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29화
갑작스럽게 나온 단어에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 같았다. 유령이라니, 영 익숙하지 않은 단어였다.
차라리 언데드라면 모를까.
언데드라면 사실 이제껏 꽤 많이 접했던 몬스터 중 하나였다.
얼마 전에 보스 몬스터로 출현했던 리치도 그렇고, 그게 아니더라도 희귀하지만 언데드를 만드는 마법이나 스킬을 개발한 경우 클래스가 ‘네크로맨서’가 되어 수족으로 부릴 언데드를 만들기도 했다.
물론 그럴 경우 타르토스에서는 대륙 공적이 되긴 하지만.
그렇지만 언데드의 경우 시스템 메시지에 제대로 ‘언데드’라고 표시되기 마련인데…… 유령이라니, 새로운 몬스터인가?
나는 일단 확인을 해 보려고 시스템을 불러냈다.
“클리어 조건 조회.”
- 해당 던전 클리어 조건 : 해당 던전에 존재하는 모든 몬스터의 섬멸
시스템 메시지는 던전에 들어오기 전, 신입 헌터가 말했던 그대로의 결과만을 출력할 뿐이었다.
‘유령’을 특정하지는 않는군.
모든 몬스터라…….
나는 일단 주위를 둘러보았다.
유령의 성이라는 말을 듣고 나니 어쩐지 더 으스스해 보이는 눈앞의 성을 제외하면, 넓게 펼쳐진 들판은 더할 나위 없이 평온해 보였다.
잔잔한 들꽃에는 나비가 노닐고 풀을 뜯는 토끼들과, 시냇물처럼 투명한 하늘에는 새들이 날아다녔다.
소풍에나 어울릴 법한 풍경이다.
주위에 몬스터라고는 한 마리도 보이지 않았다. 또 공략을 진행 중일 헌터들도, 아무도.
그래도 혹시 모르니 나는 일단 시험 삼아 허공으로 화살을 두어 대 쏘아 보았다. 마력으로 만들어진 화살이 상공을 날아 폭죽처럼 퍼졌다.
깜짝 놀란 새들이 빠르게 방향을 틀어 다른 쪽으로 날았다.
몬스터든 헌터든, 살아 있는 무언가가 있다면 반응이 있을 텐데…….
잠시 기다려 보았지만 어떤 반응도 돌아오지 않았다.
“……역시 저 안에 들어가야 하는 건가?”
나는 님페의 바람을 이용해 성문 앞으로 빠르게 다가갔다.
멀리서 보기에는 그저 으스스해 보이기만 했는데…… 가까이 다가가니 더 으스스했다.
회색빛의 성벽에는 아무렇게나 뒤엉킨 담쟁이덩굴이, 그리고 성벽 밑에 깊게 패인 해자에는 온갖 오물과 식물, 벌레의 시체가 뒤엉켜 떠다니고 있어서 끔찍한 냄새가 났다.
굳건히 닫혀 있어야 할 성문은 반쯤 부서진 채 제 몫을 다하지 못하고 열려 있었다.
이렇게 보니 타르토스에서 많이 보았던 성과 유사한 느낌인데. 손질이 되지 않고 버려져 있어서 그렇지.
제대로 적을 대비해 방비를 하려고 만든 성이다.
그나저나 유령은 그렇다 치고 다섯 번째 밤은 또 뭐야. 성안에서 몬스터랑 마피아 게임이라도 하는 거냐?
순간 머리에서 피를 흘리는 반투명한 유령이, 마피아처럼 나를 죽이러 달려오는 장면이 상상되는 바람에 약간 소름이 끼쳤다.
하여간에 지금은 아무런 정보도 없으니 뭐라 말할 수가 없다.
곰곰이 생각한 후 나는 다시 시스템을 불러냈다.
“보스 몬스터 조회.”
- 해당 던전에 보스 몬스터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그럼, 몬스터 유령 상세 조회.”
- 해당 몬스터에 대한 정보는 존재하지 않습니다.
놀라울 정도로 시스템에 도출되는 결과가 전혀 없었다. 그렇다면 이름만 유령의 성일 뿐, 유령이라는 몬스터가 나타난다는 게 아닌가?
나는 마지막으로 시스템을 한 번 더 조회해 보았다.
“다섯 번째 밤 상세 정보 조회.”
솔직히 이런 식의 애매모호한 단어는 시스템이 팁을 주지 않는 경우가 더 많아서 이번에는 딱히 기대하지 않고 검색해 본 것이었는데, 뜻밖의 결과가 나왔다.
- 다섯 번째 밤이란 공성전이 진행되는 시간을 가리킵니다. 밤에는 ‘기습’, ‘스파이 잠입’, ‘회유’, ‘계략의 실행’ 등의 행동이 가능합니다.
- 현재 ‘다섯 번째 밤’ 종료까지 00:33:57
긴 메시지를 읽는데 순간적으로 말이 막혔다.
이게 뭐야.
“공성전?”
공성전이란 건 보통 성(城)을 공격하는 행위 아니던가?
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혹시 다른 성이라도 있는 건가, 하고. 그러나 아무리 봐도 아무런 기척도 없는 으스스한 고성(古城)만이 보일 뿐이었다.
“설마 이…… ‘유령의 성’이란 걸 공략하는 게 공성전이야?”
아무도 없는데 도대체 누구랑 싸워서 성을 공격하라는 말인가. 이대로 지키는 사람 하나 없는 성을 부수기라도 하라는 거야? 그건 쉬운데.
내가 광검을 들어 마력을 불어넣기 직전,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공성전에 참여하시겠습니까? 이대로 성을 공격할 경우 ‘공성(攻城)’포지션이 확정됩니다.
“자, 잠깐!”
- 포지션 확정이 취소됩니다. 포지션 확정에 따른 보상을 받을 수 없습니다.
나는 시스템의 메시지를 취소했다.
포, 포지션이라고?
메시지에 떠오른 그 단어를 보는 순간 등줄기에 차가운 땀이 흘렀다.
이건 오랫동안 시스템의 악의를 겪어 왔던 사람의 감이었다.
여기서 아무 정보도 없이 함부로 포지션을 확정했다간 나중에 죽도록 고생하거나, 혹은 그냥 죽는 게 낫다거나, 차라리 죽여 줬으면 하고 바라게 될 확률이 높았다.
이렇게 플레이어의 ‘포지션’을 정해야만 하는 던전 자체는 처음이 아니었다. 내가 제일 싫어하는 던전의 유형도 이런 것이었다.
차라리 강대한 옵타티오 같은 보스 몬스터 하나를 처리하면 클리어되는 던전이 낫지, 이렇게 ‘섬멸’ 따위의 클리어 조건을 주고 심지어 플레이어에게 ‘포지션’을 선택하라고?
저절로 몸이 부르르 떨렸다.
무, 무서워. 포지션 정하라는 말이 유령보다 무서워!
“이거 자칫하면…… X되는…….”
혹은 장담하건대, 이건 이미 X됐다.
이렇게 된 이상 한시라도 빨리 성안에 들어가서 상황을 살펴보는 수밖에 없었다.
대략적으로라도 상황을 파악하면 그때 최대한 유리한 쪽으로 포지션을 결정해야 한다. 결정하지 않아도 된다면 그게 제일 좋겠지만…….
- ‘유령의 성’ 필드에 입장하시겠습니까?
그래그래, 간다고.
이런 젠장.
나는 성문 안으로 한 걸음을 내디뎠다.
성문 안으로 들어가 보니, 높던 성벽은 황량한 폐허만을 두르고 있었다. 눈에 보이는 모든 건물이 양식조차 알아보기 힘들 만큼 무너져 있었기 때문이다.
아직 덜 무너진 돌벽에 붙어 있던 박쥐나 동물들이 내 발걸음 소리에 놀라 날아가거나 달아났다.
나는 주위를 살폈다.
타르토스를 돌아다니면서 버려진 폐가에 하룻밤 묵는 일이 많았는데,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건물이라는 것은 놀라울 정도로 냉기가 감돌고, 감도는 공기는 건조하다.
마치 아무도 돌보지 않는 무덤과 같다.
그래, 흡사 이곳처럼.
조그마하고 잡다한 폐허들 사이로 커다란 길이 나 있었다.
그 길은 높은 언덕 위, 또 다른 성벽을 두른 성으로 이어져 있다.
그렇다면 이곳은 외곽(外廓)이고, 저쪽이 메인 필드인가.
그렇다면 이선을 비롯한 헌터들은 저곳에…….
그때였다.
- ‘앙겔루스의 가호’가 당신의 정신을 방어합니다.
- ‘앙겔루스의 가호’가 지닌 특수 효과, ‘필터링’을 발동하였습니다.
어?
그렇게 생각한 순간, 눈앞에 무언가가 튀어나왔다.
그것은, 안구가 있어야 할 자리가 텅 빈 채 피를 흘리는 인영이었다.
유령이 거꾸로 매달려 내 코앞에 얼굴을 들이밀었던 것이다!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켰으나, 유령의 희끄무레한 형체가 숨과 함께 빨려 들어올 것만 같아 나는 손으로 입을 막았다.
그런 나를 유령이 코앞에서 응시하고 있었다.
거꾸로 매달린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뭉개져 있었고, 마주한 얼굴이 가까워 텅 비어 버린 안구의 속이 보였다.
깊숙한 그 어둠 속에, 무언가가 꿈틀대고 있다.
수백 마리의 벌레와 ‘눈’이 마주친 순간 소름이 쫙 끼쳤다.
으…… 으악!
유령이다!
나는 뒤로 펄쩍 뛰었다.
님페의 바람 덕에 3미터는 더 날아갔는데, 다리에 힘이 빠져서 그대로 땅바닥에 뒹굴 뻔했다.
“아, X발!”
나는 겨우 땅바닥에 착지해 광검을 검집에서 빼냈다. 그러나 언제나 든든하게만 여겼던 스르릉, 하는 소리가 이렇게 연약하게 들릴 줄이야!
“필터링을 대체 어디다 했다는 거야!”
아니면 혹시 저게 필터링을 한 모습인 거야?!
너무 끔찍한 광경에 너무 놀라서 목소리가 나오는 것도, 행동도 늦었다.
꿈에 나올까 두려운 모습이었다.
이제까지 수도 없이 많은 시체를 봤고, 이미 끔찍한 광경에도 어지간히 익숙해졌다고 생각했는데, ‘저건’ 무언가 달랐다.
그저 보는 것만으로도 피부에 소름이 돋고, 손발이 차가워졌다.
내가 왜 이러는 거지?
심지어 앙겔루스의 가호는 제대로 정신 방어 메시지를 띄웠다. 아까 이우연을 볼 때 심장이 뛴 것도 그렇고, 내 신체에 무언가 문제가 생긴 것이 분명했다.
하지만 이 괴이한 현상을 찬찬히 생각할 틈은 없었다.
허공에 거꾸로 매달린 유령이 이빨이 하나도 남지 않은 입을 뻐끔거리며 내게로 천천히 다가왔기 때문이다.
이런 시스템 X발 새끼야, 유령은 몬스터가 아니라며! 아니라며! 이 개새끼야!
“무슨 유령이 언데드보다 더 무서운 거야!”
그러나 이번에는 나도 이를 악물었다. 겨우 이런 것 때문에 던전 공략이 막힌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지금 내가 이대로 실패라도 했다가는 아직 살아 있는 사람들도 다 죽어서 유령이 될 판이니까.
“젠장, 될 대로 되라!”
이를 악문 나는 유령을 향해 에이펙스의 광검을 뽑아 휘둘렀다.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이것뿐이고, 내 파트너는 나를 실망시킨 적이 한 번도 없었기에 나는 이번에도 내 검이 무언가를 해내 주리라 믿었다.
유령은 멍청하니 그 자리에 선 채, 휘둘러지는 검을 피하지도 않았다.
그저 자신에게로 날아오는 검을 보고 있을 뿐.
근력이 부족한데도 불구하고 놀라울 만큼 깔끔한 파공음이 유령의 신형을 갈랐다.
“아니…….”
하지만, 내 입에서 나온 것은 허무한 신음뿐이었다.
내가 믿고 있던 에이펙스의 광검이 투명한 유령을 그저 스쳐 지나갔기 때문이었다. 손에도 무언가를 베었다는 감각이 전혀 전해지지 않았다.
아니, 너 성검이잖아! 성검이라면 유령 정도는 퇴치할 수 있지 않냐?
그러나 언제나 든든했던 내 파트너는 묵묵부답이었다.
에이펙스의 광검은 아무런 반응도 없습니다. 단순한 검인 모양입니다.
이런 X발!
아무런 대비책도 없는 내게 텅 빈 시선, 움직이는 입, 푸른 색깔의 몸, 천천히 뻗어지는 희고 반투명한 손이 다시금 내 볼을 향해 다가왔다.
입술도 이빨도 없는 입이, 까만 목구멍이 보일 정도로 크게 벌어졌다가 다물어지고, 그리고 다시 벌어졌다.
무언가를 말하려는 건가……?
잠시 시선을 두니 유령이 서서히 고개를 기울였다. 공허한 시선, 뻗어 오는 손길, 쉴 새 없이 움직이는 입.
내가 좀 더 자세히 보려던 그다음 순간.
성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등지고 있는 그 유령의 뒤로 족히 수백…… 아니, 수천은 될 듯한 유령들이 일제히 저마다 머리를 빼꼼히 내밀었다.
그 광경에 다시 비명이 터져 나올 뻔했다.
- ‘필터링’이 발동 중입니다.
그러니까 대체 무슨 필터링인데!
모든 유령의 시선이 나에게로 집중되었다.
어느 유령은 비명을 지르듯 입을 벌리며 하나밖에 남지 않은 다리로 뛰어왔고, 또 누군가는 내 발목을 잡으려 두 팔로 기어 오고, 또 누군가는…….
“으아아아아아!”
결국 비명을 지르고야 말았다. 이런 미친!
나는 빠르게 님페의 바람을 이용해 높이 뛰었다.
최대한 땅을 밟지 않고 멀리 뛰며 성으로 이어지는 큰길을 달려가는데, 수많은 유령들이 들리지 않는 비명을 지르며 내게 손을 뻗어 왔다.
반투명한 손길이 발에 닿을 때마다 발목에 시린 감각이 전해져 왔다.
한참을 달려 겨우 내성(內城) 앞에 섰을 때야 뒤를 돌아보았다.
다행히 유령들은 나를 쫓아오지 않았다. 대신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이쪽을 바라보거나, 손을 뻗고 있을 뿐이었다.
마치 무언가를 바라기라도 하듯이…… 대체 무엇을?
그래도 유령과 조금 거리를 둔 덕분인지, 멀리서 보는 반투명한 형체들이 아까만큼 두렵지는 않았다.
일단은 한숨 돌렸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저 유령들은 처리해야 하는 몬스터도 아니라고 하고, 딱히 내게 해를 끼칠 수도 없는 것 같으니 내버려 두는 게 낫겠다.
지금은 빨리 다른 헌터들부터 찾아서 공략을 진행해야…….
그렇게 생각하며 거리를 살피는 내 등 뒤로 누군가의 손길이 닿았다.
이번에 닿은 감촉은 확실한 실체를 가진 무언가.
소용없다, 는 것을 알면서도 검자루에 손을 올린 채 아주 천천히, 천천히, 고개를 돌렸다.
피투성이가 된 여자의 얼굴이 쇠창살로 된 문 사이로 빼꼼, 내밀어져 있었다.
으, 으아……!
“어? 잘못 본 건가 했는데, 역시 그쪽……!”
나를 보고 반갑게 인사하려던 여자가 깜짝 놀라 내 입을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저기, 피 나는데요. 혀라도 깨물었어요?”
……그래, 비명 지르려다가 혀를 깨문 거니까 좀 내버려 둬라.
그런데, 아니.
나는 던전 입장 후 처음으로 만난 산 사람의 얼굴을 보고 당황하고야 말았다.
“……임미솔 씨?”
저 사람, 헌터 스토어 본점에서 내 아이템을 바로 샀던 그 미친 한의사 아니던가?
어째서인지 내가 부른 이름을 듣고 잠시 당황하던 여자가 아, 하고 탄성을 질렀다.
그녀는 얼굴만큼이나 엉망진창인 몰골인 손을 창살 사이로 내밀었다.
“임미솔은 정부가 관할하는 헌터 스토어 판매부 신입 이름이고요, 저는 이선이라고 해요. 정부 소속 헌터죠. 선이라고 부르세요.”
나는 황망한 얼굴로 당당할 것 하나 없는 상황에 당당한 태도를 취하고 있는 미친 한의사, 랭킹 4위의 이선을 바라보았다.
- 다섯 번째 밤 페이즈가 종료되었습니다.
- 여섯 번째 아침이 오기까지 대기 시간이 주어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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