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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2화 (13/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2화

나는 다음 날 무사히 퇴원했다.

퇴원할 때 밟아야 할 절차는 몇 가지 없었다.

기껏해야 마지막으로 몇 번 얼굴을 봤던 의사에게 진찰을 받고 원무과에서 정산이 처리된 것을 확인하는 것뿐.

가지고 나올 짐도 아주 간단했다.

새로 산 핸드폰과 원래 가지고 있었던 지갑. 그게 전부였다.

그리고 솔방울 간호사는 보이지 않았다. 어제 태워다 주기도 했고 마주치면 고맙다는 인사라도 할까 했는데.

잠깐 병실에서 서성여 보았지만 결국 얼마 안 있어 그냥 병원을 나섰다.

오늘 쉬는 날인가 보지 뭐.

어제와 같은 버스를 타고 시내로 나온 나는 먼저 마트에 맡기고 왔던 캐리어를 회수했다. 다행히 마트 근처에 우체국이 있어서 솔방울 간호사에게 택배를 보낼 수 있었다.

할 일을 다 마치고 곧장 시외버스 터미널로 향했다.

서울 고속 터미널로 향하는 버스는 2시간마다 있었다. 승차권은 단돈 만 원 남짓.

과학 만세였다. 말과는 다르게 지치지 않는 자동차를 타자 서울에 도착하는 데까지는 1시간 30분밖에 걸리지 않았다.

물론 내가 서울에 도착해서 가장 먼저 한 일은 강남에 있다는 헌터 스토어 본점을 찾아가는 일이었다.

그리고 강남역에 내린 나는 헉, 하고 가볍게 감탄했다.

“이거 뭐 완전…….”

원주에 있던 헌터 스토어랑은 비교도 안 되네.

이번에도 길을 잃을까 봐 조금은 걱정했는데, 헌터 스토어 본점은 헤맬 것도 없이 강남역 어느 출구에서 나오더라도 조금만 시선을 돌리면 찾을 수 있을 것 같았다.

왜냐하면 일단 규모가 근처 건물 두 개를 합친 것만큼 넓었기 때문이다. 저층이 전부 통유리로 되어 있고, 그 위로도 한참 뻗어 있는 건물이었다.

그리고 그 옆에는 누가 보아도 저게 그 뉴스와 인터넷에서 떠들어 대는 영원 길드가 쓰는 곳이겠구나, 싶은 건물이 또 하나.

간판도 뭣도 없었지만 1층 입구에 누가 봐도 헌터인 인간들이 경비를 서고 있어서 한눈에 알 수 있었다. 경비 서는 헌터들의 눈에 어린 살기가 아주 흉흉했다. 뭐야, 깡패야?

나는 잠시 걸음을 멈춰 세우고 강남의 거리를 지나치는 사람들의 모습을 살폈다.

뭐, 활기찬 거리였다.

드넓은 일직선의 반듯한 도로와 신호에 맞추어 이동하는 차와 사람들. 도로 양옆으로 펼쳐진 화려한 쇼윈도를 자랑하는 가게들.

그 풍경 자체는 기억 속 풍경과 아주 달라진 건 아니었다.

다만 확연히 달라진 것이 하나 있었다.

지금의 시각은 평일 오후 1시. 직장인들이 이른 점심을 먹고 들어가거나 이제 점심을 먹으러 나올 시간이었다.

그리고 정장을 입고 지친 얼굴로 커피를 마시며 걸어 다니는 사람들 사이에 군데군데 섞인, 갑옷을 입거나 기다란 로브를 입고 지팡이를 든 사람이 보였다.

아니, 사실 그뿐만이 아니라 롱소드, 랜스부터 가죽 갑옷, 경량 갑옷, 어떻게 걷나 궁금한 풀 아머도 보였다.

물론 내게는 오히려 이쪽이 더 익숙한 풍경이기는 했다. 그런데…… 이걸 자동차가 지나다니는 거리에서 보니까 역시, 뭐랄까, 위화감이 든다고나 할까.

쭉 지켜보고 있자니 한심한 작자들도 많았다.

랜스를 들고 목부터 발목 끝까지 가려 주는 사슬 갑옷을 입은 전사가 스포츠카에서 내리다가 차에 기스가 나서 아닌 척하면서도 안절부절못하지를 않나, 길 건너 대형 프랜차이즈 카페에서는 검집을 자랑하듯 테이블 옆에 세워 놓고 무심한 척 검의 모습이 드러나게 셀카를 찍고 있는 머저리도 있었고…….

‘…….’

괜히 한 대 패고 싶다. 나는 들었던 주먹을 내렸다. 하기야 어디나 허영심 많은 인간은 있는 법이니까. 그건 타르토스도 다르지 않았다.

나는 손쉽게 헌터 스토어로 걸어가는 무리 속에 섞여들었다. 가끔 내가 장비하고 있는 아이템에 향하는 호기심의 시선이 느껴지곤 했지만 곧 사그라졌다.

하긴 내 앙겔루스의 가호, 에이펙스의 광검, 님페의 바람 모두 겉보기에는 평범해 보이는 장비들이니까.

특히나 에이펙스의 광검 같은 경우 손잡이에 일부러 낡은 천을 둘러매 놓았다. 무기 가지고 시비가 걸리면 귀찮아져서.

유리문을 열고 헌터 스토어에 들어서자 거리 못지않은 소음이 귀를 덮쳤다.

내장은 원주에서 봤던 스토어처럼 깔끔하고 화려한 인상이었지만 일단 1층의 모습은 시장통에 더 가까웠다. 사람들이 바글바글 끓고 있었기 때문이다.

와.

우성연처럼 바보 같은 어린애도 헌터를 한다고 쉽사리 도전할 정도라서 예상을 하긴 했는데, 헌터가 많기는 많은 모양이구나.

그렇게 예상은 했지만 실제로 눈앞에 이렇게 많은 사람들을 보니 약간 기가 질리는 기분이었다.

이렇게 많은 사람들이 던전에 들어간다고?

“처음 방문하셨습니까?”

잠깐 멍하니 서 있던 내게 문 옆에 있던 안내 직원이 친절하게 물었다.

나는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이쪽에서 판매, 혹은 구매 버튼을 클릭하시고 대기표를 받으시면 됩니다. 대기 순번은 저 위쪽에 표시됩니다.”

“……예.”

무슨 은행 같네.

나는 대기표를 받아 들고 얌전히 구석에 있는 빈 소파를 찾아가 앉았다.

소파는 무척이나 푹신했다. 소파에 앉자 사람들 사이를 돌아다니던 직원이 웃으며 내게 주스 혹은 탄산수를 마시지 않겠냐고 권했다.

나는 얼떨결에 탄산수를 받아 들었다. 이거 진짜 백화점처럼 응대하네. 탄산수로 목을 축이면서 나는 약간 애매한 감정을 맛보았다.

‘……다들 밝아 보이네.’

물론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 내가 비관적으로 생각하는 것일지도 모르겠지만…….

타르토스에서는 내가 기억하는 한 몇 년 동안 이런 분위기는 찾아볼 수 없었다. 던전에 도전하는 용병들 사이에서는 언제나 염세적이고 비관적인 분위기가 감돌았다.

그도 그럴 것이 해를 거듭할수록 옵타티오, 최후의 던전에 대한 도전이 실패로 끝나면서 암울한 종말론이 득세했기 때문이다.

언제 죽게 되든 싸우다가 죽는 건 같을 텐데, 그런 마음과 동시에…… 그래도 지금 당장은 살아남고 싶다는 마음으로 모두가 필사적으로 칼을 쥐었다.

그렇게 나는 동료들과 최후의 결전을 위해 모인 것이고…….

“어, 1043번 떴다.”

내 대기표의 번호가 전광판에 표시되었다.

나는 대기표를 들고 서둘러 앞으로 걸어갔다. 확연하게 지쳐 보이는 직원이 고개를 들어 친절한 미소를 띄웠다.

“안녕하세요, 고객님. 판매할 물건의 종류부터 여쭤봐도 될까요?”

인터넷에서 미리 헌터 스토어 본점에 방문하기 전에 몇 가지 사항을 숙지하고 가는 게 편하다는 글을 읽어 둬서 다행이었다.

처음 직원의 질문은 내가 판매, 혹은 구매하고 싶은 물품이 크게 나누어 장비, 무기, 물약, 재료 중 무엇인지를 묻는 것이다.

“재료요.”

“등급은요?”

“C급이요.”

일단 아이템 시세를 제대로 알아보기 위해 어제 들어갔던 던전에서 드랍한 아이템만 팔아 볼 예정이었다.

직원이 고개를 끄덕였다.

“네, 확인 감사합니다. 그럼 먼저 7층으로 안내 도와 드리겠습니다. 대기표 그대로 가지고 계시고요, 7층에 가시면 직원이 안내 도와 드릴 겁니다. 감사합니다.”

‘와…… 진짜 힘들겠다.’

한마디도 더듬지 않고 빠르게 말하는데 숙련된 직장인의 고충이 그대로 느껴졌다.

하기야 내가 오늘 1043번째 손님인 거지? 접수 직원은 얼핏 보기에 열댓 명 남짓이었다.

이렇게 보니 진짜 시장통이다.

나는 대기표를 들고 7층으로 올라갔다.

7층은 기다란 복도에 열 개쯤 되는 문이 나 있는 형태였다. 문 위에는 1층처럼 전광판이 표시되어 있었고 복도에는 대기용 소파와 의자가 놓여 있었다.

1층보다는 덜했지만 역시 사람이 많았다. 물건은 팔지도 않았고 구매할 것도 있었는데 벌써 진이 빠졌다.

내가 반쯤 마신 탄산수 통을 들고 빈 소파 중 하나에 털썩, 앉자 옆에 앉아 있던, 염색한 단발머리를 한 여자가 힐끔 나를 보더니 핸드폰을 탁, 덮었다.

어, 뭐야, 저거. 폴더폰은 예전에 사라진 거 아니었어?

내 눈이 반짝거리는 걸 본 건지 여자가 아닌 척 핸드폰을 빼꼼 손바닥 위에 올려놓았다. 펴면 내 스마트폰과 같은 크기, 접으면 반만 한 크기였다.

와, 신세계다. 귀엽다!

그런 내 표정이 읽혔는지 여자가 한번 조용히 웃더니 내게 말을 걸었다.

“이거 정부에서 나오는 헌터 통신 보조금도 지원되는 기종이에요.”

헌터 통신 보조금? 그런 것도 있나. 나는 눈을 반짝였다. 인터넷에서 여러 정보를 찾아보고 있긴 했지만 이런 정보는 들어 보지 못했다.

“허, 헌터 지원금이 있어요? 핸드폰 사는데?”

“아, 모르셨나 보구나. 이거 대리점 입장에서는 귀찮아서 얘기를 잘 안 해 주던데. 꼭 서류 떼서 헌터 관리소에 보내세요. 그럼 통장에 30만 원이 바로 입금된다니까요.”

“우와…….”

어제 마침 강원도 마트에서 빠르게 최신 기종을 산 참이라 바로 바꿀 수는 없었지만, 여자가 들고 있는 핸드폰을 보니까 다시 바꾸고 싶어졌다.

내가 초등학생 때 쓰던 핸드폰 같잖아…… 귀여워. 나는 여자 쪽으로 약간 몸을 기울였다.

“생긴 건 완전 폴더폰인데…….”

“네, 네. 이거 선율 공방에서 개발한 금속이 섞인 거라 내구도도 괜찮아요. 근력 좋은 헌터들 손에서도 잘 안 부러지거든요.”

“아, 그래서 보조금이 나오는 건가요?”

“그건 아니고요. 정부에서 설치하라고 하는, 왜, 들어 본 적 없어요? 던전 브레이크 때 피난 방송하잖아요. 그때 방송 듣는 라디오가 기본으로 설치되어 있어서 그래요. 여기 안테나 있는데 괜찮으시면 한번 만져 보세요…….”

그러다가 여자가 머쓱한 표정을 지었다.

“어, 제가 너무 친하게 굴었죠? 죄송해요. 제가 이 제품 파는 일을 하다 보니.”

어쩐지 너무 잘 알더라.

물론 한국에서 보낸 기억이 이제 가물가물하긴 하지만, 핸드폰 구매는 언제나 어렵고 어떻게 사도 호구 소리를 면하지 못했다는 건 기억하고 있었다.

나는 귀여운 핸드폰을 손에 한번 쥐어 보고 다시 돌려주었다.

“아니에요. 저 이런 정보를 잘 몰라서…… 감사합니다. 어제 알았으면 핸드폰 이걸로 바꾸는 건데.”

내 말을 들은 여자가 눈을 크게 떴다. 곧 여자의 눈에 분노와 불안이 가득해졌다.

“헉, 어제 바꾸셨다고요?!”

“어…… 뭐가 잘못됐나요?”

“아니, 거기 사람이 말 안 해 주던가요? 오늘부터 지원금 정책도 바뀌는데…… 취소하고 다시 결제해 달라고 해요! 핸드폰이 한두 푼도 아니고!”

여자가 그렇게 말하며 주먹을 불끈 쥐었다. 그리고서는 내 얼굴을 빤히 보더니 그녀는 무언가 결심한 눈치로 이렇게 말했다.

“말하기가 힘들면 제가 같이 가 드릴게요!”

“……강원도 원주에서 샀는데요.”

“……대리점 전화번호 알아요?”

나는 고개를 저었다. 여자가 답답하다는 듯 제 가슴을 주먹으로 두드렸다.

“아이고, 이렇게 어린데 헌터 일을 하는 학생한테까지 사기를 치다니! 이런 빌어먹을 놈들, 길 가다 던전에나 자빠져라.”

“…….”

이런 K-오지랖을 재미있다고 받아들여야 할지, 당황스러워해야 할지.

그래도 생면부지의 남을 이렇게까지 신경 써 주는 건 분명히 드문 일이고, 고마운 일이기도 했다. 타인에게 신경을 쓰는 것도 아무나 하는 일이 아니니까.

나는 감사하다고 고개를 꾸벅 숙였다.

“이것저것 알려 주셔서 고맙습니다. 다음번엔 잘 바꿔 볼게요.”

“……음, 제가 이상해 보일 수도 있는데.”

여자가 핸드폰을 내게 내밀었다.

“번호 교환할래요? 다음에 핸드폰 바꿀 때 저한테 꼭 문자 해요.”

“어…… 영업?”

“아니, 전 핸드폰은 안 팔아요. 걱정 마세요, 어린애 등쳐 먹을 정도로 돈 없는 건 아니라서.”

아까는 이 제품 파는 일을 한다더니 말을 바꿨다. 하지만 확실히 행색을 볼 때 돈이 없어 보이지는 않았다.

그나저나 아까부터 계속 나보고 어린애라고 하는데 대체 몇 살인 거지?

나는 슬쩍 여자의 얼굴을 살폈다.

사실 한국에 돌아온 지 얼마 안 되어서 그런가, 나이를 가늠하기가 쉽지 않다.

화려하게 여러 가지 색깔로 염색한 단발과 맑은 눈동자를 보면 20대 같기도 했지만, 꽉 다문 턱이나 입술에서는 여유가 느껴졌다.

나보다 한 대여섯 살 많으려나? 그러니까 내 실제 나이를 고려했을 때.

그럼 지금 나는 스물 대여섯 살로 보일 테니 저 사람 입장에서 난 열 살이나 더 어린애라는 거지.

음, 어리다고 할 만하네. 나는 이 오지랖의 이유를 빠르게 납득했다.

“도와주시면 저야 좋죠. 이런 거 잘 몰라서…….”

내가 핸드폰을 내밀자 여자가 기종을 살펴보고 한 번 더 속이 터진다는 표정을 짓더니 전화번호를 입력해 주었다. 핸드폰을 돌려받고 확인해 보았다.

조한율

010-XXX-XXXX

“……어, 이 이름.”

“어, 내 차례 됐다.”

여자가 자리에서 쓱 일어났다. 내가 멍하니 여자를 올려다보자 그…… 아니, 조한율. 제품 파는 일을 한다는 랭킹 5위의 헌터가 손을 흔들었다.

“그럼 꼭 연락해요!”

발걸음도 씩씩하게 걸어가면서 그녀는 한 번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다.

뭐야, 그럼 단순히 핸드폰을 자랑하거나 영업하는 게 아니라 본인이 만든 제품 자랑을 했던 건가?

나는 조한율이 사라진 문을 바라보았다.

아니, 어제 선율 공방의 주인을 한번쯤 만나고 싶다고 생각하자마자 이런 식으로 마주치게 될 줄이야.

‘이건 우연? 아니면 이것도 시스템의 안배인가?’

그렇게 생각하면 찝찝한 기분이었다.

물론, 보기에는 친절한 사람처럼 보였다. 실제로도 그럴 확률이 높았다. 대량의 포션을 값싸게 공급하기로 결정을 내린 사람일 테니까.

신관이 없는 지구에서 포션은 곧 헌터의 유일한 생명줄인데도 불구하고.

하지만 지금 이건…… 조한율이 내 정체를 모르는 상태에서 베푼 호의였다. 아무리 착한 사람이라고 한들 랭커에 들 만큼의 강자라면 자부심을 순위로 평가당했을 때 기분이 좋을 리는 없다.

나는 한동안 내 핸드폰 화면을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렇지도 않게 남겨진 연락처. 별것 아닌 것처럼 주어진 호의. 내 개털이 되어 버린 능력치와 랭킹 1위라는 숫자.

혹시 모르니까 역시, 연락하지 않는 편이 좋겠지. 이대로 지우는 편이 안전했다.

“……그래도 귀엽네.”

그러나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제 할 말만 하고 당당하게 사라지는 조한율의 모습이 어쩐지 내 친구인 타르토스의 용병왕, 알리시아를 처음 만났을 때를 생각나게 했다.

결국 나는 핸드폰의 연락처를 지우지 못한 채 미소 짓고야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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