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42화
성문이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전투 초반과 다르게 시간이 더 오래 걸리는 것은 역시 내 님페의 바람 출력이 한참 떨어졌기 때문이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군주를 한 번 쓰러트렸기 때문인지 명령 체계가 혼란스러워진 것 같았다. 성으로 가까워질수록, 즉 본진에서 멀어질수록 병사들이 우왕좌왕하고 있었다.
그래도 군주가 다시 병사들을 수습한다면 곧 정리될 거다. 이러니저러니 해도 꽤 커다란 정신적 지주인 듯했으니까.
그러고 보면 성주도 성민들에게 커다란 영향을 끼치는 것 같던데, 이우연이 성주의 모습으로 활개 치는 걸 보면 다들 좀 더 사기가 충만해지지 않으려나.
“야, 이우연.”
성에 도착하기까지 얼마 남지 않았을 때 나는 이우연을 불렀다. 내 부름에 이우연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의 몸에는 헌터들이 착용할 법한 장비 외, 현대 한국과는 어울리지 않는 고풍스러운 망토가 걸쳐져 있었다. 성주의 것일 테다.
그럼 성에 돌아가면 남들 앞에서는 성주님, 해야 하는 건가? 나는 기사단장이니…… 어라.
“그러고 보니 너, 어떻게 나인 걸 알아봤어?”
상대방을 정확히 인지하기 전까지는 빙의한 모습으로만 보일 텐데. 나야 이우연이 날개를 달고 있어서 백 미터 밖에서도 알아봤다만.
내 물음에 이우연이 어이가 없다는 표정으로 대답했다.
“당신 검. 그리고 검 쓰는 방식. 누가 봐도 당신이던데?”
“아…….”
그러고 보니 이우연은 내 에이펙스의 광검을 봤었지. 알아보는 것도 당연했다. 다만 이우연이 세상 한심하다는 표정으로 나를 바라보는 게 열 받는 지점이었다.
이우연이 인심이라도 쓴다는 표정을 짓고 내게 말했다.
“또 물을 거 있으면 얼른 물어봐.”
“……그러지.”
짜증이 나는 건 사실이었지만 서로가 역할에 충실해야 하는 이상, 성에 완전히 진입하게 되면 성주로 빙의한 이우연과의 대화에 제약이 걸리게 될 가능성이 높았다.
그 전에 묻고 싶은 게 몇 가지 있었다.
“이선 헌터는 그렇다 치고, 너는 어떻게 들어온 거지?”
사실 가장 궁금했던 점이었다. 설마 보스 몬스터가 나타났다고 던전의 인원 제한이 풀리기라도 한 건가?
“당신이 들어가고 몇 십 분 후인가? 또 한 명이 히든 클리어로 나왔거든. 그 덕에 내가 들어왔지.”
“……바깥 상황은 어쩌고? 브레이크가 일어나면 어쩌려고.”
“그것 때문에 교수님이랑 약간의 말다툼이 있기는 했지만…… 당신이 어느 정도 공략을 유효하게 진행 중이라고 생각했거든. 포화도가 그 몇 분 사이에 줄어들더군. 이런 공략 속도라면 나도 들어가서 돕는 게 최선이란 말로 설득…… 했지.”
설득이라는 말을 할 때 약간 어물거리는데 어쩐지 수상했다.
김숙자 교수와 사이가 좋아 보이지는 않는데. 설마, 유혈 사태라도 일으킨 건 아니겠지.
이우연이 그렇게 말하다 인상을 찌푸리고 덧붙였다.
“물론 설마 던전 내의 시간과 바깥의 시간이 다르게 흘러간다는 사실은 몰랐지만.”
하기야 던전 안쪽의 시간과 바깥의 시간은 다르게 흘러가니, 이우연 쪽의 체감으로는 겨우 몇 십 분이었겠군.
그쪽에서는 포화도가 빠르게 줄어들고 있으니 공략 막바지인 줄 알고 화력 지원차 들어온 모양이다.
뭐, 나쁜 판단은 아니었다. 결국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지 않는 게 최선이기는 하니까.
“그 히든 클리어로 나간 사람은 무사해?”
“응, 이번에는 꽤 멀쩡한 상태였어. 뭐라더라, 본인의 히든 클리어 조건이 적군 10명을 베는 거였다던데.”
그런 조건이라면 설마…… 기마병을 이끌고 돌격할 때 함께 있었던 건가?
나는 혀를 찼다. 던전에 들어온 다른 헌터들을 인지할 수 있었다면 좋았을 텐데.
뭐, 그래도 다행이다. 치킨이나 뜯고 팝콘이나 먹으라고 했는데 알아서 잘 살아남았군.
내 표정을 보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 이우연이 마지막으로 한마디 덧붙였다.
“그나마 쓸모 있는 헌터라고 할 수 있지. 물론 던전 포화도를 낮추는 데는 전혀 도움이 되지 않았겠지만.”
“살아남은 사람한테 그게 할 소리냐? 성격이 왜 그 모양이야?”
“무슨 그런 섭섭한 소리를 하고 그래. 당신한테는 재롱떠는 중인데.”
그러면서 이우연이 윙크를 날렸다.
혹시 한쪽 눈만 시도 때도 없이 감는 게 병인가…… 고개를 돌려 버린 나는 슬슬 가까워진 해자를 바라보며 혀를 찼다.
그냥 한 발 한 발, 최선을 다해 뛰어오르는 것에 집중하다 보니 남은 마력과 도움닫기 할 만한 거리가 참 애매했다.
저 해자를 한방에 뛰어넘을 수 있으려나.
성에서 내 어려움을 알아차리고 해자의 다리를 내릴 정신이 있다면 좋겠지만, 적군의 거리가 아까보다 훨씬 가까워져 있었다.
괜한 모험은 하고 싶지 않다.
물론 해자에 처박히더라도 죽지는 않겠지만 해자는 대개 적군 방비의 목적으로 일부러 동물의 사체니 독소니 넣어 두는 경우가 무척 많았다.
구정물에 처박히고 싶지는 않은데.
“악수는 괜찮지?”
그때 휙, 하고 한쪽 손이 공중으로 매달렸다. 아니, 이우연이 내 손을 잡아챈 것이다.
물론 허공에 떠 있는 상황인 만큼 이우연밖에 나를 잡을 놈이 없긴 해서 그냥 놔둔 거긴 한데…… 이우연을 철봉 삼아 공중에 대롱대롱 매달려 버린 나는 다른 한쪽 손으로 검을 들었다.
“뭐 하는 짓인지 당장 설명하지 않으면 그 날갯죽지 동강 낸다.”
“우리 손까지는 잡아도 되는 사이 아니야?”
“아니다, 이 미친놈아.”
“안아 드는 건 싫다면서.”
“당연히 싫지. 내가 왜 안겨야 해?”
“그러니까 손 정도는 조금만 참아. 거리 애매해서 고민하던 거 뻔히 보여서 그런 거니까.”
나는 잠깐 침묵했다가 물었다.
“너 특성이 뭐야? 진짜 불여우인 거 아냐?”
“순대 먹을 때 간을 좋아하긴 하지만 특성이 그런 건 아니야. 당신 날 뭘로 보는 거야?”
뭐긴 뭐야. 더럽게 눈치 빠르고 내숭 떠는 놈이지.
뭐, 어쨌거나 해자를 건너는 데 도움이 필요한 건 사실이었다. 마력도 아끼고 좋지.
합리적 결론 끝에 나는 얌전히 이우연에게 달랑달랑 들려 가기로 했다.
사실 내가 애초에 접촉을 꺼렸던 것은 혹시 이우연에게 접촉함으로서 발동되는 스킬이 있는 게 아닌지 의심했기 때문이었다.
혹시 내가 랭킹 1위라는 게 드러나서 이우연이 나를 적대하게 되면 곤란해지니까.
그런데 이미 랭킹 1위라는 건 들켰고, 이우연이 나를 적대할 요소는 지금 당장은 보이지 않았다. 다만 나에게 이우연이 딱히 호감을 가질 만한 요소도 없으니 경계를 늦춰서도 안 될 거다.
그야 고마운 감정도 있고, 내가 지금 그를 꽤 인상 깊게 보고 있는 것은 사실이지만…… 뭔가 미심쩍은 구석이 있는 것도 확실했다.
아, 이런 머리 굴리는 거 진짜 싫은데.
일리아스, 네가 그립다, 야. 이런 통밥 굴리는 건 네가 최곤데. 같이 고민 좀 해 주라. 앞으로 꼰대라고 안 놀릴게.
이우연은 가볍게 성벽을 타 넘어 성안으로 가뿐히 착지했다.
대지에 발을 내려놓자 안도감과 동시에 부유하던 감각이 사라져 약간의 허탈함이 느껴졌다.
“단장님!”
사람들의 환호가 여기저기서 덮쳐 왔다.
나와 이우연을 맞이하러 가장 먼저 달려 나온 것은 물론 기사들이었다. 그중에서도 성벽의 가장 높은 곳에 서 있던 엘리사 메이와, 부상을 치료받고 있던 데이먼 오닐이 가장 먼저 뛰어왔다.
“으아아, 단장님!”
“단장님, 무사하셔서 다행입니다!”
데이먼은 울먹거리는 눈동자로 두 손을 모으고 나를 울 것처럼 바라보았고, 엘리사는 그렇게 말한 후 이우연…… 아니, 성주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손을 가슴 위로 올렸다.
“성주님을 뵙습니다.”
어느샌가 날개를 접고 바닥에 내려선 이우연이 고개를 끄덕여 인사를 받았다.
“그래, 메이 경.”
엘리사의 부복에 순식간에 소란이 일어났다. 다들 성벽 위에서 내 전투를 보기야 했겠지만 일반인의 시야로는 정확히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볼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래서인지 다들 이우연, 그러니까 내 옆에 서 있는 남자가 그들의 성주라는 것을 이제 알아차린 듯했다.
“헉! 성, 성주님을 뵙습니다!”
“성주님이 나오셨어!”
물 위에 파문이 번져 가듯, 성문 앞에 나와 있던 기사들을 비롯해 모든 병사들이 경탄과 함께 하나둘씩 고개를 숙이거나 무릎을 꿇었다.
심지어는 일반 주민들조차.
나도 같이 무릎이라도 굽혀야 하나. 하긴 빙의한 인물로서 행동해야 하니까.
메시지가 떠오르기 전에 나도 부복하려던 순간이었다.
“고개를 들고 일어나라.”
이우연, 아니, 성주의 목소리가 사방으로 확 퍼져 나갔다. 일반적인 목소리가 아니었다. 저건 마법으로 해낸 연출이었다.
사람들이 그 목소리에 고개를 들고 성주를 바라본 순간, 이우연이 엄숙한 목소리로 사람들에게 이렇게 전했다.
“그대들은 누구 앞에서건 고개를 숙일 이유도, 무릎을 꿇을 필요도 없다.”
그 연설에 딱 들어맞는 목소리와 내용도 내용이었지만 무엇보다 자연스러운 하대에 나는 입을 떡 벌렸다.
저 자식…… 완전 잘하잖아? 현대인 맞아? 알고 보니 나처럼 다른 세계에서 구르다 온 놈인 거 아니야?
이우연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본 후 반응을 살피며 양 입꼬리를 끌어올리며 밝게 웃었다.
“내가 반드시 그렇게 하도록 만들겠다.”
“오, 세상에.”
“성주님! 따르겠습니다!”
기사와 병사들 사이에서 탄성이 터졌다. 심지어 훌쩍, 누군가가 눈물을 닦으며 콧물을 들이켜는 소리가 났다. 질색하며 옆을 쳐다보았더니 아니나 다를까, 데이먼이었다.
데이먼이 울면서 조용히 속삭였다.
“성주님 건강도 나쁘신데…… 결국 우리를 위해서 내려오시다니…… 힘드실 텐데.”
사실 내가 보기엔 이우연의 얼굴이라 영 신뢰감은 없는 미소였으나, 다른 이들의 시선엔 성주로 보여서 그런지 반응이 어지간히 좋았다.
성주가 좀 신뢰감을 주는 얼굴인가 보지?
내가 본 성주는 가면을 쓰고 있었는데, 지금 이우연은 가면을 벗고 있으니…… 원래 성주의 얼굴이 궁금하긴 하군.
성민들의 반응도 나쁘지 않았다.
아니, 나쁘지 않은 정도가 아니었다.
다들 감동한 얼굴로 어떤 이는 두 손을 모으고 기도하고 있었고, 어떤 이는 데이먼과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울고 있었다.
보통 성주가 건강이 나쁘더라도 이런 상황에서 대가리가 안 내려오면 원망부터 들지 않나? 역시 인망이 좋은 건가.
혹은, 그럴 만큼 건강이 나쁘다는 것을 알고 있는 건가.
하긴, 이우연이 빙의하지 않았더라면 성주는 오늘 당장 죽어도 이상하지 않을 만한 상태였다.
아니, 생각하는 건 관두자.
나는 고개를 털어 생각이 많아지는 걸 털어 냈다.
이렇게 이우연이 성주 역할을 잘 해내 줘서 남은 시간 동안 수성전에 성공해 이 사람들의 원한도 풀고, 던전 브레이크도 해결하고, 나는 능력치를 얻어가고.
그거면 되지 않나.
그것도 그럴 게 내가 아무리 궁금해한들.
“어차피 시스템이 정보를 다 차단할 테니…….”
- 플레이어명 : 방랑하는 구도자(求道者)의 요청을 인지하였습니다.
나에게만 보이는 흰색의 시스템 메시지 창이 떠올랐다.
- 던전 공략 성공 시 차단되었던 일부 정보가 제공됩니다.
- 시스템은 플레이어의 던전 공략 성공을 응원합니다.
메시지가 뜬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이우연을 바라보았다.
혹시 이 메시지가 이우연에게도 떴을까?
아니, 아니야.
나는 확신했다.
이우연은 여전히 태연한 얼굴로 성민들과 기사들을 다독이고 있었다. 아무리 연기를 잘한다고 해도 그의 눈앞에 이런 메시지가 떴다면 저렇게 태연하지는 못할 거다.
그럼 저건 시스템이 내 혼잣말을 듣고 나에게만 띄운 메시지라는 건데.
“이게 뭐야.”
내가 낮게 중얼대자 엘리사가 나를 의아하게 쳐다보았다. 하지만 그녀를 신경 쓸 여력이 없었다.
물론 이제까지도 시스템이 내 요구에 즉각 반응할 때는 있었다.
가령 이 세계에 돌아온 후에는 내가 콱 죽어 버리겠다고 하자마자 아이템 창을 연다든가, 혹은 평안하게 살자고 마음먹으려던 때 랭킹 발표를 한다거나.
그러나 방금 떠오른 메시지는 무언가 달랐다.
던전 공략을 응원하느니, 뭐니.
“진짜 누군가 있는 거야?”
이번 메시지를 보니 정말로 시스템 뒤에 의지를 가진 무언가가 있다는 것이 확연히 느껴졌다.
“대체 뭐냐고.”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식은땀이 나는데.”
엘리사가 손을 뻗어 부축하려 했지만 나는 고개를 저으며 한 발자국 물러났다.
머리가 너무 아팠다.
그럼 정말로 시스템과 던전들은 타르토스의 신관들이 말하는 대로 신의 시련이라도 된단 말인가? 저 메시지는 신의 의지고?
소름이 오싹 돋는 동시에 검자루를 쥔 손에 나도 모르게 힘이 들어갔다.
그래, 만일 이 시스템 뒤에 어떤 존재가 있다고 치자. 그렇다면 그 존재가 내게 원하는 바는 대체 무엇이지?
성공을 응원한다고? 그렇다면 보스의 막타를 치기 전에 안정화 따위를 들먹이며 내 움직임을 봉한 건 뭐란 말인가.
그리고 내가 이제껏 당한 일은 다 뭐였던 거야.
처음부터 시작해 보자.
나는 갑자기 다른 세계에 가야 했고, 그다음에는 뜬금없이 다시 한국으로 돌아왔고, 돌아왔더니 내가 구한 세계는 멸망했다고 하던, 그런 게 다…… 누군가의 의지로 이루어진 일이란 말이야?
그렇다면 대체 그런 일이 왜 일어났어야 하는 건데.
나는 왜…… 아니, 나는 아무래도 좋아.
그 애들은 왜 그런 일을 겪어야 하는 건데?
환상인지 무엇인지 모를 아리아드네의 모습이 떠올랐다. 칼에 찔린 모습, 나를 밀던 그 애의 손.
그 모습을 떠올리는 순간 관자놀이를 찌르는 것 같은 격통이 일었다.
- 경고! 시스템 오류가 발생하였습니다.
- 과도한 간섭 탓에 플레이어의 신체에 일시적인 과부하가 걸립니다.
“윽!”
도저히 흘려 넘길 수 없는 갑작스러운 통증이었다. 정신을 잃어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의 아픔이어서 나는 기절하지 않기 위해 혀를 꽉 깨물었다.
“단장님!”
깜짝 놀란 엘리사와 데이먼이 다가와 양쪽으로 내 팔을 붙잡고 부축했다.
아마 부축해 주지 않았다면 쓰러졌을 것이다.
“강예나!”
- 시야 제한이 해제된 플레이어의 발언은 차단되지 않습니다.
- 단, 주변 인물에게는 대화가 제한되어 들립니다. 정체를 의심받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가물거리는 시야 속. 선명한 것은 메시지의 황금색 글씨뿐이었다.
이런 개자식 같으니.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정신을 잃었다.
- 여섯 번째 낮 페이즈가 종료되었습니다.
- 여섯 번째 밤 페이즈가 올 때까지 대기 시간이 주어집니다.
- 01:00: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