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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48화 (49/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48화

Chapter 7. 종막(終幕)

“일단 시간은 번 셈이군. 새벽 동안에는 공성전이 진행되지 않으니까. 이선 헌터, 수고하셨습니다.”

“네, 진짜 죽는 줄 알았어요.”

나는 작전 회의라는 명목으로 방금 정신을 차린 이선과 이우연을 끌고 성안 저택의 적당한 방을 찾아 들어와 있었다.

고맙게도 세바스찬 할아버지가 술까지 준비해 준 터라 작당 모의를 하기에는 안성맞춤이었다.

다만 이우연은 술을 사양했고, 이선도 지금 몸 상태로는 취할 것 같다고 해서 나만 위스키를 컵에 담아 홀짝이고 있었다.

음, 독하네.

딱 좋다.

한 모금만 더 들이켜려는데 이우연이 손을 뻗어 내게서 컵을 빼앗아 갔다.

“강예나, 술이나 마실 때야?”

“애라서 그런가, 뭘 모르네. 술이라도 있어야 이런 상황을 버티지.”

“애라니. 우리 동갑 아니던가?”

“누가 그래. 동갑이라고? 네가 내 민증이라도 봤어?”

“두 사람, 사이좋은 거 아니었어요?”

이선이 묻는 말에 나와 이우연은 상반된 대답을 한 후 서로를 노려보았다.

먼저 정신을 차리고 시선을 돌린 것은 나였다.

“뭐, 이렇게 싸울 때는 아니죠. 의논할 게 많으니까요.”

현재는 앞으로 어떻게 행동할지 우리의 의견을 통일시키는 것이 제일 중요했다.

이 던전을 클리어하기 위해서는 두 가지 방법이 있다.

하나는 여덟 번째 밤까지 이 성을 지키는 것이고, 두 번째 방법은 보스 몬스터를 쓰러트리는 것이다.

하지만 아까 전 전투의 양상으로 보았을 때.

“일단 여덟 번째 밤까지 끌고 갈 순 없을 것 같아요.”

내가 앉은 의자 팔걸이에 걸터앉은 이우연이 내 말에 동의했다.

“맞아. 겨우 한 번의 페이즈가 지났을 뿐인데 이렇게까지 소모한 걸 보면 수성전 쪽으로는 가망 없어.”

“뭐, 확실히 그래요. 신입인 만큼 실전에서는 제 역량을 반도 발휘하지 못하는 데다가…… 저는 다음 페이즈에는 별로 도움이 안 될 거예요.”

이선이 별로 분한 기색도 없이 어깨를 으쓱였다.

마력 회복제를 소비했지만 그래도 아까처럼 대규모 마법을 사용하기까지는 어느 정도 시간이 필요할 듯싶었다.

이우연도 끼어들었다.

“나도 마찬가지야. 대규모 마법을 시전하려면 적어도 하루는 더 회복 시간이 필요해.”

“그렇다면 당장 내일도 버티기 힘들어요.”

이선은 나와 이우연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한숨을 쉬었다.

“솔직히 말할게요. 아깐 예나 씨를 돕긴 했지만, 지금도 저는 두 사람이 공략을 포기하고 히든 클리어 조건을 찾아 던전을 탈출했으면 좋겠어요.”

“그랬다간 신촌 한복판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텐데요.”

“랭커 두 명을 한꺼번에 잃는 것보단 던브를 제압하는 게 차라리 나아요.”

그 말에 나는 움찔했다. 동공이 사정없이 흔들리는 게 느껴졌다.

래, 랭커? 두 명이라고 하는 걸 보면 이우연과 이선 본인을 이야기하는 거겠지……?

아니면 설마 내가 랭킹 1위라는 걸 이선에게도 들킨 거야?

와, 내가 그렇게까지 단서를 흘리고 다녔나……. 응, 그러긴 했지. 검으로 돌덩이를 가를 때 좀 힘든 척을 할 걸 그랬나.

그간의 내 행적이 머리를 스쳐 지나가는 바람에 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내가 괴로워하는 동안에도 이선과 이우연의 대화는 계속되고 있었다.

“이선 헌터…… 그거 정말 본인이 책임질 수 있는 이야기인 건 맞습니까?”

“던전 공략 지속 판단 여부는 이 공략 팀의 리더인 제 권한이에요.”

“저는 실패 후 발생한 일에 대한 책임을 말하는 겁니다만.”

“제가 책임지겠습니다. 일선에서 물러나든, 배상을 하든 모두.”

이선의 어조는 무척 강경했다.

정부 소속 헌터라더니, 저렇게 강하게 말하는 것을 보면 꽤 높은 위치에 있는 모양이었다.

그러나 이우연은 아랑곳하지 않고 비꼬았다.

“던브가 일어나면 일반인들 희생도 만만치 않을 텐데요. 남의 목숨을 어떻게 배상하시려고?”

“그렇게 비꼴 일이 아니에요. 이우연 헌터는 본인의 위치를 좀 자각할 필요가 있습니다. 만일 랭킹 2위의 헌터가 여기서 죽기라도 하면요?”

“이선 헌터야말로 생각을 좀 하시죠. 정부 소속 헌터로서 던전에 의한 희생을 막으려고 해야 하는 거 아닙니까?”

“내가 지금 그걸 몰라서 이렇게 말하는 게 아니잖아. 당장 네가 빠지면 앞으로의 정기 공략에 얼마나 차질이 있을지 몰라서 그래? 나라고 그러고 싶어서 그러자는 게 아니잖아!”

“워, 워.”

나는 싸움이 붙은 소를 말리듯 두 손을 내저었다.

“두 분 다 싸우지 마시고요. 진정하고 이야기합시다.”

“예나 씨도 마찬가지예요!”

큰소리에 저도 모르게 뜨끔했다.

이런, 나도 혼나는 건가.

이선이 주먹을 꽉 쥐고서 고개를 푹 숙였다.

“그야 물론 던전 브레이크를 막으려는 사명감은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감명 깊은 자세이긴 하지만요. 그래도 지금은…….”

그렇게 말하는 이선의 표정은 끔찍해 보였다.

타인이 보기에 그녀의 표정이 끔찍하다는 게 아니라, 본인이 스스로 하는 이야기를 끔찍해하는 표정이었다.

“일단 몸을 빼는 게 합리적이라고 생각해요. S급 랭커들의 가치는 그만큼 커요. 희생을 감수하더라도 빼내야 할 만큼.”

목숨의 경중을 나누는 자신을 혐오하면서, 그래도 이선은 자신의 입장을 분명히 했다.

이우연은 코웃음을 쳤지만 이선의 입장도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빠져나갈 길이 없다면 모를까, 탈출할 수 있는 길이 있는데 여기서 우수한 헌터들을 잃는다면 타격이 클 것이다.

그나저나 S급 헌터는…… 그…… 나를 포함한 이야기인 거겠지?

……역시 들킨 거지?

더 이상 현실 도피를 할 수도 없을 정도로 못이 땅땅 박혀 버렸다.

나는 상황도 잊고 높은 천장을 바라보았다.

이우연이 내 어깨를 툭툭 쳤다.

“갑자기 왜 그래?”

“아니야, 아무것도.”

다행이라면 다행인 게, 이우연과 마찬가지로 제 랭킹을 올리겠다며 내게 당장 칼을 뽑을 위인은 아니라는 것이다.

물론 이선이 이우연처럼 내 정체를 밝히지 않는 데 협조해 준다면 더 좋겠지만, 정부 소속 헌터인 만큼 그건 어려울 것 같고…….

내가 머리를 감싸고 고민하는 동안 이우연이 대신 입을 열었다.

“어쨌든 전 싫습니다. 나가고 싶으면 이선 헌터만 나가세요. 신입들 데리고 나가는 것도 상관없습니다.”

“……이우연!”

“이제까지 공략한 게 아까워서라도 못 나갑니다. 여기까지 왔으면 끝장을 봐야죠.”

사실 저 녀석이 저렇게 나올 건 예상하고 있었다.

이우연은 이 던전을 공략하려고 5시간 동안 홀로 전장에서 싸워 냈다.

심지어는 성과도 있었다. 보스 몬스터 처치 조건을 달성했으니까. 무려 SS급 몬스터를 공략할 기회이니 아깝지 않다면 인간, 아니, 헌터가 아닐 것이다.

만일 목숨이 아까워서 도망칠 성격이라면 애초에 랭킹 2위를 차지하지도 못 했을 것이고.

“저도 이대로 진행하고 싶습니다.”

나는 드디어 둘의 대화에 끼어들었다.

이선이 흔들리는 눈동자로 나를 바라보았다.

“……예나 씨까지.”

“김숙자 교수님이 던전 브레이크를 막으라고 저를 들여보내 준 건데, 실패하면 제 체면이 말이 아니죠.”

게다가 이우연의 주장은 나와도 이해관계가 일치했다. 나도 이 던전은 반드시 공략해야만 하니까.

“그렇지, 그렇지. 당신이랑은 말이 통해서 다행이네.”

이우연이 웃으며 내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웃지 마라, 너 때문에 찬성한 거 아니니까.

“이우연 헌터! 지금 장난이나 칠 때예요?”

아니나 다를까, 그 장난스러운 기색 때문에 이선이 화를 내며 목소리를 높였다.

하지만 이우연은 역시 눈 하나 깜박하지 않았다. 그는 속세의 더러운 것 따위는 아무것도 모를 것 같은 천진한 얼굴로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장난이 아니에요. SS급 보스 몬스터가 나오는 던전에서 이만큼이나 공략을 진행했어요. 드랍될 아이템이든 뭐든, 굉장한 게 나올 텐데 나는 그거 두고는 못 나가요.”

음, 얼굴과 전혀 어울리지 않는 속물적인 이유였다.

하지만 나도 동의했다.

“그건 그렇죠. 굉장한 게 나올 건 분명해요.”

내 에이펙스의 광검만 해도 SS급 던전을 처치한 후 받은 아이템이었다. 시스템은 때때로 심연 같은 악의를 내비치지만 시련에 걸맞은 보상은 확실하게 주는 편이었다.

그러고 보니 내가 에이펙스의 광검을 얻었을 때는 던전 공략에 거의 한 달쯤 걸렸던 것 같은데. 만일 내 계획대로 이 던전이 클리어된다면 공략 소요 시간은 겨우 이틀이다.

와, 그렇게 계산해 보니 개꿀이잖아.

이선은 나와 이우연의 말을 듣고 질렸다는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나야말로 이선이 신기할 지경이다.

그래도 랭킹 4위까지 했는데 어떻게 아이템이나 업적치 욕심이 저렇게 없을 수가 있지? 사실 이름이 이선이 아니라 신선인 거 아닌가?

“그것도 다 이 던전을 클리어해야만 받을 수 있는 거잖아요. 예나 씨, 보스 몬스터와 전면전을 펼쳐서 이길 자신이 있다는 말이에요?”

“설마요. 승산이 없다고 봐야죠.”

“예나 씨?”

“강예나?”

나는 어리둥절한 두 사람의 얼굴을 보며 씩 웃었다.

“사람 말은 끝까지 들어야죠. 전면전은 승산이 별로 없어요. 그러니까 일단…….”

솔직히 말하면, 새벽 페이즈 이야기와 이선이 빙의한 인물의 정보를 들었을 때부터 내 머릿속에는 어느 정도 계획이 세워져 있었다.

오늘 새벽이 지나가기 전에 이 던전 공략을 끝내 버릴 계획이.

“두 사람에게 물어보고 싶은 게 있어요.”

*   *   *

내가 발걸음을 옮긴 곳은 성 아래에 있는 지하 감옥이었다.

퀴퀴한 냄새가 진동하는 어둑한 계단을 내려가며 횃불을 든 데이먼 오닐이 콜록콜록, 과장된 기침을 했다.

“아이고, 좀 쉬나 했더니 단장님 횡포란.”

“그렇게 쉬고 싶어? 쉬게 해 줘?”

“잘못했습니다. 아, 수고.”

“단장님, 오닐 경! 수고하십니다.”

감옥 앞에 있던 병사들이 기합이 바짝 든 채로 경례를 붙였다.

데이먼 오닐이 주머니에서 열쇠가 여러 개 달린 열쇠를 꺼내 감옥 입구의 문을 열었다. 나는 그사이 병사에게 죄수의 상태가 어떤지 보고를 들었다.

“전투에서 입은 상처가 컸는지 계속 기절해 있다가 두 시간 전쯤 깨어났습니다. 계속 소리를 지르더니 얼마 전에 잠잠해졌습니다. 식사는 가져다주지 않았고요.”

“저런, 목이 다 쉬었겠군.”

나는 병사 중 하나에게 죄수에게 가져다주려고 준비해 둔 빵과 물을 챙겨서 따라오라 지시했다.

데이먼이 문을 열고 앞장섰다.

내가 찾는 죄수를 가둬 둔 감옥은 제법 깊은 곳에 있었다.

계단을 내려가는 동안 다른 감옥에 갇힌 죄수들이 가끔 처량하게 눈을 들어 나를 바라보거나, 혹은 분노에 찬 소리와 함께 쇠창살을 두들기곤 했다.

그러나 그것들은 다 애교에 불과했다. 가장 아래층의 감옥에 도달한 순간, 양쪽 쇠창살에서 모두 귀를 찢는 비명이 울렸으니까.

“너, 너, 너!”

“단장!”

“아이고야.”

나는 귀청이 찢어질 것 같아 양쪽 귀를 막았다.

시끄러워 죽겠다. 누가 이 둘을 같은 층에 가둬 두랬어?

“아니, 단테 경도 도주의 위험이 있으니 가장 밑에 처박아 놓은 거였는데…… 설마 저쪽 후계자도 사로잡힐 줄은 몰랐죠.”

데이먼이 변명을 하며 머리를 긁적였다.

“차라리 칼 들고 싸우는 게 낫겠다.”

다른 층의 죄인들도 큰 소리를 듣고 제각기 억울하다느니, 닥치라느니 하며 아우성을 치는 소리가 계단을 타고 왱왱 울렸다.

그렇지 않아도 전투를 한바탕 치르고 온 몸이라 영 피곤한데 시끄럽기까지 하니 저절로 짜증이 솟아올랐다.

결국 나는 쇠창살 앞에 놓여 있던 궤짝 하나를 계단을 향해 뻥, 찼다.

와장창!

궤짝 안에 뭐가 들었는지 깨지고 부서지는 소리가 났다. 굉음이 일자 아우성치던 죄수들이 삽시간에 조용해졌다.

“시끄러워, 이 새끼들아! 영원히 입 닥치게 해 줄까! 어?”

그러고 나서도 성질이 가라앉지 않아 한바탕 욕을 쏟아부으니 다들 그제야 조용해졌다.

나는 머리를 헝클어트리며 쇠창살 너머의 죄수를 바라보았다.

창살 너머로 보이는 것은 피에 떡 진 머리카락과 불에 비쳐 흔들리는 게 빤한 눈동자.

위협적으로 군 보람이 좀 있나?

나는 건들거리는 자세 그대로 남자를 내려다보며 피식, 비웃었다.

“야, 후계자. 꼴좋다?”

“뭐, 뭐? 뭐 이런 무엄한……!”

“무엄이고 나발이고, 포로가 된 주제에 무슨 예의를 찾아? 그렇지 않나, 오닐 경?”

“그렇습니다. 제멋대로 쳐들어와 전쟁을 시작해 놓고서 사로잡히니 대접을 바란다? 전하, 아무리 귀한 후계자라도 그렇지, 너무 뻔뻔한 것 아닙니까?”

그렇게 말하다가 데이먼이 작위적으로 손뼉을 짝, 쳤다.

“아, 맞다. 아버님한테 버림받으셨죠? 이제 후계자도 뭣도 아니네. 그럼 뭐라고 부르죠? 개새끼?”

“……죽일 거라면 죽여라. 이런 수모를 주다니, 기사로서의 긍지는 없느냐!”

“엥? 그렇게 죽고 싶으면 당장 죽으면 되는 거 아닙니까? 포박까지는 안 했는데 왜 아직 살아 계신지…….”

나는 혀를 내둘렀다.

와, 물론 약 올리라고 지시를 해 두긴 했지만…… 이거 정말 이죽거리는 데는 도가 튼 놈이네. 이우연이랑 붙여 놓으면 누가 이길까?

일단 둘이 싸우는 자리에는 있기 싫다. 내 복장이 터질 것 같으니까.

남자는 모욕받은 것이 아주 분한 모양인지 손까지 부들부들 떨고 있었다. 횃불에 비치는 얼굴이 아주 창백했다.

나는 그 얼굴을 내려다보며 웃었다.

“그러게, 살아 있는 걸 보니 당장 죽을 생각은 없는 것 같고.”

“죽일 셈이냐?”

“아니, 내가 왜? 이렇게 쓸모 있는 패를.”

후계자라는 이 청년이 내게 사로잡혔을 때 군주는 자신의 아들에게 자결을 명했다. 표정을 보지는 못했지만 나는 이 청년의 등이 분노와 수치를 이기지 못하고 떨리는 것을 보았다.

딱 보기에도 멍청하고 자존심만 센, 그러나 그에 걸맞은 실력은 없는 놈이 아닌가. 성질을 이기지 못하고 나를 상대하러 뛰쳐나왔다가 공개적으로 버려진 셈이니 그 심정이 오죽할까.

나는 감옥 바닥에 주저앉아 청년과 시선을 마주했다. 청년의 눈동자에 웃고 있는 내 얼굴이 비쳤다.

움찔하는 청년의 어깨를 바라보며 나는 낮은 목소리로 조용히 속삭였다.

“이봐, 후계자. 계승에는 관심 없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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