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6화
동시에 성벽 위에서 뿔 나팔이 거대하게 울며 병사들의 함성이 들려왔다.
성벽 위에서도, 성문에서 쏟아져 나온 오백 명의 날쌘 기마병들이 소리를 지르며 각자의 무기를 머리 위로 들었다.
흑마와 함께 달려 나가는 내 눈앞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여섯 번째 낮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06:00:00
- 여섯 번째 낮부터 수성에 실패할 시 페널티가 주어집니다.
페널티가 주어진다는 메시지는 딱히 놀랍지도 않았다.
그래, 이래야 시스템답지!
그러나 당장 그 페널티를 신경 쓸 여유는 없었다. 애초에 나는 절벽 끝에 서 있었으니까.
적군 측에서는 1열에 섰던 궁수들이 2열의 궁수들과 자리를 바꾸고, 새로운 궁수들은 화살을 장전한 채 기사의 명령을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전과는 달리 이번에는 내가 사정거리에 들어오는 범위.
한 번 더 쏠까, 아니면 전열을 바꾸어 그 뒤의 창병을 내세울까?
나라면 조금 전에 본 그 광경을 확인해 볼 겸 한 번 더 일제 사격을 할 거다.
머릿속에서 그렇게 판단한 순간, 말 위에 올라탄 기사가 손을 들어 신호했다.
“쏴라!”
이번에는 첫 사격과는 달리 곡사가 아닌 직사로 화살 수백 발이 날아왔다.
“단장님!”
나를 따라 성문을 나섰던 데이먼이 뒤에서 기사단장을 애타게 찾았다.
애초에 처음부터 도발을 목적으로 나선 것이니, 모든 공격이 집중될 거라는 예상이야 당연히 하고 있었다.
만일 지금 선두에 선 것이 원래 기사단장이라면 고슴도치가 되었겠지만, 나는 다른 세계와 시간에서 온 사기캐였다.
나는 뒤를 돌아보는 대신 팔에 미리 장비해 두었던 암 실드를 펼쳤다.
- 날개 아래의 보호 활성화 시간 00:03:00
- 해당 아이템은 외부의 공격에 따라 활성화 시간이 짧아질 수 있습니다.
허공으로 투명한 바람의 날개가 거대하게 떠올랐다. 펼쳐진 날개가 날아오는 화살을 감싸 안았다.
첫 번째 화살을 쳐 낼 때처럼 한계까지 성검의 날을 늘리는 짓은 그야말로 기선 제압을 위한 것이었다.
두 번씩 할 필요는 없었다. 마력 소모도 크고.
그래서 미리 준비한 것이 이 날개 아래의 보호였다.
사실 원래 이건 타르토스에서는 잡템 중 하나였다. 이 아이템이 막아 주는 것은 물리적 충격뿐이었기 때문이다.
그것도 한 번 깨어지면 다시 복구하는 데 시간이 꽤 걸린다.
지금도 바람의 날개는 화살을 감싸 안는 동시에 시시각각 명멸하며 사라지고 있었다.
그렇지만 이 정도면 충분했다. 마법 공격이 없는 이곳에서는 사기꾼 같은 아이템이지.
역시 템은 모아 둬서 나쁠 게 없다니까.
보고 있냐, 루카스?
“우와아아아아!”
바람의 날개가 감싼 숱한 화살이 다시 한번 땅바닥으로 떨어진 순간 적군 측에서는 신음이, 아군 측에서는 흥분한 환호성이 터져 나왔다.
내 뒤를 바짝 따라와 붙은 데이먼이 소리쳤다.
“단장님! 대체 무슨 기적을 배워 오신 겁니까!”
눈동자는 찬탄으로, 목소리는 흥분으로 휩싸여 있었다. 저들에게는 내가 여전히 그들의 기사단장으로 보이겠지.
“농담할 여유가 있나?”
데이먼이 내 말을 듣고 크게 웃었다.
솔직히 이렇게 아이템을 활용하면 너는 누구냐, 식의 질문이라도 받지 않을까 했는데, 해당 인물로 행동하라는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는 걸 보면 내 아이템이나 스킬을 쓰는 건 괜찮은 것으로 판정되는 모양이다.
하기야 여기는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이고, 나는 미션을 수행 중이니까.
결국은 모두 내 능력치를 올리고 던전 브레이크를 막기 위한 일이다. 해당 인물로서 행동하되, 효율적으로 미션을 수행할 필요가 있었다.
나는 차분히 머릿속을 가라앉혔다.
두 번째 공격까지 무위로 돌아간 후, 나를 태운 흑마는 이제 해자의 다리를 건너 적군에게 돌진하고 있었다.
날개 아래의 보호 덕분에 뒤의 병사들도 아직 피해를 입지 않았다.
데이먼이 크게 외쳤다.
“이대로 어떻게, 저것들 다 눌러 버리는 마법은 없습니까?”
“그런 재주는 배운 적 없어. 부족해서 미안하군!”
정확히 말하자면 뺏겼지.
이제 아군과 적군의 거리는 무척 가까워져 있었다. 이대로 돌격하면 몇 분 후 적군과 부딪힌다.
목숨이 달아날지 모르는 상황인데도, 데이먼의 웃음소리가 말머리 위로 울려 퍼졌다.
“단장님의 부족한 부분을 메우는 게 저희 일이죠! 안 그러냐, 얘들아!”
“예!”
“그렇습니다!”
병사들의 우렁찬 고함이 들렸다.
내가 기선 제압을 확실히 했기 때문일까, 눈앞에 지금 우리의 숫자와는 비교할 수도 없이 많은 적군이 있는데도 아직 사기가 충만한 모양이었다.
그래, 이래야 나도 마력을 소모한 보람이 있지.
적군의 창병이 앞으로 나서 우리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훈련된 흑마는 날카롭고 뾰족한 창날에 겁먹지 않고 다음 발을 디뎠다.
나는 속으로 시간을 세었다.
50초, 40초, 30초…….
적군을 코앞에 두고 데이먼이 소리를 질렀다.
“고결한 ■■■■■ 님의 의지를 받들어!”
다시 노이즈.
그러나 그것을 신경 쓸 때가 아니었다. 누군지 모를 자가 죽음을 앞두고 울부짖었다.
“감히 고귀한 ■■를 모욕하는 자에게 천벌을!”
“아니!”
저들이 말하는 자가 누구인지, 저들이 도대체 무엇 때문에 분노한 건지, 그리고 어째서 죽어서도 이런 지경에 몰린 것인지 나는 모른다.
시스템이 차단했으니까.
그래도 내가 해 줄 수 있는 말이 단 하나 있다.
“네가 직접 하는 거다!”
“와아아아아!”
“단장님을 위하여!”
그것이 내가 들은 최후의 환호성이었다.
그리고, 지옥이 시작되었다.
* * *
나와 함께 달려간 병사들은 날카로운 창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기세를 죽이지 않은 채 적군과 부딪혔다.
인간의 비명이 사방에서 울려 퍼지고, 악쓰는 소리와 피 냄새가 순식간에 대지를 뒤덮었다.
내가 탄 흑마는 창을 들고 전진하는 창병들을 뛰어넘고 그 뒤에 서 있는 적군들은 말발굽으로 걷어차 쓰러트렸다.
“너 진짜 대단하구나!”
나도 모르게 그런 말이 튀어나왔다.
솔직한 감탄이었다. 이렇게까지 잘 훈련된 말은 정말 드무니까.
데이먼이 검을 휘두르며 소리쳤다.
“저를 그렇게 칭찬해 주세요!”
“시끄러워!”
데이먼의 마상 전투 실력도 훌륭했다. 뒤를 따르는 병사들도 마찬가지였다.
그러고 보니 여긴 드넓은 들판이 있는 필드였지. 이 성의 주민들은 기마에 특화된 지역민일지도 모르겠다.
숫자는 적지만, 밀어닥친 기마병 수백 명을 말도 타지 않은 병사들이 당장 감당하기는 힘들었다.
기마병들은 능숙하게 병사들 사이를 휘젓고 다니기 시작했다.
난전의 시작이었다.
“자리를 이탈하지 마라!”
“적은 수백에 불과하다!”
“진군하라!”
뒤에서 적군의 기사가 소리를 질렀다. 창과 칼이 부딪치는 소리, 말이 고통에 울부짖고 곳곳에서 인간들이 악을 쓰는 소리가 울려 퍼졌다.
“뒈져라!”
“사악한 ■■의 ■■들이!”
악에 받친 적군 하나가 벼락처럼 고함을 지르며 흑마 위에 올라탄 내게로 창을 겨누며 달려왔다. 마침 내가 전방에서 무더기로 덮쳐 오는 적군 열을 벤 후 휘두른 검을 회수하기 직전이었다.
“감히, 누가 할 소리!”
그러나 그 창이 내게 닿는 일은 없었다.
나를 향하던 적병의 투구 사이를 데이먼의 롱소드가 깊숙이 찌르고 빠져 나왔다.
쓰러지는 시체를 돌아보지 않고 데이먼과 나는 동시에 적군들 사이로 달려 나갔다.
“지치신 건 아니죠, 단장님!”
“헛소리!”
경박한 것에 비해 데이먼의 솜씨는 제법이었다. 내가 셋을 베는 사이에 하나 반쯤을 벨 실력은 되었다.
나와 데이먼이 달려 나가는 앞에 있는 적군들이 비통한 함성을 질렀다.
“겁먹지 마라! 실력 있는 자는 저 두 명뿐이야!”
“죽여, 죽여라!”
그래, 전투가 벌어지는 이상 누군가는 죽는다. 무모한 숫자 앞에 뛰어든 아군도 죽어 가고 있었다.
“성주님을 위해!”
적군의 창과 칼에 수없이 찔린 병사 하나가 비명 같은 목소리로 그렇게 외쳤다. 나는 그를 향해 말머리를 돌리려 했지만, 그 전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해당 유령의 소원이 성취된 것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유령이 분노를 풀고 영면에 들었습니다.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훌륭하게 행동하였습니다! 던전 클리어 시 업적치 정산에 가산됩니다.
훌륭해? 대체 뭐가?
그렇게 생각한 순간, 내가 지켜야 할 것이, 기사단장이 무엇을 지키고 싶었던 것인지 떠올랐다.
그가 지키고 싶었던 것은 무고한 목숨과 동료들의 명예.
……투항하느니 차라리 이렇게 전사하는 것을 바랐던 건가.
나는 뒤를 덮쳐 오는 적군 병사를 하나 더 베었다.
아군은 여전히 기세를 잃지 않았고 기마술도 훌륭했으나, 수의 차이는 압도적이었다.
“두려워하지 마라! 우리가 훨씬 더 많아!”
“말을 찔러라! 낙마시켜!”
“열이 한꺼번에 달라붙어라!”
적군의 병사들은 처음에는 그들 사이로 뛰어든 기마병들에 혼란을 겪었으나, 곧 명령에 따라 일사불란하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특히 창병들이 혼란을 수습하고 전열을 가다듬은 후 긴 창의 이점을 살려 말을 집중적으로 노리기 시작하자, 말이 상처를 견디지 못하고 쓰러지며 여기저기서 아군 병사들이 낙마하기 시작했다.
쓰러진 말과 땅에 떨어진 병사에게 수없이 많은 칼날이 달려들어 끝내 난도질하고 있었다.
그런데도, 누군가가 죽을 때마다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 해당 유령의 소원이 성취된 것으로 판정되었습니다. 유령이 분노를 풀고 영면에 들었습니다.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훌륭하게 행동하였습니다! 던전 클리어 시 업적치 정산에 가산됩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기에, 이렇게 싸워서 전사하는 것조차 그들의 원한을 푸는 일이 된 것일까.
그저 살아남으려고 검을 휘둘러 온 나로서는 도저히 가늠할 수 없는 소원이었다.
아니, 생각하지 마라. 눈앞의 전투에 집중해!
나는 이를 악물고 검을 휘둘렀다.
눈앞의 상대는 유령이고, 유령이 불러낸 과거의 메아리에 불과했으나, 그 검과 창은 진짜였다.
여기서 죽었다간 다 끝장이었다.
“단장님! 저쪽 군사가 전진하고 있습니다!”
데이먼이 적군의 창을 부러트리며 소리쳤다.
그 소리에 이끌려 고개를 들어 보니, 과연 나와 병사들이 뛰어든 전열을 제외한 다른 적군들은 해자를 건너려고 진군 중이었다.
어차피 이쪽은 수가 적으니 무시하고 본진인 성벽을 먼저 공략하기로 한 모양이다.
하, 웃기고 있군.
“그렇다면 무시할 수 없게 해 줘야지!”
모든 병사는 말로는 자신이 죽을 것이라 떠들지만, 사실 당장 적군의 칼날이 자신의 목에 들어오리라고는 생각하지 않는다.
특히나 저렇게 수적 우세에 서 있는 군사들이라면.
그러나 그들은 이미 여름에 한 번 패하고 물러갔던 적이 있었다. 해자의 고약함과 성벽을 올라야 하는 고달픔은 달라지지 않았다.
저들의 숫자가 많다고 한들 그것은 지휘관의 입장이다.
그 명령을 듣는 자는 군대라는 집단이지만 결국은 개인이고, 누군가는 명령에 따라 선두에 서서 죽어 나가야 한다.
가장 앞서서 희생을 하고 싶은 자는 사실 아무도 없다.
“일 대 천 명의 싸움. 그런 싸움에서 어떻게 이기는지 알려 줄까?”
문득 머릿속에서 알리시아의 말이 떠올랐다.
“어렵게 생각할 필요 없어.”
호기로운 웃음을 띠고서 그녀는 언제나 검을 휘둘렀다.
“눈앞의 놈이 뒈질 때까지 이걸 휘두르는 거지! 그럼 어느샌가 다들 뒤꽁무니를 빼서, 천 명을 다 죽일 필요도 없을 거다.”
처음 그 말을 들었을 때는 미친놈이라며 욕이나 하고 말았으나, 알리시아의 말은 근본적으로 틀리지 않았다.
공포라는 감정으로 집단을 개인으로 해체하는 것.
그것이 수에서 압도적으로 밀리는 집단이 이기려고 할 때 시도해야 할 첫 번째다.
지금의 나는 그게 가능했다.
“뒤를 지켜라, 데이먼 경!”
데이먼은 군소리 하나 없이 빠르게 뒤로 빠졌다. 내 옆을 달리던 데이먼이 빠지자 빈 공간으로 적군들이 들이닥쳤다.
흑마가 우렁차게 포효하며 자신에게로 창과 칼을 들이대는 병사들을 발로 걷어차며 적군을 뚫고 지나갔다.
그래, 네 주인이 못한 일을 내가 대신할게.
적군 속에서 뛰쳐나간 흑마가 진군하는 적군의 보병들을 순식간에 앞질렀다. 뒤에서 덮쳐 오는 말발굽에 수십의 병사들이 깔렸다.
“뒤, 뒤다!”
“뒤에서 온다!”
적군이 되레 뒤를 덮쳐 오는 내 존재를 알아차렸을 즈음, 흑마는 이미 그 적군들의 앞을 달려 나갔다.
“여기까지다!”
적군을 앞지른 흑마가 내 마음을 읽은 것처럼 속도를 줄이며 뒤를 돌았다. 해자 바로 앞, 적군이 밀려오기 전의 공간에 멈춰 서 나는 검을 들었다.
- 에이펙스의 성검이 당신의 의지에 응답합니다!
- 주의! 마력이 급격하게 소모됩니다.
속에서 핏물이 치솟아 올랐으나 이를 악물었다. 검을 휘두르는 손은 떨리지 않았다.
내 손에 들린 검이 기적처럼 길어지는 것을 보며 달려오던 적군이 뒤늦게 놀라 소리를 질렀으나, 이미 속도를 늦출 수는 없었다.
길어진 검날이 휘둘러져 순식간에 수백 명의 생명을 앗았다.
검이 닿는 자리마다 비명이 터지고, 살을 꿰뚫고 뼈를 가르는 감각이 손으로 수없이 전해졌다.
이미 죽어 버린 유령들 주제에 왜 이런 감각만 생생한 것인지.
내가 검을 휘두르고 난 자리에 두 다리로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존재하지 않았다.
소란하던 전장에는 죽음 같은 침묵만이 자리할 뿐이었다.
“뭐, 뭐야…….”
기가 질린 얼굴로 운 좋게 베이지 않은 적군 몇이 뒷걸음질을 쳤다. 뒤에서 열 받은 적군의 기사가 전진하라며 악을 쓰고 있었으나 공포는 명령을 압도했다.
나는 뒷걸음치는 적군에게 검을 겨누며 선언했다.
“여기서 물러난다면 쫓지 않겠다.”
“개소리 지껄이지 마! 상대는 겨우 한 명이야! 돌격해!”
“그러나!”
검날이 향하는 방향에 선 병사가 검을 보고 뒷걸음질을 쳤다.
나는 적군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분명히 머리끝까지 피를 뒤집어써 악귀 같은 몰골일 터였다. 희게 빛나는 검날로 적군과 아군의 모든 시선이 쏠려 있었다.
“이 검이 닿는 곳으로 들어온다면 모두 죽는다.”
이 순간, 전장을 지배하는 것은 십만의 군사가 아닌 나였다.
내 검이 향하는 곳, 그곳에 서 있던 병사가 등을 돌렸다. 그 등 뒤에는 또 다른 등이 있었다.
“가, 뒤로 가!”
“나는 못 하겠어!”
“도, 도망쳐!”
최초로 적군의 전열이 무너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