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
“…….”
“일어났어?”
목에 잔 입맞춤을 하며 쪽쪽, 타고 올라온 입술이 턱 끝에 닿았다. 미지근한 혀가 할짝, 아랫입술을 건드림과 동시에 고개를 숙인 지예준이 강선을 깊이 끌어안았다.
크게 숨을 들이쉬느라 부푼 가슴팍에 강선이 어제처럼 마구 볼을 비볐다. 혹시 가슴을… 좋아하는 건가.
“……잘 잤어?”
“응.”
다행이다.
밤새 강선이 어디로 가지 못하도록 꽉 안고 잠들었던 기억과 달리, 막상 일어나 보니 제 팔은 나른히 풀린 채 강선의 허리 위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었다.
강선이 깨지 않도록 알람을 진동으로 맞추었는데 그 노력이 무색하게도 먼저 눈을 뜬 건 강선이었다.
“더 자.”
혼자 잘 땐 누구보다 일찍 일어나지만 옆에 누군가 있으면 업어 가는 줄도 모르고 자던 강선이었던지라 지예준은 저를 따라 일어나려는 그의 어깨를 지그시 눌렀다.
그러나 곧 다가올 이별에 잠이 달아난 강선이 닿은 손에 깍지를 끼며 엄지에 이를 세웠다. 그저 저를 재우기만 하려는 지예준에게 심술을 푸는 행위에 불과했지만 이제 막 눈을 뜬 당사자에겐 그 통증마저 야릇했다.
안 그래도 불긋한 자국이 잔뜩 난 몸이 눈앞에 어슬렁거리니 자꾸만 아래가 빠듯해지고 있었다.
“너 두고 잠만 자라고?”
응? 하고 물어 오며 올라온 몸이 은근슬쩍 아래를 주물렀다.
“너 없을 동안 혼자 자려면 미리 충전해 놔야 되는데…….”
“……강선아.”
어쩐지 품 안에 가두고 있던 몸이 왠지 모르게 부드럽다, 했다.
강선은 자기 전까지만 해도 입고 있던 잠옷 차림이 아닌, 몸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모습으로 지예준을 내려다보았다. 그럴 일은 없을 텐데도 혹시나 강선이 떨어질까 염려된 지예준의 양손이 맨 허벅지를 크게 감싸 쥐었다.
“하자.”
말랑한 엉덩이가 단단해지기 시작한 성기를 꾹꾹 자극했다.
이성이 어떻게 되는 줄도 몰랐던 어젯밤 일이 불붙은 성냥보다 빠르게 타올라 아른거렸다.
“강, 강선아.”
“너 아직 일어날 시간 아니야. 한 시간 남았으니까… 응?”
어느새 옷 안으로 스멀스멀 들어온 손이 또렷하게 쪼개진 근육들을 어루만졌다.
단단한 배를 타고 올라와 근육 덩어리로 된 가슴을 꽈악 움켜쥐자 갑작스러운 아픔에 지예준의 입에서 읏, 신음 소리가 흘렀다.
“강선아… 혹시…….”
“으응?”
“……가, 가슴… 좋아해…?”
가슴을 자극당한다고 해서 달리 특별한 느낌이 드는 것은 아니었지만 강선이 좋아한다면 언제든 내어 줄 의향이 있었기에 물어본 말이었다.
‘으음… 그런가?’ 하며 강선은 양손으로 그것을 실컷 주물렀다. 하도 꽉 쥐어서 여기저기 손톱자국이 남았다.
지예준을 하나하나 벗겨 발라먹기에 한 시간은 턱없이 부족했지만 이대로 그를 보내고 싶지 않았다.
묵직하고 굵은 성기가 헐렁한 바지춤에서 덜렁, 모습을 드러냈다. 탄력적으로 튕겨 나온 성기 끝이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바람에 지예준의 얼굴이 사과처럼 붉어졌다.
“누가 이렇게 세우래.”
“아, 미, 미안…….”
강선을 지탱하랴, 얼굴을 가리랴, 바빠진 손이 이도저도 못하며 허공을 맴돌았다.
그 모습이 강선에겐 몹시 가학적으로 다가왔다. 괴롭히고 싶고, 더 부끄럽게 하고 싶었다. 지금껏 다른 사람들과 숱하게 몸을 섞어 봤지만 이런 감정은 처음이었다.
몸을 숙여 협탁으로 손을 뻗은 강선이 새 젤 통을 꺼내 포장 비닐을 벗기고는 여전히 엉덩이 사이를 비집고 튀어나온 성기 위로 그것을 한가득 부었다.
차갑고 진득한 느낌에 놀랐는지 허벅지 아래에 닿아 있던 그의 허리가 잘게 경련했다.
“넣고 싶어서 이런 거 아니야?”
“아, 아니… 흣-”
미끌미끌한 성기가 금세 프리컴을 뱉어 냈다. 살 위로 툭툭 불거진 힘줄이 지문에 뭉개졌다.
뿌리부터 귀두까지 흡사 자위를 하듯 왕복할수록 안에 용수철이 박혀 있던 것처럼 점점 더 커지는 모습에 강선의 입에서 기대 섞인 한숨이 후우, 터져 나왔다.
“넣어 달라고, 해 봐.”
“강선아, 지금…….”
“왜, 싫어?”
허리를 들고 손에 잡힌 기둥 끝을 입구에 걸쳤다. 삽입을 하진 않았지만 귀두와 만난 좁은 구멍 끝이 작은 촉수처럼 물 듯 말 듯 빠끔거렸다.
어제 하도 쑤셨던 통에 몸만 내리면 언제든 넣을 수 있었지만 강선은 입술을 깨물며 충동을 참아 냈다.
“예준아… 나랑 섹스하는 거 싫어? 아니면 내 몸만 좋아서 이렇게 세운 거야…?”
고의 섞인 도발에 잘생긴 미간으로 주름이 생겼다. 지예준이 이 행위를 싫어할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일부러 아쉬운 말말 골라냈다.
“싫으면 안 할- 아-!”
아, 너무 놀렸나.
단번에 뒤집힌 몸이, 다리가, 그를 사이에 두고 양옆으로 벌어졌다. 저항 없이 쑤우욱- 들어온 것이 처음부터 깊은 곳을 관통했다. 예고 없이 들이닥친 강한 쾌감에 턱 끝까지 숨이 틀어막혔다.
“흐으, 힉…!”
“강, 선아, 강선…아.”
“아읏, 왜, 갑자, 기, 넣… 아, 앙, 흐응! 아앙-!”
아앙, 이라니. 듣기 민망한 제 신음에 놀란 강선이 가슴을 밀어 내든 말든, 지예준은 강선이 저 때문에 흥분했다는 사실에 머리끝까지 흥분했다. 이제 막 잠에서 깼음에도 퍼억, 퍽, 아래를 힘차게 내려찍었다.
“내가, 하, 너를, 왜… 왜, 싫어해.”
“빨, 라, 너무, 아, 흐윽, 배, 배 들어… 앗…!”
몇 번 움직이지 않았는데 아래에서 묽은 것이 팟, 터져 나왔다. 지예준이 강선의 안에서 사정한 것이었다. 내벽에서 꿀렁이며 움직이는 느낌이 꼭 소리를 내는 것만 같았다. 사정했음에도 움직임을 멈추지 않아 젤에 잔뜩 젖은 삽입부에서 끈적이고 질척한 소리가 빠르게 퍼졌다.
“아, 아아, 하, 흐으으, 이상, 해, 흐아!”
“하아, 좁아…….”
“좁, 아?”
“흐읏, 응… 강선아, 아…….”
귓가를 느릿하게 스치는 말에 허리 아래로 힘이 들어갔다. 좁다면서 이름을 부르는 건 또 무슨 예쁜 짓이지.
가만히 있어도 터뜨릴 듯 조이는 내벽이 힘을 받아 꾸욱, 꾸욱, 성기를 쥐어짰다.
그 강한 자극에 결국, 침대를 짚고 있던 팔이 무너지고 말았다. 두 가슴이 깊이 맞닿았다.
단단하게 근육이 선 팔로 강선을 빈틈없이 끌어안은 지예준이 아까보다 더욱 빠르게 허리를 움직였다. 강선의 성기가 서로의 배 사이에서 뭉개지듯 눌렸다.
“흐윽-!”
이런 걸 생각한 게 아니었는데.
지예준의 위에 앉아 섹스를 조르는 그를 느긋하게 놀리려던 계획이 아득하게 멀어졌다.
헐떡이는 것조차 할 수 없이 아무렇게나 나오는 숨에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렀다.
그와 제 몸 사이에 갇힌 손바닥으로 단단한 가슴이 넘치도록 쥐어졌지만 그것을 여유롭게 감상할 정신이 없었다.
“주, 아, 준아, 하아, 아, 또, 싸, 흐으으-!”
흐윽, 억눌린 신음이 강선의 목덜미를 씹었다.
첫 사정보다 더 오래 나온 것은 좁은 틈새를 비집고 흘러 굵은 기둥을 타고 입구까지 흘러넘쳤다. 거센 삽입에 조금씩 마르기 시작한 입구가 하얀 액체로 다시금 젖어 들어갔다.
“흐으…….”
살짝 몸을 일으킨 그가 젖은 성기를 쥐었다. 강선은 커다란 몸이 떨어지고 나서야 자신 또한 사정했음을 뒤늦게 알아차렸다. 휘몰아치는 쾌감에 잠식되어 있느라 앞 사정까지 고려할 만큼 정신이 또렷하지 못했던 모양이다.
어제 그렇게 해 댔으면서…….
사정과 함께 원래 크기로 돌아가나 싶었던 게 다시 단단해지려 했다. 힘이 딸려 벌벌 떨리는 손으로 그의 가슴팍을 찰싹, 때리자 숨을 고르던 입술이 예쁘게 휘어졌다.
“한 번만이야…….”
“응.”
침대 옆에서 지이잉, 울린 알람 소리가 세 번이나 다시 울릴 때까지 둘은 서로를 놓아 주지 않고 모든 순간을 몸에 새겨 넣었다.
“강선아, 좋아해.”
“응, 나도…….”
이제야 하나가 된 마음이 두 입술 사이에서 솜사탕처럼 뭉게뭉게 부풀었다.
✲ ✲ ✲
“안 나와도 되는데.”
“거짓말.”
애정 어린 작은 타박에 하하, 웃음을 터뜨린 지예준이 강선과 잡고 있던 손을 들어 쪽 쪽, 입을 맞추었다.
강아지처럼 붕붕, 꼬리가 흔들리는 것 같은 모습에 CCTV고 뭐고 그대로 저 목을 끌어 내리고 싶었지만 강선은 지예준이 지금 이렇게 손 뽀뽀를 하는 것 또한 큰맘 먹고 한 일임을 잘 알고 있었다.
이르게 뜬 해에 새벽이라 부르기도 애매한 아침, 주차장에 도착한 둘은 차에 올라타자마자 오랜 키스를 나누었다.
강선은 당장 지예준과 함께 울산까지 같이 가고 싶은 마음을 눌러 삼키며 그가 숨을 헐떡일 때까지 입술을 놓아 주지 않았다.
“조심히 잘 다녀와. 돌아올 때 반창고 더 붙여 오지 말고…….”
반짝이는 갈색 눈동자에 어두운 걱정이 서렸다.
아침의 섹스로 땀범벅이 된 얼굴에 다시 약을 발라 주던 강선은 이토록 예쁜 걸 이 지경으로 만든 그의 아버지에게 소리 없는 욕을 퍼부을 수밖에 없었다. 그가 제 눈앞에 있었더라면 진작에 주먹을 날리고도 남았을 정도로.
“강선이 너도… 아프지 마.”
“난 건강한데?”
아니, 그거 말고. 지예준은 못 본 사이 뼈대가 더욱 도드라진 손목을 어루만졌다. 죄책감에 젖어 가려는 표정에 강선의 목소리가 조금 높아졌다.
“알겠어. 잘 먹고 잘 잘게.”
“응…….”
시무룩해진 목소리에 강선은 그의 까만 머리를 끌어안고 슥슥, 쓰다듬었다. 손가락 끝에 닿은 두피가 따끈따끈했다. 얌전히 안긴 지예준이 입술에 닿은 부드러운 살결을 살짝 빨아들였다. 언제 머금어도 참 달았다.
아주 잠깐의 포옹 동안, 강선은 그에게 정말 교사 일은 그만두기로 한 것인지 묻고 싶었지만 이미 충분히 힘들어하는 사람의 상처를 더 건드리고 싶지 않아, 그저 가는 길에 꼭 아침을 챙겨 먹으라는 말 정도밖에 할 수 없었다.
서로 마음을 확인하고 더 없이 소중한 관계가 되었어도 서로가 끼어들 수 없는 무언가는 존재했으니까.
아무에게도 꺼내지 못했던 제 사정을 어제, 조금이나마 내보였던 것처럼 지예준도 자신만의 때가 올 거라고. 강선은 그렇게 생각하기로 했다.
“잘 다녀와.”
“응.”
강선이 있는 곳이 자신이 있을 곳이라는 말처럼 느껴졌다.
아쉬움이 뚝뚝 묻어나는 눈가에 마지막으로 입을 맞추고 시동을 걸자 지예준의 볼에 쪽, 뽀뽀를 한 강선이 조수석 문을 열었다.
타악- 하고 닫힌 문 너머로 가볍게 손을 흔들었다.
그의 차가 천천히 주차장을 가로질러 아파트 입구를 빠져나갔고, 꺾어진 골목길을 지나자마자 모습을 감추었다.
“……꿈인가.”
아침 해에 일어난 참새들이 짹짹거리는 소리만 남은 주차장 한가운데에 자신만 남아 기분이 요상했다.
마치 어제 일이 꿈만 같을 정도로 고요해져 강선은 그에게 물렸던 목을 살짝 잡아당겼다. 허리도 뻐근하고 다리는 걸을 때마다 후들거렸지만 덕분에 꿈이 아님을 다시금 확신할 수 있었다.
집에 돌아가 아침을 먹고 짐을 챙겨 학교로 향했다. 여행에서 돌아온 한상연은 강선에게 카카오 함량이 99퍼센트인 초콜릿을 주었고, 그는 미동도 없이 초콜릿을 씹어 먹는 강선의 모습에 경악을 감추지 못했다.
늦은 밤까지 동기들과 작업을 하는 틈틈이 지예준과 통화를 하고 메시지를 주고받기도 했다.
특별할 것 없던 일상이 무엇보다 소중해지기 시작했다.
✲ ✲ ✲
서예과의 암묵적인 개강 날이자 3차 사정회가 시작되는 월요일.
김 교수는 본격적인 사정회가 열리기 전, 강선을 따로 불러내 불같이 화를 내었다. 방학 내내 연락도 받지 않고 작업실에 찾아가기만 하면 보이질 않았으니 말이다.
강선은 주로 김 교수가 없는 월요일에만 작업실에 들렀고 대부분의 작업은 시디과 작업실에서 이루어졌으니 만나지 못한 건 당연했다.
강선의 작업 발표에 거의 모든 서예과 교수들이 화색을 띠었다.
현재 한국 그래픽 디자인 교육의 최고점으로 소문난 고결대 시디과에서, 그것도 시디과 교수들의 주도하에 이루어진다니.
복도에 붙은 포스터를 오며 가며 보기는 했지만 설마 저 강선이 관심을 보였을 줄 몰랐기에 교수들은 ‘시디과 학과장 교수님이 누구셨죠?’ 하며 저들끼리 속닥거렸다.
갑작스러운 협업 소식이 놀랍기는 해도 서예가 가진 부정적인 의미로의 ‘옛날 것’이라는 이미지를 새롭게 탈피해 볼 시도가 될 수 있을 거라 생각하니 꽤나 매력적이었다.
“교수님, 선이랑 너무 잘 어울리지 않나요?”
“대학생으로서 충분히 해 볼 만한데요.”
단, 한 사람 빼고 말이다.
“나는 반댑니다.”
이 고리타분하고 보수적인 판을 깨고 새로운 것을 접목하기에도 대학생 신분인 강선에겐 좋은 기회가 될 것이라며 모든 교수진들이 김 교수를 설득하려 했지만 목석같이 뻣뻣하게 고개를 든 그는 어떠한 말에도 꿈쩍하지 않았다.
“왜요, 교수님. 어쩌면 백리원 씨처럼 클 수도-”
“누구요? 그놈 이야기는 꺼내지도 마세요. 졸업도 못한 게 무슨!”
뜬금없이 나온 이름에 김 교수의 얼굴이 더욱 시커멓게 변했다.
가장 끝자리에 앉아 있던 장 교수가 아직 들어온 지 얼마 안 된 최 교수의 팔을 쿡쿡 찌르며 속삭였다. ‘아이고, 최 교수님… 여기서 백리원은 금지어예요, 금지어’ 하고 말이다.
“빵점이야, 빵점!”
어우, 유치해… 멀뚱히 서 있는 강선을 보던 한상연이 김 교수의 까진 정수리를 보며 쯧쯧, 혀를 찼다.
강선이 시디과와 뭘 하긴 한다는 걸 건너건너 알고 있던 동기들은 그런 김 교수에게 혀를 내둘렀다. 교수씩이나 돼서 학생 앞날을 저렇게까지 막으려 하다니. 학교에서 괜히 폐지 이야기가 나오는 게 아니었다.
김 교수는 있던 것을 유지하는 게 명예를 지키는 방법이라며 늘 주문처럼 외웠으나 다른 교수들의 생각은 한참 달랐다.
그들은 강선의 이름이 적힌 평가지에 조용히 펜을 놀리기 시작했다.
✲ ✲ ✲
-사정회는 잘 끝났어?
“응. 만장일치까진 아닌데 그래도 통과는 받았어.”
강선의 대답에 지예준은 본인 일보다 더 기뻐하는 기색을 보였다. 그날 이후 세진 돌핀스의 끝없는 활약과 비 한 방울 내리지 않은 날씨 탓에 꼼짝없이 울산에 갇혀 있던 터라 둘은 하루에 몇 통씩 전화를 주고받으며 서로의 일상을 공유하고 있었다.
그렇게 알게 된 것 중 하나는 강선이 우연히 TV에서 보았던 지예준의 얼굴은 정말 천운이 따라 준 것이라는 사실이었다.
거의 아르바이트생급이던 지예준은 보통 카메라가 따라가는 곳이 아닌 구석 언저리에, 그것도 제대로 된 의자도 아닌 플라스틱 상자에 겨우 엉덩이만 걸치고 있었다. 그러나 신기하게도 하필 그날 아버지가 물병을 가져오라 시킨 덕에 잠시나마 그 뒤에 앉아 있었다는 것이었다.
그 말이 사실이었는지 지예준은 더 이상 TV에 얼굴을 보이지 않았지만 강선은 매일 자기 전마다 핸드폰 화면에 들어찬 얼굴과 대화를 나눌 수 있는 것만으로도 만족했다.
지예준을 껴안고 잠들진 못해도 이렇게 30분씩 영상 통화를 하고 나면 신기하게도 악몽이 나타나지 않았다. 비록 깊은 숙면은 못 해도 예전처럼 이상한 데서 눈을 뜨는 일도 없었다.
지예준의 체취가 가득 베인 침대에 누워 그의 베개를 품에 안은 강선이 작게 하품했다.
이상하게 이 집에서 자게 된 후부턴 잠깐 머리만 기대도 솔솔 잠이 왔다.
-오늘 많이 피곤했지.
다정한 물음에 강선이 픽, 웃었다. 자기야말로 힘들었으면서.
“조금 피곤하네. 너도 고생했을 텐데 빨리 자.”
-응. 나쁜 꿈 꾸면 꼭 바로 전화하고…….
“괜찮다니까 그러네. 여기 있으니까 너랑 같이 자는 것 같아서 좋아.”
그 말에 화면이 급격히 흔들리다 까맣게 변했다.
“왜 그래?”
-아, 아니야…….
“얼굴 좀 보여 줘 봐. 응? 준아.”
지예준은 자신이 부끄럼을 느낄 때마다 이렇게 카메라를 가리곤 했다. 방금 또한 강선의 말에 얼굴이 달아오른 모양이었다.
언젠가 한 번쯤은 영상 통화를 켜 둔 채로 이렇고 저런 짓을 해 보고 싶었는데… 아무래도 그림 속 떡 같은 상상을 한 듯하다.
“알겠어, 안 놀릴게. 나 이제 잘 거니까 너도 잘 자.”
-으, 응. 잘 자…….
“내가 사랑하는 거 알지?”
겨우 나타난 얼굴이 다시 화면 밖으로 사라짐과 동시에 강선은 참고 있던 웃음을 크게 터뜨렸다.
✲ ✲ ✲
다시 울산으로 돌아간 후, 강선은 자기 전마다 영상 통화를 걸어왔다. 하루하루 빼먹지 않고 상처를 살피며 오늘은 누가 시비 걸지 않았느냐 묻기도 했다.
말을 하진 않았지만 많은 상처들이 누구 때문인지를 이미 알고 있는 눈치였다. 강선과 통화를 하는 동안 한 번도 그의 입에서 아버지 이야기가 나온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선을 만난 시점부터 지예준은 날이 갈수록 더욱 제 존재감을 숨기며 지냈다. 이번 시즌이 끝나기만을 손꼽아 기다리면서 말이다.
이따금씩 아버지에게 손찌검을 받았지만 이전보다 훨씬 납작 엎드려 고분고분 행동하는 모습에 그의 아비는 이제야 저놈이 말을 듣기 시작했다며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그것도 두 달을 채 넘기지 못했다. 시즌이 아직 끝나지도 않은, 10월 초였다.
<세진 돌핀스의 잇다른 성적 부진… 원인은 선수들 탓?>
<‘세진 돌핀스 선수들, 부산 클럽에서 밤새 술 마시고 춤춰.’ 주변 네티즌들의 SNS 제보>
<벼는 익을수록 고개를 숙인다는데… 세진 팬들, 단단히 뿔났다.>
올해 우승 후보로 예견될 정도로 여름 내내 좋은 성적을 이어 나갔던 세진 돌핀스에 돌연 적신호가 들어왔다.
안 그래도 최근 경기 동안 부진한 성적을 받은 탓에 모두가 아슬아슬한 줄타기를 하고 있던 중, 선수들의 기강이 빠진 게 아니냐는 말과 함께 대형 커뮤니티에 올라온 사진 여러 장이 사건의 물꼬를 퍼엉, 터뜨리고 만 것이었다.
<세진 돌핀스 관계자曰, “신, 최, 황 트리오가 가장 골칫덩어리.”>
세진 돌핀스 선수들 중 최근 경기에 투입되었던 신 씨, 최 씨, 황 씨 이 셋은 세진에 조금만 관심 있는 사람이라면 누군지 다 알 정도로 유명한 선수들이었다.
특히 최 씨는 전에 몸담았던 구단에서도 골수팬들 사이에서 알게 모르게 나쁜 소문이 퍼졌던지라 사람들은 ‘그럴 줄 알았다’며 입을 모아 비판했다.
선선하게 다가오던 가을바람이 이내 칼처럼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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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승열 뜁니다! 김승열 뛰어요-! 홈인인가요, 아-! 홈인-!>
<최종 스코어, 5 대 4! 두화 펠리컨즈가 세진과의 맞대결에서 8승 8패로 승리를- 가져갑니다! 4,029일 만의 가을야구 첫 승리! 두화의 다음 상대는 한산! 한산과의 빅 매치로->
어두운 밤. 하얀빛이 내린 경기장에 수만 명의 함성과 노래가 끊임없이 울려 퍼졌다.
대전 하늘 아래서 경기 때보다 더욱 뜨거워진 열기는 흡사 한국 시리즈 우승처럼 보일 정도였다.
“에이, 씨팔!”
주황색 물결로 뒤덮이기 시작한 관중석의 반대편 벤치. 하늘색 모자가 바닥에 내리꽂히는 걸 시작으로 벤치에 앉아 있던 모든 이의 얼굴이 잿빛으로 물들었다.
10월 17일, 대전에서의 원정 경기.
아슬아슬한 동점 상황에서 세진 돌핀스는 결국 상대 팀인 두화 펠리컨즈에게 패배의 무릎을 꿇고 말았다.
✲ ✲ ✲
두화 펠리컨즈의 모기업이 승리를 기념하며 쏘아 올린 폭죽 소리가 바로 옆 동네에 있는 숙소까지 펑펑 울려 퍼졌다.
“뭐라고?”
허공을 가르고 날아온 것이 볼을 스쳐 벽을 강타했다.
물이 담겨 있던 유리컵은 귀가 찢어질 만큼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수십 조각으로 쪼개져 바닥으로 떨어졌다. 조금만 각도를 틀었으면 지예준의 어깨에 맞을 뻔했음에도 불구하고 지재만은 성큼성큼 다가와 저보다 머리 하나는 더 큰 이의 뺨을 후려쳤다. 하늘색 돌고래가 박힌 모자가 저 멀리 날아갔다.
“그래, 니 새끼가 허구한 날 싸돌아다닐 때부터 이상하다 싶었어.”
“…….”
분에 차오른 가쁜 숨을 쉬익, 쉬익, 내쉰 지재만이 테이블에 있던 빈 유리잔을 대리석 바닥위로 다시금 내던졌다.
“다시 한번 말해 봐. 어?”
“…….”
“지예준-!”
쩌렁쩌렁, 숙소 안을 울리는 소리에 복도 곳곳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났다.
코치님 왜 그러세요? 무슨 일 있으세요? 하고 부르는 목소리들이 문 앞을 서성였지만 치솟는 화에 정신을 다잡지 못한 지재만은 서늘하게 저를 보는 이의 멱살을 잡아 내리기만 했다.
“그만두겠습니다.”
“이, 이…! 너, 니 애미 만났냐? 어?! 권은숙이 그년 만났냐고!”
잘못짚어도 단단히 잘못짚었다. 지예준 본인의 명백한 의사 표명이었음에도 지재만은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모를 제 아내에게 화살을 돌렸다.
화난 아버지 앞에서 늘 반항 한번 하지 못했던 몸이 기어이 자꾸만 떨리려 했다. 지예준은 자신이 주먹 한 번만 휘둘러도 아버지를 기절시킬 수 있을 만큼 컸다는 생각을 하지 못했다. 마치 코끼리와 쇠사슬 이야기처럼 말이다.
“이리 와, 인마!”
지예준의 옷깃을 세게 잡아당긴 지재만이 주머니를 뒤져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주름 가득한 손이 다급히 전원 버튼을 수차례 눌렀지만 비밀번호가 걸려 있는 핸드폰은 당연히 제대로 켜지지 못했다.
“전화 걸어!”
“…….”
아무렇게나 눌리기를 반복된 화면에 이윽고 일정 시간 동안 잠금을 풀 수 없다는 문구가 나타났다.
제 화에 못 이겨 부들부들 떨리던 손이 지예준의 얼굴을 향해 빠르게 날아갔지만 지예준은 그의 손목을 강하게 붙잡아 버텼다.
예전 같았으면 한번 맞고 말자고 생각했겠으나 강선과 상처 없이 만나기로 약속한 일이 겨우 한 달 전이었다. 이미 조금 전 뺨을 맞은 것만으로도 미안할 지경인데, 여기서 무언가를 더 남길 순 없었다.
“이, 이…!”
제 아들의 첫 반항에 붉으락푸르락 얼굴이 달아오른 지재만은 기어이 반대 손까지 휘둘렀지만 그 또한 억센 손에 막히고 말았다.
“아버지.”
뚫어 버릴 듯 강렬한 눈을 피하고 싶을 때마다 지예준은 강선의 얼굴을 끊임없이 덧그렸다. 봄처럼 빛나는 눈과 살랑이는 갈색 머릿결, 그리고 헤어지기 싫어 안타까운 포옹을 하던 따뜻한 품을.
“지금까지 가족들에게 왜 그러셨냐고 묻진 않을게요. 그러니까…….”
밑바닥까지 가라앉은 스산한 목소리에 지재만의 눈이 사시나무처럼 떨렸다.
“앞으로는, 얼굴 볼 일도… 없었으면 좋겠어요.”
✲ ✲ ✲
어떻게 돌아왔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만큼, 지예준의 머릿속은 허탈함과 무기력으로 가득했다.
몇 시간이고 쉴 틈 없이 차를 모는 순간에도 나오지 않던 눈물이 편안한 얼굴로 잠들어 있는 강선의 얼굴을 보자마자 폭포수처럼 터져 나왔다.
아버지와의 일 때문에 강선에게서 온 영상 통화도 못 받았는데.
이렇게 잘 자고 있는 게 다행이면서도 혹여나 그가 오지 않는 잠에 뒤척이다 겨우 잠든 게 아닐까 하는 생각에 무거운 죄책감이 들었다.
잠든 이가 깨지 않도록 조심하며 거실로 나온 지예준은 곧바로 욕실에 들어가 얼굴을 확인했다.
다른 부분은 시간이 지나니 괜찮아졌지만 찢어진 입가는 도무지 감출 형편이 되질 않았다.
일방적인 통보를 뒤로하고 아버지의 방을 나가려던 중, 그에게 뒷덜미를 잡힌 게 실수였다.
‘죽어, 이 새끼야-!’
강한 힘으로 지예준을 돌려세운 지재만은 무차별적으로 몸을 날렸다. 빨갛게 핏줄 선 눈과 세게 쥔 주먹이 그가 제정신이 아님을 보여 주었다.
팔을 교차해 얼굴을 막으며 조금씩 뒷걸음질 친 지예준은 그가 숨을 몰아쉬는 사이에 문을 열었고, 엉망이 된 방 꼴은 밤중 소란에 놀라 나와 있던 사람들의 눈에 단단히 자리 잡고 말았다.
찢어져 피가 고인 입술과 깨진 유리 조각들, 그리고 죽이겠다 고함치던 목소리까지.
‘김, 김 코치! 누가 김 코치 좀 불러와!’
‘감독님을 불러야 하지 않을까요?’
‘무슨 감독을 불러, 안 그래도 심란할 사람을. 빨리 김 코치나 데려와!’
불이 꺼져 있던 좁은 복도는 금세 아수라장이 되었다.
잠결에 불려 나온 김 코치는 주저 없이 경찰을 불러 지재만을 신고해 버렸다. 어차피 선수들 일과 오늘의 참패로 모든 일정이 취소된지라 저 인턴만 못한 코치를 잘라 버리는 건 일도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안 그래도 시즌 중 갑자기 들어와 자리만 차지하고 있는 모습이 김 코치 눈엔 매우 아니꼽게 보이기도 했으니.
그 뒤로는 어떻게 됐는지 잘 기억이 나질 않았다. 경찰에게 끌려간 아버지가 바락바락 소리 지르며 저에게 신발을 던지려 했던 것도 같았고…….
아버지는 자신과 다른 곳으로 갔고, 지예준 자신은 경찰 앞에서 조금 전 있었던 일을 하나하나 진술해야 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는지, 입가의 상처는 무엇에 맞아 생긴 것인지… 그리고 아버지와 사이가 안 좋아졌던 이유에 대해서도 물었으나 지예준은 경찰이 납득할 정도만큼만 입을 열었다.
어느새 도착한 김 코치는 다른 경찰과 함께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고 있었다. 자리가 멀어 잘 들리진 않았지만 속 터진다는 얼굴로 손짓 발짓을 하는 게, 상황이 좋지 않아 보였다.
서류를 뒤적이며 ‘가지가지 했네, 이 양반’이라는 말이 언뜻 들린 것도 같았다.
돌아가도 좋다는 말을 들은 건 그로부터 두 시간쯤 지난 후였다.
아버지가 쫓아올 리 없다는 걸 알고 있으면서도 떨림이 가시지 않은 발은 계속해서 엑셀을 밟아 경찰서에서 멀리, 더 멀리 도망쳤다. 방향을 정하지 않고 무작정 가다 어디인지 모를 동네가 보이고 나서야 갓길에 차를 대었고, 그제야 핸들에 고개를 묻은 그는 한동안 움직일 수 없었다.
악을 쓰며 소리를 지르고 물건을 집어 던졌던 모습들이 깨진 조각처럼 지나갔다.
어릴 적, 아빠와 주말에 낚시를 가거나 캠핑을 갔다는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었을 땐 그저 특이한 가족이라고 생각했다. 어머니가 아플 때 죽을 끓여 준다든가, 소풍날 아침 자식에게 용돈을 쥐여 준다든가 하는 사소한 것도 마찬가지였다.
초등학교 3학년 때, 친구 집에 놀러 가 하룻밤 자기로 한 날 아침. 친구 아버지가 출근하면서 현관에 놓인 쓰레기봉투를 들고 나가는 걸 보고 순간 멍해졌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했다.
지금껏 제 아버지가 쓰레기를 버리거나 청소를 하는 모습은 한 번도 본 기억이 없었으니까.
이들에겐 정말 아무것도 아닌 일상과 별걸 다 신기해한다는 친구의 웃음에 숨이 막혔다.
학교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아빠가 오늘 새벽에 몰래 라면을 끓여 줬다는 친구와 그 옆에서 자기도 아빠와 토스트를 만들었다며 들어간 재료를 하나하나 자랑할 때, 지예준은 입도 벙긋할 수 없었다.
친구들이 아버지와의 좋은 추억을 저마다 이야기하며 공유하던 그날 저녁, 제 아버지는 국에 들어간 조개에서 모래가 씹혔다는 이유로 숟가락을 집어 던지고 어머니에게 모욕적인 말을 퍼부었다.
집을 나간 아버지는 이틀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았고 어머니와 함께 엉망이 된 부엌을 치웠던 열 살 지예준은 키가 커지고 힘이 세진 자신이 아버지를 들어 베란다 밖으로 던지는 꿈을 꾸었다.
하지만 꿈은 꿈이었을 뿐이었다.
“……준아!”
쏟아지는 물줄기로 상처를 조심조심 닦으며 멍하니 사건을 되새기던 중, 등 뒤에서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언제 왔어? 깜짝 놀랐… 뭐야, 너 얼굴이 왜이래?”
잠에서 덜 깬 얼굴로도 반가운 기색을 보이던 강선의 얼굴이 입가에 닿자마자 사색이 되었다.
“아…….”
“너… 울었어?”
슬리퍼도 없이 맨발로 욕실에 들어온 그가 지예준의 뺨을 감쌌다. 조심스러운 손길이 바들바들 떨렸다. 상처에 신경 쓰느라 눈물 닦을 생각도 못했다. 발개진 눈가와 미처 마르지 않은 눈물 자국이 강선의 눈에 하나하나 들어왔다.
지예준은 혼란스러워하는 강선의 손을 잡아 내리고 아직도 쏟아지고 있는 수도를 뚝, 잠갔다.
“지예준.”
저에게 무슨 큰일이 생긴 것이라 확신한 듯, 거울에 비친 얼굴이 핏기 없이 창백했다. 턱에서 흐른 물이 하얀 손목을 타고 내려갔다. 지예준은 강선의 손등 위로 제 손을 겹쳤다.
이런 모습으로 만나고 싶지 않았는데.
“강선아, 나…….”
“응.”
꾹 감았다 뜬 눈에 보이는 건 강선이 맞았다. 꿈도 헛것도 아닌, 자신이 누구보다 좋아하는 사람이 무엇이든 다 이야기해도 된다는 얼굴로 저를 보고 있었다.
한참 동안 달싹이기만 하던 입술이 아주 조금 벌어졌다.
“…….”
한숨처럼 스러지는 소리가 마른 어깨 위를 적셨다. 등을 도닥이는 손길이 느리고 무거웠다.
✲ ✲ ✲
자꾸만 흐려지려는 얼굴에 강선은 지예준의 손을 잡고 침실로 향했다. 그의 손이 평소와 달리 매우 식어 있어 어깨에 이불을 덮어 주고 양손을 꼭 잡아 온기를 나눠 주듯 쓰다듬었다.
“우리 집이 좀…… 사정이 있어.”
집이라는 말에 걱정이 묻어 있던 강선의 눈이 고개를 끄덕이듯 천천히 두어 번 깜빡였다.
지예준은 지금 자기 얘기를 하려는 것이었다. 그의 성미는 지나치게 정직했으니 그간의 일을 에둘러 말하는 건 자신이 없었다. 시곗바늘 돌아가는 소리도 없는 방 안에서 조용히 내쉬어진 한숨이 습하고 먹먹했다.
“지금 아버지랑 연락하는 사람이 나밖에 없거든.”
사연 없는 집이 어디 있겠나 싶지만 가슴 중앙을 크게 때리는 말에 강선의 표정이 아차, 흐려졌다. 그 모습에 지예준은 말을 정리하는 것처럼 잠시 침묵을 지키다 손등을 감싼 손에 깍지를 끼고 잠시 눈을 감았다. 손가락 사이사이를 감싸는 온기가 따뜻했다.
“……다른 가족은?”
“……어머니는 거제도에 계시고, 동생은 제주도에 있어.”
거제도와 제주도. 둘 다 서울과는 너무도 먼 곳이었다.
“너는 왜 같이 안 갔어?”
강선의 물음에 지예준의 입술이 씁쓸하게 비틀렸다.
“아버지가…… 어머니랑 동생을 못 찾았으면 해서.”
똑 부러지고 영리한 동생이 이렇게 살다간 다 죽겠다며 자신은 어른이 되면 제주도로 도망치듯 가 버리겠다고 벼르고 있을 적, 지금이나 예전이나 무르기만 한 저에겐 아버지란 공포 그 자체의 존재였다. 아버지가 모르는 곳으로 사라져도 언젠가는 잡힐 것 같았고 집의 살림은 아버지가 코치 일로 벌어다 주는 돈으로만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당장의 생계도 걱정되었으니까.
어머니가 아버지로부터의 해방을 처음 꿈꾼 건 지예준이 중학교에 다니던 무렵이었다.
한겨울, 어머니는 지예준과 지예원을 데리고 광주에 있는 먼 친척집까지 도망을 쳤다. 다시 돌아가는 한이 있더라도 일주일만 숨 좀 쉬고 살았으면 좋겠다는 바람에서였다.
그러나 아무것도 몰랐던 친척의 가족이 아버지에게 안부 연락을 하며 어머니 이야기를 꺼냈고, 아버지에게 겁을 먹은 이 세 식구는 겨우 이틀 만에 다시 서울로 돌아가야만 했다.
지예준은 그날 새벽, 처음으로 어머니를 업은 채 응급실을 찾았다.
“나랑 동생은 늘 아버지를 막으려다 몇 배로 더 맞기도 했고…….”
과거의 아픔에 맞잡은 손이 잘게 떨렸다.
강선은 처음 듣는 그의 이야기에 숨 쉬는 것조차 잊은 듯 꾹 입을 다물고 엄지로 그의 손등을 살살 쓸어 주기만 했다.
“두 번째 도주는 고등학교 1학년 때였어.”
그땐 지예준이 어느 정도 머리가 큰 상태였기에 전적으로 어머니를 도왔지만 이번엔 동생의 학교로 찾아간 아버지가 기어코 동생이 전학 가기로 한 학교를 알아내는 바람에 일주일도 못 가 무산되고 말았다. 그날 밤 있었던 일은 다시 떠올리지 않아도 뻔했다.
지예준이 서울에 남은 것은 각각 흩어진 가족들 때문이었다.
자신이 아버지와 같이 있기만 한다면 자신에게 쏟아지는 폭력 속에서도 어머니의 행방을 어떻게든 숨길 수 있었으니까.
“아버지 눈엔 그중에서도 제일 고분고분하게 구는 사람이 나거든. 아버지는 어머니가 어디로 도망쳐도 나를 통해서라면 다 알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셔.”
지재만은 지예준이 저에게 꼼짝하지 못한다는 걸 잘 알고 있었기에 언제든지 제 처의 행방을 캐물을 수 있다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지금껏 ‘괘씸하게’ 집을 떠난 모녀가 돈 한 푼 없이 얼마나 오래 있나 보자며 되레 기세등등하게 제 인생을 사는 중이기도 했고.
지예준은 그것을 역으로 이용하며 지금까지 버텨 오고 있었다. 간혹 술에 취한 아버지가 ‘니 애미 어디 있냐’며 집안 물건을 때려 부술 때가 있었지만 그는 취했을 때의 기억을 잘 잊어버렸기에 지예준은 항상 어머니의 거주지가 논산에 있다느니, 동해에 있다느니 하며 상황을 무마할 수 있었다.
“그럼, 지금 어머니는 거제도에 혼자 계신 거야……?”
“응. 부둣가 근처에 일자리를 구하셔서 지금은 거기 사람들이랑 지내고 계셔.”
“……그렇구나.”
그것참 다행이라고 하기엔 상황이 너무도 좋지 않아 보였다. 일단 멍이 든 입가에 약을 발라 주려 일어났지만 지예준은 강선의 손을 놓아 주지 않았다. 강선의 손이 지예준의 마른 볼을 살살 어루만졌다. 눈물이 나오는 건 아니었지만 왠지 이렇게 해야 할 것만 같았다.
“그래서, 지금은 아버지랑 잘 끝내고 온 거야? 너 여기 왔다고 찾아오시는 건 아니고…?”
“구단 내에서 일어난 폭행이라 아마 당분간은 괜찮을 거야.”
“그래도…….”
지예준이 처음 말을 꺼냈을 때부터 줄곧 걱정을 거두지 못한 강선이 저도 모르게 현관 쪽을 바라보았다. 누군가 초인종을 누르고 문을 걷어차도 절대 열어 주지 말아야겠다며 남모를 다짐을 했다. 지예준에게 이런 사정이 있을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런 그를 매몰차게 내치며 상처를 줬던 과거가 떠올라 잡은 손에 힘이 들어갔다
자신이 조금만 사려 깊게 굴었더라면 그가 울산에 갔더라도 지금처럼 아프진 않았을 텐데. 당장 눈앞에 보이는 이별에 그의 아픔을 가려 버렸던 그날이 너무도 후회스러웠다.
“……미안해. 그런 줄도 모르고.”
지예준이 손을 풀어 강선을 품에 안았다. 입술에 닿은 머리카락이 부드러운 솜사탕 같았다. 서로에게 미안함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상대가 저에게 죄책감을 가지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여기는 게 아프면서도 애틋했다.
다 괜찮아, 강선아.
나직이 흘러나온 말에 어깨가 젖어 들어갔다.
✲ ✲ ✲
하루가 많이 고됐는지 품 안에 들어온 이는 조금의 뒤척임도 없이 고른 숨만 내고 있었다.
저보다 큰 몸을 껴안고 누운 건 처음이라 조금 어색했지만 강선은 그의 머리칼을 조심히 쓰다듬으며 조금 전까지 들었던 이야기를 하나씩 되짚었다.
주먹이 떨리려는 걸 겨우겨우 삭이긴 했으나 몇 번을 되새길수록 그런 사람에게서 지예준이 났다는 게 가히 기적처럼 느껴졌다.
스물여섯. 많다면 많다고 할 수도 있겠지만 그것이 결코 성숙의 정도를 나타내는 건 아니었다. 소리 없이 흐르던 눈물에 도대체 몇 년 치의 감정이 쌓여 있었을까. 누구에게도 보상받을 수 없는, 해질 대로 해져 버린 아픔에 얼마나 힘들었을까.
겨우 몇 개월 전까지 완전한 타인이었던 저보다 어머니와 동생이 중요한 건 너무도 당연했다.
자신이 지예준이었다 해도 같은 결정을 내렸을 테고.
우느라 발개진 눈을 보니 명치에 열이 올랐다. 할 수만 있다면 지금 당장이라도 울산이든 어디든 내려가 그 애비라는 놈을 잡아 죽기 전까지 패고 싶었다.
“으응…….”
아차.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이 들어갔나 보다. 졸지에 머리카락을 뜯긴 지예준이 끙끙 앓으며 더욱 품을 파고들었다.
엉킨 머리칼을 살살 풀어 준 강선은 자신이 평생 몰랐던, 그리고 평생 알지 못할 가족의 형태를 헤아렸다. 교과서나 TV 애니메이션에서 보았던 가족은 서로 사랑하고 아껴 주며 언제든 의지할 수 있는 존재였다. 그런 모범적인 가정이 생각보다 흔치 않다는 건 크면서 차차 알게 되었지만, 그것 또한 강선에겐 모두 타인의 사정일 뿐이었다.
지예준과 그의 어머니, 동생. 이 세 사람이 그동안 거쳐 왔던 길은 제가 감히 상상조차 할 수 없을 정도로 고되고 거칠었을 것이다. 그만큼 앞으로 할 일도 많을 테고.
어찌 되었건, 강선은 이제 지예준을 놓지 않기로 한 이상 끝까지 그의 옆자리를 지킬 생각이었다. 그가 어떤 선택을 하든 말이다.
✲ ✲ ✲
‘엄마가 너무 부족해서… 미안하다.’
조금도 힘이 없는 목소리가 들릴 듯 말 듯 희미했다. 핸드폰을 쥔 손에 힘줄이 가득 섰다.
“……그런 말씀 마세요. 괜찮으니까… 언제든 마음 변하시면 연락 주세요.”
곧은 손가락이 속눈썹 아래를 살짝 문질렀다. 울고 싶지 않았는데 결국 또 우는 모습을 보이고 말았다.
지예준은 소파 옆자리에 앉아 제 손을 꼭 잡고 있는 손을 내려다보았다. 오른쪽 약지 첫 번째 마디에 자리한 굳은살은 예전보다 조금 더 진해진 듯했다.
“……어머님이 뭐라셔?”
손을 쓰다듬으며 물어 오는 말에 조용히 고개를 저었다.
“아직… 어려우신가 봐.”
오늘 아침, 지예준은 강선과 늦은 식사를 하며 부모님의 이혼을 거론했다. 법적으로 남이 되면 어머니가 스스로 할 수 있는 것도 많아질 테고, 금전적으로도 여러 지원을 받을 수 있으며 무엇보다 아버지로부터 완전히 벗어날 수 있을 테니까.
지예준의 부모는 법적으로 여전히 부부였지만 그의 어머니가 아버지 몰래 짐을 싸 거제도로 내려갔기 때문에 수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이 실체 없는 부부 생활을 완전히 끝내지 못한 상태였다.
이제 아버지와 연을 끊기로 했으니 그는 무슨 수를 써서라도 어머니를 찾아낼 것이다. 온 동네를 수소문하며 어머니 친척집까지 알아냈던 그날처럼 말이다.
지예준은 어머니에게 시간이 더 늦기 전에 제대로 이혼하는 게 어떻겠느냐며 아주 조심스레 말을 꺼냈지만 어머니의 목소리는 위태롭다 못해 쓰러지기 일보 직전처럼 벌벌 떨렸다. 급기야 제 아들의 이야기를 듣고는 소스라치게 놀라며 당장 거제도로 오라 소리쳤다. 화가 아닌, 걱정과 염려가 서린 외침이었다. 어머니 또한 아버지에게 만만치 않은 공포를 가지고 있기 때문이었다.
가슴에 손을 얹으니 쿵쿵, 빠른 박동이 느껴졌다. 저도 이렇게 긴장했는데, 어머니가 과연 어떤 상태일지는 보지 않아도 알 수 있었다.
“그래도 한번 시작한 얘기니까 어머님도 잘 생각해 보실 거야.”
어깨를 토닥이며 달래는 목소리가 낮고 다정했다. 지예준은 그 말이 부적인 것처럼 응, 대답했다.
서울로 돌아온 지 며칠이 지났지만 핸드폰엔 아버지를 통한 그 어떤 흔적도 나타나지 않았다. 오랜 시간 동안 그와 함께 지내 왔던 지예준은 제 아버지가 현재 저에게 하늘 같은 자존심을 부리고 있음을 잘 알고 있었다.
그는 마음만 먹으면 지금이라도 서울에 올라와 이 집 문을 두드릴 수 있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아버지는 쳐들어오기는커녕 부재중 전화, 문자 한 통조차 남기지 않았다.
어머니가 친척집으로 도망쳤을 때에도 아버지는 어머니가 스스로 집에 돌아오는 것을 보며 ‘제까짓 게 도망가 봤자야’ 하며 코웃음을 쳤으니까. 무슨 일이냐 묻는 친척들에게 아무것도 아니라고, 잠깐 남편이랑 가볍게 싸운 것뿐이라며 폐를 끼쳐 미안하다며 전화하는 어머니를 보고 승리자와 같은 표정을 취한 게 제 아버지였다.
왜 몰랐을까. 조금만 뒤에서 보면 그토록 초라해 보일 수 없는데.
✲ ✲ ✲
지예준은 다시 정상적인 학교생활을 시작했다. 일주일 동안 구단 사람들과 숱한 통화를 하며 진땀을 뺀 덕인지 다행히 특수 상황으로 인정되어 무사히 취업계를 마칠 수 있었다.
둘 다 2학기엔 교양 수업을 신청하지 않았기 때문에 이전처럼 같은 강의실에서 지낼 일은 없었지만 학과 건물이 가까워 틈만 나면 조형관 1층 휴게실에서 만나 시간을 보내곤 했다.
“아, 해 봐.”
“응? 아.”
테이블에 있던 초콜릿을 조각내 제 옆에 앉은 이의 입으로 쏙, 넣어 주는 강선을 향해 한상연이 몸서리를 쳤다.
“미친 새끼…….”
한상연이 욕을 하든 말든 코웃음도 치지 않은 강선은 오히려 더 보란 듯 지예준의 널따란 어깨에 툭, 머리를 기댔다.
“준아, 얘가 너랑 나랑 잘 어울린대.”
초콜릿 과자를 우물우물 씹어 넘긴 지예준이 수줍게 미소 지었다.
“고마워, 상연아.”
휴게실에 괴로운 비명이 울려 퍼졌다. 흥, 그러게 누가 남의 데이트에 끼어들랬나.
몰려오는 졸음에 짧은 하품이 나왔다. 이제 한 달밖에 남지 않은 졸업 전시회 때문에 오늘도 겨우 두 시간 남짓밖에 못 잤더니 자꾸만 눈이 감겼다.
“야, 여기서 졸지 말고 집 가서 자.”
“이따 회의 있어.”
아, 지예준 냄새.
테이블 아래로 한상연이 발을 툭툭 건드렸지만 강선은 듣는 척도 하지 않은 채 지예준의 어깨 위로 볼을 문질렀다. 그 모습에 한상연의 미간이 잔뜩 좁아졌다. 자신은 잘못한 것도 없는데 괜히 패배한 기분이었다.
“왜 이렇게 째려봐? 기분 나쁘게.”
실눈을 뜬 강선이 나른하게 중얼거리자 지예준은 옆에 끼고 있던 카디건을 펼쳐 강선의 몸을 덮어 주었다. 휴게실엔 이들 말고는 아무도 없던지라 애정 행각에 눈치를 볼 일도 없었다.
“아- 진짜. 눈꼴시려서 못 봐 주겠네.”
“그냥 질투 난다고 해라.”
“……맞아, 상연아…….”
아니. 지예준 저 새끼는 강선 찾겠다고 그렇게 사람을 괴롭히더니, 이젠 은인을 홀대해? 배가 불렀다, 이거지. 아님 강선이랑 붙어 다녀서 저 성질머리가 살짝 옮았거나.
“15분만 자야겠다.”
“응. 이따 깨워 줄게.”
자기들만의 세상에 빠진 모습에 한상연은 꼬다리만 남은 김밥을 우걱우걱 씹으며 벌떡 일어났다. 날카롭게 바닥에 끌리는 의자 소리에 강선이 인상을 팍, 찡그렸다.
“간다.”
“…….”
친구가 간다는데 눈도 안 뜨는 것 좀 봐. 조용히 저를 향해 손을 흔드는 지예준이 그나마 양반이었다. 평생 사랑이라곤 관심 없어 보이던 저놈이 우정보단 사랑파였을 줄이야…….
‘친구가 연애를 시작하더니 저를 소홀히 대해요.’
누나의 어깨 너머로 보던 연애 상담 프로그램 사연이 남 일 같지 않았다.
한상연이 떠난 뒤 둘만 남은 휴게실엔 강선의 고른 숨소리만 조용히 맴돌았다. 아직도 자신이 이곳에 있다는 게 꿈만 같았다. 손바닥 뒤집듯 뒤바뀐 환경은 어색하고 낯설지만 어깨에 닿은 무게만큼은 그토록 바라 왔던 반가움이었다.
카디건 속으로 손을 잡고 눈을 감으니 열어 둔 창밖에서 가을바람이 솔솔 불어왔다. 머지않아 낙엽이 떨어지고 가지가 앙상해질 계절이 올 것이라는 게 실감 나지 않았다. 여름엔 온통 강선 생각뿐이었던지라 작년에 비해 더웠는지 어땠는지도 기억나지 않을 정도였다. 매년마다 시간이 점점 빨라지는 것만 같은데 올해는 유독 더 눈 깜짝할 새에 가 버리는 것 같다.
한 해가 곧 끝나 가지만 저에게 걸려 있는 일은 이제야 시작이었다. 문이 반쯤 열려도 숨통이 트이기엔 부족하다. 어젯밤, 제 오빠의 연락을 받은 지예원은 웬일이냐며 꽤 놀란 눈치를 보였다.
‘오빠가 그렇게 말했으면 엄마도 곧 마음 정리하겠지.’
여름 방학 동안 거제도로 올라가 어머니와 같이 지내면서 이혼 이야기를 수도 없이 꺼내긴 했지만 아무래도 혼자서 말하는 건 한계가 있었다나. 그는 지예준에게 이혼이 잘 마무리되면 자신이 서울로 돌아갈 때까지 어머니를 모시고 사는 게 어떻겠냐며 운을 뗐다.
‘아빠 없는 데서 사니까 얼굴이 많이 좋아지긴 했는데, 그래도 엄마 입장에선 자식들이랑 같이 있는 게 좋지 않을까 싶네. 나중에 슬쩍 엄마한테 물어봐 봐.’
‘응, 알겠어. 넌 지낼 만해?’
‘나야 엄청 잘 지내지. 걱정하지 말고 오빠는 오빠 할 일이나 열심히 해. 웬 관심도 없는 야구팀에 들어가서 개고생이야.’
‘하하… 그러게.’
어딘가 쏘아붙이는 듯한 말투였지만 그 속엔 많은 걱정이 서려 있음을 잘 알았기에 지예준은 멋쩍게 웃으며 통화를 마쳤다. 당시 옆에서 둘의 대화를 듣던 강선은 지예준이 통화를 끝내자마자 동생에 대해 여러 가지를 물었다. 이름은 뭔지, 나이는 어떻게 되는지, 제주도에서 무슨 일을 하는지 등…….
동생에 대해 그렇게 궁금했었냐는 물음에 강선은 ‘음……’ 하더니 고개를 내저었다.
‘동생 쪽이 아니라 넌데.’
‘나?’
‘생각해 보니까 너에 대해 아는 게 별로 없는 것 같아서…….’
그렇게 말하며 웃는 모습이 어찌나 심장을 때리던지.
“……강선아, 회의 가야지.”
“……응.”
그날 일을 떠올리니 얼굴에 열이 올라 창문을 조금 더 열자 동시에 핸드폰 알람이 울렸다. 강선이 깨워 달라 했던 15분이 벌써 지나 버린 것이었다. 혼자 있을 땐 1분이 한 시간 같은데, 둘이 있으면 한 시간이 1분처럼 느껴진다.
살살 어깨를 흔드는 손길에 강선은 쭈욱, 기지개를 켜더니 주변에 아무도 없는 걸 확인한 후 그대로 양팔을 벌려 지예준을 꽉 껴안았다.
“다녀올게.”
“회의 잘하고 와.”
“응. 너도 수업 잘 듣고…….”
저를 향해 고개를 숙인 이에게 강선이 짧게 입을 맞추었다. 순식간에 빨개진 얼굴이 귀여웠다.
“언제까지 부끄러워할래?”
머리를 쓰다듬으며 속삭이는 목소리에 귀에서 푸슉푸슉, 연기가 날 것만 같았다. 말도 못 하고 시선을 피하는 그를 더 놀리려다 한 번 더 볼에 입을 맞추고 몸을 일으켰다. 이젠 정말 회의실로 가야 할 시간이었다.
“수업 끝나면 연락해.”
“으응…… 아, 강선아 잠깐만. 밖에 추워.”
강선을 따라 허둥지둥 일어난 그가 강선이 덮고 있던 제 카디건을 어깨에 둘러 주었다. 품이 매우 커서 흡사 담요를 두른 모양새였다.
“바로 위층인데, 뭐. 너야말로 그 차림으로 들어가게?”
소매가 긴 옷을 입은 강선과 달리 지예준은 널널한 반소매 차림이었다. 손으로 맨살을 만져 보니 찬기가 살짝 느껴졌다.
“오늘은 실기라 괜찮아.”
“괜찮기는. 나야말로 괜찮으니까 빨리 입어.”
단호한 목소리로 카디건을 건네는 모습에 지예준의 얼굴이 당혹으로 물들었다. 이게 아닌데, 하는 표정이었으나 그 마음을 모르는 강선은 회의에 늦겠다며 카디건을 건네주고 나선 후다닥 계단을 뛰어 올라갔다
정말… 이게 아닌데.
“…….”
가을에 접어들고서야 알게 된 사실 중 하나는 강선이 추위를 매우 잘 탄다는 것이었다. 그는 오늘도 춥다는 말과 함께 기상해 집을 나올 때에도 한껏 몸을 움츠렸다.
지예준은 평소 추위를 잘 타지도 않을뿐더러 오늘은 실기가 있는 날이었던지라 긴 옷은 더욱 필요 없었지만 강선의 말이 내내 마음에 걸려 쉬는 시간을 틈타 집에 다녀온 참이었다.
강선이 춥지 않다면 그건 그것대로 다행이지만 생각과는 다른 결말에 겨우 식은 얼굴이 다시금 붉어졌다. 괜히 오버한 걸까.
덩그러니 남은 휴게실 안에서 지예준은 새삼 연애의 어려움을 깨달았다.
물론, 나중에 그 사실을 알게 된 강선이 무척이나 미안해하며 한동안 지예준의 카디건만 입고 다닌 건 비밀 아닌 비밀이 되었지만.
✲ ✲ ✲
커다란 벽을 느릿하게 기어가던 하얀 글자가 날카로운 노이즈 소리와 함께 수백 개로 쪼개지며 천장을 뒤덮었다. 제 위치에서 천천히 돌아가던 글자들에서 실 같은 선이 나와 군체를 이루고, 이는 곧 하늘에 빼곡히 찬 별이 되었다.
암막 실을 유영하는 별의 모습에 짜릿한 소름이 돋았다.
“어때? 죽이지.”
졸음 가득한 얼굴들이 일제히 강선을 돌아보았다. 빨리 칭찬해 달라는 눈빛이었다.
“너희, 진짜…… 대단하다.”
“그치? 이제 음향 넣고 전시회장 가서 시현해 보기만 하면 돼.”
권혜인의 자신만만한 목소리에 강선이 목덜미를 갉작였다.
“내가 얹혀 가는 기분인데, 지금.”
“형, 무슨 소리예요~ 우리야말로 미안해 죽겠는데.”
잦은 회의를 거치며 말을 튼 시디과 학생들이 강선의 등을 팡팡 두드렸다. 시디과 교수들이 굉장히 개방적인 시각을 가지고는 있지만 그만큼 까다롭고 스파르타식인 탓에 강선은 이들의 요구대로 한 글자를 각 50장씩 써야 했기 때문이었다. 글자 하나를 복사해서 쓰는 건 러프 때에나 하는 일이라나.
이렇게 많은 글자를 반복해 쓰는 건 늘상 해 왔기에 강선은 손목 건강에만 주의하며 그들의 요구를 모두 들어주었다. 내 글씨를 아무런 손상 없이 저렇게 멋진 그래픽으로 만들어 준다는데 어느 누가 마다할까.
“이게 뭐라고 했었지?”
“아두이노(Arduino). 물리적인 자극에 반응하도록 설계할 수 있는 개발 도구 같은 거야.”
강선의 글씨로 만든 다양한 영상 그래픽들은 특정한 물리적 자극을 받을 때에만 구동되었다. 조금 전 보았던 수백 개의 별 성(星) 그래픽은 빛에 반응하도록 설계했는데, 이는 해가 진 밤에만 나타날 것이라 했다.
“디자인과에서 이런 것도 배워?”
“표현 방식에 한계는 없으니까. 메시지 전달에 찰떡이면 다 해 보는 게 우리 교수님들 철학이야.”
암막실로 오는 길에 봤던 시디과 학생이 떠올랐다. PVC천을 한가득 실은 수레를 끌고 가던 그에게 같이 있던 학생들이 ‘과사에 재봉틀 도착했더라’라고 했던 걸 보면 그 또한 어떤 작품을 만들려는 것 같았다.
패션디자인 학과인 줄 알았다는 말에 그들은 이래서 우리 과가 대한민국 최고인 것이라며 자부심을 드러냈다. 졸업 후엔 이런 실험적인 예술만 하긴 어려울 테니 지금 다 해 봐야 한다나 뭐라나. 하루에 많으면 두어 시간밖에 못 자면서도 즐거워하는 모습에 강선은 적잖은 충격을 받았다.
김 교수는 항상 ‘어째서 저런 뜬구름 예술가 집단에 돈을 쏟아붓느냐’며 불만을 보였지만 강선은 시디과가 디자인학부 내에서 가장 많은 운영비를 받을 만하다고 생각했다. 조건과 형식을 가리지 않고 계속해서 연구하고 나아가는 모습이 확실히 달랐으니까. 뭐, 그렇다고 해서 자신이 서예과의 미래를 위해 발 벗고 나설 생각은 없다. 김 교수는 여전히 아니꼬운 반응을 보이고 있으니 말이다.
“전시장은 다음 주부터 들어갈 수 있다고 하니까 그때까지만 여기서 실험해 보면 될 것 같아.”
“응. 수고 많았어, 다들.”
“강선이 너도. 너 아녔음 어땠을지…… 생각만 해도 아찔하다, 아찔해. 우리가 정형외과라도 보내 줘야 하는 거 아니냐?”
권혜인이 은근슬쩍 농담을 쳤다. 강선의 손목을 혹사시킨 것이 어지간히 미안한 모양이었다.
“다음에 술이나 사, 그럼.”
“그건 당연한 거고. 졸전 끝나면 모여서 한잔하자.”
씨익, 웃은 그가 짝짝 박수를 쳤다.
“다들 고생했다. 이제 들어가서 좀 쉬고 월요일에 다시 모이자.”
수고하셨습니다아- 하는 인사와 함께 조촐한 박수 소리가 이어졌다.
졸업 전시회까지 남은 시간은 약 보름 정도. 강선은 앞으로 할 일을 차근차근 정리하며 건너편 건물을 바라보았다.
✲ ✲ ✲
“……강, 선아.”
응, 억눌린 소리로 나온 대답이 두터운 기둥에 빠르게 먹혀 들어갔다.
지금 자신이 뭘 하고 있는 건지 자각할 새도 없이, 몹시 갑작스레 일어난 일에 지예준의 손이 갈 곳 없이 허공을 휘저었다.
푸하, 하며 반 정도 넣었던 것을 뱉은 강선이 숨을 몰아쉬며 그의 손을 잡아 제 머리로 내렸다. 손가락 사이사이에 젖은 머리카락이 감겨 붙었다.
“쓰다듬어 줘.”
그러곤 다시 입을 크게 벌리는데, 눈가에 눈물이 맺힌 채면서 힘들지도 않은지 꾸역꾸역 성기를 머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되었을까.
살살 머리를 쓰다듬자 강선의 입 안쪽이 떨리듯 경련했다. 열심히 고갯짓하며 추웁, 춥, 빨아들이는 입술에 울컥, 프리컴이 흘러나왔다. 지예준은 튀어나오려는 신음을 참으며 바로 5분 전에 있던 일을 떠올렸다.
강선의 집에서 함께 저녁을 먹은 후 먼저 씻고 나와 뒷정리를 하던 중이었다. 잠옷을 가져온다는 걸 잊어버려 하는 수 없이 바지만 입은 채로 설거지를 하고 있는데, 너무 집중한 나머지 강선이 저를 구경하고 있다는 걸 전혀 모르고 있었다. 뒷덜미에 입술이 닿고서야 놀란 지예준은 저를 올려다보며 웃고 있는 얼굴에 먼저 입을 맞추었다.
설거지고 뭐고 그렇게 서서 한참 혀를 섞다 저를 이끄는 손길에 거실 소파까지 다다랐고, 강선은 지예준을 앉히자마자 그 아래 앉아 버클을 풀었다. 준아, 하고 부르며 다짜고짜 귀두를 머금은 입술에 순식간에 발기한 아래가 부끄러웠다.
“왜, 갑자기…….”
“그러게 누가 헐벗고 있으래?”
맨가슴을 찰싹, 두드린 손이 두툼한 살을 꽈악 쥐고는 복근을 타고 내려와 그대로 성기 밑동을 쥐었다.
“……바, 바지는 입었는데.”
“이게 입은 사람 꼴이야? 이렇게 내놓으면 누가 믿어.”
강선이 네가 꺼낸 거잖아… 하며 말하려던 입술에 뜨거운 숨만 맴돌았다. 강선이 다시 아래를 문 탓이었다. 상체를 다 드러내 놓고 살랑이며 설거지를 하는 모습이 영락없는 유혹처럼 보였으니 강선은 제 할 일을 한 것이다.
손안에 들어온 머리가 너무 작아 어찌할 줄 모르던 지예준은 그 아래 귓바퀴를 엄지로 살살 문질렀다. 흐응, 하는 콧소리와 함께 입술을 뗀 강선은 혀를 내밀어 귀두 끝으로 툭툭 때렸다. 발개진 눈가만큼 붉어진 제 성기와 그의 혀가 닿아 있는 모습이 너무도 선정적이었다. 혀를 세워 다시금 묽은 액체를 내뱉은 부분을 쪼듯이 문지른 강선이 기둥에 쪽쪽, 입을 맞추며 물어 왔다.
“좋아?”
좋으냐 묻는 얼굴이 한없이 맑고 깨끗했다. 헐렁한 셔츠 안으로 보이는 쇄골과 그의 뒤통수 너머로 비죽 튀어나온 둔부에 자꾸만 시선이 갔다.
“응? 준아, 좋냐고… 앗-”
양손을 내린 지예준이 강선을 단번에 일으켜 제 무릎 위에 앉혔다.
한창 야릇한 분위기를 주도하며 즐기고 있던 강선은 저를 짐짝 들듯 하는 힘에 놀라 눈을 동그랗게 떴다.
“왜?”
옷 안으로 불쑥 들어온 손이 뜨거웠다. 귀를 빨갛게 물들이고는 어딘가 갈등하는 얼굴로 배와 갈비뼈를 지분대는 게 이상하다. 그는 할 말이 있을 땐 늘 이렇게 손으로 뭔가를 만지며 입술을 달싹이곤 했기에 강선은 고개를 숙여 눈가에 가벼운 키스를 했다.
“할 말 있어?”
“……응.”
손바닥에 닿은 그의 가슴이 빠르고 크게 뛰었다. 콩닥콩닥하는 울림이 좋아 매끈한 턱에 입술을 묻고 말해 봐, 하니 슬금슬금 마주친 눈이 아래로 향했다. 뭐지, 만져 달라는 건가?
잔뜩 젖어 우뚝 선 성기를 손에 쥐고 수음하듯 움직이자 몇 번 지나지 않아 손목이 잡혔다.
“나, 나도…….”
“응? 싫어?”
“아니…….”
그게 아니라…….
모기만큼 작아진 목소리로 눈을 피한 그가 큼큼, 헛기침을 하더니 강선이 입은 수면바지 앞섶을 살짝 건드렸다.
“……나도, 빠, 빨아 봐도 돼?”
어찌나 긴장했는지, 말뿐 아니라 힘줄이 가득 선 손까지 잘게 떨릴 정도였다. 지예준 입에서 나올 줄 몰랐던 말에 강선은 순간 뭘 빤다는 거지, 하며 머릿속에 물음표를 띄웠으나 곧이어 뒤바뀐 자세에 숨을 들이켜고 말았다.
“안 돼!”
아까 강선이 했던 것처럼 다리 사이에 앉아 허리춤을 내리려는 그의 손을 급히 붙잡았다. 지예준 이거 미친 거 아냐?
“너, 는… 하지 마.”
정강이 아래에 닿은 널찍한 어깨가 꿈틀, 했다.
“……왜?”
“왜냐니…….”
“나야 익숙해서 괜찮은데 넌 아직 거기까진…… 아니, 내 말은 그게 아니라.”
익숙하다는 말이 나오자마자 축 내려간 눈썹에 강선이 휙휙 고개를 저었다. 급하게 말을 꺼내다 보니 그만 실수해 버렸다. 언젠가는 지예준도 하겠지, 하며 먼 미래의 일로 생각한 적은 있었지만 이렇게 갑자기 바지 먼저 벗기려 할 줄은 꿈에도 상상하지 못했다.
“그러니까, 아직 이른 것 같은-”
“이르다고……?”
둘의 대화는 꼭 지난봄의 일을 떠오르게 했다. 강선에게 아래를 물린 지예준이 진도가 너무 빠르다며 도망갔던 때 말이다.
당황을 감추지 못하며 옷을 추스르는 행동에 지예준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어 갔다. 부드러운 수면바지가 커다란 손에 단숨에 벗겨졌다.
“야, 잠깐-!”
강선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지예준은 굉장히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드러난 앞섶에 얼굴을 처박았다. 꼭 고집을 부리는 아이 같은 모습에 강선이 양손으로 그의 머리를 떼어 내려 했으나 지예준은 목에 힘을 주며 속옷 위로 입을 벌렸다.
“아, 아파!”
“읏……!”
그러나 지금껏 그 누구의 것도 입에 담아 본 적 없는 지예준이 뭘 제대로 할 수 있을 리가…….
지예준은 기둥 윤곽을 그대로 깨물었고, 그 따가움에 강선은 저도 모르게 뒤꿈치를 들어 그의 등을 퍼억, 소리가 날 만큼 세게 차 버리고 말았다.
“주, 준아, 괜찮아? 그러니까 내가 잠깐만이라고 했잖아…….”
그렇게 세게 물지 않아서 다행이었지, 하마터면 정말 큰일 날 뻔한 사태에 등 뒤로 식은땀이 주욱, 흘러내렸다.
“왜 이렇게 급하게 굴어…….”
“미, 미안해 강선아…… 많이 아프지.”
자신이 깨문 부분을 손으로 살살 쓰다듬으며 그가 연신 사과했다. 아픔보단 놀랐던 것이 더 컸기에 통증은 몇 초 만에 사라졌지만 남의 좆에 호호 입김을 불며 달래 주는 광경에 그만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참나…… 어이가 없어서.”
“……미안해.”
제 손에 쥔 것이 무엇인지도 자각되지 않을 정도로 그 또한 놀란 모양이었다. 마치 환부를 마사지하듯 주물거리는 게 일부러 이러나 싶었다. 손을 뻗어 까만 머리칼을 쓱쓱 쓰다듬고 조금 젖은 듯한 속눈썹을 매만졌다.
“가르쳐 주면 잘할 수 있어?”
“응. 잘할 수 있어.”
비장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는 것도 그렇고, 당장이라도 강선이 하라는 대로 할 것 같은 대답도 그렇고. 세상에 어떻게 이런 귀여운 놈이 내 앞에 뚝 떨어진 거지. 강선은 그에게 얹은 한쪽 다리를 들어 발바닥으로 어깨를 짚었다. 단단하면서도 부드러운 살갗이 마음에 들었다.
“입 벌려 봐.”
나른하게 웃는 얼굴에 까만 눈동자가 작게 떨렸다.
✲ ✲ ✲
손가락에 얽혀 들어오는 머리카락을 세게 쥐자 그의 입안이 잔뜩 수축했다.
“흐윽……!”
아, 씨발. 내가 이런 취향이 있었나. 강선은 후우, 숨을 고르며 머리를 조이고 있던 다리를 벌렸다. 지예준의 양팔이 허벅지를 더욱 깊게 끌어안았다.
지예준은 하나를 가르치면 열을 하는 우등생이었다. 어찌할 줄 몰라 입술로 물고만 있던 게 바로 몇 분 전이었는데, 벌써 머리까지 움직이다니…….
그의 힘에 점점 끌려가며 소파에 거의 눕듯 자리한 강선은 자신이 가르쳐 준 대로 귀두 끝을 머금고 사탕 물듯 빠는 입술을 엄지로 덧그렸다. 입안에 성기와 손가락이 함께 들어가는 느낌이 나쁘지 않았다.
“힘들면 그만해도 돼.”
처음부터 억지로 시킬 생각은 없어 나온 말이었으나 지예준은 그것을 무슨 뜻으로 해석했는지 제 입에 들어온 손가락을 빼 깍지를 끼곤 고개를 숙여 성기를 목구멍 직전까지 밀어 넣었다. 이게 그렇게나 고집 부릴 일인가 싶었지만 그것 또한 저를 향한 감정이니 강선은 기꺼운 마음으로 그의 머리를 쓰다듬었다.
“잘하네… 흐, 읏…….”
칭찬은 지예준의 입을 조이게 한다. 무슨 로봇도 아니고, 자신이 좋다고 할 때마다 세게 입술을 오므리며 힘을 주니 그 서투른 행위에도 자꾸만 아래에 피가 몰렸다.
“아, 준아, 잠깐만…….”
앞으로 한 번만 더 이러면 정말 입안에 쌀 것만 같아 머리를 쓰다듬던 손을 내려 그의 턱을 붙잡으니 다행히 착하게 입을 뗀 지예준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며 허벅지를 깨물었다.
“쌀 것 같아서.”
“싸도 되는데…….”
“그건 다음에.”
몸을 일으키려 팔꿈치에 힘을 주자 위로 올라온 그가 강선을 번쩍 들어 안았다. 구음을 하느라 번들거리는 입술을 닦아 주고 고개를 숙이자 지예준의 얼굴이 먼저 다가와 쪽, 입을 맞추었다.
“준아, 나머지는 들어가서 하자.”
“……응.”
처음치고는 만족스러웠던 펠라티오에 기분이 더욱 좋아진 강선은 지예준의 머릿속에 남은 다른 것들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다. 저보다 훨씬 능숙하고 여유로운 애인을 둔 지예준에겐 아주 사소한 것이라도 모두 배워야 할 것들이라는 사실을 말이다.
첫 섹스 때처럼 지예준을 눕히고 위로 올라탄 강선이 젤을 꺼내 막 손에 바르려던 참이었다. 지예준은 잠시만, 하며 강선의 팔을 저지하더니 젤 통을 가져가 몸을 일으켰다. 등골을 타고 올라오는 불안감에 강선의 미간이 좁아졌다.
“……왜?”
알면서도 모르는 척, 묻자 지예준의 얼굴이 화르륵 불타올랐다.
“이, 이것도 알려 주면…….”
안 돼?
제 손보다 작은 젤 통을 쥔 모양새가 어설프든 말든, 지예준은 아까와 같은 비장한 얼굴이었다.
“너… 솔직히 말해 봐.”
“으응…?”
“처음 아니지.”
그 말에 조금 전까지는 빨갛기만 하던 얼굴이 순식간에 희게 질렸다. 혹시 자신이 무슨 실수라도 했나, 하는 표정이었다. 연인 사이에, 그것도 섹스 전후에 절대 하면 안 될 말 1순위를 내뱉은 건 강선이었음에도 그는 자신이 무언가 에티켓을 어긴 것처럼 크게 고개를 저었다.
“처음이야…….”
“처음이라는 사람이 이렇게 막 남의 엉덩이를 탐낸다고?”
“……우리 남이야?”
커다란 어깨가 거의 울듯 축 처졌다. 이게, 이젠 말까지 돌릴 줄도 알고.
흐음, 하며 한쪽 눈썹을 치켜 뜬 강선은 지예준의 빈 오른손을 들어 중지 끝을 할짝, 핥았다. 축축하고 뜨거운 느낌에 손 전체가 움찔거렸다.
“이 손가락 먼저 넣는 거야. 다음은 약지고.”
“응.”
“갑자기 막 두 개씩 넣고 그러면 안 돼. 넌 손가락도 굵으니까…… 난 굵은 게 좋긴 한데 갑자기 넣으면 아파서.”
굵다는 말에 그가 으, 응. 하며 말을 더듬었다. 그 와중에도 굵은 걸 좋아한다는 말을 마음에 단단히 새겼다. 가슴도 좋아하고 굵은 것도 좋아하는구나…… 지예준은 아침 운동량을 조금 더 늘려야 할 필요를 깨달았다.
누구에게 이런 것까지 가르쳐 주는 건 강선도 처음이었던지라 기분이 참 요상했다. 이미 지예준과 몇 번이나 했음에도 꼭 이제야 첫 거사를 치루는 것만 같았기 때문이었다.
“하다가 싫으면 꼭 말 하고. 싫은데 억지로 하면 나도 싫어.”
“가, 강선이 너도…… 불편하면 말해.”
“응. 이리 와, 이제.”
침대에 누워 그의 팔을 두드리자 다리 사이로 들어온 그가 천천히 몸을 숙였다. 배와 가슴이 맞닿고 곧이어 입술이 닿았다. 뜨거운 혀가 아랫입술을 핥다 안으로 들어왔다. 섹스는 몰라도 키스는 지금껏 숱하게 해 온지라 이젠 지예준 또한 능숙하게 강선을 따라올 줄 알았다. 강선의 혀를 가져가 펠라를 하듯 빨던 그는 목덜미에 닿은 온기에 고개를 틀어 더욱 깊이 입술을 머금었다.
키스를 하며 제 온몸을 어루만지는 손길에 식어 있던 아래가 바짝 긴장했다. 강선의 다리가 허리를 감아 누르자 서로의 성기가 밀착해 짓눌렸다. 입술을 빨던 숨이 흐으, 하며 신음을 내뱉음과 동시에 지예준의 머리가 가슴께로 내려갔다.
“으응-!”
이미 발딱 선 작은 돌기가 습한 곳에 빨려 들어갔다. 젤리처럼 말랑하다가도 조금만 건드리면 단단해지는 게 여간 야한 게 아니었다. 지예준은 강선의 팔 안쪽 부드러운 부분이나 목덜미를 빠는 것을 제일 좋아했지만, 강선이 지예준의 가슴을 만지는 걸 좋아하는 것처럼 저 또한 강선의 것을 입에 넣는 것을 좋아했다.
“간지러워…….”
혀끝을 세워 유두를 할짝이자 머리 위에서 달콤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숨이 닿을 때마다 움칠거리는 배와 더 세게 빨아 달라는 듯 목을 껴안는 팔에 머리가 뜨거워졌다. 지예준은 강선이 원하는 대로 입을 벌려 가슴을 크게 머금고 강하게 빨아들인 다음 이를 세워 얕게 깨물었다.
“하아, 좋아…….”
강선이 좋다고 할 때마다 심장이 콩닥콩닥 뛰었다. 저로 인해 그가 더 기분 좋았으면 했다. 더는 붉어질 수 없을 만큼 가슴에 매달려 있는데 강선의 손이 볼을 쓰다듬었다. 지예준은 저에게 닿은 손가락에 입을 맞추었다. 굳은살 박인 네 번째 손가락을 살짝 깨물자 낮은 웃음소리가 났다.
“……해도 돼?”
“응.”
허락을 내린 눈이 느리게 깜빡였다. 몸을 세우고 침대 위를 뒹굴고 있던 젤 통을 들자 강선은 기대인지 떨림인지 모를 한숨을 쉬며 다리를 접었다. 달칵이며 열린 뚜껑과 미지근하고 미끄러운 젤이 손가락 사이에 엉켜들었다. 한쪽 무릎을 감싸듯 쥐고 천천히 벌리며 회음을 누르듯 문지르니 꽉 닫혀 있던 곳이 움찔거리는 게 한눈에 보였다.
허벅지를 당겨 안고 양손으로 비문 주변을 벌리니 말랑한 엉덩이가 지예준의 무릎 위에 올라와 단단한 근육에 떡처럼 뭉개졌다. 이렇게까지 앞에서 보는 건 처음이 분명한데도 거부감이 일기는커녕 더 만지고 싶기만 했다.
“으읏…….”
강선이 알려 준 대로 중지를 천천히 삽입했다. 활짝 열릴 듯하면서도 겨우 한마디 들어온 침입자에 급격히 조여드는 느낌이 생경하다. 조금씩 안으로 들어갈수록 뜨거운 젤리에 감싸이는 것만 같았다. 끝까지 들어간 손가락을 배 쪽으로 살짝 구부린 채로 둥글게 돌렸다. 제 성기가 들어가기엔 너무 좁았으므로 이렇게나마 자리를 넓히려는 움직임이었다.
“강선아, 아파……?”
“아니…….”
너는 괜찮아? 하고 강선이 물어 왔다. 지예준은 응, 하고 대답하며 속에 넣은 것을 천천히 뺐다가 다시 넣었다가 했다. 뺄 때엔 풀어지면서도 안쪽까지 들어올 땐 다시 조이는 내벽이 지문과 마디 사이사이를 간지럽히듯 머금었다. 번들거리는 손바닥과 엉덩이를 타고 내려가 제 허벅지로 뚝뚝 떨어지는 투명한 젤에 목이 타들어 갈 것 같았다.
“준아, 더…….”
“……더?”
베개를 끌어안고 있던 손끝이 무릎을 감싼 손등에 내려앉았다. 지예준뿐 아니라 강선 또한 숨이 탈 지경이었다. 빨리 저걸 안에 넣고 무자비하게 들쑤시고 싶었다.
“하나 더 넣어 줘, 빨리…….”
그간 강선은 일이 바빴고 지예준은 부모님 일에 신경이 곤두서 있느라 관계를 못 가진 지 꽤 시간이 흘렀기에 오늘 제대로 풀어야 뒤탈이 나지 않을 터였다. 깊은 곳을 짓누르고 있던 것이 빠져나가고 곧 아래가 빠듯하게 벌어지는 게 느껴졌다. 아프진 않았지만 긴 전희 속에서 너무 흥분한 강선이 문제라면 문제였다.
“빨리…….”
빨리 하면 아플 것 같은데. 아까보다 더 꽉 물어 오는 내벽에 지예준의 입에서도 억눌린 숨이 흘러나왔다. 중지와 약지를 끊어질 듯 물며 보채듯 다리를 바르작거리는 강선의 모습이 더는 참을 수 없어 조금 더 빨라진 속도로 푹푹, 안을 짓이겼다. 강선의 입에서 아까와 확연히 달라진 신음이 튀어나왔다. 점점 들리는 허리와 질척이며 거품이 인 젤, 높아져 가는 목소리에 지예준은 본능적으로 검지까지 밀어 넣고 말았다.
“아, 잠까, 안, 하, 준아, 으읏……!”
손톱이 팔을 긁는 것과 함께 투두둑, 무언가 떨어졌다. 터지듯 쏟아진 것이 발간 유두에 떨어져 분홍빛으로 흘러내렸다. 앞을 만질 새도 없이 사정한 강선의 손끝이 지예준의 팔에 긴 상흔을 남겼다.
제대로 시작하기도 전 손가락만으로 간 건 처음이었으나 강선은 지금 자신이 한 짓을 두 눈으로 확인할 수 없었다. 손가락과 벌리는 차이부터 다른 것이 사정없이 아래를 벌렸기 때문이었다.
“흐읏, 준아, 으응!”
귀두가 채 다 들어가기도 전, 뜨거운 것이 울컥울컥 터져 나왔다. 주름 사이를 비집고 흘러나온 것이 반, 조금이나마 벌어진 안쪽으로 들어간 것이 반이었다. 콰득, 목이 깨물렸다.
“천, 천히, 넣어… 아, 흐윽…….”
어이없게 이루어진 둘의 사정을 살필 새가 없었다. 강선은 자기에게 손가락을 꽂는 걸로 흥분해 그대로 사정한 지예준을 허겁지겁 끌어안았고, 지예준은 사정하면서 제 이름을 부르는 강선의 목소리에 머리가 터질 것만 같았으니.
억지로 벌어지며 꾸역꾸역 들어가는 성기는 계속해서 물을 흘렸다. 걷잡을 수 없이 흥분한 탓에 프리컴이 질질 새어 나온 것이었다. 강선의 것 또한 언제 그랬냐는 듯 단단해져 발딱 섰다.
좁은 곳에 힘으로 밀어 넣으려니 강선의 몸이 점점 위로 올라가 헤드에 부딪쳤다. 허리를 안고 있던 손이 허벅지를 부여잡고 주우욱, 내림과 동시에 반쯤 남아 있던 성기가 먹히듯 빨려 들어갔다.
“하으읏-!”
“강선아, 하, 읏, 강선, 아, 강선아…….”
천천히 즐기며 움직이는 법을 알려 주려 했는데 또 이전과 다를 바 없는 관계가 이어졌다. 커다란 몸 아래 깔려 박히는 대로 흔들리며 강선이 줄줄 눈물을 흘렸다. 이미 좋아서 미쳐 버리겠는데도 더, 더, 강한 것을 원했다.
쾌감에 못 이겨 꽉 감고 있던 눈을 뜨자 지예준의 상태도 장난이 아니었다. 뭐라도 한 것 처럼 풀린 눈으로 강선의 목이며 가슴을 잔뜩 깨물고 빨며 퍽퍽 허리를 내리꽂았다. 안 그래도 큰 몸이 강선아, 강선아, 이름을 부를 때마다 크게 부풀었다.
다음에 할 땐 꼭 콘돔을 끼겠다고 했으면서 또 얼마나 급했으면 이러나 싶어 웃음이 났다. 얘 지금 좀…… 아니, 많이 돈 것 같은데.
조금만 진정하라고 어깨를 두드릴까 했지만 이렇게 절절하게 매달리며 울기까지 하는 얼굴을 보니 이것 또한 지예준다워 강선은 가쁜 숨으로 그의 입술을 머금었다. 입술이 닿으니 허릿짓 또한 더욱 거세졌다. 양팔과 다리로 결박하듯 끌어안자 속을 짓찧는 움직임이 더욱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발끝이 곱아들고 목이 뒤로 넘어갈 듯 젖혀졌다.
“아으으읏-!”
철퍽이는 소리에 맞춰 픽, 픽, 쏟아진 정액이 턱 끝까지 튀어올랐다. 곧이어 안쪽 또한 무언가도 가득 들어차기 시작했다.
“흐으, 하아…….”
그에게 잡힌 어깨가 아팠지만 강선은 일부러 아래를 꽉 조이며 그가 끝까지 내뱉는 것을 도왔다. 이윽고 힘이 다 풀린 듯 육중한 몸이 강선의 위로 천천히 떨어졌다. 강선은 바들바들 떨리는 손을 들어 거의 다 마른 머리카락을 살살 쓰다듬었다.
“그렇게 좋았어?”
나긋나긋한 목소리에 지예준의 입술이 작게 응, 하며 목덜미를 지분거렸다. 어리광을 부리는 것만 같아 제법 귀여웠다. 천천히 삽입을 푼 그는 자신이 또 콘돔 없이 섹스를 했다는 사실에 놀라 허둥지둥 욕실과 방 안을 돌아다녔고 강선은 이 일을 핑계로 그에게 뒤처리를 알려 주겠다며 욕실에서 한 번 더 그의 것을 품었다.
그렇게 몇 시간 동안이나 이어진 섹스 후.
강선은 온 정기가 다 빨린 것처럼 축 늘어진 지예준 옆에서 반짝반짝 광이 나는 피부로 후루룩, 커피를 마시며 평화로운 금요일 밤을 맞이하고 있었다.
거실에 둔 핸드폰에서 요란한 벨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지예준의 것이었다. 강선의 무릎을 베고 꿈나라에 가 있던 지예준이 익숙한 벨소리를 듣곤 비척이며 몸을 일으켰다.
“괜찮아? 내가 가져올게.”
“아냐…….”
그는 저 대신 일어나려는 강선을 다시 앉혀 두고 조용히 문밖을 나섰다. 긴 손톱자국이 난 등이 거실 조명을 받아 훤히 드러났다. 이제껏 섹스를 하면서 남의 몸에 상처를 낸 적이 없었는데. 등의 상처를 보며 사과하는 저에게 아무렇지 않은 얼굴로 괜찮다 했던 그의 모습이 떠올라 강선은 괜히 가려워진 가슴께를 벅벅 긁었다.
무슨 통화인지는 몰라도 꽤나 오래 걸리는 듯해 커피를 마저 마시며 결린 목을 이리저리 돌리던 차였다. 쿵쿵, 빠르게 바닥을 울리는 발소리와 함께 문이 급하게 열렸다.
“……무슨 일 있어?”
막 잠에서 깼을 때와 달리 멀쩡해진 얼굴이 웃는 듯, 찡그린 듯 묘한 표정을 지었다. 그는 침대에 올라오자마자 강선을 껴안고 한참 동안 말을 꺼내지 않았다. 머릿속에 한 가지 일이 자연스레 떠올랐다.
✲ ✲ ✲
“안녕하세요, 어머님.”
“반가워요. 우리 예준이 친구라고 했죠?”
“네. 말씀 편히 하세요.”
50대 초반 즈음으로 보이는 중년 여성이 인자하게 웃으며 손을 내밀자 강선은 공손하게 마주 잡곤 꾸벅, 고개를 숙였다. 아주 잠깐 닿은 것이었으나 지예준처럼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에 긴장 가득했던 얼굴이 조금 풀어졌다.
“이런 잘생긴 친구가 있는 줄은 몰랐네.”
“하하… 감사합니다.”
약속 시간보다 조금 이르게 도착했음에도 식당엔 지예준과 그의 어머니가 더 빨리 도착해 앉아 있었다. 이미 한번 와 본 적 있는 식당은 익숙하면서도 매우 불편했으나 지금은 장소를 가릴 때가 아니었다.
“실례합니다. 이제 음식 내어 드려도 괜찮으실까요?”
“네. 부탁해요.”
공손한 몸짓으로 문을 연 7번의 눈빛이 강선과 부딪쳤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느냐는 물음이 가득했지만 강선은 빨리 꺼지라며 테이블 아래로 휘휘, 손을 흔들었다. 장소를 이곳으로 정한 게 다름 아닌 지예준의 어머니였으니 이건 강선도 어떻게 할 수 있는 일이 아니었다.
지예준과 정신 나갈 듯한 섹스를 했던 날 밤, 그에게 전화를 한 것은 다름 아닌 그의 어머니였다. 지예준이 하도 당황스러워하는 바람에 하나부터 열까지 전부 알아듣진 못했지만 요약하자면 주말에 그의 어머니가 서울로 올라와 이혼 상담을 받을 거라는 소식이었다.
늦은 아침, 지예준은 터미널로 어머니를 마중 나갔다. 오랜만의 만남에 그는 아들을 끌어안고 차에서 많은 눈물을 흘렸다. 미안하다는 사과가 주를 이루었으나 지예준은 고개를 저으며 괜찮다, 괜찮다, 위로를 했다.
눈물의 상봉이 끝난 후 어머니, 권은숙은 아들과 맛있는 식사를 하고 싶다며 근교의 한식당을 가리켰고 차를 몰고 가던 중 제 아들이 누군가와 메시지를 주고받는 모습에 관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워낙 숫기 없고 조용해 중학생 때 이후론 친구랑 잘 사귀는 걸 본 적이 없었던지라 권은숙은 눈을 반짝이며 친구를 초대하길 원했다.
앞에 놓인 차를 마신 권은숙은 물수건으로 손을 닦으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 짙은 눈썹과 눈매가 선한 인상을 풍겼다. 지예준이 아버지보단 어머니를 쏙 빼닮은 모양이었다. 생각보다 훨씬 밝고 건강한 모습에 강선이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인터넷에 찾아보니 여기가 평이 좋더라구. 갑자기 불러서 미안하다, 선아.”
“아니에요, 어머님. 마침 저도 그때 밥 먹으려던 참이었거든요.”
“어머, 그러니? 다행이네.”
저를 ‘선이’라 부르는 건 오래 봐 왔던 보육원 사람들이 전부였다. 보통 남들이 선이라 하면 괜히 필요 없는 친한 척을 하는 것 같아 싫었는데 지예준의 어머니라 그런지 어색하면서도 조금 쑥스러운 기분이 들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문이 열리고 정갈하게 담긴 음식들이 하나 둘, 테이블을 채워 갔다. 조금 전 눈으로 욕한 덕인지 7번의 모습이 보이지 않아 강선과 지예준은 비교적 편하게 식사를 시작할 수 있었다.
“다들 많이 먹어.”
“네. 잘 먹겠습니다.”
젓가락을 든 손에 크고 작은 굳은살이 가득했다. 거제도에 있는 민박집에서 일을 한다고는 들었지만 겨우 몇 년 만에 저렇게 되었을 리는 없을 터였다. 그간의 고난이 모두 저 손에 담긴 것만 같았다. 지예준 또한 그 손을 발견했는지 눈가가 살짝 붉어진 채로 연신 물만 들이켰다.
앞에 앉은 둘이 무슨 관계인지 모르는 권은숙은 제 아들의 친구가 싹싹하고 예의 바른 사람임에 안도했다. 같은 학교에서 서예를 전공한다는 것 또한 마음에 들었다. 지예준의 성격상 나쁜 친구들과 어울리지는 않을 테지만 엄마 마음이라는 건 어쩔 수 없는 것이니 말이다.
“좋은 친구를 뒀네.”
나지막하게 나온 말에 국물을 먹던 지예준이 쿨럭, 기침을 했다. 사레가 단단히 들렸는지 얼굴까지 새빨갛게 물들인 채로 팡팡 가슴을 쳤다.
“준아, 괜찮아?”
난데없는 소란에 강선이 후다닥 물을 따라 건넸다.
“예준아, 천천히 먹어야지.”
“……네.”
친구라는 말에 당장 어젯밤 강선과 했던 일이 떠올라 저도 모르게 과민 반응을 해 버렸다. 지예준은 커다란 손으로 얼굴을 마구 문지르며 흘긋, 오른편에 앉은 강선을 쳐다보았다. 그는 지예준이 왜 이러는지 다 안다는 듯 입꼬리를 묘하게 말아 올렸다.
“음식이 맛있네요.”
“그러게. 많이들 먹어. 부족하면 더 말하고.”
“네, 어머님.”
강선은 음식을 집어 먹으며 옆에 앉은 이의 허벅지를 은근하게 쓰다듬었다. 매우 파렴치하며 변태적인 행동이었으나 왼손이 하는 일은 모른다는 듯 태연하게 식사를 이어 나갔다. 식사가 거의 끝나 갈 때쯤에야 손을 거두자 후우, 한숨 소리가 들렸다.
“예준이 넌 왜 이렇게 땀을 흘려? 덥니?”
“아, 아니에요.”
어젠 그렇게나 거침없더니. 저런 모습이 진짜 귀엽다니까…….
“다 먹었으면 이만 일어날까? 아줌마는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 테니까 차에 가서 기다리고 있어.”
“네. 다녀오세요, 어머님.”
권은숙이 가방을 들고 일어나 방을 나서자마자 강선은 지예준의 앞섶을 툭, 건드렸다.
“아무 데서나 세우고 말야.”
“아, 아니야…….”
“아니라고? 지금 확인해 봐?”
응? 하고 웃으며 바지춤을 풀어 버릴 듯 장난을 치자 눈썹을 축 내린 그가 ‘강선아……’ 하며 울상을 지었다. 그러면서도 손을 내치지는 않는 모습이 당장 밖이고 뭐고 죄다 벗겨 먹고 싶을 정도로 귀여웠다.
“어머님 가시고 나면 혼날 준비 해.”
“……왜?”
쿡쿡, 웃은 강선이 손바닥을 펴 그의 볼을 어루만졌다. 혼난다는 말에 불안해하면서도 강선이 저를 만지고 있으니 또 콩닥콩닥 가슴이 뛰었다.
“안 세웠다고 거짓말했잖아.”
진짜 안 세웠는데……. 아무리 제 몸이 강선에게 약하다지만 이런 곳에서까지 그럴 만큼 변태는 아니었다. 식은땀이 났던 것도 혹여나 어머니 눈에 보일까 싶어 걱정하느라 그랬던 거였는데. 물, 물론 조금만 더 만졌으면 위험할 뻔했지만.
“……어떻게 혼낼 건데?”
“글쎄. 그건 앞으로 차차 생각해 봐야지.”
하지만 지예준은 그냥 자기가 거짓말을 했다고 생각하기로 했다. 강선의 얼굴이 너무도 즐거워 보였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솔직히… 조금 기대가 되기도…….
“결혼 허락이라도 받았어?”
드르륵, 열린 문 너머로 남자 목소리가 들렸다. 야릇한 분위기 속에서 곧 입을 맞출 듯 말 듯 가까워진 얼굴이 순식간에 멀어졌다. 문 열리는 소리에 어머님인 줄 알았던 강선의 얼굴이 인정사정없이 구겨졌다. 예전 일이 떠올랐는지 지예준의 표정 또한 급격히 어두워졌다.
그간 강선과 지예준에게 어떤 일이 있었는지 알 리가 없는 7번은 싱긋방긋 웃는 얼굴로 오늘은 안 남기고 다 먹어서 내심 기쁘다다느니, 하며 너스레를 떨었다.
“다 이 형님 덕인 줄 알, 아야-!”
“강선아!”
포물선을 그리며 날아간 숟가락이 그의 이마에서 청량한 소리를 냈다. 씩씩거리며 벌떡 일어난 강선과 그의 양팔을 끌어안고 몸을 물리는 지예준 앞에서 그대로 쭈그려 앉은 7번이 아이고, 아이고, 앓는 소리를 냈다.
“나 죽네, 아이고 머리야…….”
“한 번만 더 얘 건들면 뒤진다.”
분노 가득한 목소리에 7번이 어이없다는 듯 허허, 웃으며 혀를 찼다.
“무슨 소리야, 난 그냥 너랑 잘되라고 좀 도와준 것뿐인데. 은인 대우가 너무하네. 아, 씁, 아파라…….”
“은인은, 지랄…….”
지예준에게 단단히 붙잡힌 강선이 허공에 발길질을 하든 말든 7번은 ‘청첩장 나오면 연락해’라며 이마를 부여잡고 유유히 사라졌다. 곧이어 멀리서 ‘핸드폰을 놓고 왔네요~’ 하는 목소리와 함께 나타난 권은숙은 아직 주차장에 간 게 아니었냐며 두 사람의 팔을 잡아끌었다.
“가는 길에 커피 한 잔씩 할까?”
“네, 좋아요.”
어느새 이마에 반창고를 붙이고 나타난 7번이 또 오시라며 이들을 배웅했고, 강선은 실수인 척 그의 발을 밟고 지나가는 것으로 가늘고 질겼던 인연을 완전히 끝내 버렸다.
이젠 지예준이 불안해할 일은 절대 만들지 않을 거라고, 강선은 굳게 다짐했다.
✲ ✲ ✲
이혼 상담이 끝날 때까지 어머니는 아들의 집에서 지내기로 했기 때문에 과제를 핑계로 먼저 일어난 강선은 지예준의 집에 들러 제 짐을 정리했다. 자신이야 가족도 친척도 없으니 상관없다지만 지예준이 원치 않는 의심을 사거나 아웃팅을 당하는 건 상상만으로도 싫었으니 말이다.
해 봐야 칫솔 정도만 챙겨 오면 될 것이라 생각했는데 노트북과 옷가지들, 심지어 속옷까지 한 무더기가 나와 강선은 7층에서 9층까지 뜻밖의 운동을 해야만 했다.
“이럴 거면 그냥 집을 합치는 게 낫겠네.”
집에 도착하자마자 소파에 드러누워 오랜만에 TV를 켰다. 날씨는 완연한 가을이 되었는데 TV 속 인물들은 계곡에서 다이빙을 즐기고 있었다. 저런 게 재밌나…….
계곡이라 하니 자연스레 지난여름이 떠올랐다. 계곡에서 꺄악꺄악, 소리를 지르며 물장구를 치던 아이들과 그들 옆에서 수박을 나눠 먹던 어른들. 속은 뒤숭숭했지만 몸은 그보다 평화로울 수 없었다.
갑자기 나타난 지예준의 등장에 어영부영 서울로 올라오고서 걱정 가득한 마음으로 전화를 걸었지만 다행스럽게도 원장님은 아무런 의심을 하지 않았다. 일이 바빠 추석에도 못 찾아갔으니 곧 있을 전시회에 초대하는 게 좋지 않을까, 하며 멍하니 화면을 바라보았다.
지금쯤, 지예준은 어머니와 좋은 시간을 보내고 있겠지.
가물가물 감기는 눈에 강선은 지예준의 집에서 꺼내 온 그의 베개를 껴안았다.
✲ ✲ ✲
“여기 오는 건 처음이네.”
“……그러게요.”
집은 매우 깨끗하게 청소되어 있었다. 소파에 굴러다니던 강선의 노트북과 침대에 벗어 둔 잠옷은 흔적도 없이 사라져 있었고 아침에 부랴부랴 나가느라 버리지 못했던 쓰레기까지 깔끔하게 치워져 있는 모습에 입이 씁쓸했다. 자기 때문에 강선이 하지 않아도 될 일을 한 것 같아 미안해졌다.
어머니는 아들이 혼자 사는 집에 지대한 관심을 보였다. 냉장고나 찬장을 열어 보며 밥은 잘 먹고 사는지를 확인하고 이불은 철에 맞게 잘 바꿔 쓰는지를 살폈다.
“베개는 없어?”
“네?”
“베개는 베고 자야 잠이 편안하지.”
어머니는 이불만 덩그러니 남은 침대 위를 보며 지예준의 등을 찰싹, 때렸다. 보아하니 강선이 집에 들고 간 것 같아 지예준은 멋쩍게 웃으며 목덜미를 갉작였다.
“엄마가 베개 사 줄까?”
“……아니에요. 제가 살게요.”
“그래도 혼자 잘 사는 걸 보니까 마음이 좀 놓이네.”
촉촉한 눈가로 재차 집을 돌아보던 권은숙은 아들 손을 잡고 거실로 향했다. 챙겨 준 것 하나 없는데도 알아서 잘 사는 걸 보니 기특하면서도 눈시울이 뜨거워졌다. 스물여섯이나 먹은 건장한 청년이지만 제 눈엔 아직도 아이 같았다. 이렇게나 소중하고 사랑하는 아들을 남겨 두고 남편이 모르는 곳으로 도망간 자신이 너무도 한심스러웠다.
고개를 떨군 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자 지예준은 그런 어머니를 조심스레 끌어안았다.
“다 잘될 거예요.”
“……예준아, 엄마가… 너무 부족해서 미안하다.”
“그런 말씀 마시라니까요. 전 괜찮아요.”
이런 말도 할 줄 알고, 언제 이렇게 다 큰 걸까.
둘째와는 연락도 자주 하고 잘 만나기도 했지만 아들을 찾아가기엔 너무도 겁이 났었다. 자신이 서울에 발을 딛자마자 남편이 찾아와 머리채를 잡는 꿈이 수도 없이 생생하게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꿈은 꿈일 뿐이라며 마음을 다잡으려 했지만 아주 잠깐이라도 떠오르면 심장이 터질 듯 요동쳤다. 그러다 보니 이런 못난 엄마를 미워하지도 않는 아들에게 갈수록 더 의지하고 말았고…….
그렇게 숨기만 하며 세월을 보냈더니 이윽고 일이 터져 버렸다. 남편이라 부르기도 싫은 놈이 아들을 때렸다는 말을 들었을 땐 심장이 멎어 버리는 것만 같았다. 용기가 없어 남편을 찾아갈 수도 없는 자신이 그렇게 바보 같을 수도 없었다.
그러나 지예준의 생각은 달랐다. 그는 어머니가 무슨 경우로 이혼을 마음먹었든 무조건 그를 지지하고 도와주기로 다짐했다. 어머니는 자식들 뒤에서 아무것도 못 했던 자신을 자책했으나 누구처럼 자식을 없는 사람 취급하지도 않았고, 심지어 도망을 갈 때에도 저와 동생을 꼭 데리고 갔으니까.
“저랑 예원이는 다 컸으니까 어머니도 이제 편하게 지내셨으면 좋겠어요.”
더는 아플 일 없이, 행복하게요.
꼭 맞잡은 두 손은 오래도록 떨어지지 않았다. 열 수 없을 거라 생각한 문이 크게 흔들리기 시작했다.
✲ ✲ ✲
<“물의를 일으켜 송구.” 최문혁, ‘사실상 퇴출’>
세진 돌핀스를 혼란의 장으로 만들었던 ‘최씨 선수’는 모두의 예상대로 최문혁으로 확정 났다. 기사에 따르면 단순 유흥에서 그친 것이 아니라 선수들에게 불법 도박을 알선하고 그 사이에서 돈을 받은 혐의까지 드러났다는데, 이 사건을 계기로 스포츠 관계자들 사이의 불법 도박이 다시금 재조명받고 있다나.
기사 하단엔 올해 봄, 특별한 사유도 없이 들어온 새 코치의 정체 또한 짧게 거론되어 있었다. 이번 사건에 크게 분노한 야구팬들이 지재만 코치를 의심하기 시작했기 때문이었다. 세진 돌핀스는 지재만 코치에 대해 일전부터 이야기된 수순이었다며 운영에 대해선 질문을 거부했으나 지재만 코치가 어린 직원들을 폭행한다는 증언들이 나오고 있어 부정적인 시선들은 쉽사리 가시질 않았다.
강선은 야구 커뮤니티에 익명으로 올라온 증언들 중 지예준의 이름이 나올까 노심초사하며 한 줄, 한 줄 꼼꼼히 읽어 나갔다.
<익명556844: 나 거기서 물 셔틀 하다 미끄러졌을 때 자기 신발에 튀었다고 차트로 대가리 맞았음. 한 대도 아니고 세 대나. 어디 출신지도 모르는 사람이 와서 다짜고짜 때리니까 몇 번 대든 적도 있었는데 상부에 말해 봤자 들어주지도 않음. 빡쳐서 바로 때려 치고 신고하고 싶어도 맞았다는 증거나 따로 녹음한 게 없어서 아무것도 못 함. 나 다음으로 누가 들어갔다고는 들었는데 아직 남아 있는 스태프한테 물어보니까 그 사람도 얼마 전에 그만 뒀다고 함. 모 코치가 유리병으로 때렸댔나? 암튼 거기도 정상은 아님.>
<익명655412: 난 거기 직원은 아니고 다른 팀인데 담타하러 갔다가 그 코치가 누구 패는 거 봤음. 모자가 날아갈 정도로 때리더라ㄷㄷ...>
<익명789965: 익명655412야 혹시 ㅅㅈ스ㅍㅊ파ㅋ? 나도 멀리서 봤음. 혹시 선수 때린 거임?>
<익명655412: ㄴㄴ 키도 작고 말라서 선수는 아닌 것 같았음. 선수 때린 거면 벌서 들켰을 듯...ㅋ>
<익명112548: 저거 주작임. 그 코치 착함.>
<익명981213: 112548<-어그로임. 관심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