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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69화 (70/323)

랭킹 1위 용사가 세상을 지키는 방법 69화

벨리알.

마계를 통치하는 4대 공작 중 하나.

그는 언제나 같은 외모를 유지하고 있는데, 백금발을 길게 늘어뜨린 모습은 인간의 것이라기보다는 신화에 나올 법했다.

그야말로 악마 그 자체였다.

“오랜만이로구나, 용사여.”

나는 그 말에 잠시 눈을 감았다 떴다.

이곳은 내가 알고 있던 마계가 맞았고, 타르토스의 나를 아는 존재가 존재한다.

그게 설령 악마라고 할지라도.

그걸 확인받았다는 사실에 우습게도 안심이 되었다.

한참 나를 보던 벨리알이 곧 입꼬리를 끌어당겨 웃었다.

“대체 무슨 일이 있었던 거지? 이렇게 약해지다니. 혹여 신에게 반하는 대죄라도 지은 건가?”

어차피 내 능력치 하락을 눈치챌 거라는 예상은 했기에 놀랍지도 않았다.

악마를 대할 때는 되도록 감정의 동요를 보여서는 안 된다. 감정을 갈무리한 나는 태연하게 대답했다.

“신은 무슨, 웃기고 있네. 그냥 시스템의 농간에 당한 것뿐이야.”

“흠, 시스템이라.”

벨리알이 픽 웃었다.

“인간이란 신을 모욕하는 데 참신하기 이를 데 없는 방법을 사용한다니까. 이런 건 배워야만 하지.”

“마족의 시스템 신봉은 여전하군. 저딴 게 신이라고? 차라리 악마라면 모를까.”

“아름다운 지저귐이로군. 신을 모욕하는 꼴이 악마보다 더하지 않은가?”

벨리알이 킬킬대고 있었다.

나름의 유머인가, 정말 이해하고 싶지 않았다.

“쓸데없는 소리를 늘어놓는 것은 여전하네, 벨리알.”

“아, 지성을 가진 존재와 대화하는 것이 너무 오랜만이라서 말이야. 마계의 시간은 매우 지루하거든.”

마치 절친한 친우를 대하는 듯한 태도였다.

나른한 동작으로 백금발을 쓸어 넘기며 벨리알이 사뭇 고혹적으로 보이는 미소를 지었다.

“그런데 마계에는 대체 무슨 일이지? 목적도 없이 네가 여기에 오지는 않았을 터.”

“그야 용무가 없으면 이런 곳에 올 일도 없겠지.”

“흠, 그러나 저번에 마계에 방문했을 때 너는 분명 용사인 주제에 산 제물로 마계에 바쳐지지 않았던가?”

흥, 나는 코웃음을 쳤다.

“산 제물은 무슨. 난 직접 네 목을 내 손으로 비틀려고 온 거였다고.”

“아주 귀여운 허세를 부리는구나.”

“한 번 더 모가지를 꺾어 줄까?”

“하하하. 하기야 허세라고만은 할 수 없지. 실제로 그렇게 하지 않았는가? 마계 역사상 다시없을 쾌거였단다. 그땐 아주 즐거웠지.”

본인의 죽음을 이야기하면서도 벨리알은 황홀한 시선으로 나를 바라보았다.

그렇다.

나는 이미 과거에 벨리알을 죽인 적이 있었다.

그렇다면 내가 저놈을 죽였음에도 불구하고 왜 여전히 살아 있는가.

이건 이야기가 좀 복잡하다.

내가 처음으로 벨리알을 죽였던 것은 타르토스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였다.

지금은 이름도 기억나지 않는 어떤 미친놈이 산 제물을 바쳐 타르토스로 벨리알을 소환했던 것이다.

그리고 부모 없는 어린아이들을 납치해 제가 불러낸 악마의 소환을 유지하려 했다.

흉흉한 정세 속에서 고아들이 사라지는 일에 누가 신경을 쓸까마는, 그 소문을 우연히 들은 아리아드네와 루카스는 결코 묵과하지 못했다.

그때 우리는 결국 벨리알을 죽이는 것에 성공했고, 그걸로 끝난 줄로만 알았다.

그런데, 알고 보니 당시 내가 죽인 것은 벨리알이 아니었다. 그저 소환이 풀려 인간계에서 역소환되었을 뿐이었다.

즉, 정확히 말하자면 인간은 ‘악’을 죽일 수 없다.

지금도 벨리알이 나타났는데 출현 메시지가 나타나지 않는 것처럼, 벨리알은 시스템상 플레이어가 죽일 수 있는 존재가 아니었던 것이다.

그걸 알게 된 것은 내가 어떤 사건 때문에 잠시 마계에 떨어졌을 때였다.

내 기운을 탐지한 벨리알이 희희낙락하며 나를 찾아왔을 때 그 면상을 보고 얼마나 놀랐던지.

벨리알은 그때, 내 멍한 얼굴에 대고 배를 잡고 웃어 가며 설명했다.

악이란 인간들이 존재하는 이상 사라지지 않는다고, 네가 용사라고 해서 악을 절멸시킬 수 있는 줄 알았냐면서.

개나 소나 죽여도 죽여도 부활하다니 진짜 웃긴 소리였다.

아니, 사실 안 웃겨. 죽이면 좀 뒈져라.

“그렇게 즐거웠다면 다행이군. 내가 여기에 있으니 한 번 더 죽을 기회가 생겼잖아?”

“아아, 그거 좋지.”

벨리알은 내가 대놓고 죽인다는 말을 꺼냈는데도 긴장하는 기색이라고는 눈곱만큼도 없었다. 그는 정말로 아주 즐거운 듯했다.

“릴리스가 알면 나를 찢어 죽이려고 들겠군. 다음번엔 본마 차례라며 얼마나 나를 들들 볶던지.”

저건 단순히 귀 아프게 잔소리를 했다는 게 아니라, 진짜로 기름을 두른 팬에 조각조각 내어 볶았다는 의미일 것이다.

그대로 콱 죽이지 그랬냐, 릴리스. 그러면 너를 조금쯤 좋아할 수 있었을지도 모르는데.

“그렇지만 네가 마계에 온 것이 단순히 내 목을 꺾고 싶어서는 아니겠지? 굳이 여기까지 와서 이렇게 소란을 피운 걸 보니 내게 뭔가 목적이 있을 터야.”

붉은 혀가 입술을 훑었다.

솔직히 악마에게 무언가를 묻는다는 것은 마음에 들지 않지만 지금은 수단 방법을 가릴 때가 아니었다. 뭐든 단서가 필요했다.

나는 한 번 심호흡을 한 후 입을 열었다.

여기부터가 중요했다.

악마에게 내가 어떤 정보를 원하는지 들켜서는 안 된다.

원하는 것이 무엇인지 들키는 순간, 악마는 그걸 망쳐 놓을 테니까.

“저번에 너는 나를 타르토스로 돌려보냈지.”

벨리알은 자신을 죽일 수 있다면 타르토스로 돌려보내 주겠다며, 나랑 계약까지 했었다.

그 계약은 이행되었고, 벨리알은 나를 허공으로 집어 던졌다.

이후 정신을 차려 보니 나는 다시 타르토스에 있었다.

“그랬지.”

벨리알은 내가 긴장한 것도 무색하게 순순히 대답했다.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나는 최대한 평탄함을 가장하며 물었다.

“그렇다면 한 번 더 타르토스로 돌려보내 줄 수 있나?”

악마의 동공이 내 말을 듣고서 가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저번에야 나의 유흥에 어울렸다지만, 용사인 네가 악마인 내게 소원을 빈다? 그것 참 우스운 일이로군.”

“나는 가능한지 아닌지를 물었어.”

금방이라도 끊어질 것처럼 팽팽한 긴장감이 느껴졌다. 나는 검자루를 꽉 쥐었다.

가슴이 세게 뛰고 있었다.

그러나 그런 나와 반대로 벨리알은 턱을 긁으며 건성으로 대답했다.

“그야 너를 다른 세계로 보내는 것 자체야 불가능하지는 않다만.”

“정말로?!”

순간적으로 흥분해서 벨리알의 멱살을 잡을 뻔했다.

하지만 다음으로 이어지는 말은 내 기대에 찬물을 끼얹었다.

“내가 보낸 그 세계가 타르토스일지는 모를 일이야.”

“뭐?”

“사실 나는 네가 정말로 특정한 세계에 돌아갔다는 것이 더 놀랍구나. 솔직히 차원의 틈새에 던진 시점에서 이미 갈가리 찢겨 죽었으리라 생각했거늘.”

악마의 입이 귀 끝까지 찢어질 것처럼 웃고 있었다.

파충류처럼 가늘어진 눈가는 즐거움과 조롱을 담고, 악마에게 매달리는 인간을 깔보는 듯했다.

“설마 내가 정말 용사에게 도움이 되는 일을 했을 거라 믿은 건 아니겠지? 계약 내용을 잘 생각해 보게.”

“……나는 분명히 타르토스로 돌려보내 달라고 했을 텐데.”

“그랬던가? 이런, 내가 워낙 오래 살다 보니 말이야.”

벨리알이 노골적으로 조롱하고 있었다. 물론 나도 악마를 완전히 믿은 것은 아니었기에 그다지 놀랍진 않았다.

그래서 저 녀석의 조롱 따위는 아무렇지도 않았다. 다만 내가 놀란 것은 다른 점이었다.

“하지만 나는…….”

이미 두 번이나 세계를 이동하고도 무사했다, 그렇게 말하려다가 말을 집어삼켰다.

“너는?”

눈앞의 벨리알의 눈이 빛나고 있었기 때문이다. 뱀 같은 초록빛의 눈동자는 이 상황을 재미있어하는 동시에, 무언가 음험한 빛이 감돌고 있었다.

이 정보를 말했다간 귀찮아질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나는 곧바로 말을 돌렸다.

“그 차원의 틈새라는 건 대체 뭐지?”

“흠, 쉽게 인간에게 알려 줄 수 있는 개념이 아니로군. 내게는 이렇게 보이지만…….”

벨리알이 허공을 손으로 휘저었다.

그러자 내게는 그저 아무것도 없는 공간이었던 것이 벨리알의 긴 손톱에는 종이처럼 찢겨져 나갔다. 찢긴 틈새 사이로 어둠이 엿보였다.

“세계와 세계 사이에 존재하는 틈이지. 우리는 소환자의 부름을 받으면 이 틈새 사이로 마계를 빠져나가 다른 세계로 간단다. 악마에게만 허용된 일이지.”

일순간 시야가 아득해질 정도의 앞도 뒤도 분간하지 못할 어둠이었다.

나는 저도 모르게 홀린 듯 그 틈새로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도 묘한 기시감이 들었다. 심연 속에 좀 더 시선을 오래 두려던 순간.

마치 사막을 헤매는 방랑자에게 오아시스의 환상을 보여 준 것처럼, 벨리알이 공간을 닫았다.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벨리알을 바라보자 그의 눈은 즐거움으로 타오르고 있었다.

그는 새로이 발견한 장난감을 온전히 즐기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그 장난감은 바로 나였고.

인간의 절망을 사랑하는 악마는 내가 분노하길 기다리는 듯했다. 하지만 저 녀석을 즐기게 둘 이유는 없었다.

나는 입이 마르는 것을 느끼며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그럼 나는 어떻게 타르토스로 돌아갔던 건데? 네 말대로라면 원래는 불가능한 일이었다는 거잖아.”

“흐음, 그건 나도 의외다만.”

벨리알은 처음으로 불쾌한 표정을 지었다. 나를 보는 시선에 약간의 혐오감이 섞여 들었다.

“운명력이 작용한 게지.”

“운명력이라고?”

성직자들이나 입에 담던 단어가 악마의 입에서 나오니 그 의미가 다르게 들렸다.

“그래, 인간들의 운명은 복잡하게 얽혀 있기에 함부로 건드릴 수 없고, 그렇기에 본래 정해진 대로 굴러가려 하는 강제력을 지닌다. 그것이 운명력이지.”

“그럼 내가…… 그냥, 타르토스로 돌아갈 운명이었기에 돌아갈 수 있었던 거라고?”

“아마도.”

나는 그 대답에 침묵했다.

여기서부터는 더욱더 단어의 선택에 신중해야 했다. 나는 세심하게 단어를 골랐다.

“너는 악마 주제에 운명을 믿냐?”

“적어도 신께서 너를 보살피신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지.”

“……웃기고 있네.”

신이 나를 보살펴?

나도 이제 시스템이 무언가의 의지를 가지고 움직인다는 사실은 알고 있었으나, 그런 것이 신일 리가 없다.

만일 그렇다면 그따위 광경을 내게 보여 줄 리가…….

분노가 치밀어 올라 시야가 까맣게 흐려졌지만 이를 악물고 정신을 차리려 애썼다.

당장에라도 내 목을 꺾어 버릴 수 있는 적을 상대로 정신을 놓을 정도로 멍청하지는 않다.

“……내가 보살핌 따위를 받는다면 이런 곳에 와 있을 리가 있겠어? 이딴 건 운명이 아니야.”

“이런, 이런. 네 말의 곳곳에서 분노와 절망의 냄새가 나는구나. 그건 나의 즐거움이지.”

“이 개자식이…….”

“용사에게 받는 증오는 감미롭고.”

벨리알의 손길이 제 심장 위에 얹혔다. 마치 조롱하듯이 고개를 비스듬히 숙인 악마는 여전히 웃고 있었다.

“인간이 정해진 운명에 항거하는 모습은 언제 보아도 재미있구나. 어차피 모든 것은 정해진 대로 흘러갈 터, 너는 아무것도 바꿀 수 없다.”

“웃기지 마라.”

나는 검을 쥐었다.

“난 그런 거 안 믿어.”

“아아, 불신자란. 그래서 신께서는 네게 시련을 예비하신 모양이로군.”

악마의 미소가 짙어졌다.

저건 불길한 신호다.

“그렇다면 나는 시련이 되는 영광을 기꺼이 누리도록 하지.”

“내가 하려는 일을 방해할 거란 소리를 고상하게도 하네.”

“방해라니. 설마!”

벨리알이 과장된 어조로 항복을 표하듯 내게 두 손을 들어보였다.

“네가 있기에 내가 존재하지. 탄생이 있기에 죽음이 존재하듯 너는 우리의 존재 의미고, 가치의 증명이란다.”

그렇게 말하는 벨리알의 발이 살짝 지면에서 떠올랐다.

그리고 곧, ‘그것’이 시작되었다.

둥둥둥.

땅이 희미하게 울리기 시작했다. 흔들림은 명확했고, 다만 그 흔들림은 규칙적이지 않았다.

- 에이펙스의 광검이 당신에게 경고합니다.

“아, 그 망할 성검. 오랜만에 보니 더 반갑군.”

“마음에도 없는 소리 하고 있네.”

“꽤 여유롭지 않은가. 상황은 이미 알고 있을 텐데?”

그야 알지.

지평선 너머에서 저렇게 마기와 살기가 뒤섞인 고약한 냄새가 전해지고 있는데 깨닫지 못할 리가 있나.

나는 검을 뽑아 들고 지평선 너머를 바라보았다.

“짜증 나네 진짜. 목숨을 걸고 마계까지 왔는데…… 네 말대로라면 결국 정해진 운명은 바꿀 수 없다는 거잖아.”

“그러니 악마와의 거래는 신중히 생각하는 것이 좋지.”

반면에 벨리알은 나를 확실하게 죽음으로 몰아넣을 수 있을 거라고 판단한 모양인지 매우 만족스러워 보였다.

“최근 아주 지루했는데 잘되었어.”

마계의 괴물들이 마왕의 부름을 받은 채 무리를 지어 이쪽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 A급 몬스터, 바실리스크가 출현하였습니다.

- B급 몬스터, 흡혈 박쥐가 출현하였습니다.

- B급 몬스터, 코카트리스가 출현하였습니다.

시스템 메시지는 아까 전부터 미친 듯이 떠오르는 중이었다. 대충 보고 있지만 라인업이 꽤 대단했다.

마계에 사는 몬스터들은 기본적으로 죄다 시스템상 등급이 높았다. 마계 같은 환경에서 살아남은 것들이니 당연한 일일지도 모른다.

꺼멓게 무리를 지어 몰려오는 몬스터들을 보니 역함이 올라올 정도였다.

“자, 용사의 투지를 보여 주게나!”

그 광경을 보며 벨리알은 박수를 치면서 즐거워하고 있었다.

저 새끼는 무슨 경마라도 보는 건가. 신이 나서 죽을 지경인 모양이다.

하기야 저놈 입장에서는 내가 알아서 죽을 자리로 굴러들어 왔으니 얼마나 재미있을까.

나는 검을 꾹 쥔 채 인상을 찌푸리며 벨리알에게 물었다.

아마 누가 보기에도 마지막 전투를 앞둔 장대한 용사처럼 보일 것이다.

“마지막이 될지도 모르니 하나만 묻자. 그 정도 자비는 악마에게도 있겠지?”

“벌써 패배를 인정하는 건가? 그건 재미없는데.”

“네가 아까 전에 말한 이미 정해진 운명이라는 것. 그거 혹시.”

숨을 한 번 고르고, 신중하게 말을 이었다.

“‘운명의 씨앗’이 모이면 바꿀 수도 있는 건가?”

여기가 승부처였다.

그 단어를 들은 벨리알의 얼굴을, 나는 유심히 살폈다.

그리고 보았다.

벨리알의 얼굴에서 순간적으로 모든 감정이 사라지는 것을.

그게 답이었다.

내가 그것을 알아챈 동시에 벨리알도 자신이 실수했음을 깨달았다.

“……너, 이게 목적이었군.”

벨리알이 이를 갈았다.

반대로 원하는 것을 드디어 얻은 나는 코웃음을 쳤다.

“뭘 분해하는 거지? 서로 등쳐 먹으려고 기회를 보던 건 똑같은데.”

벨리알은 시간을 끌며 마계의 몬스터를 모으고 있었고, 나는 그런 벨리알에게 속아 준 척하며 정보를 얻었을 뿐이다.

악마는 결국 악마일 뿐이다. 겉으로는 내게 친근한 척 굴지만 인간을 절망으로 빠트리려는 존재에 불과하다.

그러니 내가 정말로 원하는 정보를 직설적으로 요구해 봤자 저놈이 그에 응할 리가 없었다.

그래서 제발 돌려보내 달라는 식으로 구걸하는 자세를 한번 취해 봤다.

그럼 저 악마 놈이 방법을 주르륵 늘어놓다가 결국, ‘불가능하다.’라고 말하며 내 희망을 걷어찰 심산이라는 건 예상했으니까.

그때 나는 거기서 내가 원하는 정보만 빼먹으면 그만이다.

자신이 속은 것을 알게 된 벨리알은 허공에 떠오른 채 나를 노려보다가 코웃음을 쳤다.

“뭐, 됐어. 어떻게 인간 주제에 그걸 알고 있는지는 모르겠지만, 어찌 됐든 여기서 죽을 테니.”

“아니.”

뭘 모르는 새끼는 사실 저놈이다.

나는 몰려오는 몬스터를 보며 입꼬리를 끌어올렸다.

내가 악마의 장단에 놀아 줄 필요는 없다.

“이번만큼은 신이 내 편을 들어 줬다고 해 두지.”

- 던전 클리어 조건 : B급 몬스터 30마리 처치를 충족하였습니다.

아까 전부터 내 옆에 떠 있던 출구 스팟은 사라진 적이 단 한 번도 없었거든.

나는 아직도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벨리알을 향해 가운뎃손가락을 들어 주었다.

“잘 있어라, 악마.”

출구 스팟에 발이 닿은 순간 흰빛이 나를 감쌌다.

“이게 무슨……!”

벨리알이 다급하게 무언가를 외치며 나를 잡으려 날개를 펼치고 날아왔지만, 시스템의 빛이 나를 삼키는 것이 더 빨랐다.

나는 빛 속에서 일그러진 악마의 얼굴을 바라보며 산뜻하게 웃었다.

적어도 이번 판에서 악마를 엿 먹이는 것만큼은 대성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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