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46화
눈을 뜬 순간, 나는 반사적으로 허리춤에 손을 가져가 검을 찾았다.
딱딱한 검자루의 감촉과 함께 정신이 돌아왔다.
“다, 단장님! 정신이 드십니까?”
하지만 아직 상황이 잘 파악되지 않았다. 내게 정신이 드냐고 물은 것은 낯모르는 남자였다.
“너는…….”
“의원입니다, 단장님. 몸 상태가 좋지 않으십니다. 외상도 외상이지만 특히 내장이 상한 듯하니…….”
나는 남자의 말을 흘려들으며 일단 주위를 둘러보았다. 내가 있는 곳은 허름한 천막 안인 듯했고, 나는 간이로 만든 침상에 누워 있었다.
어, 그런데 내가 왜 여기에 있지?
잠시 아무 기억도 나지 않아 당황했지만, 고개를 들자마자 허공에 떠올라 있는 메시지가 보였다.
- 여섯 번째 밤 페이즈 진행 중입니다. 08:21:09
메시지를 본 순간 기억이 떠올랐다. 아, 그렇지. 난 던전을 공략하는 중이었다.
“아니, 잠깐.”
그런데 아무리 봐도 남은 시간이 이상했다. 내가 마지막으로 메시지를 보았을 때는 여섯 번째 낮 페이즈가 종료된 직후였다.
나는 눈앞의 의원을 잡고 물었다.
“내가 기절한 지 얼마나 되었지?”
“5시간 만입니다. 좀 더 누워 계세요!”
의원이라는 자가 말을 더 잇기 전에 나는 손을 내저어 말을 멈추었다. 들어 봤자 뾰족한 수가 나올 것도 아닌데 시간이 아까웠다.
침상에서 내려와 땅에 발을 디뎌 보자 다행히 시야는 흔들리지 않았다. 검을 잡는 손도 떨리지 않았다.
이거면 됐다.
나는 의원에게 나가 보라 손짓했다.
“잠시 몸을 추스르고 나갈 테니 다른 사람에게 가 봐.”
“그렇지만 몸이…….”
“가 보라고 했을 텐데.”
“……네, 알겠습니다.”
의원은 내 강경한 태도에 재차 권하지 않고 천막을 나섰다. 나는 잠시 심호흡을 했다.
나 전쟁도 팽개치고 5시간이나 기절하고 있었던 건가?
미친 거 아니야?
주의를 기울이자 천막을 둘러싸고 있는 인기척이 느껴졌다. 살기는 없어 보이지만, 이렇게 무방비한 상태로 노출되다니. 죽어도 변명할 거리가 없었다.
“……젠장.”
나는 허공을 노려보았다. 기절하기 전 마지막으로 보았던 메시지는 진작 사라지고 없었다.
하지만 그 내용은 생생했다.
“오류 메시지니, 과부하니 뭐니. 대체 무슨 소리야?”
혹시 시스템이 반응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으나 시스템은 묵묵부답이었다. 아까 떠올랐던 메시지가 거짓말이라도 되는 것처럼.
정말 한 대 패고 싶다. 대체 나는 왜 기절해야 했던 건데? 아무리 생각해도 내 몸에 걸린 과부하라는 말이 영 찜찜했다.
오류 메시지라는 말도 그랬다.
그전에 내가 보았던 메시지는 던전 공략 시 일부 정보가 제공된다, 는 것뿐이었다.
아, 그리고 던전 공략을 응원한다는 어이없는 메시지도 있었지. 그 메시지의 어디가 오류였다는 거지?
나는 생각에 잠겨 검을 손가락으로 툭툭 두드렸다.
오류, 오류라…….
내가 지구로 돌아온 뒤부터 이상하게 ‘오류’가 잦은 것은 기분 탓인가?
적어도 타르토스에서 겪어 본 적 없는 일인 건 분명했다.
‘애초에 시스템이란 게 정상이 아닌데 더 수상할 게 있나? 무언가 불완전하거나 오류가 일어나도 이상하지 않다고 생각해, 난.’
그때였다. 이우연의 말이 떠오른 것은.
시스템이 불완전하다는, 그 말.
당시 이우연의 말을 들었을 때도 왜 시스템의 불완전을 의심하는지 궁금했었다. 나는 지난 10년간 시스템의 불완전성을 생각해 본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지금은 다르다. 눈앞에서 이렇게 오류 메시지를 몇 번이나 보고 있으니.
이우연은 뭔가 알고 있을까?
이우연을 추궁해 봐야 하나, 혹은 지금 내가 과민하게 생각하는 걸까?
“아니, 아니야.”
나는 복잡한 머리를 흔들었다.
시스템에 무지하다 보니 여러 가능성이 모든 방향으로 뻗쳐나가고 있었다. 이건 추론이라고 할 수도 없다. 아무런 근거도 없는 이상 모든 건 단순한 망상이다.
지금 확실한 것은 시스템이 확실한 의지를 가지고 움직이고 있다는 것.
시스템 너머에 있는 존재가 신이든 뭐든, 무언가 의도를 가지고 움직이는 게 확실했다.
그래서 머릿속은 복잡한 채였지만 한편으로는 속이 시원해지기도 했다. 목표물이 확실하게 잡힌 셈이니까.
이제까지는 실체 없이 두리뭉실하던 목표가 하나로 좁혀지는 느낌이었다.
타르토스에 정말로 그런 일이 일어났는지, 그리고 어떻게 해야 내 친구들을 구할 수 있을지…… 저 시스템 뒤에 있는 존재에게 도달하면 알 수 있게 되겠지.
지금은 그거면 됐다. 이런 근거 없는 망상에 잠겨 있을 때가 아니었으니까.
- 여섯 번째 밤 페이즈 진행 중입니다. 08:18:53
이러고 있는 지금도 시간이 흘러가고 있었다.
일어나서 정신 차리는 데 3분쯤 걸렸군. 그사이 누가 죽지 않았기만을 바랄 수밖에 없나.
나는 일단 내 능력치를 확인하기 위해 상태창을 불러냈다.
플레이어명 : 방랑하는 구도자(상태 : 빙의)
LV.79 (LV.22)
특성 : 관철하는 아귀 (명예로운 전사)
클래스 : 용사 (기사)
체력 : 440 (+350)
근력 : 385 (+300)
민첩 : 325 (+200)
마력 : 750 (+100)
스킬 : 멸혼의 불꽃 lv.max, 기사회생(사용 불가), 불굴의 의지-on
스킬, 기사회생을 사용하여 일정 시간 동안 체력이 급격히 감소합니다. 남은 시간 00:10:00
생각보다 몸 상태는 나쁘지 않았다.
나는 상태창을 체크하며 손목과 발목을 차례로 풀었다. 기사회생 후 패널티를 받는 시간이 이제 겨우 10분 남았다.
좋아, 그 정도라면 이 천막을 나가 상황을 파악하는 데 딱 좋은 시간이다.
용사를 기리는 망토는 사용 후 쿨타임에 들어가서 사용할 수 없지만, 아까 전쟁터에서 한번 경험해 본 바로는 이 정도의 능력치로도 일반 병사를 상대하는 것 정도는 문제없었다.
물론 보스 몬스터를 잡기에는 부족하지만…… 나는 하하, 하고 소리를 내어 웃었다.
“그래도 살아 있지.”
살아 있으니 뭐든지 할 수 있다.
살아만 있으면 뭐라도 해 볼 수 있다.
정신 차리자, 강예나.
나는 무력하고 모든 걸 해낼 수는 없다. 그러니 지금 할 수 있는 일부터 차근차근, 하나씩 해 나가는 거야.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무엇인지, 제대로 생각해.
그래야만 도달할 수 있을 테니.
그리고 딱 10분 후.
내가 가장 먼저 벤 것은 하늘을 날아오는 돌덩이었다.
숨을 돌릴 틈도 없이 엘리사 메이가 내게로 달려와 상황을 보고했다.
“단장님! 해자가 메워져 적군들이 성벽을 오르고 있습니다! 아직 막고는 있습니다만 서쪽 성벽은 이미 몇 번 뚫렸습니다. 아군의 피해도 상당합니다.”
엘리사의 머리는 온통 피에 젖어 있었고, 무거운 갑옷 따위는 입지도 않았다. 그녀의 모습에서 그간의 치열함이 보였다. 하기야 그 깊던 해자가 적군의 시체로 메워져 있었으니까.
“죄송합니다. 제가 부족한 탓에!”
“아니, 잘했다.”
압도적인 수적 열세에서 5시간을 버티는 것은, 아무리 마법사들이 있다고 하나 피해가 큰 게 당연한 이야기였다. 오히려 함락되지 않은 게 신기할 지경이다.
물론 그 이유라는 것은, 이렇게 높은 성벽에 올라서 보니 한눈에 보였다.
나는 발밑으로 전장을 살펴보았다.
십만의 군대라고는 해도 그들 모두가 정예인 것은 아니었다. 지금 성벽을 기어오르는 자들은 대부분이 잡졸이었다. 제대로 된 지휘 체계가 없어 우왕좌왕하는 것도 보였다.
“저 미친 새끼 뭐 하는 거야?”
“네?”
엘리사가 되물었으나 나는 대답하지 않았다. 기사단장 된 자가 성주를 욕하는 건 단장답지 못한 행동일 테니까.
그렇지만…… 아니, 저 미친놈은 대체 뭐 하는 거야?
빽빽한 적군들의 무리에 둥그런 땜빵이 나 있다.
그것이 바로 이우연이 선 자리였다.
아무래도 적군의 모든 정예가 저쪽으로 몰려 있는 듯했다.
말을 탄 기사들이 너 나 할 것 없이 달려 나갔으나, 이우연이 검을 휘두를 때마다 태풍 앞의 잡초처럼 쓸려 나가고 있는 게 보였다.
도저히, 아무도 상대가 되지 않았다.
기사들도 그 모양이니 일반 병사들은 기겁하며 달아나고 있을 지경이었다.
겨우 이 5년간 대체 어떻게 저런 능력치를 쌓아 올린 거지? 자존심이 상할 정도인데…… 뭐, 자존심 싸움할 상황은 아니지만.
어쨌건 나도 행동에 나서기 전에 이우연과 약간의 상황 정리가 필요할 것 같았다.
마침 적절한 아이템도 있었다.
나는 엘리사에게 전투에 복귀하라고 지시한 후 아이템을 사용했다.
- 푸른 인연의 귀걸이를 사용하였습니다!
- 상대방의 의사를 확인 중입니다…….
- 상대방의 의사가 확인되었습니다!
시야에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을 텐데도 적을 가르는 검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보이지 않았다.
곧 밉살스러운 메시지가 떠올랐다.
― 오, 이번엔 다섯 시간 만에 완쾌했네.
“덕분에! 너는 거기서 다섯 시간이나 죽치고 있었어?”
― 응, 덕분에 과제 중 50퍼센트 정도는 완수했지. 보스 공략 조건 소환해 봐.
나는 잠시 침묵했다가 이우연의 말대로 시스템창을 소환해 보았다.
- 공략 팁 : 진실에 침식된 군주를 처치하려면 권속의 30% 이상을 먼저 처치해야 합니다.
- ‘진실에 침식된 군주’ 권속 처치 수 24,985/36,746
이거 진짜 미친놈이네.
나는 헛웃음을 지었다. 5시간 동안 2만 4천을 상대했다고? 순수하게 감탄하기에는 너무 어마어마한 숫자였다.
어쩐지 자존심이 상한다. 나는 왜 마법에 재능이 없어서.
“너 혹시 수학 못해? 67퍼센트잖아.”
잠깐 대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메시지 너머로 어이없어하는 이우연의 표정이 보이는 듯했다.
― 아니, 뭐 이런…… 당신 이과야?
이과를 뭐라고 생각하는 거야, 이 자식.
“헛소리는 이만하면 됐고. 공략 진행이 순조로운 거 보니까 진짜 보스 몹은 이번 페이즈에는 안 나올 모양이네. 일단 그대로 진행하고 있어.”
― 너무하네. 돌아와서 쉬란 말은 안 해?
“바꿔 줄 수는 있는데. 바꿔 줄까?”
- 연결이 끊어졌습니다.
뚝, 하고 끊어지는 걸 보니 바꿀 의사는 없는 모양이다.
뭐, 하여튼 쌩쌩해 보이니 아직 도와주러 갈 필요는 없어 보였다.
그나저나 정말 공략 수행도를 보니 기가 찼다. 겨우 다섯 시간 동안 저런 짓을 해내다니. 물론 성 쪽에서도 적군을 해치웠겠지만…… 하여간 이대로라면 다음 페이즈에는 보스 몬스터의 공략이 가능해질 것이다.
그러나 그것도 당장 살아남아야 가능한 일이다.
나는 성벽 주위를 빠르게 둘러보았다.
내가 가장 먼저 해결해야 할 것은 끊임없이 성벽을 향해 날아오는 투석기와 메워져 제 역할을 하지 못하는 해자였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상황을 보니 저쪽에서도 투석기로 던질 재료를 수급하는 것에 골치를 앓는 모양이었다. 하기야 이미 전투가 5시간이나 진행되었으니까.
다음 투석기가 준비될 때까지 시간이 약간 있다.
나는 다시 엘리사 메이 곁으로 돌아가 물었다.
“메이 경, 무기는 얼마나 남아 있지?”
“화살은 거의 동이 났고, 주민들과 함께 돌덩이를 나르고 있습니다. 적군이 이대로 계속 몰려온다면 앞으로 한 시간도 버티지 못하고 성벽부터 뚫릴 겁니다!”
그 말과 함께 우선순위가 정해졌다.
성벽이 뚫리면 이쪽의 유일한 장점을 잃게 된다. 수적으로 열세이니 당장 밀리게 될 것이다. 그러니 해자부터 복구해서 더 이상의 적군이 몰려오는 것을 막아야 한다.
밤인 만큼 저쪽도 해자가 복구되면 진군을 강행하지는 않을 터.
그렇지만 어떻게?
횃불이 타는 냄새가 매캐했다. 성벽 아래에는 우글우글한 적군들이 훤하게 보였다. 꽤 진행된 공략 수행도가 우스워질 정도로 많은 숫자였다.
나는 적군들의 시체로 메워져 버린 해자를 보다가 헛웃음을 터트렸다.
“엘리사 메이, 지휘는 부탁한다.”
“존명!”
엘리사 메이는 뜬금없는 내 말에 되묻는 대신 그저 긍정했다.
나는 이선에게로 뛰어갔다.
이선은 곁에 선 사람들의 부축과 호위를 받으며 완드로 바닥을 짚고 겨우 서 있었다.
안색이 창백했다.
저 상태로 진언을 쓰려고 했다니.
이선의 주위로 막대한 마력이 모여들고 있었던 것을 보고 대신 뛰어든 건데 시간에 맞춰 온 듯해 다행이다.
아니, 이 사람에게는 내가 온 게 오히려 불행한 일이려나.
나는 쓴웃음을 지으며 주위에 들리지 않도록 목소리를 낮추고 이선의 귀에 속삭였다.
“혹시 고소공포증 있습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