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1화
휘두른 나의 검이 사람들에게서 리치로 연결되는 핏줄을 끊어 냈다. 후두둑 떨어지는 핏방울과 황금빛으로 휘날리는 생명력이 시야를 어지럽혔다.
핏줄에 연결되어 있던 사람들은 실이 끊어진 꼭두각시처럼 바닥으로 툭, 툭 쓰러졌다.
모두가 기절한 것이다.
무덤처럼 조용한 지하철 역사 내에서 해골의 텅 빈 시선이 붉게 달아올랐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용사 클래스 보정을 받아 성검으로 진화합니다!
- 해당 보스 몬스터를 ‘악’으로 인식하여 앙겔루스의 가호가 강화됩니다.
- 특별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성검으로 타락한 망령의 마법을 파훼하여 업적치 정산 시 보너스가 적용됩니다.
타르토스에서는 항상 보았던, 내가 몬스터를 해치울 때마다 떠오르던 든든한 메시지가 이렇게 반가울 수가 없었다.
내가 착용한 것은 용사를 기리는 망토.
루카스나 좋아할 법한 이 망토는 일주일 전, 시스템이 랭킹 1위의 보상으로 내게 준 것이었다.
처음에는 랭킹 1위 보상이고 뭐고, 쳐다보기도 싫어서 확인해 보지도 않았지만 아이템의 효과를 보고 생각이 바뀌었다.
이 아이템의 효과는 바로 내 영혼이 기억하고 있는 최대 능력치의 구현.
한국 시간으로 5년이나 병상에 누워 있던 강예나의 신체를, 타르토스에서 10년간 굴렀던 레나로 바꿀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마치 시스템이 내 상황에 꼭 맞춰 준 듯한 아이템이었다.
물론, 내 능력치를 리셋해 버린 것도 시스템이니 병 주고 약 주고인 셈이지만.
이 아이템을 사용할 때 고려해야 할 문제라면 제한 시간이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 망토의 유효 시간은 겨우 10분. 당연히 연속으로 사용할 수도 없었다. 쿨 타임은 일주일.
그래서 1차 웨이브 때는 선뜻 사용하지 못했다. 20분에서 30분 이상을 버텨야 하는 몬스터 웨이브에서는 딱히 효용이 없으니까.
하지만 이렇게 목표물이 정해졌다면 이야기는 다르다.
게다가 상대는 마(魔) 속성의 몬스터. 클래스가 용사인 데다 에이펙스의 광검까지 사용하는 나에게는 아주 좋은 먹잇감이었다.
무례한……!
물론 먹잇감을 빼앗긴 리치왕도 가만히 있지는 않았다.
리치가 뼈만 남은 흰 손을 들었다. 그 손가락 끝에 맺힌 것은 마력. 리치의 발밑으로 거대한 마법진이 떠올랐다.
“조심해!”
이우연이 고함쳤다. 물론 그렇게 소리 지르지 않아도 잘 알고 있다고.
‘옵타티오’를 공략하기 위해서 몇 번이나 리치를 연구했다. 리치는 먼저 ‘에너지 드레인’으로 생명력을 흡수해 자신의 힘을 강화하고.
그다음으로는…….
나는 등 뒤에 선 이우연을 향해 소리쳤다.
“아까 이야기한 거 기억하지?”
보스 몬스터가 리치임을 예상했기 때문에 이미 이우연에게 어느 정도 정보 전달을 해 둔 터였다. 돌아보지는 않았으나 이우연이 웃는 기척이 느껴졌다.
“그래, 하나도 빠짐없이.”
그럼 됐다. 나 혼자라면 리치를 처리할 수 있어도 사람들은 지키지 못하겠지만, 이우연이 있으니 어떻게든 될 거다.
- 경고! 보스 몬스터의 공격이 시작됩니다.
별 도움도 되지 않는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리치의 등 뒤로 순식간에 수많은 화살이 떠올랐다.
아까 내가 마력으로 화살을 만들어 낸 것과 비슷하지만, 그 위력은 비교도 될 수 없을 것이다.
역시, 예상한 대로의 공격 수순이었다.
검은 화살에 맞닿은 주변 공기가 검게 물드는 것이 보였다. 언데드가 품고 있는 독기에 오염되고 있는 것이다.
나야 피할 수 있지만, 바닥에 쓰러진 사람들이나 리치에게 묶인 사람들은 이대로라면 피할 수 없다.
이때 쓸 수 있는 방법은 단 하나뿐이었다. 나는 화살이 날아드는 순간 외쳤다.
“이우연!”
“알고 있어!”
검은빛의 화살이 사람들에게 닿기 전에 강대한 푸른빛의 실드가 광범위하게 펼쳐졌다.
이우연이 펼쳐 낸 실드에 가로막힌 검은 마력의 화살이 대부분 푸른 스파크를 튀기며 소멸했고, 실드가 채 막지 못한 화살도 사람들에게 가서 닿기 전에 이우연이 검을 휘둘러 소멸시켰다.
이우연이 사람들을 지키는 사이, 나는 한 번 더 검을 휘둘러 수십 개의 핏줄을 더 끊어 냈다.
안타깝게도 실드가 나에게까지 미치지는 않았기 때문에 내 볼과 팔을 검은 화살이 스치고 지나갔다.
- 앙겔루스의 가호가 언데드의 중독을 정화합니다!
하지만 중독되지만 않는다면 화살 몇 개 스치는 것쯤이야 아무렇지도 않다.
핏줄은 한 명 한 명의 목덜미에 박혀 있었으나 어느 지점에서 몇 십 가닥의 핏줄이 한데 모여 다시 리치에게로 이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 모인 핏줄은 리치의 마력으로 보호받고 있었다.
검을 내려칠 때마다 강력한 실드 마법이 검을 가로막았다.
“큭……!”
리치의 마력이 자그마한 불꽃이 되어 피부 위에 튀었다.
그렇지만 그것 역시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내려치고, 또다시 베고, 내려치고.
될 때까지 벨 뿐이다.
그렇게 몇 번이나 베었을까.
- ‘망령에 사로잡힌 왕’의 에너지 보급원이 60퍼센트 이상 소멸하였습니다.
됐다!
리치를 공략할 때 가장 먼저 해야 할 일은 바로 이렇게 에너지 드레인을 사용할 수 없게 보급원을 파훼하는 것이었다.
에너지 드레인을 통해 리치가 계속해서 생명력을 회복한다면 아무리 공격해 봤자 쓸모가 없으니까.
에너지 보급원이 대다수 사라진 것을 확인한 리치가 끊어진 핏줄을 다시 뻗으려 했지만, 이미 이우연은 사람들 사이를 빠르게 이동하며 실드를 시전한 상태였다.
이제 문제는 시간이었다.
- 용사를 기리는 망토 활성화 시간 00:06:20
내게 남은 시간은 6분 남짓. 리치를 빠르게 처리해야 했다.
숨 돌릴 틈도 없이, 리치의 다음 공격 페이즈가 시작되었다.
허무하게 스러져 간 망령들이여…….
언데드이면서 마법사인 리치는 네크로맨서. 죽은 이들의 영혼을 다루는 자다.
리치의 마력이 사방을 감돌았다.
서서히 주위에서 끔찍한, 쇠를 긁는 듯한 소리가 들려오기 시작했다.
이번 공격 페이즈에서는 주변의 시체를 리치의 마력으로 조종하는 것인데…….
어라, 지하철역에서 나올 시체가 대체 뭐가 있지?
그렇게 생각하는 순간 끔찍한 예감이 들었다. 서, 설마.
스스슥.
듣기만 해도 끔찍한 날갯짓이 들렸다. 리치의 주변으로 검은색의 덩어리가 모여들었다.
그 검은색의 무더기가, 잘 보면 모든 무더기가 주먹만 한 바퀴벌레였다!
“이런 씨……!”
나는 욕을 하려다 참았다. 참은 이유는 괜히 입을 벌렸다가 벌레가 입안으로 날아들까 봐 무서워서였다.
딱히 벌레를 무서워하는 건 아닌데 저렇게 많은 벌레, 그것도 멀쩡한 벌레도 아닌 벌레의 시체를 보니 보는 것만으로도 비위가 상해서 죽을 것 같았다!
약을 먹고 죽은 벌레, 몸이 반쯤 터진 벌레…….
에이펙스의 광검도 벌레 앞에서는 소용이 없었다. 너무 작고 많아서 베기는 힘들다.
“야, 이우연! 빨리 해!”
나는 검을 미친 듯이 휘두르면서 외쳤다.
“나 드랍하고 싶은데?!”
뒤에서 기겁하는 이우연의 목소리가 들렸다.
저 새끼, 3차 몬스터 웨이브가 터졌을 때도 저렇게까지 끔찍해하지는 않았던 것 같은데!
“드랍은 무슨 드랍이야!”
이 상황에서 나 혼자 두고 가면 저 새끼는 진짜 나쁜 놈이다!
다행히 이우연이 진짜 나쁜 놈은 아니었다. 아주 기겁을 한 것 같았지만 그래도 할 일은 했으니까.
“헬파이어!”
주문을 영창하는 목소리가 유독 큰 것 같았지만 그 정도는 눈을 감아 주기로 했다.
나에게로 날아들던 바퀴벌레 덩어리가 순식간에 시퍼런 불길에 휩싸였다.
코끝에 매캐하고 지독한 냄새가 와 닿았다.
리치에게는 마법이 통하지 않지만 리치가 부리는 시체는 달랐다.
마력으로 잠시 살아난 시체는 불을 무서워한다.
그래서 두 번째 공격 페이즈 때는 이우연이 쓸 수 있는 가장 높은 화력의 불 계열 공격 마법을 쓰기로 했던 것이다.
게다가 바퀴벌레 무리는 시각적으로 끔찍했을 뿐 별다른 공격력이 없었다.
이우연이 일으킨 푸른 불꽃은 수월하게 벌레들을 태워 가기 시작했다.
이것만큼은 정말 다행이었다. 타르토스에서는 이 페이즈에서 굉장히 애를 먹곤 했기 때문이다. 지하철역에 무슨 고블린이니 죽은 오크 무리 따위가 없어서 다행이네!
예상했던 것보다 더 빠르게 불러낸 시체들이 사라져 버리자 리치가 눈에 띄게 당황하는 것이 보였다.
이제 리치를 보호하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왕관을 쓴 해골이 뼈만 남은 손을 들어 올렸다.
나의 안식을 방해한 무례한 자여……
누가 마법을 사용하게 둘 줄 아냐!
“지금!”
나는 님페의 바람을 이용해 앞으로 높게 뛰었다. 리치의 손이 내게로 뻗어졌고, 그 손가락에 마력이 감도는 것이 보였다.
앞으로 겨우 3미터 남은 시점!
“위험해!”
내 검이 리치의 마법보다 먼저 닿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는지 이우연이 뒤에서 외쳤지만, 나는 그 외침을 듣고 웃었다.
“아니.”
그래, 평범한 검이라면 닿지 못할 거리였지만…….
성검의 칼날이 리치의 목을 갈랐다.
목이 떨어지는 그 순간까지, 해골의 텅 빈 시선은 자신의 목을 가른 흰색의 검날을 믿을 수 없다는 듯이 바라보고 있었다.
“와, 사기템…….”
이우연이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하긴, 사기템이기는 했다.
성스러운 빛을 흩뿌리는 에이펙스의 성검이 가진 진가는 단순히 가볍고 날카롭다는 것뿐만 아니라, 마력을 불어넣었을 때 그 검날이 길어진다는 것에 있었다.
이 검이 벨 수 있는 거리는 내 의지가 닿는 그곳까지.
나는 정상적인 길이로 돌아온 에이펙스의 검을 검집에 집어넣었다.
고맙다, 버텨 줘서.
- 용사를 기리는 망토의 활성화 시간이 종료됩니다.
- 다음 사용까지 168시간의 대기 시간이 필요합니다.
활성화 시간이 아슬아슬했던, 내 등 뒤를 장식하던 망토도 사라졌다. 그러고 나니 등 뒤에서 뜨거운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몸을 돌려 역사 내에서 유일하게 눈을 뜨고 있는 이우연을 바라보았다.
나를 의심스럽게 노려보고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뜻밖에도 이우연은 웃고 있었다.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전히 미소 지은 채로.
“그쪽 덕분에 클리어했네.”
“……그러네.”
“그럼 곧 클리어 메시지가 뜰 테고.”
“……그렇지?”
날개가 없어도 웃는 얼굴만큼은 천사처럼 예뻤으나…… 빙빙 돌려 말하는 그 말투가 아주 얄밉다.
“이번 몬스터 웨이브의 최대 업적자가 궁금한데, 그쪽도 궁금하지 않아?”
이런 여우 새끼 같으니…… 나는 혀를 찼다.
곧이어 이우연이 말하는 대로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보스 몬스터, ‘망령에 사로잡힌 왕’을 처치하였습니다.
- 구역 제한이 해제됩니다.
- 최대 업적자 : 방랑하는 구도자
“어라.”
이우연이 메시지를 읽고 고개를 갸웃하며 나를 돌아보았다. 그 시선에 내 등줄기에서는 식은땀이 흘렀다.
대체 무슨 말을 할까?
통칭 모나미, 성질 더러운 여우 새끼가 갑자기 검으로 나를 슥삭, 하는 건 아니겠지? 랭킹 1위를 계승 중입니다, 하면서…….
그러나 이우연이 꺼낸 말은 아주 뜻밖의 것이었다.
“플레이어명, 진작 바꿨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직 안 바꿨네?”
“다, 닥치지 못해!”
내가 이우연을 베기 위해 다시 에이펙스의 광검을 꺼내고, 이우연은 나를 놀리기 위해 입을 열려고 할 때였다.
갑작스러운 땅의 진동이 느껴졌다.
나와 이우연의 시선이 마주쳤다. 무언가, 이상한 일이 벌어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