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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33화 (34/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3화

그렇게 말한 지 겨우 20분 후.

“아니, 이거 할 수 있는 거 맞냐?”

나는 성벽 너머의 풍경을 보며 아연하게 중얼거렸다.

옆에서 엘리사라는 이름의 기사가 퉁명스럽게 딱 한마디로 대꾸했다.

“그러니까 단장님이 바보죠.”

“이런 씨…….”

일부 기억이 계승될 뿐이라더니, 정말로 내가 이어받은 것은 일부 기억뿐이었다.

성의 현 상황은 아주 처참했다.

수성전의 기본은 버티는 것이다. 버티는 것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식량인데, 이미 외부의 공격을 받은 지 6개월이 넘었다.

정확히 말하자면 공격은 총 두 번 있었다.

첫 번째는 한창 농사를 지었어야 할 여름에 시작되었고, 당시 수성에는 성공하였으나 그해 농사는 완전히 끝장났다.

그 후 두 번째 공격은 그나마 남은 농사의 추수를 끝마쳐야 하는 가을에 다시 시작되어 겨울인 지금에 이른다.

식량이 바닥날 만도 했다.

그나마 지금까지 버텨 왔던 것은 이 성이 본래 가지고 있는 고고한 성벽과 깊은 해자, 성 뒤를 감싸는 천혜의 성벽인 험한 산.

그리고, 놀랍게도 아직까지 병사들의 통솔력을 잃지 않았다는 것이다.

이 점을 더 알고 싶어 부단장이라는 엘리사에게 이것저것 캐물었는데, 엘리사의 말은 대부분 시스템의 ‘시간 편차’ 운운하는 메시지에 가로막혀 제대로 들리지 않았다.

추측하기로는 아마 아까 전 원탁에 둘러앉아 있던 기사들의 공이 컸던 모양인데…… 결국 나는 이 시간대의 사람이 아니라는 것 때문인지, 시스템이 판단했을 때 미션에 불필요한 정보는 모두 차단되는 모양이다.

“흥.”

대체 무슨 수작인지 모를 일이다. 어차피 나는 이 시간대의 사람들과 함께 성을 지켜야 하는 입장이니 정보 정도는 충분히 줘도 되는 거 아닌가.

하여간에 그런 이유로 지금 내가 알고 있는 것은 식량은 바닥났지만 성벽과 해자가 아직 제 기능을 한다는 것, 약 6천 명 정도에 달하는 병사들의 사기가 떨어지지 않았다는 것.

그 정도다.

그리고 지금 내 눈앞에 펼쳐진 적군. 그들이 드넓은 벌판을 뒤덮고 있었다.

어림잡아서…… 십만 정도일까?

“아, 3일 전까지만 해도 겨우 이만 명이었으니 해볼 만했는데요. 이 성 하나 잡자고 저렇게까지 총공세로 나올 줄이야.”

데이먼 오닐이 옆에서 촐싹댔다.

그런 데이먼을 엘리사가 눈빛 한 번으로 제압하는 것이 보였다. 데이먼은 야단맞은 강아지처럼 풀이 죽었다.

“아까 전 모두의 앞에서는 헤이든 경을 책망했습니다만.”

엘리사가 천천히 진중한 목소리로 말했다. 꼿꼿한 허리는 굽혀지지 않았으나 적군을 바라보는 눈빛은 냉정했다.

“성민들 사이에서도 항복하자는 의견이 나오는 것은 사실입니다. ■■가 친히 성문을 열고 항복한다면 목숨만은 살려 주겠다, 약조하였으니.”

■■.

노이즈가 낀 듯이 그 부분은 들리지 않았지만 아마도 적군의 대장 이름쯤 되려나.

나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데도 그건 일부고, 항복하지 않아야 한다는 의견이 대다수라는 것 아니야.”

“그 약조가 과연 사실이겠습니까? 무지한 성민들도 믿지 않는 이야기입니다. ■■는 여기로 도망쳐 온 이들을 군대를 이끌고 쫓아온 집요한 자인데. 분열을 일으키려는 수작이겠죠.”

엘리사 옆에 서 있던 데이먼도 한마디 거들었다.

“투항하는 순간 학살을 시작할 게 뻔합니다. 누구 하나 살아남지 못할 겁니다.”

그건 실제로 일어난 일이다.

나는 유령의 성 외곽의 풍경을 떠올렸다.

물론 지금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는 꼴이었으나, 외곽에 있던 집에서 나온 숫자를 생각해 보면 그들은 분명히 군사가 아니었다.

나도 타르토스에서 의도치 않게 전쟁에 몇 번 끼게 된 적이 있었는데, 투항했는데도 적군을 체포하는 것에서 그치지 않고 일반인까지 죽이는 것은 대대로 손가락질을 받을 만한 일이었다.

아마도 이 기사단장은 백성들의 목숨을 살리려고 이때 즈음 투항을 했겠지.

그러나 목숨을 살려 주겠다는 약조는 지켜지지 않았고 모두가 잔인하게 학살당했다.

투항하는 순간 기사의 명예는 바닥에 떨어지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그 명예를 버리고서라도 성민들의 목숨을 지키고자 했던 것인데, 그조차 지켜지지 않았다.

그걸 도저히 견딜 수 없었던 거겠지.

뭐, 그래도 긍정적으로 생각하자. 그리고 무엇보다도 내가 본래 기사단장보다 나은 점이 있었다.

바로 내가 버텨야 하는 시간이 이틀밖에 되지 않는다는 것.

- 해당 미션에는 제한 시간이 있습니다. 여덟 번째 밤이 오기 전 미션을 클리어해야 합니다.

물론 시스템이 여덟 번째 밤을 지정한 이유가 있으리라고 짐작되긴 하지만, 어쨌거나 여덟 번째 밤 이후로 이 미션은 이어지지 않는다.

그러니 장기전으로 이어질 상황은 고려하지 않고 총력을 기울여도 된다.

“■■가 제시한 투항 기간은 3일입니다. 오늘 점심까지 성문을 열지 않는다면 공격이 시작될 겁니다.”

엘리사가 그렇게 말했다.

나는 긴 한숨을 쉬었다. 고민에 빠져 있을 시간도 길지 않다.

“그럼 결국 싸울 수밖에 없네.”

어차피 내가 여기서 뭘 해도 본래 벌어졌던 참혹한 비극이 바뀌는 건 아니다.

내가 해야 할 것도, 할 수 있는 것도 이틀간 최선을 다하는 것뿐.

나는 성벽 너머 적군에게서 고개를 돌렸다. 엘리사가 내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어차피 이 싸움은 길게는 못 가져가. 식량이 부족하다는 건 저쪽도 알고 있으니까.”

“예.”

“병력이 부족하니 성민들 중 싸우겠다는 자가 있으면 가리지 말고 뽑아서 꾸리도록 해. 돌덩이를 던지든, 끓는 기름을 붓든 할 수 있는 일이 있을 테니.”

그 말에 언제까지고 무뚝뚝하게 있을 것만 같던 엘리사가 약간 미소를 띠었다.

“단장님께서 결심하셨다면 모두가 나설 겁니다. 모두 ■■의 결정에 불복해 ■■ 님과 성주님. 그리고 단장님을 따르는 사람들이니까.”

이렇게 들으니 사정이 더 궁금해지잖아. 그러나 시스템은 가차가 없었다.

데이먼이 내게 물었다.

“그럼 헤이든 경은 어떻게 할까요?”

“지하 감옥에라도 가두고 약물로 깊이 재워라. 셋 이상의 출신이 다른 병사를 선별해 감시하게 하고, 수상한 기색이 있으면 곧바로 처리해.”

겨우 이틀간 대리전을 치르게 된 것뿐이지만 뻔히 보이는 불안 요소를 방치할 필요는 없지.

“존명.”

내 말을 들은 엘리사와 데이먼이 예를 취했다.

이의는 없어 보인다. 헤이든이라는 자가 기사들 사이에서도 어지간히 인망을 잃었든가, 혹은 반대로 기사단장이 상당히 존경받는 인물이거나.

“그럼 나는 이제 성벽의 다른 곳을 점검하러…….”

전투를 하려면 지리 정도는 알아 두어야 하니 걸음을 옮기려는데, 그렇게 말하는 순간 흰색의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응? 그럼 지금 이런 말을 하는 건 해당 인물로서 적절하지 않은 행동이라는 뜻인가?

아니, 그럼 어떤 행동이 적절한 건지 알 수 있게 제대로 기억이라도 이어 주든가.

이런 시스템 미친 새끼…… 혼자서 마구 욕설을 퍼붓고 있는데 데이먼이 의아한 어조로 내게 물었다.

“어, 단장님. 개전하기 전에 성주님을 뵈러 간다고 하시지 않았습니까?”

“아…… 그렇지.”

이런 식으로 알려 주는 거군.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지금 갈 거야. 그럼 수고해라.”

“넵.”

엘리사와 데이먼은 각자 내 명령을 수행하러 빠른 걸음으로 성벽을 내려갔다.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행동해야 합니다.

흠, 성주를 만나러 가는 게 이 인물다운 행동이다, 이 말이지.

그렇지만 드디어 엘리사와 데이먼이 곁에서 떨어졌으니 자유행동을 시도할 만한 귀중한 시간인 것도 분명했다.

물론 유령들의 저주를 해주하는 것도 중요한 미션이기는 했지만 나는 어느 이름 모를 기사단장이 아니라 강예나고, 이 던전에 들어온 애초의 목적을 잊지 않았다.

진입한 헌터들이 저주에 걸린 채 이곳에 있을 것이 분명했다.

그들을 먼저 찾아야 했다.

문제는 그들도 이 시간선의 인물로서 행동하고 있을 테니 찾기가 쉽지 않다는 것이지만, 아까 전 엘리사와 데이먼의 말을 듣고 있자니 떠오른 방법이 있었다.

“소지창.”

시스템이 곧장 소지창을 띄웠다. 나는 허공에 떠오른 소지창을 빤히 바라보았다.

시스템은 내 말에 즉각 반응했으나 내가 받은 기사단장의 기억에 따르면 이 세계에는 ‘시스템’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도 마법이나 검기 따위의 힘이 있기는 했다. 적군 마법사가 다루는 공격 마법에 고생했던 기억이 단편적으로 남아 있으니까.

또 기사단장도 시스템상 스킬로 분류되는 힘이 있었던 모양이고.

하지만 비슷한 시대상인 타르토스와 비교하자면 그런 힘을 다루는 인물은 아주 드문 숫자에 불과했고, 한국과 비교해 보아도 그 위력은 강력하지 않았다.

내 입장에서 볼 때 이건 분명한 이점이기는 했다.

“……그러니 공성 포지션 쪽이 훨씬 쉬울 거라는 계산을 한 사람도 있을 텐데.”

그래서 고민이 되었다.

이선이 끌고 온 신입 헌터들은 대부분 마법사라고 들었다. 다들 자신의 마법이 이 세계에서 강력하다는 것도 알았을 테고.

그러나 수적 차이는 너무도 기울어 있었다. 몇 명의 마법만으로는 이 절망적인 상황을 쉽게 전복시킬 수 없다는 것도 깨달았을 것이다.

그러니 내가 빙의한 기사단장처럼 ‘항복’이 금지 행동이 아니라면 공성 포지션으로 옮겼을 가능성도 컸다. 히든 미션을 클리어해 빠져나온 헌터도 아마 그런 식으로 클리어했을 테고.

그러나 공성 포지션을 선택하면 개인의 목숨은 살릴 수 있지만, 던전 클리어는 할 수 없다.

공성이 어쩌고 할 때부터 이런 상황이 벌어졌을 거라고는 생각했지만, 이런 종류의 던전은 진짜 머리가 아프다.

그냥 몬스터를 하나 두고 쳐부수라고 하는 게 낫지.

하여간 해당 인물로서 행동하라는 지시가 있는 이상, 내가 적극적으로 다른 헌터들을 찾아 나설 수는 없다.

그러나 적어도 다른 헌터들에게 경고는 해야 했다.

던전 클리어는 내가 할 테니까, 설령 공성 포지션을 선택했더라도 내가 클리어할 때까지 가만히 있으라고.

던전 자체가 클리어된다면 무슨 포지션이라도 이 던전에서 나갈 수 있을 테니까.

다만, 내 검이 그들을 피해 가리라는 법이 없다는 게 문제인데…… 그런 걸 미리 걱정해 봤자 소용도 없겠지.

어쨌건 최선을 다하는 수밖에.

나는 일단 시험 삼아 크게 외쳐 보았다.

“시스템, 헌터, 포지션!”

- 시간의 편차로 인해 정보가 일부 제한됩니다.

역시.

성벽을 내려가던 중인 엘리사와 데이먼은 내가 이렇게 크게 소리쳤는데도 뒤를 돌아보지 않았고, 내 곁을 지나치던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마치 아무것도 들리지 않는 것처럼 보였다.

내가 엘리사의 말을 제대로 듣지 못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이들에게는 내 말이 들리지 않는다. 이 시간에는 존재하지 않는 단어니까 시스템상으로 차단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 시간대에 존재하는, 나와 같은 시간대의 인간에게는 내 말이 들리겠지.

나는 씩 웃었다.

그렇다면 방법은 간단하다.

“절규하는 인어의 나팔을 장비한다.”

이윽고 내 손에 푸른색의 빛이 깃들었다.

어쩔 수 없는 부분은 제외하더라도 최대한 헌터들만 알아들을 수 있는 말로 전해야 했다.

나는 입에 손을 모아 손나팔 형태를 만든 후 하늘로 고개를 들었다.

뭐, 내 말을 알아들을 헌터들의 귀가 좀 터지겠지만 내 검에 죽는 것보다야 낫지 않겠어?

듣고 웃는다면 금상첨화고.

*   *   *

“어?”

화살촉을 갈고 있던 혜원이 고개를 들었다. 옆에서 집 벽을 부수고 쓸 만한 돌멩이를 주워 등 뒤의 가방에 넣고 있던 수현도 고개를 들었다.

“방금 들었어?”

“응, 너도?”

“이렇게 큰 소린데 못 들을 리가 없잖아.”

“메리, 수잔. 뭘 하는 거야? 잡담하지 말고 일하자고!”

“아, 네. 알겠어요.”

클레어의 활기찬 목소리에 대답하며 혜원과 수현은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아무래도 다른 사람들은 못 들은 것 같지?”

“응, 우리만 들은 것 같아. 그렇다면 이거…….”

혜원은 화살과 모은 돌멩이를 수거하러 다가온 병사를 보고 말을 멈췄다.

병사가 멀어지고 난 후, 혜원과 수현은 다시 속닥이기 시작했다.

“이선 헌터님인가?”

“그러기엔 목소리가 다르지 않았어?”

“그건 그런데…… 올 사람이 없잖아. 인원 제한이 있으니까.”

둘은 고개를 갸웃했다. 하지만 메시지의 발신인은 불분명해도, 전한 내용은 짧고 분명했다.

물론 메시지에 이상한 단어가 섞여 있기는 했지만 현대인인 혜원과 수현에게 이해하기 어려운 말은 아니었다. 이 세계의 사람들이 알아듣지 못하게 암호로 쓴 것일 테다.

한동안 메시지를 곱씹던 수현은 결국 풉, 하고 웃음을 터트렸다.

혜원도 그랬다.

“수성은 치킨이나 뜯고 공성은 팝콘이나 먹으라니.”

“둘 다 가만히 있으라는 거잖아?”

“그러니까.”

결국 해석하자면 이렇다.

수성 포지션인 헌터는 가만히, 공성 포지션인 헌터는 피해라.

반드시 구하겠다.

혜원과 수현의 포지션은 수성이었다. 그들은 운 좋게 이 세계에서도 친분이 있는 사이로 빙의했고, 모습은 달랐지만 금세 서로를 알아보았다.

그래서 처음에는 둘 다 희망적이었다. 다른 헌터들을 모두 찾는다면 미션을 클리어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여기는 마법이라는 힘이 드문 것 같았고, 여덟 번째 밤까지만 버티면 된다고 하니까.

하지만 희망을 가진 것도 잠시였다.

이 미션의 관건은 여덟 번째 밤까지 수성에 성공하는 것.

초반 3일은 적군의 세력이 3만이지만, 4일 차부터는 10만으로 늘어난다.

드넓은 평원을 메운 십만 대군을 보니 불가능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심지어 다른 헌터들은 아무리 찾아도 보이지 않았다.

3일 차가 되기 전에 어떻게든 막아 보려고 했지만, 단 두 명이서 어떻게 해 보기에는 역부족이었다.

그렇게 여덟 번째 밤이 찾아올 때까지 그들은 수성에 실패했다.

몇 번이고.

그래서 포기하고 있었는데.

메시지를 들은 순간 그간 절망으로 가득했던 마음이 금세 기대를 먹고 웃음과 함께 희망이 뭉게뭉게 자라기 시작했다.

이선이 왔더라도, 아니, 누가 왔더라도 이 상황은 절망적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데도 감정이 요동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정말로 누군가 우리를 구하러 온 거야.

두 사람은 흔들리는 시선으로 하늘을 바라보았다.

구름 한 점 끼어 있지 않은 청명한 하늘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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