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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61화 (62/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61화

백사현이 내게로 들이댄 바스타드 소드의 검 끝이 둔탁하게 빛나고 있었다.

나는 일단 시험 삼아 물어보았다.

“나, 못 알아보겠어?”

그 질문에 돌아오는 대답은 무척이나 날카로웠다.

“뭐? 무슨 헛소리야?”

흠, 이 녀석도 못 알아본단 말이지.

소소한 작은 실험이 성공했다.

나는 얼굴에 덧씌워진 얇은 은으로 된 가면을 매만졌다.

불과 몇 분 전만 해도 내 번호까지 따려고 했던 백사현이 나를 알아보지 못하는 이유는 딱히 그가 멍청해서가 아니다.

내가 현재 장착한 이 아이템의 이름은 ‘은의 장막’.

은의 장막은 저번 던전을 클리어한 후 내 소지창으로 들어온 보상 아이템이었다.

이름과는 다르게 이 아이템은 섬세한 은세공이 아로새겨진, 얼굴의 반을 가리는 가면의 모양을 하고 있었다.

처음 소지창을 확인했을 땐 무기도 아닌 이런 가면 따위가 그 최악의 난도를 자랑하던 던전을 클리어한 보상으로는 약하지 않았나, 싶었는데.

- ‘은의 장막’을 장비 중입니다.

- 해당 아이템을 착용하고 있는 동안 플레이어의 모습을 타인의 인지에서 멀어지게 만듭니다.

- 제한 시간 없음.

사실 이미 병원에서 한번 실험을 해 보긴 했었다. 이 가면을 착용하자 다들 내가 강예나라는 것을 인지하지 못했다.

그런데도 대화를 하는 것에는 아무 문제가 없었다. 심지어 내가 가면을 착용하고 있다는 사실조차 인식하지 못하는 것 같았다.

어쩐지 저번 던전 공략을 떠올리게 하는 아이템이었다.

심지어 일반인뿐 아니라 헌터조차 아이템의 착용 여부를 간파하지 못했다는 건 꽤 놀라운 일이었다.

보통 이런 아이템은 상대방의 육감 혹은 탐지 스킬 따위로 파훼되기 마련인데도.

그런데 이 아이템은 어느 정도 순위권 헌터인 백사현이 간파해 내지 못했다.

이 정도라면 정말로 꽤 쓸모가 있겠다.

나는 차가운 감촉의 가면을 어루만졌다.

이우연급이라면 또 모르겠지만…… 이건 나중에 실험해 보자.

“야, 지금 너 나 무시하냐?”

백사현이 크게 고함을 내질렀다. 스킬이 광역 도발이라더니, 혹시 목소리로 몬스터들의 주의를 끄는 건 아니겠지.

“지금 이 상황을 무시하는 건 너 같은데, 백사현 헌터.”

“뭐?”

나는 한숨을 쉬며 인공 섬 방향을 가리켰다. 희뿌연 빛깔을 한 돔 모양의 결계가 섬 전체를 감싸고 있었다.

결계 너머, 헌터들이 틈새 사이로 튀어나오는 고블린들을 차근차근 처치하고 있었다. 아직까지는 안정적인 모습이었지만 헌터들 사이에서 긴장이 감돌고 있다는 것은 충분히 느껴졌다.

그걸 백사현도 보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

“저거 안 보여?”

이쯤 말하면 아무리 바보라도 상황을 파악하고 굽힐 줄 알았는데, 백사현은 내 말에 오히려 더 화가 난 듯했다.

“그래서 날더러 어쩌라고?”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다는 걸 모르는 건 아니지?”

“던브 터졌는데, 그래서 뭐?”

백사현이 코웃음을 치며 검을 집어넣는 것과 동시에 팔짱을 꼈다. 자신은 이 사태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명확한 의사 표시였다.

“그래 봤자 어차피 하급 던전이잖아. 고블린 몇십 마리 튀어나오고 말 텐데.”

혹시 클래스가 예언자인가.

할 말을 잃을 정도로 대단한 자신감이었다.

이우연이 백사현 이름을 듣고 기겁하더니, 그건 성격 때문이었나?

머리가 아파 왔지만 나는 일단 대화를 시도해 보기로 했다.

솔직히 그냥 무시하고 내 갈 길 가고 싶기는 했는데, 이 상황을 효율적으로 해결하려면 아무래도 백사현의 도움이 필요하긴 했기 때문이다.

“하지만 던전 브레이크라는 건 언제나 예외라는 게 존재하는…….”

“아, 척 보면 알지. 던브 한두 번 겪어 봐?”

얼마나 대차게 고개를 홱, 돌렸는지 백사현이 한쪽 귀에 차고 있던 이어 커프가 저 멀리로 날아가 버렸다.

나는 그 모습에 약간 할 말을 잃었다.

그리고 네가 던브를 겪어 봤자 얼마나 겪어 봤다고 그러냐, 애송아…… 그렇게 말하려는데.

“그런데.”

백사현이 아니꼽다는 눈길로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내뱉었다.

“그러는 너는 뭐 하는 새낀데 갑자기 튀어나와서 꼰대질이야?”

꼬, 꼰대질.

뼈를 주먹으로 맞은 것 같은 둔중한 감각이 몸을 강타했다. 생각지 못한 말에 나는 그만 충격을 받아 버리고 말았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몸을 떨고 있습니다.

심지어 내 손에 쥐어진 광검조차 웃고 있었다.

나는 황당한 눈길로 내 소중한 파트너를 응시했다.

야, 너 이 자식…… 이런 쓸데없는 상황에 감응할 거야? 아니, 그러니까 너도 평소에 나를 그렇게 생각했다는 뜻……?

- 에이펙스의 광검이 침묵합니다. 단순한 검인 모양입니다.

곤란해지니까 입 다무는 것 좀 봐!

내가 배신감으로 몸을 떨고 있는 사이 백사현이 내게 물었다.

“그런데 너, 어디 놈이야? 조한율 쪽인가?”

“조한율?”

“그렇게 되묻는 걸 보니 아닌가 보네. 그럼, 혹시 각성한 지 얼마 안 됐나?”

“………….”

백사현은 노골적으로 품평하는 시선으로 나를 아래위로 훑었다.

지금 내가 몸에 두르고 있는 장비는 겉으로 보기에는 무엇 하나 특별한 것이 없으니 초보자로 보이기는 할 것이다.

“왜, 각성하니까 네가 뭐라도 된 것 같냐? 초보자일수록 제가 뭐라도 된 줄 알고 날뛰기는 하지.”

어디서 들어 본 것 같은 말이었다. 언젠가 죽도록 패 준 놈이 처맞기 전에 했던 말 같은데.

나는 주먹을 우두둑 꺾었다.

그러니까 지금…… 나는 백사현에게 정의감 넘치는 애송이 취급을 받은 건가?

“하하하. 이거 아주 웃겼다.”

“뭐가?”

되묻는 얼굴을 한 대 쥐어 팰까, 그런 충동이 들었지만 내가 지금 우선해야 할 것은 이쪽이 아니었다. 지금 이 녀석을 쥐어 패 봤자 해결되는 건 내 짜증뿐이다.

……음, 그거면 된 것 같기도 하고.

백사현이 침묵한 나를 보며 제 나름대로 답을 찾아냈는지, 콧방귀를 뀌며 말을 이었다.

“내가 좋은 마음으로 충고 하나 하겠는데…… 그렇게 정의감으로 나서 봐야 하등 소용없더라.”

건방진 자세와는 달리 의외로 진심 어린 말이 튀어나왔다.

슬슬 그냥 냅다 쥐어 패고 협력을 구하려던 나는, 그 말을 듣고 일단 주먹을 내리며 한 번 되물어 보았다.

“소용이 없다고?”

“그래, 나서 봤자 누가 알아주지도 않아. 고생은 고생대로 하고, 혹시라도 인명 피해가 나면 왜 더 잘하지 못했냐고 두드려 맞는다고.”

“누구한테 두드려 맞는다는 거야?”

“각종 언론에 인터넷까지. 나처럼 이름 팔린 애들은 더하지. 누가 보면 내가 죽인 줄 알겠어.”

그렇게 말하는 백사현의 표정은 의외로 담담했다. 차라리 체념한 얼굴에 가까워 보이기도 했다.

그 표정을 보니 인터넷에서 백사현과 관련해 떠들던 말이 생각났다.

연예인 병이라든가, 관종이라든가.

썩 좋은 말은 없기는 했다. 공적을 꽤 많이 세운 헌터치고는 비판의 말만 즐비한 것도 사실이다.

물론 백사현을 두둔하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남을 우습게 깔보는 발언은 언제나 더 큰 주목을 받고, 부정적인 말일수록 영향력이 큰 편이다.

타르토스에서는 그래 봤자 사교계 귀족들이 입소문을 퍼트리는 것에 불과했지만, 여기는 인터넷이라는 궁극의 소통 수단이 있는 만큼 확산 속도가 완전히 다르다.

나는 백사현이 하고 싶은 말을 한마디로 정리했다.

“……즉, 이 상황에서 괜히 나서 봤자 욕만 먹는다는 거지?”

“그래, 바로 그거야. 이제 말이 좀 통하는군.”

백사현이 코웃음을 치며 팔짱을 꼈다.

“저쪽에 정부 놈들 와 있는 거 뻔히 알고 있거든. 내가 굳이 나설 필요 없잖아?”

“그런 것치곤 사람들 앞에선 네가 나설 것처럼 이야기했잖아. 구국의 헌터, 아니던가?”

내 비아냥에도 백사현은 동요하지 않았다. 낯빛에 약간의 그림자가 지기는 했지만 그는 철벽을 유지했다.

“그래, 그 구국의 헌터인 내가 말하는 거야. 아까 그쪽도 봤는지 모르겠는데, 헌터들은 다 목숨 걸고 싸우는 거잖아. 그런데 무슨, 나한테 맡겨 놓기라도 한 것처럼 도와주라고 하는 거 봤지? 얼마나 뻔뻔해?”

“…….”

“너도 영웅 노릇 한번 해 보고 싶은 모양인데, 그러지 마라. 내가 진짜 걱정해서 충고하는 거야.”

나는 그렇게 말하는 백사현을 빤히 바라보았다.

이건 백사현의 말이 일정 부분 옳을지도 모른다.

우성연의 요구도, 매니저의 충고도 백사현의 입장에서는 뻔뻔하게 느껴질 법했다. 그들 자신은 아무런 손해도 보지 않고 타인에게 도움을 요청하는 것이니까.

이제까지는 백사현이 그냥 관종이라서 사람이 죽어 나가건 말건 상관하지 않고 제 잇속이나 챙기는 미친놈이라고 생각했는데, 제 나름의 이유가 꽤 확실했다.

나름의 고충도 있는 것 같고.

심지어 갑자기 나타나 자신을 공격한 나를 후배처럼 여기고 충고를 해 주는 걸 봐서는 생각보다 이성적인 놈이었다.

혹은…… 나는 백사현의 손을 주시했다. 적당히 러프한 셔츠 바깥으로 맨손이 보였다.

살짝 떨리고 있다.

‘……역시.’

나는 백사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게 다야?”

“뭐?”

“이 상황에서 손 놓고 집에 가겠다는 이유가 그게 다냐고.”

고충은 잘 들었다.

아예 이해가 가지 않는 건 아니었다.

뭐, 솔직히 나도 어디서나 내 이야기를 하고 있다면 조금은 신경 쓰이긴 할 것이다. 아마 1분 정도 꺼림칙하기도 할 테고.

특히, 서치 방지를 한답시고 나를 ‘=3’ 따위로 지칭하는 건 그만뒀으면 좋겠다.

하지만 그건 그뿐인 이야기였다.

“너, 초보자라서 그런 건지 완전 중증이다……? 그렇게 영웅 노릇하다 죽어.”

백사현은 내 반응이 뜻밖이었는지 인상을 찌푸리고 있었다. 그의 눈길에는 이제 슬슬 걱정마저 섞여 있었다.

“그래, 죽을지도 모르지.”

하지만 손을 뻗지 않는다는 선택지는 내게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지만 내게 협력하지 않으면 넌 내 손에 죽어.”

왜냐하면 나는…….

-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퀘스트 수행을 수락하시겠습니까?

- Y/N

- 퀘스트 달성 시 보상이 주어집니다.

시스템 메시지는 여전히 머리 위에 떠올라 있었다.

혹시 수락을 선택하는 순간 무슨 일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어서, 일단 사람들을 대피시킨 후 수락하려고 대기 중이었다.

이제 사람들은 모두 적당한 거리 밖으로 대피했다. 그러니 이제 퀘스트를 수락하더라도 상관없긴 한데…….

“뭐, 뭐……?”

내 말에 어이가 없어 말문이 막혔는지 입을 뻐끔거리는 백사현을 힐끗 보았다.

이 상황에서도 바스타드 소드는 집어넣은 채였고, 언뜻 보인 오른손에는 굳은살이 보였지만 왼손은 또 그렇지도 않았다.

조금 전부터 내가 느끼고 있던 위화감을 결론지을 최종적인 단서가 주어진 셈이다.

이걸로 백사현의 쓸모가 정해졌다.

“……잡소리는 이쯤 해 두고 본론으로 들어가지.”

그렇다. 이쪽이 본론이다.

백사현이 실제로 어떤 인간인지는 솔직히 내 알 바가 아니다. 정말로 형편없는 인간이라면 적당히 패 주고 지나가면 될 일이다.

단지 나는 지금 해내야만 하는 일이 있고, 그걸 효율적으로 해내려면 백사현의 도움이 약간 필요했다.

백사현 본인은 그럴 생각이 없다고?

그렇다면, 어쩔 수 없이 도와야만 하는 상황을 만들어 줘야지.

“이 상황을 정리하려면 당신 도움이 좀 필요하겠는데.”

어쩐지 계속 멍하니 입을 벌리고 나를 바라보고 있던 백사현이 그 말에 겨우 정신을 차렸다. 목 끝까지 벌겋게 달아올라 있었다.

“야, 지금까지 내가 하는 말을 뭘로 들었어? 나는 나서기 싫다고 말했잖아!”

“정신 차려.”

그렇게 말하며 검을 뽑자 백사현이 놀라서 뒤로 한 걸음 물러났다.

우스운 일이었다. 마치 공격이라도 당하는 사람 같지 않은가.

나는 검 끝으로 호수 너머의 섬을 가리켰다.

이러고 있는 시간에도 저 섬에서는 헌터들이 다른 사람들을 지키기 위해 필사적으로 싸우고 있었다.

“잘 들어. 던브가 터지는 건 초반에 막아야 해.”

던브가 터진 초반에 잘 대처하기는 했다만, 결계가 깨지는 건 시간문제였다.

고블린이 사는 던전이 하위 던전으로 분류되는 것은 클리어 조건이 존재하기 때문이다.

개별 개체의 힘은 강하지 않고, 서른 마리만 잡으면 던전을 빠져나올 수 있으니까.

하지만 현실에 튀어나온 몬스터는 다르다.

“튀어나온 고블린이 서른 마리가 아니라 삼백 마리가 되면, 삼천 마리가 되면? 그래도 욕먹는 게 싫어서 내버려 두겠다는 헛소리를 지껄일 건가?”

물론 한국에서야 타르토스와 달리 무기의 화력으로 어떻게든 해결할 수는 있겠지. 하지만 주변 환경을 생각해 보면 마구잡이로 움직일 수도 없다.

피보나치의 수열처럼 늘어나는 놈들을 모두 잡아 죽이려면 어느 정도의 희생과 시간이 필요할지는 아무도 모른다.

최악의 경우, 이 일대는 고블린의 자생지가 될 수도 있다.

상황으로 미루어 보아 시스템이 일으키는 오류가 나와 관련이 있다고 가정할 때, 내게는 썩 뒷맛이 나쁜 상황이다.

백사현은 명백하게 기에 눌린 표정으로, 그래도 아직 납득하지 못한 듯 말했다.

강아지가 지레 겁을 먹고 짖는 모습과 닮았다.

“설마, 그렇게까지 상황이 악화될 리가 없잖아.”

저런 소리를 하니까 애송이라는 거다.

나는 혀를 찼다.

아직 시스템의 악의를 제대로 겪어 보지 못한 초보들이란…… 이래서 안 된다는 식의 말을 하려다가 순간 멈칫했다.

아니, 잠깐. 이게 꼰대 같다는 건가?

나는 헛기침을 하며 하려던 말을 멈추고, 말을 약간 순화하기로 했다.

“가능성이 존재하는 한 무시할 수는 없지. 그래서 그쪽 도움이 필요한 거고.”

“누군지는 모르겠지만 당신, 남의 말 정말 안 듣는구나? 내가 싫다고 했…….”

“네 스킬, 광역 도발이라던데.”

“……사람 말을 좀 들어!”

“실은 그거 아니지?”

“그러니까, 대체 무슨 말을 하는 거냐고!”

겉으로 보기에 백사현의 표정은 변함이 없었다. 그저 이 상황에 열 받은 사람처럼, 내 말을 정말로 이해하지 못하는 것처럼.

꽤 대단한 연기력이 아닐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미 눈치를 챘단 말이지.

나는 씩 웃었다.

“네 클래스, ‘배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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