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47화
다소 뜬금없게 들릴 물음에 이선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예? 아, 아니요?”
“그럼 됐네요.”
그 말과 함께 나는 이선의 허리를 팔로 단단히 감고서 들어 올렸다.
“으, 으악! 뭐 하는 거예요!”
갑자기 허공에 떠 버린 이선이 반사적으로 팔을 들어 내 목을 감았다.
이선은 나보다 키가 훌쩍 컸지만, 그래도 허리는 한 팔에 안을 수 있을 만한 체구라 다행이었다.
“어, 어?”
이선의 곁에 있던 사람들도 놀라며 나를 바라보았다. 그들의 이름을 정확히 아는 게 아니라 인지는 불가능하지만 정황상 모두 한국의 헌터들이겠지.
나는 그들을 향해 외쳤다.
“잠시만 알아서 버티고 있어. 금방 돌아올 테니까!”
“어, 네, 알겠습니다!”
가장 선두에 서 있던 남자가 얼떨결에 대답한 후에 제 입을 막는 것이 보였다. 나는 이선을 안아 올린 채 성벽 밑으로 뛰어내렸다.
뛰어내리는 순간 한 번 더 비명을 지를 거라고 생각했는데 이선은 뜻밖에도 침착했다.
지면으로 추락하는 동시에 이선이 내 등을 툭툭 두드렸다.
“건강해 보여서 다행이네요, 예나 씨.”
“이선 헌터도 무사해서 다행입니다. 상황은 별로지만.”
나는 님페의 바람으로 추락 직전에 땅을 박차며 대꾸했다. 이선이 익숙하지 않은 흔들림에 으악, 하고 소리를 질렀다.
“저도 플라이 마법 정도는 쓸 줄 아는데요!”
“괜한 마력 낭비하지 마세요. 쓸 데가 있으니까. 꽉 잡아요!”
“뭘 하려고요? 으악!”
이선이 머리 위로 날아드는 검에 놀라 머리를 자라처럼 집어넣었다.
“위쪽에서 누가 뛰어내렸다!”
“베어라!”
너무 화려하게 뛰어내려 시선을 잡아끈 탓인지 땅에 내려서자마자 사방에서 검이 찔러 들어왔다.
내 팔이 세 개라면 좋을 텐데. 나는 이선을 잡지 않은 오른팔로 검을 휘둘러 공격을 막아 냈다.
물론 모두를 상대할 필요는 없었다. 나는 피하기 어려운 공격만을 회피한 후 땅을 박찼다.
“으어어!”
이선이 경악하며 내 목에 더 단단히 매달렸다.
나는 그런 이선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해자부터 처리하지 않은 겁니까? 해자가 막힌 걸 뚫으면 성벽을 지키기 훨씬 용이해질 텐데요.”
“저는 투석기를 방비하는 것만으로도 벅차서요.”
그 대답을 듣고 나는 허공에 떠오른 채 한숨을 쉬었다.
이선이 던전에 진입하고 시간이 꽤 흘렀다. 그러니 스스로가 느낄 책임감이 그 시간에 비례해 커진 것은 분명한 사실일 터다.
“즉, 적당한 때를 봐서 공략을 포기하려고 했던 거군요.”
내 말에 이선이 입을 꾹 다물었다.
사실 전장의 상황을 보면 뻔한 일이었다.
이선의 실력을 이우연과 비슷한 수준의 마법사라고 생각해 보면, 아무리 투석기 방비에 집중한다고 한들 해자를 메운 시체를 처리하는 것 정도는 할 수 있을 터였다.
그런데 그걸 하지 않은 것은 이 던전 공략의 실패에 더 큰 무게를 두었기 때문이다.
그야 그렇겠지. 이선 입장에서는 마력을 아껴서 최후의 수단 정도는 남겨 두어야 했다.
이선에게는 지켜야 하는 사람들이 있으니까.
“딱히 비난하는 건 아닙니다.”
실은 나라도 그랬을 것이다.
아니, 지금도 그렇게 하고 있다. 돌아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나는 이들을 이용하고 있다.
“그렇지만 저는 이 던전 공략, 꼭 성공하고 싶거든요.”
그래서 지금 내겐 이선의 도움이 꼭 필요했다.
시스템이 오류 메시지까지 띄우면서 던전 공략 성공 시 보상을 제시했다. 보상을 받게 되면 시스템이 무슨 꿍꿍이로 저런 메시지를 띄웠는지 알 수 있겠지. 그걸 위해서라도 이 던전 공략은 반드시 성공해야만 했다.
“어제 제가 도와 드렸었죠? 그 빚, 당장 돌려받아야겠습니다, 이선 헌터.”
내 말에 이선의 눈동자가 흔들리는 것이 보였다.
이제 해자가 꽤 가까웠다.
나는 적당한 자리를 찾아 땅으로 내려섰다.
이선은 내가 검을 휘둘러 주위를 정리하는 동안 몸에 걸친 로브를 탁탁 털었다.
“그야 빚을 졌다고는 생각했지만.”
이선의 눈길이 빠르게, 거대하고 길게 이어지는 해자를 훑었다.
“저더러 저걸 처리하란 말이군요.”
“네.”
내가 이선에게 원하는 것은 해자를 메운 시체를 다 없앨 수 있는 대규모 마법이었다.
이선이 헛웃음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뜻인지, 충분히 알고 하는 말이죠?”
“그렇습니다.”
이우연도 마력이 동나 적군 사이에서 직접 검을 휘두르고 있으니, 이선도 비슷한 상태일 것이다. 심지어 이선의 클래스는 마법사. 마력이 동나면 회복될 때까지 무방비한 상태가 된다.
그런데도 이선에게 마지막까지 마력을 긁어모아 대규모 마법을 시전하라는 것은, 전장에서 네 목숨을 내게 맡겨 달라고 하는 것과 동일하다.
“한번 도움을 받은 것에 목숨을 걸라니, 이자율이 꽤 세군요. 상환 기간도 짧고.”
“혹독한 현실이죠.”
“정말로 자신 있어요? 보스 몹은 SS급에 적군은 아군의 몇 배. 우리도 다 죽고 밖에서도 던브가 터지면 끝장이에요.”
나를 바라보는 이선의 시선은 냉정했다.
그래, 승률이야 뻔한 일이었고 물론 자신은 없었다. 하지만 나는 자신만만하게 웃어 보였다.
자신이 있고 뭐고, 그런 건 아무런 상관도 없었다. 이건 내가 해내야만 하는 일이었다.
“……좋습니다.”
내가 무언으로 답하자 이선이 침묵 후 완드를 들었다.
검은색의 반들반들한 재질로 된 완드 끝에 석류처럼 생긴 마석이 박혀 있었다. 그 끝으로 거대한 마력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이선이 한숨을 쉬며 말했다.
“무지막지한 고리대금업자에게 잘못 걸린 것 같지만 까짓거, 한번 해 보죠.”
이선의 완드가 휘둘러지는 순간 나도 검을 휘둘렀다.
“단장, 기사단장이다!”
“저자의 목을 따라!”
갑자기 적군 속으로 뛰어든 나와 이선이 누군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던 자들이 횃불에 비치는 내 얼굴을 보고 신병을 파악했기 때문이다.
작정하고 몰려드는 검들 앞에서 나는 외쳤다.
“엄호할 테니 이쪽은 신경 쓰지 말아요!”
이선은 대답하지 않았다. 마법의 시전에도 일정 시간이 필요한 법이다.
특히 대규모 마법일수록.
나는 검에 마력을 집어넣고 날을 늘려 휘둘렀다. 긴 검날에 베인 자들이 쓰러졌지만 밀고 들어오는 인원이 더 많았다.
악전고투하는 동안 뒤에 선 이선을 중심으로 마력이 모여드는 것이 느껴졌다.
아니, 대체 무슨 마법을 사용하려고 이렇게까지? 그렇게 생각했던 순간이었다.
“내가 선 곳이 곧 내 삶의 영역임을 선포하니.”
모든 흐름이 그 외침과 함께 정지했다.
쿠궁!
땅에 커다란 흔들림이 느껴졌다.
갑작스러운 커다란 지진에 적지 않은 병력이 그 자리에서 넘어졌다.
적도, 아군도 모두 깜짝 놀라 동작을 멈췄다.
아니, 멈출 수밖에 없었다.
“어, 뭐야!”
“지진인가?”
“일어나, 얼른!”
그 상황에서 나는 황급히 이선을 돌아보았다.
이선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완드를 붙잡고 덜덜 떨고 있었다. 전형적인 마력 고갈 현상이었다.
심지어 코에서는 쌍코피가 흐르고 있었다.
“이선 헌터!”
나는 다시 이선의 허리를 잡고 땅을 박차 오를 준비를 했다. 하지만 이선이 내 팔을 떨쳐 내며 고개를 저었다.
“아직이에요. 시전자가 자리를 이동해선 안 되니까.”
발밑의 진동은 점점 심해지기 시작했다.
나는 크게 뜬 시선으로 성벽을 바라보았다. 성벽 위에 선 병사들과 주민들도 놀라 웅성거리고 있는 것이 보였다.
내가 이선에게 다시 말을 걸려던 순간.
들판 너머, 저 멀리 보이던 산에서 무언가 굴러떨어지는 것이 보였다.
아니, 굴러떨어지는 것이 아니다. 거대한 산봉우리 그 자체가 바스라지고 있었다.
“무너진다!”
“산이 무너지고 있어!”
쿠구궁!
산이 무너져 땅에 쓰러져 내릴 때마다 거대한 진동이 울렸다. 진원지가 어디인지도 파악되지 않을 정도였다.
모두가 혼비백산하고 있을 때 이선이 다시 한번 지팡이를 바닥으로 내리찧었다.
“이 영역을 침범하는 자에게 벌을 내려.”
차가운 바람이 불었다. 피 냄새가 진동하는 끈적한 밤바람과는 전혀 다른 무언가가.
짠맛이 공기에 감돌고 있었다.
누군가가 떨리는 손을 들어 허공을 가리켰다.
무시무시한 광경이었다.
아무것도 없던, 밤하늘 한가운데서 거대한 파도가 갑작스럽게 생겨나는 모습은 그것이 마법이라는 것을 알고 있음에도 경외감과 거부감이 동시에 들게 했다.
나도 그러니 적군은 오죽할까. 어떤 이들은 무기를 내던지고 바닥에 엎드렸다.
“처, 천벌이다! 천벌인 거야!”
누군가 그렇게 외치는 동시에 이선의 마지막 진언이 터졌다.
“나의 삶을 공고히 하노라.”
“피해!”
저마다 외치는 비명이 들렸으나 하늘에서 덮쳐 오는 해일을 피할 수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공중에서 생겨난 파도가 아슬아슬하게 땅을 내리쳤고, 나는 아슬아슬한 시점에서 이선의 몸을 잡고 허공으로 뛰었다.
파도가 순식간에 해자를 넘어 성벽을 감싸고 있던 적군들을 순식간에 휩쓸고 지나갔다.
해일이 지나가고 나자 그 자리에 서 있는 자는 아무도 없었다.
나는 모든 게 쓸려 나가 버린 땅 위에 이선과 함께 내려섰다.
해일이 휩쓴 자리는 정확히 해자와 성벽 사이의 구간뿐이었다.
해자에는 이제 깨끗한 물이 넘실거리고 있었다.
해자 너머 기괴한 광경을 목격한 적군도, 아군도 모두 경악한 채 이곳을 주목하고 있었다.
그 말도 안 되는 마법을 일으킨 이선은 창백한 얼굴로 바닥에 피를 탁, 뱉어 냈다.
“죽겠다.”
다 쉬어 가는 목소리로, 그 한마디를 한 채 이선은 눈을 까뒤집고 기절했다. 나는 쓰러지는 이선의 몸을 받쳐 안았다.
솔직히 이렇게까지 해 줄 줄은 몰랐다.
“이런…….”
내 입에서 절로 탄식이 나왔다. 아쉬운 일이었다.
- 축하합니다! 보스 몬스터 공략 조건을 달성하였습니다!
이선이 기절하자마자 거창한 팡파르 소리와 함께 황금색의 전체 공지가 허공에 떠올랐으니까.
이선도 저걸 봤어야 하는데.
나는 차례로 떠오르는 공지를 빠르게 훑었다.
- 최대 업적자 : 이필연
- ‘진실에 침식된 군주’의 권속 처치 수 39,101/36,746 달성
- 보스 몬스터가 권속을 30% 이상 잃었습니다!
- ‘진실에 침식된 군주’의 처치가 가능해졌습니다.
- 던전 클리어 조건 : 여덟 번째 밤이 올 때까지 수성에 성공하거나, 혹은 ‘진실에 침식된 군주’를 처치할 시 던전 클리어 판정됩니다.
이선 헌터도 꽤 분발한 편이었지만 결국 최대 업적자는 이우연이었다.
하긴 그야 그렇지. 이우연은 처음부터 던전을 클리어할 작정으로 다섯 시간 내내 전력을 다해 분투했으니까.
당연한 결과였다.
뭐, 하여간. 이번 페이즈는 이렇게 정리된 셈인가.
나는 적군을 바라보았다.
물론 여섯 번째 밤이 끝나기까지는 시간이 남아 있었지만 대규모로 쏟아진 마법은 적군은 물론, 아군까지도 경외감에 짓눌리게 만들었다.
해자 너머에는 마법이 닿지 않았음에도 적군이 한 발자국도 움직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 그 증거였다.
나는 이선을 업은 채 성벽을 올랐다. 몇 번의 도움닫기만으로도 가볍게 성벽에 올라설 수 있었다.
성벽에 오른 내게로 기사들이 가장 먼저 뛰어왔다.
“단장님! 괜찮으십니까?”
“이건 정말 말도 안 돼…….”
“이 친구가 진짜 성주님이 키운 마법사라고요? 세상에, 왜 진작 알려 주시지 않은 겁니까?”
데이먼이 억울한 목소리로 외치다가 동료 기사들에게 얻어맞았다.
다들 갑작스럽게 변한 상황에 얼떨떨해하고 있었다.
물론 적군도 얼이 빠지기는 더할 것이다. 깨끗하게 쓸려 가 버린 공간 너머, 그들은 더 진군하는 대신 완전히 움직임을 멈추고 있었다.
“어, 퇴각을 알리는 나팔 소리입니다!”
“적군이 정말로 후퇴하고 있습니다!”
“그야 그렇겠지. 눈앞에서 해일이 사람을 쓸어 가는 모습을 봤는데.”
얼핏 듣기에는 온화하지만 자세히 들으면 재수 없는 목소리가 들렸다.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생각했던 남자가 날아오고 있었다.
“화려하게도 끝냈군.”
마침, 최대 업적자가 귀환했다.
날개를 접으며 성벽에 내려선 이우연이 나를 향해 웃어 보였다. 피를 뒤집어써서 평소처럼 빛나 보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살아 있어서 다행이었다.
“성주님!”
“성주님이 귀환하셨다!”
“만세, 만세! 성주님 만세!”
돌아온 이우연을 보며 사람들 사이에서 함성이 쏟아졌다.
다들 이우연, 아니, 성주를 보며 눈물을 감추지 못하는 기색이었다. 어떤 이들은 나와 성주를 번갈아 보며 엉엉 울음을 터트리기도 했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이우연은 품에 손을 넣어 은색 가면을 꺼내 착용한 후, 한쪽 손을 들어 환호에 응답했다.
그 환호가 잦아들기 전, 나는 성주에게로 다가갔다. 이우연이 가면 너머로 나를 응시하고 있었다.
왜 그래?
눈빛에는 장난기가 깃들어 있었다.
그래, 내가 보았던 ‘성주’ 또한 죽은 사람이지. 이우연이 빙의되면서 내가 빙의된 기사단장처럼 이름도 남기지 않고 사라져 버렸다.
여기에 남은 것은 그들의 소원뿐이다.
누군가가 지키고 싶어 했던 것을 바라보며 나는 천천히 검을 빼 들고 가슴 앞에 세웠다.
나를 따라 엘리사가, 데이먼이, 미구엘이. 시스템의 메시지로 이름을 알게 되었을 뿐인 유령들이 나를 따라 자신의 성주를 향해 경의를 표시했다.
전투를 겪으며 만신창이가 된 모두가 피를 뒤집어쓴 몰골의 성주를 올려다보았다.
내 것이 아닌 말이 입을 빠져 나왔다.
“주군, 우리는 영혼을 걸고서라도 반드시 이 성을 지켜 낼 것입니다.”
그렇게 말하는 입을, 나는 스스로의 의지로 막을 수도 있었다.
결국 이 자리에 서 있는 것은 내 의지니까.
이건 결국 연극에 불과하다.
나도 그걸 안다.
그렇지만 나는 기사단장의 의지대로 입을 빌려주었다.
“그러니 부디 이 전장에 목숨을 바치는 것을 허락해 주십시오.”
그도 그럴 것이, 내가 빙의한 기사단장은 목숨을 바치기로 작정했던 자신의 주군에게 그저 이 한마디를 하고 싶어서 여기까지 왔다.
너무도 사무쳐 스스로를 원망하고 미워하느라 죽어서도 잊지 못했다.
겨우 이 한마디가, 이런 감정 따위가 자연의 섭리조차 거슬러 오랜 세월 자신의 영혼을 얽매었다.
이것을 기적 외에 무엇이라고 부를 수 있겠는가.
- 당신은 해당 인물로서 훌륭하게 행동하였습니다! 던전 클리어 시 업적치 정산에 가산됩니다.
떠오르는 메시지를 바라보며 나는 눈을 감았다.
깊은 밤이었다.
사람들이 든 초라한 횃불 외에는 그 무엇도 어둠을 밝히고 있지 않았으나, 그것으로 충분했다.
적어도 이름 모를 기사단장에게는 그랬다.
- 여섯 번째 밤이 진행 중입니다. 06:11:05
- 곧 새벽 페이즈가 진행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