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프롤로그
- 최후의 일격에 성공했습니다!
그 메시지에 숨이 가빠 오기 시작했다. 화염에 닿아 검게 변해 버린 허벅지는 비명을 지르고 싶을 정도로 아팠다.
하지만 그런 고통에 정신을 팔고 있을 틈은 없었다. 나는 애타게 허공에 뜰 메시지를 기다렸다.
제발, 제발, 제발!
- 고룡 옵타티오가 패배를 인정합니다.
-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 당신의 업적치를 계산 중입니다…….
됐다!
됐어, 됐다고. 성공했다.
허공에 떠오른 메시지를 본 순간 온갖 감정이 가슴속에서 휘몰아쳤다.
환호성이라도 지르고 싶은 심정이었지만, 성공 메시지를 보니 점차 의식이 흐려지기 시작했다. 아무래도 이미 입은 상처가 너무 컸던 모양이다.
젠장, 그렇다고 여기서 죽을 순 없잖아. 이대로 정신을 잃었다간 정말 죽을지도 모른다. 혀라도 깨물어야 하나.
나는 바닥을 검으로 짚고 후들거리는 무릎을 지탱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눈꺼풀 위로 피가 흘러내려 시야를 가렸다.
“혹시 죽은 건가?”
잘난 척하는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팔을 들어 피를 닦고 옆을 돌아보았다.
만신창이가 된 주제에 아직도 거만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남자가 검을 휘둘러 바닥에 피를 털어 냈다. 후두둑, 하고 피를 털어 내며 무겁게 떨어지는 검.
나는 그 검면을 보면서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거의 시체인 건 너거든. 거울 보여 줘? 그 잘난 얼굴이 피떡이 됐는데?”
루카스는 내 말에 대답하는 대신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눈을 감았다.
아무렇지도 않은 척하는 것 같았지만 그의 머리카락과 얼굴 전반에 녹색과 검붉은 피가 굳어 있어서 얼굴도 식별하기 어려웠고, 왼쪽 팔은 뼈가 덜렁덜렁해 보였다.
그런데도 당장 치료하지 않는 걸 보니 저 자식도 포션은 다 썼나 보다. 나도 다급히 소지창을 확인해 보았지만 역시 텅텅 비어 있었다.
눈앞이 흐려지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진짜 죽을지도 모르겠다.
“레나, 저 녀석하고 수다 떨 시간 있으면 빨리 회복이나 해. 이제 여기엔 볼일 없어. 빨리 가서 치료해야지.”
그때, 뒤에서 정신을 일깨우는 날카로운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간신히 고개를 돌려 뒤를 살폈다. 루카스만큼이나 만신창이가 된 여자가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알리시아, 너도 몰골이 진짜 볼만하다.”
“이런 건 아무것도 아니야.”
아주 호기로운 발언이었다. 아름다운 은발이 색깔도 알아보지 못할 정도로 새까맣게 변했는데도 알리시아는 허세를 그만두지 않고 코웃음을 쳤다.
“내가 자유 용병일 때는 훨씬 더 힘든 일도 많았다고! 팔 하나가 완전히 날아갔을 때도 말이야…….”
“그래그래, 엘릭서를 찾느라 북쪽 왕의 오솔길을 홀로 올라가다가 폭설을 맞아서 어쩌고저쩌고.”
“어쩌고저쩌고가 아니라고!”
“레나, 알리시아 그만 놀려. 쟤 저러다가 상처 터진다. 또 팔 날아가면 누가 책임져?”
한창 알리시아를 놀리고 있는데 차분한 목소리가 끼어들었다. 기절하거나 죽은 줄 알았더니 깨어난 모양이네.
다행이다. 나는 씩 웃었다.
“오빠인 일리아스, 네가 책임을 져야지.”
“난 그럴 생각 없는데.”
“너희 정말 짜증 나게 굴지 마!”
“……다들 그럴 시간이 있다면 빨리 몸을 추스르는 게 좋을 텐데. 던전의 유지 시간이 얼마나 남았을지 알 수 없다.”
“오, 무게 잡는 것 좀 봐.”
“진짜 재수 없다.”
“다들, 루카스 님을 그렇게 놀리는 거 아니야.”
그렇게 말하긴 했지만 일리아스도 킥킥 웃고 있었다. 루카스는 못마땅한 것처럼 잠시 말이 없었지만, 그런 그도 결국 낮은 웃음소리를 터트렸다.
일단 날 포함한 네 명이 정신을 차리고 있으니, 이제 유일하게 남은 건…….
“아리아드네는?”
모두가 고개를 들어 단 한 명, 유일하게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 이를 찾았다. 눈이 밝은 루카스가 손가락을 뻗어 한쪽을 가리켰다.
“저기 있군.”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알리시아였다.
저 동굴 구석으로 어기적어기적 기어가더니, 완전히 뻗어 있는 아리아드네의 볼을 쿡쿡 찔렀다.
“살아 있어!”
다행히 죽지는 않은 모양이다.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건 그녀의 능력 특성상 고룡 옵타티오의 마지막 공격 페이즈에 가장 많은 힘을 썼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나가면 가장 먼저 치료해야겠군.
나는 모두를 돌아보았다.
새삼스럽지만, 다들 처참한 몰골이었다.
“다들 정말 죽음만 겨우 면했구나.”
물론, 그래도 기적적인 일이었다. 고룡 옵타티오를 드디어 클리어했으니까.
드래곤 옵타티오는 20년 전 타르토스 대륙에 갑자기 나타났다.
아니, 정확히는 그렇다고 들었다. 나는 당시 이 대륙에 없었으므로, 이 세상에 갑자기 나타난 지옥을 말로만 전해 들었다.
옵타티오가 출현하며 온갖 몬스터가 사람이 사는 영역을 침범했고, 던전을 클리어하는 법을 배우기 전까지 인구의 절반 이상이 죽음을 당했다고 한다.
그렇게 수많은 희생을 치러 가며 첫 던전을 기적적으로 클리어한 순간, ‘옵타티오’의 던전을 클리어하면 모든 던전이 사라진다는 신탁이 내려졌다.
신탁이라니, 솔직히 나는 웃기는 소리라고 생각하긴 하지만.
어쨌거나 신탁 외에는 믿을 만한 구석이 없었던 타르토스 대륙인들은 옵타티오를 쓰러트리기 위해 오랜 세월을 노력해 왔다.
수많은 사람들이 전 대륙의 나라에 생긴 던전을 돌아다니며 아이템을 구비하고, 능력치를 쌓아 올리며, 다른 이들과 협력하고 때로는 경쟁했다.
그렇게 이 대륙의 모든 제국과 왕국이 군대를 끌어모아 소탕하려고 해도 계속해서 실패했던 던전은 결국 이렇게 소수의 인원으로 클리어되었다.
마치 이것이 운명이었다는 듯이.
일리아스가 아리아드네와 알리시아를 동시에 부축했고, 나도 루카스가 내밀어 준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루카스가 내 얼굴을 보고 말했다.
“너도 얼굴이 피떡이 됐는데.”
그 말을 하고 싶어서 손을 빌려줬구만? 은근히 쪼잔한 녀석이다. 나는 발로 루카스의 정강이를 한 대 까 주고 고개를 돌렸다.
“저거군.”
루카스가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 고룡 옵타티오가 살고 있던 길고 긴 동굴 던전의 끝. 천공에 뚫린 구멍 사이로 빛이 비쳐 들어오고 있었다.
그 빈 공터 한가운데 빛을 받았는데도 초라하게 보이는 문 하나가 덜렁 놓여 있었다.
던전의 보스를 쓰러트리고 클리어했을 때만 나타나는, 던전 밖으로 나가는 입구다.
“이게 정말로…….”
정말로 마지막 던전인 건가.
입안에서 피 맛이 느껴졌다.
“이제 타르토스 대륙은 안전해지겠지.”
루카스가 진지한 얼굴로 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나와 마찬가지로 신탁을 불신하는 알리시아가 고개를 불량하게 까닥였다.
“도마뱀 한 마리 죽인다고 정말로 뭐가 달라지는 건지는 모르겠지만.”
그렇게 말하며 알리시아가 냉소적으로 픽 웃었다.
“적어도 이 고룡 옵타티오가 마물들을 부려 인간을 습격할 일은 사라지겠지.”
“그래, 그럼 우리 일도 이제 끝나는 거고.”
“끝이라…….”
나는 한 번 그 말을 되뇌었다. 나뿐만이 아니었다. 다들 나름의 회한이라도 곱씹는 건지 잠시 말이 없었다.
그러고 보니 업적치 계산은 언제 끝나는 거야? 클리어 보상이나 확인하고 싶은데.
“레나는 이제 뭘 할 거야?”
일리아스가 명랑하게 느껴지는 어조로 내게 물었다.
나는 여느 때처럼 글쎄, 그렇게 대답하려다가 세 사람이 나한테 시선을 집중하는 것을 느끼고 그들의 얼굴을 둘러보았다.
“뭐야, 왜 이래? 부담스럽게.”
“생각해 보니 네 미래 계획을 들은 적이 없어서.”
“확실히, 그렇군. 앞으로 뭘 할 거지?”
루카스가 곧 거만하게 고개를 쳐들고 말했다.
“어지간한 것이라면 내가 해결해 줄 수 있으니, 아주 대단한 것을 바라는 게 좋겠어.”
알리시아가 옆에서 재수 없다고 중얼거렸지만 루카스는 그녀를 무시했다.
검푸른 눈동자가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뭘 원하지?”
“적어도 왕자님은 줄 수 없는 것.”
루카스의 얼굴이 파삭하고 굳었다. 나는 그 얼굴에 대고 웃어 주었다.
“농담이야…… 사실 딱히 바라는 거 없어.”
알리시아의 말마따나, 곱게 자란 왕자님이 내 동료이니 그가 내 생활에 필요한 것쯤은 다 지원해 줄 수 있겠지.
그게 아니더라도 나는 이제 타르토스 대륙에 주어진 시련을 처치한 용사다. 처음 이 세계에 떨어졌을 때처럼 배를 곯을 걱정은 하지 않아도 될 테고, 어느 나라에 가더라도 그럭저럭 환영받을 것이다.
용병 레나, 이제 그게 내 이름이다.
“난 그냥 이렇게 너희들이랑 가끔 술이나 마시면서 티격태격 살았으면 좋겠어.”
나도 아무런 감상이 들지 않는 건 아니었다.
그도 그럴 게 여기까지 오는 데 정말 오랜 시간이 걸렸다.
뜬금없이 이상한 세계로 불려 와서, 갑작스럽게 몬스터와 마주하고, 이상한 사람들을 만나서…… 처음에는 죽는 게 낫겠다고 생각했는데, 죽는 것도 무서워서 아등바등 살다 보니 어느 샌가 여기가 내 자리가 되었다.
“그러니까 이제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
나는 웃으면서 문으로 한 걸음씩 발을 떼기 시작했다.
정상적인 몸 상태라면 아무것도 아니었을 거리가 멀게만 느껴졌다.
꺾일 것 같은 무릎을 겨우겨우 지탱하며 출구 앞에 도착해 뒤를 돌아보니, 내가 제일 출구와 가까웠다.
“내가 먼저 연다, 얘들아.”
“기다려, 레나. 내가…….”
“먼저 온 사람이 임자지.”
루카스를 놀리면서 문고리를 잡고 문을 열던 순간이었다.
“……어라?”
문을 열자 시꺼먼 공허만이 자리하고 있었다.
얘들아, 뭔가 이상해. 그렇게 생각하고 뒤를 돌아보려던 순간.
누군가가 내 등을 밀었다.
나는 비명도 지르지 못하고 그 공허 속으로 떨어졌다.
* * *
눈을 떴더니 낯선 천장이 보였다.
아주 오랫동안 꿈을 꾼 기분…….
……아니, 이게 뭐야? 기억 상실에 걸린 드라마 주인공이나 할 법한 생각은?
나는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이상하게도 손에 감각이 없었다. 피가 통하는 것 같지가 않다.
아주 오랫동안 잠에 들었던 것 같은데, 그건 그것대로 이상한 일이었다. 오늘 아침에 일찍 일어나려고 일부러 알람까지 열두 개는 맞춰 놨는데…….
아니, 아니야. 알람이라고? 핸드폰 같은 편리한 기계가 이 세계에도 있다면 내가 이 고생을 왜…….
“…….”
나는 손을 들어 내 얼굴을 매만져 보았다.
어쩐지 눈가가 뻐근하다. 감각은 아주 천천히 돌아오기 시작했다. 코끝에서 기묘한 냄새가 느껴졌다. 그게 익숙하지 않은 약품 냄새라는 것은 뒤늦게 깨달았다.
“설…… 쿨럭, 쿨럭!”
설마 진짜 기억 상실에라도 걸린 거 아니야, 그렇게 중얼대고 싶었는데 목구멍에 무엇이 걸리기라도 한 듯 말이 나오지 않았다.
나는 한참을 더 기침해야 했다. 목구멍에 먼지가 끼기라도 한 건지 심하게 건조했다.
이게 진짜 무슨 일이지?
이쯤 해서, 만약 내가 나 자신이 누군지 잊어버렸다면 말이라도 될 것이다.
하지만 나는 내가 누군지 너무도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다.
내 이름은 강예나.
그리고 근 10년간 레나라고 불려 왔다.
무엇보다도 나는, 어제 이런 새하얀 천장에 약품 냄새를 풍기는 병실이 아니라…… 옵타티오를 처치하고…….
“이게 무슨…….”
그때였다. 병실 안으로 누군가가 걸어 들어왔다. 순간적으로 허리에 오른손을 가져다 댔지만, 잡히는 것은 환자복의 매끈한 감촉뿐이었다.
병실 안으로 들어온 것은 간호사 복장을 한 남자였다. 그는 나와 눈을 마주치더니 놀란 표정을 지었다.
“환자분, 깨어나셨군요?”
“……환자요?”
“손과 발에 감각도…… 보아하니 있고요. 와, 이거 기적인데요.”
기적이라고 말하는 만큼 남자의 표정은 어쩐지 상기되어 있었다.
나는 찬찬히 남자를 살폈다. 검은 머리카락, 갈색 눈동자, 나와 같은 인종의…….
“저, 물어볼 게 있습니다만.”
“예, 물어보세요.”
“……여기가 어딥니까?”
“강원도 원주시에 있는, 장기 입원 환자를 위한 요양 병원이랍니다.”
아주 생경한 울림이다. 적어도 근 10년 내에는 타인의 입에서 듣지 못했던 지명이었다.
“강원도 원주라고요?”
나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너무도 익숙한 풍경이었고, 본 지 한참 된 낯선 풍경이기도 했다.
현대 대한민국이라면 어디에서나 볼 수 있을 법한 병실. 병실 한구석에는 조그마한 텔레비전이 보였고, 환자 침대 옆에는 신체 상태를 체크하는 기계가 놓여 있었다.
“내가 꿈을 꾸나?”
나는 멍하니 중얼거렸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거지?”
그 말에 간호복을 입은 남자가 애매한 표정으로 웃었다.
“환자분, 일단 누워 계시죠. 정밀 검사를 진행해야 하니까요.”
“정밀 검사요?”
“예, 5년간 일어나지 못하고 누워 계셨으니까요.”
“……누워 있었다? 그것도 5년? 10년이 아니라?”
누가? 내가?
나는 입을 뻐끔대며 나를 가리켰다. 남자가 고개를 끄덕였다.
나는 조금 더 침묵했다.
혹시 내가 환상이라도 보고 있는 걸까?
그 경우에는 아주 골치 아파진다. 나는 환상계 마법에는 약한 편이니까.
홀로 머리를 굴리던 내 시야에 문득 TV 화면이 들어왔다.
- 2020년 12월 3일 오전 9시, 도봉구의 한 병원에서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가 발생하여 십 수 명이 부상…… 영원 길드에서 헌터를 파견하여 구출 작업 중…… 이우연 헌터 급파…….
“꿈이라면 개꿈이군.”
나는 일어난 그대로 침대에 누워 버렸다.
일단 자고 일어나서 생각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