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3화
그렇게 조한율과의 우연한 만남이 있은 후.
나는 평범하게 대기 순번을 기다리다가 차례가 되어 문안으로 들어갔다.
1층은 명품관보다도 더 화려하게 꾸며 놓았는데 7층의 방은 판매나 구매를 하는 상점이라기보다는 사무실처럼 보였다. 방 한가운데에는 낮은 테이블, 그리고 테이블의 양쪽에 긴 소파가 놓여 있었다.
한쪽 소파에는 기다란 흰 로브를 입은 여자가 앉아 있다가 내가 들어오자 일어섰다.
“어서 오세요, 고객님. 이쪽으로 앉으시죠. 음료는 뭘로 준비해 드릴까요? 탄산수, 홍차, 커피 중 골라 주세요.”
“괜찮아요. 1층에서 받은 탄산수가 남아 있어서.”
“그럼 필요하실 때 말씀해 주세요. 자, 그럼 이리 앉으시고요.”
나는 여자의 손짓에 따라 소파에 앉았다.
여자의 로브에는 그녀의 이름이 화려한 황금실 자수로 놓여 있었다.
임미솔.
테이블에 놓여 있는 명함첩에도 같은 이름이 박혀 있었다. 직함은 헌터 스토어 본점 소속 구매 사업부 사원.
신입인가 보다.
“C급 아이템 판매하신다고 하셨죠? 이 탁자 위에 올려 주시면 됩니다.”
임미솔이 탁자를 가리켰다.
좀 작아 보이는데, 그렇게 생각했지만 마법사가 하는 말이니 어련히 알아서 했을까. 나는 얌전히 소지창에서 아이템을 꺼냈다.
오늘 내가 거래하려는 것은 어제 던전에서 얻었던 붉은 털 청동 황소의 가죽과 겁쟁이 고슴도치의 가시 50개였다. 먹보 토끼는 안타깝게도 얻은 아이템이 없었다.
황소의 가죽은 황소 자체가 거구이다 보니 면적 자체가 컸고 고슴도치의 가시도 사람 팔만 한 길이였는데, 테이블 위에 올려놓자 마치 맞춘 것처럼 축소되었다.
역시나 마법을 걸어 놓은 모양이다. 타르토스나 지구나 마법사들이 하는 짓은 별반 차이가 없나. 언제 봐도 신기하단 말이야.
“그럼 감정 시작하겠습니다.”
임미솔이 손을 들어 소파 옆에 세워 두었던 지팡이를 집어 들었다.
긴 로브 소매가 늘어졌다.
나는 문득 궁금해졌다. 마법사들이란 어느 세계에서도 저렇게 멋을 못 잃는 걸까?
뭐, 그런 내 감상과 별반 상관없이, 아이템을 올려놓은 테이블의 바닥에 커다란 마법진이 생성되었다. 푸른빛의 마법진에 마력이 감도는 것이 느껴졌다.
마력이 아이템을 감쌌다가 순식간에 사라졌다.
“감정 끝났습니다. 음…….”
직원이 애매한 표정을 지었다. 나는 순간 긴장했다. 왜 저러는 거지? 딱히 이상한 점은 없을 텐데…….
“저, 혹시…… 실례지만, 고객님.”
“예?”
“고객님의 레벨을 여쭤봐도 될까요?”
“……예?”
내가 황당해 묻자 임미솔이 머쓱한 듯 테이블 위에 놓인 가죽을 쓰다듬었다.
“아, 실례라는 건 아는데요…… C급 몬스터가 드랍한 아이템인데도 채집 상태가 워낙 깨끗해서요.”
“그럼 뭔가 이상한가요?”
“보통 C급 몬스터쯤 되면 전투가 워낙에 격렬하니 드랍된 재료 자체도 손상이 있는 경우가 잦아서…… 이렇게 깨끗한 상태는 오랜만에 보네요.”
아, 그렇겠구나.
하긴 황소의 경우는 독으로 중독시켜서 죽였고, 고슴도치도 기회를 보다 단숨에 처죽였으므로 채집된 아이템의 상태가 깨끗한 것도 당연했다.
나는 그냥 어깨를 으쓱했다. 내 실제 레벨을 밝힐 수는 없으니까.
“레벨은 별로 안 높은데…… 운이 좋았나 봐요. 그럼 판매 가격도 좀 높게 책정되나요?”
“그럼요. 같은 등급이더라도 상태에 따라 가격은 천차만별이죠!”
그렇게 중얼거리던 임미솔이 무언가 결심한 듯 두 손을 모아 잡고 나를 바라보았다.
“저, 고객…… 아니, 헌터님! 제가 제 권한 안에서 정말 제일 높은 가격으로 구입하겠습니다.”
“……어, 감사합니다.”
“정말 제가 이 업계에서 가장! 빠르고! 적정한 가격을 쳐 드리기로 유명한 사람이거든요. 그래서 말인데.”
임미솔이 명함을 손에 쥐고 내게 내밀었다. 나는 얼떨결에 명함을 받아 들었다.
“앞으로 또 같은 아이템을 파실 때는 저희 지점에 꼭 방문해 주세요, 고객님! 제가 정말 잘해 드리겠습니다, 고객님!”
……여기 강남의 명품관 같은 헌터 스토어 아니었어? 혹시 내가 잘못 왔나.
그렇지 않아도 10분 전쯤 내가 핸드폰을 살 때 호구였다는 사실을 안 참이라 갑자기 저러는 임미솔이 영 못 미더웠다.
나는 의심쩍은 마음을 감추지 않고 물었다.
“……여기 원래 이렇게 가격 흥정 같은 걸 하나요?”
“아뇨, 설마요! 헌터님 솜씨에 너무 감탄해서 그래요. 저희 홈페이지 들어오시면 아시겠지만 등급별 정찰제를 시행하고 있습니다!”
임미솔이 깜짝 놀라 두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정말로 저희 본점이 가장 좋은 가격에 쳐 드릴 수 있어서 말씀드리는 거예요, 고객님!”
뭐지, 지점별로 고객 관리를 따로 하는 건가. 이 정도면 그냥 영업 멘트라고 생각해도 될 것 같았다. 나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명함을 지갑 안에 집어넣었다.
“일단 생각해 볼게요. 그래서 얼마에 판매할 수 있을까요?”
“가져오신 재료 자체는 레어도로 따지면 B급이라서 황소의 가죽이 200만 원, 고슴도치의 가시는 150만 원 정도가 적정가입니다만…….”
임미솔이 커다란 패드를 가지고 와서 직접 표시된 가격을 보여 주었다.
“제 권한으로 120% 더 올려서 감정 수수료를 제외하고 420만 원에 구입하겠습니다. 이거 정말 제대로 쳐 드리는 겁니다, 고객님!”
420만 원이라…… 흠.
나는 생각에 잠겼다.
솔직히 한국 물가에 대한 감각이 흐려져 있기는 한데, 그래도 내 기억과 인터넷에서 찾아본 정보로 봤을 때 저건 일반 직장인들의 월급을 훌쩍 넘기는 금액이었다.
겨우 반나절 일하고 받기에는 큰돈이다.
뭐, 사실 지금 내게는 소지금이 딱히 없었으니 다른 선택지도 없기는 했다. 당장 오늘 묵을 숙소부터 문제였으니까.
일단 C급 몬스터의 아이템 가격을 알아봤다는 것에 의의를 두기로 하고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그렇게 판매할게요. 돈은 언제 받을 수 있나요?”
“계좌 알려 주시면 제가 바로 이 자리에서 입금해 드릴 수 있어요!”
내가 거래를 결정하자 임미솔의 눈이 반짝였다.
거래를 결정했는데도 과하게 좋아하는 모습을 보니 좀 수상쩍어졌다.
이상하다. 찾아본 바로는 이게 진짜 적정가가 맞는데 왜 이렇게 사기당하는 기분이지?
나는 결국 대놓고 물어보기로 했다.
“그런데 너무 과하게 좋아하시는 것 같은데요.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아, 죄송해요. 가져오신 게 마침 제가 찾던 아이템이라 반가워서.”
그렇게 말하며 임미솔이 품에서 조그마한 침통 같은 것을 꺼내 들었다.
뭐지, 저게? 처음 보는 형태의 물건이었다. 임미솔이 웃으면서 침통의 뚜껑을 열어 보여 주었다.
“개인적으로 제가 몬스터의 혈도를 연구하는 중이거든요! 그래서 고슴도치의 바늘로 침을 만들어서 몬스터 가죽에 꽂는 실험을 하고 있었는데, 좋은 상태의 재료를 구하기 힘들어서 애먹고 있었어요!”
아, 이거 미친 과학자 재질이구만?
나는 임미솔의 말을 듣고 한 방에 납득했다. 마법사들 중에는 이상하게도 저런 괴짜가 많다. 그들에게는 무슨 행동을 할 때 이유를 물을 필요가 없다.
“아, 그렇군요. 알겠습니다. 그럼 지금 바로 입금해 주세요.”
“네, 그럼요…… 자, 확인해 보시면 됩니다!”
“확인했어요. 감사합니다.”
“아, 정말 너무 잘됐어요. 사실 제가 한의학 전공자였거든요. 각성한 이후로는 마법사가 되었지만 한의학에 대한 열정을 도저히 포기할 수가 없어서…….”
미친 과학자가 아니라 미친 한의사였구나.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저 그만 일어날게요.”
“앗, 안녕히 가세요, 고객님! 꼭 연락을 주시기예요……!”
애절한 목소리가 들려왔지만 나는 빠른 걸음으로 문을 뒤로했다.
오늘 무슨 날이냐. 랭킹 5위의 오지라퍼도 모자라 감정 스킬 가진 또라이 마법사를 다 만나게…….
* * *
여자는 끝까지 이름을 밝히지 않은 무명의 헌터가 방을 나선 뒤 곧바로 핸드폰을 들었다.
이건 마법사로서의 직감이었다.
아무리 C급의 몬스터라지만 이렇게까지 깔끔한 솜씨로 처리한 헌터를 자신이 모를 리가 없다. 이런 노련한 솜씨를 가진 헌터가 신인일 리도 없다.
이건 꼭 잡아야 했다.
그녀는 빠르게 메일을 작성하기 시작했다.
김숙자 교수님, 안녕하세요. 이선입니다. 다름이 아니라 대박 헌터님을 발견해서 연락을 드립니다. 자세한 건 전화 주세요.
오랜만에 가슴이 두근거리기 시작했다.
임미솔이라는 새로 들어온 신입 헌터가 갑자기 휴가를 냈기에 몰래 숨통이나 트러 현장 근무를 하러 나온 건데 이런 행운이 생기다니.
언제나 인재 부족에 시달리며 풀 근무 중인 시스템 공식 랭킹 4위, 이선은 씩 웃었다.
아무래도 오늘 내가 대박을 터트린 것 같다, 얘들아!
* * *
하여간에, 나는 그렇게 어느 정도의 돈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420만 원이면 적은 돈은 아니다. 그렇지만 한국에서 고정된 거처를 구하기에 많은 돈도 아니었다. 월세를 구하려고 해도 보증금이 필요한데 목돈이 없으니 문제다.
고민하던 나는 일단 강남역 근처에서 적당한 가격의 호텔을 구하기로 했다.
비싸서 고민하기는 했지만 모텔보다는 호텔이 치안과 청결 면에서 더 나을 거라는 계산이 섰다. 다른 지역으로 가면 더 저렴하게 숙박할 수도 있겠지만 그러기에는 나는 오늘 너무 피곤했다.
내가 한국에서 눈을 뜬 지는 겨우 4일. 어제는 던전을 클리어한 데다 오늘은 강원도 원주에서 서울까지 오느라 소모된 체력이 만만치 않았다.
나는 결국 호텔의 싱글 룸에 들어가 씻지도 못하고 침대에 풀썩 드러누웠다. 침대는 폭신, 시트는 청결하고 차가워서 기분이 좋았다.
나는 침대에 뻗은 채 고민했다.
어쨌건 돈 벌 궁리를 해야 하는데.’
물론 내 소지창에 아직 남아 있는 아이템은 많았지만 이것도 무한정은 아니었다. 매일 비용이 나가는 호텔에 언제까지고 머물 수는 없었다.
그러니 던전을 공략하면서 돈을 모아 집을 구하는 게 이상적이긴 한데…….
문제는 내가 지금 함부로 눈에 띄게 던전 아이템을 모을 수도 없는 처지라는 것이다.
내 플레이어명이 공식적으로 알려진 상황이다. 지금부터는 내가 던전 공략을 하면 클리어 명단에 내 이름이 남기 때문에 정체를 들킬 가능성이 컸다.
만일 내가 랭킹 1위라는 게 밝혀지고, 혹시 내 정체를 알게 된 다른 랭커들이 랭킹 쟁탈전이라도 벌인다면 나는 즉각 저승으로 아웃이다.
물론 쉽게 당해 줄 생각은 없지만 나는 지금 체근민 수치는 물론이고 스킬마저 봉인된 상태다.
이 세계의 랭커들이 설마 어제 상대한 사기꾼 남자처럼 몇 가지 아이템과 물약으로 속일 수 있을 정도는 아닐 터였다.
골치 아프네.
가장 이상적인 해결책은 내가 빠르게 원래의 힘을 회복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체근민 수치를 빠르게 올릴 수 있는 방법은 시스템이 판정할 때 내 힘보다 더 강한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것이다.
어제처럼 B급 정도 되는 던전을 나 혼자 클리어해 나가면 꽤 빠르게 회복이 가능할 텐데…….
문제는 결국 같았다. 던전 클리어 시 내 정체가 밝혀질 가능성이 있다는 것.
“아악!”
아, 어쩌란 말이냐, 트위스트 추면서! 나는 누워 있던 호텔의 하얀 베개를 주먹으로 퍽, 쳤다. 부드러운 베개는 다행히 터지지 않았다.
역시 이 망할 놈의 시스템 새끼가 문제였다. 듣도 보도 못한 무슨 랭킹 같은 걸 만들어서 이렇게 사람을 괴롭히는 거지?
“정말 내가 죽기라도 바라는 건가?”
그럼 그냥 죽이지, 왜 이렇게 거지 같은 방법으로 사람을 괴롭히는 거야.
베개를 껴안고 있자니 새삼 내 신세가 처량해졌다. 타르토스에 있을 때는 적어도 돈 걱정은 안 했는데…… 주로 루카스 삥을 뜯어서.
나는 베개에 얼굴을 묻었다. 갑자기 사라진 나를 걱정하고 있지는 않을까. 제대로 던전 밖으로 탈출해서 치료는 받았을까.
“……다들 어떻게 지내려나.”
미운 소리만 해서 한 대 때리고 싶은 루카스, 바른 소리만 해 대서 얄미운 일리아스, 직구로 사람을 패는 알리시아, 진짜로 사람을 패는 아리아드네까지.
지긋지긋하게 익숙한 동료들인데 너무나 그리웠다.
내가 태어난 곳은 여기, 한국이지만…… 내 힘으로 일구어 낸 인연은 모두 타르토스에 있다. 어딜 가나 환영받지 못한 타인이었던 내가 유일하게 있을 자리를 찾은 곳.
어쩌면 그들을 다시는 만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우리가 다시 만날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눈가가 축축해지는 것 같았지만 나는 애써 눈을 감았다.
피곤했다. 이럴 때 우울한 생각을 하는 건 좋은 게 아니었다.
고민은 일단, 내일의 나에게 맡기기로 했다.
나는 몰려드는 피로에 의식을 억지로 떠안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