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화
접수처에 앉아 노트북을 두드리고 있던 솔방울 간호사가 황당해하며 나를 쳐다보았다.
“강예나 환자님, 마음은 알겠지만 아직은 일반식 드시면 안 돼요. 검사 결과 나와서 정상이시면 그때…….”
“그럼 혹시 언제 퇴원할 수 있을까요?”
“겨우 이틀 전에 일어나셨어요. 아무리 제 스킬이 있다지만 적어도 며칠 정도는 더 경과를 봐야…….”
“저 지금 여기서 스쿼트 백 개도 할 수 있는데요.”
막 무릎을 굽히려는데 솔방울 간호사가 당황하며 앉아 있던 접수처에서 나와 내 팔을 잡고 일으켰다.
“뭐 하시는 거예요?! 이러다 큰일 납니다!”
“저 당장 퇴원 절차 밟아도 될 정도로 건강하다고요.”
“거, 검사 결과만 나오면 도와 드릴게요.”
“결과가 나오면 바로 나갈 수 있어요?”
“네, 수납만 되면 바로 퇴원하셔도 되는데…….”
아, 병원비 수납.
나는 생각지 못했던 단어에 움찔했다. 그렇지, 그러고 보니 나는 5년 동안이나 병원에 장기 입원해 있었다.
게다가 내가 입원해 있는 새빛 병원은 딱 보기에도 시설이 훌륭한 편이었다. 의사와 간호사 수는 적어 보였지만 이건 그들의 스킬 덕분인 것 같았다.
하기야 당장 솔방울 간호사만 해도 나이팅게일의 가호 스킬이 있으니…….
그렇게 생각하면 새빛 병원의 병원비는 일반 병원보다도 훨씬 비쌀 것이 틀림없다. 타르토스에서도 치유 스킬이 있는 사람이나 신관에게 치료를 받으려면 비싼 값을 치러야 했으니까.
그런 곳에 내가 5년이나 장기 입원해 있었다니. 심지어 나는 1인용 병실에 있었고.
설마 지구에 돌아오자마자 빚쟁이가 되는 건 아니겠지.
그 사람이 내 병원비를 미룰 일은 없을 것 같긴 한데…… 내가 깨어났다는 소식은 이미 들었을 테고.
내가 긴장해 대답을 기다리는 동안 다행히도 솔방울 간호사는 무언가를 떠올리듯 콧잔등을 찡그렸다가 곧 환한 인상이 되었다.
“일단 바로 원무과에 확인해 드릴게요. 제 기억으로는 문제없이 퇴원하실 수 있을 거예요.”
“다행이네요.”
“그런데 예나 환자님. 당장 내일 퇴원은 무리가 아닐까요? 아니, 스쿼트하지 마시고요…… 그게 아니라, 퇴원하시려면 준비가 필요하지 않으실까요? 입을 옷이라든가, 핸드폰이라든가.”
“아…….”
그거야 그랬다. 보통은 보호자가 와서 옷이건 뭐건 준비해 주겠지만 나는 맨땅에 홀로 헤딩해야 하는 상황이었다.
게다가 사실 당장 병원을 나가면 묵을 곳도 없었다. 예전에 내가 살던 자취방까지 그대로 뒀을 리도 없다.
그나저나 저렇게 말하는 걸 보면 솔방울 간호사는 내 사정을 어느 정도 알고 있는 모양이었다.
퇴원해도 올 보호자가 없다는 것.
하기야 5년간 입원해 있는 내내 아무도 찾아오지 않았을 테니 당연한가.
“그럼 내일 검사하시고, 결과 나오면 외출증 끊어 드릴게요. 하루 시내에 나가셔서 필요한 거 준비하셔야 하니까.”
“감사합니다.”
“별말씀을요.”
솔방울이 생긋 웃었다.
“이렇게 건강해지셔서 퇴원할 준비를 하시는 걸 보니 제가 다 기분이 좋아요.”
이제까진 여유가 없어서 자세히 살펴보지는 않았는데 솔방울은 키는 나보다 훨씬 컸지만 상당히 앳된 얼굴이었다. 아직 경험이 많이 없어서 퇴원하는 환자를 보면 뿌듯한 건가.
“제가 더 감사하죠.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시고.”
어쨌거나 좋게 대해서 나쁠 건 없다.
생각해 보니 당장 치킨이 먹고 싶기는 해도 일단 내가 가지고 있던 체크 카드에 돈이 있는지부터 확인해야 하고, 심지어 나는 시내에 나가는 법도 모른다.
나는 최대한 호의적으로 보일 웃음을 짓고 솔방울에게 이것저것 궁금한 점을 묻기 시작했다.
* * *
다음 날, 나는 내 몸이 정상적이라는 결과를 받아 볼 수 있었다.
장기 요양 병원이라 그런지 정밀 검사가 필요한 환자가 적어서 검사를 받는 것도, 결과가 나오는 것도 별로 기다릴 필요가 없었다.
솔방울 간호사는 내가 의사에게 결과를 듣는 내내 뿌듯한 얼굴로 의사 뒤에 서 있었다. 사무적인 의사와는 상반되는 태도였다.
결과를 다 들은 내가 간호사님은 왜 그러냐고 묻자 그는 웃으며 대답했다.
“제가 맡은 환자 중 강예나 환자님이 처음으로 퇴원하시는 거라서요.”
“아, 그랬구나.”
어쩐지 기뻐하더라니. 의사가 안경 너머로 나와 솔방울 간호사를 흘끗 쳐다보았다.
“벌써 친해지셨나 봐요. 하긴 동갑이니까.”
“아, 그래요?”
엄청 앳된 얼굴이라고 생각했는데 나랑 동갑이라니. 한국에서의 내 나이를 감안해도 솔방울은 좀 더 어려 보였다.
나는 눈앞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보았다.
만지면 보송보송할 것 같은, 남자치고 흰 얼굴에 찰떡 같은 볼. 동그란 갈색 눈동자는 투명했다. 체격은 크지 않아도 키는 훌쩍 큰 편인데 눈이 순해서 그런지 전체적으로는 귀여운 인상이었다.
……내가 저거랑 동갑이라고?
내 표정을 어떻게 생각한 건지 솔방울이 어색하게 웃었다.
“아하하. 제가 예나 환자님보다 나이가 좀 많아 보이죠.”
“아니요.”
“어…….”
“그럼 내일 퇴원하는 걸로 수속 밟아도 될까요?”
“네, 솔방울 간호사가 원무과에 연락해 주세요.”
“아, 네. 알겠습니다. 그럼 강예나 님, 이쪽으로 오세요.”
나는 솔방울의 안내를 받아 내가 입원해 있었던 병실로 돌아갔다.
솔방울은 나에게 잠시 기다리세요, 하더니 어디선가 쇼핑백을 들고 왔다. 유명한 죽 프랜차이즈집의 로고가 새겨진 쇼핑백이었다.
“웬 죽이에요?”
“죽이 아니고요. 어제 집에 가서 제 여동생 옷 좀 가져왔어요.”
“예?”
내가 놀라서 묻자 솔방울이 쑥스럽다는 듯이 웃었다.
“예나 환자님, 새빛 병원으로 이송되실 때 이미 환자복을 입고 계셨고 소지품은 핸드폰이랑 지갑만 있었거든요. 시내에 나가려고 해도 옷은 필요하니까요.”
그냥 휘적휘적 환자복 입고 시내에 나가서 적당히 옷을 사려던 나는 얼떨떨한 기분으로 솔방울이 내미는 쇼핑백을 바라보았다.
그가 내미는 쇼핑백을 바로 내려치려는 나 자신을, 나는 한국에서의 기억을 되살려 간신히 막았다.
그도 그럴 것이 타르토스에서라면 이건 의심할 필요도 없이 거절해야 했다.
하지만 지금 여기 한국에서의 나는 겨우 3일 전 눈을 뜬 장기 입원 환자고, 눈앞의 솔방울은 아주 착한 간호사에 불과하다!
나는 개털이고 얘는 착한 놈이야.
그렇게 세 번 정도 되뇐 후에야 나는 겨우 감사 인사를 할 수 있었다.
“진짜 감사합니다. 안 그래도 필요했는데. 시내에 나가서 옷 사면 바로 돌려 드릴게요.”
“아, 돌려주지 않으셔도 괜찮아요.”
“그냥 받을 수는 없죠. 여동생분한테도 죄송하고.”
쇼핑백 안에는 헐렁한 후드 티와 편한 추리닝 바지, 따뜻해 보이는 겉옷이 들어 있었다. 보송보송한 얼굴만큼이나 보송보송한 배려였다.
“괜찮아요. 이제 쓸 일 없는 옷들이라…….”
솔방울은 깜짝 놀란 내 얼굴을 보고 두 손을 내저었다.
“앗, 오해하지 마세요. 작아져서 못 입는 거거든요.”
아, 난 또.
솔방울의 배려 덕에 나는 따뜻한 옷을 입고 병원을 나설 수 있었다. 내 소지품은 그의 말대로 구형이 된 핸드폰과 지갑뿐이었다.
사실 한국에서는 이것만 있으면 다 있는 거지, 응. 그렇지만 허리춤이 영 허전한 것이, 역시 항상 차고 있던 검이 없으니 불안한 마음이 들었다.
심지어 오랜만에 탄 버스는 내 기억보다 훨씬 덜덜거리고 소음이 커서 멀미까지 일었다. 그야 마차나 말보다는 훨씬 낫지만…… 기계 특유의 냄새가 코를 자극했다.
그러다 보니 약 한 시간 후, 버스를 타고 시내에 도착했을 때 나는 차멀미에 시달려야 했다.
“우욱…….”
시내에 도착하자마자 치킨집에 달려가서 치킨을 먹으려고 했는데 이 상태로는 도저히 못 먹겠다. 나는 버스 정류장의 벤치에 앉아 한동안 헛구역질을 참았다.
분명히 예전에 버스 타고 학교 다녔던 것 같은데 어떻게 된 거야. 아니, 5년이나 병실에 누워 있어서 장기가 약해진 건가.
“어이구, 학생. 괜찮아?”
오죽했으면 지나가던 할아버지가 오지랖 넓게 걱정을 해 주고 지나갔다. 아, 이게 내가 잊고 있었던 K-오지랖이군. 좋은 거였어.
나는 한참이나 벤치에 앉아 구역질이 가라앉을 때까지 기다렸다.
구역질은 좀 났지만 주위를 구경하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강원도 원주의 시내.
와 본 적은 없지만 그럭저럭 익숙한 풍경이었다. 회색빛의 도로와 일직선의 건물, 가끔 다니는 자동차와 불이 들어오는 간판…… 한국에서 평범하게 볼 수 있는 풍경.
“이렇게 보면 뭐 하나 달라진 게 없는데…….”
별로 그리운 것은 없는 세상이었지만 그래도 이렇게 보니 나름대로 감회가 들었다. 타르토스에 비하자면 이곳은 확실히 편한 게 많았다.
나는 스마트폰의 화면을 열어 근처에 옷을 살 만한 곳이 있는지 바로 검색해 보았다. 구형이다 못해 고물이 된 핸드폰이지만 잘 작동했다.
10분만 걸으면 마트가 있었다. 지도 없이 스마트폰 하나만 있으면 초행임에도 누구한테 길 물어볼 필요 없는 이 편리성…… 어디서나 빵빵 터지는 인터넷…… 이거 실화냐? 눈물이 난다…….
찡해지는 코끝을 훌쩍이며 하늘을 올려다보았더니 희뿌연 구름과 파란색 하늘이 보였다. 미친 미세 먼지 같으니라고.
“던전도 나타났는데 왜 옆 나라에서 날아오는 미세 먼지는 그대로인 거야?”
누가 하나 쳐들어가서 공장만 부수고 다녔을 법한데.
던전이 나타났는데도 대부분의 국가가 예전과 다름없는 시스템을 유지하고 있다는 건 이런 점에서 불편한 거로군.
나는 한동안 내 폐를 괴롭히는 미세 먼지를 생각하다가 속이 가라앉은 후 자리에서 일어났다.
물론 목적지는 마트였다. 10분 정도밖에 걸리지 않는다니까 금방 도착하겠지.
그렇게 생각했는데 한국의 현대식 길 안내에 익숙해지지 않은 탓인지 길을 헤맸다.
내가 딱 봐도 길을 잃고 헤매는 것 같았는지, 묻지도 않았는데 길 가는 할머니와 할아버지가 친절하게 길을 알려 주었다. K-오지랖 만세다.
“여기서 길을 잃어버리는 것도 재주구만.”
어느 입이 험한 할머니가 길을 알려 주며 지나갔다. 날 좀 내버려 둬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