에필로그
“후우……. 빼먹은 건 없고.”
지훈은 전신 거울 속 제 모습을 다시 한번 뜯어 살피며 긴 한숨을 내쉬었다. 중고신입으로 입사해 2개월의 집체 교육이 끝나고, 오늘은 정말 새로운 회사로의 첫 출근이다. 그것도 이직 희망 1순위로 꼽았던 리델의 신입 사원으로서다.
해원이 맞춰준 슈트를 꼼꼼히 차려입고 나자 나가기로 예정했던 시간보다 한 시간 이르게 준비가 끝났다. 알람이 울리기도 전에 꼭두새벽부터 눈이 떠져 일어난 탓이다.
마지막으로 한 번 더 살펴보려던 그 때, 지훈은 전신 거울을 통해 문가에 비스듬히 기대 있는 남자를 발견했다. 평소였으면 곧장 눈이 마주쳤을 그는 무슨 일인지 깊은 생각에 잠겨 자신을 향한 시선조차 모르는 눈치였다.
이내 장난기 어린 미소를 건 지훈의 발뒤꿈치가 슬그머니 들렸다.
“―아.”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하십니까?”
서해원을 놀라게 하다니. 참 드물고 재미있는 경험이 아닐 수 없다. 낮게 웃으면서 손을 잡자 퍽 심각하게까지 보였던 입가에도 근사한 미소가 걸렸다. 해원은 서로의 온기를 주고받는 손장난을 치면서 제 고심의 이유를 밝혔다.
“권지훈을 리델에서 꼭 빼앗아 와야겠다는 생각요.”
“저 오늘이 첫 출근인데요?”
“그러니까.”
고운 눈썹이 살짝 까딱했다.
“지훈 씨 회사가 방심 같은 걸 했다간 곧장 채 올 거라는 소리죠.”
중고신입이 듣기에는 과분하기까지 한 엄포 앞에서 지훈은 멋쩍게 턱을 긁적였다.
권지훈의 최종 이직 성적표는 꽤 준수하다. 세 곳을 최종 합격했고, 그중에는 완전히 면접을 망쳤다고 생각했던 한터플래닛도 포함되어 있었다. 심지어 한터플래닛은 정중한 입사 거절 의사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따로 연락까지 할 정도였다.
해원의 입술이 맞잡은 연인의 손가락 끝 하나하나에 부드럽게 떨어졌다. 그 간지러운 감각을 조용히 즐기던 지훈은, 이제껏 마음 한편에 밀어두고 모른 척했던 생각을 툭 내뱉었다.
“사실, 조금 무섭습니다.”
여전히 손가락 끝에 입 맞춘 채인 해원의 갈색 눈동자가 조용히 움직였다.
“저 잘할 수 있겠죠.”
“누구보다도.”
“만약에 이전 회사 같은 일이 또 생기면… 그땐, 정말 어떡하죠.”
“조금 전에 못 들었어요? 권지훈을 리델에서 빼앗아 올 거라니까.”
그저 한없이 곧고 곧아서 약한 말 한 번 할 줄 모르는, 그래서 더 사랑스러운 연인. 해원은 몇 달 내내 혼자 속으로 삭이다가 출근을 코앞에 두고서야 어리광을 부리는 지훈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저항 없이 폭 안겨드는 늘씬한 몸은 더없이 흡족했다. 해원의 말이 이어졌다.
“―그리고 어머니께서도 말씀하셨잖아요. ‘회사에서 자꾸 더럽게 굴면 의주 내려와라. 가게나 더 키우자.’”
지훈이 자신의 퇴사와 그 이유를 어머니에게 밝힌 건 해원을 따라 의주로 내려갔던 때였다. 덕분에 지훈은 그날 언제가 마지막이었는지도 기억이 안 나는 꾸중을 들었다. 당연히 힘들게 들어간 회사를 맥없이 나왔다는 이유 때문은 아니었다.
‘어떻게 그렇게 힘든데, 엄마한테 말 한마디 안 할 수가 있어.’
지훈은 제 어머니의 눈시울이 붉어진 걸 보고 덩달아 코가 빨개졌고, 결국 모자는 저녁을 먹다 같이 훌쩍훌쩍했다. 해원은 그 사이에서 부지런히 티슈와 물을 나르며 다정한 말로 두 사람을 달랜 덕분에 지훈에게 무단 외박의 벌점을 감형받았고 말이다.
“비빌 언덕만 두 갠데 걱정이 너무 많은 거 아니신지.”
“역시 그런 걸까요.”
“네에. 역시 그런 겁니다.”
해원이 연인의 말투를 흉내 내며 콩, 하고 이마를 부딪쳤다. 제아무리 진지한 고민이래도 그 다정함 앞에서 녹아내리지 않을 방법은 없었다. 결국 지훈은 볼우물이 쏙 들어가는 미소를 걸었다. 이내 누가 먼저 시작했는지 따질 필요조차 없는 부드러운 입맞춤이 이어졌다.
“응….”
키스할 때 눈을 감는 건 살과 살이 닿는 감촉을 더 선명히 느끼고, 상대의 숨을 더 귀 기울여 듣고 싶어서일 거다. 지훈은 그 사실을 해원과의 입맞춤에서 배웠다. 유독 말랑하고 촉촉한 살덩이가 닿으면 기분이 좋아지고, 서서히 열이 오르는 숨소리를 들으면 목 뒤가 짜릿하게 땅긴다.
그리고 그다음은…….
지훈은 실눈을 뜨고 제 아랫입술에 살짝 이를 세워 부드럽게 빨아들이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해원의 하얗고 투명한 피부는 이렇게 서로의 숨을 빼앗아 입을 맞출 때면 쉬이 연한 분홍빛이 돈다. 이렇게 완벽하고 아름다운 사람이 제 것이라니. 차마 들킬 수 없는 만족감이 들었다.
마음속 한 편에 피어나기 시작한 소유욕을 아직 온전히 자각하지 못한 지훈은 키스를 멈춰 세울 핑계를 애써 만들어냈다.
“하아, 잠시만요. 옷, 구겨집니다.”
“아침엔 지훈이 네 옷 흐트러지게 한 적 없는데.”
……오늘도 미쳤다. 지훈은 나직하게 흘러나온 목소리 앞에서 마른침만 꼴깍 삼키며 생각했다. 그렇지 않아도 근사함이 과했던 남자는 요즘 들어 말 한마디로 사람을 들었다 놨다 한다.
특히 제일 심장을 덜컹거리게 하는 건 ‘지훈 씨’ 대신 이름을 부르며 말을 놓을 때다. 한편으론 저도 이제 슬슬 다르게 불러야 하지 않나, 하는 달콤한 고민에 빠지게도 하고 말이다.
해원 씨? 해원… 형?
사실 따지고 보면 예전부터 형이라고 불렀었으니 이상할 것도 없는데. 왜 이렇게 그 단어만큼은 쓰기가 부끄러운지.
형을 못 쓰는데 자기야, 같은 건 당연히 꿈도 못 꾼다. 결국 지훈은 옅은 잔기침까지 하면서 가장 편한 호칭을 선택했다.
“크흠, 제, 제 옷 말고, 변호사님 옷이요.”
오늘따라 유독 허둥지둥하는 단정한 얼굴을 내려다보는 해원의 눈이 가늘어졌다. 그건 즐거운 것 같기도 하고, 보란 듯이 유혹하는 것 같기도 한 눈이었다. 낮은 목소리가 속삭이듯 이어졌다.
“얼마든지 엉망으로 만들어 봐.”
“―저 그냥 일찍 출근할 겁니다!”
“왜. 나랑 같이 가. 응?”
“출근은 따로, 퇴근만 같이! 약속했잖습니까! 끝날 때 문자 하겠습니다.”
고지식한 연인은 정식 출근 첫날부터 아침 지옥철을 타게 하고 싶지 않아 은근히 던진 말에도 빈틈 하나 없었다.
결국, 언제나처럼 먼저 손을 든 건 해원이었다.
“우리 지훈 씨는 오늘따라 매정한 애인이네.”
“…….”
자세를 비스듬히 한 채로 지훈의 어깨에 턱을 괸 해원은 한숨 쉬듯 중얼거렸다. 사실 따지고 보면 퇴근 시간에 낯선 사옥 앞에서 죽치고 있는 것이야말로 그가 가장 잘하는 것 중 하나다. 해원은 머릿속으로 지훈의 새로운 사옥과 제 회사와의 거리를 셈하며 출근도 전에 퇴근 계획을 짰다.
하지만, 잠시 조용히 있나 싶던 지훈이 슬쩍 고개만 틀어 연인의 머리맡에 입술을 떨어트린 것도 그 때였다.
“사랑해요.”
“…….”
“이따 봬요, 서해원 변호사님.”
가볍게 닿은 입술과 그 숨이 짜릿할 정도로 따뜻했다. 그러나 역시 가장 좋은 건 세상에서 가장 달콤한 네 글자다.
해원은 대답 대신 입술을 붙여 웃었다. 완벽한 아침이었다.
<러브 카운트다운> 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