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43화
이우연은 쓰러지는 강예나를 향해 달려가기 전에 발걸음을 멈췄다. 허공에 떠오른 황금색의 메시지를 발견했기 때문이었다.
이 성에 있는 모든 헌터들이 볼 수 있는 전체 공지였다.
- 정체를 의심받지 않도록 주의하세요.
방금 기절한 강예나를 발견한 순간 당황해 저도 모르게 불렀던 이름 때문에 나타난 메시지.
메시지 자체에는 더 이상의 정보가 나타나지 않았으나 아무리 보아도 저건…… 정체를 의심받을 경우 페널티가 주어진다는 이야기겠지.
이우연은 제자리에 멈추어 선 채 눈을 꾹 감았다 떴다.
아무리 이우연이라고 해도 우선순위를 정리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말로 하자면 마음의 준비를 할 시간이.
자신이 빙의한 인물은 성주였으니 직접 달려가 부축하는 것은 주변의 의심을 받을 소지가 있는 행동일 것이다. 애초에 사람들 앞에서 ‘강예나’라는 이름을 부르는 것 자체도.
그렇다면 어디까지 허용되는 것인지도 의문이었으나, 지금은 호기심을 시험해 볼 때는 아니었다.
보스 몬스터를 상대하는 강예나에게 날아갈 때 마법도, 날개도 활용했으나 그때는 저런 메시지가 떠오르지 않았다.
즉 헌터가 가지고 있는 능력의 활용은 괜찮지만, 서로 간의 소통은 제한된다는 건가.
하기야 아예 능력을 제한받는다면 이 미션은 애초에 불가능하고, 빙의라는 형식인 만큼 대화를 너무 자유롭게 풀 수도 없으니 어느 정도 밸런스 패치를 했다고 생각하는 게 좋을 듯싶었다.
항상 그런 식이지. 이우연은 입꼬리만 끌어올려 웃었다. 희망 고문이나 마찬가지다.
이우연은 쓰러지기 직전 곁의 기사들에게 부축을 받은 강예나를 바라보았다. 다른 인물들의 옆에는 성주의 기억 덕분에 이름이 떠올라 있었으나, 강예나가 빙의한 기사단장의 이름은 공백이었다.
이거 아주 묘한 일이군. 그렇게 생각하며 이우연은 성주로서 지시를 내렸다.
“단장이 무리를 한 것 같군. 성으로 데려가 편히 쉬도록 해 주어라. 메이 경, 부탁하지.”
“존명.”
엘리사 메이가 경례를 한 후 강예나를 부축했다. 원래도 그리 혈색이 좋지 않았으나, 지금은 좋지 않은 정도가 아니라 금방이라도 숨이 넘어갈 것처럼 보였다.
그 옆에서 데이먼 오닐이 울상을 지었다.
“단장님, 역시 많이 다치신 거로군요.”
“그리 큰 부상은 아니었어. 쉬면 나을 거네.”
“위로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성주님.”
데이먼이 그렇게 대답한 후 제 주먹을 불끈 쥐는 것이 보였다. 다행히도 이우연의 눈앞에 성주답게 행동하라는 경고 메시지는 떠오르지 않았다.
“……제가 강했다면 단장님도 혼자 뛰어들지는 않으셨을 텐데.”
글쎄, 힘이 모자라고 말고의 차이가 아닐 것 같은데.
이우연은 속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본래의 기사단장이 어떤 성격인지는 모르겠지만 강예나라는 인간은 어떤 성격인지 대강 알 것 같았다.
물론 함께 던전을 공략한 것은 이게 겨우 두 번째. 만난 것조차도 겨우 두 번째이기는 했다.
사실 친구는커녕, 동료라고 말하기에도 민망한 사이다.
그러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인간이라면 누구나 본모습이 드러나는 법이다.
그런 의미에서 이우연은 저 여자의 본모습을 볼 기회가 두 번이나 있었다.
만일 데이먼이나 엘리사가 좀 더 강했더라도 결과는 똑같았을 것이다.
그냥 저 사람은 저런 성격인 거다. 다른 누군가가 다치는 게 싫어서 주위를 돌아보지 않고 홀로 해결하려고 하는.
차라리 능력도 되지 않으면서 저런 짓을 한다면 뜨거운 맛을 보고 물러나거나 죽거나 할 텐데, 강예나의 경우 능력도 있고 전투 센스도 뛰어난 편이라 정말로 해결이 된다는 게 문제다.
지구에 시스템과 던전이 생겨난 지는 5년.
이제껏 어디에 있다가 갑자기 튀어나온 건지는 모르겠지만, 아마 그간 주위 사람들을 꽤 피 말리게 했을 것 같다.
‘아, 이번엔 내가 그런 심정을 맛보게 되는 건가?’
생각해 보니 그렇게 되는군.
기분이 나쁘지는 않지만 묘한 심정이기는 했다.
이제껏 자신에게 동료가 없었던 이유는 딱 하나였다.
같은 페이스로 던전을 공략해야 하는데, 한국에는 그럴 만한 인물이 거의 없었다는 것이다.
물론 던전을 공략하며 안면을 트거나 정보를 공유하는 사람은 몇 명 있었으나, 대부분 일시적인 것이었다.
‘이대로라면 꽤 이상적인 파트너가 될 수도 있겠는데.’
클래스가 뭔지는 정확히 모르겠지만 물리 공격 계열인 건 확실하고, 항마 속성인 것도 딱 좋았다.
던전 공략만 생각하면 괜찮은 파트너였다.
문제라면 역시 그녀 본인에게 의심할 구석이 많다는 점이겠지만, 그쯤이야 던전 공략만 된다면 상관없다.
사람들이 들것에 기절한 강예나를 실어 간이 치료소에 데려가는 모습을 지켜본 후에야 이우연은 발걸음을 돌렸다.
강예나가 정확히 어떻게 SS급 몬스터를 상대했는지는 보지 못했지만, 거의 성공할 뻔했다는 건 확실했다. 저 지경까지 이르렀다는 건 일반적인 방법은 아니었을 터.
제 몸 아끼지 않는 성격이라는 건 알겠지만, 저렇게까지 할 필요가 있을까?
혹시 무슨 이유라도…….
- 이우연, 지금 뭐 하고 있어?
그때, 뇌 내에서 직접 울리는 듯한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불쾌하기 짝이 없는 감각이었다.
이우연은 한 번 한숨을 쉰 후 정신을 집중했다.
- 스킬, 텔레파시를 사용하여 지정된 대상, 플레이어명 : 이선에게 의사를 전달합니다.
- 잠깐 생각할 게 있어서. 이선 헌터는 지금 어디에 있죠?
마법사들이 가끔 발현하는 스킬인 텔레파시. 대상은 최대 3인까지 지정할 수 있고 지정하는 것도 플레이어명만 알고 있으면 얼마든지 바꿀 수 있다.
물론 만능인 스킬은 아니라 거리 제한은 있지만, 현재는 같은 필드 내에 있어 상관이 없었다.
다만 동시에 3명 이상에게 의사 전달은 불가능하고, 상대방의 머릿속에 직접 의사를 전달하는 방식이다 보니 머리가 아파서 자주 사용하는 스킬은 아니었다.
그래도 이 상황에서는 유용한 스킬이기는 해서, 각자 거의 접점이 없는 인물로 빙의했는데도 빠른 소재 파악이 가능했다.
- 지금 5명은 찾았어. 투옥되어 있더라고. 나머지는 찾으러 돌아다니는 중이야. 대기 시간이 주어졌으니 그 안에 최대한 찾아볼게.
- 알겠습니다.
신입 헌터들은 이우연과 이선의 예상대로 행동거지가 수상하다는 이유를 들어 투옥당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낭비한 시간이 6일.
안타까운 점이었다.
초반에 화력으로 밀어붙였다면 보스 몬스터도 능력을 제한받았을 가능성이 높으니 어떻게든 되었을지도 모르는데.
뭐, 지나간 일은 어쩔 수 없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던 것은 이선이 성의 감옥을 관리하는 가장 높은 직책의 간수로 빙의했다는 점이었다. 그래서 이우연보다는 행동하는 것에 자유가 있었고, 감옥에 갇힌 인원을 빼돌리는 것도 쉬웠다.
- 적군을 살펴본 감상은 어떻지?
- 마법사가 별로 없더군요. 우리에겐 다행이죠.
- 그게 다행이라기엔 숫자가 너무 많은걸.
- 어떻게든 해 봐야죠, 그 점은.
- 일단 알겠어. 예나 씨는 상태가 어때?
이번에는 진심으로 걱정하는 것이 느껴지는 목소리였다.
강예나. 아니, 기사단장이 쓰러진 순간 여기 성문 바로 앞에서는 꽤 소동이 일었는데 아마 지금 이쪽을 보고 있지 않은 모양이다.
- 지금 기절했어요.
- 뭐?! 그럼 힐이라도 써 줘야 하는 거 아니야?
머릿속에 울리는 목소리가 다급하게 커졌다.
머리가 아프다.
이우연은 인상을 찡그렸다가 곁에 남아 있던 데이먼 오닐과 미구엘 보일의 표정을 마주했다.
둘 다 매우 걱정스럽다는 표정이었다.
“괘, 괜찮으십니까?”
“역시 너무 무리하신 게 아닌지요. 마력을 그렇게 많이 쓰셨다간 몸에 무리가 갑니다.”
그 말에서 이우연은 약간의 위화감을 느꼈다.
이 세계에 마법사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데도 저 둘은 마치 성주가 원래부터 마력을 다루었던 사람처럼 이야기하는군.
혹시 성주가 원래 마법사였나?
그럴지도 몰랐다.
할 수 있는 건 추측뿐이었다.
성주의 기억을 거의 계승받지 않아 알 수 있는 것이 매우 적었다. 이선과 비교해 보아도 전달받은 정보가 적다.
그만큼 중요한 정보를 알고 있었던 인물이란 거겠지만 지금 상황에서는 아무 쓸모도 없었다.
이우연은 넣어 두었던 은색 가면을 다시 착용했다. 표정 하나하나를 관찰당하느니 그게 편할 것 같았으니까.
“신경 쓰지 말게. 그보다 어서 성벽의 병사들을 다독여 주고, 부상자들을 살펴 주게나.”
“알겠습니다!”
“존명.”
- 제가 어련히 생각했을까 봐요. 아까 포션을 계속 복용하더군요. 대기 시간이 좀 필요할 것 같습니다.
마법으로 만드는 포션은 복용하는 즉시 효과가 나타나지만, 몸이 마력을 버틸 수 있는 것 이상으로 복용하게 되면 으레 부작용이 따른다.
구토, 어지러움…… 심하면 각혈까지.
이 경우 외부에서 주입된 마력을 버티지 못하는 것이기 때문에 치유 계열의 마법을 썼다간 몸이 더 나빠질 우려가 있었다.
이럴 때 조한율이야 정부에서 지정한 SS급이니 어쩔 수 없다 하더라도 솔방울 같은 녀석이 필요한 건데.
당장 데려올 수 없으니 아쉽게 되었다.
하여간 이우연이 보기에 지금 강예나는 더 이상 포션을 복용해서는 안 될 상태였다. 차라리 조금이라도 쉬는 게 나을 것이다.
- 그냥 쉬게 놔두죠. 몇 시간 자고 나면 나아질 테니까.
어차피 이 수성전은 여덟 번째 날까지 이어 가야 했으니 조금이라도 쉬게 두는 게 나을 것이다.
- 강예나 덕분에 보스 몹도 분명 쿨타임이 필요할 거고, 행동 제약도 있는 듯합니다. 강예나도 같은 의견이었어요.
- 그럼 다음 페이즈는 각 진영 보스의 휴식 타임이라고 생각하면 되겠군?
이선도 곧바로 상황을 이해했다.
여전히 유능한 헌터였다.
이우연은 그 농담이 묻어나는 말에 저도 모르게 김빠지는 소리를 내며 웃어 버렸다.
뭐, 하지만 틀린 말도 아니었다. 지금 각 진영의 왕이 강제 쿨타임에 들어간 셈이다.
그래도 다음 페이즈는 온전히 이우연과 이선, 둘이서 싸움을 이끌어야 했다.
- 다음 페이즈도 문제지만, 보스 몬스터를 이길 가능성은 얼마나 될까.
그러나 그 유능함과는 별개로 보스 몹이 SS급이라는 것은 이미 전달한 상태였기에 이선의 목소리는 어두웠다.
- 사실 아무도 상대해 본 적이 없어서 가늠이 안 되는데…….
이우연도 SS급 몬스터를 상대해 본 적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한국에서 SS급 몬스터가 나타났던 것은 5년 전, 단 한 번 있었던 일이었다.
당시 그 던전은 보스 몬스터를 처치해 클리어하는 대신 히든 클리어 조건을 채운 생존자들만이 겨우 귀환했었다.
-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죠. 만일 갈수록 던전의 난이도가 높아진다면 언젠가는 겪어 봐야 할 일이에요.
- 그야 그렇긴 하지. 에휴, 그래도 랭커들이 있어서 다행이라고 해야 하나.
이선이 혀를 찼다.
- 그나저나, 이거 참 환상의 밸런스네. 보스 몬스터는 마법 계열이라 마법사로는 상대가 안 돼. 그런데 막상 사전 조건인 권속들 처리는 광역기를 가진 마법사 없이는 할 수 없다, 라.
그 말대로였다.
실드 마법이 물리적 충격에 깨어지지 않는 건 아니지만 이 던전에 입장한 마법사는 그 누구도 아닌 이우연과 이선이었다.
마력만 끊임없이 주입할 수 있다면 이론적으로 보았을 때 일반적인 물리 공격에서는 몇 시간이고 버틸 수 있다.
그러나, 마법을 다루는 보스 몬스터의 곁에서는 마력 장악이 어려워진다.
그 경우 마법사들의 실드는 버티지 못하게 된다.
결국 승패는 보스 몬스터가 나오기 전까지 마법사들이 권속의 30퍼센트 이상을 죽일 수 있느냐, 없느냐 하는 것에 크게 좌우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강예나가 컨디션을 회복하더라도 보스 몬스터를 잡지 못할 테니.
- 던전이 계속 이런 식이라면 마법 계열 보스 몬스터는 사실상 강예나 없이는 공략 불가능하겠어요.
- 한국 랭커 중에 물공 타입이 부족하긴 하지. 그래도 백사현은 가능하지 않을까?
- 그 경우는 양태원이 같이 있어야 할걸요. 백사현은 제 몸을 끔찍이 챙기니까.
- 우연아, 태원이 속 터져서 죽는 꼴 보고 싶어?
- 그 새끼가 죽든 말든 저랑 무슨 상관인지…….
- ……뭐, 이건 돌발성 던전이니까 클리어하고 나면 사라지겠지만 말이야. 너무 이른 걱정이야.
- 그래요. 결론적으로 이 던전은 강예나가 없으면 클리어 불가능이다, 이거죠. 정부 소속 헌터로서 감상이 어떠세요?
- 육성 아카데미에서 검사 클래스로 졸업 시 혜택을 늘려야겠다는 생각?
- 그것참 한가한 생각이네요. 시스템이 헌터 육성을 기다려 주기라도 한대요?
- 네 말을 들으면 항상 우리가 멸망에 쫓기고 있는 기분이란 말이지. 뜻은 알겠다만.
이선이 떨떠름한 기색으로 혀를 찼다.
김숙자 교수 사단이라고 불리는 정부 소속의 헌터 중 가장 강한 마법사로서 생각하는 바가 있기는 할 터였다.
이우연 본인도 마검사인 만큼 마법의 압도적인 화력은 인정하는 바였지만, 몬스터에 속성이 있는 만큼 아무래도 상성이란 게 존재했다.
검사의 육성은 꼭 필요하다.
‘지금 한국은 물리 공격이 가능한 클래스가 너무 없어.’
운동량이 절대적으로 부족한 현대인의 특성이 전투에 맞는 경우도 드물었고, 생사가 걸려 있는 싸움이니 직접 몸으로 부딪치는 클래스를 개방하는 사람이 적은 건 당연한 일이긴 했다.
그래서 강예나가 지금 이 자리에 있는 건 대단한 행운이기도 했다.
어디서 튀어나왔는지는 모르겠지만, 그게 신경 쓰이지 않을 정도로.
아마 이선도 비슷한 심정일 터였다.
- 이거 정말 예나 씨에게 빚을 져 버렸네. 꼭 갚아야겠어.
- 이선 헌터가 빚지고는 못 사는 성격이란 건 누구나 알죠. 뭘 해 주시려고요?
농담으로 받아치자 돌아오는 목소리도 장난스러워졌다. 이선은 정부 소속의 헌터치고는 이우연과 사이가 그럭저럭 나쁘지 않은 축에 속했다.
- 나도 따라서 플레이어명이라도 바꿀까? 그럼 예나 씨가 덜 튈 거 아니야.
그 말을 듣는 순간 이우연은 소리를 내어 하하하, 웃어 버렸다. 곁을 지나가는 사람이 이상하게 쳐다보았지만 어쩔 수가 없었다.
너무 재미있지 않은가.
그러니까, 강예나.
숨길 생각이 있긴 한 거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