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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7화 (8/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7화

처음 튀어나왔던 붉은 털의 청동 황소 이후로 두 번째 몬스터는 그나마 만만한 먹보 토끼가 출현했다.

독 넣은 먹이를 던져 줘서 편하게 클리어하긴 했는데 몬스터인 만큼 2미터 정도는 되는 크기라서 나까지 씹어 먹힐 뻔했다.

그리고 문제는 그다음, 마지막 몬스터였다.

나는 팔의 갑주에 한가득 박힌 C급 몬스터 겁 많은 고슴도치의 가시를 뽑았다. 소지창에 알맞은 장비가 없었다면 그대로 정말 내가 고슴도치가 될 뻔했다.

뭐, 그래도 살아남았으니 됐나.

우성연도 일단 살아남았다.

나는 바닥에 형편없이 널브러져 있는 건장한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그는 내가 고슴도치를 쓰러트릴 때 이미 정신을 잃은 상태였다.

고슴도치가 화가 나서 미친 듯이 제 바늘을 쏘아 낼 때 몸통에 바늘을 맞고 기절한 것이다.

물론 다치기야 했지만 그래도 살아 있다는 게 중요하지. 내가 미리 넘겨주었던 사슬 갑옷을 착용한 덕이었다.

그러니까…….

“이 정도면 그럭저럭 용사다운 일, 한 것 같은데.”

내가 괜히 생면부지의 이 녀석을 구한 게 아니었다. 목적이 없었다면 진즉에 내버렸을 것이다.

내가 청년을 구한 이유는 바로 내 시스템상의 직업 클래스 때문이었다.

시스템은 사용자가 타고난 성향을 분석해 ‘특성’을 출력하는데, ‘클래스’는 쉽게 말해 사용자가 밟아 온 행적을 분석해 출력되는 것이다.

클래스가 정해지면 클래스에 따른 수치의 보정이 있고, 어떤 스킬이 개화될지도 어느 정도 예측할 수 있다.

그리고 내 기억이 정확하다면, 타르토스에서 옵타티오를 쓰러트릴 때까지 내 직업 클래스는 ‘용사’였다.

솔직히 나랑 어울리는 클래스는 아니라고 생각하는데, 거만한 척해도 결국 남이 죽는 꼴을 못 보는 왕자님과 신관인 아리아드네와 함께 다니다 보니 처음에는 무난한 검사였던 내 클래스는 어느샌가 용사로 바뀌어 버렸다.

뭐, 그렇게 생각하면 이제 걔들은 이 지구에 없으니 다시 클래스가 바뀔 수도 있으려나. 내가 만일 시스템이 판정하는 ‘용사’의 기준에 걸맞지 않는다면 클래스는 언제든 바뀔 수 있는 것이다.

솔직히 나 자신도 용사라는 클래스에 딱히 집착은 없었다.

물론 클래스 특성상 내가 에이펙스의 광검을 사용할 때 수치 보정을 받기는 하지만 검이야 또 구하면 되는 거고…… 친구들이 없다면 내가 굳이 용사 같은 짓을 하고 다닐 이유도 없다.

그런데도 내가 일부러 ‘용사’ 같은 짓을 한 것은 시스템 메시지 때문이었다.

처음 이 던전에 들어왔을 때 떴던, 세계가 혼란을 느끼고 있습니다, 라는 메시지.

타르토스의 레나와 지구의 강예나, 이 두 인물 사이에 괴리가 있어 시스템이 혼란을 느끼고 있는 거라면…… 내가 타르토스의 레나와 같은 인물이라는 것을 증명하면 조금 더 빠르게 그 ‘로딩’이라는 것이 되는 게 아닐까.

딱히 근거가 있는 건 아니고, 단순한 감이다만.

얼마 기다리지 않아 허공에 시스템 메시지가 떴다.

- 미션 조건 충족으로 던전이 클리어되었습니다.

- 오래 기다리셨습니다! 세계가 당신의 존재를 인식합니다.

- 플레이어명 : 방랑하는 구도자(求道者)

- 정산되지 않은 업적치가 있습니다. 정산까지 시간이 걸립니다……

겨우 C급 몬스터 세 마리 쓰러트렸다고 업적치 계산이 밀린다고? 시스템 이 자식, 빠져 가지고.

……아니지. 내가 타르토스에서부터 쌓아 온 업적치까지 계산하느라 오래 걸리는 거 아닐까? 하긴, 소지창도 돌려주었으니 업적치도 복구해 주는 건지도 몰랐다.

그렇다면 다행이었다. 다 다시 쌓으면 된다고 정신 승리 회로를 돌리기는 했지만 정말 먹튀 당하면 이틀은 앓아누웠을 거다.

“상태창.”

내 존재를 인식했다는 메시지가 떴으니 이제 상태창을 제대로 볼 수 있게 되지 않았을까. 그렇게 생각하고 호출했더니, 정말로 드디어 상태창이 떠올랐다.

익숙한 상태창을 보는 순간 눈물이 날 뻔했다.

플레이어명 : 방랑하는 구도자

LV.79

특성 : 관철하는 아귀

클래스 : 용사

그래, 좋아. 여기까진 그대로군.

그러나 다음 시스템 메시지가 뜨는 순간 나는 다시 멍해졌다.

- 당신의 신체 상태가 스킬을 사용하기에 적합하지 않아 스킬 사용이 중지됩니다.

- 체력, 근력, 민첩 수치가 당신의 신체 상태에 따라 약화됩니다. 레벨은 초기화되지 않습니다.

- 스킬 또한 일정 수치에 도달할 때까지 사용할 수 없습니다.

눈앞에 뜬 내 종합 스펙은 아주 처참했다.

체력 : 20

근력 : 15

민첩 : 25

마력 : 750

스킬 : 사용 불가

“…….”

나는 허공을 올려다보았다. 왠지 눈물이 날 것 같았다.

체력이…… 20? 근력이 15? 어쩐지 세상에서 가장 가볍고 강한 금속인 미스릴로 만들어진 광검조차 무겁게 느껴진다 했다.

이래서 검을 어떻게 들어?

저 수치라면 일반인보다 약간 못한 수준이었다. 레벨 79가 무색한 수준이다.

정말 눈물을 흘릴 뻔했지만 간신히 참았다. 그래, 뭐, 내 신체 자체는 병상에 계속 누워 있었으니 어쩔 수 없나.

그나마 마력 수치는 그대로인 걸 보면, 마력은 신체가 아니라 영혼 자체가 다루는 힘이라 초기화되지 않은 듯했다.

이건 다행이긴 한데…… 다른 수치가 저렇게 저질이면 마력 하나 높다고 해서 딱히 도움이 되는 것도 아니었다.

내 클래스가 마법사라도 되면 모를까, 내 클래스는 용사고 주 무기는 검이었다.

마법 같은 건 쓸 줄 모른다고. 마법은 재능의 문제였고 나는 마법에는 전혀 재능이 없었다. 내가 그나마 마력을 사용하는 경우는 아티팩트를 구동할 때뿐이었다. 자주 쓰는 것도 아니고.

“아니야, 그래도 일단 아이템은 그대로니까.”

10년간 모아 왔던 아이템 창고는 아주 방대했다.

그래, 체근민 수치야 다시 회복하면 되는 거다.

내가 모아 온 아이템을 활용한다면 고위 던전도 클리어 가능할 거고, 던전을 클리어하다 보면 저런 수치쯤이야 빠르게 올릴 수 있을 것이다.

게다가 사실 뭐, 아이템도 무사한데 그냥 이대로 살아도 나쁘지 않을 것 같았다. 한국에서도 헌터가 던전에서 구한 물품은 상당히 비싸게 팔린다고 하니 소소하게 먹고살 만큼은 벌 수 있을 것 같고.

그런 생각을 떠올리고, 나는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지난 10년간 내가 차마 상상도 해 보지 못한 삶이었다.

몬스터를 쓰러트리기 위해 검을 쥐지 않고, 이익을 위해 배신하는 인간을 베지 않고, 목숨을 걸고 누군가를 구할 일도 없는.

옵타티오를 쓰러트리고 나서야 잠깐 꿈꾸었던, 그런 평온한 삶…… 그 삶을 정말 이룰 수 있게 된 건지도 모른다.

나는 무릎을 굽혀 바닥에 쪼그려 앉았다.

등의 화상이 아팠다. 무척이나.

타르토스에서야 얼떨결에 다른 세계에 떨어져 살아남기 위해 몬스터와 싸웠고, 싸우다 보니 동료가 생겨서 세계를 구한다는 사명도 한 번 짊어지게 되었지만…….

여기는 그런 게 없잖아?

최후의 던전은 제시되지 않았고 현대의 화력으로 초반의 던전 브레이크도 빠르게 제압해서 나라의 시스템도 유지되고 있었다.

그렇다면 그냥 이대로…… 던전에 다시는 휘말리지 않고 살아가는 것도 가능한 게 아닐까.

한국의 강예나는 그런 삶을 살 수 있었다.

우성연의 입만 막으면 헌터로 등록하지 않아도 되고, 등록하게 되더라도 한국의 헌터 등록제는 자가 등록이었다. 개인의 상태창을 남이 볼 수는 없는 일이니까.

대강 D급 헌터 정도로 등록하면 될 것이다. 나는 딱히 사치하는 편은 아니니까 하위 던전만 부지런히 돌아도 혼자 쓰기에는 충분한 돈을 벌 수 있을 것이다.

……정말 괜찮은데. 그렇게 살까?

그게 정말 가능한 걸까?

- 깜짝 공지

갑작스럽게 메시지가 떠올랐다. 거대한 팡파르 소리와 함께 황금색 글씨가 허공에 나타났다.

- 오늘부터 헌터의 랭킹이 공개됩니다!

- 랭킹에 따라 보상이 주어집니다.

- 랭킹은 한 달을 기준으로 갱신됩니다! 랭킹 보상을 위해 던전을 클리어하여 업적치를 쌓아 보세요!

- 랭킹 10위부터 1위까지 순서대로 전체 공지로 게시됩니다.

메시지를 보는 순간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당황스럽다.

그것도 그럴 것이, 이건 내가 타르토스에서 10년을 지낼 때도 겪어 보지 못한 상황이었다. 타르토스와 지구의 상황이 거의 비슷하다고 생각했는데 이건 대체?

헌터의 능력치에 따라 순위를 매긴다고?

타르토스에서도 호사가들이야 전 대륙에서 가장 강한 자가 누군지 떠들곤 했지만, 승부라는 것은 여러 상황에 좌우되는 만큼 명확한 결론은 한 번도 난 적이 없었다.

그런데 그걸 시스템이 출력해 낸다고?

“이거 상위 랭킹으로 선정되면 완전히 X되는 건데.”

내로라하는 강자들을 순위 매겨 줄 세운다니.

강한 자들은 대부분 자신의 힘에 자부심이 있고 누군가 자기 위에 있다는 것을 참을 수 없는 인간들이다.

랭킹의 순위에 따라 상당한 신경전, 혹은 피 튀기는 싸움이 벌어질 게 뻔했다.

무엇보다 융통성 있는 시스템의 특성상, 랭킹 1위에 선정되었다고 해도 랭킹 10위가 1위를 이길 수 없는 것도 아닐 테니.

“……그래도 나랑은 상관없는 일이지?”

지금의 나는 레벨만 높은 허접 깡통이다.

체근민 수치는 아주 형편없고 그나마 정상인 건 마력 수치뿐이지만 클래스는 용사다. 오즈의 심장 없는 양철 나무꾼도 나보다 실속이 있을 거다!

그런 내 생각을 비웃기라도 하듯이 때맞추어 다시 한번 메시지가 떠올랐다.

- 랭킹은 업적치를 기준으로 선정됩니다.

종합 레벨이나 수치가 아니라 업적치를 기준으로 랭킹이 선정된다고?

업적치란 던전을 클리어했을 때 시스템이 산정하는 기여도였다.

기여도에 따라 클리어 보상이 정해질 뿐 아니라, 레벨이 오르고 레벨에 따라 신체의 스펙이 상승하기 때문에 던전 공략 시 누가 보스의 막타를 치느냐는 중요한 문제였다.

그러니까, 나는 그 짓을 10년 정도 했고…….

지구에서 던전이 발생한 지는 5년밖에 되지 않았지.

불길한 예감이 들었다.

“…….”

설마, 아니지?

- 랭킹을 발표합니다. 10위 : 김성연

메시지는 내 불안함을 비웃기라도 하듯 쭉쭉 랭킹을 띄웠다.

점점 불안이 다가와 나를 비웃는 것 같았다. 9위, 8위, 계속해서 떠오르는 메시지.

- 5위 : 조한율

- 4위 : 이선

아니, 근데 잠시만.

나는 랭킹 발표 메시지를 보던 중 의문을 느꼈다.

왜 다들 플레이어명이 본명인건데?

“잠, 잠시만! 플레이어명 변경!”

- 플레이어명의 변경은 랭킹 발표 후 가능합니다. 제한 횟수 : 1달에 1번

불길한 예감에 휩싸여 그렇게 외쳤지만 시스템은 무정했다.

- 3위 : 김숙자

- 2위 : 이필연

진짜 다들 본명이야? 왜 이렇게 플레이어명에 감동도 재미도 없는 건데?!

나는 속으로 비명을 질렀다.

타르토스에서는 플레이어명을…… 본명으로 짓는 놈은 아무도 없었단 말이야! 루카스마저 플레이어명만큼은 고심해서 지었단 말이다!

이렇게 되면 나만 너무 튀잖아!

아니나 다를까.

곧이어 황금색 글씨로 불꽃처럼 화려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불길한 예감은 곧바로 현실이 되어 나를 덮쳤다.

- 1위 : 방랑하는 구도자(求道者)

- 축하합니다! 랭커들에게는 특별한 보상이 지급됩니다. 소지창을 확인하십시오.

“…….”

보상이고 뭐고, 차마 메시지를 볼 용기가 나지 않은 나는 눈을 질끈 감았다.

10위까지 전체 공지된 랭킹 순위 속에서 1위의 플레이어명만이 기묘한 괴리감을 내세우고 있었다.

일주일 정도는 인터넷 들어가지 말아야지…….

……아니, 내 플레이어명이 쪽팔린 것도 쪽팔린 건데.

그러니까 지금 내가 랭킹 1위인데…… 실제로는 레벨과 업적치만 높은 허접 깡통이다, 이거야?

보상까지 쥐어 주는 판이니 상위 랭커들끼리 싸움이 붙을 게 뻔한 이…… 상황에서?

“X발, X됐다.”

평온한 삶은 개뿔이.

나는 머리를 감싸 쥐며 욕설을 내뱉었다. 그러나 내가 아무리 욕을 내뱉어도 옆에서 내 입을 때릴 신관은 이제 없었다.

그 사실이 사무치게…… 짜증 나서, 나는 한 번 더 욕설을 되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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