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식당을 나오기 전, 지예준이 잠시 화장실에 간 틈을 타 계산을 하러 내려온 강선은 카운터를 지키고 서 있는 이에게 카드를 내밀었다.
“서비스가 별로였어? 산적은 하나도 안 먹었더라.”
“변태 새끼같이 그걸 일일이 확인하네.”
“다음에 또 와.”
“올 일 없어.”
지이잉- 하며 나온 영수증과 카드를 건넨 7번이 흥, 하고 코웃음 쳤다.
“아까 그 사람은 몇 번이야? 8번?”
깐족거리며 히죽 웃는 얼굴에 영수증을 던지고 싶었지만, 곧 멀리서 나타난 지예준의 모습에 강선이 목소리를 낮추었다.
“그냥 친구니까 거지 같은 말 하지 말고 닥쳐.”
“같이 좆 비빈 사이에 말이 심하네…….”
그는 한껏 눈썹을 내리며 불쌍한 표정을 지었으나 조금도 미동하지 않는 반응에 머쓱한 얼굴로 눈썹 끝을 갉작였다.
“아무튼, 잘 지내는 것 같아서 다행이다.”
“누가 보면 부모님인 줄 알겠어.”
“또, 또. 하여간 미운 말만 골… 식사는 맛있게 하셨어요?”
“네. 잘 먹었습니다.”
어느샌가 나타나 선한 얼굴로 인사를 하는 지예준을 보며 7번이 눈을 반짝였다.
“잘 먹었다는 인사는 강선이한테 해야죠, 하하하. 얘가 ‘친구’한테 얼~마나 잘하는지… 정말 친한 ‘친구’이신가 봐요.”
“아… 네…….”
유독 ‘친구’라는 단어에 힘을 줘 말하는 7번에게 강선이 눈을 부라렸지만, 7번은 더 약을 올리듯 ‘그럼 친구분, 안녕히 가세요~’라며 유유히 카운터를 빠져나갔다.
‘저게 진짜…….’
마지막치고는 더러운 이별에 강선은 주머니에 지갑을 쑤셔 넣고 지예준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자.”
“어? 어어…….”
‘8번은 지랄.’
이날, 강선은 반년 치 욕을 한꺼번에 쏟아 냈다.
✲ ✲ ✲
“강선아, 졸리면 자. 도착하면 깨울게.”
“……아냐. 운전하는 사람 옆에서 어떻게 그래.”
꽉 막힌 도로에 갇힌 차는 앞으로 나아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집까지 겨우 15분 거리였지만, 20분이 넘을 동안 겨우 100미터 남짓밖에 가지 못했다.
“왜 이렇게 막히지…….”
사고라도 났나 싶어 인터넷에 ‘성북구 교통사고’라 검색해 봐도 관련 기사는 하나도 나오질 않아 더 의문이었다. 20분 내내 똑같은 풍경만 보고 있던 강선이 입을 가리고 하품하자, 그 모습을 본 지예준은 뒷좌석에 손을 뻗어 뭔가를 꺼냈다.
“이거라도 베고 있어.”
강선의 무릎 위로 올라온 것은 개구리눈이 뿅뿅 달린 차량용 목 베개였다.
꼭 지 같은 걸 가지고 다닌다며 개구리눈을 주물럭거린 강선이 목 베개를 앞으로 차고 그 위에 턱을 기댔다.
적당히 단단한 것이 꽤나 편해 몸에 힘을 빼고 라디오에서 나오는 음악 소리에 맞춰 발을 까닥였다.
슬쩍 눈을 돌리니 지예준은 나른한 얼굴로 정면을 보고 있었다.
새삼 그 얼굴이 참 잘났다 싶어 강선은 저 안경을 빨리 버리든가 해야겠다며 쓸데없는 생각을 했다.
긴 시간 동안 행인과 보도블록 사이를 뚫고 피어난 이름 모를 꽃을 구경하다 보니 의식이 점점 흐려지는 게 느껴졌다. 이대로 잠들면 지예준이 심심할 텐데, 하면서도 강선은 무겁게 감기는 눈에 힘을 주지 못했다.
무언가 보닛 앞을 빠르게 밟고 지나가는 소리에 놀라 눈을 떴을 때, 풍경은 매일같이 보던 아파트 주차장으로 바뀌어 있었다.
새까만 어둠에 졸음 섞인 숨을 내쉬며 옆을 보니 지예준은 운전석에 앉은 채로 푹 잠들어 있었다. 멀리서 들어오는 가로등 빛을 받은 얼굴이 이쪽을 향하고 있어 강선은 멍하니 그 얼굴을 구경했다.
‘그냥 깨우지…….’
강선은 목 베개를 벗어 무릎에 올려 둔 채 지예준에게 몸을 가까이 기울였다.
“준아.”
처음부터 선명히 부르는 소리에도 그는 일어나지 않았다.
장소만 다를 뿐, 어젯밤과 비슷한 상황에 강선의 목울대가 크게 흔들렸다.
이미 어제 호된 일을 겪었으면서도 강선은 마치 그 일을 까맣게 잊어버린 것처럼 그에게 조금 더 얼굴을 가까이했다.
정말 마지막으로… 짧게, 딱 한 번만.
어둠 속에서 두 입술의 거리가 손가락 한 마디도 채 남지 않았다.
첫 키스도 아닌데 강선은 자신도 모르게 숨을 멈췄다.
“…….”
쪽, 하고 가볍게 닿은 입술이 뜨거웠다.
아주 짧게 닿고 떨어졌는데도 그 온기가 입안까지 전해진 것만 같았다.
“……진짜 안 일어나네…….”
몸을 물리고 등받이에 머리를 기대며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이렇게 쉽게 끝나는 걸, 어제는 무슨 정신으로 그랬는지…….
조금 전 느꼈던 감각을 기억이라도 하듯 손가락으로 입술을 매만지던 강선이 안전벨트를 풀어냈다. 이젠 정말로 지예준을 깨워야만 했다.
✲ ✲ ✲
‘준아’ 하고 부르는 소리에 잠은 깼지만 그 숨결이 너무도 가까워 지예준은 또 저가 꿈을 꾸나, 했다.
꿈이라면 빨리 지나가길 바랐고, 꿈이 아니라면 적당한 때에 자연스럽게 눈을 떠야겠다 생각하고 있었으나, 그 생각은 입술에 닿아 온 것에 모조리 날아가 버리고 말았다.
조금 서늘하면서도 말랑한 그것은 꿈인 줄 알았던 어젯밤, 주체할 수 없는 제 욕구를 받아 낸 것과 같았다.
물기에 젖은 소리가 짧게 떨어졌다.
“……진짜 안 일어나네.”
입술 위로 간지럽게 닿는 숨이 한 번에 멀어지고, 잠시 한숨 쉬는 소리가 들리더니 어깨에 손이 닿았다.
“일어나, 준아. 올라가자.”
마치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돌변한 목소리에 온 정신이 혼란했다.
막혀 있던 숨을 천천히 내뱉고 싶었지만, 호흡은 추위에 절어 버린 듯 벌벌 떨리기만 했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를 향해 있는 어두운 눈에 강선이 왜 그러냐는 듯 ‘응?’ 하고 물었다.
“강선아.”
빠르게 손을 뻗어 그의 손목을 낚아채 끌어당겼다. 한 손에 다 들어오는 손목에서부터 울리는 소리가 점점 거대해졌다.
뜨겁게 옥죄어 오는 열기에 몸을 움츠린 얼굴을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될 정도로.
“방금, 뭐였어?”
좁은 차 안이 까만 먹물로 가득 채워지는 것만 같았다.
✲ ✲ ✲
어젯밤, 잠결에 닿았던 입술이… 꿈인 줄 알았는데.
“……강선ㅇ-”
“싫어?”
조그만 입술이 작게 속삭였다.
손바닥 안에서 빠르게 울리는 고동에 비해 목소리는 더할 나위 없이 차분했다.
그 말이 뜻하는 바를 알 수 없어 얼굴을 보려고 했지만, 다시 가까이 다가오는 움직임에 미미했던 가로등 빛조차도 그의 뒤로 숨어 버리고 말았다.
강선은 잡힌 손목을 뒤집었다.
어제와 달리 쉽게 힘을 푼 손 위로 차가운 손가락이 내려앉았다.
“준아.”
상대의 대답을 요구하는 부름은 아니었다.
겨우 손 하나로 잡아 두기엔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강선은 잡은 손에 힘을 주며 그의 연하늘색 옷깃을 끌어당겼다.
후에 이 일을 회상하며 후회를 할지, 아니면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별것 아닌 해프닝으로 끝날지는 모르겠지만, 한 가지 확실한 것은 입술이 한 번 더 닿았다는 것이었다.
입을 맞추면서도 강선은 눈을 감지 않았다. 그것은 지예준도 마찬가지였다.
아까보다는 조금 더 오래 머무른 입술을 떼지 않은 채로 속삭였다.
“눈 감아.”
입술을 간지럽히는 속삭임에 까만 눈동자가 잘게 흔들렸지만, 이는 곧 각도를 바꿔 다시금 부딪쳐 오는 입술에 눈꺼풀 속으로 사라져 버렸다.
겨우 입술이라는 아주 작은 신체 부위끼리 맞닿은 것이었다. 그럼에도 그것은 머릿속을 까맣게 잠식했다.
제 손을 붙잡은 손에서 떨림이 느껴졌다. 그리 힘을 주어 잡은 것이 아님에도 마치 온 힘을 다한 것처럼.
강선은 천천히 눈을 감으며 혀로 그의 입술을 진득이 핥고, 가볍게 빨아들였다.
지예준의 첫 키스를 제대로 가져갔다는 고양감에 머리가 아찔했다.
“……하아.”
참을 수 없는 감각에 한숨이 터져 나왔을 때였다.
가만히 잡혀 있던 손이 쑤욱, 빠져나오는 느낌에 입술을 떼자 커다란 무언가가 목덜미를 감싸 끌어당겼다.
“흐, 읍…….”
가만히 있던 것이 무섭게 달려들어 강선의 입술을 먹어 치울 듯 삼켰다.
그 기세에 놀라 어깨를 움츠려 보아도 세게 등을 끌어안은 팔 안에선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오히려 달뜬 숨을 머금은 입술을 더욱 빨아들일 뿐이었다.
시동이 꺼진 차 안은 둘의 숨소리만으로 가득 채워졌다.
비어 버린 손을 들어 양팔로 그의 목을 껴안자 정신없이 움직이던 입술이 우뚝, 멈추었다.
그 입술 사이를 비집고 들어간 혀가 숨보다도 뜨거운 것과 닿았을 때, 처음으로 지예준에게서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강선은 입을 조금 더 벌려 그의 혀를 끌어당겨 깨물 듯 빨아들였다.
자신이 자는 사이에 젤리나 사탕을 먹었는지, 아주 흐린 과일 향이 느껴졌다. 이번에는 머리를 감싼 손이 벌벌 떨리기 시작했다.
등을 끌어안은 손도 어디로 가야 할지 모르는 것처럼 강선의 옷깃을 쥐었다 놨다 했다.
그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다 알 수 있을 것 같은 적나라한 움직임에 강선은 그의 혀를 놓아 주었다.
“……계속해도 돼?”
“…….”
“응?”
“……아니.”
푸흐, 하는 웃음이 살랑살랑 둘 사이를 지나갔다.
아쉬운 마음을 가득 담아 마지막으로 쪽, 하며 가벼운 입맞춤을 남기고 얼굴을 떼자 곧 눈물이라도 가득 쏟을 것처럼 그렁그렁한 눈이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강선은 퐁퐁 터져 나오는 열기를 억누르며 그에게서 몸을 물렸다.
“거짓말해서 미안해. 어젯밤에… 내가 먼저 했던 것 맞아. 정말 미안하다.”
정중한 사과에 잠시 말을 않고 있던 지예준은 작게 ‘응’ 대답했다.
타액이 조금 남아 있는 입술로 손을 뻗어 그것을 닦아 주자 또다시 숨을 멈췄다.
“싫었어…?”
그러나 이번에는 그가 주저 없이 고개를 저었다.
✲ ✲ ✲
“안녕.”
“……안녕.”
일요일 아침.
7층에서 멈춘 엘리베이터 문 사이로 짧은 인사가 오갔다.
“운동하러 가?”
편한 운동복에 텀블러 하나를 쥐고 있는 행색을 보며 묻자 그가 고개를 끄덕였다.
“아, 아니. 갑자기 수영 센터 좀 나와 달라고 해서… 너는?”
“집 청소.”
“아…….”
손에 들린 쓰레기봉투로 눈짓한 강선은 그가 올라타자마자 닫힘 버튼을 눌렀다.
“…….”
“…….”
기분 탓이 절대 아니었다.
평소와 다른 분위기에 둘은 겨우 인사만 나눈 후 그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았다.
강선은 엘리베이터 버튼 숫자를 셌고, 지예준은 문에 비친 제 신발만 바라보았다.
어제저녁, 도둑 뽀뽀가 깊은 키스가 되고, 숨을 겨우 진정시킨 지예준은 엘리베이터가 7층에 멈추자마자 인사도 없이 집으로 도망갔다.
꼭 뒤에서 누가 그의 등을 밀어 낸 것처럼 순식간에 사라지는 모습에 강선은 괜히 저가 부끄러워지는 기분이 들어 애꿎은 벽만 콩콩 두드렸다.
그렇게 싱숭생숭한 밤과 새벽을 보내고 도저히 안 되겠다 싶어 밀린 집안일이라도 하자는 마음으로 대청소를 시작했다.
깨끗한 마음으로 깨끗한 주말을 보내자 다짐한 것도 아주 잠시.
이렇게 바로 그를 마주할 줄은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
‘이 무슨, 첫날밤 보낸 조선 시대 신혼부부도 아니고…….’
오늘따라 느리게 느껴지는 시간에 강선이 숨을 내쉬자 지예준의 시선이 잠시 그를 향했다.
“……강선아.”
“어, 어어?”
갑자기 불린 이름에 놀라 어벙하게 대답하니 그는 무슨 큰 고백이라도 하듯 입술을 달싹였다.
“……그, 어… 있잖아…….”
[1층입니다.]
한참을 우물쭈물하다 겨우 열린 말은 엘리베이터에서 나온 목소리에 뚝, 끊겨 버렸다.
“응? 뭐라고?”
“……아니야. 나, 난 갈게.”
벌게진 귀를 숨길 생각도 못 하고 아직 다 열리지 않은 문을 비집고 나가는 뒷모습에 강선은 마른침을 삼켰다.
쓰레기장으로 가 분리수거를 하면서도 떠오르는 건 온통 지예준뿐이었다.
호로록, 잡아먹겠다는 계획이 한 발짝 더 가까워졌으니 분명 좋아해야 할 일인데도 무언가 걸리는 기분이 매우 찝찝했다.
엘리베이터에서 내리기 직전, 비장하게까지 보이던 얼굴로 그는 도대체 무슨 말을 하려고 했던 걸까.
아무리 생각해 봐도 이건 아닌 것 같다? 혹은, 내 첫 키스 돌려내?
이것도 아니라면… 어제 일은 없던 걸로 하자?
“뭐래…….”
아직 듣지도 않은 말을 혼자 만들어 놓은 건 저였으면서, 강선은 입을 비죽이며 비닐봉지를 뒤집어 들고 탈탈 흔들었다.
“들어오기만 해 봐.”
요란한 소리를 내며 우수수 떨어지는 참치 통조림 소리가 저를 놀리는 것만 같은 기분에 강선은 거칠게 슬리퍼를 끌며 아파트로 들어갔다.
졸업 준비로 정신없어야 할 4학년 생활이 다른 의미로 정신없는 기분이었다.
✲ ✲ ✲
“유은서 파이팅-!”
킥판을 잡고 발차기를 하며 앞으로 나아가는 이를 향해 도윤이 크게 소리 질렀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도윤은 은서를 괴롭히지 못해 안달이었는데, 무슨 바람이 분 것인지는 몰라도 요즘 들어선 은서 옆에 꼬옥 붙어 다니며 자신이 마치 경호원이라도 된 것처럼 굴었다.
은서 어머니 말로는 은서가 도윤에게 ‘자꾸 괴롭히면 너랑 안 놀아!’라며 짐짓 심하게 화를 내었다고 했다. 그 말에 도윤은 꽤 큰 충격을 받았는지, 어느 날엔 다른 친구가 은서를 약 올리자 그 친구를 쫓아가 ‘너는 유은서랑 놀지 마!’라며 으름장까지 놓았더랬다.
도윤은 저가 쓰고 있던 수영모를 벗어 흔들며 그 자리에서 방방, 뛰었다. 작은 몸에 부딪힌 물이 반짝이며 작은 물보라를 일으키는 걸 본 지예준의 입꼬리가 슬며시 올라갔다.
“예준아, 교대하자.”
“아, 그래.”
응원에 정신없는 아이들을 보던 중, 누군가 뒤에서 말을 걸었다.
원래 이 시간에 어린이반 강사 일을 해야 했던, 같은 과 동기인 김성우였다.
윗집에서 물이 새 일요일 아침부터 고생을 하고 온 김성우는 ‘아이고오-’ 곡을 하며 수영장 안으로 들어왔다.
김성우의 등장에 몇몇 아이들이 ‘벨루미 선생님 왔다!’ 하며 조르르 모여들었다. 그가 요즘 초등학생들 사이에서 유행하는 유령 애니메이션 캐릭터를 빼다 박은 탓이었다.
“쉬는 날 불러서 미안.”
“괜찮아. 온 김에 나도 운동하고 가면 되니까.”
‘지금 가는 거 누구야~? 어~ 은서~’ 하며 짝짝, 손뼉을 치는 벨루미… 아니, 김성우를 지나 수영장 밖으로 나온 지예준은 탈의실에서 전용 수영복을 갈아입었다.
조각조각 짜인 근육과 탄탄한 허벅지에 눈이 동그래진 취미반 회원들이 저들끼리 모여 수군거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지예준은 혼자만의 시간 틈으로 물밀 듯 밀려오는 한 존재를 떠올리며 풍덩, 물속으로 뛰어들었다.
날카롭게 파고드는 손날 옆으로 물줄기가 튀어 올랐다.
눈앞을 가로막는 하얀 거품들을 밀어 내며 터닝 지점까지 도착한 그가 몸을 한 바퀴 굴려 발로 벽을 짚고 종아리에 바짝 힘주었다.
상념을 날려 버리고자 처음부터 긴 코스를 선택한 것이었지만, 날아가기는커녕 더욱 커져만 가는 고민에 호흡만 거칠어졌다.
“하아, 하아…….”
도착지에 멈춰 이마를 쓸어 올리는 그의 가슴이 크게 들썩였다.
파랗게 일렁이는 물 위로 강선이 떠올랐다.
조용하고 깜깜한 차 안에서 제 목에 팔을 감고 혀를 감아올리던 감각이 여태껏 선명했다.
겨우 가볍게 뽀뽀나 하던 그간의 꿈들과는 확연히 달랐다.
놀란 마음에 그를 두고 집으로 도망쳤지만, 몇 시간 전 엘리베이터에서 다시 마주했을 땐 그야말로 심장이 터지는 것만 같았다.
강선이 먼저 무어라 말을 걸었다면 비록 눈은 잘 마주치진 못했더라도 대화다운 대화 정도는 할 수 있었을 텐데, 오늘은 강선도 내내 말이 없어 자신도 입을 다물고 말았다.
그래도 새벽 내내 고민했던 것은 물어야 할 것 같아 그에게 애인과 헤어졌냐고 물으려던 찰나, 1층에 도착했고, 허락 없이 타인의 연애사를 물을 뻔했던 제 무례함이 부끄러워 어제처럼 또 먼저 도망쳐 버렸다.
‘이러면 안 되는데…….’
더욱 엉켜만 가는 고민에 오랜 시간 그 자리에 서 있던 지예준은 고개를 젓고 다시 물에 몸을 맡겼지만, 점점 더 또렷해지기만 하는 시름에 이 또한 그리 오래 갈 수 없었다.
✲ ✲ ✲
‘왔다!’
아파트 정문을 지나 건물 쪽으로 걸어오던 이를 발견하자마자 베란다 창틀 너머를 보던 머리가 안으로 쏙 들어갔다.
지예준이 언제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들어올지 몰라 몇 번이나 밖을 내다봤던지.
나갈 때와 똑같은 옷차림을 하고 있는 손에 분홍색 종이가방이 들려 있었다.
거리가 멀어 뭐가 들어 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강선은 그의 귀가를 확인하자마자 어딘가로 전화를 걸었다.
“여보세요? 아, 여기 에코빌 하우스 108동 703호인데요-”
핸드폰에 대고 무어라 말하면서 열심히 고개를 끄덕이던 강선의 얼굴이 활짝 피었다.
그로부터 딱 15분 후.
정문을 타고 올라오는 오토바이 소리에 강선은 기다렸다는 듯 소파에서 벌떡 일어났다.
✲ ✲ ✲
집에 들어가자마자 가방을 벗지도 않고 냉장고를 열어 사 온 것을 집어넣었다.
기분이 꿀꿀할 땐 커다란 티라미수를 푹푹 퍼먹으며 좋아하는 영화를 보는 게 제일이었다.
오늘은 주말이기도 하고, 낮에 열심히 운동도 했으니 이 정도 고칼로리 사치는 저에게 주는 선물이라 여긴 지예준은 오늘 밤만큼은 강선과 있던 일을 조금이나마 잊어 보자 생각했다.
빨리 옷을 갈아입고 나와 혼자만의 시간을 가지려는데, 갑자기 띵동- 초인종 소리가 들려왔다.
올 사람도 없는 집을 가득 채운 소리에 지예준이 숨을 멈췄다.
그 짧은 순간에 강선의 얼굴이 스쳐 가 문을 열어야 하나, 말아야 하나 고민하고 있으니 문 너머로 ‘배달이요-!’ 하는 소리와 함께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렸다.
“……하아-”
오늘은 강선을 잊자고 생각한 것이 겨우 몇 초 전이었으면서 강선일까, 하는 생각에 당황한 저가 우스웠지만 지예준은 내심 안심하며 문을 열었다.
알록달록한 점퍼에 빨간 헬멧을 쓴 배달원이 철가방을 내려놓기도 전에 손을 내저었다.
“저, 배달시킨 적 없는데… 잘못 오신 것 같아요.”
“네?”
그 말에 배달원이 고개를 들어 현관문에 붙어 있는 호수를 확인했으나 그는 곧 고개를 저으며 다시 철가방을 내려놓았다.
“703호 맞는데요.”
“……네?”
그는 이것 보세요, 하며 철가방에 붙은 영수증을 떼 지예준에게 내밀었다.
‘찹쌀탕수육中’. ‘간짜장 1’이라 적힌 영수증엔 아파트 이름과 함께 정확히 ‘108동 703호’라 쓰여 있었다.
어떤 질 나쁜 사람이 이런 장난을 친 걸까.
문을 반 이상 열어젖히고 신발장에 음식을 올려놓는 배달원 앞에서 말없이 영수증을 내려다보던 지예준이 영수증에 찍힌 익숙한 전화번호에 눈을 크게 떴다.
“이만육천오백 원입니다.”
“……네.”
정말이지, 강선은 언제나 예고 없이 침범했다.
✲ ✲ ✲
작게 똑똑, 문 두드리는 소리만으로도 그의 성격이 느껴졌다.
“누구세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일부러 지갑을 들고 현관으로 향하며 묻자 문 너머로 ‘나야, 강선아’ 하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무슨 일… 어어?”
문을 여니 지예준은 예상대로 강선이 일부러 잘못 주문한 음식을 들고 있었다.
“……강선아, 이거… 우리 집으로 잘못 왔더라.”
“아, 그래? 이상하다… 분명 903호라고 했는데…….”
정말 이상하다는 듯 고개를 갸웃거리며 지갑을 다시 신발장 위에 올려놓자 지갑 쪽을 흘끗 쳐다보는 얼굴에 의문이 가득했다.
“번거롭게 해서 미안하네… 여기 서 있지 말고 들어와서 같이 먹자, 준아.”
속에서 뿜어져 나오는 음침함을 꾹꾹 누르며 음식을 전해 받고 안을 가리켰지만 그는 한 걸음 뒤로 물러서 고개를 저었다.
“아, 아냐. 괜찮아.”
“왜? 벌써 밥 먹었어?”
눈을 동그랗게 뜨고 곧바로 물으니 당황한 그가 ‘아니……’ 하며 말끝을 흐렸다.
살면서 선의의 거짓말 한 번도 해 보지 않은 것처럼 순진한 얼굴이었다.
“어차피 이거 양도 너무 많은데… 혼자 먹으면 좀 심심하기도 하잖아. 같이 먹자. 응?”
거실로 향하려던 걸음을 돌려 그에게 다가가 한 팔로 그릇을 감싸 안고 팔을 끌어당겼다.
지예준의 몸에 가로막혀 열려 있던 문이 스르르 닫히며 도어락이 잠길 때 나는 기계음이 울렸다.
이렇다 할 생각을 할 틈도 없이 거실까지 끌려온 지예준은 테이블 위에 음식을 올려 둔 강선이 랩을 뜯으려고 할 때에야 자리에서 엉거주춤 일어났다.
그를 따라 고개를 든 강선이 ‘왜?’ 하고 물었다.
“나 잠깐… 집 좀 다녀올게.”
“다시 올 거지?”
“으응.”
빨리 와, 하며 몇 겹이나 되는 랩을 거침없이 뜯어내는 손가락 힘이 대단했다.
곧은 손가락이 제 입술을 만지던 때로 의식이 흘러 지예준은 빨개진 귀를 숨기기 위해 후다닥 신발장을 나섰다.
얼마 지나지 않아 다시 돌아온 지예준은 손에 분홍색 종이가방을 들고 있었다.
그가 귀가하길 목 빠지게 기다리던 중 베란다 너머로 보았던 가방과 같은 것이었으나 강선은 그것을 처음 본다는 듯이 행동했다.
“강선아, 잠깐 냉장고 좀 써도 돼?”
“응? 어, 괜찮아. 근데 그게 뭐야?”
냉장고 앞에 종이가방을 내려 둔 지예준이 꺼낸 것은 입맛에 맞지 않아 살면서도 몇 번 먹어 본 적 없는 티라미수인가 뭔가 하는 것이었다.
“티라미수 좋아해?”
냉장고 문을 열고 텅 비어 있는 아래 칸에 티라미수 상자를 넣으며 그가 물었다.
강선은 새까만 뒤통수를 보며 ‘음……’ 했다.
‘좋아해야 한다고 하는 게 맞겠지.’
“좋아해.”
솔직히 말해서 단것은 정말 싫어했지만, 그래도 저를 생각해 가져온 그의 정성 앞에서 입맛이 어떠니, 하는 건 그리 올바른 행동은 아니었으니까.
하지 않아도 될 거짓말에 슬쩍 눈을 피하며 답하자 상대에게서 아무런 말이 들리지 않았다.
다시 시선을 돌려 지예준을 바라보니 그는 냉장고 문을 닫던 자세 그대로 굳은 채 서 있었다.
달아오른 열이 그의 얼굴을 순식간에 물들였고, 강선은 그 찰나의 순간을 못 본 척할 수 없었다.
“……티라미수를.”
눈치 빠른 강선은 말 뒤에 바로 살을 덧붙였으나 저도 모르게 꿀꺽, 넘어가는 목울대까지는 숨길 수 없었다.
“…….”
“…….”
이 순간, 둘은 서로 다른 생각을 했다.
강선은 어제 나눴던 입맞춤을 떠올렸고, 지예준은 어딘가에 있을 강선의 애인을 떠올렸다.
접점을 찾지 못하고 빗겨 나간 오해가 언제 궤도를 꺾어 부딪칠지는 미지수였다.
어찌저찌 식사를 마치긴 했으나, 티라미수 한 조각을 채 먹지 못한 강선은 아릴 정도로 단 혀에 결국 포크를 내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그것을 본 지예준은 티라미수가 별로 맛이 없었나, 하며 눈치를 살폈지만 강선은 ‘배불러서 더 못 먹겠다’며 티라미수 상자를 지예준 쪽으로 살짝 밀어 주었다.
강선이 평소 개미 눈곱만큼 먹는 수준은 아니었으나 지예준은 그보다 몇 배를 먹어야 했기에 그는 음식을 거의 다 먹고서도 티라미수 한 판을 쉽게 해치웠다.
“그렇게 먹고도 유지가 돼?”
“……응?”
마지막 한 입을 입에 넣고 상자 정리를 하는 그를 보며 묻자, 지예준이 ‘아……’ 하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렇게 안 먹으면 살이 빠져서…….”
남들은 물만 마셔도 살이 찐다고들 하는데, 지예준은 오히려 많이 먹어야만 체중이 유지된다고 한다.
어떻게 된 몸이기에 그럴 수가 있을까. 강선은 마저 뒷정리를 하는 팔뚝으로 시선을 옮겼다. 날이 따뜻해지기는 했으나 반소매 티를 입을 정도는 아닌데, 그는 춥지도 않은지 팔뚝을 훤히 드러내 놓고 있었다.
확실히… 어지간해선 잘 빠지지 않을 만큼 단단해 보이긴 했다. 실제로도 그렇지만.
빈 상자를 다시 종이가방에 넣은 그가 곧 일어날 것처럼 손잡이를 쥐었다.
어떻게 붙들어 놓은 건데, 이렇게 쉽게 보낼 수는 없어 강선은 잠깐만, 하며 그의 팔을 붙잡았다.
손바닥 피부로 찰지게 느껴지는 근육에 하마터면 염치도 없이 주물럭거릴 뻔했다.
“우리 집에서 자고 가.”
그러나 염치없는 건 손이 아닌 입이었다.
한 손에 다 잡히지도 않을 만큼 탄탄한 팔뚝에 힘이 빠지며 바닥으로 떨어진 종이가방이 앞으로 고꾸라졌다.
아마 심장이 팔에 있었더라면, 그것은 이미 강선의 손에서 터졌을지도 모른다.
✲ ✲ ✲
조용하고 어두운 방 안은 질척이는 소리만 가득했다.
도망가려는 목을 끌어안고 더욱 깊이 혀를 넣자 그 열기에 놀란 것이 잠시 주춤했다.
“……왜 도망가…….”
얄밉다는 듯 아랫입술을 살짝 깨무니 상대는 작게 고개를 저었다. 도망간 것이 아니라고 하는 것 같았지만 입술은 견고히 닫혀 있었다.
“……싫어?”
어두우면 좀 괜찮을 줄 알았는데 착각이었나.
집안 불은 모두 껐고, 침실 창은 암막 커튼에 가려져 있어 아무것도 보이지 않아 조금 답답했지만 이것도 제법 구미가 당기는 분위기였다.
목을 끌어안았던 팔을 풀고 그의 입술이 있는 곳을 더듬자 지예준이 손목을 잡아 왔다.
뜨겁게까지 느껴질 정도로 열 오른 손에 강선은 앞이 안 보여 다행이라 생각했다.
“……안, 안 해 봐서…….”
미지근한 공기를 타고 전해진 목소리가 머리 근처를 맴돌았다.
입을 맞춘 게 이번이 벌써 세 번째인데도 그는 영 적응이 안 되는 모양이다.
그러나 강선이 듣기엔 그것 말고도 또 다른 이유가 있는 것처럼, 무언가 이상한 기류가 섞여 들어오는 기분이었다.
“진짜 안 해 봐서 그런 것 맞아?”
“……으응.”
방이 어두워 다행이라고 생각했던 것은 취소다.
밤눈이 조금 더 밝았다면 그가 무슨 표정을 짓고 있는지 알았을 텐데, 지금은 하나도 보이질 않으니 슬슬 답답해지기만 했다.
강선은 잡히지 않은 손으로 그의 어깨를 짚고, 흠칫 떨리는 몸을 꾹 누르듯 하며 몸을 더 가까이 기울였다.
“이상한데.”
“…….”
“왜 다른 이유가 있는 것 같지…?”
그 말에 손목을 잡고 있던 팔이 크게 튀어 올랐다.
강선은 자유가 된 손으로 그의 손목을 잡았다. 빠르게 역전된 상황에 강선이 보이지 않는 눈을 가늘게 떴다.
“준아, 솔직하게 말해도 돼. 나랑 이런 거 하기 싫으면 싫다고 해도-”
“애, 애인이…….”
최대한 나긋나긋하게, 그가 놀라지 않도록 부드럽게 말을 꺼내는데 그가 강선의 말을 자르고 불쑥 들어왔다.
“……응?”
강선은 저가 잘못 들었나 했다.
조금 더듬기는 했지만, 지예준은 분명 ‘애인’이라고 했으니까.
겨우 딱 한 번, 아주 짧게 나온 애인이라는 말에 강선의 머릿속으로 폭풍이 휘몰아쳤다.
“……너 사귀는 사람이… 있었어…?”
멍하게 나온 목소리만큼 그를 안고 있던 팔에도 주륵, 힘이 빠졌다.
애인이 있음에도 타인을 거절할 수 없을 만큼 소심했다니… 아니, 호구인 건가? 아니지, 이건 쓰레기지…….
도덕적으로도 하면 안 될 짓을 했다는 사실에 강선이 불을 켜려 몸을 일으킨 순간이었다.
“강, 강선아! 내가 아니라… 네가… 너, 너 말이야.”
다급하게 외친 목소리가 몸을 붙잡았다.
“……사귀는 사람 있잖-”
“뭐?!”
조금의 간격도 없이 나온 외침에 놀란 그가 어깨를 움츠렸다.
“어제, 낮에… 통화하던 사람…….”
“……뭐?”
“……혹시 헤어졌다면 미안해… 그런데 싫, 싫어서 그런 건… 정말 아니야…….”
“…….”
강선은 이날 처음으로 얼이 빠진다는 게 무슨 뜻인지를 몸소 체감했다.
✲ ✲ ✲
“잠깐만, 누가? 내가?”
황당함에 언성이 높아지자 지예준은 이불을 그러쥐며 고개를 끄덕였지만, 방이 어둡다는 것을 뒤늦게 자각하고 조심스레 말을 뗐다.
방 불을 켜면 되는 일이었으나 제 얼굴은 지금 보지 않아도 곧 터질 듯 붉어져 있을 게 뻔했기에 재차 침대에서 일어나려 하는 강선의 팔을 지푸라기라도 된 듯 붙잡았다.
“……미안해.”
“야, 아니… 그, 허어…….”
기껏 분위기 좀 잡히나 했더니 이게 무슨 날벼락이란 말인가.
강선은 지예준 입에서 나왔던, 그러니까 어제 7번과 했던 통화 중 오해를 살 만한 내용이 있었는지를 떠올렸지만 애인은커녕 만나자는 그에게 철벽을 쳤던 기억밖에 없었다.
심지어 거의 끝 무렵엔 욕 비슷한 것도 했던 것 같은데, 그게 어떻게 연인 사이로 보였던 걸까.
“오해가 있던 것 같은데, 어제 통화했던 사람은 그냥 아는 사람이야.”
“……어?”
“사귀는… 하아, 사귀는 사람, 그런 건 있지도 않고.”
답답함에 머리를 헝클어뜨린 강선이 기가 차다는 듯 헛웃음 쳤다.
“넌 내가… 애인이 있는데 남이랑 막, 키스하고 껴안고 그럴 사람인 줄 알았어?”
“아, 아니야! 절대!”
또 입이 방정이었다.
곧 침대에서 튀어오를 것처럼 화들짝 놀란 그의 몸에 눌려 매트리스가 작게 출렁였지만, 강선은 일부러 들으라는 듯이 크게 한숨을 쉬었다.
“응, 그래… 내가 그런 사람으로 보였으면 다 내 잘못이지…….”
“……아, 아니야, 강선아…….”
손등에 닿은 지예준의 손바닥이 점점 축축해짐을 느끼며 강선은 마지막 쐐기를 박았다.
“나랑… 이런 짓 하는 거, 싫어…?”
지예준의 어깨로 이마를 툭, 기대고 그의 옷자락을 잡은 손을 잘게 떨자 지예준이 짧게 숨을 들이켰다.
“……안 싫어.”
불이 꺼져 있어 다행이었다.
강선은 지금 웃고 있었으니까.
세상에 어떻게 이런 애가 있나 싶을 정도로 충격이었다.
키스를 주저하는 이유가 저에게 애인이 있는 것 같아서라니…….
잠결에 키스까지 당했으면 뺨이라도 때려야 하는데, 뺨은커녕 몇 번이나 입술을 내어 주는 이 호구 수준으로 착한 놈 때문에 비실비실 웃음이 나왔다.
긴장에 절어 곧 끊어질 듯 힘겹게 숨을 고르던 지예준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준아, 이제 다시 키스해도 돼…?”
목덜미에 가볍게 닿아 흩어지는 숨결이 간지러웠다.
지예준은 대답 대신 그대로 강선에게 고개를 숙였고, 강선은 급하게 부딪쳐 오는 입술에 곧바로 혀를 내밀었다.
정신없이 그와 혀를 얽고 서로의 숨을 삼키며 부드러운 머리카락을 헤집다 귓불을 매만졌다.
“……하아.”
첫 키스인 것답게 지예준은 당연히 테크닉이 좋지 못했으나, 강선이 그의 혀를 빨고 깨물고, 또 입술을 핥았던 것을 상기하듯 어설프게나마 따라 하는 모습에 이유 모를 쾌감이 가슴을 짓눌렀다.
지예준에게 첫 도둑 키스를 했을 때처럼 몸이 달아올랐다.
술과 잠에 취해 목덜미에 이를 박고 거세게 빨아올리던 힘을 다시 느끼고 싶었다.
타액에 젖어 자꾸만 빠져나가는 혀를 잡아채 야살스러운 소리가 나도록 몰두하고 있는 이의 어깨를 더욱 끌어안으며 등 뒤로 무게를 내리자 커다란 손이 머리와 등을 받쳤다.
침대와 지예준의 몸 사이에 갇힌 기분이 강선을 더욱 부추겼다.
그의 얼굴로 손을 더듬어 안경을 벗겨 내고 엄지로 눈가를 쓸자 그가 하아, 하며 밭은 숨을 내뱉었다.
“준아…….”
입에 가득 고인 타액을 넘기고 목덜미 쪽으로 머리를 끌어당겼다.
입술에 닿은 살결에 잠시 행동을 멈춘 그가 천천히 입술을 벌려 부드러운 살을 혀로 쓸었다.
아주 예민한 것을 다루는 것처럼 몇 번이나 쪽, 쪽 가볍게 입을 맞추는 것이 감질나 강선은 어깨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흐읏!”
돌연 그의 몸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뜨거운 입술이 여린 살을 한순간, 강하게 빨아들였다. 놓아 주지 않을 것처럼 오랜 시간을 물고 있던 입술과 살이 마찰을 받아 펑, 하는 소리가 나는 것만 같았다.
입술만큼 열 오른 숨이 거칠었다.
귓가에 내려앉는 호흡에 강선의 숨도 가빠졌다.
굳이 확인하지 않아도 아마 그가 물고 있던 곳엔 발간 흔적이 남았을 것이다.
커다란 몸이 누르는 무게도, 소중하다는 듯 어깨를 매만지는 손도 너무 좋았다.
“준아, 더… 더 해 줘…….”
이미 가까이 붙어 있는데도 더 매달려 오는 목소리가 물속에 있는 듯 푹 젖은 채였다.
마치 첫 걸음마를 뗀 아기가 여기저기 뛰어다니는 것처럼 지예준은 처음 알게 된 쾌감에 거침이 없었다.
술을 먹지 않았는데도 취한 기분이었다.
✲ ✲ ✲
“강선아, 일어나.”
어깨를 쓸어내리는 손에 천천히 잠이 달아났다.
느리게 꿈뻑인 눈을 비비적대던 강선은 침대에 걸터앉은 이의 팔을 끌어당겼다.
순순히 몸을 숙인 그가 볼에 쪽, 입을 맞추다 살짝 부은 입술을 매만졌다.
“……몇 시야?”
“8시.”
“응… 일어나야겠네.”
꿈지럭대며 겨우 상체를 일으켜 그를 보자, 먼저 씻고 나온 듯 까만 머리카락이 푹 내려앉아 있었다.
어제 잠들었던 게 늦은 새벽이었으니 아마 다섯 시간도 채 자지 못했을 텐데, 살짝 분홍색이 도는 귓불 말고는 푹 숙면한 사람처럼 멀끔했다.
“몇 시에 일어났어?”
“7시쯤.”
“일찍 일어났네…….”
끄응, 소리가 나도록 쭉 기지개를 켜고 침대를 빠져나와 비척비척 욕실로 향했다.
지예준은 주인 따라다니는 강아지처럼 쫄래쫄래 뒤를 좇다 결국 강선에게 저지당했다.
“와…….”
거울 앞에 서자마자 시선이 쏠렸다.
새벽 내내 그에게 붙들려 있던 목덜미가 아주 난장판이었다. 그중 일부는 새파랗게까지 보이기도 해 강선은 잠시 문 쪽을 쳐다보다 고개를 저었다.
잘못하다간 자신이 지예준에게 잡아먹힐 것 같았다.
‘그것도 나쁘진… 않지.’
얌전한 애들이 한번 고삐 풀리면 난리도 아니라더니.
지예준과 함께 집을 나서 차 없는 거리를 사이에 두고 헤어졌다.
강의실 안에 들어감과 동시에 한상연은 ‘이 날씨에 웬 목폴라?’ 하며 강선의 옷차림을 지적했으나 이는 곧 ‘강 선배, 그 옷 잘 어울린다!’ 하는 후배들의 말에 살포시 묻히고 말았다.
“얘들아, 좋은 아침~”
“안녕하세요!”
“상연이는 또 주말 내내 게임했니? 다크서클 좀 봐.”
“아, 교수님…….”
왁자지껄한 강의실 안에서 강선은 핸드폰을 켜 꾹꾹 키패드를 눌렀다.
오늘 몇 시에 끝나? 기다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