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37화
“닥쳐라!”
그러나 그것을 두고 보지 못하는 자가 당연히 존재했다.
저편에서 말을 타고 달려오는 은색 갑옷의 기사가 보였다. 심지어 그는 얼마나 다혈질인지 아군마저 짓밟으며 달려오고 있었다.
“감히 어느 안전이라고 그깟 사술을!”
투구를 썼지만 목소리는 젊고 혈기가 끓어넘치고 있었다. 나는 기사의 외침을 듣고 점점 의문이 강해지는 것을 느꼈다.
“사술이라니.”
내가 받은 기사단장의 기억에 따르면 이 세계에서도 분명히 희귀하게나마 마법이나 스킬이 존재하고 있었다.
그러니 데이먼이나 나를 따른 병사들도 내 힘의 강대함에 놀라고 환호했을 뿐, 그 힘의 존재 자체에 의문을 가진 건 아니었다.
데이먼은 기적이라고까지 했고.
내가 너무 깊게 생각하는 걸까. 그냥 적인 내가 갑자기 강대한 힘을 쓰니 사술이라고 칭하는 것뿐인가?
하지만 그저 그렇게 치부하기에는 목소리에 담긴 증오가 심상치 않은데…….
아니다. 어차피 깊은 사정을 들으려고 캐물어 보았자 시스템 때문에 노이즈가 끼는 것이 전부겠지.
“비켜! 내가 상대하겠다, 이 쓸모없는 것들!”
얼마나 우렁차게 외치며 달려오는지, 그 기세에 놀란 몇몇 병사들은 등을 돌려 달아나던 것을 멈췄다.
하기야 병사들에게 하늘 같은 상관은 무섭기 마련이다.
나는 달려오는 기사를 보며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내가 저 십만의 군사를 두려움으로 압도한 것은 그야말로 요행이었다.
그건 나도 안다.
당장의 전열은 무너졌으나, 상대는 결국 십만의 군세였다.
저 뒤편, 아직 아득한 들판의 저편에는 아직도 적군의 깃발이 성대하게 들려 있었다.
도열한 후방의 군사들은 아무도 동요하지 않았고, 지휘관의 명령에 따라 굳건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그리고 가장 큰 문제는, 적군 진영 후방에서 건설되고 있는 투석기였다.
투석기의 수는 다섯 대.
완성까지 얼마 남지 않아 보였다.
적어도 내가 지켜야 하는 이틀 내에 완성될 것은 당연하고, 완성되면 성벽을 방비하기가 어려워지는 건 불을 보듯 뻔했다.
제대로 된 공성전은 저게 나온 이후부터다.
그리고 그걸 적군도 알고 있다.
전진을 멈춘 적군의 중앙.
호화로운 막사와 차려 놓은 단상이 보였다. 그리고 높은 단상 위에 앉은 누군가가 있었다.
그자는 한가롭게 최전방을 관전하고 있었다.
그것은 절대적인 자신감에서 비롯된 것이다.
결국 내가 바꾼 건 아주 잠깐의 흐름.
아무리 칼을 들고 단숨에 수백을 벤다 한들 당장 내 앞에 있는 병사들이야 두렵겠으나…… 절대적인 숫자의 차이는 변하지 않는다.
게다가 이렇게 버티고 서 있지만 사실 내 상황도 별로 좋지 않았다.
이미 입안에는 피 맛이 감돌고 있었다.
시스템상, 내 마력의 총량은 숫자로 볼 수 있어도 얼마나 감소했고 얼마나 남았는지는 알 수 없다. 감으로 계산해 보는 수밖에.
이왕 시스템이라고 명명했을 정도라면 뭐든 게임처럼 수치로 표시해 주면 좀 좋을까.
하여간에 기사단장의 능력치와 클래스 보정을 받기는 했지만 그렇다고 해서 내 본래의 능력치가 돌아온 것도 아니었다.
원래도 성검의 날을 한계치까지 늘리는 것은 마력의 부담이 컸기에 그리 자주 하는 짓이 아니었다.
한 번은 더 사용할 수 있을까?
아니, 아니다.
나는 판단을 내렸다. 이 방법은 지금 상태로는 더 사용할 수 없을 듯했다.
물론 이렇게 되리란 걸 몰랐던 건 아니었다. 그래도 잠시나마 적군의 발을 붙잡아 놓을 수 있을 것 같아 사용한 것이었다.
그러니 만일 지금 나를 향해 달려오는 기사가 내 목을 베기라도 한다면 그 기세조차 순식간에 역전될 것이다.
그렇게 되면 이 시간대의 역사는 유령이 원하는 대로 흘러갈 수 없게 된다.
젠장, 무슨 미션이 이렇게 어려운 거야? 겨우 스무 명의 인원으로 이미 실패한 전쟁을 어떻게 이기라고. 심지어 난 지금 한 명인데!
내가 미션을 욕하는 동안 맹렬한 기세로 달려온 적군의 기사가 어느새 코앞으로 당도했다.
기사가 올라탄 것은 내 흑마와 대조되는 백마였으며, 아직 피를 뒤집어쓰지 않은 은빛의 갑옷과 투구가 햇빛에 빛났다.
저런, 저러다 쪄 죽겠어.
“사악한 종자는 내가 처단하겠다!”
저런 모습으로 그렇게 말하니 내가 정말 악역이 된 것 같군. 나도 달려오는 기사를 맞이하기 위해 검을 들었다.
“사악하다, 라.”
그래, 사실 나는 이 상황에 대해 아무것도 모른다. 이미 죽어 버린 유령의 소원을 들어주기 위해 이렇게 검을 휘두르고 있으니 실은 저자의 말대로 악역에 가까울지도 몰랐다.
“단장님! 위험합니다!”
“비켜, 이 새끼들아! 단장님!”
그렇지만 적군의 한복판에서 이쪽으로 달려오는 병사들의 필사적인 얼굴을 보니 이것도 그리 나쁘지는 않았다.
어쩌면 내가 빙의한 기사단장의 감정이 내게로 옮겨 왔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입꼬리를 끌어올리고 내 파트너에게 말을 걸었다.
“뭐, 용사는 오래 했으니 마왕을 해 보는 것도 나쁘지 않지. 안 그래?”
하지만 검은 내 말에 항의하듯 작게 몸을 떨었다. 참나. 하는 일이야 똑같은데 왜 그래?
어차피 내가 하는 건 내 앞에 선 미션을 해결하며 살아남는 것. 그걸 위해서라면 누구든 벨 수 있었다. 설령 악당이 되더라도 상관없다.
그래도 나는 너희들을 구하러 갈 거야.
“죽어!”
맹렬히 달려온 기사가 기세를 죽이지 않고 내게로 검을 휘둘렀다.
검이 맞부딪치는 청명한 소리가 울렸다.
나는 검을 흘리거나 튕기는 대신 상대 기사가 휘두른 검을 힘으로 버텼다. 힘에서 내가 조금도 밀리지 않자 가깝게 다가온 기사의 눈이 커다래졌다.
“이봐.”
“닥쳐라!”
“너, 높은 지위야?”
“무슨 헛소리를 지껄여도 나는 굴하지 않는다!”
“응, 높은 지위인가 봐.”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걸 보니 말이다. 대개 이런 새끼들이 분수에 맞지 않게 높은 자리에 올라가서 군을 전멸시키거든.
순수한 힘으로 맞부딪힌 검은 점점 한쪽으로 밀리기 시작했다. 흑마가 용맹하게 콧김을 뿜으며 한 보 한 보 적군으로 진전하기 시작했다.
“이, 이익!”
점점 밀리기 시작한 검을 부여잡은 기사가 악을 쓰고 있었다. 팔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이 보였다.
솔직히 지금의 내게는 버거운 상대일까 걱정했는데, 겨우 이 정도라면 걱정한 게 아까울 지경이었다.
“어이가 없네. 눈이 없나?”
만약 내가 적군의 입장이라면 가장 강력한 패를 내세웠을 것이다. 여기서 지면 정말로 초반 기세 싸움에서 완전히 패하는 게 되니까.
나는 검을 맞댄 채 저 멀리 보이는 단상 위의 누군가를 바라보았다.
여전히 움직임은 없었다.
슬슬 이렇게 겨루고 있다는 것 자체가 한심해졌다.
나는 적당히 힘을 주고 있던 것을 그만두고 제대로 상대의 검을 쳐 냈다.
카캉!
날카로운 소리와 함께 내 힘을 이기지 못하고 기사와 말이 한꺼번에 뒤로 물러났다.
나는 몇 번 더 검을 휘둘렀다. 적당히, 상대가 맞받아칠 수 있을 정도로만.
성검을 한 번 휘두를 때마다 막아 내는 기사의 검에서 날이 나가는 것이 보였다.
내가 위에서 내려치는 것을 받은 팔이 덜덜 떨리고 있었다.
어느샌가 투구 사이로 보이는 눈은 불가해한 것을 보는 것처럼 두려움에 물들어 있었다.
“말했지. 물러난다면 죽지는 않을 거라고.”
“이 건방진……!”
“하지만 너는 내 검이 닿는 위치에 있군.”
내가 다시 한번 검을 내려치려고 팔을 드는 순간 기사의 어깨가 움츠러드는 것이 보였다.
단 한순간. 그러나 이자의 망설임과 두려움은 적군에게도 전해졌을 터.
잊지 말자. 나는 지금 이 절망적인 싸움에서 이겨야 한다는 것. 그러려면 필요한 것은 무엇인지.
나는 검을 휘두르는 대신 말의 안장에서 발을 빼내고 가볍게 뛰어올랐다.
님페의 바람이 내 몸을 감쌌다.
어차피 허세를 부려야 한다면 과하게 연출하는 것도 좋겠지. 이우연처럼 날개를 펼칠 수는 없지만!
허공에서 몸이 한 바퀴 돌았다.
나는 공중에서 검을 들지 않은 다른 한 손으로 기사의 투구 꼬리를 잡았다. 기사의 머리가 내 몸을 따라 훅 기울어졌다.
“윽!”
다리로 안장을 잡아 어떻게든 버티려는 것을, 나는 머리를 잡은 손을 이용해 다리로 기사의 갑옷을 걷어찼다.
뜻밖의 공격에 대비하지 못한 기사는 속절없이 낙마했다.
“으아악!”
둔중한 갑옷이 바닥에 부딪치며 우당탕 소리가 나고, 놀란 백마가 다리를 크게 들며 주인을 잃고 저쪽으로 마구 뛰어가기 시작했다.
요란하고 허무한 패배였다.
검술로 겨룬 것조차 아니니, 기사에게는 이보다 굴욕적인 패배는 존재하지 않을 터.
나는 땅에 떨어진 기사의 가슴 위에 한쪽 다리를 올려 밟았다.
땅에 떨어진 기사가 신음했다. 내가 잡아당긴 투구는 헐거워져 바닥을 굴렀다.
그 모습에 적군 쪽에서 제각기 앓는 소리가 들렸다.
투구가 벗겨져 드러난 얼굴은 20대 중반쯤 된 앳된 청년이었다.
선연한 금발, 오만한 푸른 눈동자.
낙마한 타격에 신음하던 청년은 정신을 차리자마자 나를 향해 이를 득득 갈았다.
“이런 비겁한 자식! 수치를 주지 말고 정정당당하게 겨뤄!”
확실히 비겁하긴 했다. 도중에 검을 버리고 난투전으로 돌입한 거니까.
하지만 이쪽은 기사가 아니라서.
나는 어깨를 으쓱였다.
“십만 대군 앞에서 정정당당하기가 어디 쉽나?”
내 검날이 청년의 목에 닿자 적군 사이에서 아우성이 터져 나왔다.
흠, 반응을 보니 꽤 높은 지위인가 본데.
나는 아까 사용했던 절규하는 인어의 나팔을 장비하고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적군과 그 사이에서 아직도 분투 중인 아군에게로 외쳤다.
“적군의 기사를 사로잡았다!”
이건 약간의 도박이었다. 인질로서의 가치가 있을지는 모르겠지만, 어쨌건 나도 쓸 수 있는 건 다 써야 하는 상황이었다.
그런데 뜻밖에도 적군의 진영에서 말을 탄 다른 기사가 대열 앞으로 달려 나왔다.
“그만, 그만두시오!”
어라.
예상외로 잭팟인가?
나는 땅바닥에서 필사적으로 일어나려 노력하는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그사이 데이먼을 비롯한 병사들은 내 말을 들은 후 적군의 대열에서 빠져 나와 나에게로 달려오고 있었다.
기마병들은 상처투성이였고 숫자도 줄었으나, 그래도 여전히 사기가 충만한 모습이었다.
“단장님!”
데이먼은 심지어 손까지 흔들고 있었다. 성벽 위에서도 북소리가 둥둥 울리고 있었다.
그야 그렇지. 적군의 진군을 막는 게 일차 목표였고, 일단은 그걸 달성한 거나 다름없으니 기세는 좋을 터였다.
동시에 적군의 앞으로 달려 나온 다른 기사가 침통한 목소리로 외쳤다.
“주군!”
“……주군?”
나는 땅바닥에서 이를 박박 갈고 있는 청년을 내려다보았다. 그가 시퍼런 살기를 띠고 나를 마주 보고 있었다.
주군이라니, 설마 저 적군의 수장급쯤 되는 건가? 아니, 그렇게 중요한 인물이면 애초에 왜 단기필마로 나선 거야?
그게 의문이었으나 나는 청년의 증오가 담긴 얼굴을 본 순간 이런 상황이 생긴 이유를 납득했다.
눈초리가 매서운 것 하며 인상부터가 고집이 세 보인다. 진짜 남의 말 안 듣게 생겼다. 누가 만류하는 말은 죄다 무시하고 나왔겠지 뭐.
저런 멍청한 놈은 한둘도 아니다.
하여간 내게 중요한 건, 이 청년에게 인질의 가치가 있다는 것뿐이다.
나는 청년에게 칼을 겨눈 채 앞으로 나선 적측 기사에게 말했다.
“이자의 목숨이 아깝다면 뒤로 물러서라.”
“말도 안 되는 소리!”
기사가 벼락처럼 외쳤다. 그는 얼마나 분노했는지 투구를 벗어 바닥으로 집어던져 버렸다.
“주군께서도 항복을 바라시지는 않을 터! 감히 그런 수치를 주려 하다니!”
그 말을 들은 청년의 눈이 멍해지는 것이 보였다. 땅바닥에서 버둥거리던 사지가 일순간 멎었다.
기사의 말을 들은 나도 그랬다.
이거 잭팟이 아니라 버리는 패 같은데. 돌려서 말하고는 있지만 결국 죽여도 상관없다는 거 아닌가.
물론 블러핑일 확률도 있다. 나는 아무런 정보도 모르니 판단을 내릴 근거가 전혀 없다.
“웃기는 소리!”
그러나 데이먼은 달랐다.
말을 달려 빠르게 내 곁으로 달려온 데이먼이 말머리를 돌리며 우렁찬 목소리로 외쳤다.
“네놈들의 소중한 후계자가 죽는 꼬락서니를 보고 싶지 않다면 물러나야 할 것이다!”
잭팟 맞았잖아? 데이먼도 말에서 내려 나를 따라 검을 청년에게 들이댔다.
그 얼굴은 웃고 있었다.
“이 비천한 필부가 고귀한 전하께 검을 들이대는 날이 올 줄이야. 이런 날을 얼마나 꿈에 그렸는지 모르겠소.”
“감히!”
“뭣들 하고 있냐! 당장 묶어서 끌고 간다!”
병사들 몇이 말에서 내려와 천으로 청년의 팔다리를 묶고 짐짝처럼 말 위에 올렸다.
청년은 묶인 채 어떻게든 고개를 들려고 애쓰고 있었다. 그러자 적군들 사이에서 터지는 비통한 소리.
그 모습에 나는 잠시 희망을 엿보았다.
뭐야, 이거 이 자식을 인질로 잡아서 이대로 이길 수 있는 거 아닌가…….
그때였다.
“감히.”
적군의 한복판에 있던 단상. 그 위에 앉아 있던 자가 천천히 일어났다.
능력치가 높아져 시야가 넓어진 내게는 그자의 모습이 똑똑히 보였다.
사로잡은 청년과 같은 빛나는 흰색의 갑옷.
넓게 펼쳐지는 화려한 망토와 손에 쥔 왕홀.
뒤로 펼쳐진 깃발.
소리치지 않았음에도 단숨에 전장을 압도하는 목소리.
“사악한 종자들이 감히 나의 후계자를 모욕하느냐.”
마법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