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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64화 (65/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64화

Chapter 9. 운명의 씨앗

- 속보입니다. 오늘 일산의 호수 공원에서 타-01 던전의 포화도가 넘쳐 던전 브레이크 사태가 벌어졌는데요, 다행히 빠른 대처로 사상자는 발생하지 않았습니다만 전문가들은 연속해서 일어나는 돌발 사태에 대해서 우려를 표시하고 있습니다.

좀 더 자세한 상황은 현장 리포터를 연결해 알아보겠습니다…….

화면이 분할됨과 동시에 현장에 나간 기자의 모습이 한쪽에 나타났다. 기자가 심각한 표정으로 카메라를 바라보며 준비한 대사를 읊었다.

- 여기는 일산의 한 호수 공원입니다. 오늘 오후 4시경 공원 중앙에 위치한 인공 섬에서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났으며, 공식 종료 시간은 5시 5분입니다.

현장은 이례적으로 빠르게 수습되었습니다만 정부는 주변에 남은 몬스터가 있을 가능성을 염두에 두고 헌터들을 급파해 주변을 수색하고 있습니다.

밤중임에도 불구하고 수색은 여전히 가열차게 진행되고 있습니다.

방송용 드론 카메라가 하늘을 날면서 공원의 전체 풍경을 보여 주었다. 랜턴을 켜고 경찰들이 사람들의 출입을 통제하는 모습도 함께 비추어졌다.

아나운서가 심각하게 물었다.

- 사상자가 없다는 것은 확실한 건가요?

- 네, 그렇습니다. 정부 소속 헌터 중 두 명이 경미한 부상을 입었지만 이미 치료를 받은 후 귀가했다고 합니다.

- 갑작스럽게 일어난 던전 브레이크였는데 이게 어떻게 가능했던 건가요?

흥분된 기자의 얼굴이 클로즈업되며 정확한 발성으로 어떤 이름이 카메라 앞에서 튀어나왔다.

- 현장 헌터들의 증언에 따르면 놀랍게도 단 한 명의 헌터가 이 상황을 곧바로 정리했다고 하는데요, 최대 업적자가 바로 방랑하는 구도자라고 합니다!

“푸합!”

나는 호텔의 푹신한 침구에 누워 커다란 화면으로 한가롭게 TV를 시청하다가 맥주를 뿜었다.

현장 리포터의 말을 들은 아나운서도 흥분한 기색으로 말을 받았다.

- 방랑하는 구도자라면 현재 시스템상 랭킹 1위인 헌터를 지칭하는 게 맞나요?

- 네, 그렇습니다. 던전 브레이크 종료 시 최대 업적자 이름에 방랑하는 구도자의 이름이 떴다는 증언이 속속들이 나오고 있습니다.

켁, 켁.

나는 사레들린 채로 핸드폰의 시간을 확인했다.

때는 9시.

혹시 내가 한국을 떠난 사이에 9시 메인 뉴스의 무게가 조금 바뀌었나?

아나운서의 정확한 발음으로 방랑하는 구도자라는 이름을 듣자 정신이 날아갈 것 같다.

호텔 바로 옆 편의점에서 과자 한 봉지와 맥주를 사 와서 넉넉했던 마음이 갑자기 쪼그라들기 시작했다. 감자칩을 먹어서 까슬해진 입천장이 마른다.

- 현장에 있었던 헌터의 증언으로는 결계가 해제된 뒤 풀려난 몬스터를 일격에……

정신이 날아갈 것 같은 보도는 계속되고 있었다.

충격을 이기지 못하고 멍하니 입을 벌리고 있던 나는, 나중에야 해당 속보가 끝날 때까지 백사현의 이름이 한 번도 언급되지 않았음을 깨달았다.

이건 예상에서 벗어난 일이었다. 내가 적당히 빠졌으니 본인이 수습했다고 나설 법도 했는데 말이다. 실제로 백사현이 한 일이 아예 없는 것도 아니고.

심지어 내 얼굴은 공개되지 않았으니 아무리 최대 업적자 이름이 명시되었더라도 본인이 나서면 챙길 만한 몫이 분명히 있었을 텐데…… 의외였다.

그나저나 이렇게 9시 뉴스의 첫 보도로 나올 줄이야…….

나는 떨떠름한 심정으로 미지근해진 맥주 캔을 내려놓았다.

이거 아무래도 내 생각보다 더 정체불명의 랭킹 1위에 대한 관심도가 높은 것 같다.

정체도 안 밝히고 뭐 하냐고 욕이나 처먹을 줄 알았는데 보도하는 뉘앙스가 꽤 호의적이다.

그것도 그리 달갑지는 않다만.

차라리 누가 나를 제치고 1위로 올라간다면 나에 대한 관심도 줄어들 테지만 당분간 그럴 일은 없을 것이다.

뭐, 그런 랭킹 따위는 아무래도 좋다.

지금 내가 저런 데 한눈팔 때는 아니라서 말이야.

내 시야에는 몇 시간 전, 던전 브레이크가 종료되었을 때부터 같은 메시지가 떠올라 있었다.

- 퀘스트 수행에 따른 보상을 받습니다.

- 보상 항목 : ‘시스템 관리자’가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를 특별 관리 대상으로 인식합니다.

- 시스템 관리자가 특별 관리 대상의 과부하를 줄이기 위해 시스템 안정화 작업에 돌입합니다.

-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와 서버 : 대한민국의 마찰이 안정화됩니다.

- 시스템 안정화까지 18:56:32

- 시스템 안정화 후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합니다.

갑작스럽게 던전 브레이크까지 터트리면서 나온 ‘퀘스트’라 사실 보상에 꽤 기대를 했더랬다.

그런데 뜻밖에도 여러모로 걸리는 키워드가 많은 메시지가 튀어나왔다.

그리고 그 후로 차분히 앉아서 홀로 몇 시간 동안 찬찬히 머리를 굴려 보니 결론이 나왔다.

‘이제까지 본 것 중에 가장 도움이 되는 힌트다.’

사실 이제까지, 왜 시스템이 갑작스러운 던전 브레이크나 과부하 같은 현상을 계속 일으키는지 의아했었다.

그런데 이 메시지를 보니 확신이 섰다.

이건 모두 내가 타르토스에 다녀왔기 때문에 생긴 일이다.

처음 내가 한국으로 돌아왔을 때 이쪽 시스템의 반응을 보면 명확했다.

이쪽 시스템상에서 나는 던전에 처음 진입한 일반인인데, 내 영혼은 타르토스의 용병이었던 시절을 기억하고 있다.

시스템은 그런 나를 제대로 인식하지 못한 거고.

내가 능력치를 좀 손해 보는 걸로 그 차이가 메워진 줄 알았는데, 그게 아니었던 모양이다.

즉, 이쪽 시스템이 나를 받아들이지 못해서 이제껏 던전 브레이크 등의 불안정함이 생겼던 것이다.

그랬던 것이 이번에 수행한 퀘스트의 보상으로 안정화된다는 것 같다.

그러니 저 메시지만 두고 보자면 이제 내가 가는 장소마다 던전 브레이크나 오류 현상이 터지는 게 아닐까 걱정하지는 않아도 되는 셈이다.

나도 가는 곳마다 던전 브레이크가 터지는 건 그리 달갑지 않은 일이니 보상에 불만은 없다.

그리고 저 메시지에서 중요한 건 어차피 보상 항목 따위가 아니다.

여기서 중요한 건…… 이거다.

한국의 시스템 또한 나로 인한 혼란을 달가워하지 않는다는 것. 동시에 만능은 아니라는 것.

‘나라면 죽였어.’

사실 원하지 않는 혼란을 일으키는 요소가 있다면, 그 요소를 배제하는 방법이 가장 쉽다.

하지만 시스템은 나를 죽이는 대신 내게 퀘스트를 주고 수행의 보상으로 시스템을 안정화시켰다.

이건…… 보상이라는 형태가 아니면 시스템은 나라는 불안정한 요소를 처리할 수 없다는 의미로 해석할 수 있지 않나.

즉, 플레이어가 어떤 행동을 해야만 시스템이 보상이라는 형태로 무언가를 할 수 있다는 게 아닐까?

이제까지 시스템이 내 별것 아닌 말에 반응하여 퀘스트를 주고 그 보상을 제시한 걸 보면, 이 가설에는 상당히 설득력이 생긴다.

“……젠장.”

그렇다면 결국 시스템의 의도는 ‘나’를 이용해 이 세계의 혼란을 잠재우겠다는 건가.

빈 맥주 캔을 대충 쓰레기통에 던져 넣은 다음 침대에 대자로 뻗어 누워 버렸다.

이딴 걸 생각해 봤자 대체 무슨 소용이 있냐.

무력감이 발끝까지 차오르는 것 같았다.

눈을 감으면 자꾸만 어른거리는 모습들이…… 젠장.

그리 긍정적이지 못한 사고였기에 얼른 떠오르는 심상을 지워 버렸다.

아무래도 저번 던전 공략에 걸렸던 보상에 너무 큰 기대를 했던 게 문제였나 보다.

그도 그럴게, 굉장한 정보를 줄 것처럼 굴어 놓고 정작 돌아온 것은 별 도움이 안 되는 기억뿐이었으니.

어떻게든 빨리 타르토스로 돌아가고 싶은데 눈에 보이게 진척되는 게 없으니 답답했다.

지금 단계에서 확실한 거라고는 이쪽 시스템이 영 이상하다는 것뿐이다.

이 정도 가지고는 내가 혼자 아무리 머리를 굴려 보아도 타르토스에 돌아갈 방법은 찾을 수 없다.

젠장, 이럴 줄 알았으면 루카스가 시스템에 대해서 공부할 때 옆에서 같이 책이라도 좀 읽어 둘 걸 그랬어.

아니면 시스템을 신봉하는 마족 놈들을 고문해서라도 뭘 알아내든가…….

그렇게 새벽까지 뒤척이다가 어느새 잠들었던 모양이다.

핸드폰 진동을 느끼고 나는 눈을 떴다.

비몽사몽한 상태로 핸드폰을 보니 문자가 들어와 있었다.

시간을 보니 오전 9시였다.

발신인은 최민혁.

내용은 짧았다.

요청하신 내용 승인되어 문자 드립니다.

눈을 비비며 확인해 보니 주소가 적혀 있었다.

이게 뭐야.

문자에 URL이 첨부되어 있어 클릭해 보자, 간단한 지도와 건물의 내부 구조도가 떴다.

나는 한동안 눈을 껌벅이며 그 구조도를 멍하니 바라보다, 깨달았다.

아, 내 새로운 주거지구나.

일 처리가 꽤 빨랐다. 며칠 더 기다려야 할 거라고 생각했는데.

혹은 어제의 내 행동이 영향을 미친 걸지도 모른다. 최민혁은 내가 나서서 던전 브레이크를 해결한 걸 꽤 인상 깊게 본 눈치였으니까.

물론 그 던전 브레이크를 일으킨 원인이 나라는 걸 알게 된 입장에서야 영 꺼림칙하다만…… 결과적으로 다 해결하긴 했잖아?

사실 엄밀히 따지자면 이건 내 탓도 아니다. 이게 다 X같은 시스템 탓이지.

그러게 왜 사람을 갑자기 이세계로 날려 보냈다가 또 돌아오게 만드냔 말이다. 그냥 내버려 뒀으면 마찰이고 나발이고 생기지 않았을 거 아니냐.

시스템 욕을 사발로 퍼부으면서 씻고 나오니 이번에는 핸드폰에 또 다른 착신이 들어와 있었다.

이 핸드폰 번호, 아는 사람이 그래 봤자 4명밖에 없는데 의외로 바쁘군.

심지어 이번에는 부재중 전화였다.

발신인 이름은 이우연이었다.

아, 맞다. 연락하기로 해 놓고 까먹고 있었네.

나는 젖은 머리를 털면서 귀걸이를 소환해 착용했다.

전화보다 이쪽이 낫지. 슬슬 익숙해지기 시작한 메시지가 떠올랐다.

― 강예나, 너무한 거 아니야? 어떻게 이렇게 연락이 없어?!

표시되는 것은 글자뿐인 메시지였지만 어쩐지 이우연의 목소리가 환청처럼 들리는 것 같았다.

하마터면 귀를 막을 뻔했다.

음, 그래도 이건 내가 잘못했지. 나 같아도 그런 상황에서 정보만 불고 하루 넘게 연락이 끊기면 빡칠 거다.

순순히 사과해 두자.

“아, 미안. 어제 너무 피곤해서 연락한다는 걸 깜박했어.”

― 어떻게 그걸 깜박할 수가 있어? 나는 어제 하루 종일 밥도 안 먹고 기다렸는데!

“밥을 왜 안 먹어? 진짜로? 왜 그랬어?”

― 물론 농담이야. 밥은 먹었지. 다 먹고살자고 하는 일인데.

“너는 무슨 농담을 그렇게 진지하게 하냐……?”

이우연이 진지하게 대꾸하는데 힘이 다 빠졌다. 사람 놀라게 하는 데 재주가 있다.

그나저나 머리가 너무 길어서 수건으로 터는 것만으로는 이제 잘 마르지 않았다. 전화가 아니라는 점을 이용해 드라이기로 머리를 말리면서 대화를 지속했다.

“어쨌든 어제 뉴스에 나왔으니까 너도 무슨 상황인지는 봤을 거 아니야.”

― 오호라, 그래서 연락을 안 하셨다?

“그건 아니고…… 상황은 알 거 아니냐, 하는 말이지.”

― 뉴스에 나온 거랑 직접 입으로 듣는 거랑은 완전 다르잖아. 나도 방랑하는 구도자님의 무용담을 직접 듣……

- ‘푸른 인연의 귀걸이’ 사용이 중지됩니다.

아, 나도 모르게 끊어 버렸다.

물론 통신은 금방 다시 걸려왔다.

나는 빡치는 심정을 눌러 담으며, 허공을 향해 한 글자 한 글자 씹어뱉듯이 말했다.

“자꾸 놀리면 너 진짜 나한테 죽을 줄 알아.”

― 아니, 왜 본인이 지어 놓고 부끄러워하는 거야? 그럴 정도라면 바꾸지 그래?

“부끄러워하는 게 아니야! 그걸 남의 입으로 듣고 싶지 않은 것뿐이라고!”

그야 ‘방랑하는 구도자’란 나름대로 내 철학과 신념이 담겨 있는 플레이어명이다.

그리고 나는 이걸 부끄러워하는 게 결코, 결단코 아니었다. 그저 현대 한국인 입에서 직접 듣는 게 싫을 뿐이다! 나 혼자 내 마음에 아로새기며 다짐을 새로이 하고 싶을 뿐이라고.

― 뭐, 그건 그렇다 치고. 그래서? 어제 백사현 이야기는 뭐야?

“아, 백사현 헌터 말이지. 어제 우연히 마주쳤는데…….”

던전 브레이크가 일어난 상황에서 내가 도움을 좀 구했다, 그렇게 말하려는데 이우연이 대뜸 이상한 것을 물었다.

― 아, 됐고. 나랑 백사현 중에 누가 더 잘생겼어?

“이런 미친 새…….”

― 아하하. 욕하지 말고. 진짜 궁금해서 묻는 건데.

그딴 게 대체 왜 궁금하냐.

어이가 없어서 말을 하지 않고 있자니 역시 실없는 메시지가 떠올랐다.

― 사실 당신 말대로 이미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대강 소식이 들려와서 말이야. 그래서 궁금한 거라곤 이 정도밖에 없는데? 아, 하나 더 있긴 하다.

아이템을 사용한 메시지 주고받기라 표정을 볼 수는 없었지만, 아마 이우연이 웃고 있으리라는 건 능히 짐작이 갔다.

― 어떻게 그 많은 헌터들이 하나같이 당신 얼굴을 못 봤는지는 아주 많~ 이 궁금하네.

이쪽이 본론이군.

나는 혀를 찼다.

이 자식, 뉴스를 본 정도가 아니라 어제 던전 브레이크 때 참여한 다른 헌터들의 증언까지 채집한 건가.

어제 오후쯤에 터진 일인데 정보력이 놀라웠다. 이우연이 무슨 정보기관에서 일하는 것도 아니고, 영원 길드도 사실상 사기업에 불과할 텐데.

뭐, 사실상 대한민국 랭킹 1위 헌터나 다름없고, 이쪽은 이우연의 홈그라운드니 불가능한 일은 아닐지도.

“그냥 처음부터 그렇게 물어봐라. 돌리지 말고. 그거 재수 없어.”

― 아하하. 그런데 그렇게 말하는 거 보니 대답해 줄 생각은 있나 봐?

나는 선선히 대답했다.

“너는 언제 시간 되는데?”

대답해 줄 생각이 있는 정도가 아니라 ‘은의 장막’은 이우연한테 한번 시험해 보려고 했었다. 이우연도 눈치를 챌지 궁금했으니까.

그런데 뭔가 이상하다.

금방 희희낙락하는 대답이 돌아올 거라고 생각했는데 아이템 너머의 상대방은 한동안 침묵을 지켰다.

그동안 머리를 다 말린 나는 고무줄을 찾아 머리카락을 한데 모아 높게 올려 묶었다. 이제 옷만 챙겨 입으면 언제라도 나갈 수 있다.

“뭐야? 왜 말이 없어?”

― 아…… 좀 감동을 받았다고나 할까.

“무슨 헛소리야?”

―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너튜브에서 길고양이를 입양한 감동 실화 영상을 봤을 때의 기분이야.

괜히 물어봤다.

들을 필요 없는 잡담이었다.

“그래서 시간이 있다는 거야, 없다는 거야? 바빠?”

― 바쁘긴 한데 당신한테 내줄 시간이 없지는 않지. 그쪽에 맞출게. 언제 괜찮아?

생색내기는.

나는 시계를 흘끗 보고 대답했다.

“최대한 빨리? 지금 당장도 괜찮고.”

― ……응?

“아, 참. 혹시 차 있으면 좀 끌고 와라.”

― 어?

어차피 새로운 주거지로 가야 하는데 이왕 연락하는 김에 이우연을 부려 먹으면 일석이조다.

그렇게 가볍게 생각하고 말한 것이었는데.

그러나 그렇게 말한 지 한 시간 후.

이우연이 호텔 로비 앞에 빨간색 오픈카를 몰고 등장했을 때 나는 생각했다.

아, 그냥 혼자 갈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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