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49화
내 말을 들은 남자의 표정이 보기 흉하게 일그러졌다.
“뭘 그렇게 놀라?”
“나더러 아버지를 배신하라고? 네가 누구를 향해 말하는지 알고는 있느냐?”
혈육이 맞기는 한가 보네. 하도 매정하게 내쳐서 아닌 줄 알았지.
다행히 이번 말은 노이즈가 끼지 않았다. 시스템이 정보를 차단하는 기준이 뭔지 도통 모르겠단 말이지.
“뭐, 천천히 말해 보자고. 일단 먹어. 기운은 차려야 할 거 아냐?”
나는 병사에게 가져온 식사를 감옥 안으로 넣어 주라고 지시했다. 빵과 물이 들어갔지만 남자는 본 체도 하지 않았다.
그는 코웃음을 쳤다.
“이런 개밥 따위를 먹으란 말이냐. 미쳤군!”
“저런, 아직 덜 굶었네.”
며칠 굶어 봐라. 빵 부스러기건 곰팡이건 구별도 하지 못하고 있는 대로 핥아먹게 될 거다.
나도 겪어 봐서 안다. 배고픔 앞에서 인간의 존엄성이란 쉽게도 사라진다. 이 남자도 며칠 굶기면 개밥이고 뭐고 구분할 수 없게 될 것이다.
다만 문제는 내게 별로 시간이 없다는 것.
이선 앞에서는 큰소리를 쳤지만 어려운 상황인 건 틀림없다.
당장 이길 수 있는 방법은 전무했다. 공성전을 버티는 것도, SS급 몬스터를 정면에서 상대하는 것도 힘들다.
그렇다면 정석이 아니라, 편법을 쓸 수밖에.
나는 후계자의 얼굴을 보며 빙글빙글 웃었다. 정말이지, 저 자식이 내 손에 들어오지 않으면 어쩔 뻔했어.
신난 나와는 반대로 내 얼굴을 본 후계자는 어깨를 움찔거렸다.
너무하네.
“그런데 배신이라고 할 것도 없지 않나? 그 아버지란 작자가 널더러 자결하라고 하던데.”
“그렇죠. 사실상 버림받은 거죠.”
이번에는 시키지도 않았는데 데이먼이 옆에서 깐죽거렸다. 입에 담은 것이 조금의 과장도 없는 진실이라는 점에서 더 날카롭다.
남자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에 말을 어물거렸다.
“그건…… 폐하께서는 군주로서 당연한 판단을 하신 것뿐이다.”
“그래, 그러니까 당신도 냉정하게 계산해 보라고.”
내가 바쁜 와중에 이 지하 감옥까지 내려와 후계자를 꼬드기는 것도 물론 냉정하게 계산한 결과였다.
나는 지난 10년간 제 피붙이를 살해하려 드는 왕가의 일족을 몇 명이나 봐 왔다. 그래서 권력이 어떻게 사람을 망가트리는지도 안다.
물론 이 세계가 어떨지는 모르겠지만, 인간이 사는 이상 그리 다를 것도 없을 것이다.
“당신은 버림받았고, 아무도 당신을 구하러 오지 않을 거야. 이대로 끝낼 건가?”
모두가 듣는 앞에서 후계자에게 자결을 명령하는 수준이다. 이제껏 눈앞의 청년이 어떤 취급을 받아 왔을지는 뻔했다.
내가 창살 사이로 손을 뻗어 턱을 틀어쥐고 끌어당기자 그는 반항도 하지 못하고 끌려왔다.
남자의 이마가 쾅, 하고 창살에 부딪혔다.
“윽!”
“네 말대로 너는 고귀한 후계자인데도 말 한마디로 쉽게 버려졌지.”
“난…….”
남자의 눈동자가 아주 가까웠기에 나는 그의 아주 미세한 떨림까지도 볼 수 있었다.
굴욕감과 무력감…… 그렇지만 그것뿐일까.
나는 나지막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복수하고 싶지 않아?”
내 말을 들은 데이먼이 매우 마음에 들지 않는다는 듯 혀를 찼지만, 그래도 이번에는 첨언하지 않았다.
뜻밖의 말이었는지 후계자는 꽤 오랫동안 침묵했다.
속으로 1분을 세었을 즈음에야 쉰 목소리가 남자의 목에서 흘러나왔다.
“웃기고 있군.”
“그리 웃긴 소리는 한 기억이 없는걸.”
“복수라니, 애초에 이 전쟁에서 네놈들이 이길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하나?”
“그렇게 말하는 걸 보니 복수할 수 있다면 하겠다는 의미로군. 좋아.”
복수할 생각 따위는 없다면서 혹시 절대적인 충성심이라든가 효심이라도 보인다면 이 계획은 성립되지 않으니 나로서는 나쁘지 않은 반응이었다.
나는 남자의 턱을 놓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렇다면 확인시켜 주지.”
데이먼은 내키지 않는 기색이었으나 미리 말을 맞춰 놓은 대로 감옥의 자물쇠를 풀었다. 나는 감옥 안으로 성큼성큼 걸어 들어가 남자의 멱살을 잡고 자리에서 일으켰다.
“뭐, 무슨 짓을…… 컥!”
“이렇게 힘이 없어서야 쓰나. 그러니까 식사라도 하라니까.”
청년은 변변한 반항도 하지 못했다. 생각보다 더 기력이 없군.
“일어나서 따라와.”
지하 감옥의 긴 계단을 올라가는 동안 남자는 계속해서 비틀거렸다.
철창에 갇힌 이들이 감옥을 나서는 남자에게 야유를 보내고, 올라갈수록 울리는 소리가 메아리쳐서 귀를 시끄럽게 만들었다.
그래서인지 남자를 성벽 위로 데려갔을 즈음에 그는 이미 혼이 쏙 빠져 있었다.
하지만 나는 아랑곳하지 않고 남자의 고개를 강제로 들게 했다.
“자, 봐.”
성벽 아래를 내려다본 남자의 눈이 커졌다. 믿을 수 없는 것을 본 것처럼 눈동자가 흔들렸다.
그것도 그럴 것이, 시야에 펼쳐진 전장은 제법 처참한 꼴이었다. 달빛이 비치는 땅에는 시체가 늘어져 있지 않은 곳이 없었다.
모두가 적군의 시체였다.
반면 이선의 활약 덕에 성벽과 해자 사이는 손상 하나 없이 깨끗한 채였다. 물론 이쪽의 피해도 컸지만 지금 이 성벽 위에선 보이지 않을 터.
“도대체 어떻게…….”
남자가 허탈한 얼굴로 바닥에 주저앉았다. 완전히 얼이 빠진 상태였다.
아마 그로서는 이해할 수 없는 광경이겠지. 이 남자가 기억하고 있는 낮만 해도 이미 우리는 보스 몬스터의 마법에 눌려 있었으니까.
하지만 겨우 저 정도로 완전히 넋이 나가 버리다니. 저거 역시 좀 모자란 놈 아닌가?
뭐, 물론 단지 저 광경만으로 혼을 빼놓은 건 아니지만…… 나는 아까 전부터 떠올라 있는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 ‘푸른 인연의 귀걸이’를 사용 중입니다.
― 어때, 좀 먹히는 것 같아?
타이밍을 맞추기라도 했는지 이우연의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씩 웃으며 조그맣게 말했다.
“아주 잘.”
― 그거 아주 잘됐군.
남자가 이렇게까지 쉽게 절망한 것은 내가 밀어붙인 것도 있지만, 이우연이 후계자에게 걸어 둔 정신 계열 마법이 한몫했다.
지금 저 남자의 눈에는 내가 보는 전장의 상황이 훨씬 과장되어 보이고 있을 테니.
정신계 마법을 탐지한 탓인지 허리에 찬 에이펙스의 광검이 아까부터 불안하게 진동하고 있었다.
걱정하지 마. 저 녀석, 지금만큼은 내 편이니까.
“이걸로 알겠지? 이 전쟁에서 우리가 이길 가능성은 충분해. 다만, 네가 도와준다면 서로 쓸모없는 피해를 내지 않아도 돼.”
“어, 어떻게 도와 달란 말이냐. 내가 대체 뭘 할 수 있다고…….”
이건 진심에서 나온 말이로군.
저도 모르게 나온 말인 듯, 남자는 말한 후 제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렇지만, 병력을 잃었다고 해도 그뿐이다. 아버지가 어떤 분인지 너도 알고 있을 텐데. 그분에겐 자비가 없어. 그리고 누구보다도 강하지.”
“그건 나도 알아.”
SS급 보스 몬스터로 판정될 정도니 말이야.
“너보고 죽이란 말이 아니야. 죽이는 건 내가 할 거다.”
“그러니까 그런 일은 누구에게도 불가능하단 말이다!”
“불가능하지 않아. 아까 전 내가 이미 한 번 죽였거든.”
그렇게 말하고 나는 한마디 덧붙였다.
“다시 살아나긴 했지만.”
내 말을 들은 남자가 경악했다.
“뭐, 뭐라고? 방금 뭐라고 했지?”
“뭐에 놀란 거야? 내가 죽였다는 것? 혹은 다시 살아났다는 것? 둘 다 사실인데.”
남자는 전장의 상황을 봤을 때보다도 훨씬 더 놀란 모습이었다.
그는 믿을 수 없다는 눈으로 나를 아래위로 훑어보다가, 이윽고 황망한 얼굴이 되어 고개를 떨궜다.
“……정말이로군.”
그 반응에 나는 고개를 갸웃했다.
“엄청 의심하더니, 믿는 거야?”
“폐하가 죽음에서 돌아올 수 있다는 걸 아는 자는 극소수다. 나 같은 최측근이거나, 혹은…… 정말로 아버지의 목을 잘라 본 인간뿐이지.”
“저런, 보는 눈이 많았는데 큰일이군.”
이런 스킬은 숨길수록 유용하니 비밀로 하는 것도 당연했다. 본의 아니게 남의 비밀을 아주 만천하에 까발리고 말았다.
나이스.
“이제 이야기가 쉬워지겠네. 알겠지? 네 아버지를 죽이는 게 내게는 불가능한 일이 아니라는 거. 어쨌거나 네가 후계자잖아. 나머지는 네가 알아서 할 일이고.”
내가 싱긋 웃자 남자가 침을 꿀꺽 삼켰다.
포로로 잡혀 아군에게 버림받은 상황에 내가 뻗는 손은 한 줄기 동아줄이나 다름없을 터였다.
그리고 잠시 후, 드디어 내가 원하던 대답이 나왔다.
“내가 뭘 하면 되지?”
됐다!
나는 속으로 환호성을 질렀지만, 일단 침착한 척하며 남자에게 계약서를 내밀었다.
“일단 여기 서명해.”
남자는 여전히 망설이는 듯했지만 곧 계약서를 훑어보고서 그럭저럭 근엄한 태도로 고개를 끄덕였다.
“좋아, 서명하겠다. 문서로 남겨 두는 건 중요하니까.”
― 저 자식, 읽어 보긴 한 거야? 내가 얼마나 열심히 썼는데.
이우연이 메시지로 투덜거렸다.
사실 이런 반응은 당연했다. 계약서는 이우연이 멋대로 작성했으므로 남자가 그냥 넘겨서는 안 되는 조항이 꽤 많았다.
가령 내 목적인 황제의 죽음을 달성하기 전까지 남자는 내 말에 절대적으로 복종한다든가.
그 독소 조항을 보지 못했을 리 없을 텐데 남자는 호쾌하게 펜을 잡았다.
나는 일단 한 번 충고했다.
“정말 다 읽었어? 여기 서명하면 계약서에 전부 동의하는 거다. 돌이킬 수 없어.”
“몇 번이나 말하는 거지? 나도 알고 있다.”
― 모르는 것 같은데.
어휴, 저 자식은 또 왜 저렇게 말이 많담. 나는 이우연이 보낸 메시지를 무시하면서 남자가 서명란에 자신의 이름을 적는 것을 보았다.
그리고 펜이 떨어진 순간.
- 아이템, ‘금석맹약의 서’가 성립되었습니다.
황금빛의 마력이 남자가 펜을 쥔 손에서 뻗어 나왔다.
남자가 당황하며 황급히 계약서에서 손을 떼려 했지만, 줄기처럼 뻗어 나간 마력은 순식간에 그의 몸을 휘감았다.
- ‘금석맹약의 서’는 상호가 동의했을 때에만 성립 가능합니다.
- 계약자 : 강예나, 라인하르트(임시)
- 해당 아이템은 계약자가 계약을 위반하였을 때 계약자에게 정해진 페널티를 부과합니다.
- 해당 아이템에 새겨진 페널티는 ‘죽음’입니다.
이 아이템을 사용하면서도 과연 저 시스템 메시지가 이 남자에게 보일까, 궁금했는데 허공을 경악한 눈으로 바라보고 있는 것이 남자에게도 저 메시지가 보이는 게 확실했다.
“어, 어떻게 이런 일이……? 아이템이라니!”
“그거야 네가 알 거 없잖아.”
설마 남자가 말로 약속한 것을 믿을 거라고 생각한 것은 아닐 테고.
내가 그렇게 바보로 보였다면 유감이다.
“그럼 이걸로 계약은 성립된 걸로 알지.”
나는 계약서를 소지창으로 갈무리했다. 남자가 이를 뿌득, 가는 소리가 들렸다.
“나를 속였구나!”
“계약만 제대로 지킨다면 죽을 일이 없는데, 속고 말고 할 게 어디 있어? 그리고 말이야.”
아직도 정신을 못 차린 모양이다.
하기야 계약자 이름을 보니 속을 알 법했다. 계약서에는 각자 서명한 이름이 적힌다.
그런데 성까지 똑바로 적지 않은 것을 보면 애초에 계약서는 대충 쓰고 이 상황을 모면할 계획이었겠지.
나는 시뻘건 눈으로 나를 노려보는 남자, 아니, 라인하르트의 정강이를 한 번 걷어차 주었다.
“악!”
쿠당탕!
차가운 돌바닥에 쓰러진 라인하르트가 한동안 일어나지도 못하고 끙끙거렸다.
“애초에 네놈들이 쳐들어오지 않았다면 일어나지 않았을 일이었어.”
일어서려는 라인하르트의 등을 콱 밟자 연약한 몸뚱이가 긴장으로 경직하는 것이 느껴졌다. 여기에 힘을 주면 이대로 뼈가 부서져서 절명할 것이다.
“우리는 서, 성전을 준비한 것뿐이다. 네놈들도 이렇게 되리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을 텐데?”
짓눌린 채로도 라인하르트는 한마디도 지지 않으려 했다. 저 성전이라는 말, 보스 몹의 곁에 있던 마법사도 사용했던 단어였지.
“난 그딴 건 관심 없어.”
“컥!”
한 번 더 힘을 담아 꾹 짓밟자 라인하르트가 숨넘어가는 소리를 냈다.
나는 그의 등을 밟은 채 성벽 너머의 전장이 아닌, 성벽 아래의 모습을 바라보았다.
어두운 새벽이었다.
달조차 어느새 구름에 가려 빛을 감추고 있었고, 동이 트려면 아직도 멀었다.
그 어둠 속에서도 치료소가 있는 임시 막사는 아직도 누군가 죽음과 치열하게 싸우고 있었고, 시체를 끌어안고 멍하니 앉아 있는 자도 보였다.
그 흔한 갑옷이나 검 하나 차고 있지 않은 일반인들이었다.
물론 나는 이 두 세력이 왜 싸우게 됐는지는 모른다.
전쟁이란 게 선악의 갈등만으로 일어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도 안다. 그래서 내가 빙의한 기사단장이, 성주가 선역인지 아닌지에는 관심이 없다.
그렇지만, 그 모든 것을 떠나 기사단장이 투항을 결정했을 때…… 이들은 일반 백성들마저 모두 죽이는 길을 택했다.
처음 이 던전에 진입했을 때 나는 유령이 된 그들을 확실히 보았다. 상태가 얼마나 끔찍했는지, 시체를 보는 것에 면역이 있는 나조차도 무서울 지경이었다.
죽고 죽이는 행위에서 정당함을 찾는 것은 분명 우스운 일이다. 하지만 적어도, 검도 들지 않은 상대를 일방적으로 학살하는 일은 하지 말았어야 했다.
……아니, 이제 와서 이런 말이 다 무슨 소용일까.
나는 라인하르트의 등에서 발을 떼어 냈다. 겨우 숨통이 트인 라인하르트가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이……!”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는 몇 번 입을 뻐끔대다가, 무력으로는 내게 이길 수 없다는 사실을 상기했는지 그만 입을 다물어 버리고 말았다.
그래, 그렇게 입이나 다물고 있어라. 닥치니 얼마나 보기 좋아?
나는 웃으며 계약자에게 손을 내밀었다.
라인하르트가 반사적으로 마주 손을 내밀었으나, 나는 악수하는 대신 손가락으로 그의 이마를 툭 건드렸다.
“지금 내가 관심 있는 건 네 패륜뿐이라고, 라인하르트 전하.”
내가 그렇게 말하자마자 이제껏 침묵하고 있던 이우연이 메시지를 띄웠다.
― 강예나, 진짜 나빴다.
뭐, 어쩌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