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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50화 (51/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50화

작전을 수행하기에 앞서 내게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다. 그러다 보니 남은 시간은 이제 겨우 4시간.

- 여섯 번째 밤이 진행 중입니다. 04:23:12

“그럼, 여기는 이선 헌터에게 맡길게요.”

“네, 알겠어요.”

이선은 창백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 곁을 둘러싸고 있는 헌터들은 하나같이 불안한 얼굴이었다. 그들의 대장인 이선의 상태가 저러니 그럴 만도 했다.

“다들 이선 헌터를 잘 보호해 주세요. 자리를 비울 때는 최소 셋 이상 붙어 다니고요.”

“알겠습니다.”

이우연이 입 떼는 것도 힘겨워 보이는 이선 대신 몇 가지 지시를 내렸다. 헌터들이 모두 이우연의 얼굴을 알고 있어서 그런지, 지시를 듣는 것에 별다른 거부감은 없어 보였다.

그리고 나는 이우연이 지시를 내리는 동안 벽에 기대어 선 채 헌터들의 면면을 살펴보았다.

살펴보는 것만으로 저들의 실제 능력치가 어느 정도인지 알 수는 없지만…… 어깨에 과도하게 힘이 들어가 있는 걸 보면 확실히 다들 경험이 없는 게 티가 났다.

사실 시스템상으로는 능력치만 보여 줄 뿐, 플레이어의 등급을 판별하지는 않는다. 인간에게 등급을 매겨 구분하는 것은 같은 인간뿐이다.

그러니 딱히 절대적인 기준은 아니지만…… 이선에게 듣기로는 정부가 매기는 등급상 이들의 능력은 A에서 B급.

타르토스에서 용병을 판별하는 기준과 동치시켜 생각해 보면, 아무래도 한국의 플레이어들은 두세 단계 실력이 떨어진다고 생각해야 할 것 같다.

당연한 일이다. 타르토스에서 던전이 나타난 것은 20년이고, 한국은 겨우 5년에 불과하니까.

그러니까 역시 이상하단 말이야. 왜 이우연 저 자식만 저렇게 강하냔 말이지.

“스파이들이 활동을 시작하면 어떤 일이 벌어질지 모릅니다. 서로가 서로를 감시하도록 하세요.”

“어, 저희끼리도 감시가 필요합니까? 설마 여기서 배신자가 나올 리가…….”

이우연이 피식 웃는 소리가 들렸다.

나야 이우연의 뒤통수를 보고 있었지만 그 미소를 직접 마주한 헌터들의 얼굴이 일순 헤, 하고 풀어졌다.

음, 뭐, 이해한다. 인간은 누구나 아름다운 조형물을 좋아하니까.

“그 터무니없이 낙관적인 추측이 맞을 확률이 얼마나 될까요? 뭐, 누가 하나 죽어 나가면 알게 되겠죠.”

다만 외관만 예쁠 뿐이지, 튀어나오는 말은 악역이다.

“야, 살살 해라.”

애 울겠다. 내가 끼어들자 이우연이 나를 돌아보고 어깨를 으쓱했다.

“내가 잘못한 건 없는 것 같은데? 이선 헌터도 다 죽어 가는 이 마당에 다들 정신 똑바로 차려야지.”

“우연아, 나 아직 안 죽었다…….”

“그러니까요. 여기서 죽으면 제 말이 마지막으로 들은 말이 되는 겁니다, 이선 헌터. 부디 우리가 돌아올 때까지 살아남으세요. 당신 말마따나 전력 손실이 나는 건 사양이니까.”

“삶의 의욕을 고취시켜 줘서 고맙다. 아주.”

나는 의심쩍은 눈으로 두 사람을 훑어보았다.

그래도 협력해서 여기까지 왔으니 그럭저럭 괜찮은 사이인 줄 알았는데 이런 걸 보면 아닌 것도 같고.

일단 이우연의 성격에 지대한 문제가 있다는 것만큼은 분명했다. 이선의 손에 완드가 쥐어져 있었다면 사달이 나도 한참 전에 났을 것 같다.

“저, 한 가지 질문을 드려도 됩니까?”

헌터들 중 가장 긴장한 것처럼 보이는 한 남자가 손을 들고 나섰다.

이름이 뭐였더라. 무슨 최…… 최석…… 뭐더라.

“말씀하시죠.”

“저…… 기사단장? 이라는 분도 헌터인 거죠? 시스템에서 정체를 의심받지 않게 주의하라는 문구가 있었잖아요. 그래서 걱정이 되어서요.”

“아, 그랬죠.”

제법 똘똘하고도 도움이 되지 않는 그 질문에 이우연이 웃는 걸 참는 게 분명한 표정으로 나를 돌아보았다. 나는 벽에 기대어 선 채 고개를 돌렸다.

한숨이 나왔다. 그냥 눈치껏 넘어갈 것이지.

헌터들이 각자 랜덤으로 어떤 인물에 빙의되어 있는 이 던전의 특성상, ‘인지’를 하려면 상대방이 누구인지 정확히 알아야 했다.

그래서 이우연과 이선이 나를 상대방에게 소개시켜 주지 않는 한, 저들은 여전히 나를 ‘기사단장’으로 인식할 수밖에 없다.

이우연이 내게 다가와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어차피 클리어할 때 최대 업적자 이름이 뜨잖아. 공략 성공하면 싫어도 알게 될 텐데.”

“시끄러워.”

어쨌거나 내 얼굴과 목소리는 밝혀지지 않을 테니 그나마 낫지 않냐.

물론 이선에게 들킨 거나 다름없는 상태이니 어느 정도 포기하기는 했다. 그래도 아는 사람을 되도록 줄이는 게 나을 것이다.

……뭐, 전부 이 던전 공략을 성공한 후에나 생각할 일이지만.

나는 나를 바라보는 헌터들에게 불퉁히 대꾸했다.

“저도 헌터이니 걱정하지 않으셔도 됩니다. 다른 생각 말고, 살아남는 거나 신경 써요.”

“어, 네…… 알겠습니다!”

공격적인 어조에 불만을 가질 법도 한데 생각 외로 밝은 대답이 돌아왔다.

이우연이 불퉁한 어조로 속살댔다.

“쟤가 당신 좋아하는 것 같은데.”

“어지간히 해라, 진짜.”

나는 이우연의 옆구리를 쥐어박았다.

*   *   *

새벽 공기는 차가웠다.

성벽 틈으로 난 개구멍을 발견한 라인하르트가 하, 하고 헛웃음을 내뱉었다.

“나더러 이런 곳을 지나가라고?”

“그럼 어떡해? 성에서 배신자의 조력을 받아 탈출한 척하는 거라고 했잖아. 정문에서 말을 타고 나갈 순 없지 않냐?”

“그래도 그렇지, 이런 개구멍을 어떻게 기어가란 말이냐!”

“말이 많다. 가기나 해!”

말하는 것과 동시에 라인하르트의 엉덩이를 걷어차자 그가 머리를 벽에 박았다.

라인하르트가 발끈했지만, 그는 곧 입술을 꽉 깨물고 허리를 숙인 채 개구멍을 통과했다.

뒤에서 그 모습을 보고 있던 이우연이 노골적으로 킥킥대며 웃었다.

“아이고, 고생하시네.”

“……너 그렇게 말하면 메시지 안 뜨냐? 해당 인물로서 행동하라든가.”

“음, 딱히 안 뜨는데? 원래 성주란 인물도 나랑 성격이 비슷했나 봐.”

설마 그럴 리가. 물론 성주와 아주 짧게 만나긴 했지만 무척 진중해 보였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자 이우연이 어깨를 으쓱였다.

“뭐, 지금은 얼굴을 가리고 있으니 다른 사람은 내가 성주인 걸 모르잖아. 그래서 그런 거 아냐?”

“하긴 그런가…….”

그렇게 이야기를 나누며 이우연은 날아서, 나는 몇 번의 도움닫기로 금세 성벽을 뛰어넘었다.

개구멍을 기어 성벽을 나온 라인하르트가 그걸 보고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심지어 눈에 물기까지 엿보였다.

“이, 이……!”

“뭐 해? 가자고.”

절로 웃음이 새어 나왔다. 소소한 화풀이였는데 생각보다 훨씬 더 마음이 가벼워지는 게…….

그래, 이번엔 내가 나빴다.

“네놈들이 정말 나를 능멸할 작정이로구나!”

“저기 있다.”

씩씩대며 라인하르트가 무어라 더 말을 하려 했지만 가볍게 무시한 이우연이 성벽 근처의 나무에 묶여 있는 말 세 필을 가리켰다.

말을 발견한 나는 라인하르트를 돌아보며 웃었다. 내 웃음을 마주한 라인하르트가 움찔했다.

“뭐, 뭐……!”

“이번엔 끌고 가지는 않으마. 타라.”

“……이익!”

라인하르트가 어깨를 부들부들 떨었다.

나무에 묶인 말들은 적당히 배불러 보였으며 안장까지도 올려져 있었다. 사람도 없는데 얌전히 기다리고 있는 것을 보니 제대로 훈련받은 말이었다.

아까 내가 탔던 기사단장의 애마는 아니었지만, 갈색 말의 등을 쓰다듬자 순해 보이는 눈동자가 다정하게 끔벅였다.

나는 쓴웃음을 지었다.

“정말로 준비해 뒀네.”

솔직히 가능성은 반반이라고 생각했었는데.

한 시간 전, 나는 성벽 밖에 말을 준비할 수 있는지 엘리사에게 물었다. 뜬금없는 명령에 의구심을 품을 법도 한데 엘리사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그러겠다고 대답했다.

그 대답에 오히려 내가 놀랐다.

“가능하다고?”

“아시다시피, 서쪽에는 폐쇄된 문이 있으니까요. 제게 열쇠가 있으니 가능합니다.”

이런, 기사단장이라면 알고 있어야 할 정보였나? 정체를 의심받으면 안 되는데.

나는 재빨리 엘리사의 낯빛을 살폈다. 하지만 엘리사의 눈동자에는 딱히 의심하는 빛이 떠오르지 않았다.

……아니, 그건 그것대로 이상하지.

지금 우리는 불리한 전쟁 중이다. 그런 상황에서 성 바깥에 말을 준비해 달라고 하는 데다 지하 감옥에서 기껏 사로잡은 포로까지 꺼내왔다.

일반적으로 배신을 의심할 만한 상황이지 않나?

그런데도 엘리사는 단 한마디도 묻지 않았다. 침묵을 이기지 못한 내가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무슨 의도인지, 어딜 가는지는 묻지 않는 건가?”

“작전이 있으신 거겠지요. 말하지 않으셨다는 건 제가 그 작전에 필요 없다는 뜻일 테고요.”

“…….”

“저는 그저 단장님의 뜻을 따를 뿐입니다. 그리고 단장님이 돌아오실 때까지 제자리를 지킬 겁니다.”

굳은 결의에 찬 녹색의 눈동자가 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나는 차마 그 시선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돌려야 했다. 그저, 그 말을 들어야 할 사람이 여기에 없다는 것이 안타까울 뿐이었다.

결국 나는 변변찮은 대답도 하지 못한 채 일방적으로 필요한 지시를 내리고 돌아설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지금, 말에 올라탄 나는 성벽 위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작전대로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는 것에 성공한다면 이 유령의 성으로 다시 돌아올 일은 없다.

“강예나, 왜 그래?”

내가 멍하니 있는 것이 이상했는지 말에 올라탄 이우연이 다가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그 목소리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감상에 잠겨 있던 게 민망해 나는 몇 번 헛기침을 하고 물었다.

“아무것도 아니야. 준비는 끝났어?”

“나야 물론. 저쪽은 모르겠고. 영 덜떨어져 보이지 않아?”

이우연은 라인하르트가 영 미덥지 못한 것 같았다.

나와 일대일로 붙어서 형편없이 지는 모습을 본 것도 아닌데 어떻게 쟤가 덜떨어졌다는 걸 알았담.

“이랴!”

제 욕을 하는지도 모르고 라인하르트가 기세 좋게 고함을 지르며 박차를 가했다. 나도 하는 수 없이 따라붙었고 이우연도 마찬가지였다.

달려 나가는 말 세 필이 새벽의 정적을 깨웠다.

그 소리에 성벽 위를 순찰하던 순찰병들이 웅성대기 시작했다.

횃불을 든 병사들이 고함치기 시작했다.

“누군가 성에서 탈출했다!”

“무기를 가져와!”

미리 지시해 놓은 대로였다. 적당히 성 쪽에서도 소란이 일어나 줘야 이 탈출이 좀 더 그럴듯해질 테니까.

이윽고 성 정문을 지나 해자가 나타났다. 이선이 청소해 깨끗해진 상태 그대로였다.

라인하르트의 말이 주춤하는 동시에 이우연이 손을 들어 올렸다.

공중에 떠오른 말들이 놀라 울음소리를 냈으나 땅에서 발이 떨어진 것은 잠시였다. 우리는 해자의 의미가 무색할 정도로 순식간에 해자 건너편 땅에 닿았다.

“대단한 재주로다!”

라인하르트가 꽤 감명을 받았는지 말 위에서 큰 소리로 칭찬을 했다. 적군 입장에서는 이렇게 쉽게 해자를 건너다니, 오히려 허무해져야 하는 것 아닌가?

이우연도 어이가 없었는지 투덜거렸다.

“공중 부양 마법 정도에 놀라는 것도 자존심 상하는데.”

“이쪽은 그 정도의 마법사도 드물다는 소리지.”

“그런데 보스 몬스터는 나보다 더 강한 마법을 쓰잖아. 이거 모순된 것 같지 않아?”

“그것도 그렇지.”

우리가 등지기 시작한 성문에서 혼란해하는 외침이 들렸다.

결코 긍정적이지 않은 그 반응은 성을 감시하고 있던 적군 측에도 혼란을 가져다주기 충분했다.

그들 사이의 소란이 채 정리되기도 전에 방해 없이 전속력으로 달린 우리의 말들이 적군 진영에 근접했고, 병사가 보이는 동시에 라인하르트가 외쳤다.

“나다! 길을 열어라!”

나와 이우연이 깊이 눌러쓴 후드로 얼굴을 가리고 있던 것과 반대로 라인하르트는 얼굴을 드러내 놓고 있었다. 마치 개선장군과도 같은 당당함이었다.

뭐, 별반 다르지 않긴 하지.

“화, 황자님!”

“라인하르트 황자님이다!”

“황자님이 귀환하셨다!”

곧이어 라인하르트의 얼굴을 알아본 자들이 환호성을 올리기 시작했다.

새벽의 혼란을 틈타 우리는 순식간에 적군의 막사를 가로질렀다.

도중에 갑작스러운 난입에 놀라 길을 막으려는 자가 있었으나 라인하르트는 말을 멈추지 않고 허리에 찬 검을 위협적으로 휘둘렀다.

“감히 누가 내 귀환을 막는 것인가! 폐하께 가장 먼저 보고를 드릴 것이다! 모두 비켜라!”

그 모습이 제법 흉폭하고도 무도했다. 평소에도 권력을 어떻게 휘둘러 왔는지 알 만했다.

그의 얼굴을 확인한 병사들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물러나야만 했다.

다만 그 질주도 적군의 중반쯤을 가로질렀을 때 멈춰야만 했다.

드디어 갑옷을 갖춰 입은 기사가 나타났기 때문이었다.

기사가 장창을 들고 있어 검을 휘두르기 전에 말이 찔릴 판이라 겁을 먹은 라인하르트가 천천히 말을 멈췄다.

나와 이우연도 마찬가지로 속도를 줄였다.

기사의 얼굴을 확인한 라인하르트가 소리를 질렀다.

“왜 내 앞을 막는 거지, 베른 공!”

“먼저 귀환을 경하드립니다, 전하. 그러나 이대로 멈추지 않으신다면 저는 불충을 저지를 수밖에 없습니다.”

나는 후드 밑으로 기사를 살펴보았다.

얼굴은 노회했지만 딱 봐도 잘 단련된 거구의 남자였다. 한칼에 해치우자면 못할 것도 없겠으나 벌써 시비가 붙어도 곤란했다.

“먼저 어떻게 탈출하신 것인지, 또 뒤의 종자들은 누구인지 확인해야겠습니다.”

“네놈이 감히 나를 의심해!”

“송구합니다만 당연한 절차입니다.”

“내가 모두 폐하께 직접 말씀드릴 것이다! 한시가 급한 일이다.”

“송구하오나 제게는 폐하의 안전이 우선입니다. 낮에도 불미스러운 일이 있었고 하여.”

베른 공이라는 남자는 나를 향해 창을 세웠다. 날카로운 살기가 피부를 찌르는 듯했다.

“저자들은 누구입니까? 어느 안전이라고 얼굴을 가리고 있는가?”

“이런, 실례했군.”

나는 말을 몰아 앞으로 나섰다. 헐겁게 매인 후드가 천천히 벗겨졌다.

내 얼굴을 본 병사들이 놀라 숨을 들이쉬고, 검을 뽑는 소리도 들렸다.

하지만 베른 공은 흥미로운 듯 눈을 가늘게 뜬 채 나를 마주 보았다. 그의 눈에는 내가 여전히 기사단장 그 자체로 보일 것이다.

그 모습을 빌린 채 나는 웃으며 말을 건넸다.

“황제 폐하를 뵈러 왔네만. 안내해 주지 않겠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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