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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35화 (36/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5화

첨탑을 내려오자 이미 해가 중천에 떠오르고 있었다. 엘리사를 비롯해 원탁을 두르고 서 있던 기사들이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엘리사가 간략하게 보고했다.

“저쪽이 예고한 시간이 지나 적군이 전진하였습니다. 사열을 마치고 곧 개전할 것으로 보입니다.”

“성벽의 병사 배치는?”

“말씀하신 대로 전군, 전방 성벽을 위주로 배치했습니다. 무기도 최대한 준비하였습니다.”

엘리사의 보고가 끝나자 곁에 서 있던 기사 중 하나가 걱정스러운 듯 내게 말을 걸었다. 머리가 새하얗게 센, 나이가 지긋한 편인 기사였다.

이름은 미구엘 보일.

“그러나, 괜찮으시겠습니까? 이 작전대로라면 단장님이 질 부담이…….”

말이 길어지려 하기에 나는 고개를 저어 그의 말을 끊어 냈다.

“다른 방법은 없어.”

지금 성의 상황과 미션 제한 시간을 미루어 볼 때 내가 선택할 수 있는 방법은 어차피 제한되어 있었다.

이 성의 성벽은 거의 기복 없이 높고 뒤에는 산이 있어 방비에 좋지만, 약점이 있다면 그것은 인원에 비해 지켜야 할 성벽이 너무 길다는 것이었다.

겨우 6천 명의 병사로는 모든 성벽을 방비하는 것에 한계가 있다.

성민들을 동원하더라도 완벽한 방어는 어차피 무리였다.

저쪽이 십만의 숫자로 해자를 넘어 성벽을 오르기 시작한다면, 분명히 뚫리는 곳이 생긴다.

어디라도 뚫려 성안으로 침입하는 것을 허락한다면 그다음은 순식간이다. 이틀은커녕 두 시간도 버티지 못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여러모로 끝장이었다.

이미 죽은 유령들의 원혼을 풀어 주는 것은 고사하고, 여기에 들어와 있는 이선을 포함한 헌터들도 죽을 확률이 높았다. 그리고 아직 살아 있는 대한민국 신촌에 있는 사람들이 죽어 나가겠지.

나를 믿고 맡긴 김숙자 교수나 이우연도…… 죽지는 않겠지만 고생할 테고.

그러니까, 무슨 일이 있더라도 수성을 성공시켜야만 한다.

그러기 위해서는.

“내가 나간다.”

엘리사가 무언가 말하려는 다른 기사를 제치고 나섰다. 숲을 담은 눈은 타오르듯 강렬하게 나를 노려보고 있었다.

어이쿠, 거의 찌르겠는데.

“단장님의 뜻은 알겠습니다. 그렇다면 저도 함께 가겠습니다. 가게 해 주십시오.”

“그럼 유사시에는 누가 지휘를 하지, 부단장?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마라.”

엘리사가 입술을 깨무는 것이 보였다. 그러나 반박은 하지 않았다. 현 상황에서 이것이 가장 효율적인 방법인 건 사실이다.

지금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해자를 넘어오는 적군을 전방에서 나서서 막고, 다 막지는 못하더라도 성벽에 도달하는 적군의 숫자를 최대한 줄이는 것이었다.

즉, 해자를 넘어 적군의 한복판으로 뛰어들고, 그들의 움직임을 교란할 최정예가 필요하다.

그래서 내가 선택한 방법은 나를 위주로, 날쌘 병사 오백 명을 뽑아 전방에서 적군들을 휘젓는 것이었다.

숫자는 아쉽지만 더 뽑는다면 성의 방비에 구멍이 뚫린다.

어차피 적군 입장에서도 다리를 모두 없앤 깊은 해자를 건너야 하는 부담은 크다.

그러니 애초에 처음 성을 향해 돌진하는 적의 기세를 꺾어 놓는 게 중요했다.

물론 숫자로는 절대적으로 불리하다.

하지만 전쟁이라는 것은 언제나 초반의 기세가 중요한 법이다.

압도적인 무력으로 적군의 기세를 꺾어 놓으려면 실제 가진 힘으로 보나 상징적으로 보나 내가, 그러니까 기사단장이 나가는 게 맞았다.

만일 시간이 있거나, 적어도 정보가 있다면 다른 방법도 있었겠으나…… 나는 시스템에 의해 모두 차단당한 상태다.

이래저래 생각해 봤자 결국 내가 서게 될 곳은 익숙한 전장이라는 이야기다.

뭐, 이쪽이 나도 간단하고 좋지. 복잡할 것 없이 그냥 검만 휘두르면 된다는 거 아니야.

아마 원래의 기사단장도 투항하지 않았더라면 나와 같은 선택을 했을 것임이 틀림없다.

나는 엘리사를 향해 씩 웃어 주었다.

“그런 표정 하지 말고 내 뒤를 지켜. 그럼 나도 살아서 성에 돌아올 수 있을 테니.”

울 것 같은 녹색 눈동자와 시선이 마주쳤으나 나는 고개를 돌렸다.

어차피 그 시선 너머에 있어야 할 것은 내가 아니다. 흉내도 적당히 내야지. 방금 첨탑에서 그 점을 분명히 깨달은 바였다.

“단장님, 말과 갑옷이 준비되어 있습니다.”

미구엘 경이 조용히 말했다.

“그래, 가지.”

기사단장의 갑옷은 이음새가 사슬로 된 풀 플레이트 아머였다. 좋은 갑옷이었으나 나와는 그다지 맞지 않았기에 사양하기로 했다.

무언가 말하려는 미구엘 경에게 나는 고개를 저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건 기동력이야.”

게다가 이들은 모르지만 내게는 시스템의 소지창 속에 있는 다른 훌륭한 장비가 많았다. 굳이 무거운 갑옷을 고집할 필요는 없다.

결국 미구엘이 물러섰다.

“그래도 말까지 사양하진 않으시겠지요.”

“그거야 당연하지.”

기사단장의 애마는 건장하고 갈기가 훌륭한 흑마였다. 말의 목을 쓰다듬자 흑마가 투레질을 했다.

내가 주인이 아니라는 걸 아는 건지, 모르는 건지.

홀로 안장에 오르려 하는데 어느새 곁으로 온 데이먼 오닐이 곁에서 무릎을 꿇고 다리를 내주었다.

“밟고 오르십시오.”

“……남의 허벅지 밟는 취향은 없는데.”

“부디.”

처음의 경박한 태도는 어디로 갔는지 보는 눈길이 하도 진중하기에 결국 그의 다리를 밟고 안장 위로 올랐다.

나를 안장에 올려 준 후 자리에서 일어난 데이먼이 씩 웃었다.

“저는 부단장도 아니니 따라가도 되겠지요? 제가 기사단 중 제일 날쌔다는 건 단장님도 인정하실 테고.”

“이미 배치를 정해 놓고서 내게 묻는 건 어디서 배운 버릇이지?”

“죄송합니다!”

언제 진중했냐는 듯 데이먼이 울상을 지으며 고개를 숙였다. 미구엘이 옆에서 파안했고, 엘리사는 끝까지 웃지 않았다.

저런…….

나를 태운 흑마가 천천히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마상 전투 경험은 별로 없어서 걱정했는데, 이 부분은 기사단장의 기억을 받은 덕인지 호흡이 잘 맞았다.

내성을 나가 외곽의 성문으로 향하는 길.

성안의 모든 이들이 길거리로 나와 있었다.

하나같이 모두가 나와 내 뒤를 따르는 기사들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묵례를 할 뿐이었는데, 조용하던 거리에서 누군가의 목소리가 높게 울려 퍼졌다.

너무 작아 잘 들리지 않던 목소리가 점차 그 소리를 키워 나가며 불어나기 시작했다.

무형의 무수한 목소리는 점차 정돈되어 하나가 되어 갔다.

성벽으로 부지런히 돌을 나르던 누군가는 허리를 펴고 입을 열었고, 검을 쥔 누군가는 하늘을 우러러보며 소리를 질렀다.

내 뒤를 따르는 기사들도 어느샌가 입을 열기 시작했다.

그렇게 모두가 하나의 노래를 반복해 부르고 있었다.

그들이 부르는 것은 짧은 노래였다.

낯선 가락, 낯선 가사.

성문 앞으로 도달할 때까지 그 노래는 몇 번이고 반복되었다.

어쩌면 최후의 말이 될지도 모르는데, 그들은 아까부터 모두가 한마음이라도 된 것처럼 같은 노래를 계속해서 부르고 있었다.

그건 마치 기도문을 읊는 것과도 같았다.

그것이 생애 마지막 말이 되더라도 후회 따위는 없다는 듯이.

신이시여

당신이 미처 돌보지 못한 자식이 여기 있나이다

지금 이 비루한 삶을 바치려 합니다

이 팔은 검을 휘두르기 위해

이 검은 무고한 목숨을 위해

이 목숨은 고결한 희생을 위해

그리하여 이 삶이

“……그리하여 이 삶이.”

나는 몇 번이고 반복된 그들의 노래를 함께 읊조렸다.

“온전히 내 것임을 증명하게 하소서.”

성문이 서서히 열리고 있었다.

도열한 오백 명의 병사가 비장한 표정으로 내가 지나갈 길을 틔워 놓고 있었다.

성문 위, 성벽에서 병사들이 모여 손을 흔들었다. 성문을 열고 해자의 다리를 내릴 준비가 된 것이다.

성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이랴!”

말에 박차를 가하자 흑마가 머리를 들어 힘차게 울었다.

나는 가장 먼저 열린 성문을 빠져나갔다.

님페의 바람을 쓸 때와는 또 다른 바람이 이마를 스치고, 높이 묶은 머리칼이 휘날리는 게 느껴졌다.

성문이 열리자 가장 먼저 보이는 것은, 저 해자 너머의 적군이다.

개전을 기다렸다는 듯, 저 너머에서 화살을 장비한 적군의 제1열이 보였다.

적군의 수장으로 보이는 자가 손을 올렸다.

일제히 화살의 시위를 당기는 것이 보였다.

어차피 아직 닿지 않을 거리인데, 위협사격을 할 모양이었다.

저쪽도 기선 제압을 할 셈인가.

그래, 어차피 인간이 하는 생각이란 게 다 똑같지.

내가 탄 흑마가 해자를 가로지르는 유일하고 좁은 다리를 달려 나가고, 적군이 쏘아 낸 화살이 하늘에서 비처럼 쏟아져 내리기 직전.

나는 에이펙스의 광검을 뽑았다.

이제 직접 보여 줄 때였다.

설령 하는 생각이 똑같더라도, 실제로 하는 행동은 얼마든지 다를 수 있다고!

- 에이펙스의 광검이 당신의 의지에 반응합니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성검으로 진화합니다!

내 부름에 가장 먼저 답한 것은 내 오래된 파트너였다.

- 에이펙스의 성검이 한계에 도달하였습니다.

- 당신의 마력이 급격히 소진됩니다!

시스템 메시지가 시야에 떠올랐으나 아무래도 상관없다. 어차피 단 한 번 검을 휘두르는 것으로 충분했으니까.

하늘에 별처럼 수놓아진 무수한 화살을, 하늘을 가를 듯 길어진 성검의 검날이 모두 쳐 냈다.

자신의 진영에서 고고히 서 있던 적군의 기사가 당황하는 것이 선명하게 보였다.

기선 제압은 이렇게 하는 거다, 멍청아!

“저게 대체 뭐야!”

내가 휘두르는 검에 베여 허공에서 힘을 잃은 화살이 바닥으로 힘없이 쏟아졌다. 그 광경에 적 쪽에서인지, 아군 쪽에서인지 모를 경악이 터져 나왔다.

그러나 내가 지금 기다리는 것은 다른 목소리다.

자, 무대는 준비했다.

이제 당신들이 내게 답할 차례야.

적군의 기사들이 병사 사이를 돌아다니며 빠르게 혼란을 수습하는 것이 보였다.

제2열이 1열과 자리를 바꾸어 시위를 장전하고, 창병이 앞으로 나서며 대열을 정비하고 있었다.

두려움을 모르는 흑마가 용맹하게 죽음으로 한발 더 나아간 순간.

-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용사의 의지가 당신의 영혼에 응답합니다.

드디어 목소리가 닿았다.

- 당신의 신체에 용사의 영혼이 깃듭니다! 용사 클래스 보정이 능력치에 적용됩니다. 상태창을 확인하십시오.

아니, 확인하지 않아도 괜찮다. 이 검을 휘두르는 팔에 힘이 돌아온 것이 느껴졌으니까.

나는 검을 든 채 등 뒤에서 나를 보고 있을 병사들을 향해 외쳤다.

“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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