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59화
내가 얼떨떨해하는 표정으로 나를 가리키자 백사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 혹시 내가 아까 한 말이 들리기라도 했나?
그렇다면 미안한 일이었다.
나 스스로가 백사현이 연예인 병에 걸렸다고 생각한다는 게 아니라, 인터넷에서 보았던 가장 강렬한 단어가 문득 생각나서 무심코 말이 그렇게 나왔다.
……그렇지만 들은 사람한테는 그게 아니겠지. 나는 최대한의 미안함을 담아 상대방을 바라보았다.
일단 사과부터 하자.
“저기, 죄송합니…….”
“괜찮으면 번호 좀…… 응?”
말이 겹쳤다.
나와 백사현은 서로를 멀뚱히 쳐다보다가 5초 후에 이 상황이 상당히 뻘쭘한 것임을 깨달았다.
백사현은 약간 귀가 달아오른 채로 애써 호탕하게 웃었다.
“하하하. 말 꺼내기도 전에 까였네요.”
“아, 그…….”
나는 말을 흐렸다.
사과를 하려다 의도치 않게 초장부터 거절해 버렸는데, 말을 들어 봤자 거절하는 건 똑같을 테니 굳이 정정하는 의미가 없겠다.
대신 나는 한 번 더 사과했다.
“죄송합니다.”
뒤에 생략된 말로는 연예인 병이라고 말해서, 가 되겠다.
백사현은 무안한 듯 예에, 하고 말한 다음 등을 돌려 제자리로 돌아갔다.
아무래도 본인이 까일 거라고 예상하지 못했을 테니 꽤 무안한 모양인지, 돌아가는 모습에서도 귀가 벌겋게 달아오른 게 보였다.
메인 광장에서 이쪽으로 다가온 백사현의 움직임을 따라 이쪽으로 시선을 옮겼던 사람들이 수군대는 것도 보였다.
나와 백사현 둘 다 그리 큰 목소리는 아니었고, 심지어 목소리가 맞물렸기에 일반적인 사람들에게 대화가 정확히 들릴 만한 거리는 아니었지만, 이게 무슨 상황인지는 솔직히 뻔했다.
백사현 까였다, 대박, 나 같으면 일단 번호 줬다…… 뭐, 그런 이야기들이 들려오고 있었다.
이거, 의도한 건 아닌데 어쩐지 미안한 모양새가 되어 버렸다……?
그렇지만 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렇다고 무작정 번호를 넘겨줄 수도 없는 일 아니겠는가.
여러모로 민망해져 버린 나는 빠르게 장소를 이동하기로 했다.
등 뒤에서 따가운 시선이 느껴졌지만 무시했다. SNS에 글이나 안 올라오면 다행이군.
내가 안도한 것은 사람이 아무도 없는, 겨울이라 다 말라붙어 버린 갈대밭을 지나칠 때였다.
다시 빈 벤치를 찾아 앉은 나는 깊게 한숨을 쉬었다.
그래도 뭐, 내가 해 버린 앞담화가 본인에게 들리지는 않은 것 같아서 다행이었다. 여러모로 더 민망해질 뻔하지 않았나.
그런데…… 이상하네.
나는 고개를 기울였다.
아무리 그래도 30위권에 들 정도로 던전을 공략한 헌터니 당연히 능력도 뛰어날 텐데 내 말을 듣지 못했다고?
뭔가 찜찜한데.
아니, 뭐. 설령 그렇다고 한들 내 알 바는 아닌가.
어쨌거나 시스템 랭킹이 거짓 순위를 공지할 리는 없다. 실제 능력치가 어떻든, 백사현이 한국에서 38번째로 던전을 공략하는 데 많은 공을 세웠다는 게 중요한 거지.
그리고 아리아드네나 일리아스 같은 경우도 신체 능력은 낮은 편이지만, 능력 특성 때문에 던전 공략 시 최대 업적자로 자주 선정되는 편이었다.
이런 건 당연한 건데…… 괜히 신경 쓰이는 것은 그만큼 내 신경이 곤두서 있다는 것이겠지.
“후우.”
나는 파란 하늘을 올려다보며 숨을 내뱉었다.
하얀 숨결이 사방으로 흩어졌다.
일부러 예전에 살던 곳까지 찾아왔는데, 이렇게 머리에 쓸데없는 생각이나 들 정도로 떠오르는 기억이 아무것도 없었다.
설마 이렇게까지 아무것도 생각이 나지 않을 줄이야.
대체 10년 전의 나는 어떤 경로로 타르토스에 간 걸까.
기억의 한 부분이 강제로 도려내진 것처럼 어떤 기억도 떠오르지 않았다.
“진짜 나한테 무슨 악의라도 있나.”
지구로 돌아온 후 시스템이 이상한 짓을 하는 게 한두 번이 아니었다.
시스템이 내게 보여 주었던 기사단장의 기억 파편도 마찬가지.
그 이후로 곰곰이 그 기억 속 모습을 따져 보았지만, 역시 시스템이 그 기억을 보여 준 의도는 알 수 없었다.
물론 의미심장한 대화가 스쳐 지나가기는 했다.
하지만 그건 어디까지나 던전 내의 속사정을 좀 더 깊이 알게 해 줬을 뿐이지, 지금 당장 내게 필요한 정보는 전혀 아니었다.
설마…… 내가 속사정을 궁금해한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진상을 보여 준 것은 아닐 테고.
“……아니겠지?”
그래, 그런 가벼운 이유로 움직인 건 아니겠지.
나는 미심쩍어하며 허공을 노려보았다.
하지만 던전 속에서 내 혼잣말에 반응한 그때처럼 메시지가 떠오르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결국, 별다른 단서는 없는 건가.
나는 한 번 더 한숨을 쉬었다.
어떻게든 타르토스로 돌아갈 방법을 찾아야 하는데…… 이래서야 당장의 방침이 정해지질 않는다.
“……할 것도 없는데, 이왕 나왔으니 여기 있는 던전이나 공략하고 돌아갈까?”
음, 일산까지 왔는데 아무래도 그편이 효율적일 것 같지?
나는 금방 마음을 다잡았다.
할 게 없으면 찾으면 된다.
또, 내게 지금의 능력치에 익숙해지는 작업이 필요한 것도 사실이었다.
마침 이 앞의 던전은 하급으로 분류되는 손쉬운 던전이니 몸을 풀기에는 딱 좋을 거다.
운동 삼아 던전을 공략하고 나오면 이 찝찝한 기분도 날려 버릴 수 있을 것이다.
“좋아.”
쇠뿔도 단김에 빼라고 했다.
나는 마음먹은 김에 곧바로 최민혁의 번호로 전화를 걸었다. 정부에 등록된 던전의 경우에는 입장 허가를 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신호음이 몇 번 가지도 않았을 때 최민혁이 전화를 받았다.
빠르네.
“예, 강예나 헌터. 최민혁입니다.”
“갑자기 전화드려서 죄송합니다. 던전 입장 허가 좀 받으려고 하는데요.”
내가 말하고 약간의 침묵 후 최민혁이 대답했다.
“괜찮습니다. 업무 시간이니까요.”
즉, 업무 시간 외에 전화하면 내 목을 날리겠단 뜻이겠지? 직장인의 한은 무서우니 유념해 둬야겠다.
“일단 들어가고 싶은 던전명을…… 아니, 지역만 말씀해 주셔도 괜찮습니다.”
“어, 여기 일산에 있는 호수 공원인데요.”
호수 한가운데에 떠 있는 인공 섬 바로 위에, 동동 떠 있는 마름모 모양의 던전 표식이 보였다.
최민혁은 약간 의아한 기색이었다.
“아, 타-01 던전을 말씀하시는 거군요. 하지만 타-01은 정기적으로 공략되고 있는데, 입장하고 싶은 이유를 말씀해 주시겠습니까?”
“어, 이유가 필요한가요? 그냥 나온 김에 공략하려고 했는데요.”
아무리 정기적으로 공략되고 있다고 한들, 포화도를 낮추는 작업은 많이 해도 나쁠 건 없다. 그래서 당연히 바로 가능하리라 생각했는데, 이상하게도 대화가 끊어졌다.
“최민혁 씨?”
“아, 예.”
이어지는 목소리는 심지어 무척이나 떨떠름하게 들렸다.
“……나온 김에 던전 공략을…… 하신다고요?”
“……네, 그런데요.”
나는 저도 모르게 말을 흐렸다.
생각해 보니 별 이유도 없이 던전에 들어간다고 전화를 건 점은 좀, 아닌 것 같기는 했다. 밥 먹고 배 꺼트리려고 산책을 간다는 것도 아니고.
그런 감각이긴 했다만.
“……저, 불가능하다면 됐습니다. 그냥 돌아가죠.”
“아, 아닙니다. 끊지 마세요! 오해십니다. 강예나 헌터의 그런 자세, 저는 아주 훌륭하다고 생각합니다!”
갑자기 터져 나온 큰 소리에 나는 깜짝 놀라 핸드폰을 귀에서 떼어 냈다.
저번에 봤을 때 느꼈던 예민한 인상은 어디로 갔는지, 전화 너머의 최민혁은 어느샌가 열변을 토하고 있었다.
“이렇게 정부 측이 요구하는 것도 아닌데 자발적으로 던전 공략에 임하는 그 자세! 모든 헌터들의 귀감입니다. 감동해서 말이 늦어졌을 뿐입니다!”
“아…… 아, 예. 그렇습니까.”
“물론 정기 공략이 제대로 진행되지 않는 던전에 관심을 가져 주시면 더 좋겠지만요, 괜찮습니다. 강예나 헌터가 타-01에 들어가신다면 스케줄 조정은 얼마든지 가능합니다. 타-01에 배정되어 있는 정부 헌터들은 다른 던전으로 재배치하겠습니다.”
“어, 제가 너무 수고를 끼치는 게 아닌지…….”
“아니요, 20분만 기다려 주십시오! 제가 곧장 스케줄을 조정하겠습니다. 바로 현장 팀에게 연락을 넣어서…….”
그리고 말은 꽤 길게 이어졌다.
이렇게 수다스러운 성격일 줄은 몰랐는데…… 아무래도 저번엔 이우연이 부담스러워서 말을 아낀 게 맞는 것 같다.
아니, 그건 그렇고.
이렇게 던전 공략 한번 한다고 흥분해서 말을 쏟아 내는 사람인데, 이우연은 던전 공략에 미쳐 있는 놈 아니던가? 그런데도 이우연을 부담스러워하다니, 대체 뭘 어떻게 했기에…….
그렇게 내가 뜬금없이 이우연의 인성을 의심하고 있을 때였다.
흥분해서 떠들고 있던 전화 너머가 갑자기 조용해졌는데, 너무 시끄러워서 잠깐 귀를 떼고 있던 나는 그 이상한 기색을 약간 늦게 알아차렸다.
“……최민혁 씨?”
“강예나 헌터.”
최민혁의 목소리는 완전히 굳어 있었다. 무기질적인 기계음이 약간 섞여 있는 목소리 속에서도 삐져나온 두려움이 느껴졌다.
“방금 보고가 들어왔습니다.”
“무슨 보고죠?”
“공교롭게도, 방금 말씀하신 타-01 던전의 포화도가…… 급격히 높아지고 있다고 합니다.”
……뭐?
그게 의미하는 바는 단 하나였다.
긴장한 목소리도 그 결론을 암시하고 있었다.
“이대로라면 곧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날 겁니다.”
나는 벤치에서 일어나 호수 한가운데에 있는 섬을 주시했다. 이 거리였지만 포화도 조회는 가능했다.
- 해당 던전의 공략 상황을 조회하시겠습니까?
- 해당 던전의 포화도는 ‘극도로 위험’ 상태입니다.
조회한 붉은색의 게이지 바는 거의 끝까지 꽉 차 있었다.
그 메시지를 보는 순간, 머릿속에서 안구를 찌르는 것 같은 두통이 머리를 엄습했다.
저 정도로 극도로 치달은 포화도라면 이건 곧 터진다. 안에서 클리어 조건을 달성하든, 말든.
“이걸, 이게 대체 무슨 일인지…… 이제까지 이런 일이 터진 적은…….”
전화 너머에서는 최민혁이 패닉 상태에 빠져 있었다. 소란함이 전해져 오는 것을 보니 부서 전체에 비상이 걸린 듯했다.
“……최민혁 씨.”
“예, 예?”
“여쭤보고 싶은 사항이 있습니다만.”
하지만, 일단은 침착해야 한다.
나는 소지창에서 검과 갑옷을 장착하며 주위를 살폈다.
일은 이미 터졌고, 시간을 돌릴 수는 없으니, 당장 내가 해결할 수 있는 일이 무엇인지 찾아야 했다.
나는 최민혁에게 가장 필요한 사항부터 물었다.
“타-01 던전, 내용물은 뭡니까? 하급으로 분류되었다는 것만 알고 있어서요.”
“……어.”
“최민혁 씨, 대답하세요.”
“……아, 예. 내용물이요.”
아직 얼떨떨한 상태이던 최민혁은 내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듯싶었다.
“내용물이라면…… 아, 던전 내 몬스터 말씀이시죠. 고블린입니다. 클리어 조건은 고블린 30마리를 해치우는 거고요.”
쳇, 하필이면 까다롭게. 차라리 같은 하급 던전이라도 슬라임이면 좋았을 것을.
고정형 던전이 터질 경우 그 던전 내의 몬스터가 현실로 새어 나오게 된다.
고블린이라면 하급 던전에서 가장 흔한 종류의 몬스터로, 각 개체는 어느 정도 스펙을 쌓은 헌터라면 상대하기 어렵지 않을 정도지만 무리를 지어 다니기에 약간 까다롭다.
그나마 다행인 건 호수 가운데 있는 인공 섬에 던전이 발생한지라, 고블린들이 뭍까지 나오는 데 시간이 좀 걸릴 거란 것이다.
다만 고블린 새끼들은 헤엄도 잘 치는 편이라서, 정말 약간의 시간 벌이밖에 되지 않는다.
나는 빠르게 주위를 둘러보았다.
평일이라 다행히 호수 공원 안에 사람은 많지 않지만, 메인 광장에는 방송을 촬영하는 시민들이 있고 공원을 지나 길 하나만 건너면 상업 지역이 있다.
여기서 막지 못하면 일반인의 피해도 커질 것이다.
“근처에 있는 헌터들은 몇 명이나 됩니까?”
“일단 정기 공략차 정부 소속 헌터들이 스무 명 근무 중입니다.”
스무 명.
적은 숫자는 아니었지만 고블린들을 한 마리도 흘리지 않으려면 좀 더 많은 게 낫다.
“저는 일단 근처 경찰청에 외근 나간 헌터는 없는지 바로 확인해 보고 지원 요청 넣겠습니다.”
“네, 빨리 부탁드립니다. 그럼 이만.”
전화가 끊겼다.
이제 최민혁이 얼마나 빨리 많은 인원을 충원하느냐에 따라서 위험도가 달라질 것이다.
“하…….”
그리고 전화를 끊은 나는, 잠시 하늘을 우러러보았다.
밝은 햇빛이 눈을 찌를 듯했다.
헛웃음이 절로 터져 나왔다.
이건 분명히 시스템의 농간이다. 그런 강렬한 예감이 뇌리를 스쳤다.
“……이건…… 우연일 수가 없다.”
한두 번도 아니고, 이걸로 세 번째였다.
처음에는 강남에서 일어난 돌발성 던전 브레이크.
그리고 두 번째로는, 신촌의 고정형 던전 내에서 갑자기 오류가 발생했던 것.
마지막으로 지금. 잘 관리되고 있던 던전의 포화도가 갑자기 치솟았다.
내가 한국으로 돌아온 이후, 이렇게 3번도 넘게 ‘이상 상황’ 이 발생했다.
그 외에도 이상한 오류가 자잘하게 많이 발생했었지.
이쯤 되면 이건 우연이라고 할 수 없다.
내가 이 상황의 원인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는 게 비약인가?
아니, 비약일 수가 없지. 적어도 저 시스템이 ‘나’를 특정하고 이런 짓을 벌이고 있다는 것은 확실해졌다.
나는 허공을 노려보며 물었다.
“원하는 게 뭐야. 말해.”
어쩐지 기묘하게도 확신이 들었다.
던전 내에서 그랬듯이, 이번에도 시스템이 내 말에 응답할 것이라는 걸.
내 확신은 정확하게 들어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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