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2화
이번에는 나보다 이우연의 행동이 더 빨랐다.
그는 마력 보충제를 꺼내 마시고, 지하철 역사 내에 이동 마법을 걸었다.
마법진이 커다랗게 펼쳐졌다.
가히 안쓰럽기까지 한 장관이었으나 이우연은 방금 1차, 2차 몬스터 웨이브에, 리치를 쓰러트리려고 대규모 마법을 몇 번이나 쓴 참이었다.
어딜 보나 무리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핏물이 입술 사이로 흐르는 것이 보였다.
그럼에도 마법진은 점점 크게 퍼져 나가 역사 내에 쓰러진 사람들을 모두 덮기 시작했다.
내가 외쳤다.
“뭘 어떻게 하려고?!”
“일단 밖으로!”
이우연은 그렇게밖에 말을 잇지 못했다. 악문 입가가 떨리고 있었다.
젠장, 나는 화가 치미는 것을 느꼈다.
나는 왜 마법에 재주가 없어서!
어쨌거나 이우연의 판단이 옳았다. 조금 무리하더라도 일단 이 역사 내를 빠져나가야 한다는 것은 확실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이 지하철역이 무너지게 되면 여기 있는 수백 명의 사람들이 매장되고 말 테니까.
물론 나와 이우연이라면 매몰되더라도 어떻게든 살아남을 수야 있겠지만, 에너지 드레인으로 리치에게 생명력을 흡수당한 사람들은 빠른 치료가 필요했다.
“간원하건대.”
넓게 펼쳐진 마법진의 정중앙에 선 이우연이 검을 바닥에 내리꽂았다.
아까처럼 헬파이어 같은 마법 주문이 아니라, 이번에는 진언이 들려오고 있었다.
마법사가 사용하는, 정형화된 수식이 아니라 그 스스로의 영혼에 새겨진 마법을 발현시킬 때 쓰이는 언어.
“이 마음이 닿는 곳까지 데려가 주기를.”
다음 순간, 나와 이우연을 비롯한 사람들은 강남역 한복판, 사거리로 나와 있었다.
밖으로 나온 우리의 시야에 먼저 보인 것은 구역 제한이 사라진 투명하고 맑은 하늘.
그 하늘 아래에는 몬스터의 시체들, 그리고 찢긴 인간의 시신, 거리가 파괴된 흔적만이 남아 있었다.
저 멀리서 앰뷸런스 소리, 사람들이 웅성대는 소리가 가까워지는 것이 들려왔다.
일단 주위의 풍경은 상황이 종료된 듯 보였다. 아까 느껴진 진동도 더 이상 느껴지지 않았고.
“다행이다…… 지진은 아닌 것 같네.”
상황을 확인한 이우연이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쉬었다.
햇빛 아래에 비치는 사람들의 낯빛도 예상보다 나쁘진 않았다.
그래도 나는 아직 경계를 풀지 않았다. 보스 몬스터가 있는 돌발성 던브가 일어난 마당에 무슨 일이 또 벌어져도 이상하지 않으니까.
이우연이 핸드폰을 꺼내 조작이 가능해진 것을 보여 주었다.
“구역 해제가 된 건 확실해. 사람들 소리도 들리고.”
“그럼 방금 그건 대체…….”
뭐지, 그렇게 말하려고 할 때였다. 이우연이 팔꿈치로 내 옆구리를 툭툭 쳤다.
돌아보자 이우연이 검지로 하늘을 가리켰다.
뭐야, 구역 해제된 건 확인했는데? 도대체 뭘 보라는…….
하늘을 보게 된 나는 침묵하고야 말았다.
- !&@*@#%#$ 혼란한 오♤류가 발생 ※♠
- 분리된 ○●가 →←↑↓ 됩$니다
- 겹부쳐지분는의중복발생으로 인한 사고
- 필^&*연적 발생 과 운명력의 한계가 충돌
“저게 대체 뭐야?!”
괴상한 메시지가 하늘 한구석에 투명하게 떠 있었다.
평소처럼 전체 공지로 된 황금색 글씨도, 나만이 읽을 수 있는 흰색 글씨도 아니었다. 뒤의 하늘까지 비쳐 보일 것 같은 투명한 메시지다.
저걸 지금 메시지라고 띄운 거야?
아니, 아니다.
저건 플레이어에게 보여 주려고 띄운 메시지가 아닌 것이다.
입가의 피를 대충 소매로 닦은 이우연도 허공의 메시지를 바라보며 눈살을 찌푸렸다.
그는 목을 가다듬고서 말했다.
“저거, 아무래도…….”
그러나 그 시도는 무참한 실패로 돌아갔다.
이우연은 말을 잇지 못하고 검을 바닥에 꽂은 채 한쪽 무릎을 바닥에 꿇었다. 아무래도 내상이 극심한 모양이었다.
나는 다급히 이우연 곁에 다가갔다.
“포션은?! 안 가지고 있어?”
이우연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 보니 1차 몬스터 웨이브 대기 시간 때 이우연이 돌아다니며 헌터들의 조를 짤 때 포션도 같이 배부했던 기억이 났다.
“아니,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본인 몫은 남겨 놔야 할 것 아냐!”
영악한 여우 새낀 줄 알았더니 여우가 아니라 곰처럼 미련한 놈 아닌가, 이거.
이우연이 쿨럭이며 바닥에 피를 뱉었다. 나는 어쩔 수 없이 미련 곰탱이의 등을 한두 번 토닥였다.
그런데 그 순간.
- 경고! 경고! 경고합니다!
- 운명력의 작용으로
최후의 시련이 출몰할 가능성이
- 경고! ※※은 ※※※※의 출현을 ※※하지 않았으므로
합당하지 않은 난이도로 간주되어 취소
중도 취소 불가
허공에 나타난 메시지가 갑자기 미친 듯이 번뜩이기 시작했다. 검을 짚고 있던 이우연이 그 번쩍임에 화들짝 놀라 일어섰다.
나는 갑작스럽게 움직인 이우연 때문에 깜짝 놀라 한 발자국 뒤로 떼다가 무심결에 고개를 들었고…….
그렇게 나는 그것을 보았다.
태양의 빛을 구름이 가리듯이, 모든 희망의 빛을 꺼트릴 것만 같은 그림자가 불길하게 반짝이고 있는 메시지를 덮었다.
그것은 용암 같은 눈동자로 이 거리를, 세상을…… 아니, 나를 굽어보고 있었다.
도저히 한눈으로는 가늠할 수 없는 거대한 무언가가 하늘을 가렸다. 햇빛을 가리는 것만으로도 그것은 도저히 정체를 알 수 없는, 그저 ‘검은 것’이었다.
하지만 나는, ‘그것’을 조금 더 자세히 보면 파충류의 비늘이 온몸을 뒤덮고, 찢어질 것처럼 투명한 나비의 날개 한 쌍이 퍼덕인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것은 불길한 검은 용.
신음처럼, 내 입에서 그 이름이 새어 나왔다.
“옵타티오……!”
인간의 파멸을 예고하려는 진정한 천사가 이 땅에 강림하고 있었다.
나는 순식간에 혼란해졌다.
여기에 왜 옵타티오가 있는 거지? 타르토스에서 나는 분명히 내 동료들과 함께 옵타티오를 쓰러트렸고, 옵타티오의 패배를 인정하는 시스템 메시지를 보았다.
그런데 대체 왜!
나는 반사적으로 검을 쥐려 했다. 하지만 다음 순간, 나는 내가 허리에 차고 있던 검이 사라졌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소지창을……!”
벼락처럼 소리치려 했지만 목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아니, 그건 정확한 표현이 아니었다.
내 목소리는 물론이고 이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소리가 진공으로 휩쓸려 가듯, 세상이 온통 고요했다.
문득 고개를 든 내 주위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어느새 나 자신이 어둠 한가운데 홀로 서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빛도, 소리도 없는 공간.
여긴 대체 어디인 거야?
아무리 주위를 둘러보아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손과 발을 움직여 보았으나 잡히거나 닿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러기를 수십 번, 수백 번…… 아니, 수천 번.
얼마나 움직였을까? 지금 얼마나 시간이 흐른 걸까? 아니, 시간이 흘러가고 있기는 한 것일까?
내가 움직인 것이 맞긴 한 건가?
사실은 움직였다고 생각했을 뿐 전혀 움직이지 않은 것일지도 몰라. 아니, 애초에…… 내게 사지라는 것이 존재했던가? 나는 지금 살아 있는 건가?
그곳은 홀로 있기에는 너무도 고독한 공간이었다.
“나는…….”
그건 얼마 만에 내가 낸 목소리였을까.
나는 결국 내가 무엇을 말하려 했는지조차 잊어버리고, 제자리에 멈추어 섰다.
자리하는 것은 압도적인 공허함.
……내가, 무엇을 하고 있었더라? 무엇을 하려고 했었더라? 무언가를, 하려고 했었던가? 그건 꼭 해야만 하는 일이었을까?
“………….”
그냥 이대로, 아무것도 떠올려 내지 말고, 그렇게 더 이상 고통 받지 말고, 모든 걸 포기해 버리면 분명 편해지겠지.
나는 힘겹게 떠올려 낸 그 결론에 만족했다. 그래, 나는 분명히 이걸 바랐던 거야.
레나.
그러나, 그 고독한 어둠 속에서 불꽃처럼 환하게 타오르는 목소리가 나를 깨웠다.
눈앞에 나타난 환상은 아름다운 여자의 모습을 하고 있었다. 길게 기른 금발을 땋아서 늘어뜨린 나의 친구.
“아리아드네……?”
그녀의 얼굴을 마주하고 이름을 부른 순간, 내 주위를 둘러싸고 있던 죽음 같은 고요가 모두 사라졌다.
폭죽이 터지는 것 같은 소란함이, 생명의 눈부심이 가득 자리하고 있었다.
아, 그건 다 꿈이었구나. 영원할 것 같던 고독은 순식간에 씻겨 나갔다.
아무래도 던전을 공략하다가 환상계 마법으로 공격당한 후유증이라도 남은 건가…….
“아, 아리아드네……!”
내가 꿈을 꿨는데 그게 글쎄, 그렇게 말을 하려는데 화난 얼굴을 한 아리아드네가 먼저 내 입을 찰싹 때렸다.
갑자기 얻어맞은 나는 깜짝 놀라 입을 감쌌다.
“뭐 하는 거야! 아프잖아!”
“제가 말했지요. 레나의 마음이 길을 찾지 못하여 자꾸 심마가 찾아오는 거라고요.”
“……그런데?”
“그러니 가르침을 드린 겁니다.”
“신관이 언제부터 사람을 때려서 가르침을 주는 직업이었어?”
억울한 마음에 그렇게 말하자 아리아드네가 한 번 더 내 입을 때렸다. 성력을 담아서 때리면 진짜로 아프다고, 엄살이 아니라!
“야, 이 나쁜……!”
“그러니까 빨리 당신의 길을 찾아요, 레나.”
아리아드네는 웃는 채로, 내 어깨를 손으로 밀었다.
이번에는 아무런 힘도 실리지 않는 손에 나는 이상하게도 속절없이 밀려나고야 말았다.
한 걸음. 겨우 한 걸음 떠밀린 것뿐이었는데, 그 뒤로는 발을 디딜 부분이 없다.
대체 나한테 왜 이러는 거야? 그렇게 물으려 했으나.
“우리는 괜찮을 거야.”
피투성이가 된 아리아드네가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말하는 그녀의 뒤로는 수많은 시체의 산이 있다.
대체 뭐가 괜찮다는 거야, 나는 악을 썼지만 내 목소리는 그녀에게 닿지 않았다.
그녀의 눈에 어느샌가 빛이 사라지고 있었다. 녹이 슬어 버린 검이 심장에 꽂혀 있었기 때문에.
“나는 걱정하지 말고 어서…….”
- 마찰로 인해 찢긴 틈새를 복구하였습니다.
- 세계가 플레이어명 : 방랑하는 구도자(求道者)를 재인식하였습니다.
“……정신 차려!”
누군가가 내 몸을 흔들고 있었다.
눈을 뜨자 가장 먼저 내 시야에 들어온 것은 이우연의 얼굴이었다.
그는 필사적인 얼굴로 나를 흔들고 있었는데, 내가 눈을 뜨자 드디어 안심한 얼굴이 되었다.
“괜찮아? 갑자기 왜 그래?”
나는 멍하니 그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래, 이우연이었다. 첫 등장부터 날개를 달고 하늘에서 내려온 웃기지도 않은 불여우 자식…….
어?
나는 순식간에 정신을 차렸다. 언제 혼란했었냐는 듯 정신이 금세 명료해졌다.
“왜 그러냐니? 너야말로 그게 무슨…….”
지금 여기, 지구에 옵타티오가, 최후의 드래곤이 나타나지 않았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나는 멈칫했다.
이우연은 미심쩍은 얼굴로 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혹시 내상이 심해져서 그런 거야? 갑자기 쓰러졌어, 당신.”
이우연의 얼굴은 그런 재앙을 목격했다기에는 너무도 태평했고…… 정말로 이 세계에 옵타티오가 나타났다면 정신을 잃은 내가 아직도 살아 있을 리가 없다.
그렇다면 도대체 어디부터 환상이었던 거지?
나는 비척비척, 몸을 일으켜 세웠다. 이우연이 당황하며 내 몸을 부축했다.
일어선 내 눈에 보이는 허공의 시스템 메시지는 언제 그런 오류를 냈냐는 듯, 말끔하게 갱신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메시지의 내용은 기괴했다.
- 당신은 세계를 멸망시킨 최후의 전령을 목격하였습니다.
- 특별한 업적을 세웠습니다! 이미 멸망한 세계의 파편이 보상으로 주어집니다.
나는 천천히 그 메시지를 읽었다.
읽고, 읽고, 또 읽고.
그리고 이해한 다음에는, 이해하고 싶지 않다고 생각했다.
멸망했다, 고.
뭐가 멸망했다는 거지? 설마, 타르토스가?
그럴 리는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마음 한편에는 불안함이 피어올랐다.
그도 그럴 것이 방금 내가 겪은 현상은 제대로 된 무언가가 아니었다.
영원히 이어질 것 같던 어둠 속, 그 어둠에서 나를 깨운 아리아드네의 목소리, 이상하게도 다쳐 있던 그녀의 모습.
무엇 하나 제대로 된 것이 없다.
“……하.”
나는 숨을 내뱉었다.
그래, 솔직히 말하자. 나는 이유도 모른 채 한국으로 돌아와서 지난 10년간 쌓아 온 내 모든 것을 잃었다.
무척이나 허무했다.
그렇지만…… 그래도 괜찮았다.
왜냐하면 나는 타르토스를 지켜 냈으니까.
이걸로 내가 해야 할 일은 끝났다고, 그렇게 생각했다.
해야 할 일이 끝났다면 내 능력치 따위가 사라지는 게 무슨 상관이 있겠는가? 굳이 필요하다면 이제부터 천천히 쌓아 나가면 되는 일이었다.
물론 시스템이 랭킹 따위의 사소한 농간을 부렸지만 그 정도야 어떻게든 버틸 자신이 있었다.
결국 여유가 있었던 거다. 저 악랄한 시스템이라는 이름의 운명에서 세계를 지켜 냈다고 생각했으니까.
그런데 시스템은 내게 지켜 냈다고 생각한 내 세상이, 내 사람들이 죽어 가고 있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마치 네가 해야 할 일은 아직 끝나지 않았다는 듯이.
“젠장.”
나는 내 뺨을 때렸다.
그래도 성에 차지 않아서 한 대 더 때리고, 여전히 멍한 느낌이 가시지 않아 한 대 더 때리려는데 이우연이 깜짝 놀라 내 손을 잡아 멈췄다.
이우연의 존재를 잊고 있었던 나도 덩달아 놀랐다.
“뭐 하는 거야?”
나는 그 말에 대답을 할 수 없었다.
무어라고 대답해야 할까?
내가 지난 10년간 지키려고 노력했던 어떤 세계가 있었고, 노력 끝에 지켜 냈다고 생각했는데…… 어찌 된 일인지 그 세계가 멸망한 것 같다고?
아니면, 시스템이란 게 실체가 있다면 당장 갈기갈기 찢어 죽여 버리고 싶다고?
아니, 그 무엇도 아니다.
“……뭘 하긴.”
나는 아리아드네의 가르침대로 뻔뻔하게 웃어 보였다.
“정신을 바짝 차리는 중이지.”
저 빌어먹을 시스템이 아무리 나를 절망시키려 한들, 그런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내게 중요한 건 그런 게 아니었다.
중요한 건 언제나, 내가 과연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답은 정해져 있었다.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 허리에 달린 검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조금만 기다려, 얘들아.
내가 무슨 일이 있어도 너희들을 구하러 갈 테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