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54화
Chapter 8. 은막의 배우
이우연은 아주 간만에 집으로 돌아왔다.
신촌의 이레귤러 던전에서 나온 지는 이미 사흘이 흘렀지만, 그간 병원과 길드를 오가며 후처리를 하느라 너무 바빠서 집에 도통 들를 틈이 나질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집에 들어서자마자 묵은 공기가 느껴져서 이우연은 인상을 찌푸렸다. 돌아오자마자 샤워를 하려던 계획이 무너지는 순간이었다.
일단 환기부터 시켜야겠군. 청소기도 한번 돌리고. 그리고…… 이런 집안일은 시작하면 이상하게도 꼬리에 꼬리를 무는 법이다. 하나가 온전해지면 다른 하나가 또 눈에 들어온다.
밀린 빨래도 하고, 냉장고에 놔둔 채 유통 기한이 지나 버린 재료들도 정리하고.
사실 직접 하지 않고 사람을 불러도 되지만, 이우연은 그러지 않았다.
타인을 집 안에 굳이 들이고 싶지 않다는 이유가 반, 그리고 나머지 반은 이런 일상적인 일을 하고 나서 느껴지는 소소한 생활감을 좋아하기 때문이다.
물론 귀찮기는 하지만, 던전 내에서 검과 마법으로 몬스터들을 처리하다 보면 이런 ‘정상적인’ 감각이 소중해진다.
일종의 균형을 맞추는 작업이라고도 할 수 있겠다.
그래서 이런 사소한 시간은 이우연에게는 드물게 귀중한 것 중 하나였다.
“야, 이우연!”
그렇게 집안일을 하는 동안, 밖에서 누군가 문을 쾅쾅 두드리는 소리가 들려왔으나 이우연은 별로 신경 쓰지 않았다.
소음 차단 마법을 걸자 실제로 들리지 않게 되기도 했다.
‘이왕 시작한 김에 이불도 털까?’
창밖을 흘끗 보자 오후다운 햇살이 비치고 있었다. 겨울치고는 포근한 날씨.
역시 이불도 털어 버리자. 이우연은 큰 결심을 했다.
그렇게 집안일을 끝내고 씻은 후, 부엌을 뒤지다가 예전에 사다 둔 마른 미역을 발견했다.
던전에 들어가기 전 냉동실에 얼려 둔 소고기를 생각하니 요리할 메뉴가 바로 정해졌다. 소고기 미역국 정도면 환자가 먹어도 괜찮겠지.
물론 그 환자란 강예나였다.
강예나는 이레귤러 던전을 클리어하고 현실에 발을 딛는 순간 기절했고, 사흘이 지난 지금까지도 입원한 상태였다.
처음에는 무척이나 걱정했는데, 의료진의 소견으로는 과도한 피로 누적에 의한 폭면을 취하고 있을 뿐이라기에 안심하고 병원에서 돌아온 참이었다.
음, 결정했다.
그렇게 미역국을 끓이는 동안 이우연의 핸드폰은 계속해서 울리고 있었지만, 이우연은 무시했다.
핸드폰으로 연락해야 하는 인간 중에서 지금 컨택이 필요한 인간은 딱히 없고, 강예나라면 어차피 아이템을 써서 연락해 올 것이다.
그나저나, 강예나는 물공 타입인데 이상하게 체력이 약한 것 같단 말이지. 그게 말이 되나?
뭐, 강예나에게 수상한 점이 하나나 둘만 있는 건 아니지만.
일단 지금은 신경 쓰지 말자.
그렇게 한참 미역국을 끓이던 중, 드디어 집 안의 인터폰이 울렸다.
확인해 보니 아파트의 관리 사무소였다.
흠, 제법 머리를 썼는걸.
과연 이 연락을 무시할 수는 없었기에 일단 인터폰을 받았다.
인터폰 너머의 목소리는 긴장으로 떨리고 있었다.
“저, 관리 사무소인데요. 소음 때문에 신고가 들어와서요.”
“네, 수고하십니다. 곧 처리할게요. 10분 내로.”
평일 낮이기도 하니 좀 더 놔뒀다가 상대하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밖에 나가지 않은 이웃이 있었던 모양이다.
그래도 굳이 서두르지 않았다.
일단 캡슐 커피 머신으로 커피를 한 잔 내렸다. 나름의 평화를 찾는 방법이다.
이우연은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며 드디어 현관문을 열었다.
“야, 이우연! 안 열면 내가 진짜…… 으억!”
밖에 서 있던 청년은 갑자기 열린 문에 머리를 찧으며 바닥으로 나가떨어지듯 주저앉았다.
이우연은 그런 청년을 한심하게 내려다보았다.
완벽하게 세팅된 머리, 다소 과하게 화려한 복장까지. 당장 방송에 나가도 손색없는 차림이었다.
예상했던 인물이라 놀라움은 없었다.
청년의 이름은 백사현.
정부 판정 S급 헌터. 시스템상으로는 랭킹 38위.
백사현은 씩씩대며 금세 자리에서 일어났다.
“이 씨…… 야, 이우연 이 새끼야! 갑자기 문을 여는 게 어디 있어?”
“문 열라고 계속 두드린 거 아니야? 고맙다고 해야 할 것 같은데.”
그렇게 말하며 이우연은 남은 커피를 한 번 더 홀짝 마셨다.
솔직히 말해 이쯤 해서 상대해 주는 것도 층간 소음을 유발하기 싫어서였다. 백사현을 상대하는 건 아주 귀찮으니까.
이유는 별거 없었다.
백사현과 이우연의 성격은 근본적으로 맞지 않았다.
‘뭐, 양태원보다는 좀 낫지만.’
어떤 점이 나은가 하면, 백사현의 성격이 아주 단순해서 상대하기가 편하다는 것 정도다.
“이 새끼가! 내가 너보다 다섯 살은 많다! 형한테 말버릇이 그게 뭐야?”
“백사현 헌터, 적당히 해.”
이우연은 나직한 목소리로 경고했다.
한국에 헌터라는 직업이 생기면서 가장 처음 생긴 암묵적 룰은, 바로 상호 간의 호칭을 나이 관계없이 헌터로 통일하는 것이었다.
생사가 오고 가는 싸움에서 나이를 이유로 누군가의 의견이 무시당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물론 이상론이긴 했지만, 나이가 어린 축인 이우연부터 많은 편인 김숙자 교수까지 모두 동의한 의견이기에 아직까지 기적적으로 잘 지켜지고 있는 편이다.
그런데도 여전히 나이를 이유로 어떻게 해 보려는 꼰대가 꼭 있지.
이우연은 눈앞의 백사현을 보며 혀를 쯧, 찼다.
정말 귀찮았지만 적당히 상대해 줄 수밖에 없는 것은 백사현이 이래 봬도 귀중한 인재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무슨 일인지 이야기나 해. 시답지 않은 용건일 게 뻔하니 듣지 않아도 무방하겠고.”
“중요한 용건이라고, 이 자식아!”
“그러니까 그 중요한 용건이란 거, 빨리 말해 주지 않겠어? 30초 내로.”
“뭘 이렇게 비싸게 굴어?”
“바쁘거든.”
마음이 급한 것도 사실이었다. 미역국은 오래 끓여야 맛있긴 하지만 요리가 으레 그렇듯 불 조절이 관건이다. 소고기를 넣어서 너무 펄펄 끓이면 텁텁한 맛이 난다고.
거의 비어 가는 커피도 리필하고 싶었다.
백사현은 이우연의 말에 울컥했지만, 정말로 중요한 용건인 모양인지 곧 진정했다.
이우연은 딱 20초 기다렸다.
20초가 지난 후 현관문을 닫으려는데, 백사현은 다급하게 발을 밀어 넣었다.
“기다려, 기다려! 30초 안 됐다고! 왜 이렇게 성질이 급해?”
“바쁘다고 했잖아.”
미역국이 텁텁해지면 책임질 건가.
이우연이 노려보자 백사현이 긴장했는지 침을 꼴깍 삼키는 것이 보였다.
그리고, 드디어 입을 열었다.
“그, 네가 어제 던전 공략한 거 말이다. 신촌에 있던 고정형 던전.”
“가-18 말이지. 그리고 정확히 말하자면 고정형 던전 내에서 돌발성 던브가 일어났다고 봐야 해. 곧 정확한 내용은 공문으로 뜰 거야. 그럼 이만.”
“아, 잠깐, 잠깐! 아야!”
닫으려는 현관문 사이에 발을 또 끼워 넣은 백사현이 비명을 질렀다.
아, 몸만 더럽게 튼튼해서.
이우연은 쳇, 하고 혀를 찼다.
“뭐가 더 남았지?”
“그, 공략 말이야.”
이우연은 백사현과 시선이 마주친 순간 이어질 말을 직감했다.
아, 그냥 문 열어 주지 말고 문 너머로 총이라도 갈겨 버릴걸.
“랭킹 1위랑 같이했다는 소문이 있던데? 야, 정체 알면 나한테 소개 좀…… 악!”
아니야, 지금이라도 갈기면 되지.
백사현은 이우연이 휘두른 발차기 한 번에 금세 나가떨어졌다.
이우연은 또 바닥에 엎어져 낑낑거리고 있는 백사현을 차갑게 내려다보았다.
쓸데없이 정보력만 좋아서. 누가 저딴 새끼한테 정보를 흘린 거지?
“괜히 들쑤실 생각하지 말고 꺼져. 너 같은 거랑 엮일 생각 없을 테니까.”
“야!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바닥에 나뒹군 백사현이 바락바락 소리를 질렀지만, 이우연이 허공에서 검을 소환한 것을 보고 곧 입을 다물었다.
“이제껏 알아 온 정을 봐서 그냥 보내 줄게. 다신 찾아오지 마.”
“야, 이우연!”
“그리고 또.”
소용없을 것 같기는 하지만, 그래도 한 번 경고 정도는 해 두는 게 좋을 것이다.
괜히 저런 놈에게 물들어서 오랜만에 찾은 귀중한 자산이 오염되는 건 사양이니까.
“혹시라도 랭킹 1위를 그놈의 관종질에 이용해 먹으려고 들었다간.”
“뭐, 뭐? 관종질?”
“이번엔 진짜로 죽을 각오하는 게 좋을 거야.”
백사현이 입을 쩍 벌리는 것을 보며, 이우연은 이번에야말로 문을 제대로 닫았다.
말 그대로 문전박대.
‘이걸로 포기해 주면 좋겠지만…….’
이우연은 미역국 맛을 보며 한숨을 쉬었다.
희망적인 추측일 뿐, 실제로는 귀찮아질 듯했다. 저 백사현이라는 인간이 어떤 놈인지는 2년 전에 이미 깨달았으니까.
아무래도 앞으로 할 일이 많아질 것 같았다.
‘손이 많이 가네.’
그래도 뭐, 나쁜 기분은 아니었다.
이우연은 산뜻한 기분으로 소고기 미역국을 보온병에 담기 시작했다.
한편으로.
3시간 내내 문 앞에서 소리만 지르다가 성과 하나 없이 돌아온 백사현은 차에 올라타며 소리를 질렀다.
“아악, 이우연. 그 미친 새끼!”
운전석에 앉아 있던 백사현의 매니저는 차를 출발시키며 한숨을 쉬었다. 지금부터 출발해도 20분은 더 지각하겠다.
“사현아, 화 좀 가라앉혀. 곧 촬영인데.”
“아, X발. 그냥 펑크 내면 안 돼?”
당연히 안 된다.
그렇게 소리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매니저도 프로였다. 그는 화를 꾹 참고 백사현을 달랬다.
“어, 어렵게 잡은 건데. 네가 하고 싶어 하던 힐링 인터뷰잖아.”
“힐링이고 나발이고 지금 내 기분이 나쁘다고!”
젠장, 어디서 갑질이야.
매니저는 하루에도 열 번씩 일을 때려치우고 싶은 것을 카드값을 떠올리며 참았다. 백사현이 워낙에 다루기 힘들다 보니 소속사 대표가 보너스를 많이 주는 편이었다.
“자꾸 왜 그럴까, 우리 프로가. 저번에는 엠씨가 마음에 든다고 인터뷰 한번 해 보고 싶다고 했잖아.”
“그건 랭킹 까발려지기 전이고!”
씩씩대는 숨소리가 차 안을 가득 채웠다.
백사현은 제가 그렇게 말해 놓고도 아차, 싶었는지 입을 다물었다.
그때였다.
매니저의 핸드폰이 울렸다.
매니저는 백사현의 눈치를 보면서 전화를 받았다. 운전 중이라 당연히 스피커폰이었다.
“여보세…….”
“당장 백사현 전화 받으라고 해!”
차 안을 쩌렁쩌렁하게 울리는 회사 대표의 목소리. 그 소리를 같이 들은 백사현이 짜증을 냈다.
“아, 또 왜!”
“백사현! 너! 당장 인별 글 내려!”
백사현의 매니저를 맡은 지 3년 차. 대표의 말만 들어도 어떤 상황인지 감이 왔다.
매니저는 빨간불인 틈을 타 핸들에 머리를 박았다.
그사이에도 백사현과 회사 대표의 공방은 계속되고 있었다.
“난 할 말 했을 뿐인데 왜 내리란 거야! 계약 해지한다, 진짜?”
“뻑 하면 그 계약 해지 운운하는 것도 지겹다, 이 자식아! 이걸 또 어떻게 수습하란 거야!”
얼마나 열이 받은 건지, 회사 대표는 백사현이 올린 글을 줄줄 읽었다.
“던전 공략에 목숨 거는 헌터를 격려하지는 못할망정 욕이나 하는 망할 종자들은 전부 다 던전에 처넣어야 해…… 이게 네가 올릴 글이냐? 어? 너 공인이야!”
“내가 못 할 말 했어? 사실이잖아!”
“그래, 다 사실이라고 치자. 그런데 이건 헌터랑 아무 관련 없잖아! 네가 미성년자 때 소주 마시던 사진이 발굴된 걸로 욕하는 사람들한테 그게 할 소리인 것 같냐?”
매니저는 그냥, 침묵했다.
그래, 이건 연예인으로서 치명적이긴 하네.
대표는 한참을 더 소리 지르다가 결국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깨닫고 전화를 끊었다. 그러나 차 안에는 여전히 화가 난 백사현이 남았다.
매니저는 불행했다.
백사현은 여전히 씩씩대고 있었다.
“내가 하는 것마다 다 찬양할 때는 언제고!”
그랬다.
한국에 시스템과 던전이 생겨난 후, 던전을 공략하는 헌터에 대한 관심도가 자연스럽게 높아졌다. 거의 연예인 수준으로 일상의 모든 모습이 조명되었다.
백사현은 그렇게 주목받은 소위 스타 헌터 중 한 명이었다.
그는 고등학생 때 잠시 아이돌 연습생을 했을 정도로 준수한 외모를 지녔고, 헌터로서의 능력도 출중했다. 자연스럽게 많은 연예계 기획사가 백사현과 계약하려고 달려들었다.
그중 매니저가 일하는 회사가 백사현과 계약하게 되었던 것이다.
여기까진 좋았다.
다 좋았다.
회사는 스타 헌터를 영입해서 밀려드는 CF와 방송에 환호성을 지르고, 매니저 또한 연예인 헌터 1호를 케어했다는 커리어를 쌓고.
문제는, 기획사에서 밀던 콘셉트와 평소 이미지의 괴리가 너무 크다는 거였다.
세간에 만들어진 이미지는 ‘구국의 헌터’.
실제로 던전 공략 초반에는 괜찮았다. 백사현도 어린 나이임에도 불구하고 몸을 사리지 않고 활동했었다.
평소 언행이 좀 거칠긴 했어도 상황이 상황인지라 대부분 드러나지 않고 묻히기도 했고.
하지만 사회가 안정되면서, 수면 밑에 가라앉아 있던 것들이 슬금슬금 올라온 것이다.
‘대표님도 욕심이 좀 많긴 했지.’
백사현의 대외적 이미지는 이우연과 김성연, 김숙자 교수 등 탑 티어 헌터들과 비슷한 수준으로 올라와 있었다. 젊은 데다 외모가 뛰어나서 사실상 인기로는 그 이우연과 겨뤄 볼 만했다.
그런데 막상 발표된 순위가 이우연보다 현저하게 낮았다. 그러다 보니 이제껏 밀던 이미지에서 반동이 거세게 온 것이다.
광고 계약 만료 시점에서 연장 제의가 온 곳은 하나도 없고, 예능에 나가면 다들 미묘한 웃음을 지은 채 ‘랭킹 순위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는지’ 질문을 하기 일쑤였다.
“젠장, 그럼 나더러 뭘 어쩌라고!”
그리고 이 모든 폭풍의 한가운데 있는 백사현도 미칠 지경이었다.
심지어 오늘은 대형 언론사 신문에 백사현이 랭킹 1위에게 돌아갈 영광을 가로챘다며 비꼬는 기사가 나기도 했다.
그리고 그 오갈 데 없는 분노는, 갑자기 튀어나온 랭킹 1위에게로 향했다.
“흥, 이우연 그 새끼가 안 알려 준다고 내가 못 알아낼 것 같아? 두고 보자고!”
찾아내서, 랭킹과는 관계없이 나야말로 ‘구국의 헌터’, 그 자체라는 걸 보여 주고 말겠다!
백사현의 주먹이 부들부들 떨리는 것을 매니저가 불안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아, 오늘 진짜 펑크 각이다.’
억지로 스케줄을 조정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위장이 아파 왔다.
진짜, 내년에는 꼭 퇴사해야지. 매니저는 결심을 굳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