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역시, 너무 티를 낸 걸까.
강선이 조금만 다가와도 물밀 듯 밀려오는 수줍음에 머리는 안 된다고 하지만 몸은 벌써 멀찍이 떨어져만 갔다.
그를 싫어하는 게 아니라, 정말… 너무, 부끄러워서.
좋아하는 마음을 억지로 들키듯 꺼낸 지예준에겐 모든 게 빠르고 어색했다.
제 침대에 강선과 함께 누워 키스를 나누는 것과 그의 몸에 쉴 새 없이 입을 맞추는 건 너무도 좋았다.
만져 보기는커녕 제대로 눈에 담아 본 적도 없는 타인의 가슴을 입에 담았을 때에도 많이 부끄럽기는 했지만 강선임을 자각하고서부턴 머리만 뜨거워졌다.
이미 스물여섯이나 되었음에도 ‘어른’이라는 테두리엔 이제야 발을 디딘 기분이었다.
강선의 손에 떠밀려 욕실에 들어가 다시 샤워를 하고 나오니 집 어디에도 강선의 흔적은 남아 있지 않았다.
‘내일 시험 잘 봐’라 적힌 쪽지 하나만이 달랑 있을 뿐이었다.
씻고 나오면 분위기를 어떻게 바꿔야 할지, 혹은 강선에게 무어라 말을 꺼내야 할지 걱정하던 것이 무색하게도…….
“하…….”
붉은 기가 도무지 가라앉질 않는 얼굴을 수건으로 덮어 버리고 소파에 드러눕듯 앉아 쪽지만 만지작거렸다.
스프링 노트에서 찢어 내 너덜너덜한 자국이 난 모서리가 손바닥을 거칠게 찔렀지만, 터져 나오는 민망함까지 긁어낼 순 없었다.
‘화났겠지.’
동의도 없이 아래를 물린 건 지예준 본인이었음에도 호구처럼 강선 걱정을 먼저 했다.
두 손안에 다 잡힐 수 있을 정도로 조막만 한 얼굴 중에서도 유독 작은 게 입인데. 강선은 정말 이걸 다 삼키려 했던 걸까.
아니지, 그러다 결국 힘겨워하지 않았던가.
무의식을 타고 넘실넘실 흘러간 생각은 제 몸 위에 앉아 능숙하게 움직이던 모습까지 다다랐다.
강선은 뭐든 잘하는 것 같았다. 물론 저가 모든 것이 처음이라 잘 모르는 것일 수도 있을 테지만, 그럼에도 강선이 해 주는 건 다 좋았으니까.
‘많이 안 해 봤다는 게 더 이상한 거겠지.’
강선은 소위 말하는 ‘남자답게 생겼다’는 느낌과는 거리가 멀지만, 그럼에도 TV에 나오는 남자 아이돌 사이에 끼워 놓아도 조금도 위화감이 들지 않을 만큼 얼굴에 모난 곳이 없었다.
목소리도 좋고, 성격도 좋고, 공부도 열심히 하는 데다가 술도 잘 마시고 착하기까지 하니 분명 인기도 많겠지.
지난번 벚꽃주를 마실 때에도 서예과 후배처럼 보이는 애들이 강 선배, 강 선배, 하며 잘 따르기도 했으니까… 강선은 조금 귀찮아하는 것 같아 보이긴 했지만.
스르륵, 옆으로 기울어진 상체에 얼굴을 가리던 수건이 바닥으로 떨어졌다.
키도, 덩치도 큰 그가 소파 위에 누워 무릎을 끌어안은 모습은 그다지 볼만한 풍경이 되지 못했으나 그 얼굴은 누구보다도 풀이 잔뜩 죽어 있었다.
자신이 너무 못해서. 키스고 뭐고 다 잘하지 못해서.
그래서 강선이 저를 싫어할까 걱정이 한가득이었다.
✲ ✲ ✲
지예준의 돌발 행동에 처음부터 바지를 벗기는 건 좀 아니었나, 하는 작은 후회가 들긴 했지만 당장 내일이 시험인 강선에겐 그건 그거고 공부는 공부였다.
“뭐라는 거야…….”
240p짜리 저화질 동영상을 두 시간째 들여다보고 있어도 당최 무슨 말인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수학이면 수학답게 문제 풀이나 낼 것이지, 피타고라스 공식을 이용해 칠교놀이 판을 맞추라니.
교수가 화면에 가득 휘갈기는 식들을 옮겨 적고 똑같이 풀어 보는 것만 해도 버거워 강선은 잠시 영상을 정지시켜 놓고 뻐근한 고개를 이리저리 돌려 댔다.
아까 그 일만 아니었어도 지예준이랑 같이 공부했을 텐데.
지예준은 저보다 수업 이해력이 훨씬 나으니 이 칠교 뭐시기 문제도 교수보다 쉽게 알려 줄 수 있을 것이다.
입대 전 마지막 학점이 4.38이면 뭐 하나. 이번엔 이놈의 수학 강의 때문에 크게 말아먹게 생겼는데… 심지어 이번엔 김 교수 수업에서도 영 좋은 점수는 못 받을 게 뻔했기에 강선은 성적 장학금이 몇 등까지 나오는지를 다시 한번 따져 보기 시작했다.
나라에서 주는 돈만으로는 턱없이 부족하니 장학금과 상금, 알바 비를 있는 대로 모아 졸업 전시회가 끝나자마자 바로 경기도 인근에 집을 구할 생각이었기 때문에 목돈이 생길 기회는 언제나 소중했다.
그렇다고 김 교수 앞에 납작 엎드릴 생각은 조금도 없지만.
요약 정리 노트를 들고 일어나 침대에 풀썩, 엎어졌다.
낡은 매트리스는 수명이 거의 다 되어 강선의 몸을 탄력 있게 받아 내질 못해 이상한 삐그덕 소리만 겨우 내었다.
“에휴…….”
어질어질한 머릿속으로 김 교수와 장학금, 전셋집, 그리고 지예준이 번갈아 가며 빙빙 돌아갔다.
“조금만 더 하면 될 것 같은데…….”
공부와 지예준. 둘 중 누굴 가리키는 건지는, 글쎄.
강선은 쏟아지는 상념에 한동안 몸을 일으킬 수 없었다.
✲ ✲ ✲
일이 일이었던 만큼, 강선은 지예준이 또 먼저 학교에 갔을 것이라 생각했고 그 예상은 틀리지 않았다.
피타고라스의 칠교놀이 문제를 빼고는 대부분 쉽게 풀 수 있는 것들이라 일찌감치 시험지를 채우긴 했지만, 강선은 자리를 뜨지 않고 지예준이 시험을 마칠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항상 나란히 앉았던 뒷자리가 아닌 맨 오른쪽 구석에 자리한 지예준은 겨우 열 문제 남짓밖에 되지 않는 시험지에 아주 오랜 시간 동안 코를 박고 있었다.
시험 시간이 십여 분 남았을 때, 지예준은 드디어 자리에서 일어나 교수에게 시험지를 제출했다. 강선이 그의 뒤를 이어 빠르게 시험지를 내자 지예준은 그 자리에서 우뚝, 굳어 버리고 말았다.
당연히 저보다 먼저 강의실을 나갔을 거라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강선은 어쩔 줄 몰라 하는 그의 팔을 붙잡아 강의실 밖으로 질질 끌고 나갔다.
“시험 잘 봤어?”
“……어? 어. 아니…….”
“오래 보고 있던데.”
휘둥그레진 눈은 그걸 네가 어떻게 아냐, 묻고 있었지만 강선은 개의치 않은 얼굴로 지예준의 등을 툭툭, 털듯 도닥였다.
“어제는 미안.”
“……아, 아니야…….”
강선은 그에게 사과를 하는 것이 우선이라 여겼다.
뭐가 되었든, 일단 지예준이 내켜 하지 않았던 일이라는 건 확실했으니 2보 전진을 위한 한 번의 후퇴쯤이라 생각하기로 했다.
그동안 꽤나 가까워졌다 하더라도 다른 사람이 제 성기를 무턱대고 삼켰는데 지예준이 예전처럼 강선을 귀신 취급 하며 도망이라도 가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이미 벌어진 일, 애매한 변태가 되느니 끝장을 봐야 속도 시원할 것 같고.
“전공 시험은 없어?”
“……내일 하나 있어.”
그리 넓지 않은 복도를 걸어가는 도중 의도치 않게 서로 팔이 닿자마자 지예준의 어깨가 흠칫거리며 슬슬 좁아지는 게 꽤나 웃겼다.
그렇게 힘줘 봤자 근육이 빠지는 것도 아닐 텐데.
“오늘 알바도 밥 먹고 갈 거지?”
“아… 음…….”
평소와 다름없이 구는 강선의 모습에 지예준은 조금 당황한 상태였다.
저는 어제 일로 공부는커녕 잠 한숨 들지 못하고 밤을 새웠는데, 너무도 멀쩡해 보이는 강선을 보니 그가 제 거절에 화를 내지 않았음에 안심되면서도 역시 경험이 하나도 없는 자신과는 너무도 다르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시무룩해졌다.
“왜? 약속 있어?”
강선을 바라보자 오늘따라 유달리 붉은 선홍색 입술이 눈에 띄었다.
그 안에 숨겨진, 더욱 진하고 보드라웠던 것이 살짝살짝 보일 때마다 입안이 말라 지예준은 몰래 손으로 가슴께를 스윽, 문질렀다.
오늘도 햇살을 받아 반짝반짝한 눈이 저를 향해 있으니 다시금 마음이 약해지려 했다.
짝사랑이란 건 이렇게나 사람을 무르게 한다.
“……그건 아닌-”
“강 선배!”
건물을 나오며 입술을 달싹이던 지예준이 모기만 한 목소리로 대답하려는 차, 뒤에서 커다란 외침이 들려왔다.
강선을 부르는 소리인 줄 몰랐던 지예준은 걸음을 멈춘 강선보다 한 발자국 앞에서 뒤를 돌아보았다.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며 뛰어오는 이는 지난번 벚꽃주 때 서예과 4학년 대표라던 강선의 동기였다. 이름이 ‘김초희’라고 했던가.
“이 시간에 웬일?”
심드렁한 목소리에도 그는 긴 원피스 자락을 펄럭이며 턱짓으로 뒤를 가리켰다.
“교양 시험.”
“원래 이 시간에 수업인가?”
“아니. 시험 시간만 바뀐 거. 아, 안녕하세요.”
강선보다 아주 조금 더 작은 그가 꾸벅, 인사를 해 오자 지예준은 얼결에 그를 따라 고개를 숙였다.
“안…녕하세요.”
“저번에 강 선배가 흑기사 해 줬던 분 맞죠?”
“……네.”
“그때 재밌었는데. 체교과 분들이 그렇게 술을 잘 먹는 줄 몰랐어요. 하하!”
“네…….”
흑기사라는 말에 애써 묻어 두었던 창피한 과거가 퍼엉- 하고 터지는 듯했다.
김초희는 지예준이 귀를 붉히든 말든 강선의 옆에서 시험이 어쨌고, 교수가 어쨌고, 하며 조잘조잘 수다를 떨었다.
“배고픈데 밥 먹으러 갈래?”
“나 얘랑 먹기로 했는데.”
“같이 먹으면 되지. 괜찮으시죠?!”
신나게 이야기를 나누는 둘 옆에서 멋쩍게 걷던 지예준이 저를 향해 묻는 목소리에 목각 인형처럼 삐걱이며 고개를 돌리니 강선 너머로 고개를 뺀 김초희가 방긋방긋 웃고 있었다.
“아, 아니요. 저는 괜찮으니까 둘이-”
“에~이. 그러면 제가 죄송한데요… 저기 서문 쪽에 뭐 생겼다는데, 괜찮으시면 같이 가요. 네?”
“그래. 같이 가자, 준아. 응? 알바까지 아직 시간도 많잖아.”
강선만으로도 부담인데 하나가 더 붙어 버렸다.
지예준은 저를 올려다보는 두 쌍의 시선에 볼 안쪽을 꾸욱, 깨물었다.
“……알겠, 어.”
“흐흐. 체교과에 아는 사람 생겼다.”
별것 아닌 일에도 뭐가 그리 좋은지 방방 뛰며 좋아하는 모습에 지예준은 제주도에 있는 동생을 떠올렸다.
‘방학에 놀러 올 거지?’
이번 여름 방학엔 꼭 제주도로 놀러 오라며 활짝 웃던 예원과는 달리 저는 대답을 얼버무리고 말았다.
곧 다가오는 5월에 있을 실습을 마치면 기말고사가 끝나자마자 바로 울산으로 내려가 구단 훈련을 도와야 하는 일정에 절로 한숨이 나왔다.
못 간다고 하면 많이 서운해할 텐데.
“…….”
이래저래 꼬이기만 하는 날들에 번민만 늘어 갔다.
✲ ✲ ✲
김초희가 데려간 곳은 조금 특이한 우동집이었다.
메뉴는 딱 세 개밖에 없었고 가게 문에 붙은 종이엔 하루에 손님을 딱 50명만 받는다고 쓰여 있었다.
문 앞엔 대기 순서를 적는 노트 같은 게 놓여 있었지만, 아직 이른 시간이라 그런지 이들을 본 사장은 그냥 들어오라며 가게 문을 활짝 열어젖혔다.
“생긴 지 얼마 안 됐나 봐?”
“응. 이번 학기 초에 생겼댔어.”
안내받은 자리에 먼저 앉자 맞은편엔 김초희가, 오른편엔 지예준이 자리했다.
메뉴가 겨우 세 개라 딱히 고를 필요가 없어 있는 걸 하나씩 주문한 뒤 강선은 먼저 받은 물티슈로 손을 닦았다.
“서문도 오랜만이네.”
“그러게. 맨날 축제 때나 어쩌다 한 번 오지, 평소엔 올 일도 없으니까. 예준 씨도 서문은 잘 안 오시죠?”
“네? 아, 네…….”
식당까지 어떻게 왔는지 기억도 안 날 정도로 정신이 나가 있던 지예준이 저를 향한 물음에 어깨를 움찔, 떨자 김초희는 덩치에 비해 참 놀랄 것도 많다 생각하며 테이블 위로 팔꿈치를 걸쳤다.
“그런데 예준 씨는 언제 강 선배랑 친해지신 거예요? 저 인간, 보기보다 되게 까탈스럽지 않나?”
“앞담 잘하네.”
“이거 봐요, 으하하.”
저렇게 막말을 하다니.
당사자가 보는 앞에서 ‘저 인간’이라느니, 까탈스럽다느니 하는 김초희의 언행에 지예준은 손끝까지 땀이 들어차는 기분이었다.
아무리 둘이 친하다고는 하지만, 저렇게까지 말해도 괜찮은 걸까?
김초희도 하지 않는 걱정을 사서 하던 지예준은 강선의 표정을 살폈으나 오히려 그는 익숙하다는 듯, 아니. 아예 김초희의 말을 신경도 쓰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이제 막 안면을 튼 지 몇 개월 된 저와 달리 김초희와는 오랜 시간을 알고 지냈으니 차이가 나는 건 어쩔 수 없을 테지만…….
마음속으로 스멀스멀 들어오는 것은 과분한 질투심이었다.
“……강선이 착해요.”
때문에 김초희의 말이 장난임을 알아도 툭, 말을 뱉고 말았다.
“엥, 강 선배가요?”
지예준의 말을 예상하지 못한 듯, 그 당사자인 강선이 저를 향해 고개를 돌리는 것이 느껴졌다.
마주 닿지도 않은 시선에 왼쪽 볼이 간지러웠다. 차마 그 눈을 마주칠 수 없어 김초희의 손목에서 달랑거리는 팔찌 끝만 바라보았다.
“배려심도 많고… 까다로운지는 모르겠지만 저는 그렇게 느낀 적이 없어서요.”
별것도 아닌 일에 진지하게 반응하는 것 같아 이미 부끄러움은 한계를 넘어갔지만, 혹시나 김초희에게 실례가 되는 말일까 싶어 멋쩍은 척, 입꼬리에 힘을 주자 볼 끝에 조그마한 우물이 패였다.
걱정과 달리 김초희는 흥, 하고 웃으며 물 잔을 만지작댔다.
“또, 또 이거 순진한 사람 홀라당 잡았구만.”
“뭐래. 얘가 착해서 그래. 그치, 준아.”
강선은 저를 보지 않는 지예준에게 손을 뻗어 그의 의자 등받이에 팔을 걸쳤다.
몸도 아니고 겨우 옷자락 끝이 닿은 것뿐인데도 꼭 강선이 제 등을 껴안고 있는 것 같아 지예준은 허리에 힘을 주며 등받이에서 몸을 아주 조금 떼어 냈다.
바로 어젯밤 있었던 일을 저만 깊이 담아 두고 있던 것인지… 아까부터 티가 날 정도로 어색하게 구는 저와 다르게 강선은 평소와 너무도 똑같아 시간이 갈수록 기분이 싱숭생숭, 이상해졌다.
“그런데 둘은 어떻게 친해진 거야? 난 선배가 체교과 사람이랑 알 정도로 사회성이 뛰어난 줄 몰랐잖아.”
“교양 팀플 같이해서.”
“오… 그런데 이렇게 친해졌다고?”
“어. 그렇…게 됐어.”
강선의 마지막 대답은 아주 미묘하게 늘어졌지만 누구도 그것을 눈치채지 못했다.
사실, 강선은…….
‘아, 돌겠네.’
지예준을 어떻게 해야 넘어뜨릴 수 있는지에 대해 아주 혈안이 났기 때문이었다.
반강제적으로 어찌어찌 진도를 빼긴 했지만, 그가 이런 쪽으로 생 초보라는 걸 어느 정도는 이해해야 했다.
‘진도가 너무 빠른 것 같아.’
‘손도 잡았고 포옹도 했고 키스도 했고 목이며 가슴까지 오픈했는데 이게 빠르다고 하면 다시 손부터 잡자는 건가.’
지예준을 이해하자고 생각한 지 1초 만에 다시금 불만 섞인 의문으로 돌아갔다.
앞에선 김초희가 새로 개봉한 영화에 대해 뭐라 떠들고 있고, 지예준은 어딘가 굳은 모습으로 물티슈만 꼬집어 대고 있었다.
아까부터 저를 쳐다보지도 않으면서 왠지 어제 일을 모르는 체하는 것 같은 그가 얄미워 강선은 등받이에 올렸던 팔을 들어 엄지로 그의 날개뼈 부근을 스윽, 훑었다.
의도가 다분한 손가락이 닿자마자 몸을 움츠린 그에게서 얇은 운동복 자락이 바스락대는 소리가 들렸다.
등받이에 닿을 듯 말 듯 했던 등이 완전히 떨어지고 지예준은 이미 다 비운 잔에 물을 따르며 딴청을 피웠다.
‘이게…….’
역시, 자신이 잘못 느낀 게 아니었다.
지예준은 어제 일을 애써 무시하고 있거나, 혹은 너무 신경이 쓰여 저를 못 보고 있는 것이 확실했다.
그게 아니라면 이렇게 노골적으로 제 손을 피하며 남 보기에도 민망할 정도로 귀를 붉힐 리가.
연애는 안 해 봤어도 이런 쪽으로는 남다른 감을 가진 저에게 지예준의 반응은 너무도 뻔할 뻔 자였다.
“아, 음식 나왔다.”
강선은 테이블 위에 차려지는 음식을 보며 친근하게 그의 등을 다시 매만졌다.
등을 도닥이고 은근하게 허리께를 쓸어내리며 손을 거두니 순식간에 분홍색으로 물든 목에 핏줄이 섰다.
“예준 씨, 더우면 겉옷 벗는 게 낫지 않아요? 곧 벚꽃도 지는데.”
“그래, 준아. 더운데… 벗으면 좋지.”
음식이고 뭐고 눈 둘 곳을 찾지 못하는 그를 보며 강선이 장난스레 미소 지었다.
✲ ✲ ✲
“선배는 이번 방학에도 공방 출근이야?”
“시간 봐서.”
입안에서 착착 감기며 바질 향이 가득 퍼진 면 사이로 아주 은은한 간장 양념과 함께 잘게 다진 소고기가 씹히는 맛이 가히 일품이었다.
또 다른 우동은 면이 검은색이었는데, 그와 달리 맑고 기름진 육수는 감칠맛의 깊이가 남달랐으며 유일하게 면 요리가 아닌 해산물 롤은 과장을 더해 크기가 아이 얼굴만 했다.
참치와 연어, 새우, 아보카도 등 여러 재료가 똘똘 뭉쳐 있어 젓가락으로 쪼개 먹어야 하는 게 조금 불편했지만 오히려 그것이 서로의 맛을 해치지 않았고, 무엇보다 양이 엄청났다.
우동집치고 가격대가 조금 있다는 생각은 했지만, 이 정도면 이해하고도 남을 맛이었다.
“여기 맛있다.”
“선배가 딱 좋아할 스타일일 것 같더라고. 상연 선배도 부를 걸 그랬나?”
“걘 이제야 일어났을걸.”
“아~ 그러네. 요즘 뭔 승급전인가 뭔가 한다고 했었나? 하여간에 4학년 맞나 몰라.”
“방학 끝나면 제대로 시작하겠지.”
테이블 가운데 놓인 바질 우동을 앞 접시로 덜며 말하자 김초희는 어련하시겠다는 듯 어깨를 으쓱였다.
“난 방학 때 대회나 나갈란다.”
“왜?”
“컴퓨터랑 핸드폰 바꿔야 하는데 모아 둔 돈 쓰긴 좀 그래서.”
강선과 한상연이 워낙 뛰어나 눈에 띄지 않았을 뿐, 이들 못지않게 한 실력 하는 김초희는 대회 상금으로 목돈을 모으는 게 취미였다.
교수들이 올해 4학년들에게 괜히 기대를 거는 게 아니었다.
“지방으로 가게?”
“응. 이번에 안동 대회가 상금이 괜찮더라. 한강예술제는 너무 빡세서. 딱히 스펙 쌓을 생각도 아니니까.”
대회 참가 전부터 아무렇지 않게 상금이니 스펙이니 하는 대화 속에서 귀만 열어 둔 채 묵묵히 식사를 하던 지예준에게 김초희가 아차, 하며 입을 열었다.
“예준 씨는 방학에 뭐 하실 거예요?”
“아… 5월에 실습 끝나면 바로 아버지 일 도우러 가야 해요.”
“아버지 일이요? 와, 뭐 하시는데요?”
“음, 야구 구단에서 코치 일을-”
‘코치 일을 하신다’며 말을 채 마치기도 전에 김초희가 손바닥으로 테이블을 내리쳤다.
“어디요?!”
“……세진 돌-”
“흐어어어억!”
“김초희, 시끄러.”
난데없이 질러 댄 소리에 ‘세진 돌핀스요……’ 하는 목소리가 그대로 묻혀 버렸다.
“개세진… 아, 아니. 죄송해요. 와, 대박. 예준 씨 아버님이 세진 코치세요?”
“……네.”
김초희는 양손을 입가에 모으며 연신 우와, 우와, 감탄했다.
놀란 것은 강선도 마찬가지였다. 지난번엔 고등학교 야구부라고 했던 것 같았는데, 프로 야구라니.
“고등학교 야구부라고 하지 않았어?”
“……으응. 나도 옮기신 줄 몰랐네. 원래 다른 구단에 계시다 쉴 겸 학교로 가시긴 했지만…….”
지예준은 아버지 이야기를 꺼내는 게 어딘가 불편한 듯 주먹을 쥐었다 폈다 하며 침을 삼켰다. 그 모습에 이유 모를 기시감을 느낀 강선이 입을 다물자 김초희가 눈을 반짝이며 지예준을 향해 몸을 숙였다.
“그럼 방학에 울산으로 가시는 거네요? 와… 저 표영준 팬이거든요. 그런데 교생 실습도 하고 바로 울산 내려가는 거면 좀 힘드시겠다… 아예 코치 쪽으로 생각 중이신 거예요?”
“네? 아, 아뇨. 구단은 그냥 아버지 도와드리러 가는 거라…….”
“그럼 겨울 캠프도 따라가시는 거예요?”
“……그건 잘 모르겠어요.”
“혹시 괜찮으시면 사인 좀 부탁드려도 될까요?”
김초희의 얼굴이 밝아질수록 지예준의 안색은 점점 잿빛이 되어 가고 있었다.
조금 전까지만 해도 별다른 것 없이 밥만 먹던 사람이 저러니 강선은 낌새가 이상해졌음을 감지했다.
그나저나 울산이라니. 심지어 잊고 있던 교생 실습까지…….
“잠깐만. 준아, 교생 실습이 언제라고 했지?”
“어? 아, 실습. 다음 달부터인데… 왜?”
강선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치고 싶은 충동을 억누르며 숨을 들이켰다.
✲ ✲ ✲
“나 간다. 예준 씨, 다음에 또 같이 밥 먹어요. 선배랑 같이.”
“네. 조심히 들어가세요.”
한 시간 뒤에 다른 교양 수업 시험이 있다며 김초희는 다시 학교 쪽으로 몸을 돌렸고, 강선은 인파 사이로 김초희의 모습이 사라지는 것을 보다 시간을 확인했다.
“여기서 버스 타고 가야겠다.”
“응.”
걸어가기엔 시간이 애매하게 남았으니 서문에서 버스를 타고 아예 수영 센터까지 가는 게 빠를 것 같아 둘은 큰길로 나와 인근 버스 정류장까지 걷기 시작했다.
이제 머리 위까지 올라오려 하는 햇살이 제법 따가웠다.
아직 이르다고 생각하지만, 가는 길엔 이따금씩 반팔 소매 차림으로 다니는 사람도 몇 명 있을 정도였다.
“김초희랑 밥 먹는 거 괜찮았어?”
“……왜?”
툭 던진 물음에 지예준의 얼굴의 의문이 서렸다.
정말 모른다는 듯 구는 그에게 강선이 씨익, 미소 지었다.
“다른 사람이랑 가까이 있는 거 어려워했잖아.”
“아… 응. 괜찮았어. 직접 몸이 닿거나 잡히는 것만 아니면 괜찮아.”
강선은 내심 지예준이 저와 훈련 아닌 훈련을 해 왔기 때문에 괜찮아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렇지만, 그건 또 아니라니.
과 사람들과 한데 엉겨 술 게임을 하던 것이나 교양 첫날에 제 옆자리에 앉았던 일을 떠올리니 납득이 가는 이유였다.
정류장에 도착하니 수영 센터를 지나가는 버스가 도착하기까지는 약 20여 분이 남아 있었다.
생각보다 오래 기다려야 하는 대기 시간에 놀라 강선과 지예준은 안내판을 보다 서로에게 눈을 돌렸다.
“어떡할래? 기다릴 거야?”
걸어가기엔 20분이 훨씬 넘을 테니 빨리 가려면 택시밖에 답이 없어 물으니 손목시계를 보며 잠시 생각하던 지예준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택시 타야 할 것 같아.”
“음. 그렇지, 아무래도.”
개발을 시작한 지 얼마 되지 않아 인적은 드물지만 큰길이니 지나가는 택시는 있을 거라며 강선은 도로 끝을 바라보았다.
여기까지 데려온 건 저였으니 지예준이 늦지 않게 갈 수 있도록 책임을 져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차도 몇 대 다니지 않는 황량한 도로엔 택시는커녕 그 흔한 배달 오토바이 하나도 잘 보이지 않았다.
“……왜 이렇게 차가 없지.”
안 그래도 넓은 캠퍼스에서 서문 쪽은 이과 계열 학과만 가득했기에 대학에 다니며 이 동네를 와 본 적은 강선도, 지예준도 다섯 손가락 안에 꼽을 정도였다.
때문에 둘은 서문 사람들이 급하게 버스를 타야 할 땐 남문까지 간다는 사실 또한 알 리가 만무했다.
지금이라도 콜택시를 불러 애를 태워야 하나, 하는 생각에 강선이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려던 순간이었다.
웬 넓적한 스포츠카 한 대가 두 사람 근처에서 급히 속도를 줄이며 천천히 다가오더니 정확하게 그들 앞에 정차했다.
그러나 오랜만에 열어 보는 택시 호출 어플에 버벅이느라 그것을 보지 못한 강선은 차가 앞에 서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차를 본 건 지예준뿐이었다.
천천히 내려가는 조수석 창문 너머로 나타난 얼굴에 지예준은 깜짝 놀랄 수밖에 없었다.
“안녕하세요.”
하얀 와이셔츠에 서글서글한 웃음을 머금고 두 청년에게 인사를 건넨 건, 지예준도 익히 아는 얼굴이기 때문이었다.
“강선아, 형 보고도 인사 안 하니?”
“……뭐야?”
저를 부르는 소리에 그제야 반응해 고개를 든 강선은 예고 없이 등장한 7번의 차에 하마터면 핸드폰을 놓칠 뻔했다.
“버스 기다려?”
“형이 왜 여기 있어?”
“나? 동생 데려다주러… 아, 맞다. 너도 이 학교 다녔지?”
강선은 7번의 남동생인지 여동생인지가 고결대 학생이라는 것을 뒤늦게 기억해 냈다.
예전에 종종 얻어 탔던 스포츠카는 여전히 때깔이 고왔지만, 그 안에 든 건 구렁이 한 마리였기에 강선은 한 발짝 뒤로 물러섰다.
“안녕하세요.”
그는 강선이 저에게 보이는 노골적인 반응에도 눈 하나 깜빡 하지 않으며 지예준을 향해 태연하게 말을 건넸다.
“어디 가시는 길이에요?”
대화의 화살이 저를 향해 바뀌자 잠시 눈이 커졌던 지예준이 7번을 향해 꾸벅, 인사했다.
“아, 네. 아르바이트 하러…….”
“어느 동네에 있는 건데요?”
“남문 쪽이요.”
그 말에 혼잣말로 ‘남문?’ 하던 7번은 혼자 고개를 끄덕이더니 조수석 잠금 장치를 철컥, 풀어냈다.
“그럼 태워 줄게요. 나도 마침 그쪽 지나가는 길이니까.”
“안 돼.”
“강선이 너도 타. 너희 집도 그쪽 아닌가?”
“택시 탈 거야.”
“오늘 아침 뉴스 보니까 기본요금이 몇백 원이나 올랐다더라.”
“알 게 뭐야.”
단 한 마디도 지지 않는 대답에 7번이 절레절레 고개를 저었다.
지난번 식당에서 만났을 땐 8번이 될지 모르는 저 친구 앞이라 그런지 그래도 좀 참는 것 같더니만, 그것도 잠깐이던 모양이다.
“거참, 성질머리… 그럼 친구분만 타세요. 강선이 쟨 두고 가죠, 뭐. 아르바이트 늦으신 거 아니에요?”
“네? 아…….”
강선과 7번 사이에 낀 지예준은 옆으로 시선을 돌렸다.
지금 출발해야 안정적인 시간에 도착할 수 있기는 하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강선이 저 사람을 아주 싫어하는 것 같아 저 또한 이렇다 할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겨우겨우 택시를 부르긴 했지만, 택시 또한 하필 멀리 있는 게 잡혀 거의 5분을 기다려야만 했다.
“어차피 가는 길이니까 부담 가지지 말고 타세요.”
택시도 별 거지 같은 게 잡힌 마당에 곤란해하는 지예준을 보니 정말 일이 꼬여도 제대로 꼬였다.
셋이 타려면 분명 자신이 조수석에 앉아야 할 텐데, 7번 옆에 앉기는 죽어도 싫고, 그렇다고 둘 다 뒷좌석에 앉자니 7번을 운전기사 취급하는 것 같아 나중에 그걸로 꼬투리 잡힐 게 뻔하니 답은 지예준만 보내는 것뿐이었다.
늘 여유 부리는 척하면서 은근히 거머리처럼 들러붙었던 7번이었기에 강선은 6번이 아니라 7번 먼저 정리했어야 했다며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러나 후회는 늦었고 당장 보이는 건 7번이었으며 조금만 더 지체하면 지예준의 지각이 코앞으로 다가올 게 뻔했다.
“난 잠깐 과실에 들러야 해서. 준아, 괜찮으니까 먼저 가.”
“어, 어?”
지예준의 등을 살짝 두드리며 뒤로 더 물러나자 그는 당황한 얼굴로 강선을 돌아보았다.
“이러다 지각하겠다. 빨리 가.”
“그래요, 친구분. 나도 여기 계속 차 대고 있기 좀 그런데.”
둘의 행동을 흥미롭게 관찰하던 7번이 내뱉은 말에 강선은 ‘허튼소리 하면 죽는다’며 눈짓을 보냈다.
당연히 7번은 모르는 척 고개를 갸웃할 뿐이었지만 말이다.
“이따 연락할게. 잘 다녀와.”
이대로 정말 차를 타도 되는 걸까.
당혹스러운 상황에 어쩔 줄 몰라 하던 지예준은 다시 한번 제 등을 미는 손길에 엉거주춤 허리를 숙여 조수석 문을 열었다.
“강선아, 다음에 식당 놀러 와.”
7번은 조수석 문이 닫히자마자 강선에게 인사를 건네더니 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과실에 들러야 한다는 말은 없었는데.’
사이드미러 너머로 강선의 모습이 빠르게 멀어져 갔다.
✲ ✲ ✲
“강선이랑 친해요?”
“……네?”
“아, 이게 아니지. 강선이랑 사귀어요?”
“네, 네?!”
하마터면 천장에 머리를 찧을 뻔했다.
예상치 못한 질문에 펄쩍 뛰는 반응을 보며 7번은 가볍게 하하, 웃었다.
식당에서도 느낀 것이지만, 저 예비 8번의 시선은 언제나 강선을 향하고 있었다. 꼭 관심받길 원하는 강아지처럼 말이다. 정작 본인은 눈치채지 못한 것처럼 보였지만.
일전에 강선에게 고백했다 차인 전적을 갖고 있는 7번이었으나 아무렇지 않게 파트너 관계를 이어 가는 강선에게 복수라고 하기엔 거창하지만 장난이라고 하기에도 그리 가볍지만은 않은 묘한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내가 형이랑 왜 사귀어? 난 아저씨 싫어해.’
정의하자면 그냥, 작은 심술이라고 해야 할까.
한 톨의 악의도 없이 남 가슴에 비수를 꽂던 스물다섯 강선은 그때나 지금이나 여전했다.
“이름이 뭐예요?”
“지, 지예준이요…….”
“예준 씨는 강선이 좋아해요?”
직설적인 물음에 그의 얼굴이 조금씩 붉어졌다. 강선이 좀 많이 밝힌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이런 곰 같은 놈이라니.
무릎 위에 가지런히 놓인 손 크기나 몸 골격이 딱 봐도 운동선수쯤은 되어 보였다. 그럼에도 이렇게 순진하게 구니 저가 아는 강선이라면 이 월척을 가만히 놔둘 리 없을 터였다.
망설이던 끝에 아주 작은 목소리로 ‘네…’ 하며 대답하는 그의 모습에 저런 갭이 강선을 환장하게 한 게 아닐까, 하는 마음이 들었다.
“강선이한테 맞춰 주려면 밤에 고생깨나 할 텐데.”
“네?”
“네?”
‘아, 이런.’
당연히 둘이 잤다고 생각했기에 나온 말이었는데, 반응을 보니 영 아닌 모양이었다.
강선이라면 이미 일을 치르고도 남았을 텐데.
‘강선 이게 웬일이지.’
아차, 싶은 마음에 7번은 황급히 말을 이어 나갔다.
“애가 야식 같은 것도 잘 안 먹고, 입이 까다롭잖아요. 그 나이 땐 밤에 치맥도 하고 그럴 텐데.”
“아… 저도 야식은 잘 안 먹어서요. 술도 못 마시고…….”
“그렇구나. 다행이네요.”
굳은살이 자잘하게 박인 손으로 부끄럽다는 듯 목덜미를 쓸어내린 지예준은 비록 두 번째 만남이지만 누군가와 이런 이야기를 한다는 사실에 새로운 기분을 느꼈다.
강선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 같으니 잘하면 그에 대해 몰랐던 것을 알 수도 있지 않을까.
“고백은 했어요?”
“……네.”
“그럼 이제 사귀는 건가?”
“……아.”
그러나 조금 전의 설렘이 무색하게도, 7번이 머쓱한 상황을 무마시키려 돌린 화제인 줄 모르는 지예준은 그 물음에 순간 머릿속이 차갑게 식음을 느꼈다.
“아, 사귀는 건 아니에요?”
그리고 다른 의미로 다시금 되풀이되는 어제의 일.
‘너, 나 좋아하잖아.’
‘나 안 좋아하는데 나랑 키스한 건가?’
“예준 씨?”
“……아. 네.”
그러고 보니, 강선은 저에게 자신을 좋아하냐 묻기만 했지, 본인의 마음이 어떻다고는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었다.
무엇보다, 제 고백에 대한 대답조차…….
“사귀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급격히 낮아진 목소리에 7번은 또 뭔가 실수를 했나 싶어 옆을 흘끗 바라보았지만, 지예준은 불시에 찾아온 혼란에 떨어지려는 심장을 겨우 붙잡고 있을 수밖에 없었다.
어제 일이 꿈같다고만 생각할 게 아니었다.
✲ ✲ ✲
“무슨 일 생기면 연락해요. 다음에 강선이랑 같이 밥 먹으러 와도 좋고.”
“……감사합니다.”
7번이 내민 명함엔 그의 식당 이름과 함께 개인 전화번호가 적혀 있었다.
겨우 두 번 본 사이에 이런 것까지 알려 줘도 되나 싶었으나 이리저리 흔들리기만 하는 심란함에 축 처져 명함을 손에 쥐고 꾸벅, 고개를 숙였다.
“데려다주셔서 감사합니다.”
“뭘요. 강선이 친군데.”
친구.
짙은 눈썹 끝이 끝도 모르고 아래로 내려갔다.
‘쉬운 거야 바보인 거야.’
강선과 동갑이라면 스물여섯 정도일 텐데 군대도 다녀왔을 놈이 뭐 저리 물렁한지.
조금만 더 가만히 내버려 두면 곧 땅으로 꺼질 기세인 그를 보며 상당히 시대착오적인 생각을 하던 7번은 지예준이 조수석으로 손을 뻗음과 동시에 그의 어깨 위로 손을 올렸다.
“아!”
타악, 하고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내쳐진 손이 핸들에 부딪쳤다.
아플 정도는 아니었으나 찰나에 일어난 상황에 은근히 웃는 상이던 눈이 크기를 키웠다.
“아, 죄, 죄송, 죄송해요.”
“예준 씨?”
이게 지금 무슨 상황이지.
7번의 얼굴이 황당함을 넘어 조금 불쾌한 기색을 띠기 시작했다.
자신이 뭘 한 것도 아니고 너무 생각이 많아 보여 위로라도 해 주려 했더니 웬 과민 반응이란 말인가.
놀란 것은 지예준도 마찬가지였다.
그동안 강선과 함께 있어 내심 조금은 괜찮아졌을 것이라 생각해 왔는데 몸은 전혀 변한 게 없었다니.
밖이라면 어깨를 피하거나 하며 슬쩍 거리를 두었겠지만, 좁은 차 안이다 보니 절로 손이 올라간 모양이었다.
숨 막힐 듯 팽팽해진 공기에 손끝이 떨려 왔다.
“정말 죄송해요. 제가 좀, 누구랑 닿는 게 좀, 그래서…….”
대역죄라도 지은 듯 얼굴까지 새하얘진 모습에 놀라 괜찮으냐며 등이라도 토닥여 주려던 7번이 뒤이은 말에 ‘네?’ 하고 눈을 찌푸렸다.
지예준의 시선은 저가 아닌 제 손에 가 있었고, 심지어 똑바로 앉아 있던 그의 어깨가 창문에 바짝 닿아 있었다.
싸해진 분위기 속에서 한동안 말이 없던 둘 중 먼저 입을 연 건 7번이었다.
그는 어정쩡하게 올라가 있던 손을 거두어 핸들 위에 툭, 얹어 놓았다.
“강선이가 좋아하는 게 뭔 줄 알아요?”
“……네?”
혹시나 강선이답지 않게 플라토닉한 사랑이라도 하는 건가 싶었던 마음이 싸그리 증발하고 그 아래 남은 찌꺼기조차 에휴휴, 하는 한숨에 먼지처럼 날아가 버렸다.
강선이 왜 이 순둥한 놈을 놓지 못하고 지켜보고만 있었는지 조금은 알 것 같았다.
7번이 아는 강선은 보기와 달리 욕심이 많고 취향이 너무나 확고한 이였다.
얼굴도 얼굴이지만 저 몸은 확실히 강선을 위해 어느 신이 정성스레 빚어 갖다 놓았다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다.
“걔는 예준 씨 같은 사람을 좋아해요.”
정확히는 몸을.
“예준 씨는 강선이 취향을 빼다 박았거든요. 키도 크고 몸도 좋으니까. 어린 게 눈은 높아서… 아, 욕 아니고 칭찬인 거 알죠?”
일부러 그의 가슴 쪽으로 눈짓하며 싱긋, 미소 짓자 꾹 다물고만 있던 지예준의 입술이 서서히 벌어졌다. 강선의 이름만 나와도 열이 올랐던 그의 귓불이며 목덜미는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생각할 겨를도 없이 얼이 빠진 것이었다.
“난 글렀지만, 강선이랑 잘해 봐요. 둘이 잘 어울리던데.”
누가 만지는 걸 싫어한다니.
사실인지는 몰라도 강선 입장에선 꽤 애를 먹을 상황이 분명할 것이다. 딱 봐도 섹스는커녕 제대로 뭘 해 본 적도 없어 보이는 이 불쌍한 놈을 강선의 거미줄에 갖다 바쳐도 말이다.
이건 늘 여유를 부리며 이래도 흥, 저래도 흥, 하던 강선을 제대로 골릴 수 있는 기회였다.
7번은 자신이야말로 나잇값을 못 하고 있다는 걸 망각한 채 이젠 흥미를 넘어 둘의 관계에 쏠쏠한 재미를 붙였다.
“아, 비밀 하나 알려 줄까.”
지예준은 여전히 멍한 얼굴로 ‘네…?’ 하고 겨우 대답했다.
7번의 손이 거침없이 향한 곳은 조수석에 달린 글로브 박스였다.
“강선이는 혼자 자는 걸 정말 싫어하거든요. 무서운 꿈을 꾼다고.”
악몽.
강선이 나쁜 꿈을 꾼다는 건 예전에 들은 적이 있었다. 어릴 때부터 늘 따라온 꿈이지만 성인이 되어서도 무서운 건 똑같다며 제 손을 잡아 오던 밤에.
지예준이 자신의 비밀을 알려 줬으니 저 또한 알려 줘도 괜찮다며 제 비밀을 꺼냈던 강선의 목소리와 꼭 맞잡은 손의 온기가 여태 생생했다.
“……손잡고 자면 괜찮다고 했는데.”
“아, 뭐야. 알고 있었어요? 손도 잡고, 같이 자기도 했고? 그럼 더 쉽겠네.”
능숙하게 커버를 연 그는 잘 보이지 않는 구석까지 손을 넣어 무얼 찾듯 뒤적거리더니 손바닥보다 조금 더 작은 상자를 꺼내 지예준의 다리 위로 휙, 던졌다.
“그거 가지고 가요. 나머지는 강선이가 알아서 해 줄 테니까.”
✲ ✲ ✲
잘 도착했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