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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30화 (31/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0화

“아, 헌터 스토어나 우리 정부 소속 헌터나 크게 보면 같은 ‘한국 헌터 산업 진흥원’ 소속이라 딱히 위장 취업은 아니고요. 가끔 그럴 때 있어요. 현장도 뛰어야 하고, 뛴 다음에는 포션 사용 내역이니 뭐니 서류 제출해야 하는데, 다 잊고 싶어서 타 부서에 놀러 가는 거죠.”

나는 이선의 설명으로 헌터 스토어가 정부에서 운영하는 공기업이라는 사실을 처음 알았다. 던전 클리어가 끝나고 밖으로 나가면 좀 더 자세하게 한국의 정보를 알아봐야겠다.

그건 그렇다 치고.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날 향해 씩 웃는 여자를 보니 어쩐지 맥이 탁 풀리는 느낌이었다.

“그래서…… 우연히 저를 만났다, 이거군요.”

“그날 고객도 많은데 갑자기 신입분이랑 연락이 안 된다는 거예요. 저도 감정 스킬은 있거든요. 그래서 대타 뛰어 준다고 했죠.”

그렇다는 건 나는 같은 날에 랭킹 4, 5위를 만났다는 게 되는 건가.

이게 우연일까?

나는 잠시 허공을 노려보았다. 시스템이 아무런 메시지도 띄우지 않아 하늘은 청명했다.

“그런데 대박 헌터님…… 아니, 헌터님은 어쩌다 여기에 오신 거예요? 이상하다, 입장하니까 인원 제한 뜨던데.”

나는 이선 헌터의 질문에 겨우 저 멀리 날아가려던 정신을 붙잡았다.

그래, 지금은 그 생각을 할 때가 아니다. 할 일이 많아. 나는 이선이 붙잡고 있는 쇠창살로 된 문을 눈짓했다.

“지원 온 겁니다. 일단 문부터 열어 주시죠. 들어가겠습니다.”

“어, 지원이요?”

이선은 어리둥절한 기색이었지만 일단 내가 문을 열 수 있도록 뒤로 물러섰다.

나는 문고리를 잡고 철문을 열었다.

끼이익.

오랫동안 쓰지 않아 녹슬어 버린 탓인지 소름 끼치는 소리가 났다.

“포션도 받아 왔으니 넘겨 드리겠습니다. 먼저 상처부터 치료하세요.”

“아, 이거요? 괜찮아요, 별거 아니라 내버려 둔 거니까. 이런 상황인데 포션은 아껴야죠.”

“아주 작은 상처라도 내버려 두면 감염의 위험이 있잖아요. 일단 치료하시고…….”

“그게 문제가 아니라서요, 지금.”

이선이 내게 고갯짓으로 한 방향을 보라고 가리켰다. 나는 이선이 가리키는 방향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높은 벽과 철창문 때문에 보이지 않았던 성안은 높은 풀이 우거지게 제멋대로 자란 정원이었다.

한때는 잘 꾸민 정원이었을 거라 짐작되지만, 지금은 그때의 흔적조차 남지 않은.

그 정원 한복판에 십 수 명의 사람들이 가지런히 일렬로 누워 있었다.

병원의 환자와 다른 점이라면 다들 땅바닥에 누워 있다는 것뿐이었다.

그것도 자세히 보니 맨바닥이 아니라 여기저기서 끌어모은 천이나 나뭇잎 등으로 바닥의 한기를 막고 있었다.

그중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몸 여기저기에 꽂혀 있는 침과…… 심지어는 뜸을 뜨고 있는 모습이었다.

이런 미친…… 하지만 내가 무어라 하기 전에 이선이 먼저 손을 내저었다.

“오해하지 마세요. 일단 소지한 포션은 다 써 봤는데 일어날 기미가 없어서 이거라도 써 보자, 한 거니까. 효과는 없는 것 같지만요.”

“……왜 이런 상태가 된 겁니까?”

“던전에 입장한 초반에는 멀쩡했어요.”

상황을 설명하는 이선의 표정이 씁쓸했다.

“물론 클리어 조건이 ‘섬멸’로 바뀌었고, 던전 내의 환경도 완전히 바뀌기는 했지만, 그래도 처음 마주쳤던 들판 쪽의 몬스터는 별거 없었거든요. 제가 감당 가능할 정도로.”

하기야 이선도 랭킹 4위나 되는 헌터이니 한국에서는 손꼽히게 던전 클리어 경험이 많은 사람이다.

어쩐지 들판에 몬스터가 하나도 없다, 했더니 이미 다 처리했던 모양이다.

“그런데 아무리 찾아봐도 들판의 몬스터는 더 나타나지 않는데 클리어가 안 되는 거예요. 그래서 성안으로 들어왔죠.”

그렇게 말하며 이선이 가장 앳되어 보이는 얼굴을 한 헌터의 곁에 무릎을 꿇고선 이마에 손을 대고 열을 쟀다.

걱정하는 기색이 역력했다.

황당해 보이기는 하지만 침을 놓은 것도, 뜸을 뜬 것도 결국은 무슨 수라도 써 보려는 발악이었을 거다.

지금도 본인 스스로 소용이 없다고 말했으면서, 내게 건네받은 포션을 기절한 헌터의 입속에 조금씩 붓기 시작했다.

“헌터님도 들어오셨으니 아시겠지만…… 아, 성함이?”

“……강예나예요.”

“예나 씨도 아시겠지만, 성내 필드에 진입하면 외곽 부분에서는 유령이 출몰하죠. 그런데 유령은…….”

“예, 몬스터가 아니더라고요. 설마 유령 때문에 놀라서 다들 기절한 건 아니죠?”

“놀라기는 했지만 제가 빠르게 이동 마법을 써서 곧장 피할 수 있었어요.”

나는 왜 마법을 못 배워서.

이선의 설명은 계속되었다.

“그런데 그게 실수였나 봐요. 보이는 곳이 이 내성(內城)이기에 이쪽으로 이동했는데…… 처음에는 몬스터를 찾으려고 조를 짜서 성안을 돌았죠.”

“설마, 없습니까?”

“아무데도요.”

이선의 말을 듣고 나는 거대한 성을 올려다보았다.

확실히, 살아 있는 무언가가 있으리라고는 짐작되지 않는 고요함이었다.

마치 사장된 무덤 속에 있는 것처럼.

“그럼 몬스터도 없는데 왜 다들 이렇게 된 거죠……?”

“그걸 저도 모르겠어요.”

그렇게 말하는 이선의 얼굴은 어두웠다.

“시작은 한 명이 불침번을 서다가 홀린 것처럼 혼자 성안으로 들어간 것이었어요. 잠깐 눈을 뗐을 뿐인데…… 성안에서 쓰러진 채 발견됐어요. 아무리 주의를 주어도 계속됐고, 심지어 한 명은 실종이 되어서 찾을 수도 없고…….”

“잠시만요.”

나는 그녀의 설명에서 위화감을 느끼고 손을 들었다. 이선이 의아하게 나를 바라보았다.

“왜 그러시죠?”

“불침번이라니, 대체 언제요?”

내가 알기로 이 던전의 이상 현상이 발견된 건 바로 오늘이었다. 김숙자의 말도 그렇고, 이선이 헌터 여러 명과 함께 던전에 들어온 것은 분명 그리 오래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선이 내 말에 건조한 웃음을 흘리며 바닥을 가리켰다.

바닥에는 검으로 그은 듯한 자국이 있었다. 바를 정(正)자가 하나, 둘…… 셋이 되기 전 하나가 모자라다.

“던전 내와 밖의 시간 흐름이 다른 모양이네요. 우리는 이미 여기서 2주를 보냈거든요.”

나는 잠시 할 말을 찾을 수 없었다.

그야 고위급 던전이라면 클리어 기간이 오래 걸리는 경우는 드물지 않다. 또 던전은 기본적으로 밖과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라 시간의 흐름이 다른 경우는 나도 몇 번 겪었다.

하지만 이렇게 대비도 없이 들어와, 경험이 없는 신입 헌터들 열아홉 명을 지켜 내야만 한다는 책임감에 홀로 2주일을 시달렸다니.

그렇지 않아도 정신적 압박감이 심했을 텐데, 심지어 성 밖 거리로 나서면 유령들이 보이고, 지켜야만 하는 사람들은 이유도 없이 쓰러져 일으킬 방법도 보이지 않는다.

나는 이선의 머리에 난 상처를 바라보았다. 몬스터도 나타나지 않았고, 헌터들 사이의 내분도 없었다.

그렇다면 저 상처를 만든 사람은 단 하나였다.

바로 본인.

생각해 보면 저렇게 경험이 많은 헌터인데도 이선은 도중에 ‘인원 제한’의 조건 변경이 일어났음을 알아차리지 못했다.

저렇게 웃고 있지만 스스로 머리를 찧어 가며 정신을 바짝 차리려 노력했을 거다.

얼마나 절박한 심정이었을까.

무어라 말해야 좋을지…….

말재주가 없는 탓에, 나는 겨우 한마디 짜내는 것이 고작이었다.

“……고생하셨어요.”

그 말에 이선이 씩 웃었다.

“뭘요.”

나온 대답도 겨우 한마디. 그뿐이었지만 그간 이선의 심정이 어땠을지 무겁게 전해져 왔다.

이선이 분위기를 환기하려는 듯 박수를 한 번 짝, 쳤다.

“자, 그럼 여기 설명은 끝났고. 이제 예나 씨 설명을 좀 듣고 싶은데요. 어떻게 들어오셨죠?”

나는 이선에게 대략적인 설명을 했다.

이선은 히든 클리어를 해서 밖으로 나왔다는 신입의 말에 반색을 했고, 내가 들어온 경위를 듣고 나서는 의외라는 표정이었다.

“여울 씨네요. 실종되어서 반쯤 포기하고 있었는데 밖으로 나갔다니 다행이에요. 그리고 예나 씨 진입은…… 숙자 교수님이 용케 허락하셨군요.”

“던전 내 입장한 최대 업적자, 혹은 최강의 헌터에게 가장 위협적인 몬스터가 출현할 확률이 높다는 말을 믿으셨으니까요.”

그 말에 이선이 고개를 끄덕였다.

“예나 씨가 최초로 말을 꺼냈을 뿐 다들 어렴풋이 느끼고 있긴 했을 거예요. 저도 그렇고요. 돌발성 던전에서 살아남은 헌터 자체가 적다 보니 표본 조사는 해 보지 못했지만…….”

이선은 그렇게 말하며 고개를 기울였다. 그녀의 시선은 음침해 보이는 성을 훑고 있었다.

2주나 갇혀 있었던 것과 다름없는데 이선의 눈빛은 아직도 죽지 않았다. 나와 마주친 그녀의 눈은 절망 대신 반드시 이 상황을 타파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담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번에는 애초에 제대로 된 몬스터가 출현하지 않았어요. 혼자가 된 후로 실마리를 찾으려고 몇 번이나 성안을 탐험해 봤지만 아무것도…….”

“아뇨, 이 정도면 충분합니다.”

처음에는 나도 당장 몬스터가 출현하지 않기에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패턴이라 당황하기는 했지만, 이선의 말을 듣다 보니 짐작이 가는 구석이 있었다.

먼저 던전 히든 클리어 후 넋이 빠진 사람처럼 아무 말도 하지 않는 헌터. 그리고 눈을 뗀 사이 홀린 것처럼 한 명씩 성으로 들어간 헌터들.

그들은 정신을 잃은 채 성안에서 발견되었으나 이선이 들어갔을 때는 몬스터의 흔적이 없었다.

결국은 가장 강한 이선을 기준으로 마법사가 다루기 까다로운 던전이 구성되었을 테고, 던전이 플레이어에게 맞춰 클리어하기 가장 까다로운 조건으로 형성되는 것을 생각해 보면 나올 답은 정해져 있다.

만일 나 대신 이우연이 들어왔다면 정말로 전멸이었을지도 모르겠다.

나는 생각을 정리한 후 이선에게 물었다.

“그 전에 먼저 확인할 게 있습니다. 혹시 시스템에서 ‘포지션’을 정하라는 메시지가 떴나요? 아마도 공성(攻城), 수성(守城)으로 나뉘었을 듯한데.”

“음? 아니요, 그런 건 보지 못했어요.”

그렇다면 ‘포지션’ 자체는 성을 물리적으로 공격해야만 뜨는 메시지인건가.

하긴 이선은 헌터들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니 함부로 움직이지 않고 신중했을 것이다.

던전 내의 무언가를 손상시키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이것저것 시험해 보지는 못했겠지.

물론 이번 경우 그 ‘신중함’이 약간의 족쇄가 되어 실마리를 전혀 잡지 못했던 것 같지만…… 그래도 이선은 앞으로 포지션을 선택할 기회가 남았다는 거니, 긍정적인 일이었다.

한동안 침묵하는 나 때문에 안달이 났는지 이선이 약간 조급하게 물었다.

“저, 실마리가 있다면 빨리 말씀해 주지 않으실래요? 다들 쓰러진 지 꽤 오래되어서 빨리 치료해야…….”

“확실히, 그건 그러네요.”

나는 에이펙스의 광검을 꺼내 들어 바닥에 누워 있는 헌터 하나를 겨누었다.

칼날이 날카롭게 반짝였다.

“빠르게 처치해야 한 명이라도 더 가능성이 생길 테니.”

이선이 깜짝 놀라 내 검을 쳐다보았다.

“저, 저, 잠깐만요! 예나 씨! 무슨 일을 하시려고……?”

나를 막으려고 바닥에 던져두었던 긴 스태프를 급하게 잡은 이선이, 그다음 순간 일어난 현상에 침묵했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당신의 의지에 반응해 성검으로 진화합니다!

눈부시게 빛나는 흰 검날이 순식간에 바닥에 누운 헌터의 몸에서 뻗어 나오는 검은 기운에 휩싸였기 때문이다.

검은 연기처럼 솟아오른 그것은 검을 휩싸고 자루를 쥔 내 손까지 올라오려 했지만, 나는 검을 털어 연기를 흩어 버렸다.

연기는 힘없이 공중으로 흩어져 사라졌다.

청명한 햇살이 비추는 허공에 기대하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원통한 기억’을 간파하였습니다.

- 앙겔루스의 가호가 ‘저주’를 방어하였습니다.

역시.

나는 경악한 이선을 돌아보았다.

흔들리는 시선과 마주쳤다.

이선은 비록 내게 보이는 시스템 메시지를 볼 수는 없겠지만, 저 검은 기운 자체는 보았을 거다.

“저건 설마…….”

“그래요, 저주입니다.”

나는 고개를 올려 거대하고 낡은, 버려진 성을 바라보았다.

먼 옛날, 언젠가는 고고했을 성은 이미 무너져 폐허가 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무언가가 아직도 저 안에 살아 있다.

“이들은 성안에서 ‘건드려서는 안 될 것’을 건드린 겁니다.”

그래, 마치 물레의 바늘에 찔려 잠든 공주처럼.

- 여섯 번째 아침이 오기까지 대기 시간이 주어집니다.

- 00:20: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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