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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17화 (18/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17화

나의 어이없음을 뒤로하고…… 뭐, 어쨌거나 실제로 시간이 얼마 남지 않은 것은 사실이었다.

다들 이우연이 임의로 지정해 준 조대로 방어선 앞을 지키기 시작했다.

어? 그러고 보니 나는 왜 조가 없지.

홀로 된 내가 멀뚱히 주위를 둘러보자 이우연이 나를 돌아보며 싱긋 웃었다.

“아, 그쪽은 저랑 같은 팀이요.”

“……왜 내가 당신이랑?”

“내 말 안 듣고 있었구나? 어쩐지.”

이우연이 내 눈앞에서 자신의 빈 오른손을 반짝여 보이다가 어깨를 으쓱했다. 아무래도 악수를 하지 못한 원한이 남은 모양이다.

“아까 하늘에서 봤어요. 그쪽, 검을 던지면서 몬스터를 처리하던데 왜 근접전 자리에 섰어요?”

설마 공중에서 그런 걸 봤을 줄이야. 나는 속으로 혀를 찼다. 하기야 랭킹 2위쯤 되면 시야도 넓을 텐데.

게다가 아주 사소한 걸 눈치챘네. 기억력이 좋은 편인가? 혹은 의심이 많은 편? 둘 다?

어쨌거나 내게 유리할 게 없었다. 나는 모르는 척으로 일관하기로 했다.

“……잘못 들었나 보지.”

“뭐, 그렇다 치고요. 적중률이 좋길래 눈에 들어오더군요. 원거리 공격 스킬이 있겠다, 싶어서 나랑 짜자고 한 거예요.”

이우연이 그렇게 말하며 내게 웃어 보였다.

“같은 조니까 악수 정도는 할 수도 있잖아요?”

듣고 보니 합리적이기는 했지만…… 꾸며 낸 핑계인 것 같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나를 향해 웃는 이우연의 얼굴은 얼핏 보기에 나에게 호감이라도 가진 게 아닌가, 생각할 만한 표정이었으나, 눈빛은 차가웠다.

눈앞의 무언가를 시시각각 재고 있는 것처럼, 속내를 알 수 없는 눈빛.

“2차 몬스터 웨이브 때는 비행 몬스터도 나올 수 있죠. 당신 위치는 건물 옥상. 거기서 나를 엄호하는 게 당신 임무.”

나는 눈을 가늘게 뜨고 이우연을 아래위로 훑었다. 이우연의 의도가 수상쩍은 것은 여전했다.

“엄호가 필요한 실력은 아닌 것 같던데?”

아까 이우연이 벌이는 쇼를 관람한 차였다. 인정하기 껄끄러웠으나 저 정도의 전투력은 타르토스에서도 보기 힘들었다.

게다가 지구는 던전과 시스템이 생긴 지 겨우 5년, 타르토스는 20년째라는 걸 감안하면 이우연의 실력은 정말 대단한 것이었다.

단적으로 비교했을 때, 내가 아는 최강의 마검사는 루카스였다. 이우연은 그 루카스와 비교하더라도 나쁘지 않은 실력이었다.

본래의 내 능력치와 비교하자면…… 상성 때문에 이우연에게 상당한 운이 따라 줘야겠고, 다만 나도 방심은 할 수 없을 거다.

그러니 이우연은 이 한국에서의 최강자라고 자타가 공인할 만한 실력.

그런데도 이우연은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전투에 방심은 금물이죠.”

그렇게 말한 이우연이 주위에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어 말했다.

“무엇보다 1차 웨이브가 심상치 않아서.

그 말에 나는 움찔했다.

이우연이 여전히 의심쩍다는 것은 제쳐 두고서, 사실 나도 그렇게 생각하던 바였다.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는 말 그대로 돌발성이고 고정형 던전처럼 클리어 정보가 있는 것도 아니어서 미리 등급을 판별할 만한 수단이 없지만, 보통 1차 웨이브를 보면 그때 흘러나오는 몬스터의 수와 등급으로 그 이후의 난이도도 예상이 가능했다.

물론 1차 웨이브는, 이우연의 등장으로 수월하게 넘기기는 했다. 다만 그와 별개로 심상치 않은 조짐이 엿보였다.

나는 이우연의 말에 고개를 끄덕였다.

“등급 자체는 D~E급으로 낮기는 했지만…….”

“그 짧은 시간 안에 삼백에서 오백 마리는 튀어나왔어요.”

“그리고 2차 웨이브는 보통 두 등급 정도 뛰지. 숫자도 두 배.”

그렇게 생각하면 2차는 B~C등급의 최소 600, 최대 1000마리.

눈이 돌아가는 숫자였다.

B와 C등급 정도 되는 몬스터라면 어느 정도의 지능을 가지고 있어서, 일반인이 상대한다면 웨이브 활성화 시간 동안 도망가는 것도 어려울 터였다.

즉 헌터가 몬스터들을 도발해 공격을 집중시키고, 또 버텨 줘야 한다는 이야기였다.

그러나 1차 웨이브 때 이우연이 나타나기 전까지 헌터들이 싸우는 것을 보고 느꼈지만…… 다들 별로 경험이 없는 것 같았다.

방어선을 구축한 건 잘했지만 그 이후로 도통 협력이 되지 않았다.

물론 이우연이 최소한의 지시는 했지만, 막상 웨이브가 시작되고 목숨을 위협받게 되면 저 사람들 중 얼마나 제자리를 지킬까. 나는 솔직히 회의적이었다.

“……그래도 못 할 건 없잖아.”

비관해 보았자 어차피 달라지는 건 없었다. 몬스터 웨이브가 활성화되는 동안 이 결계가 감싸고 있는 구역 안에는 아무도 들어오지 못한다.

그러니 어떻게든 이 안에서 해결을 봐야 했다.

“당신 역할이 좀 커지긴 하겠지만.”

내가 봤을 때 이우연이 메인 딜러를 맡고 다른 헌터들이 돕는다면, 2차 웨이브의 시간을 30분 정도로 가정했을 때 어찌어찌 버티지 못할 건 아니었다. 희망은 있었다.

이우연은 내 말을 듣고 어깨를 으쓱였다.

“그거야 그렇죠. 1차 때보다 힘들어질 테지만 저야 못할 건 없어요. 2차까지는요.”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대로 가면 3차 웨이브는 답이 없다는 이야기.”

- 2차 몬스터 웨이브까지 대기 시간이 주어집니다. 00:02:56

허공에 떠오른 대기 시간은 이제 3분 남짓.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다행히 나와 이우연에게서 다들 멀리 떨어져 있어, 이우연의 말을 들은 사람은 없어 보였다.

우리 말을 듣는 사람이 없다는 걸 확인한 나는 이우연에게 조용히 말했다.

“당신이 그렇게 말하면 다들 사기가 떨어질 텐데.”

“현실적인 이야기를 하는 거예요.”

이우연은 아까 전 사람들을 북돋던 모습은 어디로 갔는지 냉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아까 모인 헌터들을 봤지만, 시스템 순위로 치자면 백 위권 안에 드는 사람들이 몇 없었어요.”

그 말에 저도 모르게 등골이 서늘해졌다.

“정말 한국에 있는 모든 헌터를 알기라도 하는 거야?”

“설마요. 고위 던전 공략에 오는 사람은 거기서 거기니까 얼굴이 익숙할 뿐. 그러니 제가 얼굴을 모른다면, 그건 이런 고위급 던전 공략에 참여해 본 사람이 아니란 이야기죠. 그리고 경험이 없다는 건 실전에서 치명적이고.”

“그래서? 포기하고 이대로 죽자?”

“설마요.”

이우연이 씩 웃으며 내게 손을 내밀었다.

“싸우는 걸 보니 그나마 당신이 여기서 제일 경험 많은 헌터인 것 같길래, 이렇게 터놓고 상의하는 중이잖아요.”

……그런 거였나.

나는 웃는 이우연의 얼굴에서 고개를 돌리고 하늘을 바라보았다.

이우연이 여전히 비어 있는 자신의 손을 흔들었다.

“이거 안 보이나요, 혹시?”

“내가 할 수 있는 건 당신이 땅 위의 잡몹을 해치우는 동안 하늘에서 접근하는 몬스터를 처리하는 정도야.”

“……뭐, 좋습니다. 2차 웨이브는 그걸로 버텨 보죠.”

“그리고 손 치워. 악수 안 할 거니까.”

내 말에도 이우연은 손을 치우지 않고 빙글빙글 웃고 있었다. 저쯤 되면 저 녀석도 오기가 생긴 듯싶었다.

“시간이 얼마 안 남았어요. 옥상으로 올라가야 저를 엄호해 줄 거 아닙니까? 사양 말고 잡아요, 공주님처럼 안아 모실 테니.”

“필요 없어!”

나는 다음 순간 님페의 바람을 활용해 땅을 박차고 뛰어올랐다.

바람이 나를 휘감고, 나는 몸이 중력의 흐름에 따라 바닥으로 떨어지기 전에 다음 발을 건물 벽에 대고 박찼다.

이런 건물 벽 따위, 옵타티오의 외피에 비교하자면 어린애 장난이지.

이우연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그의 등 뒤에서 다시 커다란 날개가 펼쳐졌다.

그는 날아오르며 건물 벽을 뛰어올라가는 나를 황당하게 바라보았다.

“날 이렇게까지 싫어하는 사람은 드문데. 혹시 내 안티 카페 운영자의 정체가……?”

“당신한테 그렇게까지 관심, 헉, 없어!”

30층 정도 되는 건물이었으나 군데군데 튀어나온 부분을 의지하며 나는 순식간에 타고 올랐다.

옥상에 도착하자, 조금 더 가깝게 보이는 것 같은 시스템 메시지가 빨간색으로 변하고 있었다.

- 2차 몬스터 웨이브까지 대기 시간이 주어집니다. 00:00:26

그나저나 내 임무가 원거리 사격이라, 이거지.

그렇다면 단검은 효율적이지 않았다. 지금의 나는 근력이 절대적으로 부족하니까, 날아다니는 비행 몬스터를 단검으로 맞추기는 힘들다.

그러나 지금 이우연은 나를 원거리 공격이 특기인 헌터로 알고 있다.

최대한 그 장단에 맞춰 주어야 하니, 내가 선택할 수 있는 수단은 적었다.

나는 소지창에서 활을 찾아 꺼내 들었다. 시위를 풀자 각궁이 제 모습을 드러냈다.

날개를 펼친 채 퍼덕이고 있던 여우 새끼가 눈을 크게 떴다가 곧 즐겁다는 듯이 웃었다.

“오, 역시 클래스는 궁수?”

“비슷해.”

사실 한 글자도 안 비슷하지만 대충 그렇게 말했다.

그래도 아주 거짓말은 아니었다.

클래스는 클래스와 맞는 무기를 사용하는 경우 능력치 보정을 주는데, 내 클래스인 용사는 내 주 무기인 검에 특별한 보정이 없었다.

대신 내가 사용하는 모든 무기에 약간의 보정치를 더해 준다. 활도 예외는 아니었다.

다만 내 주 무기는 검인 데다, 원거리 공격도 가능한 에이펙스의 광검을 얻은 이후로 활을 쓸 일이 없었기에 거의 3년 만에 꺼내는 게 문제라면 문제였다.

뭐, 잘못 쏘면 이우연이 맞기밖에 더하겠어. 나는 마음을 편하게 먹었다.

내 활을 본 이우연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각궁이네요? 화살은?”

“질문이 많네, 이우연 씨.”

“사정거리가 그리 길 것 같지 않은데.”

이우연의 시선이 내 팔을 훑었다.

분하기는 했지만 이우연의 말대로였다. 궁수의 팔 힘이 부족하다면 사정거리가 짧아 쓸모가 없으니까.

그는 미심쩍은 듯 몇 마디 더 하려 했으나, 결국 시스템 메시지에 표시되는 시간이 10초도 남지 않자 어쩔 수 없이 자리를 떴다.

날개를 펼친 이우연이 건물 위를 날았다.

나는 시험 삼아 빈 활의 시위를 퉁, 하고 당겼다.

너를 쓰는 것도 오랜만이구나. 나를 반기기라도 하듯 픽, 하고 붉은빛의 마력이 시위를 감돌았다.

- 경고! 2차 몬스터 웨이브가 시작됩니다. 몬스터 등급 제한이 있습니다(A급에서 F급 랜덤 출현)

- 2차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00:30:00

- 몬스터 웨이브 활성화 시간 동안 해당 구역을 벗어날 수 없습니다.

나는 메시지를 보는 순간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미친…….”

나만 그런 게 아니었다. 건물 아래에서 탄식이 울려 퍼졌다. 건물 안에 피신해 있던 일반인들도, 헌터도 마찬가지였다.

여기저기서 비명이 울려 퍼지고, 그 절망은 삽시간에 번져 가기 시작했다.

“뭐, 뭐야! A급이라고?”

“이거 아직 2차잖아!”

“헌터가 별로 많지도 않은데…… 어떻게 해!”

모두가 절망하는 것도 당연했다.

던전에 법칙은 없다지만 그래도 어느 정도의 규칙에 따라서 나오는 법이었다.

그렇지 않아도 희망적이지 않은 상황에, B에서 C등급을 예상했는데 갑자기 2차 웨이브에서 A등급까지 나오다니.

저 멀리서 이우연조차 얼굴을 찡그러트리는 것이 보였다.

그야 그렇지, 이우연이 2차 웨이브에서 죽을 일은 없겠지만 이렇게 되면 3차 웨이브는 정말 생존을 장담할 수 없다.

그렇게 모두가 두려워하는 시선이 모인 가운데, 허공에서 빛이 쏟아지기 시작했다.

빛 속에서 처음 드러난 것은 거대한 뿔이다.

마치 코뿔소의 것처럼 거대한 두 개의 뿔. 그리고 코끼리 가죽처럼 두꺼운 회색의 이마, 흉포한 사자의 턱, 두꺼운 발이 틈새를 비집고 기어 나오기 시작했다.

- 시스템 알람 : 몬스터의 등급과 종류를 조회할 수 있습니다.

쓸모없는 짓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처음 보는 몬스터라 궁금하기는 했다.

나는 시스템창을 조회했다.

- A급 몬스터 : 공포로 잉태된 황소

……그 유명한 신화에서 따오기라도 한 건가? 그나저나 요새 황소와 자주 엮이는 것 같은데.

“당황하지 마! 제자리를 지켜!”

“아, 그, 그렇지만……!”

“도망쳐 봤자 어차피 죽는다고!”

아니나 다를까, 나타난 몬스터를 본 헌터들은 동요하고 있었다.

그 이름대로, 아주 일부만 드러났을 뿐인데도 사람들의 얼굴은 공포로 물들어 있었다.

이우연은 날개를 편 채 하늘을 빙빙 돌며 자신의 존재를 사람들에게 떠올려 주려 했지만, 이우연이 짠 대로 방어선 앞에 포진해 있던 헌터들은 주춤주춤, 뒤로 물러서기 시작했다.

이대로라면 모두 죽는다.

나는 멀리서 보이는 사람들을 내려다보았다. 모두가 찬란한 빛에 감싸여 나타나는 죽음의 징조를 두려워하고 있었다.

가끔은, 그런 생각을 한다.

시스템은 인간을 미워한 나머지 인간을 멸종시키려고 나타난 것이고, 어쩌면 정말로 우리는 저항해 봤자 소용없는 멸망으로 걸어가는 것일지도 모르겠다고.

이런 생명의 연장에, 과연 의미가 있을까? 살아남아 봤자 기다리는 것은 고통뿐이다.

……그런 생각을, 나는 혀를 깨물며 떨쳐 냈다.

으득, 살이 씹히는 소리가 났다. 고통이 흐트러지려 하는 정신을 고양시켰다.

“같잖은 소리.”

설령 그렇다고 한들 그래도, 포기하기엔 아직 이르다.

겨우 이런 꼴을 보자고 이제껏 살아남은 게 아니야.

이런 것 따위가 내 삶의 의미일 리 없다.

허물어지는 빛 속에서 황소가 완전히 제 몸을 드러내려 할 때, 나는 시위를 당겼다.

- 어느 이름 없는 활이 당신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이 활에는 그럴듯한 이름도, 님페의 바람처럼 능력치를 보정해 주는 옵션도 붙어 있지 않았다. 근력이 부족한 팔이 덜덜 떨리고, 시위를 당기는 손가락이 패여 아프다.

그런데도 내가 이 활을 쓰는 이유는 단 하나.

- 용사 클래스 보정이 적용됩니다.

- 무명의 활에게 당신의 영혼이 사명을 부여합니다.

- 당신의 마력이 화살을 대체합니다.

용사에게는 부여된 사명이 있는 법이지만, 용사가 드는 무기가 특별할 필요는 없다.

필요한 것은 사명을 완수하고자 하는 의지뿐.

내 몸을 타고 흐르는 마력은 내 엄지손가락 위, 본래라면 화살이 놓여야 할 곳으로 흘러 들어가 화살의 모양을 만들었다.

나는 입가가 틀어지도록 시위를 세게 당겼다.

한껏 당겨진 시위가 쏘아 낸, 붉은 마력으로 된 화살이 허공을 날았다.

바람을 가르는 소리, 화살이 목표를 명중하기 전에 나는 외쳤다.

“너나 뒈져 버려!”

화살은 황소의 미간에 정확하게 명중했다.

유일하게 내 영혼에 남은, 누구도 빼앗아 가지 못한 힘이 황소의 뼈를 꿰뚫었다.

거대한 괴물은 빛이 쏟아지는 관문도 채 넘지 못한 채 쓰러졌다.

황소의 뒤를 따르던 몬스터들이 당황한 건지, 끼익대는 괴성이 들렸다.

아직 상황을 채 파악하지 못한 건물 밑에서, 환호인지 경악인지 모를 목소리들도.

나는 다시 조용히 시위를 당겼다. 2차 몬스터 웨이브는 이제 시작된 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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