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2화 (2/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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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문을 지나 가파른 내리막 입구까지 뛰어온 지예준은 저를 찾으려 두리번거리는 강선을 두고 빌라 건물 사이에 숨어 있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숨을 죽이며 주저앉자 걸음 소리가 제 쪽으로 다가오는 것이 느껴졌다.

“헉, 어디, 어디, 간 거야. 하-”

웃옷을 팔락거리며 소매로 땀을 훔친 강선은 본능적으로 빌라 건물을 기웃거렸다.

주차장을 디디고 있는 기둥 뒤로 검은색 옷자락이 살짝 나타남과 동시에 주차된 차 표면으로 사람 인영이 비췄다.

“지예준!”

타다닥, 소리가 나도록 그쪽을 향해 뛰어가자 숨을 삼키는 소리와 함께 튀어나온 지예준이 강선을 밀치고 다시 뛰기 시작했다.

“저게, 진짜…!”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학교로 올라가는 사람들 틈을 잘도 피해 다니며 요령 좋게 내리막길을 뛰어가는 지예준을 쫓아 강선 또한 다시 발을 구르기 시작했다.

아무리 체력 좋은 지예준이라 해도 끝은 있는 법. 남들 저리 가란 수준으로 강한 끈기의 강선은 누가 이기나 재 보자는 마음으로 내리막길을 뛰어갔다.

이미 많은 사람이 저와 지예준의 레이스를 보고 수군거렸지만, 어차피 내일 되면 까먹을 얼굴들이니 아무 상관 없었다.

“준아! 헉, 얘기 좀 하자니까?!”

“오지 마, 강선아!”

“왜에-!”

주택가 사이에 난 내리막길은 끊임없이 계속됐다.

그 때문일까. 속도에 속도를 붙인 다리는 점점 강선의 의지를 벗어났고, 물기 남은 맨홀 뚜껑과 신발이 닿으면서 강선은 그대로 미끄러져 허공으로 날아오르고 말았다.

“으악-!”

미끄러지면서 접질린 발목을 채 눈치채기도 전에 넘어진 강선이 내리막길을 데굴데굴, 굴렀다. 뒤에서 들려오는 비명 소리에 고개를 돌린 지예준의 시야로 바닥에 엎드려 일어나지 못하고 있는 강선의 모습이 들어왔다.

그의 주변에 있던 사람들이 ‘어떡해’, ‘아프겠다’ 하며 술렁였다.

잠시 사고가 멈춘 지예준은 제 옆에서 ‘기절한 거 아니야?’ 하는 목소리에 퍼뜩 정신을 차렸다.

“……강선아!”

그보다 한참을 내려온 지예준이 다시 길을 올라가 엎어진 강선에게 순식간에 도착했을 때, 강선의 몸이 조금씩 꿈틀거렸다.

“괜, 괜찮아? 강선아…….”

“……목.”

“어떡, 어떡하지. 일어날 수 있겠어?”

“……목… 발목… 아악!”

여전히 일어나질 못하고 있는 강선의 팔을 잡고 일으키려 하니 강선은 소스라치게 몸을 떨며 지예준의 팔을 쳐 냈다.

“나, 발… 발목 좀…….”

“강선아! 너, 피…….”

그의 왼쪽 턱엔 작은 핏방울이 맺혀 있었고, 왼쪽 손바닥은 거친 바닥에 갈려 흙과 핏자국으로 가득했다. 넘어지면서 반사적으로 오른손을 보호하느라 다친 흔적이었다.

일어나고 싶어도 일어날 수가 없었다. 시큰거림을 넘어 부러질 듯 아픈 발목을 부여잡고 웅크리고 있자 제 옆에서 어쩔 줄 몰라 하던 지예준은 강선을 번쩍 들어 길가로 뛰어갔다.

너무도 아파하는 강선을 따라 구경꾼들의 표정도 구겨졌지만 얼마 지나지 않아 이들은 제 갈 길을 찾아 하나둘씩 떠나기 시작했다.

“아, 씁…….”

“강선아, 미안해. 병원 가자, 응?”

대답할 겨를도 없어 고개를 주억이는 강선을 잠시 앉혀 둔 지예준은 큰길로 나갈까 하다 이내 고개를 젓고는 핸드폰으로 택시 어플을 켜 근처에 있던 택시를 불러냈다.

흙과 먼지로 가득한 옷을 털어 주면서도 물밀 듯 들이닥치는 죄책감에 지예준의 얼굴은 어둡다 못해 넘어진 강선보다도 더 불쌍해 보일 지경이었다.

발목을 찌르는 통증에 강선의 이마에서 연신 식은땀이 흘렀다.

인대 한두 개가 나간 건 확실했다. 끊어졌는지는 몰라도 아무튼 늘어났거나 크게 손상된 게 분명한 통증이었다.

누가 만지는 걸 그렇게 싫어한다면서 또 이번엔 무슨 자신감으로 저를 들고 여기까지 왔는지 궁금했지만 이렇게 아픈 와중에 이런 생각을 하는 자신이 웃겨 강선이 짧게 콧김을 뱉었다.

지예준은 연신 강선의 옷이며 손바닥을 조심스레 털어 내고 있었다. 그 얼굴이 곧 눈물을 쏟을 것만 같아 뭐라 화를 내기도 그랬다.

손바닥과 턱이 까졌어도 발목만큼 아프지는 않아 참을 만했지만, 제 손바닥을 어루만지는 지예준의 손길이 너무도 애처러워 보여 강선은 택시가 올 때까지 발목을 살피며 가만히 앉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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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뼈는 괜찮은데, 인대가 늘어난 것 같네요.”

검사 결과를 보던 의사는 대수롭지 않다는 듯 강선에게 일주일 치 염증약과 반 깁스 처방을 내렸다.

일단 한 달 정도 지켜보다가 그래도 계속 아프면 MRI를 찍어 봐야 한다고 했지만, 강선은 40만 원을 웃도는 MRI 비용에 그것을 못 들은 척했다.

많이 불편하면 목발을 쓰는 게 어떻겠냐고도 했지만, 목발을 짚고 나타난 저에게 무슨 일이냐며 물을 수많은 사람들을 생각하니 골치가 아파 강선은 반 깁스만 받는 걸로 결정했다.

치료실을 나오자마자 양팔에 두 사람분의 가방을 짊어진 지예준이 빠른 걸음으로 다가왔다.

“……뭐라셔?”

“인대 늘어났다는데.”

“……아.”

“반 깁스 하고 한 달 지내보라니까 엄청 심각한 건 아닌 것 같아.”

정작 위로를 받아야 하는 건 강선 자신임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까부터 영 고개를 들지 못 하고 있는 지예준의 어깨를 토닥이는 대신 괜찮다는 말로 위로했다.

지예준의 시선이 반창고를 붙인 왼쪽 턱에 닿았다가 다시 땅으로 떨어졌다.

“……미안해.”

“그러니까 누가 그렇게 도망가래?”

“……미안해…….”

이러다 곧 얼굴까지 지하로 꺼지겠다 싶어, 강선은 발을 절뚝이며 병원 소파로 향했다.

“잡, 잡아 줄게.”

“됐어, 뭘.”

강선은 저를 부축해 주겠다는 말에도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지난밤, 제 손을 거세게 쳐 내던 손이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강선 님, 수납 도와드릴게요.”

데스크에서 들리는 목소리에 지예준이 지갑을 들고 곧장 일어났다.

모든 일에 부끄러움을 타는 그의 성격 탓인지, 아니면 그에게 음험한 생각을 품고 있어서 그런지, 저와는 다른 말끔한 뒷모습에도 그리 화가 나지는 않았다.

“……앞으로 병원 올 때마다 나랑 같이 오자.”

수납을 마친 그가 다시 가방을 들쳐 메며 말했다.

굳은 결심을 한 것처럼 보이는 얼굴에 풋, 하고 웃음이 나왔다.

“네가 내 부모님이야?”

“강선아… 제발.”

지예준을 쫓다 넘어진 건 맞지만 병원에 갈 때마다 그와 동행할 필요까지는 없었기에 강선은 됐다는 표시로, 손을 내저었다.

“서로 시간도 잘 안 맞을 텐데, 매번 어떻게 같이 와.”

“시간 낼 수 있어…….”

“어이구, 시간 많은 사람이 그렇게 얼굴 보기가 힘들었어?”

“……미안해…….”

지예준은 강선의 손을 들어 올려 제 팔뚝을 잡게 했다.

이건 그가 먼저 한 행동이었으니 강선은 그의 팔뚝을 단단히 잡고 한 걸음, 한 걸음 발을 디뎠다.

깁스 덕인지 다행히 걸을 만해 다행이라 생각하며 강선은 저에게 보폭을 맞추는 이를 올려다보았다.

“그래. 병원 같이 가자.”

“으응. 고마워…….”

고마울 일이 전혀 아님에도 고맙다고 하는 그가 퍽 귀여웠다.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갈래?”

“응.”

발목을 다쳤으니 앞으로 일상생활이 불편할 텐데도 오랜만에 받아 보는 보살핌에 마음이 약해진 저에겐 어이가 없었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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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까지 데려다주는 겸, 강선은 지예준을 붙잡아 두고 그가 놓고 갔던 옷들을 돌려주었다.

제 옷을 보자마자 그는 또 얼굴을 한껏 붉히긴 했지만, 그 밤에 상의를 홀딱 벗고 복도를 활보했을 이를 생각하니 그럴 만하다 싶기도 해 강선은 지예준이 더 부끄러움을 느끼기 전에 빨리 집으로 돌려보냈다.

욕실에 들어가 거울을 보니 모습이 아주 가관이었다.

실컷 식은땀을 흘린 얼굴은 창백했고, 뺨엔 하얀 반창고가 덕지덕지 붙어 있었으며, 흙먼지에 구른 머리카락은 퍼석했다.

“그지가 따로 없네.”

씻는 게 좀 불편하기는 해도 그나마 손바닥과 턱 상처가 그리 크지 않아 다행이었다.

단순히 인대가 늘어난 게 아니라 뼈나 다른 곳에 문제가 생겼더라면 이야기는 달라졌을 테지만.

발에 물이 닿지 않도록 뚜껑 내린 변기 위에 걸쳐 둔 채 어찌저찌 샤워를 끝낸 뒤, 탈부착이 가능한 깁스를 풀고 침대 위를 기어가 몸을 뉘었다.

오늘 하루 종일 지예준을 만나겠다 벼르고 있었는데, 이런 식으로 만나게 될 줄은 꿈에도 몰랐다.

경황이 없어 왜 그가 강선을 피해 다녔는지에 대해 묻는 것도 잊을 정도였으니, 그만큼 정신없는 하루였던 것이다.

머리를 베고 있던 베개를 빼 품 안에 가득 끌어안으며 강선은 지예준을 떠올렸다.

울 것 같은 표정을 지으면서도 꽤나 고집이 있었지. 그리고 단단한 팔뚝이…….

“아니. 팔뚝이라니, 강선아.”

베개에 얼굴을 묻고 웅얼웅얼 혼잣말 하던 그는 오랜만에 쉽게 잠이 들었다.

고된 하루가 달무리를 넘어가는 12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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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

“아, 안녕….”

7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 문이 열리며 이제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얼굴이 나타났다.

엘리베이터 버튼 앞에 서서 벽에 몸을 기댄 강선의 옆으로 지예준이 깡통 로봇처럼 삐걱거리며 탑승했다.

이른 아침 수업 탓에 눈이 반쯤 감긴 강선에게서 작은 한숨 소리가 들려왔다.

“빨리 방학 됐으면 좋겠다.”

“으응….”

지예준은 반대편에 난 거울 너머로 그런 강선을 몰래 쳐다보았다.

짙은 녹색 후드티에 연한 청바지를 입은 모습이 꼭 나무와 하늘 같았다. 제 품보다 큰 후드티에 파묻혀 웅크린 모습은 귀여운 거북이 같기도 했고.

아직 여름 방학이 오려면 한참 멀었음에도 강선은 손가락을 하나하나 접으며 날짜를 셌다.

“넌 방학하면 뭐 할 거야?”

“아버지… 일 도와드리러 가야 해.”

“가업 같은 거야?”

“……아니. 선수단 코치를 하셔서…….”

“와, 멋있다.”

졸린 눈을 떠 의외라는 눈빛을 보내던 강선은 ‘1층입니다’라는 소리에 기대 있던 몸을 바로 세웠다.

“종목은 어떤 거 하셔?”

“야구.”

“프로 야구?”

“아, 아니. 고등학교… 잡아, 강선아.”

지예준은 절뚝이며 앞서가려던 강선의 팔을 붙잡아 저를 잡게 했다.

발목을 다친 지 사흘째. 즉, 지예준이 강선의 시간표에 맞춰 일부러 나오는 것도 사흘째였다.

함께 등하교하겠다는 지예준의 말에 강선은 당연히 거절했지만, 지예준의 고집은 생각보다 더 질기고 억셌다.

엘리베이터를 붙잡고 놔 주지 않던 탓에 하마터면 난생처음으로 지각을 할 뻔했던 강선은 너 알아서 하라며 결국 백기를 들고 말았지만, 대신 하교는 따로 하는 걸로 타협 아닌 타협을 하게 되었다.

등교 중 둘의 모습을 본 한상연은 강의실에 들어서자마자 강선에게 ‘언제 적 신발주머니를 달고 다니냐’며 코웃음을 쳤고, 강선은 그런 한상연의 옆통수에 연적을 날렸다.

이른 아침부터 대강의실로 향하는 걸음은 그리 가볍지 않았다. 물론 발목에 찬 깁스 무게 때문이기도 했지만, 강선이 한 발, 한 발 디딜 때마다 오만 긴장을 하는 팔뚝 때문이기도 했다.

‘이럴 거면 그냥 따로 걷지.’

수학의 언어 수업이 있는 대강의실은 남문과 아주 반대 방향인 고결대 80주년 기념관에 있어 조형관과 도서관을 지나야만 했기에 이들의 집과 가까운 거리가 아니었다.

즉, 지예준의 팔을 잡은 채로 학교의 절반을 가로질러야 한다는 것이다.

평소 같았으면 웬 떡이냐, 하며 실컷 주무르고 쓰다듬었을 만큼 탐나는 팔뚝이지만, 상황이 상황이니만큼 강선은 스멀스멀 나오려는 욕망을 꾹꾹 눌러 담았다.

“오늘도 수영, 알바지?”

“응.”

불편한 걸음걸이에 살짝 호흡이 거칠어진 강선이 후, 숨을 불어 눈을 찔러 대던 앞머리를 걷어 냈다.

“그럼 밥 먹고 가.”

“……응.”

봄바람에 살랑이는 머리카락이 제 볼에 닿을까, 꿀꺽 침을 삼킨 지예준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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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번 시간에 얘기하는 걸 깜빡했는데….”

칼날보다 날카로워 보이는 얇은 안경을 고쳐 쓴 교수가 빔프로젝터에 띄운 것은 ‘고결대 사이버 교육 시스템’ 홈페이지였다.

그는 마우스를 이리저리 움직이더니 곧 웬 영상 리스트가 가득한 링크 페이지를 클릭했다.

“별건 아니고요, 이게… 20분 정도 되는 아주 짧은 영상이에요. 지난주엔 말을 못 했으니 오늘은 팀 활동 없이 그냥 하겠지만, 다음 주부터는 꼭 날짜에 맞는 영상들 시청하고 그걸 토대로 수업을 진행할 테니까 꼭 미리 영상 시청하고 오세요.”

“저걸 굳이 봐야 하나?”

혼잣말하며 쯧, 혀를 찬 강선이 노트 구석에 ‘수학의 언어’, ‘사이버 시스템’, ‘영상’이라 끄적였다.

“끝까지 다 시청하지 않으면 학생들 이름 옆에 ‘불참’이라 뜨니까 이건 무조건 봐야 합니다. 성적에도 30% 들어가요. 알겠죠? 각자 보고 와도 좋지만, 팀원과 함께 하는 수업이니만큼 웬만하면 같이 보는 것도 좋겠죠.”

아니나 다를까, 팀별로 옹기종기 모여 앉은 이들 사이에서 작은 야유가 터져 나왔다. 그것은 강선과 지예준도 마찬가지였다.

곳곳에서 ‘시간도 없는데 언제 모여서 영상을 보냐’, ‘그냥 따로 보자’ 하는 말이 언뜻언뜻 들려와 지예준은 슬쩍 우리도 따로 볼까, 제안할까 했으나 강선에게서 나온 말은 아주 의외였다.

“우리는 같이 볼래?”

“……어?”

멍한 대답에도 강선은 새로 적은 ‘30%’에 빙글빙글 동그라미를 치며 지예준 쪽으로 몸을 숙였다.

그에게서 단 한 번도 나지 않았던 장미 향 같은 게 훅, 끼쳐 들었다.

“30%라잖아. 어차피 같은 건물 사니까 영상은 수업 전날에 보면 되겠고… 아, 너 혹시 성적 같은 거 신경 안 쓰는 편이야?”

큰 눈을 동그랗게 뜨고 올려다보는 얼굴에 지예준은 붕붕 고개를 저었다.

이래 봬도 지예준은 체교과에서 과탑을 앞다툴 만큼 성실한 학생이었으니.

“아냐… 나도 신경 써. 많이.”

“다행이다. 내가 좀 성적에 예민해서.”

그는 조금 부끄럽다는 듯 콧등을 매만지며 두어 번 눈을 깜빡였다. 춤추듯 팔랑이는 속눈썹으로 까만 시선이 고정됐다.

“난, 난 좋아.”

오똑한 콧날이며 작은 입술, 그리고 가지런한 손가락에 자꾸만 눈길이 갔다.

아기자기하다는 말치고는 키가 큰 그임에도, 심지어 같은 남자인데도 강선을 볼 때마다 몸 어딘가가 콕콕, 눌리는 기분이었다.

장미 향이 멀어지고 강선은 다시 정면을 보며 수업에 집중하기 시작해 지예준 또한 앞을 바라보았지만, 신경은 온통 오른편으로 향해 있었다.

스무 명 남짓한 강의실인데도, 앞에선 끊임없이 교수의 목소리가 들리는데도, 꼭 강선과 저만 세상에 남은 것만 같았다.

까만 옷소매와 살짝 닿은 진녹색 소매를 타고 제 안에 있는 무언가가 옮겨지는 기분이었다.

만약 긴장이라는 것에 형체가 있다면, 지예준에게서 흘러나온 것은 무지갯빛으로 일렁이며 강선을 집어삼켰을 테다.

수업 내내 노트 한 페이지를 빼곡히 채운 강선과 다르게 지예준의 노트엔 겨우 ‘수학의 언어란?’이라는 짧은 문장만 남았다.

‘아무래도 이상해.’

역시…. 그날, 샤워를 하다 나온 강선을 보며 파렴치한 생각을 했던 게 문제일까.

이제 와서 다시 돌이켜 본다는 것도 웃기지만, 등교하는 강선을 엘리베이터에서 붙잡고 놔 주지 않았던 며칠 전이 떠올라 절로 손가락이 굽어 들었다.

자신 때문에 다쳤으니 다 나을 때까지 책임져야 한다 여기기는 했으나 괜히 바쁜 사람한테 질척거린 것 같아 가늠할 수 없는 민망함이 몰려왔기 때문이었다.

곧게 자리한 짙은 눈썹 끝이 아래로 추욱, 내려갔다.

“……준아, 왜 그래?”

“어, 어?”

하염없이 그의 소매 끝만 보고 있는데, 다시 장미 향이 가까워졌다.

“뭐 해? 수업 끝났는데.”

그 말에 놀라 주변을 살피니 몇 안 되는 학생 중 절반이 넘게 강의실을 빠져나가고 있었다.

“하하. 졸았어?”

“아, 아… 응….”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빈 노트를 가리키는 강선의 모습에 지예준의 귓불이 빨갛게 달아올랐다.

성적에 신경 쓴다고 말한 지가 언젠데, 벌써부터 불성실한 모습을 보인 것 같아 부끄러웠다. 이래서야 팀 활동은 제대로 할 수 있을지….

“배고프다. 밥 먹으러 가자, 준아.”

오늘은 일찍 끝났으니 집 근처에서 먹자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빠르게 짐을 챙긴 지예준은 강선의 어깨에서 그의 가방을 가져갔다.

“내가 들어도 된다니까.”

“아냐… 들어 줄게.”

“그럼 고맙고.”

계단형 강의실에 천천히 발을 디디는 그를 부축해 주는 순간에도 팔에 닿은 온기가 너무도 뜨겁게 느껴져 지예준은 속으로 1부터 30까지를 셈했다.

지예준이 조금 더 제 감정에 익숙했다면… 글쎄. 어떨진 모르겠지만, 안타깝게도 그는 26년 인생을 살면서 누구 손 한번 잡아 본 적 없는, 청정인 그 자체였다.

“뭔가 좋다.”

“……어어?”

강의실을 나와 남문으로 향하는 와중에도 셈을 멈추지 않고 있는데 돌연 강선에게서 좋다는 말이 나와 지예준의 몸이 움찔, 했다.

“교양 듣는 날엔 밥 친구가 있으니까.”

“아, 으응.”

“평소엔 혼자 먹거나 한상연이랑… 아, 한상연은 과 친구. 아무튼, 걔랑 먹거나 하거든. 근데 이런저런 우연인지는 몰라도 친구 한 명 더 생긴 것 같아서 왠지 좋네.”

조잘조잘, 작은 입술이 호선을 그리며 움직였다.

발이 불편한 그와 보폭을 맞추느라 제 걸음도 평소보다 몇 배는 느려졌는데도 지예준은 남문까지 가는 길이 조금 더 길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만약 실제로 그렇게 된다면 강선의 발목에 더 많은 무리가 갈 거라는 사실에 바로 생각을 철회하기는 했지만.

“……강선아.”

“응?”

“괜찮으면… 저녁에 우리 집 놀러 올래?”

대신, 거의 머리 위까지 다다른 태양이라도 조금만 더 천천히 넘어가길 바랐다.

✲ ✲ ✲

이게 뭐 그리 대단한 말이라고, 하겠지만 지예준에겐 제법 큰 용기를 들여야 할 수 있는 것이었다.

때문에 강선에게서 ‘알겠다’는 대답을 듣게 되었을 때. 그리고 ‘알바 잘하고 와’ 하고 말하던 목소리와 살짝 웃으며 저를 보던 눈동자에 하마터면 지예준은 그 자리에서 주저앉을 뻔했다.

누군가 오금을 치고 간 것처럼 힘이 풀리는 다리를 겨우 지탱하며 먼저 집으로 떠나는 강선이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오랜 시간을 그 자리에 서 있었다.

늘 수업 시작 30분 전에는 센터에 도착하던 그가 처음으로 10분을 남기고 도착한 것도 이 때문이었다.

“선생니임-!”

그로부터 한참이 지났음에도 끊임없이 재생되는 기억에 일렁이는 물결만 멍하니 바라보고 있자, 멀리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이도윤이 자꾸 물 뿌려요!”

“아니에요! 발차기 연습한 거예요!”

“거짓말이에요!”

올해로 초등학교 2학년이 된 도윤과 은서가 서로를 가리키며 언쟁을 벌이고 있었다.

많이 억울한 듯 입술을 쭉 내밀고 있는 은서 옆에서 킥판에 매달린 도윤이 첨벙첨벙 발차기를 했다.

도윤과 은서는 같은 유치원을 나와 같은 초등학교에 다니고 있는 소꿉친구였다.

학부모님께 미리 들어 놓은 이야기론 도윤이 은서를 그렇게나 짝사랑하고 있다는데, 은서는 세상에서 도윤을 제일 싫어한다나.

아무 잘못 없이 둘 사이에 낀 지예준만 불쌍할 지경이었다.

“도윤아~ 연습할 땐 친구들이랑 가까운 곳에서 하면 안 돼. 알겠지?”

다른 친구들 앞에서 혼내거나 야단을 치는 건 아이들에게 아주 안 좋은 영향을 줄 수 있으니 나름 친절하고 부드럽게 말했음에도 도윤은 뾰루퉁한 얼굴로 은서보다도 더 입술을 삐죽 내밀었다.

“연습하고 있는데 유은서가 온 거란 말이에요.”

“안 갔거든?!”

“얘들아, 이제 그만. 서로 사이좋게 지내야지.”

이 나이 때 애들은 그만해라, 사이좋게 지내라, 해도 통하지 않는다는 걸 잘 알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가만히 내버려 둘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생각지도 못한 우연으로 좋은 일자리를 얻게 된 만큼 교생 실습이 있는 5월이 오기 전까진 감사한 마음으로 열심히 일해야 했으니까.

지예준은 서로에게 물을 뿌려 대는 둘을 겨우 떼어 놓고 제각각 흩어져 있던 아이들을 모아 게임 준비를 시작했다.

이제 막 킥판을 사용해 음파음파 호흡을 하며 앞으로 나갈 수 있게 된 아이들이 휘슬 소리에 맞추어 힘차게 발장구를 쳤다. 그러자 일렬로 선 아이들은 옆으로 고개를 내밀어 자기가 응원하는 친구의 이름을 외쳐 댔다.

꺄르르, 웃음소리와 북적북적한 소음, 푸른 물결이 더없이 평화로웠다.

✲ ✲ ✲

“아, 우리 팀 딜러 뭐 하냐? 이걸 못 먹네.”

모니터 화면 중앙에 크게 적힌 ‘패배’를 보자마자 헤드셋을 벗어 던진 한상연이 한 젓가락 남은 짜장 라면을 털어 넣자, ESC 키를 눌러 대전 창에서 나온 강선이 새 대전 참가 버튼을 클릭했다.

“넌 라면 안 먹어?”

“어. 약속 있어.”

푹신한 게임용 의자에 기대 새로 나온 캐릭터 테마를 구경하며 말하자 한상연은 ‘아~ 그 신발주머니?’ 하며 킥킥 웃어 댔다.

“신발주머니 아니라니까.”

“너 발 다치게 한 것도 걔라며. 도대체 어떻게 넘어졌길래 그 지경이 되냐?”

“말했잖아. 내리막길에서 굴렀다고.”

“그래서 걔가 너 수발들어 주는 거야?”

수발이라는 말에 강선의 미간이 좁아졌다.

누가 들으면 꼭 자기가 선량한 지예준을 괴롭히는 줄 알겠다 싶어 그런 것 아니라고 재차 말하려는 찰나, 키보드 옆에 올려 두었던 핸드폰에서 진동이 울렸다.

지예준: 강선아, 나 아르바이트 끝났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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