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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57화 (58/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57화

“아, 날씨 좋다.”

입술 사이로 숨이 희게 내뱉어지는 것이 보였다. 오늘은 미세 먼지 상태가 좋은 건지 폐로 들어오는 공기가 상쾌했다.

아니, 사실 상쾌하다 못해 폐부를 찌를 정도로 추운 날씨였다.

때는 아직 1월. 그래서인지 병원에 딸린 옥상 정원에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그 덕에 내가 정원 한구석에 있는 벤치에 앉아 편의점에서 사 온 삼각김밥을 뜯고 있어도 이상하게 쳐다보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내 픽은 물론 전주비빔밥과 참치 마요였다.

나는 비닐을 신중하게 뜯어 입에 넣었다. 강렬한 맛이 혀를 자극했다.

아, 역시 이 맛이다.

이걸 내가 다시 먹을 수 있을 거란 생각은 해 보지 않았는데 말이다. 고3 때 질리게 먹다 보니 물렸었는데, 막상 타르토스에 가니 얼마나 먹고 싶던지.

그래서 오늘부터 환자식이 아니라 일반식을 먹어도 된다는 의사의 말을 듣고 당장 편의점부터 들른 참이었다. 환자복을 입고 음식점에 가기도 귀찮다는 게 한몫하긴 했지만.

그러고 보니까 옷도 사야 한다.

강원도 원주에서 대충 샀던 옷을 담은 캐리어는 이우연 집에 내버려 두고 온 참이다. 바쁘다고 했으니 가져다줄 새도 없겠지.

생각해 보니 시간이 가는 게 참 빨랐다.

어라, 그러고 보니 얼마 전에 해도 넘긴 참이었다.

한국의 강예나도 나이를 한 살 더 먹어 25살이 되었다. 애초에 한국에 돌아온 것이 12월이었으니까.

타르토스에서 이미 십 년을 보낸 마당에 한두 살 더 먹는 것이 무슨 의미가 있냐, 싶지만.

“에효오.”

삶이 고달팠다.

한국으로 돌아온 지 이제 한 달 조금 더 됐는데 왜 이렇게 삶이 고달픈 것 같지.

눈 뜨면 이상하게도 무슨 일이 터지고, 그걸 해결하면 일주일은 꼼짝없이 기절하고.

이번에는 다행히 그 정도는 아니긴 했지만.

“내 팔자야.”

타르토스에서 옵타티오를 처치할 때까지만 해도 이제 편안하게 살 일만 남았다고 생각했는데, 이게 무슨 일인지 모르겠다.

산 너머 산인데, 이 등산이 언제까지 계속되는지도 모르겠고.

그렇지만 언제까지고 한탄만 할 수도 없는 일.

나는 벤치 위에서 기지개를 한 번 쭉 편 후 몸을 일으켰다.

자기 연민에 잠기는 건 이 정도면 됐다. 그리고 지금 상황을 아주 비관적으로 볼 것도 없었다.

왜냐하면, 일단 당장 세웠던 목표인 ‘능력치 복구’는 일정 부분 달성했으니까.

던전 클리어 보상을 받은 현재의 내 상태창은 이랬다.

플레이어명 : 방랑하는 구도자

LV.79

특성 : 관철하는 아귀

클래스 : 용사

체력 : 790

근력 : 685

민첩 : 525

마력 : 850

스킬 : 멸혼의 불꽃 lv.3, 기사회생 lv.4, 불굴의 의지-on

물론 내 본 능력치에 비하자면 아직 턱도 없는 수치기는 하지만, 한 달 전의 눈물 나던 수치와는 비교도 할 수 없을 정도로 복구되었다.

기사단장의 능력치를 보상으로 받은 것도 그렇지만, 던전 내에서 용사 클래스 보정을 받은 게 운이 좋았다.

그리고 가장 고무적인 것은 내 스킬이 돌아왔다는 것.

참고로 시스템상 스킬의 만렙은 10이다.

멸혼의 불꽃…… 은 그렇다 치고, 기사회생이 사용 가능한 상태가 된 건 정말 쓸모 있을 거다.

레벨이 좀 낮은 게 흠이기는 하지만.

“심지어 마력 수치는 더 늘었고.”

내 레벨에 한 번에 능력 수치를 100씩이나 늘리는 게 거의 불가능한 일이란 걸 감안해 보면 정말 후한 보상이었다.

내가 마법사는 아니지만 마력이 많다고 나쁠 건 없었다. 심지어 지금은 생각만큼 체력, 근력이 따라 주지 않으니까.

흠, 일단 한번 시험해 볼까.

나는 시험 삼아 엄지와 검지를 모아 마력을 맺히게 해 보았다.

붉은빛의 정순한 마력이 검지 끝에 모였다.

피슝!

하늘 위로 시험 삼아 손가락을 튕겨 보자 마력은 마치 총알처럼 날아갔다. 마력을 날리며 일어난 바람 때문에 벤치 위에 놔둔 편의점 봉투가 날아가려는 것을 재빠르게 잡아챘다.

“켁.”

마력은 얼마 가지 못하고 공중에서 흩어졌다.

그거야 딱히 기대하지 않았다. 마력을 담을 사물이나 마법을 다루지 않는 이상, 마력 자체만으로는 대기에서 오래 형체를 유지하기 힘들기 때문이다.

알아보려고 했던 것은 이렇게 마력을 쏘아 냈을 때 얼마나 마력을 소모하는지였다.

하늘로 마력을 날려 보낸 다음 가장 처음 든 생각은 이거였다.

“아, 갈 길이 멀다.”

능력치가 괜찮기는 개뿔.

나는 혀를 찼다.

마력은 영혼에 담긴 힘. 그러나 그 영혼이 깃들어 있는 것은 결국 육체다. 육체의 강건함에 따라 마력을 얼마나 섬세하게 다룰 수 있을지가 결정된다.

그런데 지금 내 육체의 완성도는 그리 훌륭한 편이 아니었다.

게다가 가장 커다란 문제는 따로 있었다.

내가 자꾸 본래 스펙일 때의 움직임을 유지하려고 한다는 것.

호랑이에게는 호랑이에게 걸맞은 움직임이 있고, 토끼에게는 토끼에게 맞는 동작이 있는 법이다.

그런데 나는 지금 토끼의 몸을 가지고 호랑이처럼 굴려고 하고 있었다.

아예 한 수 아래인 적을 상대할 때라면 상관없겠지만, 나와 대등하거나 더 강한 적을 상대하게 된다면 이건 내 치명적인 약점이 될 것이다.

당장 검 한 번을 내뻗을 때도 내가 상정하는 속도와 실제 내 몸이 구현할 수 있는 속도는 어쩔 수 없이 차이가 나게 된다.

그리고 그 약간의 틈은 상대에게 절호의 기회가 될 테지. 내 목이 날아가는 것도 순식간이고.

지금까지는 강한 적을 상대할 때 용사를 기리는 망토를 장비했기 때문에 그리 문제가 되지 않았지만, 이 아이템을 상시 장비할 수 없는 이상 현재 스펙에도 몸을 적응시켜야 한다.

그리고 그러려면 가장 좋은 건 역시.

“실전 경험을 좀 쌓아야겠는데.”

되도록 많은 실전 경험이 필요하다.

처음에는 잡몹을 상대로 시작해서, 익숙해졌다 싶을 즈음에는 비슷한 스펙의 검사와 겨루는 게 가장 이상적이다.

일단 잡몹을 상대하는 거야 별로 어려울 게 없을 것 같다. 인터넷에서 찾아본 바로는 서울에도 하급 던전이 제법 분포되어 있으니까.

물론 하급 던전 진입 대기 줄이 길다곤 하지만 한국 정부에 정체도 알려진 마당이니, 던전 진입 정도야 어떻게든 해 주겠지.

이왕 들킨 거 이용할 수 있는 건 다 이용해야겠다.

그리고…… 남은 보상이 하나 더 있다.

나는 눈앞의 시스템창을 심각하게 노려보았다.

- 던전 클리어 보상 : 차단되었던 정보가 일부 제공됩니다.

- 기사단장의 기억이 담긴 파편을 수령하시겠습니까?

- Y/N

아직 보상을 수령하지 않았기에 메시지는 여전히 반짝이며 허공에 떠올라 있었다.

이건, 시스템이 던전 공략 도중에 갑자기 튀어나와 내게 약속한 보상이다.

시스템에게 어떤 의지가 있다는 전제하에, 저런 정보를 주는 것 자체에 어떤 의도가 있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던전 공략을 포기하지 않은 것이기도 했다.

저 정보를 받으면 시스템을 파악하는 데 도움이 되고, 더 나아가 타르토스로 돌아가는 것에 조그만 단서라도 되지 않을까, 하여.

그런데 막상 저렇게 시스템 메시지로 보니 영 꺼려졌다.

마치 남의 일기를 엿보는 기분이라고나 할까.

이걸 내가 봐도 될까?

애초에 기사단장의 기억이 정말로 내 목적인 타르토스로 돌아가는 것에 도움이 될 거라는 생각은 안 드는데…….

에잇, 지금 내가 뭘 따질 때냐. 이러고 있는 지금도 시간은 지나가고 있었다.

나는 주위에 인기척이 없는 것을 먼저 확인한 후, 속으로 기사단장에게 사과하면서 결국 Y를 눌렀다.

- 기사단장의 기억이 재생됩니다.

메시지가 떠오르는 동시에, 순식간에 시야가 바뀌었다.

나는 벤치에 앉은 그대로였지만 사방의 풍경이 바뀐 것이다. 으레 환상의 형태로 보여 줄 것이라고 생각했기에 놀라지는 않았다.

내 시야에 펼쳐진 곳은 실내의 한 공간이었다. 침실인 듯했는데 붉은 카펫이 깔렸고, 난로에는 장작이 타오르고 있었다.

그리고 난로 가까이 놓인 흔들의자 위에 익숙한 인물이 앉아 있었다.

던전에서 한 번 마주했던, 가면과 두꺼운 옷으로 얼굴과 몸을 모두 가린 성주였다. 그나마 이때는 침대에 눕지 않았고, 손으로 두꺼운 책을 들고 읽고 있었으나 병색이 완연했다.

그리고 성주의 의자 뒤에 서 있는 인물은…….

윤기가 흐르는 흑발을 대충 묶고, 기사의 갑주를 착용하는 대신 편한 옷을 입고 있었다. 그럼에도 허리춤에는 검이 달려 있었고.

시스템상에서는 어떤 설명도 없었으나 나는 어쩐지, 그 여자가 기사단장임을 깨달았다. 내가 빙의했던 인물이니 당연한 걸지도 몰랐다.

기사단장은 난로의 불꽃을 바라보는 성주에게 말을 걸었다.

“외람되오나, 성주님. 이제 그만 침수에 드시지요. 밤이 깊었습니다.”

“이 정도는 괜찮다. 걱정하지 말거라.”

“이제 걱정할 권리마저 앗아 가려 하십니까?”

“네가 날 걱정하는 건 권리가 아니라 의무지. 아니 그러하냐?”

“그야 저는 당신의 기사이니 말입니다. 어쩔 수 없지요.”

기사단장의 말투에는 웃음기가 섞여 있었고, 대답하는 성주의 말투도 친근했다.

생각보다 성주와 친밀한 사이였구나.

하긴, 내가 빙의했던 시기에는 한창 전쟁 중이었으니 성주의 태도가 딱딱한 게 더 자연스러운가.

결국 성주는 충직한 기사의 권유를 못 이기는 척 받아들이고, 책을 접은 후 기사의 부축을 받아 침대에 누웠다.

기사단장은 침대 옆 의자를 끌어당겨 앉은 채, 누운 성주를 지켜보았다.

“잠드실 때까지 여기 있겠습니다. 편히 주무십시오.”

“걱정이 과하구나. 내가 설마 다시 일어나 독서라도 할까.”

“그러실지도 모르지요. 주무십시오.”

“정말이지 과하다.”

“예, 예.”

나는 그 모습을 지켜보았다.

이상하게도, 성주와 기사단장의 모습은 주종 관계라기보다는 상당히 사적으로 느껴졌다. 마치…… 드라마에서나 보던 노부모와 장성한 자식의 관계 같달까.

내가 기사단장에게 빙의했을 때 내 모습이 이상하다는 것을 성주에게 들키지 않은 게 맞나, 그런 생각을 하고 있을 때였다.

고른 숨소리를 내며 잠든 성주를 지켜보던 기사단장이 조용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기사단장이 고개를 돌려 창문을 노려보고 있었다.

이미 깊은 밤이었다.

정적만이 감도는.

그러나 기사단장의 귀에 잡혔을, 그 미묘한 바람 소리가 내 귀에도 들려왔다.

암습이다.

내가 그렇게 판단한 것과 동시에 기사단장 또한 검을 뽑아 들었다.

날카로운 쇳소리가 나는 동시에 창문이 스르륵 열렸다.

어둠이 스며들 듯 소리도 없이 방으로 침입한 것은 검은 망토를 머리끝까지 눌러쓴 자였다.

그리고 기사단장은 동요하지 않은 채 그에게 검을 겨누었다.

“암살자인가.”

기사단장에게는 이런 일이 매우 익숙한 듯 보였다.

암살자에 익숙한 것을 보면 이 기억의 시점은 첫 번째 전쟁이 끝난 후일지도 모른다.

기사단장은 눈앞의 적을 노려보며 웃었다.

“내가 있다는 것을 알았을 텐데 용기가 가상하구나. 죽고 싶은 모양이지?”

“타락한 기사가 충심을 그리 굳건히 세우다니, 참으로 우스운 일입니다.”

“유언은 그것뿐인가?”

“폐하께서 전언을 명하셔서 온 것일 뿐입니다. 예민하게 반응하지 마시지요.”

“성주님은 최근 깊게 주무시기에 어지간한 소란에도 깨지 않지. 너를 죽인다고 해도 깨지 않으실 거야.”

“남의 말을 듣지 않는 건 여전하십니다. 일단 제 말을 들어라도 보시고…….”

그러나 기사단장은 그 말을 끝까지 듣지 않고 칼을 휘둘렀다.

훌륭한 솜씨였다. 암살자는 곧바로 목이 베였다.

그러나, 죽지 않았다. 애초에 실체가 없는 환상의 형태였기 때문이다.

“……마법이로군.”

기사단장은 탄식했고, 암살자의 형태를 한 것이 웃었다.

“네, 그렇습니다. 당신이 잃어버린 그것.”

잃어버려?

나는 거기서 최초로 위화감을 감지했다. 하지만 내가 그 의문을 풀 상대는 없었다.

왜냐하면, 눈앞에 펼쳐지는 이 광경은 나와 전혀 상관없는 곳에서 이미 지나가 버린 시간을 재생하는 것에 불과하니까.

내가 지켜보는 앞에서 세 명의 배우는 열연을 지속했다.

뱀처럼 간사한 목소리가 기사단장에게 달콤한 말을 속삭였다.

“보셨으니 아시겠지요? 이쪽으로 돌아오십시오. 폐하께서도 당신을 높게 사고 계십니다. 그리고 당신의 능력을 돌려줄 수도…….”

“아니.”

하지만 기사단장은 그 말에 전혀 흥미가 없어 보였다.

여자의 눈길은 벨 수 없는 암살자 대신 방 안에서 타오르고 있는 난로의 불을 향했다. 슬슬 장작을 넣어 주지 않으면 불길이 죽을 것이다.

이상하게도, 나는 그 눈빛에서 성주를 향한 걱정을 느꼈다. 동시에 그 자신이 어떤 상황에서도 성주를 지킬 수 있다는 자신감도.

“마법으로 만든 환상 따위에 할애할 시간은 없다. 적당히 하고 꺼지도록.”

“정말 이대로 죽어 갈 작정입니까. 당신쯤 되는 사람이?”

협박하는 그 말에서는 오히려 초조함이 느껴졌다.

이상한 일이었다. 내가 겪은 바로는 적군의 진영이 압도적으로 유리한데도.

“그것도 좋겠지.”

“페트라!”

그리고 나는 처음으로 기사단장의 이름을 ‘인식’했다.

페트라는 무감한 눈으로 환상을 돌아보며 똑똑히 말했다.

“이 세상은 그런 것으로는 구할 수 없다. 그러니 이만 꺼져라.”

그렇게 말하며 페트라가 우연찮게도 내 쪽으로 고개를 향했기에, 나는 그제야 그 여자의 얼굴을 제대로 볼 수 있었다.

흑발과 마찬가지로 검은색 눈동자.

전체적으로 고집이 세 보이고 차가운 인상의 여자였다.

하지만 기사단장의 눈은 그런 인상과 반대로 불타오르는 것처럼 뜨거워서, 이 성을 모두 덥히고도 남을 것 같았다.

한때 내 몸을 빌렸던 페트라는, 지금만큼은 내 눈앞에서 확실한 신념을 가지고 살아 있었다.

“내가 따르는 것은 이분뿐이니까.”

그래, 너는 그런 사람이었구나.

- 기사단장의 기억의 재생이 종료됩니다.

내가 볼 수 있었던 기억은 거기까지였다.

내 시야는 금세 정상으로 돌아왔다.

나는 눈을 깜박였다.

보이는 것은 푸른 하늘, 병원 옥상에 꾸며진 작은 정원.

그 어디에도, 방금 전 광경은 남아 있지 않았다. 다만 내 머릿속에 의문을 남겼을 뿐이었다.

도대체 시스템이 이 기억을 내게 보여 준 의도가 뭘까. 그건 여전히 모르겠다만…….

“페트라.”

나는 그 이름을 나지막이 중얼거려 보았다.

돌처럼 강건하고, 신념에 몸을 불태우려 했던 기사. 그런 기사에게 잘 어울리는 이름이라고 생각했다.

전해지지 않겠지만, 그래도 푸른 하늘을 보니 속이 답답해져서 혼잣말을 내뱉었다.

“……수고했다.”

정말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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