따라 저도 모르게 눈을 감고 있다가 이내 따뜻한 숨이 뺨이 닿을 때야 눈을 떴다.
그리고 그 순간. 옅게나마 숨이 턱 막혔다.
“애인으로서 하는 건… 처음.”
“…….”
“듣기 좋은 말이네요, 그거.”
세상에 어떻게 저렇게 웃는 사람이 있을 수가 있지? 스스로에게 물어보았지만 대답은 돌아오지 않았다. 머릿속에서 사고를 담당하는 모든 부분이 이미 세상에서 가장 근사한 미소를 건 남자에게 넘어가 얼이 빠진 지 오래였으니 말이다.
조각달처럼 휜 눈매, 사르르 떨어지는 속눈썹, 여리고 투명한 벚꽃잎을 겹쳐 만든듯한 홍조, 도톰하고 붉은 입술. 지훈은 감히 서해원의 어떤 것에서도 눈을 뗄 수 없었다.
뒤이어 무슨 말을 하더라도 다 들어주고 싶을 입술이 열렸다.
“지훈 씨. 혹시 받고 싶은 거 있어요?”
“바, 받고 싶은… 거요?”
“빨아 주는 것도, 핥아 주는 것도, 만져 주는 것도 좋아하잖아요. 애인으로 처음 하는 거니까, 원하는 걸 해 주고 싶어서.”
말하는 중간중간마다 간지러운 키스를 떨어트리는 해원의 모든 것이 소름 돋게 기분 좋았다. 시선을 빼앗긴 입술은 말할 것도 없고, 얼굴을 스치는 오뚝한 코와 살짝 흘러내린 머리칼마저도 닿는 곳마다 전류를 일게 했다.
덕분에 권지훈은 제게 건네진 제안 속의 음탕한 표현을 한발 늦게 깨닫고 턱밑까지 뜨거워졌다. 원래도 이 정도는 아니었는데. 말 그대로 얼굴에 홀려서 정신을 못 차릴 지경이라니. 해원에게 들키기에는 영 창피한 상태다.
새하얘진 머릿속으로 문득 무언가 스쳐 지나간 건 그 때였다. 지훈은 저도 모르게 고민조차 없이 툭 입을 열었다.
“받는 거 말고… 하, 하고, 싶습니다.”
고운 눈썹이 살짝 찡긋하듯 움직였다. 달콤하게 이어지던 대화도 몇 초인가 끊겼다. 하지만 새삼 자각한 연인의 얼굴에 푹 빠진 지훈에게 그 정적은 얼른 짚어지지 않았다. 그저 ‘우와, 저런 표정도 멋있다.’ 하는 콩깍지 낀 생각을 하고 있었을 뿐이다.
지훈을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해원은 그 멍한 반응을 퍽 진지하게 받아들였다. 그린 듯한 얼굴 위로 얼마 안 가 픽, 옅은 미소가 다시 걸렸다.
“난 아픈 거 싫은데. 아프지 않게 잘할 수 있겠어요?”
“예?”
“워낙 박힐 때마다 좋아 자지러지길래 나한테 박고 싶다는 생각을 하는 줄은 몰랐어요. 미안해요.”
표현은 여느 때처럼 노골적이었지만 평소 같은 장난기는 전혀 없었다. 심지어 마지막에 붙은 사과는 꽤 진지하기까지 했다. 덕분에 멍하게 해원의 얼굴을 뜯어 살피고 있던 지훈은 뒤늦게나마 정신을 차렸다. 하지만, 워낙에 상상조차 못 했던 내용이라 들은 말을 소화하는 데는 몇 초의 시간이 걸렸다.
그리고 이해가 완료된 순간.
“―그, 그런 뜻이 아니고요!”
“아니면?”
해원이 고개를 갸웃했다.
정말이지 구구절절 다 아니다. 저보다 키도, 체격도 좋은 서해원을― 아니, 설령 저보다 더 작았다고 하더라도 감히 ‘박을’ 생각 같은 건 절대 하지 못했을 거고, 무엇보다, ‘좋아 자지러진다’라는 표현만큼은 반드시 반박하고 싶다.
하지만 그 모든 걸 하나하나 따지기엔 너무 부끄럽고, 또 무엇보다 해원이 정말 아무렇지도 않은 표정이었기에 지훈은 곧장 본론을 외쳤다.
“일전에 ‘그쪽은 다음에’, 라고 하셨었잖습니까!”
“‘그쪽은 다음에’?”
“……차 안에서요!”
다행히 서해원은 머지않아 오랜만에 토마토가 된 연인이 언제를 말한 건지 곧장 기억해 냈다.
“아. 오럴.”
툭 튀어나온 한마디 앞에서 토마토 권지훈은 완벽히 후숙을 마쳤다.
사실, 해원은 차 안에서 손을 빌렸던 그때 이후로 지훈에게 어떤 것도 요구한 적 없었다. 정작 그 자신은 지훈의 몸 여기저기를 빨고, 핥고, 만졌지만 말이다. 연인으로서의 첫 섹스를 앞둔 순간 떠올리는 게 지나가듯 만든 빚이라니. 그마저도 참 권지훈다워서 해원은 저도 모르게 소리 내 웃었다.
“우리 지훈이가 어쩌다가 이렇게 야한 짓에 도가 튼 어른으로 자랐을까.”
“피차일반인데요!”
“뭐. 하긴. 애인끼리 속궁합이 잘 맞는 것도 중요하죠.”
“…….”
아무래도 권지훈은 제 애인을 말로 이기는 건 틀렸다. 그나마 이긴다고 해도, 저의 무슨 말이 서해원을 넉다운시켰는지 자각조차 못 할 거다. 이제껏 늘 그랬듯이 말이다.
해원은 낮게 웃으면서 살짝 몸을 일으켜 제 옷을 직접 벗기 시작했다. 섹스를 어떻게 했는지 잊었다며 귀엽게 투정했던 연인을 위해서였기도 했지만, 애초에 손이 많이 가는 슈트를 입었던 평소와는 다르게 가벼운 옷차림이었기에 어려운 일도 아니었다.
벌겋게 익은 채로 어찌할 바 모르고 있는 지훈에게도 상냥하고 야한 지시가 뒤따랐다.
“바지 벗고, 올라타 봐요.”
“예…, 예에?”
“지훈 씨 거가 내 입으로 오게 올라오라는 말이에요.”
지훈의 눈이 몇 번 멍하게 깜박였다. 받는 것 대신에 하고 싶다고 기세 좋게 말하기는 했지만, 자세한 방법과 체위까지는 생각하지 않은 탓에 명령 아닌 명령을 머릿속으로 그려보아야 했기 때문이다.
지훈은 해원의 말을 천천히 곱씹었다. ‘내 거가, 입으로 오게 올라….’ 그즈음에서, 머릿속에 불현듯 음란한 자세를 한 목각인형의 모습이 나타났다.
그 순간 비명 같은 외침이 터져 나온 건 놀라운 일도 아니다.
“서해원 변호사님!”
“네.”
“굳이, 그, 그런, 자세까지는―”
“그래서 안 해 주실 건가요?”
해원이 슬쩍 눈썹을 늘어트렸다.
“아! 물론 하긴 할 건데, 그렇지만!”
“할 거면 제대로 해야죠. 자, 빨리.”
……세상에 사귀자마자 69부터 하는 사람들이 있을까?
아무리 그 전에 많이 했다지만, 그래도 처음인데 괜찮은 건가. 그리고 어쩐지 제가 넘어간 것도 같았다. 이번에는 정말 해 준다고 했는데 또 받기까지 하잖아. 지훈은 순간 휘몰아치는 물음 앞에서 머리꼭지까지 뜨거워졌다.
하지만 그렇다고 더 마다할 수 있었던 것도 아니다. 먼저 옷을 벗다 만난 해원의 살랑이는 눈웃음 때문이었다. 정말이지 살며 누군가의 얼굴에 휘둘려 본 적이 없었는데, 진심으로 반해서 하는 연애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결국 지훈은 그 역시 몸을 일으켜 약한 전기가 찌릿찌릿 흐르는 손으로 바지의 훅을 풀었다.
서해원은 권지훈의 몸을 그 자신보다 더 잘 안다. ‘정말 많이 한’ 섹스 덕분이다.
애초에 해원은 섹스할 때 지훈에게 공들이는 걸 좋아했다. 틈만 나면 머리끝부터 발가락 끝까지 입술로만 그 온도와 촉감을 확인할 수 있다는 것처럼 키스했고, 진득하게 애무해 새로운 성감을 알려 주었다.
하지만 역시 그중 가장 많이, 자주, 그리고 오래 그의 입술이 매달린 건 지훈의 다리 사이일 거다. 그래서 저도 똑같이 해 주고 싶었는데―
“흐응……!”
턱이 뻐근할 정도로 커다란 성기를 입에 문 지훈은 순간 먹먹한 신음을 삼켰다. 제 귀두 끝을 집중적으로 긁는 두툼한 혀의 감촉 때문이었다. 허리 아래부터 타고 오르는 전율 앞에서 허벅지를 벌벌 떨고 있자 다정한 듯 엄한 꾸중이 뒤따랐다.
“해 준다면서. 제 거 입에 물기만 하고 한참이나 놀고 있어요, 지훈 씨.”
“―아, 흣, 그으, 죄, 죄송…, 합니다.”
지훈은 답지 않게 허둥지둥 대답했다. 언제나 반듯하고 똑 부러지게 말하던 평소와 비교하면 같은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의심스럽지 않을 정도로 떨리는 목소리기도 했다.
그러나 목 안으로 낮게 웃은 해원은 지훈이 왜 저렇게 당황했는지 안다. 허둥지둥 입에서 성기를 빼고 말하려다 타액으로 질척해진 커다란 기둥이 뺨에 길게 문질러진 탓이다. 해원은 한껏 흥분한 연인의 성기를 다시 크게 삼키기 전, 그가 가장 부끄러워할 말을 소곤거렸다.
“역시 지훈 씨는 혀를 너무 좋아해요.”
감히 아니라는 부정은 하지 못한다. 해원이 다시 제 입 안으로 성기를 깊게 처박아 부드럽게 조이고 빨기 시작하자 기쁨에 들떠 옴죽대는 입구를 멈출 수 없었기 때문이다.
지훈은 탄탄한 둔근에 각이 질 정도로 힘을 주었다 풀기를 반복하며 숨을 헐떡였다. 제 구멍의 움직임이 숨이 닿을 정도로 가까운 해원의 코앞에서 모두 보일 거라고 생각하면 새삼스러운 수치심에 머리가 어지러웠다.
하지만 그저 부끄러워하기만 할 수는 없었다. 그 역시 해야 할 일이 있었기 때문이다.
“우읍, 응…, 읏.”
언제나 너무 심하게, 때론 과하게 크다고 생각은 했었다. 그야 해원의 표현을 빌려 ‘내 거가 몸속 어디까지 들어가는지 누구보다 잘 아는 사람’이기에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그러나 아무리 몇 번이나 뒷입으로 삼키고, 먹고, 빨고, 물어보았다 한들 한 번도 써 보지 않은 앞은 좀 사정이 달랐다.
“읏, 으읍…!”
손으로 쥐거나 뒤로 꿰뚫렸을 때는 채 몰랐다. 그저 조금 삼키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 막힐 정도로 커다랗고 굵었다니. 대체 이제껏 그 수많은 섹스 동안 이렇게 커다란 게 어떻게 뿌리 끝까지 처박혔던 건지 짐작도 안 간다.
결국 지훈은 거대한 성기를 채 다 물지도 못하고 어설피 머리를 움직였다. 제가 이제까지 해원에게 받았던 기분 좋은 펠라티오를 떠올리면서.
잘 움직이고 있는지 자신은 없었지만, 정성껏 빨고 혀를 움직일 때마다 굵은 기둥의 단단함이 더욱 선명해졌다. 정확히는 모양과 온도, 맛과 냄새, 감촉… 입 안의 점막을 통해 느껴지는 모든 것이 진해져 갔다. 그걸 깨닫는 순간부터 아랫배 깊숙한 곳에서부터 시작된 들뜸의 빈도 역시 잦아졌다.
물론, 연인의 흥분을 삼키고 있던 해원이 그걸 모를 리 없었다.
“아, ―후으응!”
해원이 제 기둥을 뱉어내자 저도 모르게 긴장을 풀며 늘어졌던 지훈은, 다음 순간 무방비하게 이완된 입구에 와 닿은 두툼하고 축축한 살덩이에 크게 펄떡였다. 심지어 그 와중에도 자신이 이를 세워 민감한 피부를 아프게 할까 싶어 해원의 성기를 급하게 입에서 빼냈건만, 다정한 배려는 지독한 자극으로 돌아왔다.
“후으, 흑…!”
엄밀히 따지면 해원이 좁은 구멍을 혀로 적시는 건 처음 있는 일도 아니다. 하지만 지금 이 순간만큼은 따뜻하고 단단한 혀가 민감한 입구를 건드리는 걸 유독 참기 힘들었다.
헐떡대며 고개를 움직일 때마다 머잖아 그곳에 처박힐 성기가 얼굴에 비벼지며 제 타액인지 해원의 선액인지 모를 것이 단정한 얼굴을 번들거리게 했다. 어떻게든 쾌감에서 피해 보려 몸을 옆으로 틀어 보아도 소용없었다. 해원은 도망치려는 골반을 더욱 단단히 붙잡은 채 고개를 깊게 파묻으며 젖은 소리를 더해갔다.
덕분에 말 그대로 미칠 것 같아진 건 지훈이었다.
차 안에서 해원에게 다리를 벌렸을 때의 권지훈과 지금의 권지훈은 완전히 다른 사람이다. 제가 조금 전 말 그대로 ‘맛을 본’ 기둥이 저 작은 입구를 한껏 벌리며 들어오고, 쑤시고, 헤집고, 짓누를 때의 감각이 어떤지 너무도 잘 안다.
“제발, 아, 흐윽, 그만하고, 빨리…!”
“……박아 달라고 보챌 줄도 알고. 좋네.”
흥분으로 살짝 쉰 듯한 낮은 목소리가 귓가에 걸리자 팔뚝 위의 솜털이 곤두서며 소름이 올라왔다. 하지만 그건 긴장이나 두려움과는 완전히 다른 종류의 것이다. 간신히 엉덩이만 쳐든 채로 늘어지듯 엎드린 순간, 지훈은 곧이어 깊게 처박힐 쾌락을 상상하며 헐떡였다.
하지만 그 어떤 상상도 언제나 실제보다는 못했다.
“―힉, 아아, 앗!”
살갗이 서로 부딪칠 정도로 뿌리 끝까지 밀고 들어온 성기는 어느 때보다 깊었다. 하지만 지훈은 그것에 놀라거나 겁을 먹기는커녕 발가락 끝까지 꽉 조이며 더운 숨을 터트렸다. 지금껏 막연하게 크다, 혹은 박힐 때마다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치받는다 생각했던 성기가 정확히 제 몸의 어디에 있는지 느껴지는 것 같았다.
“아, 아, 흐읏, 앗 ……아!”
좁은 길을 열어 벌리고, 눈앞을 하얗게 만드는 무언가를 건드리고, 그러다 더 깊게, 깊게. 조금 더, 안쪽. 짓눌러지면 저도 모르게 줄줄 싸게 되고 마는 어떤 곳까지.
퍽, 퍽, 살과 살이 부딪치는 젖은 소리에 서서히 속도가 붙을 때마다 지훈은 힘이 풀려 늘어진 몸으로도 예쁜 소리를 터트렸다. 제 아래서 이성을 잃고 기뻐하는 모습을 고스란히 보여 주는 연인을 앞에 두고 덩달아 미치지 않을 남자는 없을 거다. 당연히 해원 역시 예외는 아니었다.
한없이 달콤했던 연인으로서의 첫 섹스는 어느 순간부터 마치 짐승의 교미와 다름없는 행위로 궤를 달리하기 시작했다. 하지만 두 사람 중 누구도 그 넘실대는 쾌락을 거부하지 않았다.
“…아, 하아읏!”
잡아끄는 대로 움직이는 늘씬한 몸을 비스듬히 세우고 다리 하나를 벌려 잡은 채 깊게 찔러넣자 지훈은 고개를 뒤로 살짝 꺾기까지 한 채로 힉, 힉, 급한 숨을 쉬었다. 체위 때문인지 유독 선명하게 느껴지는 압박감 때문이었다. 무의식중에 아랫배를 만져보자 쾌감에 덜덜 경련하는 제 복근이 만져졌다.
귓가로 해원의 더운 속삭임이 들렸다.
“왜. 여기에, 있는 거 같아?”
사실 평소 같았다면 이런 짓궂은 음담패설에 화들짝 놀라 아니라며 고개를 저었을 것이다. 하지만 쾌감에 늘어진 몸만큼 이성마저 흐물흐물해진 지훈은 웃음기가 실린 물음에 솔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분명 그건 그렇지 않아도 불붙은 지금 투입되기에는 실로 부적절한 장작이었다.
그걸 증명하듯 열에 들뜬 해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확인해 볼까. 지훈아.”
지훈은 제가 들은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엄밀히 따지면 이해하지 못해도 상관없었다. 지훈의 손등 위로 깍지끼어 손을 잡은 해원이 그걸 친절하게 잡아끌어 보기 좋은 근육이 새겨진 복근 아래, 줄줄 액을 흘리는 성기보다는 조금 위의 어딘가를 꾸욱 힘주어 눌렀기 때문이다.
잠시 숨을 고르듯 멈췄던 움직임이 거세게 시작된 것도 그 때였다.
“흐아, 아, 흐아앙, ―히읏, 아아!”
서해원은 여느 때처럼 제가 한 말을 충실하게 이행했다. 단어 그대로 쾅쾅 처박는 것만으로도 눈앞이 점멸하는데, 아랫배 어딘가까지 손이 겹쳐진 채로 짓눌리자 쾌감이라는 단어로는 다 표현할 수 없는 무언가가 머리를 헤집어 댔다. 입은 저절로 헤, 벌어지고 저도 모르게 눈물마저 줄줄 흘렀다.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커지던 교성 역시 어느 순간부터는 제대로 된 신음 대신 아, 아아, 하는 입 모양으로만 바뀌어 온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더 이상은 들어갈 수 없어, 안 돼, 라고 생각하는 순간, 모양, 온도, 맛, 냄새, 감촉 그 모든 것을 배우게 된 성기가 가장 깊은 곳에 깊게 찔러 넣어졌다. 지훈은 강제로 짓누르듯 만지고 있는 제 아랫배 깊숙한 쪽 어딘가로 연인의 흥분이 토해지고 있음을 직감했다.
“아, 하아, 아…….”
지훈의 반듯한 어깨가 옅게 경련했다. 정말 미친 것 같지만, 제 안으로 해원의 정액이 들어와 아래가 꽉 차는 듯한 느낌마저 들어서였다. 그건 이제까지와는 또다른 자극이었다. 지독한 후희에 밭은 숨을 몰아쉬다 바라본 해원 역시 고운 눈썹을 살짝 찌푸리고 있었다.
키스하고 싶어.
지훈은 그렇게 생각했지만, 도저히 손가락 하나 까딱할 힘이 없었다. 하지만 괜한 걱정이었다. 눈치 빠른 연인은 눈이 마주치자마자 당연하다는 듯 허리를 숙여 쪽, 다정하게 입을 맞춰 왔으니.
* * *
의주시의 작은 빵집 <도란>.
벌써 22년째 한 자리를 지키고 있는 이곳은 맛집으로 유명한 가게다. 제일 유명한 건 단팥빵이지만, 하나하나 모두 맛있다 보니 같은 동네 사람조차도 늦게 오면 이미 다 팔려버려 먹기 힘들 정도였다.
마찬가지로 22년째 그대로라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좋아지는 간판을 빤히 올려다보던 지훈은, 보조개가 쏙 들어가는 미소를 건 채로 문을 잡아당겼다. 그러자 저 안쪽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곧장 들려왔다.
“―죄송합니다. 오늘은…… 어머, 어머, 어머!”
“저 왔어요, 엄마.”
“지훈이 너 어떻게 연락도 없이!”
지훈은 저를 꼭 끌어안는 따뜻한 팔 앞에서 눈까지 꼭 감으며 웃었다. 이 작은 공간에는 그리운 모든 것들이 있다. 고소한 빵 냄새. 포근한 온기. 듣기 좋은 음악.
이전 회사에서 마음고생을 하며 눈에 띄게 살이 빠졌던 탓에 온갖 핑계를 대며 오지 못했었지만, 사실 매일같이 이곳을 마음 한편에 두고 버텼었다.
“죄송해요. 너무 오랜만에 왔죠.”
“반년도 넘었지! 아빠 기일 때 온 다음 추석엔 안 내려왔으니까. 어휴, 우리 아들. 어디 얼굴 좀 봐. …전보다 살 좀 빠진 거 아니니?”
“요새 저 얼마나 잘 먹는데요. 앞으로 정말 자주 올게요.”
내일모레 서른인 180cm의 신체 건장한 성인 남자도 어머니의 앞에 서면 열댓 살 아이나 다름없어진다. 지훈은 예전과 다를 것 하나 없는 가게를 둘러보았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건 텅텅 빈 가판대다. 어머니의 가게가 유명해졌다는 건 알았지만, 성인이 된 이후로 쭉 떨어져 지냈던 탓에 그 인기를 채 다 실감하지 못했던 지훈은 순수한 감탄을 터트렸다.
“우와. 벌써 오늘 장사 끝났어요?”
“으응. 보통 2시면 마감이지. 그래도 아들 먹일 거 하나 없을까. 얼른 들어가자. 맛있는 거 해 줄게. ……응?”
지훈의 어머니가 제 아들의 뒤에서 그보다 조금 더 삐죽 큰 남자의 존재를 깨달은 건 그 때다. 지훈 역시 어머니의 시선에 반가움이 깃든 걸 깨닫고는 다정한 미소를 걸었다. 평소에도 눈썰미가 좋던 분이셨으니, ‘김도현’이었던 해원을 알아본 모양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말이다.
하지만 그건 지훈의 귀여운 착각이었다.
“세상에, 오늘 무슨 날인가? 서울 손님도 왔네!”
그렇지 않아도 오랜만에 하나뿐인 아들을 만나 한껏 높아졌던 목소리는 반가운 손님 앞에서 유독 살갑게 이어졌다. 한편 지훈은 멍하게 제가 들은 단어를 곱씹기에 바빴다.
“‘서울 손님’……이요?”
“으응. 우리 가게에 달마다 찾아오는 단골이셔.”
“‘달마다 찾아오는’, ‘단골’?”
어머니가 모르고 내놓은 힌트를 하나하나 콕 집어 되묻는 연인의 목소리 앞에서 해원은 답지 않게 시선을 한곳에 두지 못했다. 괜히 천장 어딘가를 봤다가, 텅 빈 가판대를 봤다가, 마지막엔 슬쩍 솜털이 곤두선 팔뚝을 쓸기도 하면서 말이다.
“멀리서 와 주셨는데 뭐가 없어서, 이를 어떡하죠? 죄송해라―”
“…….”
“…….”
“아! 그나마 있는 거라곤 쿠키 한두 종류뿐인데. 어떻게, 이거라도 제가 좀 싸 드릴까요? 그냥 가져가세요.”
황당하다는 눈을 감추지 못하는 아들과 그 시선을 필사적으로 피하는 ‘서울 손님’. 그 두 남자 사이의 기류를 짚어내지 못한 지훈의 어머니는 어느새 저쪽에서 쿠키를 여러 개 집어왔다.
덕분에 궁지에 몰린 건 역시 서해원이었다. 그는 지훈의 어머니에게 감사하다는 인사도, 그렇다고 얼결에 건네받은 쿠키 봉투를 마다하지도 못한 채 어색하게 쩔쩔맸다.
쐐기나 다름없는 물음이 들린 건 그 때다.
“변호사님.”
“…….”
“진짜 너무하신 거 아닙니까?”
해원의 귀가 붉게 물드는 모습을 보는 건 침대 위가 아니면 쉽지 않은 일이다. 지훈은 차마 눈조차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는 애인을 보며 고개를 삐딱하게 기울었다. 왠지 호텔에서 나올 때부터 유독 더 긴장한 것 같더라니. 이런 비밀이 있었을 줄은 또 몰랐다.
“변호사님?”
“…….”
“어머, 세상에. 혹시… 서로 아는 사이?”
그제야 무언가 이상한 걸 깨달은 물음은 자못 천진하게마저 들렸다. 지훈은 오늘 하루가 다 가도 먼저 입을 떼지 않을 것 같은 해원을 보며 짧은 한숨을 푹 내쉬었다. 물론 거기엔 애틋하기까지 한 웃음이 한가득 배어 있었다.
“엄마. 엄마도 기억하실 거예요.”
“응? 뭘?”
“왜, 저 초등학교 때요…….”
오랜 애정이 깃든 다정한 목소리가 이어지면 이어질수록, 어디 가서 움츠러들 일 따위 없던 장신의 남자는 눈에 띌 만큼 뻣뻣하게 굳어갔다. 처음엔 분홍빛으로 시작했던 귀 역시 어떻게 감출 수도 없을 정도로 새빨갛게 변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다 목덜미까지 뜨거워지기 시작했을 때.
서해원은 그 커다란 덩치가 무색하게 제 어깨를 조금 넘는 여자의 끌어당기는 힘 앞에서 몸이 휙 기울어졌다. 순간 힘이 빠진 손에서 떨어진 쿠키 봉투를 얼른 대신 잡은 지훈이 옅게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