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53화
눈을 뜨자 시간이 멈춘 것 같았다.
아니, 멈추어 있었다.
말도 못 하게 시끄러웠던 전쟁터가 마치 무덤처럼 고요했다.
휘둘러지던 창칼들, 비명, 흐르는 피, 그 모든 것들이 마치 화면의 정지 버튼을 누른 것처럼 멈추어 있었기 때문에.
“어?”
나는 눈을 끔벅였다.
이거 분명히 내가 보스 몬스터 필드에 진입하기 직전의 광경과 동일한데, 왜 이런 꼴이 되어 있는 거지?
“강예나!”
“아씨, 깜짝이야.”
딸꾹질이 나올 정도로 놀랐다. 멈춰 있는 병사들 사이로 갑작스럽게 이우연이 튀어나왔다.
그도 어지간히 당황한 얼굴이었다.
“괜찮아? 필드에서 벗어난 거야?”
“그런 모양이네. 여기 있는 걸 보니.”
나는 검을 들어 올린 채 굳어 버린 병사 중 하나를 손으로 툭 건드려 보았다. 마치 조각상처럼 박제된 채 그 누구도 움직이지 않았다.
진시황의 병마용 같군.
“이게 어떻게 된 거야?”
“방금 보스 몬스터 처치 메시지가 떴는데, 메시지가 뜬 순간 이 꼴이야.”
이우연은 그렇게 말하며 한숨을 푹 쉬었다.
“무사해 보여서 그나마 다행이네. 갑자기 사라져서 얼마나 놀랐는지 알아?”
그건 좀 미안했다.
이우연 입장에서도 이 던전 공략에서 그나마 의지할 수 있는 건 나뿐이었는데, 내가 갑자기 사라져 버리니 공든 탑이 무너지는 줄 알았을 것이다.
물론 그게 내 탓은 아니다만.
“넌 별로 무사하지 않아 보이네. 얼굴에 그게 뭐야?”
이우연의 꼴은 엉망이었다.
아직 어두운 새벽이라 잘 보이지는 않았지만 사지가 온통 상처투성이였고, 잘난 얼굴에 커다란 상처가 나 있었다. 뺨을 가로질러 자칫하면 눈을 다쳤을 것이다.
하지만 막상 이우연은 그리 신경 쓰지 않는 기색이었다.
“이 정도면 부상 축에도 안 드는 거 아니야? 포션 하나면 멀쩡해질 텐데. 오히려 당신이야말로 보스 몬스터를 혼자 상대한 것치고는 멀쩡하잖아.”
“아, 그게…….”
나는 이우연에게, 히든 루트가 열리면서 보스 몬스터가 S급으로 등급 조정이 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주었다.
이우연은 금방 납득했다.
“여기서 히든 루트가 나오다니.”
하기야 히든 루트 같은 건 대개 공략 베이스가 쌓인 고정형 던전에서 클리어까지의 시간을 줄이려고 시도되곤 하는 방식이니 이우연이 그 존재를 모를 리 없다.
“진짜 복권에 당첨된 것보다 더 극악한 확률 아니야? 운이 좋아도 너무 좋은데.”
“그러게. 나가면 정말 복권이나 살까. 돈도 없는데.”
그렇지 않아도 이우연이 리치를 잡은 후 나온 아이템을 정산해 주지 않으면 돈 몇 푼 없는 처지인데, 복권이라도 당첨되면 매우 유용할 거다.
“하여간 버텨서 다행이네. 그럼, 보스 몬스터 처치 메시지가 뜬 다음에 갑자기 이런 꼴이 됐다는 거야??”
“그래, 무슨 시트콤 엔딩인 줄 알았지 뭐야. 아, 잠시만. 이선 헌터다.”
그러고 나서 이우연은 인상을 찌푸린 채 허공을 노려보았다. 텔레파시 스킬이라도 있는 건가.
약간의 시간이 흐른 후 이우연이 나를 돌아보았다.
“그쪽도 같은 상황인 모양이야. 갑자기 성내의 모든 사람들의 움직임이 멈췄다는데.”
“클리어 메시지는? 떴대?”
“보스 처치 메시지는 떴대. 클리어 메시지는 아직…… 어?”
심각한 표정으로 말을 이어 나가던 이우연의 표정이 순간 멍해졌다.
나도 이우연을 따라 고개를 돌렸다.
“……어?”
희뿌연 먼지가 일어나고 있었다.
갑자기 웬 먼지인가, 했는데…… 이우연 바로 옆에 있던 병사의 몸이 툭, 하고 반으로 부서져 스러졌다. 인간의 몸이 아니라, 정말로 조각상이 세월에 이기지 못해 스러지는 것처럼.
“으악!”
이우연이 기겁하며 비명을 질렀다.
나도 놀랐다. 비명이 너무 커서.
그 외에도, 전장 전체의 모습이 그랬다. 모든 사람들의 몸이 부서져 허공으로 흩날리고 있었다.
아니, 사람이 아니었지.
이곳은 던전이고, 이곳은 이미 죽은 자들의 공간이다. 이미 끝난 이야기를 다시 한번 되풀이해, 원한을 풀려고 생겨난 공간.
그 공간이 이렇게 사라지고 있다는 건…….
“……해주된 모양이네.”
‘원통한 기억’이라는 이름의 저주가.
성을 향해 걸어가는 도중 우리는 베른 공작과 라인하르트를 발견했다.
그들은 서로를 향해 무언가를 열심히 외치는 도중에 굳어 버린 것 같았는데, 내가 손가락으로 툭툭 쳐도 반응하지 않았다.
방금까지만 해도 살아 있는 사람 같았는데, 이렇게 보니 정말 느낌이 이상했다. 마치 정교하게 만들어진 인형 같았다.
하긴 인형 같다는 건 틀린 말도 아니었다. 이 던전 자체가 만들어진 인형으로 벌이는 하나의 연극 같은 것이었으니까.
죽은 사람을 위한, 일종의 진혼극.
“보통 해주란 게 되면 이래?”
이우연이 내게 물었으나 대답해 줄 수가 없었다. 나도 해주를 해 보는 건 처음이니까.
그렇지만 만약 해주라는 게 나와 대화를 나누었던 사람들이 이렇게 눈앞에서 재처럼 허공으로 흩어져 버리는 거라면…… 나는 잠깐 눈을 꾹 감았다.
아리아드네는 홀로 몇 번이나 상처받아 왔을까.
“울어?”
“아니, 설마.”
그리고 이 실상을 알게 된 나는 약간 화가 났다.
아리아드네가 앞에 있더라면 무척 화를 냈을 것이다. 하지만 앞에 없으니 속으로 꾹꾹 눌러 담는 수밖에.
전쟁터를 가로질러 천천히 걸어가는 동안 이미 전장의 병사들 대다수가 모두 재로 흩어져 사라지고 있었다. 들판이 점점 휑하게 비어 가는 모습을 보니 어쩐지 소름이 돋았다.
“그나저나 왜 클리어 메시지가 안 뜨는 거야?”
“그럴 법도 하지. 우리, 정확히 말하자면 던전 내의 저주에 걸린 거잖아.”
액자식 구성이라고 할 수 있다.
이우연이 아, 하고 손뼉을 쳤다.
“아, 그렇지. 그럼 이 필드의 모든 사람이 사라져야 끝나는 건가…… 어? 저기 봐.”
이우연이 성벽 위 어딘가를 가리켰다.
손가락이 가리키는 곳을 따라 시선을 들어 보니 이선을 비롯한 헌터들이 이쪽을 향해 손을 흔들고 있었다.
다들 무사하니 다행이다.
유독 어둡게 느껴졌던 새벽은 우리가 걷는 동안 서서히 물러가고, 어느새 날은 빠르게 밝아 오고 있었다.
그러나, 흘러가는 시간과는 별개로 성벽 위의 사람들은 마치 박제된 것처럼 그저 그 자리에 서 있을 뿐이었다.
숨도 쉬지 않고, 눈도 깜박이지 않고.
제각기 다른 모습으로 굳어 있는 병사들 사이로 은색의 갑옷이 빛에 반사되어 번쩍였다.
그새 익숙해져 버린 얼굴들이었다.
엘리사, 데이먼.
나는 겨우 이틀 사이 입에 익어 버린 그 이름을 홀로 되뇌어 보았다.
이미 기사단장의 혼이 떠나 버린 후라서 그런지, 그 이름에는 아무런 감상도 들지 않았다.
다만 궁금하기는 했다.
너희들은 이걸로 만족하느냐고, 이거면 그 억울함이 풀린 것이냐고.
하지만 대답은 들을 수 없을 거다.
“저 사람들은 어떻게 될까?”
이우연이 옆에서 조용히 중얼거렸다.
심경 복잡하게 하는 말을 하는군.
“어떻게 되고 뭐고, 이미 죽은 사람들이잖아.”
“그랬지. 뭔가 허무하네. 그렇게 열심히 싸웠는데 우리가 뭘 바꾼 것도 아니고.”
의외였다.
나는 이우연의 옆얼굴을 슬쩍 훔쳐보았다.
이우연이 저런 말을 할 줄이야. 성주로 빙의하더니 유령들에게 애착이라도 붙었던 건가.
……하기야 내가 할 말은 아니었다. 나는 길게 한숨을 쉰 후 성을 등지고 이우연을 돌아보았다.
“그럼 일단 저쪽 헌터들이랑 합류해서…….”
“어?”
그런데 내 말에 집중하고 있던 이우연의 시선이 갑자기 멍해졌다.
갑작스레 튀어나온 얼빠진 소리에 눈살을 찌푸리며 집중하라고 한마디 하려는 순간, 이우연이 내 소매를 잡고 당겼다.
“저, 저기 봐.”
목소리가 살짝 떨리는 게 심상치 않았다. 동공도 사정없이 떨리고 있다.
저, 저거 무서운 거 봤을 때 표정 같은데.
나는 침을 꿀꺽 삼켰다. 처음 이 유령의 성에 진입했을 때 생각이 났다.
혹시 또 무서운 거라도 튀어나온 거 아니야?
“아, 안 볼래.”
“아니, 저거 봐야 돼!”
“안 본다고…… 악!”
이우연이 내 양 볼을 턱, 잡고 고개를 돌리게 했다.
아, 이 새끼가?
검을 뽑으려는데 그 전에 ‘그’ 광경이 시야에 들어왔다. 일사불란하게 움직이는 기사들과 병사들의 모습.
제각기 다른 일을 하던 채로 굳어 있던 모두가 이쪽으로 시선을 고정한 채 일제히 같은 동작을 취했다.
들리지 않았어야 할 소리가 환상처럼 귀를 스쳤다.
웃는 소리 같기도 했고, 울음 같기도 한 누군가의 목소리.
완전히 밝아 버린 날의 하늘 아래, 나를 향해 경례를 취한 엘리사의 몸이, 데이먼의 손이, 병사들의 검이 투명하게 사라지고 있었다.
모든 것이 사라진 이후, 성벽 위에 남은 것은 이 상황에 어리둥절한 채 서 있는 헌터들뿐이었다.
“하하…….”
저도 모르게 웃음이 새어 나왔다.
그래, 이우연의 말대로 우린 결국 현실의 그 무엇도 바꿀 수 없었고, 그 누구도 도와줄 수는 없었지만…… 그래도.
그래도, 들을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던 대답을 들은 기분이었다.
영원히 걷히지 않을 것만 같던 어둠은 찾아볼 수도 없이, 어느새 들판에는 해가 떠올라 있었다.
그곳에 남은 것은 풀들이 무성한 들판. 그리고 그 들판 한가운데 선 음산한 성뿐이었다. 내가 던전에 들어왔을 때 처음으로 보았던 것과 같은 풍경.
그러나 한때는 온갖 상처로 뒤덮여 있었던 성벽도, 온통 헤집어진 채였었던 땅도, 자욱한 연기를 풍겼었던 시체 더미들도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인간의 흔적이라곤 남지 않은 장소를 바라보며, 나는 지금 당장은 만날 수 없는 친구를 떠올렸다.
너에게도 이런 순간이 찾아왔었을까.
아니, 부디 그랬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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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아주 잠깐만 더 비어 버린 유령의 성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돌렸다.
“……이만 가자.”
언제까지고 이곳에 머무를 수는 없었다.
내 옆에 말없이 서 있던 이우연은 그래, 하고 대꾸하며 내 어깨를 툭, 쳤다.
순간 무릎에 힘이 풀려서 넘어질 뻔했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검을 빼 들었다.
“진짜 죽고 싶냐?”
“장난 좀 친 것 가지고 왜 그래. 무서워서 살겠어?”
“그럼 죽어, 이 자식아!”
“그래그래, 얼른 가자.”
* * *
제목 : 야 대박. 신촌에 던브 터질 가능성 있으니 대피하래(현재 상황)
내용 : 지금 재난문자 왔다
나 Y대 대학원생인데 아까 이우연 날아오는 거 봄. 정문 앞에 군인 쫙 깔려 있고 겨수님도 돌아다니는 중.
- 진짜 Y대 문 닫는 날이 오나?
- 등록금 환불해줌? 반만 돌려줬으면
- 아니 그걸 왜 보고 있어 빨리 대피해
- 던브가 터진다는데 대박이라니 존나 생각 없네;
- ㅇㅇㅇ 써방안한 거 보니 곧 썰리겠네
- 그냥 목격담인데도 썰려?
- 그렇더라 무슨 군사기밀이냐고
- 모나미급이면 군사기밀 맞지
- 몬스터가 인터넷 사찰하냐?ㅋㅋㅋㅋㅋ오바떠네
- 지금 그게 문제냐 던브 터진다는데ㅋㅋㅋㅋ다들 존나 태평하다
- 난 서울러 아님 ㅅㄱ
- 2222 ㅅㄱ
- 근데 진짜 5년 내내 던브 겪다 보니 안전불감증 생긴듯
- ㅁㅈ 내가 거기 있는 것도 아니고…… 강남 돌발성급 아니면 대충 빨리 정리되잖어
- 근데 Y대 앞 정문 던전 그거 말하는 거면 난이도도 별로 안 높잖아. 정기공략도 되고 있는 걸로 아는데…… 심각한 문제는 아니지 않음? 우리 동네 던전은 정기 공략 할 때마다 재난문자 보내줌
- 그 던전이 터진다는 게 아니라 돌발성 던브가 터진 거 아님?
- 아니야 정문 던전 그게 터진 게 맞대 대학 건물 내 사람들 다 대피하라고 했어 병원도 필수 인력 빼고 대피중
- 아니 그게 대체 왜 터짐?? 정부에서 포화도 관리도 안 한다고? 신촌에 사람이 몇인데;;
- 요새 갑자기 던브가 너무 잦다? 에반데
(생략)
- 야 던전 공략 성공 문자 왔다
- 안심하고 일상생활로 돌아가래 역시 갓겨수님
- 환호성 들린다 ㅋㅋㅋㅋ신촌러들 소리 질러~
- 무슨 축구 보냐 개념없는 새끼
- 나 지금 건물 옥상에서 던전 밖 구경중ㅋㅋㅋㅋ모나미 보면 사진찍어 올림
- 님 고소당할듯
- 어? 지금 혹시 보고 있는 사람? 던전에서 지금 사람들 나온다
- 나
- 나도
- 공략팀 되게 많다 거의 스무 명 넘는 것 같은데
- 저 인원이 들어갔는데 무슨 던브야 ㅋㅋㅋㅋ문자 잘못 보낸거 안야?
- 겨스님은 그런 실수 안 해
- 긴급 인터뷰 시작했다 공략 과정 이야기해 준대
- 그런데 모나미는? 모나미 안나오는데?
- 첨부터 모나미 봤단 놈이 거짓말했나보지 모나미 없이 공략했나보네
- 하긴 모나미 있는데 정기 공략을 실패할 리가 없지
- 아냐 아까 내가 봤다는 앤데 나 말고도 다들 봤어 이우연 날아오는 사진도 있음(사진)
- 아니 근데 모나미는 안 보인다니까
- 뭐지? 설마 모나미 죽은 거 아냐?
- 아 나왔다
- 모나미 던전에서 나왔다! 공략 참가한 거 맞네
- 여기 모나미 있는 증거짤이다(사진)
- 근데 저 옆 여자는 누구야? 헌터인가?
- 야 이거 기사 봐라 링크> 속보 이번 던전 공략 최대 업적자는 랭킹 1위로 밝혀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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