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65화
오픈카의 운전대를 잡은 채로, 이우연은 쓰고 있던 선글라스를 슬쩍 들어 올리며 나를 보고 윙크를 했다.
평일 오전이라 호텔 정문 앞에 사람들이 별로 없어서 다행이다. 그래도 도어맨이 이우연을 알아보았는지 표정에 금이 가는 것이 보였지만.
그 시선을 모를 리 없을 텐데 이우연은 굳이 한마디를 덧붙였다.
“자기야, 오래 기다렸어?”
쳇. 나는 혀를 차며 얼굴에 쓰고 있던 가면을 해제했다. 솔직히 통하지 않을까 약간 기대했는데.
“그 차째로 날아가고 싶지 않으면 입 다물어라.”
실실 웃는 표정으로 입에 지퍼를 닫는 시늉을 하는 것까지 세트였다.
팔에 닭살이 돋았다.
혹시 다음에 함께 던전 공략할 일이 있으면, 보스 몹이 저놈을 한 대 치는 걸 꼭 관망하고 말 테다.
조수석에 앉아 벨트를 매자 이우연이 즐거운 기색으로 물었다.
“그게 다른 사람들에게 얼굴을 알리지 않은 비결이야?”
“그래, 이번 던전 공략 보상이었어.”
“아하, 그랬군. 어쩐지, 운전하면서 오는데 처음에는 누구인지 못 알아보겠더라고.”
“그런데 결국 알아봤잖아?”
“기시감이 들어서. 처음 던전에 입장했을 때 당신의 검을 보기 전에도 이런 느낌이었거든. 이상하게 얼굴은 인지가 안 되는데 누군지는 알 것 같은.”
즉, 이 아이템을 사용하면 이우연도 내 얼굴을 인지하지 못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결국 던전 내의 기시감 때문에 눈치로 때려 맞췄다는 건가.
그럼 결국 내가 이 아이템을 쓰고 작정하고 속이면 이우연도 나를 인지하지 못할 가능성이 있다.
흠, 나쁘지 않은걸.
내가 아이템에 대해 생각하고 있는 동안 이우연은 루프를 닫으며 차를 출발시켰다. 배기음이 요란해서 인상을 찌푸리자 이우연은 약간 시무룩한 기색이었다.
“그렇게 마음에 안 들어? 예쁘지 않아?”
“누가 뭐래? 본인 마음에 들면 끝이지.”
물론 내 돈이었다면 절대 안 살 거지만.
그나저나 이우연은 눈에 띄는 걸 별로 좋아하지 않는 것 같더니, 자동차 취향은 또 다른가 보다.
“그래서 당신이 보내 준 주소로 가면 되는 건가? 와, 집들이는 언제 해?”
“집들이고 뭐고…… 일단 가서 청소하고 필요한 것만 사도 하루가 다 갈 것 같은데. 그리고 모레부터는 던전 공략하기로 했어.”
이우연이 나지막하게 휘파람을 불었다.
“행동이 빠르네. 퇴원한 지 이틀밖에 안 됐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지금 컨디션만 좋으면 됐지.”
“하긴, 저번보다 훨씬 건강해 보이긴 해. 오늘따라 더 예쁜 것 같기도…… 아, 주먹 풀어. 알았어, 잘못했어. 그래서 어느 던전 맡기로 했어?”
“일단 시험 삼아서…… 서울역에 있는 던전. A급이라던데?”
최민혁이 메일로 보내온 공략 가능한 던전의 목록을 처음 봤을 때는 의외였다. 대부분이 A급에서 B급을 위주로 한 던전이었기 때문이다.
랭킹 1위인 만큼 내게 곧바로 S급 공략 던전을 맡기는 게 아닐까, 했는데.
하지만 사정을 들어 보니 서울의 S급 던전의 경우,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큰 길드 몇 군데와 정부가 협력하여 공략하고 있으므로 당장 내가 참여할 필요는 없다고 한다.
그런 경위로 이번에 내가 선택한 것은 헌터들의 관심도가 상대적으로 떨어져서 포화도 관리가 아슬아슬한 A급 던전 중 하나였다.
“……잠깐만. 설마 혼자서 공략한다는 건 아니겠지?”
왜 아니겠냐. 아마 고정 파티 없이 솔플이라는 것도 내가 공략할 던전의 난이도 하향에 영향을 끼쳤을 것이다.
나는 심드렁하게 대꾸했다.
“공략 내용 들어 보니 불가능하진 않겠던데.”
“가능 불가능의 문제를 떠나서 너무 비효율적이잖아. A급 헌터들이 4명 파티를 짜서 가면 공략 가능한 곳이야. 굳이 당신 혼자 보낼 필요가 있나?”
이우연이 생각에 잠긴 채 핸들에 놓인 손가락을 규칙적으로 두드렸다.
“이거 마음에 안 드는데. 왜 그런 곳에 인력을 낭비하는 거지? 차라리 내 공략 스케줄에 참여할래? 내 공략대에서 인원을 조정하면…….”
이우연의 반응이 생각보다 격렬했다.
그냥 왜 그런 귀찮은 짓을 하는지만 묻고 넘어갈 줄 알았는데, 내가 이 녀석의 효율 따지는 성격을 간과했다.
이러다가 최민혁에게 따지러 갈 기세이기에 나는 결국 한마디 덧붙였다.
“내가 선택한 거야. 컨디션이 별로라서 조정부터 하려고.”
반쯤은 사실이었다.
현재의 능력치에 적응하려면 적절한 난도의 던전을 다수 클리어하는 게 가장 빠른 방법이다. S급 던전 공략이 불가능한 건 아니지만 무리하게 될 것이 뻔했다.
게다가 안정화가 끝나면 새로운 퀘스트가 발생한다고 하니까, 오랜 시간을 투자해야 하는 고위 던전 공략은 사양하고 싶다.
“그게 당신 의사라면 어쩔 수 없지만…….”
이우연은 그래도 영 아쉬운 기색이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A급 던전 따위에 최종 병기를 쓰는 건 너무 아까워.”
뭐, 이우연 관점에서 보자면 그럴 수도 있겠지.
S급 던전쯤 되면, 공략 경험이 풍부하고 능력치가 비슷한 헌터 한 명 한 명이 아주 소중하다.
다만 이우연이 지금 내게 내리는 평가는, 원래의 내 능력보다 상당히 고평가되어 있다는 점도 감안해야 한다.
이우연이 저러는 건 내가 그의 눈앞에서 ‘용사를 기리는 망토’ 아이템을 사용한 탓이 컸다. 실제로는 10분밖에 사용할 수 없지만 그걸 모르고 있으니까.
그러니 내가 최종 병기 같을 수밖에.
“그런데 너, 당분간 바쁘다고 하지 않았어? 그런 것치고 며칠 만에 바로 봤네.”
“바쁜 건 사실이고, 오늘 본 건 당신이 나를 불러서 온 거지. 안 불렀으면 안 왔을 거야.”
“즉 바쁘지 않았다면 부르지 않았어도 왔다?”
“바로 그렇지. 뉴스에 안 나왔으니 모르겠지만 나도 어지간히 바빴거든. 어제 여의도 사건도 있었고.”
어라? 익숙한 이야기였다.
그러고 보니 어제 일산 호수 공원에서 일어났던 던전 브레이크에 차출할 인원이 없었던 게, 여의도에 사건이 터져서 그렇다고 했는데.
“여의도에 무슨 일이 있었는데?”
“아, 길드끼리 좀 충돌이 있었어. 던전 공략 순서를 두고 싸우는 건 워낙 흔한 일이니까.”
이우연이 자세히 말해 주지는 않았지만 대충 무슨 상황인지는 알겠다. 역시 한국도 타르토스와 별다를 게 없이 굴러가는 양상이군.
던전 보상을 두고 다투는 건 흔한 일이다.
그러고 보니 이우연이 저번 던전에서 무슨 보상을 받았는지도 궁금한데.
나는 운전하는 이우연의 옆얼굴을 흘깃 보았다.
내 보상을 보여 주었으니 너도 알려 달라고 하기에는 사실 약간의 문제가 있었다.
지금 저 녀석이 나에게 호의적으로 굴어서 그렇지, 일반적으로 볼 때 랭킹 1위와 2위의 사이가 좋기란 쉽지 않다.
금방 결론이 나왔다.
‘물어보지 말자.’
괜히 호기심으로 자극할 필요는 없다. 물론 싸운다고 해도 질 생각은 없지만, 귀찮은 일은 피하는 게 낫지.
그 이후로 별것 아닌 잡담을 나누는 동안 어느새 오픈카는 목적지에 도착했다.
출근 시간을 넘겨서인지, 아니면 다른 차들이 이우연의 차를 피해서 그런 건지는 모르겠지만 예상 시간보다 훨씬 빠르게 도착했다.
도착한 곳은 공덕역 근처의 한 아파트였다.
최민혁이 미리 알려 준 비밀번호로 아파트를 열고 들어가니…… 그럭저럭 청결한 공간이 나를 맞이했다.
방은 두 개, 부엌 하나, 거실 하나, 화장실도 두 개에 다용도실. 추가로 제법 넓은 발코니까지.
생각보다 넓은 평수였다.
내가 집을 둘러보는데 뒤따라 들어온 이우연이 집을 훑더니 투덜거렸다.
“입주 청소부터 신청해야겠어. 당일 와 주는 곳도 있으니까. 그나저나 정말 아무것도 없잖아. 가구 사는 것만도 한세월이겠다.”
나와는 감상이 매우 다른 것 같다.
솔직히 나는 아주 만족스러운데. 관리비 빼고 나가는 비용이 없다는 점에서.
“일단 침낭이라도 하나 두고, 청소는 차근차근 하지 뭐. 빗자루라도 사 와야…… 왜 그래?”
이우연은 어느 예술 작품에 나올 것 같은 표정을 지은 채 경악하고 있었다. 저렇게 혼이 빠질 것 같은 표정은 처음 본다.
“가, 가, 강예나! 혹시 원시에서 살다 왔어? 그게 대체 무슨 소리야!”
그 기백에 눌린 나는 결국 이우연의 손에 끌려가 대형 마트에서 청소 도구 일체를 구입했으며, 세탁기와 건조기를 산 후에는 가구점에까지 끌려갔다.
그렇게 이우연이 주장하는, 집에 필요한 온갖 것을 쇼핑하는 사이 입주 청소까지 완료되었다.
그즈음 나는 완전히 지쳐 있었다.
“그, 그만 좀 하자. 이 정도면 된 거 아냐? 나머지는 차차 사면 되잖아…….”
던전 공략을 할 때보다 더 피로해졌다. 하지만 이우연은 나와 반대로 점점 팔팔해졌다. 심지어 막판에는 흐물흐물해진 나를 끌고 다닐 정도였다.
결국 나는 내 집에 들어갈 가구를 고르는 일을 이우연에게 모두 떠넘겼는데, 도리어 좋아하더라.
“이거 신형이잖아. 에너지 효율 1등급으로 나온 버전. 아, 재고가 있다고요? 잘됐네. 그럼 에어컨은 이걸로 해.”
“그래, 그러지 뭐…… 아니, 잠깐만. 지금 겨울인데 벌써 에어컨을 사라고?”
“무슨 소리야? 이런 건 마음먹었을 때 한꺼번에 처리하는 게 최고야. 당신 성격 보면 뻔하지. 나중으로 미뤘다간 여름 중반에야 에어컨 사야지, 했다가 물량이 없어서 가을에나 받을걸.”
뭐냐, 그 구체적인 예시는.
하지만 정곡을 찔린 것은 부정할 수 없었기에 나는 작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가을에 받으면 뭐 어때…….”
“그랬다간 삶의 질이 하락한다니까. 한국의 여름을 얕보지 말라고. 그리고 말이야.”
이우연이 주먹을 꽉 쥐고 들어 올리며 말했다.
“우리가 이렇게 던전 공략을 열심히 하는 이유가 뭐야? 다 잘 먹고 잘살기 위해서잖아! 이런 건 양보하면 안 돼!”
아니, 나는 그런 생각 안 했거든. 나한테는 다른 목표가 있거든…… 머리가 어질어질해진 내게 이우연은 포기하지 않고 카탈로그를 들이밀었다.
“이게 끝이 아니라고. 정신 차려. 이제 소파랑 식탁 골라야지. 아, 그리고 옷장은…… 일단 행거로 쓰고. 또 침대랑 매트리스는 당장 써야 하니까 재고 있는 걸로 하고, 나중에 좋은 걸로 바꾸자.”
총체적으로 평가해 보자면, 이우연이 쇼핑을 좋아한다는 것을 몰랐던 것이 나의 패인이었다.
이럴 줄 알았다면 이선 헌터에게 데려다 달라고 부탁해 볼걸. 상대하는 게 좀 더 편하다고 이우연에게 말을 건 게 잘못이었다.
참고로 비용은 내가 이전에 이우연에게 맡겼던 ‘망령의 지팡이’와 ‘망령의 왕관’을 정산받은 것으로 해결했다.
이우연이 명세서를 보여 주며 설명하기로는, 아이템의 가격이 합쳐서 약 24억 원에 달했다.
헌터 스토어에서 책정된 통상적인 판매 금액보다 높은 거라며 얼마나 생색을 내던지. 나를 대신해 자신의 이름으로 길드 사이에서 이루어지는 경매에 출품했다고 한다.
하긴 고위 템일수록 원하는 사람에게 팔아야 좋은 값을 받는 법이지. 이건 타르토스와 별다르지 않았다.
그런데 24억…… 그게 구체적으로 어떤 숫자인지 감이 잘 오질 않았다.
그야 큰돈이라는 것은 분명하지만 이번엔 내가 파는 입장이었을 뿐, 반대로 내가 고위 아이템이 필요해질 경우도 있을지 모르니 그렇게 생각하면 아주 많은 돈은 아니었다.
무엇보다 포션도 대량으로 구입해야 하고.
그래도 한국에 있을 동안 기본적인 의식주를 걱정할 단계를 지난 것은 확실했다.
이건 순수하게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돈이 없어서 며칠이고 굶는 경험을 두 번 할 필요까지는 없으니까 말이야.
몇 시간이 지나 가구와 집기들이 집으로 속속들이 도착했다.
가구를 배치한 후 무선 청소기로 거실을 청소하는 이우연을 구경하다 보니 이미 날이 저문 지 한참이었다.
저녁 메뉴는 이우연이 강력하게 주장한 짜장면과 탕수육이었다.
이것저것 신세를 졌기 때문에 내가 샀다.
식탁에 앉아서 신나게 젓가락을 뜯은 이우연은 의기양양한 기색이었다.
“오늘 잠들 때 나에 대한 감사를 곱씹게 될걸?”
“그래그래, 고맙다니까?”
나는 대강 대답했다.
내가 그나마 이렇게 긍정적으로 대답이라도 할 수 있는 이유 대부분은 지금 입에 들어가고 있는 짜장면이 맛있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이걸 잊어버리고 살았지? 지금이라도 많이 먹어 둬야겠다.
그 후 잠시 탕수육의 소스를 부어 먹느냐 찍어 먹느냐 하는 문제로 말다툼이 있었지만, 내가 검을 뽑을 정도의 체력이 남아 있지 않았기 때문에 금방 소강되었다.
“그럼 나 갈게~ 자기 전에 창문 꼭 닫고, 비밀번호도 바꿔야 된다. 알았지?”
오늘 너무 지쳐 버린 탓에 이우연이 현관을 나설 때, 나는 소파에 뻗은 채 손만 흔들었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아, 힘들다.
나는 멍하니 소파에 누워서 눈을 껌벅였다.
오늘 하루는 이상하게도 빠르게 지나갔다.
아니, 이상할 것도 없지. 집에 들어올 가구와 집기를 있는 대로 다 샀는데. 오늘 하루만 얼마를 쓴 거지? 대략 24억 자산가가 23억 자산가로 변한 것 같긴 한데.
“하하하…….”
원래의 계획과는 완전히 다른 하루가 되어 버렸다.
이우연을 부른 건 시스템이 새로운 퀘스트를 내줄 때까지 시간을 효율적으로 활용하기 위해서였는데 웬걸, 외려 시간을 낭비해 버리지 않았는가.
그런데 이상하게도 나쁘게 생각되지 않았다.
생존과 던전 공략 외의 문제로 누군가와 함께 시간을 보낸 게 얼마 만이지?
적어도 금방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오래된 일이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래서인지 이우연이 나를 끌고 다니는 것을 단호하게 거절하기는커녕 끌려다녔던 것이다.
음, 그래.
나는 아마도, 이런 시간이…… 즐거웠던 것 같다.
“뭘 원하지?”
루카스의 말이 문득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옵타티오를 처치하고 나서 이게 모든 일의 끝이라는 것을 확신하고 내게 그렇게 물어봤었지.
나는 어떻게 대답했더라.
뭐라고 했는지는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마 이런…… 아무것도 아닌 시간을 너희들과 보내고 싶다고 대답했을 것이다.
쇼핑을 싫어하는 알리시아를 일리아스가 억지로 끌고 다니고, 아리아드네는 나한테 찰싹 달라붙어서 이것저것 사라고 조언하고, 보는 눈이 까다로운 루카스는 옆에서 번번이 퇴짜를 놓다가 나와 몇 번 싸우겠지.
생각만 해도 짜증 난다.
그게 그리워서 죽을 것 같은 나도 짜증 나고.
나는 이번에야말로 소파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래, 여유로운 시간은 이 정도면 충분했다.
이렇게 흘려보내는 시간이 아까웠다.
- 시스템 안정화가 완료되었습니다.
-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의 소속이 완전히 변경되었습니다. 기타 존재의 간섭이 차단되었습니다.
- 새로운 퀘스트를 확인할 수 있습니다. 퀘스트를 확인하시겠습니까?
- Y/N
시스템은 선택지를 부여했지만 내게 N을 누른다는 선택지는 존재하지 않는다.
그딴 건 원한 적도 없다.
나는 망설이지 않고 선택지를 눌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