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67화
코에 걸리는 악취가 폐를 잠식하는 듯했다. 손과 발에 휘감기는 기운이 불쾌한 족쇄가 되어 땅으로 나를 짓누르는 듯했다.
- 앙겔루스의 가호가 당신의 신체를 보호하고 있습니다.
- 앙겔루스의 가호가 당신의 정신을 보호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완전히 짓눌리지는 않았다. 다행히 숨이라도 쉴 수 있는 것은 앙겔루스의 가호 덕분이다.
하지만 대천사의 가호도 그 이상의 효과를 발휘하지는 못한다.
- 경고! 마계가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의 존재를 거부하고 있습니다.
- 용사 클래스가 마계에 진입할 경우 클래스 특성으로 능력치가 하락합니다.
정말로, 마계였다.
“와…….”
약간의 희열이 찾아왔으나 곧 사라졌다.
그래도 어제 하루 종일 전국의 던전 데이터를 이 잡듯이 뒤진 보람이 있었다.
한국에도 타르토스와 마찬가지로 마계로 이어지는 던전이 정말로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솔직히 반신반의했었다.
마계란 악마인 마족이 거주하는 곳.
사실 한국인인 내게는 딱히 개념적으로 와 닿는 곳은 아닌데, 어쨌거나 타르토스에 있을 때 우연히 이곳에 떨어진 경험이 있어 조금 익숙해졌다.
후우, 나는 깊게 숨을 내쉬었다. 지독한 공기가 몸 안을 채우니 불쾌한 기분만이 남았다.
“이제 이것만 확인하면 되겠네.”
스릉.
검을 뽑아 드는 소리가 사방을 무겁게 잠식했다.
흰빛을 뿜는 검신은 사방을 둘러싼 마기에 저항하듯 더욱 투명한 빛을 발하고 있었다.
“이곳이 내가 그때 왔었던 마계와 같은 곳인지.”
당시 마계에 떨어졌을 때 악마가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수많은 차원계를 통틀어 ‘악마’가 존재하는 마계는 단 한 곳뿐이라고.
다만 지나가는 말이었던 데다, 악마의 말에 신빙성을 가지기도 어려우니, 결국은 승률이 낮은 도박이기는 했다.
물론, 이곳이 내가 방문했던 마계가 아니더라도 상관은 없다.
이 세계에 지성을 가지고, 시스템에 대해 잘 알고 있는 마족만 있다면 된다.
나는 그 마족에게서 정보만 빼내면 되니까.
- 마계의 모든 존재가 당신의 죽음을 바랍니다.
- 마계에 체류하는 동안 플레이어, 방랑하는 구도자의 행동에 제약이 걸립니다.
이 세계에 존재하는 모든 생명체들이 나를 거부하고 있었다.
숨을 쉬는 것조차 허용되지 않을 정도의 악의와 증오.
타락하기 위해서는 옳은 것이 필요하다.
그러므로 옳은 것이 존재하지 않는 세계에서는 타락이 존재하지 않고, 선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무엇이 악인지 구분할 수 없다.
악의만이 존재하는 이 세계는 용사의 존재를 부정한다.
그런데, 그래서 뭐 어쩌라고?
“나도 그래, 이 미친 새끼들아.”
나도 이 세계의 모든 것들이 다 죽어 버렸으면 좋겠거든.
우리 통하는 게 있어서 다행이다. 그렇지?
- 에이펙스의 광검이 당신의 투지를 기꺼워합니다.
내 생각에 동의하듯 검집 안에서 청명한 검음이 울려 퍼졌다. 그 덕분인지 약간 숨쉬기가 편해졌다.
하지만 사실, 마계에서 내가 져야 하는 가장 커다란 핸디캡은 바로 내 파트너다.
허리에 찬 광검에 마계의 기운이 자석에 붙는 철처럼 순식간에 들러붙는 것이 보였다. 마기를 감지한 검이 부르르 몸을 떠는 것이 느껴진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마기에 잠식당한 세계에서 힘을 발휘하지 못합니다.
- 에이펙스 광검의 특성, ‘파훼’가 발휘되지 않습니다.
나도 익히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내가 가장 약해지는 장소가 있다면 그건 마계일 것이다.
일반적인 세상에서 용사는 타락한 존재를 벨 수 있지만, 마계는 그런 것이 통용되는 세계가 아니다.
결국 나는 이곳에서 가장 약자였다.
죽어 버린 갈색의 토지와 붉은 하늘 위로 내 기운을 감지한 까마귀들이 울기 시작했다.
이제 곧 살아 있는 자를 뜯어먹으려 몬스터들이 몰려올 것이다.
- 던전 클리어 조건 : B급 몬스터 30마리 처치
몬스터의 등장을 알리는 시스템 메시지가 떠올랐다.
나는 흘끗 보고 클리어 조건 메시지를 치워 버렸다.
띄워 준 건 고맙지만 내가 채워야 할 조건은 클리어 조건이 아니었다.
쿵쿵쿵!
까마귀 소리가 더욱더 시끄러워진다 싶더니 광야 저편에서 땅을 울리는 소리가 들려오고 있었다.
지평선 너머로 보이던 까만 점들은 가까워질수록 지축을 울리며 위협적인 기운을 더해 가고 있었다.
이제껏 이 던전에 입장한 헌터들은 수색에 상당한 힘을 들여야 몬스터를 찾을 수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나는 전혀 그럴 필요가 없다.
마계에 사는 존재들은 내가 마계에 발을 들인 순간 내 기운을 탐지하고 몰려올 테니.
이 필드가 아무리 넓은 광야라고 한들 상관없다.
그들에게 나라는 존재는 최악이자 최고의 사냥감이니까.
- A급 몬스터, 만티코어가 출현하였습니다.
얼굴은 인간, 사자의 몸, 전갈의 꼬리를 한 몬스터들이 떼를 지어 이쪽으로 달려오고 있었다.
가장 먼저 달려오는 몬스터를 인식한 나는 씩 웃었다.
“그래, 와 봐.”
내게 저것들은 미끼에 불과했다.
지금 내게 필요한 것은 지성을 가지고 마계에 존재하는 것.
시스템에 대해 물어볼 ‘사람’은 없지만, 사람이 아닌 것.
즉, 이 마계에 군림할 마왕.
“네 영역의 몬스터를 다 죽이면 싫어도 튀어나오겠지.”
마계가 내게 먹이는 페널티 때문에 사지가 무거운 감이 있었지만 그딴 건 아무래도 상관없다.
그래도 나는 여기에 와야만 했다. 이곳이 마계일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사실, 타르토스로 돌아갈 수만 있다면 내겐 마왕의 목을 따는 것조차 아무것도 아니다.
어차피 용사가 하는 일이 이런 것 아니겠어?
* * *
내게 검술을 가르친 것은 알리시아다.
그전까지 나는 시스템이 알려 주는 검술 스킬 튜토리얼에 따른, 아주 기본적인 검술밖에 알지 못했다. 거의 힘에 맡긴 무식한 수준이라고 할 수 있겠다.
반면에 알리시아는 타르토스 대륙에 존재하는 검사 중 가장 정점에 존재하고 있었다.
어릴 때부터 검을 잡았다고 했다.
딱히 알리시아가 고귀해서 검을 배울 기회가 주어진 것이 아니었다.
오히려 반대였다.
일리아스와 알리시아는 던전이 나타난 초기의 난리 통에 부모를 잃고 거리를 전전하는 고아가 되었다. 그래서 먹고살기 위해 호객업부터 소매치기까지 모두 하는 집단에 들어갔다.
그런데 불운에 불운이 덮친 격으로, 어린아이들이 모인 그 집단은 자신들이 대륙의 멸망에 맞서야만 한다는, 가당찮은 신념을 가진 우두머리가 앉아 있는 곳이었다.
내가 그 신념이 가당찮다고 하는 이유는 집단의 우두머리가 직접 던전을 공략하는 것이 아니라, 어린아이들을 던전에 던져 넣고 살아남은 아이들을 재능이 있답시고 선별하여 집중 육성을 하려고 했던 미친놈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런 지옥에서 일리아스과 알리시아는 살아남았고, 알리시아는 검을 배웠다. 제 몸과 비슷한 길이의 검을 들고 강제로 던전에 던져진 알리시아는 또다시 불운하게도 검술의 천재였다.
그렇게 스무 살이 되었을 때, 알리시아보다 뛰어난 검사는 존재하지 않았다.
그리고 성년이 된 알리시아는 저를 키운 집단의 간부들을 모두 베어 죽였다.
그 수법의 잔인함에 경악한 타인들이 알리시아에게 더 온건한 방법은 없었는지 읍소하였으나, 알리시아는 코웃음으로 일관했다.
그야말로 패도와 수라장의 길을 걸었다고 할 수 있겠다.
몇 년이 더 지난 후, 알리시아는 용병왕이라는 타이틀을 거머쥐었다.
그런 여자에게서 검을 배우다 보니 나도 자연스럽게, 뭐랄까.
내 살점을 탐해 달려드는 만티코어의 내장을 손으로 으깨면서 생각했다.
이걸 뭐라더라?
아, 그렇지.
무식. 포악.
자주 듣던 소리였다. 나도, 알리시아도.
알리시아는 내게 살아남는 법을 알려 주었다. 그건 사실 검술에만 국한된 가르침은 아니었다.
왜냐하면 알리시아는 뛰어난 검사였으나 검에 집착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알리시아는 항상 이렇게 말했다.
검을 휘두르는 것은 그것이 가장 효율적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검 외에도 너의 무기가 있음을 잊지 마라.
주먹도, 발도, 머리도, 이빨도 네가 살아남기 위한 무기다.
살아남는 것만이 가장 중요하다.
나는 알리시아의 말에 매우 동의하는 편이다.
푹!
만티코어의 배는 등껍질보다 부드러운 편이다. 근력을 강화한 내 손톱이 뚫고 들어갈 수 있을 정도로.
인간의 얼굴을 한 만티코어가 귀가 찢어지도록 비명을 질렀다. 그사이 검으로 목을 베인 다른 시체 너머로 또다시 다른 몬스터가 달려들었다.
검을 회수해 베기에는 늦다.
어쩔 수 없다.
아직 따뜻한 몸체 속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손을 그대로 들어 달려오는 몬스터의 머리를 내리쳤다.
데엥!
제 동족의 등딱지로 머리를 맞은 만티코어가 나가떨어졌다. 버둥거리는 몸은 다시 발로 제압해 밟아 버렸다.
뭐, 그러니 알리시아가 지금 이 광경을 보면 아주 자랑스러워할 것이라고 생각한다.
나는 그녀가 가르쳐 준 방식대로 살아남고 있는 중이니.
“키에엑!”
괴물의 몸체를 밟은 발밑에 물컹한 감촉이 느껴졌다.
이번엔 얼굴을 짓뭉갠 괴물의 꼬리를 잡고 이쪽을 향해 달려드는 다른 놈의 얼굴에 처박았다.
그래도 쉴 틈이 없었다. 검으로 세 마리를 베는 동안 다섯 마리가 더 달려드니까.
- 앙겔루스의 가호가 당신의 신체를 정화하고 있습니다!
만티코어의 경우 인간의 입으로 살을 탐하며 독이 달린 전갈의 꼬리를 가지고 있다.
내 팔과 다리에는 만티코어가 쏘아 보낸 독침이 이미 수십 개 박혀 있었다. 인간이 아니라 어지간한 몬스터도 죽을 맹독이다.
사실 앙겔루스의 가호가 아니었다면 이미 독이 올라 죽었을 것이다.
다만 앙겔루스의 가호가 가진 정화의 힘은 기본적으로 마기에 대한 것.
신체에 침범하는 독을 정화하는 것에는 한계가 있다.
심지어 지금 내 신체는 아직 연약했다.
달려드는 만티코어의 대가리를 이마로 박았더니 오히려 내 골이 흔들렸다.
약해 빠졌긴!
그래도 다행히 나의 검, 내 파트너도 분발하고 있었다.
타락한 존재를 파훼, 정화하지는 못할지라도 주위의 마기를 막아 주는 역할에는 충실했다. 덕분에 그나마 숨을 쉬는 것에는 문제가 없었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의기소침해하고 있습니다.
저런.
그렇지만 어쩔 수 없잖아. 떼로 달려드는 몬스터, 그것도 인간보다 작은 크기의 몬스터를 상대할 때는 검이라는 것이 꼭 효율적이지만은 않다.
검은 어쨌거나 팔을 뻗어 벤 후 다시 휘둘러야 그 가치를 다하는 무기다.
찌르고 베는 동작은 신체 구조상 회수하기까지의 시간 손실이 발생하고, 그건 어떻게든 빈틈이 된다.
결국 주먹이고, 내 대가리고, 이빨이고, 뭐든지 써먹을 수 있는 건 써먹어야 한다는 것이다.
슬슬 만티코어의 대가리를 박살 낸 주먹이 얼얼하기 시작할 무렵, 시스템 메시지와 함께 근처에 출구가 떠올랐다.
- 던전 클리어 조건 : B급 몬스터 30마리 처치를 충족하였습니다.
- 최대 업적자 : 방랑하는 구도자
나는 떼로 몰려든 만티코어 중 마지막 한 놈의 배를 검으로 찍어 내렸다.
키이익!
끔찍한 소리를 내며 만티코어가 절명했다.
독침도 채 뿜어내지 못한 전갈 꼬리가 꿈틀대며 곧 완전히 힘을 잃었다.
“……후.”
주위를 돌아보았지만 어떤 살아 있는 것의 낌새도 보이지 않았다.
필드가 워낙 넓은 탓인가. 마계의 존재들이 내 기운을 눈치챈 것은 분명한데.
- 던전을 나가시겠습니까?
- Y/N
조건을 충족했는데도 내가 던전을 나갈 낌새가 보이지 않자 출구 메시지가 한 번 더 올라왔다.
“아직은 나갈 생각 없어.”
약간의 틈이 생긴 김에 해 둘 수 있는 일은 해 두자. 나는 소지창을 살펴 응급 처치에 쓸 만한 것들을 꺼냈다.
먼저 작은 칼을 꺼내 독침이 박힌 살갗의 주변 피부색을 확인해 완전히 변색한 살점은 약간 도려냈다.
독이 퍼진 곳에 포션을 썼다간 대참사가 일어나기 때문이다.
물론 의사가 아니라 어디까지 잘라야 할지는 정확히 모르니 감이다. 그래도 어느 정도의 독이라면 앙겔루스의 가호가 해결해 줄 것이다.
음, 이렇게 대충 살면 안 되는데.
의사 선생님, 죄송합니다.
- 클래스 특성으로 포션의 효과가 감소합니다.
게다가 떠오른 메시지대로 포션이 듣는 속도가 상당히 더뎠다. 여러모로 내가 오래 머물 만한 세계는 아니었다.
나는 살이 조금씩 차오르는 것을 확인한 후 바지를 툭툭 털었다.
그래도 원하는 걸 얻을 때까지 이 던전에서 나갈 생각은 없었다.
그걸 위해서 마계의 모든 몬스터를 절멸시켜야 한다고 할지라도.
“……그런데 대체 언제 등장할 셈이지?”
이 정도 날뛰었으면 등장할 때도 됐는데 말이다.
역시 여기, 내가 아는 마계가 아닌 건가? 내가 아는 놈들이라면 이미 나타나고도 남았는데.
아니면, 좀 더 소란을 일으켜야 하나.
그때였다.
지평선 너머의 하늘에 거대한 검은 그림자가 나타났다. 그 그림자는 빠른 속도로 이쪽을 향해 날아오고 있었다.
메시지는 내가 인식하는 것보다 늦게 떠올랐다.
- A급 몬스터, 와이번이 출현하였습니다.
- S급 몬스터, 데스나이트가 출현하였습니다.
드디어 나타나셨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