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63화
설마 자신의 클래스를 알아맞히는 인간이 나올 거라고는 생각도 하지 못했다.
백사현은 앞에 선 여자를 바라보며 이를 꽉 악물었다.
한국에 던전과 시스템이 생겨나면서, 본래 사회에서는 발휘할 수 없었던 능력을 개화한 인간들이 튀어나오기 시작했다.
직접 무기를 들어 다른 생명체를 죽일 기회가 없었기에 발휘될 기회가 없었던 재능.
백사현은 새로운 세상에서 재능을 발휘한 인간 중 하나였다.
처음 던전 브레이크에 말려든 사람들은 대부분 제 손으로 피를 묻힐 기회가 생기기도 전에 먼저 죽거나, 혹은 기회가 생기더라도 차마 손을 대지 못하고 죽어 갔다.
하지만 백사현은 달랐다.
칼을 집어 들고 살기 위해 몬스터의 몸을 몇 번이고 내리찍었다.
시스템이 살해를 인정했음에도 멈추지 않고 계속.
동작을 멈춘 것은 팔에 힘이 모두 빠져서 도저히 움직이지 않게 되었을 때였다.
시스템 메시지.
머리를 터트려 버린 눈앞의 몬스터…….
영화에서나 나올 법한 장면이었다.
그 현실 같지 않은 광경을 바라보다가, 백사현은 문득 정신을 차렸다.
옆에 있던 아기의 울음소리가 들렸기 때문이었다.
그랬지. 백사현이 던전 브레이크가 터진 후 얼떨결에 도망쳐 들어온 건물은 커다란 쇼핑몰이었다.
아직 던전 브레이크가 무엇인지도 모르던 때였기에 헌터는커녕 무기를 가진 군인조차 없었다. 모두가 악을 쓰며 엘리베이터나 에스컬레이터를 타고 몬스터를 피해 도망치고 있었다.
그 와중에 유모차를 밀던 젊은 부부가 도피 행렬에서 뒤처진 것은 당연한 일이었고, 백사현이 그걸 발견한 건 우연한 일이었다.
몬스터가 달려드는 것을 본 백사현은 칼을 들었다.
부엌칼이 당시 백사현에게 주어진 유일한 무기였고, 상대 몬스터가 신체 능력이 다소 떨어지는 고블린이었다는 건 백사현의 유일한 행운이었다.
- D급 몬스터, ‘고블린’을 처치하였습니다.
- 당신의 행동이 이후 개화될 ‘클래스’에 영향을 줍니다.
아직 그 시스템 메시지의 의미를 모를 때라서 시야를 방해하는 것들을 날파리 쫓듯 치워 버렸다.
그렇게 명확해진 시야에서 백사현은 문득, 그 아기를 소중히 껴안은 부모를 돌아보았다.
그들의 얼굴은 경악과 당혹, 그리고 두려움으로 물들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던 백사현은 무심코 이렇게 말했다.
“이제 괜찮습니다.”
그건 백사현의 마음에서 우러나온 말은 아니었다. 그 전날 보았던 형사 드라마에서 나온 대사였다.
형사가 납치된 피해자를 구했고, 피해자를 안심시키기 위해 했던 대사.
백사현은 맥주와 함께 그 허접한 연기를 깠더랬다.
내가 해도 저 정도는 하겠다.
심지어 스토리도 유치하기 짝이 없었다. 요즘 세상에 누가 이런 정의를 추구하는 형사 드라마 따위를 본다고?
그래서 설마 자신이 이런 대사를 하는 상황이 정말로 오리라고는 상상도 하지 못했다.
“흑, 흐윽…….”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그리고, 상대방의 반응이 이렇게 기쁘게 느껴지리라는 것도.
백사현은 자신의 손에 쥐어진 칼을 바라보았다. 피범벅이 되어서 만신창이가 된 손은 더 이상 신경 쓰이지 않았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타인에게 받아 본 감사함이라는 것은 마약 같았다.
그렇게 첫 단추를 잘못 꿴 셈이다.
어느 정도 던전 브레이크가 잦아들게 되며, 언론은 그동안 일어난 참사에서 찾아낸 미담을 조명하기 시작했다.
사람들이 좋아할 만한 소재였다.
그 소재 중 하나로 선택된 것이 백사현이었다.
자신의 목숨이 걸린 상황에서 아기의 울음소리를 외면하지 못한 영웅.
젊은 부부가 눈물을 감추지 못하며 인터뷰를 한 덕에 백사현의 이름값은 순식간에 치솟았다.
백사현은 잘 팔렸다.
그의 배경이 자극적인 것투성이였던 덕도 있었다.
어려운 가정 환경, 꿈을 좇다가 실패해서 빗나갔던 사춘기, 그 후 성실하게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꾸려 나가던 청년.
완전히 뒤바뀐 세상에서는 그런 흔한 스토리도 팔아먹을 거리가 되었다.
그의 인생은 이제 완전히 달라져 있었다. 어디서나 골칫덩어리, 보기 싫은 것에 불과했던 백사현은 누가 보아도 성공 가도의 입구에 서 있었다.
백사현 자신도 이 변한 세상에서 좀 더 유용한 인간이 되어 있다는 사실에 꽤 고무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모두 백사현의 클래스가 정해지기 전까지의 일이었다.
시스템상 표시된 백사현의 클래스는 배우였다.
그때까지 검을 써 왔던 백사현은 당연히 자신의 클래스가 검사가 되리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결과는 달랐다.
마침 백사현과 함께 언론에 팔리기 시작하던 이우연의 클래스가 마검사라는 것이 밝혀졌을 때였다.
그런데 나는 배우라 이거지.
백사현은 헛웃음을 지었다.
뭐랄까, 사실 약간 허탈했다.
시스템이 나타난 이후 모든 노력은 수치로 변환되어 표시되었고, 그것은 절대적인 결과값으로 느껴졌다.
시스템 메시지가 떴을 때 깨달았어야만 했다.
너는 결국 영웅을 연기하는 배우에 불과하다고, 실은 그런 깜냥도 되지 않는 인간이라고.
사실 몬스터가 나타났을 때, 백사현은 아기를 도울 생각이 전혀 없었다.
그 상황이 너무 무서웠고, 몬스터가 다른 사람을 공격하는 틈에 그 자리를 빠져나가려고 했을 뿐이었다.
그런데 뒷걸음치다 떨어트린 진열대의 물건 소리 때문에 몬스터가 백사현에게로 시선을 돌린 것이, 이 모든 사태의 원인이었다.
그는 그저 자신이 살기 위해 칼을 들었을 뿐이었다.
결국 시스템에 의해 백사현이라는 인간은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판정이 내려진 것이다.
그렇지만 그걸 솔직하게 남들에게 밝힐 용기도 나지 않았다.
그래서 백사현은 자신의 클래스는 검사라고 밝혔고, 계속해서 적극적으로 던전을 공략해 나가기 시작했다.
다행히도 의심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물론, 언론에 팔리기 시작하면서 백사현이라는 인물의 가치는 점점 떨어지기 시작했지만, 그건 예상한 바였다.
어차피 나라는 인간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으니까.
하지만 동시에 오기도 생겼다.
클래스 따윈 상관없이, 모두에게 내가 진짜 구국의 영웅이 될 수 있다는 걸 보여 주고 말겠다고.
이우연이 가장 거슬리기는 했지만 그도 어차피 영웅 따위에 어울리는 인간상은 아니었다. 소속인 영원 길드에서 입막음을 하고 있지만 실체가 알려지는 것도 시간문제였다.
그런 인간보단 내가 훨씬 더 잘 연기해 낼 수 있다.
이제까지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해 왔다.
“백사현, 준비해.”
롱소드를 든 여자의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호수에 비친 햇빛이 강렬하기 때문인가?
백사현은 일순간 위화감을 느꼈지만 그보다 더 중요한 것에 시선을 빼앗겼다.
자신에게로 향한 등이 완전히 비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이라면 이해도가 레벨 7에 달한 암살자가 되어 목숨을 노릴 수 있을지도 모른다. 쓸 만한 단검은 아직도 소지창에 몇백 개 남짓 남아 있다.
찌를까?
그렇게 생각한 순간 여자가 고개를 돌려 이쪽을 바라보았다.
“허튼 생각하지 말고.”
허를 찔린 백사현은 순간적으로 움찔했다.
“어떻게 알았어?”
“살기를 그렇게 뿜어내는데 모를 수가 있냐.”
그게 말이 되나.
살의를 가지고 노려본다고 해서 습격을 알아차릴 정도면 암살자 클래스는 존재 가치를 잃을 것이다.
상대방의 실력을 도통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이렇게까지 뛰어난 헌터를 내가 모를 리가 없는데.
“꼭 습격하고 싶다면 이게 끝난 다음 상대해 줄 테니까 집중이나 해.”
어조는 퉁명스러웠으나 방금 제 목에 단검을 꽂으려고 했던 자에게 향한다고 하기엔 제법 친절한 내용이었다.
더불어 자신감도 엿보였다. 백사현이 본인에게 칼을 들이대더라도 처리할 수 있다는.
그래서 궁금한 것이다.
저 자신감에 과연 근거가 있을까?
백사현은 시선을 옮겨 아직 결계가 유지되고 있는 섬을 바라보았다.
처음에는 하급 던전이 터졌다고 하기에 사태를 얕본 것은 사실이다. 저런 하급 던전은 터져 봤자 헌터들이 초기에 진압하면 대개 큰 사태로 번지지는 않으니까.
그런데 확실히, 저 정체 모를 헌터의 말대로 기세가 심상치 않았다.
뿌연 결계 안에 다닥다닥 붙어 결계를 두드리는 흉악한 얼굴의 몬스터가 보였다. 마치 모기장에 다닥다닥 붙어 있는 날벌레를 보는 것 같아서 소름이 돋았다.
이런 걸 예상할 수 있다면 확실히 초보자는 아니다.
다만, 그렇다고 해서 아직 실력이 증명된 것은 아니다.
이름도 모르는 헌터의 실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면서도, 백사현은 내심 아직도 회피하고 있었다.
백사현의 역할은 여자가 말한 대로 단순한 미끼였다.
결계가 깨진 순간 스킬을 사용해 고블린들의 주목을 끌고, 최대한 많은 숫자를 이쪽으로 밀어닥치게 한다.
간단한 일이지만 목숨을 걸어야 하는 일이기도 했다.
물론 백사현의 스킬을 사용하면 불가능한 일은 아니었다.
배우 클래스의 스킬인 메소드 연기는 몬스터 상대로도 어그로를 끌기 딱 좋은 스킬이니까. 실제로도 이제까지 광역 도발이라는 명목으로 당당하게 써 왔던 것이기도 했다.
하지만 이 스킬을 쓸 때는 언제나 주변에 실력이 확실한 헌터들이 있었다. 저렇게 정체불명인 여자가 아니라.
속으로 욕을 하는 게 들키기라도 했는지, 전화 너머의 누군가와 상황을 조정하고 있던 여자가 힐끗 백사현을 돌아보았다.
백사현의 얼굴을 본 여자가 풉, 하고 웃었다.
백사현은 울컥했다. 아무리 봐도 비웃음으로밖에 보이지 않았기 때문이다.
“하기 싫어 죽겠다는 얼굴이네.”
“당연한 거 아니야?”
하기 싫은 건 당연했다. 저 여자가 자신의 클래스를 알아차리지만 않았더라면 당장 이 자리를 떠났을 것이다.
“그것 참 미안하군. 하지만 어쩔 수 없어.”
복잡한 백사현의 심경에 돌을 떨어트린 여자는 아무것도 아니라는 듯 그렇게 말했다.
“내가 해야만 하는 일이 있거든.”
그렇게 말하는 것과 동시에 결계가 해제되기 시작했다.
그리고 여자의 검 끝이 백사현을 향했다.
말보다 효율적인 지시였다.
내키지 않았지만 나설 때였다.
백사현은 짜증을 씹어 삼키며 스킬을 사용했다.
- 스킬, ‘메소드 연기’를 사용합니다.
- 몰입할 배역을 지정할 수 있습니다.
- 검사(LV.5)/암살자(LV.7)/연출가(LV.3)/요리사(LV.4)……
한계 없이 펼쳐지는 목록 중에 백사현은 금세 이번에 몰입해야 하는 것을 찾아냈다.
사실 가장 익숙한 것이기도 했다.
- 배역을 ‘먹이(LV.10)’로 지정합니다.
- 제한 시간 동안 모든 몬스터가 당신을 최상의 먹이로 인식합니다.
- 00:20:00
처음 이 목록에서 저딴 것을 발견했을 때는 어이가 없었지만 가장 유용하게 써먹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몬스터를 상대하다 보니 이해도 레벨이 자연스럽게 올라간 덕도 있었고.
결계가 옅어져서 점점 그 모습이 선명하게 드러나는 와중에 모든 고블린들의 관심이 이쪽으로 집중되는 것이 느껴졌다.
확률상 B급 이상의 몬스터에게는 이런 스킬이 먹히지 않을 때가 있지만 고블린은 어차피 D급 몬스터.
제대로 먹힌 모양이다.
“우, 우악! 이 새끼들 뭐야!”
“조금만 더 버텨! 아직 5분 안 됐다고!”
섬 안에서 결계를 유지하고 있는 헌터들이 아우성치는 소리가 들렸다.
먹이를 앞에 둔 고블린들이 백사현이 있는 방향으로 달라붙으며 결계를 두드리는 기세가 더 거세지기 시작한 것이다.
수백 마리에 달하는 몬스터들의 살기에 가득한 시선을 받으며 백사현은 이를 악물었다.
‘먹이’가 되면 주변 기척에 평소보다 훨씬 민감해진다. 천성적 피식자가 되었으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시선을 중간에서 한 번 걸러 내는 등이 있었다.
백사현의 앞에서 그 시선을 아무렇지도 않게 받아 내고 있는 여자가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어그로는 잘 먹혔네.”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이쪽을 주시하고 있는데 이 상황을 긍정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는 게 대단했다.
여자가 귀 한쪽에 끼고 있는 블루투스 이어폰에서 나오는 소리가 백사현의 청력에도 잡혔다.
- 30초 전입니다.
“좋아.”
상대방에게 말하는 게 아니라 스스로에게 되뇌듯 말한 여자가 한 번 숨을 들이켰다.
손에 든 것은 더할 나위 없이 평범해 보이는 롱소드였다. 날이 잘 세워져 있는 검이었으나 겉으로 보기에는 어떤 특이 사항도 보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여자의 등은 약간의 망설임조차 엿보이지 않았다.
긴장감도 보이지 않았다.
이게 잘될까?
백사현은 확신이 들지 않았다. 아니, 잘될 리가 없지.
- 10초 전입니다.
다가오는 죽음의 예감은 ‘먹이’로서 느끼는 것이다. 도망치지 않으려고 다리에 힘을 꽉 주며, 백사현은 앞을 노려보았다.
- 결계 해제됩니다!
긴장이 역력한 목소리와 함께, 아슬아슬하게 버티고 있던 결계가 유리 조각처럼 부서졌다.
수백 마리의 몬스터가 한꺼번에 쏟아지는 장면은 장관이라고 할 법했다.
녹색 몸체를 한 고블린들이 일제히 백사현을 향해 쏟아졌다.
백사현의 시야가 순식간에 어두워졌다. 수많은 작은 몸체들이 하늘을 덮어 빛이 가려졌기 때문이다.
타닥타닥, 괴물의 날개가 부딪치는 소리만이 시끄럽게 들렸다.
그것은 무시무시한 압박감이었다.
일순 하늘조차 뒤덮어 버린 모든 몬스터들은 ‘먹이’를 향해 무너지듯 지상의 한 점을 향해 낙하했다.
정말 이대로 죽는다.
지금이라도 도망쳐야 한다.
백사현이 그렇게 생각한 순간이었다.
“하압!”
짧은 기합 소리와 함께 백사현은 지상에서 발화하는 빛을 보았다.
아니, 빛이 아니다.
그것은 단 한 번의 검격이었다.
절대적인 숫자 앞에서 별다른 효용 없이, 빛이 어둠 속에 파묻히듯 사라졌어야 할 검의 궤적이 하늘을 갈랐다.
“말도 안 돼.”
백사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것은 드라마에서 나왔더라면 뻔하다고 혀를 찰 만한 대사였다.
하지만 그 외의 말이 튀어나오지 않았다.
정말로 하늘까지 닿을 것처럼 길어진 검이 닿는 자리마다 푸른 빛깔의 스파크가 튀었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마(魔) 속성의 몬스터에 절대적인 효과를 발휘합니다!
백사현은 강예나가 보고 있는 그 메시지를 볼 수 없었지만, 대신 길어진 검날에 닿은 몬스터가 순식간에 재로 화해 가는 광경을 보았다.
검이 그려 가는 궤적 앞에 숱한 몬스터가 있었으나, 뻗어 가는 검은 마치 허공을 베는 것처럼 아무런 장애도 없이 나아갔다.
무어라 덧붙일 것 없는 깔끔한 검격이 지나간 자리에는 푸른 하늘만이 남았다.
삽시간에 사위가 조용해졌다.
“이게 뭐, 뭐……?”
- 출현한 몬스터의 80퍼센트 이상이 즉살당하였습니다.
- 고정형 던전 브레이크가 종료되었습니다.
- 최대 업적자 : 방랑하는 구도자
“돌발형 던전 브레이크가 아니라는 게 다행이지.”
여자가 무어라고 중얼거리면서 검을 집어넣었다.
갑작스럽게 끝난 상황에 멍해진 백사현은 무어라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눈만 깜박였다.
메소드 연기 스킬의 지속 시간은 아직도 10분 이상 남아 있었다. 여자가 태연히 전화 통화를 하고 있음에도 그게 더 두렵게 느껴지는 것은 스킬의 탓인가?
“네, 상황 종료되었습니다. 헌터들 부상이 있을 수도 있으니까 그 점은 알아서 구급차 보내 주시고. 아, 저요? 이제 저녁 먹고 들어가려고…… 보고서요?”
여자가 인상을 찡그리며 뒤를 돌아보았다. 백사현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그것을 보고 여자가 피식 웃었다.
“저 말고 여기 보고서 쓸 만한 놈이 하나 있는 것 같은데, 이쪽에 미루면 안 되겠습니까? 저 그런 게 너무 귀찮아서…… 안 된다고요? 아, 너무하시네.”
그 대화가 무척이나 일상적으로 들린다는 것이 더 소름 돋는 점이었다. 방금 전 그만한 일을 해 놓고서 뽐내는 기색조차 없다.
곧 통화를 끝낸 여자가 백사현에게 걸어왔다. 스킬 사용을 중단했음에도 불구하고 등줄기가 서늘했다.
‘방랑하는 구도자’.
그 웃기지도 않는 이름의 주인이 지금 바로 여기에 서 있는 것이다. 모든 것이 불명이었던 랭킹 1위가 설마 이런 녀석이었다니!
백사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시선을 굴려, 지금 이 상황에서 가장 유용할 만한 클래스를 필사적으로 찾았다.
자칫하다가는 이대로 죽을지도……!
“눈 굴러가는 거 다 보인다.”
“……헉.”
“뭘 그렇게 긴장하고 있어? 던브도 종료됐는데. 스킬 써 줘서 고맙다. 꽤 도움이 됐어.”
“어? 아, 예…… 예?”
“그럼 난 간다.”
그렇게 시원스럽게 발걸음을 옮겨 그대로 지나치려던 여자가 문득 걸음을 멈추고 백사현을 돌아보았다.
역시 죽여서 입막음을 하려는 건가.
백사현이 단검을 소환하려던 때, 여자가 웃는 얼굴로 주먹을 들었다.
“그건 그렇고.”
뻐억!
너무 갑작스러운 공격이라 피할 새도 없이 주먹으로 얼굴을 처맞은 백사현은 그대로 바닥에 나가떨어졌다.
멍하니 여자를 올려다보니 여전히 웃고 있었다.
쨍쨍한 햇빛이 비치는 호숫가의 오후, 여자의 얼굴에 닿은 햇빛이 이상하게 반사되고 있었다. 일순간 눈 주위를 가린 무언가가 언뜻 보인 듯했지만 곧 사라졌다.
결국, 백사현이 인식할 수 있었던 것은 양쪽으로 한껏 올라간 입꼬리뿐이었다.
“난 꼰대가 아니야. 정정해라.”
그런 대사만을 남기며 여자는 무대에서 퇴장했다.
쫓을 생각도 들지 않았다. 정확히는 그럴 힘이 전혀 남지 않았다.
“으, 으아아…….”
그대로 바닥에 대자로 뻗어 버린 백사현은 가물가물해진 시야 속에서 허공에 떠오른 시스템 메시지를 바라보았다.
- ‘용사’ 클래스에 대한 이해도가 올라 새로운 배역이 생성됩니다.
- 일정 이해도에 다다를 때까지 해당 배역은 연기할 수 없습니다.
그렇구나, 용사였어.
……저게?!
백사현은 미처 말로 표현하지 못한 생각을 마지막으로, 완전히 기절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