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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44화 (45/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44화

- 대기 시간이 곧 종료됩니다.

- 00:05:00

이우연은 메시지를 흘끗 바라보았다.

시간이 없다.

이선도 같은 생각이었는지 빠른 어조로 말을 시작했다.

“그럼 정리해 볼게요. 기본적으로는 아침, 낮, 밤 페이즈로 나뉘고, 아침과 낮은 6시간. 밤 페이즈만 12시간입니다. 하지만 밤의 경우 6시간이 나면 새벽 알림이 뜬다.”

현재 이우연과 이선이 확보한 것은 총 12명.

각기 이 성내의 인물로 빙의한 그들은 이선이 ‘인지’함으로써 모두 시야 제한에서 벗어났다.

기본적으로는 이선이 직접 지도에 나선 만큼 다들 이런 경험이 일천할 뿐, 모두 우수한 헌터들이었다.

정부가 매기는 헌터 등급으로 따지자면 A~B급.

경험 부족으로 6일 차까지 별다른 일은 하지 못했지만, 그래도 시스템 메시지를 보면서 다들 나름의 정보 정리 정도는 하고 있었다.

그나마 다행이었다. 이 던전에 늦게 진입한 탓에 정보가 절대적으로 부족하니까.

이선이 한 번 정리를 하자 장혜원이라는 이름의 헌터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맞아요. 그리고 대기 시간과 새벽에는 공성전이 진행되지 않아요.”

“왜지? 시스템이 보장하는 휴식 시간이라도 되는 건가?”

“대기 시간에는 전투가 멈추니 그런 듯합니다. 하지만 새벽은 시스템에 따르면 스파이가 활동하는 시간이라고 해요. 아직 스파이를 본 적은 없지만요.”

“공성 포지션을 택한 헌터를 말하는 거겠군요. 그들은 새벽 시간을 이용해 히든 클리어 조건을 채우라, 이건가.”

이우연은 별다른 감흥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 정보를 듣고 드는 생각이라고는 역시 지독할 만큼 공평하다는 것 정도.

다만 지금 가장 큰 문제는 남은 헌터 5명의 행방을 알 수 없다는 점이었다.

이선이 성안을 헤집고 다녔지만 대기 시간 1시간 만에 모든 공간을 뒤지는 것에는 한계가 있는 데다, 인지하지 못하도록 감추고 있다면 이선으로서도 알아볼 재간이 없었다.

“공성 포지션을 선택해서 나오지 않는 거겠지.”

한국에서 이우연을 모르는 헌터는 없고, 그렇기에 아직 나오지 않은 헌터들이 보란 듯이 날개를 펼친 이우연을 인지하지 못했을 리 없다.

그런데도 나오지 않는 건 이제 와서 포지션을 바꿀 생각은 없다는 뜻이다.

그야 살아 나가려면 그쪽이 더 편하긴 했다. 어차피 던전 공략이 불가능하다면 살아남는 게 가장 중요하니까.

개인으로서는 훌륭한 선택일지도 모른다.

“……해당 인원은 정부 소속에서는 제명해야겠어.”

이선은 참담한 표정이었지만, 이우연은 아직도 12명이나 수성 포지션에 머무르고 있다는 것이 더 놀라운 일이라고 생각했다.

던전 내에서 헌터들끼리 배신하고 뒤통수를 치는 건 놀라운 일도 아니었다.

게다가 이 던전은 누가 보더라도 공성 포지션이 훨씬 효율적이었다.

그 선택 때문에 포화도가 높아져 밖에서는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나겠지만 뭐, 개인적으로 목숨만 살리면 되는 것 아닌가.

실제로 맨 처음 던전을 빠져 나왔던 헌터가 선택한 방식이다.

목숨 앞에서 공명심이니 사명감 따위는 대개 깃털만큼 가볍고 값싼 것으로 취급되곤 했다.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고 살아남는 것이 진리요, 합리적인 일이라고 생각되는 세상이다.

이우연은 어깨를 으쓱했다.

“우리 존재를 알아차리고 방해만 하지 않아도 다행이죠.”

“하긴, 습격을 받을지도 몰라. 혹시 모르니 다들 조심하고.”

“예, 알겠습니다!”

헌터들이 씩씩하게 대답했다.

다들 전달받은 작전을 복기하는 동안 한 헌터가 이우연에게 조심스럽게 다가왔다.

“저, 죄송한데요.”

최수현이라고 했나? 아니다, 강수현인가? 하여간 차마 말은 걸지 못하고 우물쭈물하기에 이우연은 고개를 돌려 물었다.

“할 말 있으면 하세요.”

“어, 저기…… 혹시 몇 시간 전에 전체 알림 띄우신 게 이우연 헌터님인가요?”

“전체 알림?”

무슨 소린가, 했지만 이우연은 곧 최수현이 말하는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다. 강예나가 아이템으로 외쳤다는 그거로군.

그렇지 않아도 회의 전에 이선에게서 전달받았다. 누군가가 신입 헌터들을 안심시켜 주었다고.

‘뭐, 강예나밖에 없지.’

여느 때처럼 불투명하게 얽혀 있던 정신이 그 이름을 떠올리자 맑아지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이선은 강예나가 정체를 밝히고 싶어 하지 않으니 실상을 알려 주진 않은 모양이었다.

그러니 신입 헌터들 입장에서는 새로 입장한 헌터라고는 이선과 이우연 둘뿐인데, 이선은 아니니 자연스레 이우연이라는 결론을 낸 건가.

이우연은 잠시 망설이다가 곧 빙긋 웃어 주었다.

“저 그렇게 친절한 사람 아닙니다.”

“예?”

“저라면 당장 집합하라고 했겠죠. 조금이라도 써먹어야 하니까.”

그 대답에 헌터의 표정이 애매해졌다.

뭐, 이우연 성격이 장난 아니라던데 실제로도 이상하구나, 그런 생각이나 하고 있을 것이다.

“그럼 대체 누가…….”

“잡담할 시간 있어? 빨리 위치로 가!”

“앗, 넵!”

이선이 불호령을 내리자 신입 헌터가 불벼락이라도 맞은 것처럼 화들짝 놀라 제자리로 뛰어갔다.

이우연은 이선과 시선을 마주치기 전에 홀로 슬쩍 웃었다.

“그럼 헌터들 관리는 잘 부탁드립니다.”

이우연과 이선도 역할을 분담했다.

이선은 다른 헌터들과 함께 성벽을 보호하는 실드를 유지시키기로 했고, 이우연은 보스 몬스터의 처치를 위한 최소 조건을 맞추기로 했다.

이선은 이 역할 분배에 불만이 있어 보였지만 헌터를 보호할 책임이 있다는 점에서 간신히 납득한 듯했다.

“네가 해치우는 추이를 보면서 나도 나갈 테니까.”

물론 3만이라는 병력은 만만한 숫자가 아니었다.

마력에 한계가 있으니 계속 광역 마법을 사용할 수도 없고, 공격 마법에 치중하다 보면 방어에 소홀해지기 마련이다.

결국 몸으로 때워야 할 때가 올 것이다.

그러니 이선과 함께 전장으로 나간다면 분명히 도움은 될 것이다.

“아뇨, 됐습니다.”

그렇지만 실드 유지를 신입 헌터들에게 모두 맡기기에는 부담이 컸다. 적군 측에 거대한 투석기도 보였고, 초기에 진입한 헌터들은 이미 6일 차를 보내면서 정신적으로 꽤 소모된 상태였다.

괜히 이선과 이우연 둘 다 적군을 처치하러 나간 사이 본진이 털려 ‘수성전’ 자체가 실패하면 아주 곤란했다.

신입 헌터들의 관리, 감시, 감독을 할 한 명은 남아 있어야 한다.

그렇다면 남아야 할 사람은 이선이었다.

“걱정 마세요. 제가 다~ 알아서 할 테니까. 정부 헌터들이 다 그렇죠, 뭐.”

사적으로야 나쁘지 않지만 정부 소속 헌터들과 이우연은 입장상 좋을 수가 없는 사이였다.

정부는 책임과 가능 범위를 확실히 하고 싶어 하고, 이우연은 빠른 던전 클리어만을 중요시했으니까.

“우연아.”

이우연은 25살. 이선은 35살로 딱 10살 차이였다. 그래서인지 이선은 사적인 자리에서는 가끔 저렇게 이름을 부르곤 했다.

이우연은 고개를 갸우뚱 기울였다.

“네, 말씀하시죠.”

“너, 한 대만 때려도 되냐?”

“마검사 클래스로 오시면 생각해 보죠.”

- 여섯 번째 밤 페이즈가 시작됩니다. 12:00:00

대기 시간이 완전히 종료되며 메시지가 떠올랐다.

동시에, 방금까지만 해도 중천에 떠 있던 태양의 모습이 바뀌었다. 들판을 가득 채운 적군 너머로 핏빛의 석양이 지는 것이 보였다.

적군이 둥둥, 북을 울리기 시작했다. 귀청이 찢어질 것 같은 뿔 나팔 소리도 들렸다.

순식간에 바뀐 풍경에 동요하는 헌터들과 달리, 성벽 위에 선 기사들과 병사들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래서 더더욱 이것이 현실이 아니라는 실감이 들었다.

이 던전에 빙의된 헌터들과 이들이 보는 세계는 다르다.

그래, 이곳은 시스템에 농락당하고 있는 세계였다.

이미 지나가 버린 일은 신이라고 한들 바꿀 수 없을 텐데, 겨우 이런 연극 따위로 어떻게 그 원한을 풀 수 있다고.

이우연은 이선과 짧은 인사를 나눈 후 그제야 엘리사 메이에게로 다가갔다.

방금 전까지는 성주가 몰래 양성했던 마법사들을 모아 놓고 작전 회의를 해야겠다는 핑계로 잠시 떨어져 있었다.

대화를 들키면 안 된다는 조건이 붙었으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성문이 있는 성벽 바로 위, 가장 높은 곳에 올라와 있던 엘리사 메이는 이우연을 보자마자 가슴에 한쪽 손을 얹었다.

“성주님, 개전을 명해 주십시오.”

“그러지. 그리고 아까 말했듯 전투 중의 지시는 모두 자네에게 일임하겠네, 부단장.”

부단장에게도 자신이 어떻게 움직일지는 이미 설명한 후였다.

아니, 사실 계획이랄 것도 없었다.

부단장에게 내린 지시란 이선을 비롯한 헌터들이 자율적으로 움직일 것을 보장하고, 마법사의 역할이 중하니 그들을 최대한 보호하라는 것 정도였다.

다만, 성주 역할인 자신이 직접 나서는 것을 말리거나 이상하게 여기지 않을까 걱정이었는데.

“정말 홀로 나서실 생각이십니까? 아무리 마법의 힘이 돌아왔다고 한들 위험하십니다.”

예상을 벗어나는 엘리사의 말에 이우연은 순간 흥미가 일었다.

마법의 힘이 돌아왔다, 고?

그렇다면 본래 성주 또한 마법사였는데 마법을 쓰지 못하는 상태였던 건가.

왜 그런 일이 생겼는지 궁금해지는데.

“걱정 말게. 그 정도로 연약하지는 않으니.”

하지만 이우연은 굳이 캐묻지 않았다. 던전 클리어에 쓸모없는 곁다리 이야기는 중요한 게 아니었다.

“그리고 어차피 다른 방법도 없지 않나.”

또 엘리사가 말린다고 한들 그게 사실이었다. 만약 진짜 성주가 이 자리에 있었더라도 이렇게 했을 것이다.

들판을 꽉 채운 적군의 숫자는 일반적인 방법으로는 절대 상대할 수 없는 숫자였다. 심지어 적군의 수장은 강력한 마법사였다.

아무리 분전한다고 한들 수의 차이는 압도적이다. 얼마를 버티건 간에 결국 저들은 이 성을 불태우고 함락시키겠지.

다른 세계의 힘을 빌려 오더라도 절망적인 싸움인 것은 매한가지다.

이우연의 말에 엘리사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이렇게 말했다.

“성주님, 저는 무슨 일이 있더라도 단장님을 따르겠다고 맹세했습니다.”

굳이 답을 필요로 하지 않는 말인 것 같기에 이우연은 대답하지 않았다.

엘리사는 알아서 다음 말을 이어 나갔다.

“그러니 그분이 정신을 잃은 동안, 슬퍼할 일을 만드는 것만은 하지 말아 주십시오.”

엘리사 메이는 자신의 주군일 성주를 바라보는 대신, 들판을 가득 메운 적군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눈에 담긴 결연한 의지가 선명했다.

생존이 아닌, 무언가 다른 것을 지키기 위해 불타오르고 있는 눈이었다.

“무운을 빌겠습니다. 부디 무사히 돌아오시길.”

“그러지.”

이우연은 그렇게 대답한 채 돌아섰다. 뒤는 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이것은 연극에 불과하다.

이 던전은 결국 이미 죽어 버린 자들의 한풀이 장소에 불과하다.

무슨 짓을 하더라도 아무것도 바뀌지 않는다.

누구도 도울 수 없고, 아무도 구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우연이 이곳에 서 있는 것은 이것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강예나를 감싸고도는 것도, 이 던전을 공략하려 애쓰고 있는 것도 모두.

이우연은 석양을 등진 채 성벽 위, 가장 높은 곳에 섰다.

시야에 들어오는 것은 긴 성벽을 빙 둘러 배치된 병사들, 성문 앞을 지키고 선 사람들, 그리고 제대로 된 무장도 갖추지 않은 채 돌 주머니를 매고 있는 자들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행색은 남루하고 안색은 초췌했다. 눈빛 또한 두려움에 가득 차 있었다. 그들이 모두 이우연을, 아니, 성주를 바라보고 있었다.

“살아남아라.”

그렇기에 그들에게 해 줄 수 있는 말도 이것뿐이었다. 이우연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성벽에서 뛰어내렸다.

높은 성벽.

그러나 추락하기 전 등 뒤에서 날개가 돋아났다.

- 스킬, 프시케의 염원이 발동합니다.

언제 봐도 참 이해가 가지 않는 스킬명이란 말이지. 물론 쓸모만 있다면 아무 상관없지만.

이우연은 뒤에서 터지는 찬탄을 무시하며 검을 들었다.

“이 생을 이어 가야 할 필연은 없으나.”

진언이 시작되는 동시에 마검, 레바테인의 끝에 마력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마력 장악이 쉬운 걸 보아하니 보스 몬스터는 근처에 없다.

그렇다면야 얘기는 쉽지.

검을 중심으로 모여든 파란빛의 전류 같은 마력이 하늘을 뒤덮었다. 마력이 깃든 검은 손이 저릿해질 정도의 무게감을 자랑했다.

마법사의 진언은 영혼에 새겨진 그 자신의 언어다. 영혼의 힘을 끌어내는, 그 무엇보다도 절박한 소원.

이우연은 시스템이 태어난 순간 처음으로 빌었던 것을 진언으로 발현했다.

“그럼에도 살아가야 하는 운명에 맞설 기회를.”

말이 끝나는 동시에 몸에서 거대한 마력이 훅 빠져나갔다. 심장도, 뇌도, 모든 생체 현상을 누군가가 인위적으로 막고 있는 것 같은 그 불쾌한 느낌.

그것과 함께.

레바테인의 검 끝에서 푸른빛의 마력이 아무런 형태도 띠지 않은 채 줄기줄기 뻗어 나가 해를 가렸다.

그것은 인위적으로 만들었다고 보기에는 아름다운 풍경이라, 모든 이들이 태양을 우러러보듯 고개를 들었다.

그리고 그들 대부분 자신이 무엇을 보는지도 모른 채 다음 순간, 재로 화했다.

콰과과광!

굉음이 파문처럼 적군의 머리 위를 덮치고, 푸른 전기가 내리친 대지에 불길이 일었다.

그 광경을 보는 동시에 이우연은 외쳤다.

“개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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